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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작성일 2024-02-01
  • 조회수 675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2)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3. 새로운 돌봄 공백


   교사의 위기가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이래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제출되었다. 멀리는 1995년의 5·31 교육개혁에서부터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문제, 교육의 서비스화로 인해 서비스 수혜자와 공급자로 바뀐 학부모1)와 교사의 관계, 저출산 등이 심층적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교사의 위기가 사실상 여러 사안들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한 문제임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현 사태의 책임이 인기 예능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새끼>2)에 상담자로 출연한 오은영 박사의 교육관에 일정 부분 있다고 보고 한동안 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던 일과 앞서 언급한 여러 분석들이 사실은 교육 소비자이자 민원 제기자이자 ‘금쪽이’의 양육자, 그리고 그들이 길러낸 금쪽이들을 공통적으로 문제 대상으로 가리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물론 여기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이 교사의 죽음에 주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는 정황들과 이를 교권침해의 주된 요소로 꼽는 교사의 목소리3)가 자리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의들 틈에서 ‘맘충이 진상 학부모가 된다’는 말과 학교 및 가정 내 체벌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의견들이 큰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분석들이나 ‘괴물 부모’ 등과 같은 새로운 명명이 의도와는 관계없이 또 다른 혐오의 정동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관련한 사유를 한여진의 다음 시를 통해 조금 더 확장해 보자.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 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들 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 한여진, 「조사」(『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전문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누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이 시는 사실상 우리가 마주하는 대다수 문제들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을 만큼 사건이 발생하고 수습되는 과정의 미묘한 지점들을 섬세히 짚어내는 까닭에 이를 현 사태와 관련하여 말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그러나 한 편의 시가 이처럼 확장성을 갖는 것이 문제에 당면한 이들에 대한 밀도 있는 관찰과 너른 통찰 때문이라면 이에 기대어 우리의 현재를 되짚고 근미래를 짐작해 보는 일은 가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 그리고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며 저마다의 의견을 보태는 동안 문제에 대한 실감이 점차 무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누수를 잡으려 “몰려든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누군가가 울며 새로운 ‘누수’가 발생하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이 시의 다분히 의도적인 구성을 눈여겨보자. 이는 우리가 앞서의 문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누수를 발생시켰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한편으로4) 당초 새어 나오는 물을 막기 위해 모인 우리들 사이에 또 다른 누수가 발생했다면, 과연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누수를 막는 것만으로 이 사태가 해결되는 것인가를 묻게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하며 보아야 할 지점은 시 속 누수가 애초에 “건축불량”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대상이 이곳에 함께 거주하며 누수를 일으켰을 것으로 여겨지는 누군가가 아니라 이 건물을 잘못 설계했거나 잘못 지은 자, 혹은 이 건물 자체가 아닌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주택’을 논의의 중심에 놓아 보는 사고의 전환을 시는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동주택은 언제 건축된 것인지, 이곳의 건축불량은 왜 발생하였으며 어느 부분이 잘못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하여 언제부터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인지 말이다. 

   학교라는 ‘공동주택’이 건설된 것은, 그러니까 학교가 ‘또 다른 집’으로 용도를 확장 · 변경한 것은 2004년부터였다. 1996년, 보건복지부 주관 아래 두 개교에서 시범 운영되었던 초등돌봄교실이 2004년 교육부 주관으로 바뀌며 확대 시행된 이래, ‘돌봄’ 개념은 학교에 적극적으로 접목되었다. “학생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건전한 정서적 ․ 사회적 발달을 도모하며, 학업 성취능력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과 같은 안락함을 제공해 주기 위해 제도화”5)한다는 정부의 방침과 2011년에 시범 운영되었던 ‘엄마품 온종일 돌봄교실’이라는 이름은 ‘공동주택화’된 학교의 변화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문제는 정부가 완전히 설계를 끝마치지 않은 채 증축을 시도했다는 데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비판되었듯 인력, 프로그램, 예산과 같은 어떠한 인프라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봄 정책이 시행되면서6) 돌봄교실은 실질적으로는 아이의 시간을 학교라는 공간에 묶어 두는 협의의 돌봄에 머물러 있었으며 , 이는 돌봄을 “휴식, 놀이, 간식 등”으로 규정하는 데에서도 확인되듯 올해부터 확대 · 운영되는 늘봄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7) 이러한 점은 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학교 내 돌봄을 교육 돌봄까지 포함한 보다 넓은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학부모의 돌봄 개념과 비교해 볼 때 그 차이가 매우 크다.8) 돌봄교실에 대한 정부의 구상과 실제 돌봄 현장의 간극은 지금껏 ‘돌봄의 질’이라는 말로 논해졌지만 사실상 여기에는 학부모들 간에는 물론, 관련 당사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인식된 돌봄 개념이 있는 것이다. 

