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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자유

  • 작성일 2023-10-04
  • 조회수 907

자발적 자유

홍예성


등장인물:

유지연- 40세 여자. - 전 한국병원 간호사

박수찬- 39세 남자. - 사진작가, 독립영화 감독

임보성- 30세 남자. - 취업준비생

오영란- 24세 여자. - 범죄자

장수영- 34세 남자. - 셰프로 활동한 경험 있음

이진순- 55세 남자. - 이혼 후 산중 생활을 했다. 사고로 다리를 전다

방성한- 65세 남자. - 과거 노숙인으로 살다 현재 저택의 집사



무대는 화려한 호화주택의 내부와 주택 외부로 나누어진다. 주택의 내부는 각 방과 거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사용되며 사실적이지 않은 기호적이고 상징적 구조물로 공간을 나누어 사용한다.


<Prologue>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들린다. 


남자1

사······ 살려줘. 

남자4

어서 쏘시죠.


어둠 속에 서서히 다섯 명의 실루엣이 보인다. 남자1이 바닥에 앉아 있고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남자2. 그 옆에서 남자2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서 있는 남자3.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 그리고 한쪽에서 겁에 질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 남자 4.


남자5

뭐 하고 있습니까? 네가 이자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 겁니다.



남자1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남자2가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리자 그 옆에 서 있던 남자5가 남자3의 머리에 총을 겨눈 후 총알을 장전한다. 겁에 질린 남자3이 비명을 지르며 남자1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남자1 쓰러진다. 정적. 암전. 


<제1막> -1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수  찬

일어나 봐요. 어서요.

지  연

아, 머리야.

수  찬

정신이 들어요? 

지  연

여기가 어디예요? 


무대 밝아진다.


지  연

(방을 둘러보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수  찬

식당에서 나올 때. 어떤 남자가······


일어나 주변을 살피는 지연.


지  연

내 가방. 

수  찬

휴대폰도 없어졌어.


지연, 벌떡 일어나 문으로 가서 두드리며


지  연

이거 봐요! 문 좀 열어봐요. 아무도 없어요? 이봐요.


수찬은 조심스럽게 방 내부를 살펴본다. 방문이 열리고 백색의 슈트를 입은 단정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서 있다.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어딘지 모를 차가움이 감돈다.


성  한

(가벼운 목례를 하고) 많이 놀라셨죠? 이제 안심하십시오. 

지  연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성  한

쉿. 그건 차차 이야기하고, 우선 마음을 진정시킬 겸 차를 한잔 드시죠. (차를 건넨다.)


지연이 차를 받지 않자 성한, 지연과 수찬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성  한

그럼 식사를 준비할 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성한이 방을 나간다. 사이. 수찬과 지연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방문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드러내는 영란. 


지  연

누, 누구세요? 

영  란

두 명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들어오며) 반가워요.


영란이 발랄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그러나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지연.


영  란

(안쓰러운 듯) 완전히 겁먹었네. 집 구경은 했어요? 아, 아직 못 했겠구나. 따라와요. 내가 집 안내해줄게요. 어차피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닌데. 

지  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기 대체 어디예요? 

영  란

궁금하면 따라와요. (두 사람을 떠밀며) 자, 자. 어서.


영란이 지연과 수찬을 데리고 방을 나간다. 음악과 함께 무대가 전환된다. 

무대는 호화로운 저택의 거실. 한쪽 벽에 천장까지 빼곡히 책이 꽂혀있는 큰 책장이 있고, 한쪽에 고가의 커다란 소파가 있다. 그리고 한쪽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보성이 거대한 책장 앞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이때 지연과 수찬을 데리고 나오는 영란. 


영  란

새 식구 왔어요. 


보성이 무관심한 듯,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책을 고른다. 수찬과 지연이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 


영  란

긴장돼요? 하긴, 나두 처음에 엄청 겁먹었었지.

