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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우

  • 작성일 2020-11-01
  • 조회수 4,472

[본격! 비평]

지난 몇 년간 비평의 영역은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되어 왔다.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동시에 비평의 형태는 무척 다변화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분석을 하는 행위를 넘어 비평적 기획, 조직 등 새로운 시도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문장웹진》은 웹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공적 지면이라는 점을 활용해 '본격비평'의 장을 열어 보려 한다. 분량의 제한 없이 정액의 원고료로 자유롭게 투고를 받아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



이상우

- 『두 사람이 걸어가』의 원리와 논리1)



홍승택




『두 사람이 걸어가』의 서술 방식에 대하여


옛날에 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스파이 영화2)에서는 스파이가 상대방과의 대화중에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 컵이 귀중한 도청 장치가 되는 장면이 있다. 컵 속 물의 진동은 스파이 측 정보 센터로 이어져 상대방의 정보를 얻게 한다. 상대방 목소리의 진동이 물의 진동으로 바뀌고, 그러나 그것으로 청각적 정보만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초음파처럼 상대방의 생김새를 비롯해서 그 공간의 모습까지, 시각적 정보까지 알 수 있게 한다. 이 장면은 상상력이 동반된 것이지만 시각적 정보든 청각적 정보든 모두 파동이라는 점에서 근거가 충분하다. 이상우는 시각, 청각, 촉각 등 서로 다른 매개를 필요로 하는 감각들을 한 문장 안에서 결합시킨다. 그는 여러 가지 대상을 경유하면서 그렇게 하는데,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를 이끌어오는 연상 작용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항상 그 결합에 성공한다. 그러나 연상이 작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감각들의 결합 자체가 목적인 것도 아니다. 기억에서 피어오르는, 또는 보이는 것에서 가져오는 연상을 통해서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를 이끌어오고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감각들이 결합되는 문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어 그의 목적은, 어떻게 일방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총체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반대 방향으로 말하자면, 총체적이면서도 일방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기억과 풍경의 재생을 위해서, 바로 그 기억과 풍경 속에서 가져온 단어들이 연상을 통해 다른 단어와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서로 다른 감각들이 결합된다. 목적을 먼저 상정하고 문장이 그에 따라 움직인다고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장이 자기의 길을 가다가 어떤 목적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사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움직이는 문장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이상우의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전자가 맞는 것 같다. 전체적인 소설의 서술 방식이 그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중핵으로서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행위들은 그 원인을 둘러싼 반작용으로 드러난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원인은 과거의 원인인데,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원인이 아니라, 과거를 만든, 과거를 만드는 원인이다.
소설 속 인물들(링, 조시, 자피로, 케이와와, 마시오, 아누라다, 엔니, 오사마, 아벨, 등등)은 국제적인 대학이라고 생각되는 현재의 한 공간에서 만나지만 서로 다른 원인을 하나씩 갖고 있다. 일기 형식의 부분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와 발화들은 특별한 이야기나 사건 없이 이어지지만 그 행위와 발화들은 대개 이미 그들이 그곳에 오기 전에 벌어진 일들로 갖게 된 각자의 원인에 따라 드러나는 것 같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눈 속에」, 「부채꼴 모양의 타일이 이렇게」, 「장다름의 집 안에서」, 「자피로와 친구들」, 「조시는 괴로워」, 「두 사람이 걸어가」, 「나가유미 씨에게」3)의 순서로 이어진다(이후에 이어지는 그라티아구스티 차나냐 롬파스의 「두 사람이 걸어가」와 「스카이트리보다 높은」은 본 글이 다루고 있지 않다). 「눈 속에」는 대화와 묘사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채꼴」은 일기로만 이루어져 있고, 「장다름」은 대화와 묘사로 이루어진 부분이 처음에 나온 뒤 일기가 이어지고, 「자피로」, 「조시」는 각각 자피로와 조시, 두 사람의 이력을 설명하는 이야기로만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링의 이력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일기가 이어지고, 「나가유미」는 나가유미 씨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오고 다시 일기가 이어진다. 일기는 대체로 순서대로, 한 학년의 시간대로,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지만 자피로와 조시의 이력을 설명하는 부분들인 「자피로」, 「조시」를 앞뒤로 하는 「장다름」과 「두 사람」에서는 여름방학 기간인 6월, 7월 동안 약간 교차된다. 모든 인물들의 이력이 소설에서 따로 분량을 갖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일기 형식의 부분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따로 작성된 세 이야기들을 통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재구성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부채꼴」은 전체 소설에서 짧은 첫 장 이후의 두 번째 장을 이루는데, 후에 서술될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력이 여기서는 감춰져 있다. 말 그대로 부채꼴 모양의 타일들이 표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는 빗물이 흐르고 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간다. 나는 소설의 이런 서술 방식을 루셀과의 유사성을 통해 파악하고 싶었다.
루셀의 『아프리카의 인상』4) 그리고 『로쿠스 솔루스』5)의 서술 방식은 그 등장인물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와 그것을 묘사하는 부분, 그리고 그뒤에 이어지는 그들이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 이야기로서 들려주는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 이야기들은 등장인물의 존재에 메울 수 없는 틈을 기입하는 외상적 사건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각 등장인물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를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물론 일반적인 소설들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가 그 이유를 궁금하게 하고 소설을 이어지도록 하지만, 그것은 암시의 형식을 취하는 반면, 이상우의 등장인물들은, 루셀의 서술 방식에서 그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움직임으로써 암시의 형식이 아닌 전시의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일상의 전시로서의 일기의 형식을 빌려 그렇게 움직인다. 다른 소설에서는 a라는 등장인물의 행위가 소설 속의 진행에 영향을 끼치거나 다른 행위, 사건들과의 결합을 통해 의미의 획득을 위한다면 루셀과 이상우의 소설에서는 a라는 등장인물의 행위가 그것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의 획득을 위하지 않고 무대 위의, 또는 일상의 한 장면으로 제시된다(『아프리카의 인상』에서는 ‘탁월한 자들’의 무대, 『로쿠스 솔루스』에서는 칸트렐 선생 저택의 각 공간). 그리고 그 이유, 또는 등장인물의 사건, 이력이 뒤에서 해명된다. 그때는 무대 위도 아니고 일기의 형식을 취하지도 않는다.
또한 이 작품의 경우에 일기의 형식은, 작품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흐트러뜨리기 위함으로도 읽어야 한다. 일상의 번역이라고도. 실제로 이 작품은 이상우와 이상우의 친구들-번역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소설 중간 중간 드러나는 테마들은 이상우의 친구들의 소설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테마이다. 핸드폰으로 스승을 만나는 미아는 오한기의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6)에서 발견할 수 있는 테마이고,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아벨의 옷에 묻은 고양이털은 박솔뫼의 『고요함 동물』7)에서 발견할 수 있는 테마이다.