   ‘학교 내 돌봄’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은 아이 돌봄의 범위가 보다 확장적으로 인식되는 지금 더욱 문제적이다. 최근 한국 현대시에서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가족 모델을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수지를 키울 때 그랬다. 내 삶 갈아서 만든 이 돈 어떻게 하면 최대한 덜 뺏기면서 수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고민하다 보면 답이 없고 답이 없으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면 수지를 때렸다. 수지는 훌륭한 울보였다. 찍소리도 없이 정말 많이 울 줄 알았다. 덕분에 나는 늘 떳떳한 양육자일 수 있었다 공적으로도

   수지가 어떻게 죽지 않고 마흔세 살이 되었을 때 수지는 정말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 

   수지는 [KEB 하나은행 종신형 방카슈랑스 생명보험 Ⅱ]의 계약이 종료되기 이틀 전 조력사로 사망했다. 죽어 가는 수지는 수지로 태어난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됐던 수지, 어디로도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수지, 밖에 나가 험한 꼴 당하는 사회생활 같은 건 꿈에서도 나올 일이 아니었던 수지, 그래서 늘 공상하며 환각 하느라 세상에는 관심도 없었던 수지, 23년 후의 지수만을 믿으며 허송세월하였던 수지. 나는 파트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정말 훌륭한 양육자였어, 여자인 수지가 살해당하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취업난에 시달리거나 시달려서 취직해도 왕따에 성희롱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말리지 않아도 됐고 결혼하지 않아도 됐고 많은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됐고 여자를 믿지 않아도 됐고 오로지 23년 연금만 생각하면서 [······] 큰 병도 큰 사고도 없이 심지어 우아하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 내 손을 잡은 파트너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한다, 맞아 정말 그래, 우리는 환상의 팀이었어 자기가 벌고 나는 벌리고 자기가 계산하고 나는 계획하고 자기가 협박하는 동안 나는 달랬지. 우리의 수지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돈으로 가난을 미리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야 티 하나 없이 생활 기스 하나 없이 깨끗한 우리의 수지를 봐, 수지는 정말 행복했을 거야 이 시대 최고의 행운아였을 거야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매일 있는 이 나라에서 수지는 아예 일을 안 해도 괜찮았잖아 수지는 장수한 거야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던 거야 정말 대견하다 우리 수지 우리 수지 정말 사랑해 다시 태어나도 우리 딸 하자 알았지 수지야 우리 예쁜 수지 정말 정말

― 박참새, 「수지」(『정신머리』, 민음사, 2023) 부분


   딸인 “수지”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그를 통제하는 한편 적극적인 도움을 주려는 이 시의 화자는 2000년대부터 이미 사회적 · 학문적 관심을 받아 왔던 과보호 양육자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리 색다르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지의 부모는 지금까지 다뤄졌던 과보호 양육자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학업과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타인과 비교하거나 체면을 중시하는 특징”9)을 보이는 지난 과보호 양육 모델과 달리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나 좋은 직장과 같은 자녀의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지가 “돈을 벌지 않”고 “출근하지 않”고 “밖에 나가 험한 꼴 당하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 “먹고사는 인생”으로 살 수 있도록 “달마다 육백만 원의 연금 보험”을 든다. 여자인 수지가 겪을 수도 있는 일들, 그러니까 수지가 “살해당하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취업난에 시달리거나 시달려서 취직해도 왕따에 성희롱 온갖 사소한 일들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이를 미리 차단하는 데 그들 양육의 목표가 있기에, 그녀가 남의 손을 빌려 죽음을 선택한 것이 살아 여러 힘든 일들을 겪는 것보다 옳다고 믿으며(“우아하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 그들은 이렇게 그녀를 키운 자신들을 “환상의 팀”으로 자찬할 수 있었다. 