지  연

(두려움에 몹시 흥분하며) 그럼 그쪽도 우리처럼 납치당한 거예요? 


납치라는 말에 순간 보성의 표정에 긴장감이 흐르며 날카롭게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이때 주방 쪽에서 등장하는 수영. 깔끔한 모습에 방금 손을 씻었는지 손을 닦으며,


수  영

(지연과 수찬을 발견하고) 누구?

영  란

오늘 새로 오신 분들. 

수  영

(지연과 수찬을 보고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세요. 장수영이라고 합니다. 

영  란

(수영에게 팔짱을 끼며 지연과 수찬에게) 우리 오빠 완전 잘 생겼죠? 셰프님이에요, 우리 오빠.


셰프라는 말에 수영이 잠시 당황하는 표정으로 수찬과 지연을 살핀다. 


수  영

아, 아니에요. 셰프는 무슨. 그냥 요리하는 걸 좋아할 뿐.

보  성

(영란에게) 형이 왜 너네 오빠냐? 

영  란

저 오빤 임보성이에요. 엄청 까칠해요. 재수 없어.

수  영

(주변 반응을 보고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하하하. 아무튼 새로 오셨다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  란

(수영과 보성을 가리키며) 여기서 같이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때 허름한 복장을 한 남자가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모자를 눌러 쓰고 온몸이 흙투성이다. 진순은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한번 보고 화장실로 바로 들어간다. 


영  란

아, 한 사람 더 있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당최 알 수 없···

보  성

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물이나 좀 가지고 와.

영  란

오빠가 갖다 먹어. 맨날 심부름만 시켜.


영란, 물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한다. 


수  영

(지연과 수찬에게) 며칠 있으면 적응될 거예요. 생각보다 여기 생활도 나쁘지 않거든요.


수영의 말에 보성이 못마땅한지 헛기침을 한다. 


수  영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 같이 들어왔어요? 혹시 부부? 아니면 연인?


순간 멈칫하며 수찬이 지연을 쳐다보면,


지  연

아뇨. 그런 사이 아니에요.


이때 물을 가지고 등장하는 영란. 보성에게 물을 건넨다. 잠시 사이. 욕실에서 나오는 진순. 지연과 수찬을 훑어본다.


성  한

(주방으로부터 거실로 나오며) 자, 다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영  란

오늘 메뉴는 뭐예요? 

성  한

영란 씨를 위해 장 활동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로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오늘은 특별히 수영 씨가 식사를 준비했답니다.

영  란

(엄지를 치켜세우며) 역시 우리 오빠.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보  성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참에 관장도 좀 해달라고 그러지 그러냐? 

진  순

(화내며) 거참! 밥 먹을 시간에! 더러워서!

영  란

뭐가 어때서 그래요? 아저씨가 변비 환자의 고통을 알아요? 

수  영

(만류하며) 왜들 이래요? 새 식구들도 들어왔는데. 

성  한

어서 식사하러 가시죠. 오늘 새로 오신 유지연 씨와 박수찬 씨는 식사후 제가 방으로 안내를······

영  란

저 이 언니랑 방같이 쓰면 안 돼요? 그동안 나 혼자만 여자라서 조금 심심했었는데.

성  한

두 분의 방은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1인실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자, 그럼 모두 식사하러 가시죠.


성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퇴장하면 성한이 거실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한 곳으로 시선이 고정된다. 그곳을 향해 무언가 암호와 같은 몸짓을 하고 조심스럽게 퇴장한다. 어둠 속에 음악이 흐른다. 

암전 중에 구토 소리가 들려온다. 조명이 들어오면 수찬의 방.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수찬. 이때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오는 수영. 수영이 들어오자 매우 긴장한 수찬이 반사적으로 기겁하며 놀란다.


수  영

괜찮아요? 

수  찬

······

수  영

소리가 나서 들어왔어요. 어디 불편해요?

수  찬

괜찮습니다.