1) 이 글의 제목은 작가의 이름과 같은 ‘이상우’이다. 이 글에서 나는 『두 사람이 걸어가』라는 장편소설의 구성 방식과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장들의 작동 원리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문장이 쓰이는 각기 다른 방식들은 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라기보다도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의 발현이며, 세계를 개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들은 개개인이 자기의 욕망을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특별한 서사가 없는 이 소설에서는 화자와 등장인물들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행위 해야 할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대화와 묘사가 소설을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고민의 증거이면서 또한 그전에 그러한 고민의 직접적인 드러남인 소설 속 문장들을 분석함으로써 이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2) 추후에 찾아본 결과 이 영화는 D. J. 카루소의 〈이글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내용과는 다소 달랐다.
3) 이하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눈 속에」, 「부채꼴」, 「장다름」, 「자피로」, 「조시」, 「두 사람」, 「나가유미」로 약칭한다.
4) 레이몽 루셀, 『로쿠스 솔루스』, 오종은 옮김, 이모션북스, 2014.
5) 레이몽 루셀, 『아프리카의 인상』, 송진석 옮김, 문학동네, 2019.
6) 오한기, 「팽 사부와 거북이 진진」, 《자음과모음》, 2020년 여름호.
7) 박솔뫼, 『고요함 동물』, 창비, 2020.