   시의 이러한 과장된 설정은 개인에게 발생하는 위험을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아이가 “티 하나 없이 생활 기스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돌봄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는 흐름이 등장했으며,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서 발생한 것인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아이가 어떠한 신체적 · 정신적 어려움에도 맞닥뜨리게 하지 않게 돕는 것’을 돌봄으로 인식하고 아이를 ‘생활 기스’ 하나 없이 기르는 것이 목표가 될 때, 돌봄 노동자가 돌봐야 하는 영역이 상당히 포괄적인 범위를 아우르게 될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 조사된 초등학교 학부모 민원들이 공통적으로 아이의 마음 돌봄이나 맞춤형 돌봄을 교사에게 요청10)하며, 이를 행하지 않는 교사의 돌봄 공백을 지적한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경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학교, 학부모, 교사 모두 돌봄의 영역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봄의 범위를 보다 넓게 인식하는 흐름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돌봄 공백을 가리킬 때 그들 사이의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돌봄’이라는 용어의 문제는 지난 비평에서 지적되었듯 이 “따뜻하고 온화한 말”이 “자본의 교환체제에서 배제된 재생산노동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숨기고 있다는 것11)만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는 모호한 말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4. 빈 유리병들


   물론 ‘돌봄’이라는 용어가 모호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있어 왔다. 모든 돌봄 이론가가 용어 정의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조안 C. 트론트의 말처럼12) 돌봄의 복합적인 함의를 새로운 정의 아래 재배치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음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돌봄 개념이 재규정되는 와중에도 그것의 모호함은 대체로 여러 상상력으로 뻗어 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되었다. 일종의 실천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돌봄’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가장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다른 형태의 돌봄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트론트의 주장이나,13) 이 용어의 포괄성을 활용하여 생태주의 돌봄까지 논의에 포섭해 온 해러웨이의 관점14)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돌봄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정책의 주요 의제로 삼아 실제 현장에 적용할 때에는, 더욱이 그것이 기존의 사고틀을 깨뜨리는 새로운 도모인 경우 그 개념 규정과 용어의 사용은 보다 면밀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철학자 사이파이 사일런스는 『관내 여행자』라는 책을 통해 관 사용법을 두 가지로 안내합니다. 관을 사용하기 그리고 관을 낭비하기 두 가지 방법 중 첫 번째는 익히 아시다시피 시체를 돌려보내는 용도입니다. 대체로 직사각형 형태의 나무 궤짝은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땅의 일부가 된다고 알려졌지요. 그것은 적절한 용도입니다. 그러나 한 목수가 직사각형이 아닌 정사각형으로 된 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관의 낭비가 시작됐습니다. 목수는 일이 아니라 재미를 보려는 마음이었겠지요. 어쩌면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을 안치시키고 싶다는 누군가의 요구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과로사를 당한 후 그대로 몸이 굳은 사람도 남들보다 반절의 몸으로 평생을 산 사람도 목수가 변주한 관을 통해 딱히 좁지 않고 너무 넓지 않은 딱 맞음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겠지요. [······] 지상용 관을 완성한 후 안타깝게도 목수는 이제 관을 만들지 않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철학자 사이파이가 누워 있고 목수는 세 단계 풍화가 시작된 철학자를 들여다보며 이런 말을 비문에 남기길 바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들이 살면서 풀지 못한 문제를 관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며 자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말이지요. 죽은 후에도 증손자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빳빳하고 부드러운 잔디가 사시사철 푸르른 마당이 있는 관을 만들어 주세요. 내 시체가 문드러지고도 지구의 종말까지 목격할 수 있는 번듯하게 생존할 수 있는 플라스틱 성전을 만들어 주세요. 나의 관이 나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보내 줄 수 있도록 우주선에 범접한 광속 발전체를 달아 주세요. 내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번영할 내세를 위해 오랫동안 신께 기도했던 나의 목소리, 기도의 성실함, 기도의 밀도를 여러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는 1테라짜리 기록용 관을 만들어 주세요 등등. 셀 수도 없는 창의적 주문서들은 『관내 여행자』 내 별첨 도서로 만들었으니 목수가 당부한 문장으로 이 비문을 서둘러 끝내야겠군요. “이보쇼. 정말 모르는 거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요? 설마 관이 달걀


   메모) 장묘 문화와 비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출하는 스톤매직입니다. 저희 스톤매직 일반 비석에 귀하의 텍스트가 전부 들어가지 않더군요. 납품 마감 날에도 귀하께 연락이 닿지 않아 비석에 넣을 수 있는 글자만 제작해 보냅니다. 귀하의 회신이 늦은 관계로 스톤매직 일반 비석의 교환 환불은 불가합니다.