수  영

많이 안 좋으면 약을 좀 가지고 올까요? 

수  찬

(예민하게) 괜찮다구요. 

수  영

미안해요. 난 그저 걱정이 돼서. 그럼 주무세요.


수영이 나가려는데,


수  찬

(조심스럽게) 그쪽은 괜찮습니까?

수  영

뭐가요?

수  찬

그쪽도 납치된 거 맞죠? 들어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수  영

한 이삼 년쯤 됐나? 

수  찬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죠? 

수  영

뭐 여기도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요. 

수  찬

뭐? 나쁘지 않다니. 여기 이렇게 갇혀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요?

수  영

무슨 일이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고 여기 생활을 즐기도록 노력해보세요. 나름 지낼만할 거예요.

수  찬

즐기라고? 여기가 어딘지,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수  영

죽긴 누가 죽어요? 저도 이렇게 잘살고 있잖아요.

수  찬

(수영의 멱살을 잡으며) 당신도 한패지? 여기 사람들 다 한패 맞지?

수  영

(수찬을 뿌리치며) 왜 이래요? 이래봤자 소용없어요. 그냥 빨리 적응하는 수밖에.

수  찬

그럼 평생을 아무것도 해보지도 않고 여기 갇혀 지내야 한다는 말이야? 아니, 난 그러기 싫어! 

수  영

(수찬을 진정시키려) 저, 형님······

수  찬

(언성이 높아지며) 당신이나 평생 여기서 살아! 난 여기서 나가고 말테니까!

수  영

(놀라서 수찬의 입을 막고 주변을 둘러보며) 진정하세요, 제발.


수영,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안심하며 수찬을 놓아준다.


수  영

쉬어요.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수영이 조용히 방을 나가면 초조해하는 수찬의 모습과 함께 암전. 

모두가 불을 끄고 잠든 밤, 사방이 정적으로 고요해지면 어디선가 휠체어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희미하게 들리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휠체어 바퀴 소리. 그리고 잠시 후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휠체어 소리를 따라 함께 움직이듯 지나간다.  


다음 날. 거실에 모여 있는 지연, 수찬, 보성.

보성은 책을 보고 있고 지연은 눈치를 보고 앉아 있다. 수찬은 한쪽 구석에 서서 눈에 띄지 않게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곧이어 성한이 쟁반에 물과 약을 가지고 등장. 영란이 불편한 기색으로 등장한다.


성  한

(영란에게 약을 건네며) 부탁하셨던 약입니다. 앞으로 식사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겠으니 약은 삼가시는 것이······

영  란

(짜증내며) 아, 진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싸야 시원한데.

보  성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그 똥 타령 좀 그만할 수 없냐? 너 하나 때문에 언제까지 우리 모두 맨날 풀만 먹어야 해? 


보성이 크게 소리치자 성한과 영란이 놀란다. 성한은 주변의 어딘가를 아주 조심스럽게 살피고


영  란

뭐야? 갑자기 왜 큰 소리? 내가 하루 이틀 이랬어?


영란의 목소리가 커지자 수영이 방으로부터 나오며


수  영

무슨 일이에요? 

성  한

다들 진정하시죠.


그때 집을 둘러보던 지연이 눈치를 보다가 피아노를 보고 다가간다.


지  연

비싼 피아노 같은데. 저, 이거 좀 쳐 봐도 되나요?

성  한

치는 것은 자유지만 연주는 하실 수 없습니다. 

지  연

그게 무슨 소리······?

영  란

소리가 안 나요. 

지  연

네? 

수  찬

그런데 이 집 주인은 대체 누구요? 뭐 사람수집이라도 하나?


수찬의 발언에 모두가 놀라 성한의 눈치를 본다. 잠시 사이,


성  한

(지연과 수찬에게) 어제 둘러보셨겠지만, 이 집에는 여러분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누리셔도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요청해 주시구요. 집 밖에도 산책로와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어있으니 얼마든지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영  란

여긴 다 좋은데 맨날 우리끼리만 놀아서 재미없어요! 

