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②

  • 작성일 2023-08-01
  • 조회수 1,005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②

윤재민


   이 책에서 사람들은 ‘땅속에서’ 일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굴을 뚫고, 흙을 파내며,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중략) 어떤 믿음이 그를 인도하고, 또 위로한다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기나긴 어둠을 갖고자 하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 안 되는 것들, 숨겨진 것들,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아침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자기 자신의 아침놀을 가지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1)


   1. 1960s: 삶


   1964년 겨울밤. 서울 인근의 모 선술집에서 술 마시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김’. 그는 우연히 동갑내기 대학원생 ‘안’과 말을 섞다 합석하여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대학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시골 출신 구청 공무원인 김은 자신을 부잣집 장남이라 소개하는 안에게 위화감을 느낀다.

   동갑내기 남성이라는 점 외에 아무런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잦아들고 급속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김은 안에게 ‘파리를 사랑하냐’는 시덥잖은 질문을 던져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도한다. 안은 갑작스러운 김의 스몰토크를 미적지근한 태도로 얼버무린 후, 곧장 김에게 질문을 되돌려 물어본다. 이에 대해 김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이상한 말을 부연하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것이 있으세요?”2)

 

   놀랍게도 안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에 반응한다. 대화는 다시 활기를 띠며 이어진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지극히 추상적인 질문과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을 주고받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의 화두와 사적인 얘기를 깊이 소통하는 듯하지만, 그 대화의 내용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안의 추상적인 질문에 김은 사관학교 입시 실패 이후 생긴 자신의 변태적인 취미생활을 고백하는 식이다. 안은 김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반문한다. 그러고는 각자가 사랑하는 ‘꿈틀거림’에 대한 대화가 더 이어지다 아무런 접점 없이 흐지부지된다. ‘데모’를 염두에 둔 듯한 질문에 당당하게 ‘여자의 아랫배’라 답하는 이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화신백화점 가로등, 적십자병원 가로수, 을지로 3가 술집 작부, 종로 2가 모 빌딩 화장실에 낸 손톱자국 등 무의미한 내용의 나열로 치닫는다. 각자가 간직한 지극히 사적이고 파편적인 경험을 그저 나열할 뿐인, 그 어떤 의미의 충돌도 없이 매끄럽게 서로를 비껴가는 ‘소통하지 않는 소통 상태’로 진입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 상태에 들어서야 대화의 활기가 절정에 이른다. 많은 논자들이 앞서 지적하듯이, 언어를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에는 필연적으로 ‘오해될 가능성’이라는 사고위험이 내재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소통은 일반적인 오해의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듯한데, 상대방이 하는 말의 의미(내실)와 저의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충돌하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소통은 사적 영역을 점유한 한 사람 이상의 개인이 공통적이라 간주되는 언어적 상징계에 진입, 즉 예속(subject)을 전제한다. 소통의 영역으로 들어선 개인은 사적 영역에서 상징계의 공적 영역으로의 진입, 다시 말해 사회화에 접어든다. 이로써, 소통의 성격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언어 모드는 상상계적 사적 욕망을 일정부분 거세(castration)하여 상대방을 향하게 된다.

   그에 반해 김과 안 두 사람의 ‘활발한’ 소통에는 상대를 위한 ‘거세’의 의지가 희박하다. 그저 각자의 상상계적 인식과 욕망을 내뱉을 뿐인 이런 식의 대화가 제대로 된 소통일 리 없다. 두 사람의 대화는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 신경증자(분열증자)라고 진단한 이들 사이의 그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정신분석의 치료는 정신분석가가 마련한 일종의 상징계적 언어게임에 신경증자가 전이됨으로써 시작된다. 이후 신경증자는 분석가와의 소통, 즉 유의미한 상징계적 ‘거세’ 과정을 경유하여 내적 욕망을 ‘재사회화(주체화)’한다. 그러나 어떤 신경증 환자는 전이를 거부한 채, 분석가가 마련한 상징계적 언어게임과 신경증적 자신의 상상계를 임의대로 오간다. 그것은 상상계적 나르시시즘을 ‘억압’하여 주체를 상징계의 유의미한 좌표에 안착시키는 주체화 과정과 신경증의 부조리한 공존(분열증)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라캉은 억압과 거세의 배제(foreclosure)라는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주체는 상징계적 억압을 통해 상상계적 나르시시즘의 범람을 거세하여, 그 무의식적 외상을 간직한 채 사회화된다. 반면에 상상계의 봉합에 실패한 채로 상징계(사회화)로 이행한 배제 상태의 주체는 사회적 소통이나 유의미한 축적이 극히 난망한 존재가 된다.3)