― 백가경, 「사이파이 비문을 위한 간단한 메모」(『문학과사회』, 2023년 봄호) 부분


   대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획기적인 시도가 자칫 여러 욕망을 증폭시켜 불가능한 요구들을 발생하게 할 수 있음을 백가경 시의 상상력을 빌려와 이야기해 보자. 최초로 “직사각형이 아닌 정사각형” 관을 만들기 시작한 어느 목수의 작업이 파생한 일련의 사태들을 다룬 이 작품에서 목수의 실험은 새로운 예술적 방법의 도모로 우선 읽히기는 한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관을 “좌대”에 빗대어 그것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작품의 일부가 될 수도 오히려 도드라지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라고 서술하거나 관을 활용하여 치밀하게 계산된 퍼포먼스를 구상하는 목수의 작업을 시가 제시한다는 점은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안내서 양식을 시에 가져오고 문장을 마무리 짓지 않는 등 정교하게 고안된 시적 장치 역시 시인이 목수와 같은 실험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를 더욱 두껍게 읽히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독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저 목수의 시도를 사회적 상상력으로 확대해 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목수의 신선한 기획이 “과로사를 당한 후 그대로 몸이 굳은 사람”과 “반절의 몸으로 평생을 산 사람”과 같은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을 안치시키고 싶다는 누군가의 요구”에서 발현된 것으로 추정하는 서술에 주목한다면, 관을 변주하려는 목수의 행동은 우리와 다른 몸에 대한 그간의 무관심이 만든 공백을 채우려는 실천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죽은 몸의 임시 거처이자 “시체를 돌려보내는” 도구로서 관을 바라보던 기존의 인식을 목수가 흔들어버린 후 그가 받은 “셀 수도 없는 창의적 주문서”들은 정치적 으로 “재미를 보려는 마음”에서든 공공의 돌봄이라는 연대의식에 의해서든 돌봄을 학교와 적극적으로 접목시킨 시도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난 지금 발생한 어려움을 다루는 이 글이 논의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살면서 풀지 못한 문제를 관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거나 죽은 후에도 삶의 연속선상에 있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낭만적이고 막연한 상상이 관의 본래 기능과 완전히 배치되는 요구로 이어짐으로써 목수가 더 이상 관을 만들지 않을 것을 선택하였다는 시의 결론은 새로운 장소성을 갖게 된 학교가 가까운 미래에 어떠한 상황에 직면할 지를 미리 보여준다.

   정부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만을 추구한 채 ‘학교 내 돌봄’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을 내리지 못하고/않고 돌봄교실에 한정하여 (그것도 여러 돌봄 개념이 혼재된)15)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는 상상외로 복잡하고 심각하다. 시 속 목수처럼 쉽게 정책을 무를 수 없는 정부가 합의되지 않은, 혹은 합의되기 어려운 돌봄 영역에 대한 숙고 없이 ‘돌봄’이란 용어를 전유해 버림으로써 학교 내 돌봄에 대한 잔뜩 부풀려진 기대와 실제 행해야 하는 포괄적 노동의 하중은 이를 담당하는 노동자인 교사가 고스란히 담당하게 된 것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국가의 무관심과 가부장적 가족 구도 아래 여성이 돌봄 공백을 메워 왔던 것과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제 교사의 노동을 ‘여성화된 노동’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가정 내 엄마들이 하는 일과 가장 비슷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노동 영역의 포괄성까지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16) “외주의 외주의 외주가 필요했던 치사량의 노동”(주민현, 「밤이 검은 건」,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이 하청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교사는 어느새 돌봄의 책임자가 된 학교에서, 전 계급으로 확대된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돌봄 공백은 물론, “경제나 복지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가족 단위의 책임으로 전가되면서”17) 더욱 확대된 돌봄 영역이 야기한 새로운 돌봄 공백까지 메우는 역할을 모두 감당하는 최전선의 자리에 있다. 지금의 교사 위기는 그들이 저 이중으로 겹쳐진 돌봄 공백의 자리에 놓여 있다는 점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교사에게 이중의 돌봄 공백을 메울 것이 요구될 때, 다음의 시는 교사의 위기가 단지 교사만의 것이 아니게 됨을 알려 준다.