성  한

아 그러셨어요? 요청하시면 해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정숙해주시기를. 

수  찬

여봐요! 왜 자꾸 조용히 하라는 거요?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성한이 나가려다가 돌아서며,


성  한

이미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기 위해 말씀드리죠. 이곳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여러분께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실내에서 절대 정숙하시는 것이 첫 번째 규율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지요? 

수  찬

뭐요? 규칙? 그걸 왜 우리가 지켜야 하냐고?

성  한

잘 지켜주신다면 천국과 같은 생활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다들 편하고 자유롭게 지내십시오.

수  찬

천국 좋아하시네. 사람을 이유도 없이 납치해놓고 천국이라고? 


성한이 못 들은 척 나가버린다. 수찬이 답답해하며 자리에 앉는다. 순간 긴장하던 수영과 보성도 성한이 나가자 긴장을 푼다. 


지  연

(조심스럽게) 다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요? 

영  란

난 한 두세 달 정도 됐나? 여기 있으니까 날짜를 모르겠어. 암튼 그정도 된 거 같아요. (수영을 가리키며) 우리 오빤 나보다 먼저 있었구요. 

수  찬

대체 왜 자꾸 조용히 하라는 거야?


보성, 수영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영  란

그건 몰라요. 아무튼 뭐, 그것만 지키면 된다니까 지키는 거죠. 

지  연

왜 나갈 생각들을 안 하는 거예요? 이건 범죄라고요. 우리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영  란

신고요? 할 수 있으면 해봐요. 할 방법이 있나. 


영란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보성을 툭툭 치며 사인을 보내면 보성이 책장의 책을 꺼내 마지못해 읽는다. 


보  성

범죄란 사전적 의미로 법규를 어기고 저지른 잘못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해자란 사전적 의미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침해 또는 위협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영  란

따라서 저들이 우리에게 범법 행위를 취한 것은 맞지만 피해자인 우리는 이곳에서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따위에 위협을 받고 있지 않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피해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죠.


영란이 굉장히 뿌듯해한다. 그리고 보성을 의기양양해하면 보성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책을 책장에 넣는다. 


영  란

저도 처음엔 좀 두려웠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여기 오게 된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대궐 같은 곳에서 아무 걱정없이 최고급 음식에, 최고급 옷에. 밖이었다면 이런 생활은 꿈도 못 꿨을 거예요. 밖에 나가봤자 개고생이지.

지  연

그래도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보고 싶지 않아?

영  란

(표정 어두워지며) 저 친구 없어요. 부모님은······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제가 죽었다고 해도 관심도 없을 거예요.

보  성

최고급이면 뭐해? 그런 거 우리 말고 보여줄 사람이나 있냐? 

영  란

사이코패스야? 왜 저렇게 공감 능력이 없어?


생각에 잠겨있던 수찬이 조용히 일어나 초조한 듯 집 안 이곳저곳을 살핀다. 


수  찬

다들 어젯밤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지  연

무슨 소리요?

수  찬

여자 목소리.

영  란

난 못 들었는데. 일찍 잠들어서.

수  영

저도 못 들었어요. 


보성이 책을 보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때 안마기를 든 진순이 나와 거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안마기로 어깨를 마사지한다.


영  란

(배를 문지르며) 아, 배야. 

보  성

야, 먹고 운동이라도 좀 해. 먹고 움직이지를 않으니까 그런 거 아냐.

영  란

저놈의 잔소리. 귀찮아 죽겠어. 나, 운동 싫어해.

보  성

그럼 똥 타령이나 좀 하지 말던가. 

수  영

그만들 해. 영란이는 얼마나 답답하겠어. 일주일이 넘었다는데. 배 따뜻하게 하고 있어. 요거트 만들어올게. (나간다.)