   지극히 사적인 욕망과 생각의 편린들을 주고받듯 내뱉음으로써 도리어 매끈한 소통 상태에 다다른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배제 상태의 주체들이 벌이는 분열증적 언어게임처럼 읽히기도 한다. 두 사람이 실제로 분열증자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별다른 목적 없이 들른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언어게임 모드는 형식적으로는 사회적 격식을 갖췄지만, 내용의 차원에서는 철저하게 각자의 상상계적 나르시시즘을 표출한다. 물론, 이는 하등 문제 될 일이 없는 사안이다. 일상 속 비일상의 공간인 술자리에서 만난 하릴없는 두 청년 간의 합의된 상태이므로.

   그러나 삼십 대 중반의 ‘아저씨’가 합석을 제안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배제 상태의 나르시시즘을 향유하던 두 사람과 달리, 사내는 그들에게 그날 오후 급성 뇌막염으로 사망한 아내의 시신을 병원에 팔아넘겼다는 처절한 사연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는 오늘 밤 ‘아내 판 돈’을 다 쓰고자 하는 데 두 사람이 동참해 줬으면 한다고 부탁한다.

   김과 안은 아저씨의 비애 섞인 고백과 제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지만, 어쩐 일인지 순순히 동행한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서울 밤거리 산책을 시작한다. 아저씨는 양품점을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김과 안에게 비싼 선물을 안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지만, 딱히 마다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서 돈이 전부 소진되기만 기다린다.

   아저씨는 다르다. 그는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져 두 사람과 함께 아내가 잠들어 있는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향하고자 한다. 안은 아저씨를 단호하게 제지한다. 아저씨의 ‘진짜 인생’과 연루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이렇듯 안과 김은 산책에 동행하지만 여기에 연루되는 걸 거부하는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다. 세 사람은 통금시간이 임박하여 통제가 시작됐을 서울 밤거리를 그저 부유하다 각자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새벽, 자고 있던 김의 방문을 두드린 안이 아저씨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심각한 사태에 연루되는 걸 원치 않은 두 사람은 도망치듯 여관방을 떠나 헤어진다.

  하룻밤 술친구로 만난 두 사람은 생의 끝자락에서 간절하게 구원을 원하는 이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도리(신고나 애도)조차 회피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술자리에서의 배제적 소통의 기조로 아저씨를 대했을 뿐이다. 이러한 두 사람에겐 ‘뜨거운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저씨의 태도야말로, 안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라는 건지’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 묘사된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행태와 태도로 삶을 살고 있다. 짧게 언급되는 김과 안 두 사람의 전사(前史)부터 그렇다. 김은 한때 장교를 꿈꿨으나, 구청 병사계 직원으로 정착했다. 데모라는 ‘꿈틀거림’을 사랑하는 안은 정작 자기 눈앞에서 구원을 바라며 ‘꿈틀거리는’ 아저씨를 매몰차게 외면한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코 ‘문제’를 일으키거나 연루되지 않고자 한다. 아저씨의 이상행동에 부리나케 달려온 경찰관과 소방관에 쩔쩔매며 변명하고, 통행금지 시간이 되자 자연스럽게 여관으로 들어가 아침을 맞아 일상으로 돌아가려 쫓기듯 흩어진다.    