   아이 하나

   아이 둘


   [······]


   나는 정시마다 순차적으로 아이를 들어올려

   바깥을 보여준다


   [······]


   내가 아이 세는 일에 급급하여

   간혹 아이 하나가 창밖을 오래 골몰하면


   바깥에서 호명소리를 듣던 아이의 보호자들이 달려와

   겉옷을 벗어 창을 가린다


   똑바로 하세요

   맡은 바 일을요


   나의 일은

   정확하게 셈하고

   불분명하게 기억하며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 일

   아무것도 의아해하지 않는


   빈 유리병의 일


   [······]


   아이 하나가 실수로

   나를 부수는


   상상을 한다


   우글거리는 아이들

   불어나지 않는 창


   짐승의 가죽이 모든 창을 막아버리는

   미래가 도착하지 않길 바라는


   빈 저택의


   유리병 하나


   유리병 둘

― 류휘석, 「빈 저택」(『우리 그때 말했던 거 있잖아』, 문학동네, 2023) 부분


   이 시를 돌봄 노동 현장의 재현으로 읽는다면, ‘나’가 맡은 업무는 아이의 수를 세고 호명함으로써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잠시 이곳 너머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해야 하는 탓에 “간혹” 그는 “아이의 보호자”가 정해둔 시간 이상 아이가 창밖을 바라보게 두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아이의 보호자들은 아이가 (아마도 위험한) 바깥을 오래 보게 방치한 그를 다그치며 즉각 “달려와” 창을 가린다.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업무들과 언제든 침해될 수 있는 노동 현장이 그를 무언가가 비어져 버린, 깨뜨려지기 쉬운 “빈 유리병”으로 만드는 과정을 시는 자세히 담는다. 그의 몸을 마구 넘나드는 아이들이(“유리병을 뛰어넘는 아이들”) 자신을 부수어버리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 그는 이제, 자신의 일이 무엇인가를, 아니 무엇을 자신의 일로 생각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따져본다. 그것은 아이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거나 그들을 이해하며 그들과 소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이 아니라, 아이의 수를 “정확하게 셈하”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작업이거나 그들을 호명하는 일처럼 자신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전시할 수 있는 노동, 어떤 창의적인 노동이기보다는 정해진 매뉴얼을 “의아해 하지 않”고 따름으로써 노동자인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세던 그가(“아이 하나/아이 둘”)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유리병을 세고 있는(“유리병 하나//유리병 둘”) 장면은 그의 이와 같은 변화가 아이들 역시 ‘빈 유리병’으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시가 포착한 이러한 장면들은 우리 사회가 애써 합의한 ‘공공의 돌봄’으로의 전환이 자칫 마주하게 될 위태로운 미래이자 벌써 마주한 현실처럼 보인다. 관의 본래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무한한 요구들로 인해 목수의 의욕적인 계획이 전면 중지된 사태를 다룬 백가경의 시는 이에 더해, 목수가 전환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을 재빠르게 시장으로 끌고 가 이를 이해(利害)적으로만 접근하는 “스톤매직”사(社)의 행태를 보여준다. 이는 교사의 위기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공공’ 돌봄의 위기가 될 수 있음을 예기한다. 우리의 ‘공동주택’이 “빈 유리병”들이 모인 “빈 저택”이 되는 것을 막고, 교사의 위기이자 사실은 학교의 위기, 더 나아가 공공 돌봄의 위기이기도 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은 무엇일까. 문학은 무엇을 상상하는가. (3편에서 계속) 