『두 사람이 걸어가』를 이루는 문장들에 대하여


이상우의 특별한 문장들 중에서 계열화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우선 두 가지에 집중하고 싶다. 1. 주체에게 있어 청각, 시각, 촉각 등의 감각들의 결합을 통해 총체적인 기억의 생산을 위하는 문장. 2. 한 문장 안에서 두 개의 공간을 이동하거나 두 사람의 일을 발화함으로써, 기억의 주체를 분산시키는 문장. 나는 소설 전체의 서술 방식에 대해 썼고 뒤이어 이 문장들을 분석해 보는 것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1에 해당하는 예문을 보자.


링은 침대에 누워 낮에 본 풍경들이 눈 감아도 쏟아지는 물소리에 실려 여관 플라스틱 차양 두들기며 천장에서 벽까지 배수관 타고 터질 듯 터지지 않고서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링에게로 향초 연기와 담배 냄새 섞여 링은 이어폰 끼고서 농구공을 든 학생들을 공원 농구 코트에서 편의점 도시락 먹으며 구경했던 바람 속 빗방울 같은 웃음 다발 농구공이 골대를 비켜 갈 때마다 나부끼는 야자수 이파리의 속삭거림에 수풀 안에 누가 있지는 않은지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어 애무하거나 자위하거나 아무 초점 없이 수풀 사이로 발가벗겨진 채 찢겨버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장소를 확인해 보듯 잠에 들어 꿈 대신 소리가 들려왔지 (163-164쪽)8)

8) 이하 『두 사람이 걸어가』에서 인용한 문장들은 따로 인용표기 없이 쪽수만 병기한다.


나는 이 복잡한 문장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침대에 누운 링에게로 낮에 본 풍경들이, 향초 연기와 담배 냄새와 섞여, 눈을 감아도 쏟아지는 물소리에 실려 여관의 플라스틱 차양을 두들기며 천장에서 배수관을 타고 벽을 터지게 할 듯 터지게 하지 않고서 들림으로써 보였다.
그런데 이어폰을 끼고서 공원의 농구 코트에서 농구공을 든 학생들을 도시락을 먹으며 구경했을 때, 그때의 바람 속 빗방울과 같은 학생들의 웃음 다발을 보는 것은 봄으로써 듣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농구공이 골대를 비켜 가면 스치게 되어 나부끼게 되는 야자수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이 마치 속삭거리는 것 같아서, 눈에 보이는 장소이지만 그 안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기도 하는 수풀 안에 숨어 애무하거나 자위하거나 아무 초점 없이 수풀 사이로 발가벗겨진 채 찢겨버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누가 있지는 않은지 상상하게 했고, 그런 점에서 수풀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장소이듯 다시 그런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 잠에 들었지만 꿈보다도 오히려 그런 장소인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이 유형의 문장들은 기억을 불러일으킨 대상들을 경유해서 기억의 주체인 주어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주어의 현실에서의 움직임과 변화는 간단하고 미세하다. 현실에서는 링이 침대에 누워서 잠에 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런 가운데 링이 그 침대에 누워 있는 여관의 배수관을 타고 물소리가 들리고, 그것은 분명 비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빗방울을 연상시킨다. 이런 과정들이 계속 문장에서 드러난다. 연상은 빗방울, 학생들, 농구공, 수풀, 소리, 다시 잠으로 이어져서 주어의 현실에게로 돌아오지만, 이런 연상들은 작위적이지 않다(또한 이상우의 문장들에서는 연상이 무한하다는 것이 하나의 대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상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대상에서 시작해서 여러 대상을 거쳐 다시 원래의 대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으로 작동한다). 주어의 현실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인접성을 전반적으로, 촘촘히 이용하여 연상이 진행되도록 하고, 그런 인접성의 활용은 기억의 과정에서도 계속되는데 그러면서 기억이 이어지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간의 인접성을 이용한다고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어의 현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같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배수관 속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빗방울을 연상시켜 공원으로 기억을 이동시킬 때, 동시에 배수관이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벽이 여관을 사방으로 둘러싸면서 링이 그 방 안의 침대에 누울 수도 있게 된다. ‘터질 듯 터지지 않고서’는 기억과 현실이 벽을 사이에 두고 어느 한쪽으로 범람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서로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그 긴장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문장은 ‘링은 물소리가 들리는 여관의 침대에 누웠을 때 공원의 농구 코트의 학생들이 있는 풍경이 들리지만 보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 했기 때문이다’ 이런 두 문장을 인과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한 문장 속에서 그런 의미 작용이 가능해지는 원리를 표현으로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현실과 기억은 서로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어쨌든 서로를 자리 잡게 한다.
연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로 다른 감각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들이 등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면 연상은, 그리고 기억은 다시 더 풍부하게, 다차원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소설 전반적으로 계속 사용되는 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눈을 감거나 이어폰을 끼우는 것도 그러한 매개로 사용된다. 그럴 때는 한쪽의 감각을 막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감각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에 해당하는 예문을 보자(인용구 내의 화살표는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음악을 틀러 가는 할머니의 해진 새들슈즈 발소리가 멀어지고, 한 아이가 혼자 턴을 연습하고, 세 아이가 서로의 머리 망을 만져주고 ← 무릎을 꿇다시피 앉아 → 용산사 마당 마루의 빗물을 쓸어내는 승려들을 바라보던 링은 고개 숙인 승려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164쪽)