   이렇듯 시종일관 두 사람의 어중간한 행보와 태도를 잠정적으로 생(生)의 딜레탕티즘(dilettantism)이라 부르고 싶다. 어중간한 삶, 질서와 치안에 순응하는 태도는 평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품은 인생의 목표나 욕망(각각 장교와 데모)에 전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채, 이를 간간이 (진짜 정신질환도 아닌) 분열증적으로 소소하게 해소하며 사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평화로운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애호하는 딜레당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아저씨와 같은, ‘평시’를 깨뜨리는 사고가 발생할 때는 얘기가 다르다. 어떠한 문제에도 연루되고 싶지 않은 애매한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딜레당티즘적인 삶의 태도는, 여관방에 남겨진 아저씨의 시신처럼 때때로 사고나 위기를 ‘일상’과 분리하는 외면이나 부인의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 


   2. 2020s: 삶


   발터 벤야민은 1940년에 쓴 어느 글에서, ‘비어있는 동질적 시간(homogeneous, empty time)’을 향한 끊임없는 운동을 현대의 주요한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 말했다. 전근대 문명과 종교 시대에 출몰하던 비균질적이고 마술적인 사건들의 동시 발생(co-occurence)은 단일한 체제와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밝히는 이성과 기술의 빛에 의해 현재성을 상실하여 시대의 저편에 파묻힌다. 

   니체는 벤야민 이전에 이러한 근대의 합리적이고 매끈한 단일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근대사회에 나타난 세계의 합리적 균일화, 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세계의 탈마술화 경향과 함께 나타난 근대적 인간형의 미덕을 구성하는 도덕과 논리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여타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여 마치 아주 예전부터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간주됐던 당대의 도덕과 지식 대신에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몸과 욕구로의 회귀를 역설했다(“논리적 충동은 결코 자기 자신을 향하지 못했다”, 『비극의 탄생』). 이는 동시대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을 ‘더 광범위한 물질적 역사’의 시야로 조망한 결과4)로서, 동시대 전체와 도전하는 인간 즉 초인을 향한 급진적인 여정의 찬미로 귀결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동시대의 도덕과 지식에 화합하고 순응하는 인간 정신의 활동 일체에 저항하는 적대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중재하고 혼합시켜 놓으려는 모든 것과 적대적이다. 우리는 지금 통용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신앙과 기독교 비슷한 짓거리들에 적대적이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낭만주의와 또 조국을 들먹이며 조국을 더럽히는 조국애에 더해, 이런 말들을 주저 없이 쏟아대는 어중이떠중이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믿지도 않는 곳에서 기도라 하고 설득을 해대는 예술가들의 향락주의와 예술가들의 결여된 양식에 대해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예술가이기 때문이다.5)

 

   이처럼 철저하게 합리적 근대와 이를 구성하는 모든 역사적 ‘기원’과 도덕률에 대항한 니체에게 있어서, 이에 조금이라도 호응하는 인간의 태도, 어중이떠중이 같은 행태는 일단 생의 딜레당티즘으로 보일 수 있다.

   2020년대 초 서울 모처, 양산형 딜도로 태어났지만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자신을 구매한 ‘주인’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권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니체가 있다. 실리콘 육신에 불과한 존재지만 적어도 정신만큼은 실로 니체인 이 사물은 “사물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보는 심연의 눈”6)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한낱 소비재에 불과한 그것이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을 구매한 주인들의 일상이 전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들은 그를 집에 들이고 이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술대학교에서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해 동거 중인 두 여성은 삶의 대부분의 측면에 있어서 과정 중에 있다. 각각 작곡과 회화를 전공했지만 자신들의 작업물을 아직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 가운데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가운데 짐작할 만한 여러 이유로 레즈비언 정체성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수고까지 해야 한다. 딜도는 이러한 여자들의 일상을 ‘심연’이라 일컬으며 하릴없이 이를 고해상도로 응시하는 나날을 보낸다.