1) 이 글은 <더 글로리>의 전재준이 친딸에게 젠더 폭력을 행하는 교사를 응징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부터 ‘학부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돌봄 제공자를 온전히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을 이 용어를 그럼에도 사용하는 까닭은 ‘학부모’라는 말을 가져올 때 악성 민원인의 젠더화된 양상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간략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2) 김승훈, 강태연, 정재국, 박진우, 김규리 연출, 채널 A, 2020.05.29.∼현재.
3) 전국초등교사노동조합이 전국 초등교사 239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2023.7.21.∼24)에 따르면 99.2%의 초등교사가 교권 침해의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학부모의 악성 민원(49%)이 그 주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4) 한국 사회의 “젠더 역할 구분”에 따라 학부모 중 ‘모’에 해당하는 ‘어머니’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고정되었음을 분석한 몽글의 다음과 같은 서술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참조해 볼 수 있다. “악성 민원인인 어머니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비난의 시선은 종종 여성에 대한 타자화된 시선과 사회적 배제의 기제에 맞물린다 [······] 사건을 만들어낸 구조는 사라지고 대안적 기제와 사후적 조치에 대한 논의 역시 휘발된다. 텅 빈 자리에 남는 것은 젠더화된 악성 민원인의 이미지다”. 몽글, 「교육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학교라는 ‘장소’」, 『오늘의 교육』, 2023.11+12, 30-31쪽.
5) 양윤이 · 이태연, 「초등돌봄교실의 운영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열린교육연구』, 한국열린교육학회, 2013, 173쪽.
6)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채효정, 「돌봄 없이는 교육도 없다: 교육과 돌봄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학교’를 상상하기」, 『돌봄이 돌보는 세계』, 동아시아, 2022, 203-204쪽.
7) 교육부 · 시도교육청 · 한국교육개발원이 함께하는 방과후학교포털시스템에 따르면, 늘봄학교는 “방과후 프로그램(교과연계, 특기적성 등 교육) + 돌봄(휴식, 놀이, 간식 등)”이라는 “교육 · 돌봄(Educare)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8) 중산층 및 저소득층 학부모의 각기 다른 돌봄 요구에 대해서는 장지은, 이성회, 「학부모 요구의 관점에서 본 초등돌봄교실의 운영방향」, 『학부모연구』, 한국학부모학회, 2021. 참조. 이는 학교 내 돌봄에 대한 보다 신중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9) 이승아 · 정경미, 「개정판 한국 과보호 양육척도(K-POS-2)의 개발 및 타당화」,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한국심리학회, 2023, 181쪽.
10) 이는 현직 교사 2000여 명의 학부모 민원 사례를 모은 「학교 교권 침해 교실 붕괴 민원 사례 모음집」(2023.7.21.∼7.23)에서 확인된다. 거친 분류이겠지만 민원들은 마음 돌봄과 맞춤형 돌봄으로 구분되는데, 마음 돌봄은 아이에 대한 칭찬 요구, 기분 맞춰주기 요구, 혼내지 않아주기 요구 등이며, 맞춤형 돌봄에 대한 민원은 아이 맞춤 음식 제공 요구, 맞춤형 시험 제출 요구 등으로 나타난다.
11) 장은영, 「돌봄의 상상력과 평등의 꼬뮌―강지혜 이근화 김선우 시를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405쪽.
12) 조안 C. 트론토, 『돌봄민주주의』, 김희강 · 나상원 옮김, 박영사, 2014, 66쪽.
13) 조안 C. 트론토, 같은 책, 67쪽.
14) 도나 J.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15) 이는 각주 7에 언급한 늘봄학교 정책이 ‘돌봄’을 다루는 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 물론 교사가 이러한 돌봄 공백을 모두 메워 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사 다수가 돌봄 교실을 담당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해당 업무를 맡은 교사에게 승진 가산점을 주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돌봄 업무가 배당되었음을 드러낸다. 홍섭근, 「돌봄정책 방향에 대한 숙고― 돌봄담당교사(늘봄교사) 도입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2023.06.13. 이와 더불어 지난 5월,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발표한 <초등돌봄 대기 해소와 2학기 늘봄학교 정책 운영 방안>에서 늘봄학교 인력 충원요소로서 “임용대기자”가 인적 자원 중 하나의 예시로 들어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7) 박소진, 「‘자기관리’와 ‘가족경영’ 시대의 불안한 삶: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주체」, 『경제와 사회』2009년 겨울호,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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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1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들 - 서수진의 「한국인의 밤」, 「헬로 차이나」 최정호 202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이동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지속되는 전쟁과 기후 재난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사례가 연일 보도되고,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다문화 가정도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으로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통해 이민자와 재일조선인의 서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 두 작품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조명해 소수자성을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1) 디아스포라는 본래 제1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해 세계 각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상실이나 추방 혹은 시련과 연결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에 방점이 찍혀 사용되고 있다. 강제로 추방된 소수의 집단 공동체나 정치적 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이민자와 소수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로 포괄된다.2)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주민의 정체성을 디아스포라로 단편화할 때, 그 말은 “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디아스포라를 셀 수 있는 실체로 환원”3)한다. 다시 말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중이거나 도착한 이들의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한데 모아 디아스포라로 호명하는 것은 정주하지 못한 이들을 한 장소에 고정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이는 이주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이주의 이유와 정주 과정의 어려움이 한데 모여 뭉개진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이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애써 도착한 장소에 정주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가. 소니아 샤는 이주민들에게 왜 이동하는지 물을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답하기는 어렵고, ‘왜 이동하느냐’는 질문 속에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했다.4)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맥락들이 생략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때때로 이주민들이 겪는 문제는 인종차별, 부적응, 향수병의 차원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맥락들이 있다. 오늘날의 이주민들이 디아스포라로 환원되고 있다면, 서수진의 소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서수진의 소설집 『골드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딘가를 떠나(대체로 대한민국)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주에 방점이 찍혀 있는 일반적인 디아스포라의 용례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서수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으나 정주하지는 못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상 여전히 이동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인물은 새로운 공동체에, 누군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집착한다. 이동 과정에서 균열