다른 할머니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할머니들끼리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을 남겨두고 골목을 떠나는 할머니의 발아래로 그림자가 기다랗게 ← 가로등의 길이만큼 → 담배 연기 내뱉으며 링은 빗물 낀 유리창 밖으로 스쿠터 행렬 구경하고 (160쪽)


열쇠 가게 앞에 멈춰 서서 할머니는 한 손을 뒷짐 지곤 담배를 피웠지 햇빛을 문 손가락 너머 가게 안 선풍기 바람이 창 안으로 라디오 켜놓고 잠든 주인 얼굴을 스치면서 ← 빗방울 달라붙은 창가의 → 레코드점 링이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짧게 포옹하고 나서 (156쪽)


이 유형의 문장들에서 ← →표시한 부분들은 그 앞부분과 뒷부분 모두를 수식한다. 그리고 그 부분을 통해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으로의 이동이 한 문장 안에서 가능해진다. 이런 부분들은 구름이 해를 지나가듯이 한 사람이 걸어갔다, 처럼 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에 다른 부분들이 복무하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 세 아이가 승려들을 수식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 → 표시를 전후로 하는 부분이 시간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앞부분은 지금은 없는 할머니와의 기억 부분이고 뒷부분은 링이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 부분이다) 어떤 쪽이 다른 쪽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축약하거나 건너뛰어도 되는 부분이 없어지며, 그럼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서로라는 단어는 이럴 때 자기 자신을 위하면서 자기 자신과 다른 것을 위한다).
나는 x거리를 걸어가면서 예전에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을 다시 먹고 싶었다, 이렇게 쓰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걸어가는 도중에 어떤 것으로 인해 그런 기억을 촉발되었는지를 함께 드러내고 싶은 것인데, 그것도, 나는 x거리를 걸어가면서 보게 된 어떤 색 때문에 예전에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을 다시 먹고 싶었다, 이렇게 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도 여전히 해명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불러일으킨 그 원인을 주체가 파악하는 것이 오해와 폭력을 동반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렇다고 그 기억을 기억의 대상이 들려주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기억을 단어가 파악하고 있게, 단어가 끌어올 수 있게 한다.


빗방울 달라붙은 창가의 레코드점 링이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짧게 포옹하고 나서 (160쪽)