   딜도의 눈에 비치는 두 여성의 일상은 ‘위선’과 ‘모순’의 향연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점점 질식해 가는 가운데 멀끔한 중산층 아파트를 욕망하고, 레즈비언이면서 포르노 취향은 이를 거부한다. 니체의 『아침놀』을 비롯하여 플라톤, 쇼펜하우어 등 ‘위대한’ 철학을 섭렵한 작곡 전공생 먹점은 <팔도아리랑>에 전자음악을 매쉬업한 음악을 만들며, 용이한 섹스를 위해서는 적당한 코미디 영화를 트는 데도 주저가 없다. 

   실리콘 재질의 바이브레이터에 불과한 사물이 인간의 삶을 재단하는 이런 행태는 분명 희극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 공산품 딜도치고는 썩 니체 같은 구석이 있다(물론 딜도는 니체의 가장 열등한 제자에 속할 터이다). 잠언의 형태로 발설되는 니체의 철학은 시종일관 기독교에 기반한 근대 이후 삶의 균일한 지평에 일조하는 동시대의 도덕과 지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니체는 이를 발판으로 인간의 궁극적인 ‘힘’을 끌어내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실리콘 재질의 바이브레이터로 태어났다고 해서 부여된 사용 가치에만 복무하며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기능과 효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의 손에 맡겨진 운 나쁜 상황을 지렛대 삼아 더 큰 ‘힘’을 추구하지 말란 법이 없다. 

   당연히도 그녀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실리콘 재질의 무기물에 불과한 사물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두 사람의 옥탑방)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재창하는 ‘예술가’를 꿈꾸고 있다는 발상을 하긴 어렵다. 「저녁놀」은 그 어려운 걸 굳이 해내는 소설인데,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의 레즈비언·퀴어의 일상적 삶의 조건과 위태로움을 탁월한 구도로 제시한다. 

   딜도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조건과 상황을 초월하여 스스로가 ‘예술(가)’이 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레즈비언 커플의 아직 채 정돈되지 않은 일상 일체를 원료로 삼는다. 이 사물은 이를 두 사람의 심연이라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딜도 자신의 뒤틀린 자기애가 투사된, 딜도 자신의 심연이다. 그것은 무엇을 보든 간에 자기 자신만을 본다. 세계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을 인지하고, 이에 대항하는 유일자-개인의 ‘힘이 대상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적대에 기반을 둔 원한(ressentment)과 자기애의 악순환으로 고착된 것이다. “내 삶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나를 주인공으로 노래를 만들고 영화를 찍으면 좋겠다. 나는 더 소비되고 싶고 더 관심 받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내 재능과 인기에 고개를 숙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는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오랜 세월, 난 억눌려 살았다. 내가 받아야 할 응당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나는 두 여자의 먹고사는 일에 밀려 숨죽여 살아야 했다.”7)

   타인의 일상을 자신의 심연으로 전도하여 나르시시즘을 충족하는 딜도의 원한은 일상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지라 배제(실제로 ‘한다고’ 가정되지만 무시되는 영역)되어도 무방할 것들을 마치 무언가 중요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가시화한다. 그들의 포르노 취미나 판소리 매쉬업을 틀어 놓고 하는 충동적인 섹스 같은 것들이 그렇다(사실 그들이 딜도 같은 성인용품을 구매했다는 사실도). 성생활 취향 같은 데서 발견되는 일상생활의 지엽적인 모순은 적어도 평상시에는 타인의 개인성이나 주체성을 의미화하는 사회적·상징적 시선에서 배제되어야 유의미한 영역이다. 김과 안이 술집에서 하는 소통의 방식처럼 말이다. 실제로 일상에서의 정신적인 분열증을 동반하는 게 아니라면, 배제라는 기제는 주체와 개인을 상징계의 압력에 대한 숨 쉴 구멍이 된다. 누구나 자신만의 ‘배제된 영역’이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열패감을 품고 살아가는 김이나 모자랄 것 없는 환경에서 불만을 품고 지내는 안 같은 사람에게 ‘한밤의 포장마차’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정신분석에서 배제는 분열증을 동반하는 까다로운 병리지만, 사실 사회적으로 배제가 원천 봉쇄된 주체나 개인의 삶은 끔찍하다. 그럼에도 먹점과 눈점이 딜도를 내버려두는 이유는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열증자를 제외하고 그런 끔찍한 사물이 사적인 영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딜도는 그런 존재다. 두 사람은 충동적으로 딜도를 구입한 순간의 선택으로 적나라하게 자신들의 가장 내밀한 일상의 영역을 속속들이 노출당하고 있다. 그들의 존엄과 사회적 삶을 위해 유의미하게 배제되어야 할 기회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 니체 같은 딜도는 레즈비언인 두 사람의 고단함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성인들에게 마련된 생애 주기에서의 제도적 기틀에서 배제된 상황을 멋대로 재단하여 자기애의 연료로 삼고 있다. 배제되어야 할 것이 배제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아야 할 게 배제되어 있다는 것인데, 자기 처지에 대한 원한에 빠진 딜도에겐 이러한 배제의 전도는 중요한 일이 아닐 터이다. 