  • 관리자
  • 2024-06-01
To be, or not to be,

To be, or not to be, 홍미르 It's the economy, stupid. 평단에서 처음으로 ‘매력의 경제’를 문제 삼았던 이희우는,1)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2)에서 비평이 취해야 할 자세를 제시하고 「배움의 단계들—손보미, 「불장난」 읽기」(이하 「단계들」)3)를 통해 구체적인 비평까지 선보인 바 있다. 여기서 전개된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와 윤리의 칸트식 분리가 효력을 다한 오늘날 비판은 더 이상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매력의 경제와 그에 대한 실망을 배움으로 승화시킬 의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김건형의 지적처럼 그의 이론이 다분히 신비평적 결말에 이를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4) 「단계들」에서 그는 작품 속 매력과 실망에 따른 배움의 과정을 상세히 열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작중 주인공의 배움만 명시되기 때문이다. 즉, 작중 배움이 어떻게 작품 바깥의 ‘배움’으로까지 이어지는지는 공백으로 처리된 셈이다. 이 공백이 확정적 결여가 될 때 ‘배움의 비평’은 “텍스트의 언어·형식적 운동성에 대한 감탄”5)에만 국한된 채 사회·역사와 유리된다는 신비평의 한계를 답습할 여지가 있다. 쉽게 말해 작중 주인공의 배움과 독자의 배움은 별개라는 뜻이고, 독자의 배움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움의 비평’이란 결국 작품 내부에서만 진동하는 형식 놀이에 불과하게 된다는 의미다. 영향 받지 않는 독자를 상정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이건 다른 비평들도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어려움은 어찌 보면 자초된 일이다. 왜냐하면, 칸트식 분리 대신 매력의 경제가 전제될 때, 논의의 대상이 ‘감각’적 기호로 ‘구체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상실한 구체적 기호들의 역학관계가 ‘개별적 감각을 매개로 배움에 이르는’ 장면의 분석은, 따라서 ‘개별 텍스트의 매력 해설’6)에 그치게 되고 그 자체만으로는 작품 바깥으로 일반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평적 개념으로서의 매력’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배수아의 에세이 『작별의 순간들』(문학동네, 2023)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채 제시되는 정보에 대한 의문을, 오석화의 「열린 문으로 잠입하기, 어둠 나누기」7)가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이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희우가 작중의 배움을 제시하면서 작품 바깥의 배움을 기대할 때, 오석화는 이희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그와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매력의 개념을 작품 외부에 먼저 적용하고 독자가 작품의 의도된 ‘공백’을 통해 내부로 잠입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것이 가능했던

  • 관리자
  •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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