나는 이 예문에서 특별히 다뤄 보고 싶은 부분이 또 있다. ‘링이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이다. ‘링이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여자가 나오고’가 아니다. 그리고 ‘링이 문을 두들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도 아니다. 전자는 여자 앞에 붙는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을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고’ 둘로 분할해 각각 링과 여자의 행위로 바꾸어서 논리적 선후 관계(능동-수동 관계)와 함께 시간적 선후 관계를 정립한 것이고, 후자는 가정법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전부 현실성으로 바꾸어서 두들김의 행위를 정박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상우는 링이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라고 썼다. 나는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문을 두들기면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링이 포옹한 것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읽으면 잃어버리는 것도 부정확하게 얻게 되는 것도 없다. 능동성도 수동성도 가능성 속에서 미결된 채 남아 있고 대신 여자는 이름을 얻는다. 행위에 대한 묘사가 고유명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 →로 연결되는 부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문장들 또한 많다. 즉 어디까지가 앞부분이고 어디까지가 뒷부분인지조차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그럴 때는 읽은 이의 욕망이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구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구분할 수 없음을 통해 하나의 주어로서 있으면서 기억의 주체, 또는 풍경의 주체로서 기능하는 것을 불명확하게 하거나 분산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의 경우 문장의 의미 작용 원리는 문장 안에 감춰져 있어서, 드러난 표현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상우의 이런 (계열화된) 특별한 문장들은 문장의 의미 작용 원리를 표현으로 드러내고, 단지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작용 원리를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다. 총체적이고 상호주체적인 기억의 재생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문장을 적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위해서 문장을 적는다고 생각할 때, 어떤 문장을 적다가 왜 그렇게 적는지, 왜 그렇게 기억하는지가 궁금해지면 그 원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것은 총체적이고 상호주체적인 기억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목적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질문에 부쳐질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우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이 점은 이 글의 가장 뒷부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상우가 이런 문장들을 쓰면서 이룬 것을,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가시화, 라고 부르고도 싶다. 이때 가시화는 어떤 과정을 표면 위로 드러내는 것이면서 또한 이미지로 옮겨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어 적절하다(프리즘이라는 단어를 여기서 거론하고 싶다. 프리즘은 그곳에 도착한 백색광이 원래 어떤 색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드러내며 동시에 그 여러 색의 빛을 계속 진행시킨다).



발 킬머의 이동과 비라는 장소에 대하여


서울에 오는 눈이 춘천에도 오고 춘천에 오는 눈 속엔 누가 있나 춘천에 오는 눈 속엔 춘천이 있고 서울에 오는 눈 속엔 서울이 있네 서울에 오는 눈이 진주에도 오고 부산에도 오고 수원에도 오네 오늘 하루 종일 내리는 눈발 속에 하루가 내리고 오늘 오는 눈은 어제 오던 눈 이 눈 속에 눈 속에 내가 있네 눈은 내리고 눈발 속에 내가 사라지네

- 이승훈 「서울에 오는 눈」 부분9)

9) 이승훈, 『인생』, 민음사, 2002.


이승훈의 이 시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서울이 어디에 있는가, 이고, 그에 대한 이 시의 대답은 서울은 서울에 오는 눈 속에, 라고 쓰일 때 그 써진 문장에 있는 서울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서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통해서는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서울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서울 밖에서 바라보아도 서울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은 서울의 땅도 아니고 서울의 사람들도 아니며 그 모든 것을 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0) 그리고 그다음, 상징적인 장소들을 넘나들며 넓게 분포하는 성질을 가진 눈이라는 대상을 통해(오히려 눈이라는 장소를 통해), 서울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서울에 오는 눈이 다른 장소에도 내린다고 함으로써 다른 장소로도 서울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한다.

10) 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b, 2011, 154쪽 참조.


발 킬머는 거실에 앉아 비 오는 산타페 거리를 걸었고 비 오는 힐사이드 공원을 어슬렁거렸고 비 오는 공업단지의 굴뚝을 바라보았다. (110쪽)