   따라서 진짜 운이 나쁜 건 딜도가 아니다. 충동적으로 이 상서롭지 않은 사물을 집에 들인 먹점과 눈점 두 사람이다. 안타까운 건 그녀들의 불운이 한동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티머시 모턴이 한 재치 있는 잠언을 빌려 이에 대해 말하자면,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모턴은 사물은 이를 대하는 주체의 인식이나 의지 그러니까 대상화나 표상의 인과적인 여부와는 무관하게 ‘실재적(real)’이라 생각한다. 이는 사물이 주체가 인식하는 인과성의 정도에서 항상 ‘물러난’ 영역을 포함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상정되는 주체와 대상의 간극 다시 말해 전통적인 인식론에서의 무(null)를 뜻하지 않는다. 모턴과 같은 객체 지향 존재론자들에게 사물에 대한 주체의 대상화-인식의 현상학은 거기에서 ‘물러나 있는’ 실재의 파편이다. 따라서 주체와 주체가 인식하는 표상은 그것이 구성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인식에서 제외되는(혹은 인식을 초과하는) ‘모든 물러난 사물, 비존재적 무’라는 ‘실재적’인 사물로 가득하다.8) 그에 따르면, 사물에 대해 주체가 감지하는 ‘거리감(대상화)’은 실재의 영역에서는 비존재적 사물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은 인과성의 미스테리아(mysteria) 즉 신비라는 미적 차원과 관련된다.9) 일종의 인식론적 사이키델릭 체험의 영역인 것이다.

   먹점과 눈점은 눈앞의 딜도가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실재적 영역의 위험지대로 진입하는 사이드 미러라는 걸 모른다.10) 그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제도적 장치가 마련한 안락하고 평범한 생애 주기를 꿈꾸기도 하면서 완벽하지 않은 일상을 하루하루 가꿔 갈 따름이다. 두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닐 사물(딜도)을 치워버리는 일은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두 사람에게 딜도는 별 의미 없는, 중고시장에 내놓기도 까다로운 충동구매 물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들의 모든 일상을 원한으로 화한 사물의 위험을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두고 살고 있다. 그것은 딜도에 딸린 바이브레이터를 마사지기로 사용하는 식의 패러디나 표면에 새로운 텍스트를 덧대는 패스티시 같은 방법으로 해소되지 않는 차원의 위험이다. 심지어 그것은 두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 깊이 침투해 있다. 

   니체는 역사와 동시대와 투쟁하는 위대한 존재, 초인의 탄생의 순간을 어두운 밤을 보내고 마침내 해가 뜨는 아침놀에 비유했다. 이 소설은 일몰이 시작된 순간 끝난다. 니체의 잠언에 따라 소설을 읽자면, 아직은 딜도가 ‘승리’할 순간이 아니다. 일몰이란 앞으로는 어두워질 일만 남은 때다. 그것은 딜도뿐만 아니라 먹점과 눈점 두 사람에게도 그렇다. 타인의 가장 내밀한 사적 영역과 관련된 실재하는 위험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먹점과 눈점 두 사람의 삶에 드리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사물의 위험’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외면해도 무방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에 드리운 실재적(real)인 위험이 실제로(actually) 임박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녁놀」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퀴어적 삶과 일상성에 임박한 실재하는 위험과 이를 다루는 인식론적 난망함을 레즈비언의 일상을 원한을 담아 응시하는 사물의 시점이라는 활달한 발상으로 구현한다. 이 소설은 김승옥이 「1964년 겨울, 서울」에서 가시화했던, 일상을 영위하는 딜레당트들에게 닥친 윤리적인 딜레마를 이 시대에 유의미하게 반복하는 듯하다. 