보  성

움직여야 나온다니까. 어느 정도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야 장이 움직이고, 그래야 노폐물이 밀려 나오지.

영  란

신경 끄시지.


배를 문지르던 영란이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서 어설픈 동작으로 움직여 본다. 수영이 주방으로부터 등장하자 갑자기 섹시함을 어필하는 동작으로 바뀐다. 보성이 가잖다는 듯 쳐다본다. 수찬은 이들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고 있다.


영  란

잠깐만. 조금씩 느낌이 오는데. 

보  성

진작에 움직이라니까.

영  란

지금이야. 드디어 신호가 온다.


영란이 화장실로 달려간다. 


수  찬

다들 뭐 하는 짓들인지. 머리에 똥밖에 안 들은 인간들처럼. 

보  성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다 같은 처지끼리.

수  찬

같은 처지? 어떻게 댁들이랑 내가 같은 처지야? 댁들은 이미 이곳 생활에 물들었어. 나갈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 


수찬의 언성이 높아지자 다시 등장하는 성한. 


성  한

무슨 일이시죠? 

수  영

(수찬을 막아서며) 별일 아녜요. 

수  찬

그래? (수영을 끌고 와 목을 잡고 위협하며) 과연 그럴까? 이래도 별 일이 아니야? 다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 갇혀있으면서도자기 집인 양 이런 꼴로 있는 게 별일이 아니야? 내가 보기엔 당신들 다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쳤다구!

보  성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때, 등장하는 영란. 벌어진 상황에 놀라며


영  란

(수영을 보고) 오빠! 


수찬이 주머니에서 포크를 꺼내 수영의 목에 가져다 대며 성한을 향해 위협한다. 영란과 지연은 몹시 놀라 공포에 떨고, 진순은 별 놀란 기색 없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 보성은 진순과 성한의 눈치를 보고 있다.


수  찬

어서 말해! 여기가 어디야? 왜 납치한 거지? 

성  한

당황스러우시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진정하시고······

수  찬

닥쳐!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당신 같으면 진정하겠냐고! 어서 말해!

성  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수찬이 점점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


수  찬

곤란해? 내가 지금 곤란한 상황이야! 그러니까 당장 내보내 줘! 당장!

성  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로) 제발, 쉿. 조용히······

수  찬

이 와중에도 조용히 하라고? 하! 미친 새끼! 마지막 경고야. 지금 당장 내보내 주지 않으면 무슨 짓 할지 몰라! 

지  연

수찬 씨, 이러지 말아요.

수  찬

다들 나가고 싶지 않아? 저 사람한테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지 않냐고!

지  연

수찬 씨...... 그래도 이런 방법은.......

수  찬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냥 이렇게 있을 거야? 

지  연

우리끼리 이러면 안 돼요. 수영 씨도 우리랑 같은 처지라구요.

수  찬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봐야 말할 거야? 어서 말해. 여기가 어디야!


성한이 당황하여 허공으로 이곳, 저곳 시선을 돌린다.


수  찬

그래,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고!


수찬이 포크를 높이 들어 보성의 목덜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때 진순이 다가와 수찬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순식간에 수찬의 팔을 붙잡는다. 성한이 식은땀을 닦으며,


성  한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기는 천국 같은 곳입니다. 여러분이 주인이시고요. 그러나 정해진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성한이 말없이 퇴장한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수영, 수영에게 달려가는 영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는 보성과 지연.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진순의 손에 제압당한 채 씩씩거리는 수찬. 


수  찬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진  순

조용히 하지. 이래 봐야 소용없어. 소란 피워봤자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야.


영란이 수영을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간다. 잠시 후 진순이 진정한 듯한 수찬을 놓아준다. 진순은 한숨을 크게 쉬고 답답한지 밖으로 나간다. 수찬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가는 지연. 홀로 남아 있는 보성.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털썩 앉는다. 보성의 내면 속에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괴로워하는 보성. 