「자피로」에는 발 킬머가 비라는 매개를 통해 온갖 공간을 한 번에 이동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승훈의 시에서 눈이라는 장소를 통해 서울이 이동하는 그 방식이, 발 킬머가 비를 통해 이동하는 방식과 정확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발 킬머의 이야기에 있어서는 비라는 매개가 갖고 있는, 그 투명함으로 인해 그것을 둘러싼 시각적 정보를 함유한다는 점, 내리는 소리로 인해 청각적 정보가 그 안에 녹아든다는 점을 통해서, 그리고 그렇게 결합된 감각의 동시성(무시간성)을 통해서 이동한다고 보는 것이 우선 맞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이상우의 문장을 분석하면서 어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것들이 어떤 주어에게 속하는지 확정할 수 없음을 통해서 공간의 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설의 다른 부분들에서는 직접적으로 명사의 나열이 그러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발 킬머의 이동과 서울의 이동에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발 킬머의 이동 부분에서는 그것이 표현상으로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의 이동의 매개가 된 눈처럼, 발 킬머의 이동의 매개가 된 비 역시 또 다른 장소이다. 비는 개별의 장소 속에 내리는 무엇이라기보다도, 이제 그 자체로 장소와 다른 장소 사이에 놓인다는 면에서, 하나의 또 다른 장소이다. 기차가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를 이동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소이듯, 비 역시 하나의 장소이다. 어떤 장소냐면 비라는 이름이 놓이는 장소이다. 『warp』의 가장 뒷면을 맡고 있는 유명한 문장 “구름 그곳은 비문이다”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조사의 생략을 통한 명사들의 나열에서 우리는 단순히 그 명사들이 문장에서 그 앞 단어와 뒤 단어 모두와 연관됨으로써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게 함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명사들의 고유명사화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11) 단어가 이름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관점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명사(또는 어구)가 그 앞과 뒤를 연결해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명사(또는 어구)가 가진 가능성이 그 앞과 뒤 부분을 통해서 발견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어떤 주어져 있는 것의 이름이 아니라, 주어져 있는 것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것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 알려진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해 기울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본질은 묘사적인 것이 아니다. 이름은 예단적이다.”12) (「부채꼴」의 첫 부분 “베개 밖 흐르는 머리칼 침대 아래로 검은색 오른 어깨선 수두 자국”은 묘사로서 기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려 보려고 할수록 오히려 단어들이 남는다) 장다름은 산봉우리를 뜻하는 공간의 한 종류이지만 장다름의 집 안에서, 라는 제목은 장다름을 이름처럼 기능하게 하고 그런 한에서 야외에서 실내라는 다른 성격으로 이름이 기울어지게 한다. 옛날에 보았던 스파이 영화에서 한 사람의 얼굴의 모습과 물소리가 각각 시각적 정보, 청각적 정보이지만 파동이라는 점에서 같았던 것처럼, 이름(이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

11) 이성민, 『사랑과 연합』, 도서출판b, 2011, 234쪽 참조.
12) 실뱅 라자뤼스, 『이름의 인류학』,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2, 19쪽.


발 킬머가 지금 그곳에도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는지, 발 킬머 씨 옆에는 창문이 있습니까? 나에겐 당신도 창문 옆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라며 [……] 묘사해 줬고 자피로 또한 침대만 있고 창문도 아무것도 없는 자기 방을 설명해 줬지만 각자의 어둠 속에서 자라난 서로를 아직 믿지 않았다. (109쪽)


그러므로 각자의 어둠은, 그 장소가 그 장소가 아닐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서울이 서울 밖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발 킬머가 바라본 자피로는 창문 있는 방에 있다. 둘 다 창문 있는 방에 있다. 자피로가 보는 발 킬머는 창문 없는 방에 있다. 둘 다 창문 없는 방에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공간의 겹침이 아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창문 있는 방에 있고 다른 쪽은 창문 없는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문 있는 방의 창문 없음, 창문 없는 방의 창문 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겹침이 있는 것이다. 그 겹침은 공간의 겹침이 아니라, ‘그 공간이 그 공간이 아님’들의 겹침이다.
그러므로 「부채꼴」 가장 앞부분에서 창문 없는 방에 두 사람이 있고 그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올 때,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 보고 싶게 한다(208쪽에 등장하는 “두 개의 병원. 두 개의 병실. 두 개의 시간에 누워 있던 두 할머니 생각났다.”와 같은 묘사가 「부채꼴」의 그 부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이 경우에는 두 개의 병실, 두 개의 시간에 누워 있던 두 할머니가 모두 창문 없는 방에 있었다. 이때 두 할머니는 서로 다른 할머니이기보다는 다른 시간 속의 링의 할머니일 것이다. 나는 그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창문 없음의 스스로와의 다름’을 통해서, 즉 ‘창문 없음의 그렇지 않음’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햇빛이 들어옴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그리고 발 킬머의 이동에서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겹쳐진다. 사실 한 문장 안에서 공간을 이동하는 것은, 한 시점에서 공간을 갑자기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시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한 문장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겹쳐 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발 킬머에게 있어서의 시간의 이동은 그것이 공간의 경우에서처럼 표현으로서만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시가 “오늘 하루 종일 내리는 눈발 속에 하루가 내리고 오늘 오는 눈은 어제 오던 눈”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이 부분도 역시 단어가 이름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서 읽고 싶다.
“이름은 시간의 범주를 폐기시킨다. 이름은 시간을 포섭하지 않는다. 이름은 단일성으로의 이행을 통해, 그리고 이름에서 이름의 장소로 나아가는 운동에 다양성을 귀속시킴으로써, 시간을 폐기시킨다.”13)

13) 실뱅 라자뤼스, 『이름의 인류학』,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02, 221쪽.