   어둠은 걷히고 언젠가 해는 떠오른다. 그 순간 우리가 봐야 할 아침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내게 이 소설은 한낱 ‘텍스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물로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중인 듯하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이동용 역, 『아침놀: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출판사, 2022, 13~14쪽. 문장 수정.
2)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무진기행』, 더클래식, 2017, 79쪽.
3) 이와 관련해서는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 b, 2009, 231~232쪽 참조.
4) 테리 이글턴, 전대호 역, 『유물론』, 갈마바람, 2018, 130쪽 참조.
5)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24쪽.
6) 김멜라, 「저녁놀」, 『제 꿈 꾸세요』, 문학동네, 2022, 95~97쪽.
7) 앞의 책, 104~105쪽.
8) 티머시 모턴, 안호정 역, 『실재론적 마술-객체, 존재론, 인과성』, 갈무리, 2023, 72~73쪽 참조.
9) 위의 책, 20쪽 참조.
10) 여기서 ‘모른다’는 말을 레즈비언이나 퀴어의 당사자성의 인식의 한계를 암시하는 말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니체를 참칭하는 딜도와 레즈비언 커플의 소통 없는 동거라는 이 소설의 구도를 퀴어적 일상과 삶에 대한 오늘날의 복잡다단한 사회적 인식과 실재적 위험을 동시에 가시화하는 픽션으로 독해하고자 했다. 이 글에서 티머시 머튼의 객체지향 실재론을 끌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모른다’는 이러한 의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맥상의 불가피한 흔적이다.

추천 콘텐츠

세계의 끝을 넘는 법

세계의 끝을 넘는 법 박인성 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시간이란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은 물질세계의 변화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실제적인 힘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시간을 단위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편의적인 메커니즘일 뿐이지만, 그러한 메커니즘이 다시금 인간의 모든 삶에 작동하면서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시간이라는 틀에 맞추어 운영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변적 도구가 다시 우리의 삶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내재적 체제가 된다는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시간을 측정하지만 모든 시간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에 의해서 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의 누적된 결과는 지속적이며 실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이것이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시간은 순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된 결과로서 주관적 경험에 그칠 수도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근사치의 이해를 제공한다. 어디까지나 근사치 말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운행을 파악하는 시계를 만들고, 달력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정례화한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은 오랜 세월 시간이라는 운영체제(OS)에 의해서 작동하는 시간-사이보그로서 살아왔으며, 이러한 운영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재귀적 성격은 시간을 다루는 모든 확장된 논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회상, 약속과 지연, 예언과 예지는 모두 인간이 시간이라는 틀을 활용해서 세계와 타인에 개입하기 위한 조작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은 허상이지만 동시에 실존하며, 인간은 시간에 대한 조작적인 사유를 통해서 의미를 조직해 낸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시간은 결코 분절되지도 정지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멈추거나 지연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바로 시간을 사유하는 조작적 시간(정지와 지연)에서만 발견되고 생성된다. 사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삶의 의미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일종의 ‘시간의 바깥’을 상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에서 블랙홀을 통해 진입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 지구를 떠나기 전 딸 머피와의 만남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비유적이지만 정교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치 다른 중력의 영향을 받듯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간 삶에 대한 예외적인 의미화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흘러가 버렸으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마치 구조화된 순서처럼 배열되고 우리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SF 장르로서 〈인터스텔라〉가 물리 법칙에 주어진

  • 관리자
  • 2024-06-01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 관리자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 관리자
  • 2024-06-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