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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출발하는 것

  • 작성일 2005-10-28
  • 조회수 4,277




사람의 삶


박형준 :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 시절 이야기에는 위험 속에 상존하는 열정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선생님의 시세계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깊은 산 골짜기에 막 얼어붙은 폭포의 숨결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다른 입김이 와서 그대를 녹여줄 때까지


「노래」라는 시를 인용하시고 “나는 나의 시가 지금 막 얼어붙은 겨울 폭포의 숨결을 아무런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생생히 되살리는 일에 기여하길 바란다”(『곧 수풀은 베어지라라』, 1995)라고 하셨습니다.  

간략하게 선생님의 시집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선생님의 시집은 크게 보면 여덟 번째 시집인 『은빛 호각』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이 시집에는 맹문재 시인이 말한대로 『만월』 『바람 속으로』『길은 멀다 친구여』등에서 보여준 긴 서술시와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등에서 보여준 짤막한 시들을 골고루 수록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전 시는 수식을 버린 순도 높은 작품들이었는데, 맹문재 시인은 그것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 한 폭의 한국화라고 했습니다. 최근 시집으로 올수록 시와 산문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구술 형식으로 기록하고 계신데요. 이런 변화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요?

 

이시영 : 최근 『은빛 호각』 이후에 와서 서술적이고 풀어진 듯한 산문시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에 담긴 압축된 짧은 시적 언어로 된 긴장된 세계가 갑갑하게 느껴져서 서술시로 돌아선 이유도 있습니다.

더 근원적인 면에는 ‘시의 형식을 깨버리자’, ‘시의 역사는 규정된 형식에 대한 파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는 실험의식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제 시를 읽고 시가 아니라 산문이라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시라는 고정된 선험적인 형식을 부숴버리고 시와 산문의 아슬아슬한 경계까지 가보자는 것이 의도입니다.

 

박형준 : 선생님이 쓰시는 시들이 옛날이 되어버린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구술 형식이 강화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옛날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고 계신지요?

 

이시영 : 옛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이라거나, 사람들 사이의 연대, 사람과 다른 사물들과의 우애 정신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박형준 : 이런 시들은 고은의 『만인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영향을 받으신 점이나 다른 점이 있으신지요?

 

이시영 : 고은의 『만인보』를 읽었지만 의식하고 쓰지는 않았습니다. 『만인보』에는 시인의 평가가 들어가 있습니다. 『질마재 신화』에도 토속 세계에 대한 시인의 신화적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객관적 서술시는 액자처럼 시인의 의도나 평가를 배제하면서 있었던 사실과 에피소드를 건조하게 드러내어 독자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좋도록 쓴 것입니다.

 

박형준 : 선생님의 시는 어떤 면에서는 예술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신지요?

 

이시영 : 얼마 전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작품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화집도 스위스에서 구입해서 산 적이 있고요. “구성과 시각적 질서를 먼저 찾아라. 그리고 드라마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거기에 있었고 그 순간에 삶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방법이 있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카메라는 순간의 예술이고, 시는 순간의 시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움직이는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순간이 있다.’는 말도 공감합니다.

 

박형준 : 선생님 시는 회고담이 아닌 기억과 역사의 몽타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몽타주를 통해 그 시대의 깊이 있는 이미지와 만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시영 : 이미지에 깊이 가 닿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 씨는 직관을 가리키면서 ‘시는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출발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물이 나에게 주는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출발하는 것이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준 : 선생님의 시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문인들과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이 해학적으로 그립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시영 : 감옥이 집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연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끌립니다. 김현 씨도 저를 가리켜서 대자연에 관심이 없고 사람 이야기만 한다고 했더군요. 어떤 악인에게도 미워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기보다는 구치소로 가고 싶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박형준 : 시집에서는 문인들의 비화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데요. 그런 것들을 시로 표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이시영 : 특별한 의미라기보다는 지나간 시대의 인물들, 현대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이문구, 조태일, 송기원 등이 모두 그런 인물입니다. 

 

박형준 : 좋은 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시영 : 좋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유종호 선생의 ‘각자의 방식대로 좋은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현대문학 양식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반복은 리듬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각 시마다 시인의 호흡이 행간에 스며서 이루어지는 것이 리듬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준 : 선생님께서는 “시심(詩心)이란 침묵, 나아가서는 ‘함묵의 큰 질서’를 자아와 세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함묵의 큰 질서가 뭘까요?  

 

이시영 : 저는 이용악의 「북쪽」이란 시를 좋아하는데요,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여섯 행의 짧은 시에 함경도를 고향으로 둔 망향의 정서와 고향에 대한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함묵의 시가 아닌가 합니다. 시 속에서 함묵이라는 것은 말없음으로 큰 세계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함묵이란 말없음 사이에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인들


박형준 : 선생님은 최근에 젊은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으신다고 정평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시영 : 엘리엇은 ‘정말로(The real) 새로운’ 시가 나타나면 문학사가 출렁한다고 했습니다. 옛것과 새것 사이의 협동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엘리엇의 말대로 ‘정말로 새로운’ 시가 있는가 하면 아류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장욱, 권혁웅, 김수이, 허윤진 등의 평론에 기대어서 젊은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황병승 시인의 경우,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솜씨와 감각의 매끄러운 사용, 비유의 느닷없음, 그 모든 것을 총괄하여 시를 전개하는 에너지를 보았을 때 정말로 새로운 단계에 이른 시인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이장욱의 표현처럼 ‘꼰대들의 영혼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감각의 제국’, 즉 지금과는 다른 제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무수한 시인들이 있는데 황병승은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박형준 : 새로운 것을 긍정적으로 보시면서 나아가려는 정신이 우리 대화의 많은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시영 : 그런데 불만이 있다면 유형진, 김민정, 이민하 등의 시는 황병승과 같은 다채로움이 없고 표면적이며 환상들이 비극적 유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들의 환상에 대한 극도의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회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해석들도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박형준 : 향후 계획은 어떠신지요?

 

이시영 :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행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출발하는 시도 쓰고 싶습니다. 남북작가회담이나 공동체 일도 주어진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민으로서도 성실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젊은 시인들도 시민으로서의 성실성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문장 웹진/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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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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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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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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