도표를 그려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나가유미 씨에게서 온 편지의 한 부분인 밑의 문장은 소설 전반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다루어 보고 싶은 것이다.


하나사키 공원에서 와다 묘원까지 걸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묘비들이 세워진 바다를 건너갈 수 있습니다. (23쪽)


여기서 특별한 점은 묘비들이 세워진 바다, 라는 부분이다. 이 점을 유념하면서, 또한 아래 〈그림1〉을 참고하면서 위의 문장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지점(공원)에서 B 지점(묘원)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 옆으로 무한한 공간을 볼 수 있는데, 걸어가는 동안 B 지점을 이루는 것들과 내가 만드는 각도가 달라지고 무한한 공간을 그 달라지는 각도의 시선들이 걸쳐서 지나감으로써 무한한 공간에서 B 지점을 이루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보다도 B 지점을 이루는 것들이 하나의 영역을 그 안에서 이루고 있는 무한한 공간을 건너갈 수 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어떤 곳으로 이동을 시작할 때, 그곳에 도착해서 볼 수 있는 것을 이미 보면서 그곳으로 이동하고 있음은 죽음과의 연관을 떠올리게 한다.
관점을 바꿔 보면 ‘도착하기 전에 본 것, 그것들로 이루어지는 곳에 도착하기’가 되기도 한다. 위 문장을 이 관점으로 바꿔 보면, “하나사키 공원에서 와다 묘원까지 걸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묘원에 도착하면 그전까지 건너왔던 바다에 세워져 있던 묘비들이 있을 뿐입니다.”가 된다.


사람들은 이동 시간을 세 시간 단축하기 위해 통째로 없어져버린 마을에 대해 이야기했다. (18쪽)


이 예문에서 사람들은 이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마을을 없애지만, 나가유미 씨가 보낸 문장의 관점에서라면, 이동은 곧 도착이다. 그러므로 어딘가로 도착하기 위해 이동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우는 역으로 이동 시간은 상관없으니 없어져 버렸던 마을도 다시 그 자리로 돌려놓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 정말 어딘가로 도착하는 일은 도착의 도착으로서, 도착도 중지되는 것으로서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상우의 『두 사람이 걸어가』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단편 「나가유미」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미지는 단어를 통해서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단어와 문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그림2〉는 〈그림1〉을 같은 입장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동이 곧 도착이라는 것은, 같은 시점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워프의 의미), 또한 ‘그곳이 그곳이 아님’이 이름이 된 단어의 수준에서 늘 유지됨으로써, 어디로 이동하든 ‘그곳이 그곳이 아닌’ 곳이므로, 그런 한에서 어디든 같기 때문에 이동이 곧 도착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것이 아님’이 모든 단어 수준에서 늘 유지되는 가운데, A 단어를 쓰면 B 자리에 어떤 단어가 올 수 있는지가 문법적으로 한정된다. 그리고 B 단어가 문장의 진행을 따라 정해졌을 때 A 단어의 의미는 B 단어의 의미에 따라 소급적으로 갱신된다. 그리고 문장이 진행되면서 각각의 단어에 대해 이와 같은 과정이 계속되다가 구두점이 찍히는 것으로 완결된다. 그 진행의 연쇄를 〈그림3〉처럼 표현해 볼 수 있다.14)

14) 자크 라캉, 『에크리』,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 새물결, 2019, 948쪽 참조.




『두 사람이 걸어가』와 두 사람이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이상우의 문장에 또 다른 종류의 결합이 있다면 그것은 묘사와 대화의 결합이다.


빗장 걸린 옷장 열리지 않은 파티 갈 거야 이따? 아니 [……] 혹시 파티에 가고 싶어? 아까는 그랬는데 지금은 싫어 왜? 벌써 갔다 온 것 같아 (62쪽)


여기서는 후치수식을 이용해서 묘사 부분과 대화 부분을 은밀하게 연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후치수식이 사용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를 일부러 명확히 할 수 없게 하여 두 다른 부분을 연결하고 있다. ‘열리지 않은’은 이미 빗장 걸린 옷장을 뒤에서 수직하면서 또한 파티를 앞에서 수식하고 있다. 열리지 않은 파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의 결합이 없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읽을 수 없게 하는 벌써 갔다 온 것 같아, 라는 말이 뒤에 이어진다. 파티, 라는 단어가 예단적 차원을 얻게 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공원 갈까 또? 매일 가잖아 갈 만한 데가 거기밖에 없네 지겨워 없어지지도 않아 거기는 어두워 보이지 않는 복도로부터 침대 경비원 유니폼 초충화 족자 (67쪽)


여기서는 문어체와 구어체에서 사용될 때 문법적 용도는 다르지만 표현상으로는 같은 단어, 어두워, 를 써서 대화 부분과 묘사 부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는데 이럴 때 대화 부분은 끝마쳐지지 않고 계속되는 묘사 속에서 유예되며 부유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이런 부유 상태가, 이어지는 단어들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대화와 함께 생각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대화와 묘사의 결합을 이상우의 문장이 대타자를 타자로서 여기려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읽고 싶다. 언표의 차원과 언표 행위의 차원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나는 거짓말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언표의 차원의 주체라고 한다면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언표 행위의 차원의 주체라고 한다). 고유명사화를 통해서라면 문장의 모든 단어들이 한 평면 위에 동등하게 놓일 수 있다는 것을 통해, 묘사를 하던 중에 등장한 단어와 대화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럴 때는 ‘-라고 말했고’와 같은 표현이 사용되지 않고 누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따옴표의 사용도 없다. 이런 기획은 그러나 대타자를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아니, 없는 셈 칠 수는 있지만 없게 하지 않는다. 여전히 문장으로 적히고(비문이라고 하더라도, 한 문장 안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입장의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적힌 글은 대타자의 차원에서 다시 반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문장을 다시, 다른 차원으로 읽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장의 구성과 관련된 이상우의 여러 가지 시도를 그 자체로 타자와 대타자가 이루는 세계의 체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그런 세계의 체계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어떤 암호와 같은 문장이라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도, 한 사람은 한 문장을 말하면서, 바로 그 문장을 말한다는 것 또한 말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이상우가 다르게 말고 이렇게 쓰고 싶었던 작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걸어가』는 이상우의 친구들이 함께, 다수가 쓴 작품이기도 하다. 번역자의 결과물이 같은 작품 안에 들어 있다. 『warp』도 작품이 여러 사람에 의해 쓰이는 기획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이상우가 같은 기획을 문장의 차원에서 다른 여러 차원으로까지 가져갔다고 보고 싶다).
두 사람이 걸어간다는 것은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각각 걸어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게 타자인 두 명이 그저 서로에게 타자로서 있다는 것보다는, 상호주체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상호주체성은 하나의 개별 주체가 전부 관할할 수 없는 것처럼, 각각의 두 타자가 나누어서 관할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주체성의 다른 이름이 대타자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되어 동시에 편지를” 쓸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이 한 번에 두 문장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은 불가능”한 이유도, 편지는 글로 적히는 것으로서, 한 사람이 한 문장 안에서 두 사람의 말을 함께 받아써도, 다시 대타자의 층위에서 반향하기 때문이고, 그럴 때 한 사람은 생각을, 비문이든 아니든 한 문장의 단위로 생각한다는 한계를 갖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명사의 고유명사화, 즉 단어들이 이름으로 바뀌는 것과 대타자를 타자로서 취급하려는 도착적 기획(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도착적 기획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은 이상우의 문장들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위해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화와 묘사의 결합을 통해 단어들이 묘사가 아닌 예단의 차원을 얻어 이름으로 바뀌는 것은 위의 예문을 통해 확인했지만, 감각들의 결합을 통해서, 그리고 공통된 감각을 경유한 공간의 이동을 통해서 단어가 이름으로 바뀌는 것이 같은 도착적 기획의 산물인지는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상우의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인 폭력과 죽음 그리고 윤리학이 그 문제와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홍승택
작가소개 / 홍승택

예술가.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났고 한국 서울에서 살고 있다.
김용현 개인전 〈버려진 그 자전거는 어떻게 자유를 획득하였는가_대부도에서 만들어진 내리막길〉을 위해 「짧은 자유 낙하」를 썼다.


《문장웹진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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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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