목소리1

사······ 살려줘.

목소리2

어서 쏘십시오. 어서. 쏘지 않으면 당신이 죽게 됩니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의 발사음과 동시에 총에 맞은 이의 신음. 괴로워하는 보성의 모습. 


목소리2

당신들이 죽인 겁니다. 살인을 도모한 거라구요. 이 모습은 모두 촬영되었습니다. 다들 봤지요?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곳은 천국 같은 곳입니다. 규칙만 잘 지켜주신다면 여러분은 계속 이곳에서 안락하고 평화롭게 생활하실 수 있습니다. 


두 귀를 감싸 쥐고 웅크리며 극도로 괴로워하는 보성. 암전.

어둠 속에서 휠체어가 지나가는 바퀴 소리와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온다. 소리가 사라질 때쯤 다시 작은 불빛이 보인다. 불빛을 들고 이곳, 저곳을 살피던 누군가가 휙 지나간다. 암전.


다음날. 거실. 영란이 피아노 앞에 앉아 마치 피아니스트인 양 신나게 피아노를 치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있는 지연. 그러나 소리 내어 깔깔대고 웃지는 못한다. 보성은 관심 없는 듯 책을 읽고 있다. 


지  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아이고 배야. 그만, 그만. 너무 웃겨서 못 참겠어.

영  란

제 연주 어땠어요, 여러분?

지  연

하하하! 진짜 너무 재밌어. 


이때 방에서 나오는 수영. 수영에게 달려가는 영란.


영  란

오빠. 괜찮아? 

수  영

(영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럼.

영  란

(수영을 끌어안으며)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나 진심으로 깨달았어. 이제 난 오빠 없인 안 될 것 같아.

보  성

놀고들 있네.

영  란

그쪽은 남 일에 신경 끄시구요.


수영이 영란이 낀 팔을 뺀다. 


수  영

(슬쩍 자리를 피하려 하며) 고마워. 내가 영란이 덕에 산다. 

영  란

뭐야?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수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주방 쪽을 향해 퇴장한다.


보  성

눈치도 없냐? 싫다는 거잖아.

영  란

뭐? 말도 안 돼. 오빠도 나 좋아한다고. 

보  성

공주병이냐? 도끼병이야? 

영  란

신경 끄라고 했다! 


이때, 방에서 나오는 수찬. 수찬을 보자 보성은 책 한 권을 들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수찬은 보성이 가져가는 책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수찬. 지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찬이 나간 쪽을 본다. 


영  란

저 아저씨 싫어. 하마터면 우리 오빠 큰일 날뻔했잖아.

지  연

수찬 씨도 너무 놀라서 그랬을 거야. 

영  란

그런데 언니랑 아저씨는 그 식사메이트인지 뭔지 정말 그것뿐이에요? 정말 그 이상도 아닌 only 식사메이트일 뿐이냐고요.

지  연

응, 그렇대도.      


성한이 쇼핑백을 들고 등장. 


성  한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죠? (쇼핑백을 지연에게 건네며) 아, 이건 유지연 씨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입니다.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들이 있을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지  연

감사합니다. 


영란이 쇼핑백을 낚아채 내용물을 꺼내본다. 명품 옷을 자기 몸에 대 보며,


영  란

와! 이거 진짜 끝내준다! 


이때, 수영이 차를 가지고 등장한다. 성한의 눈빛에 따라 차를 테이블에 셋팅한다.


성  한

허브티입니다. 향과 맛이 꽤 괜찮을 테니 드셔보시죠.

영  란

그런데 왜 맨 날 차만 줘요? 시원한 생맥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성  한

음주와 흡연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대신 최고급 차는 늘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즐기십시오. 


성한이 퇴장하면 성한이 나간 쪽을 쳐다보던 세 사람. 


영  란

장수하겠네, 장수하겠어. 술, 담배도 못 하게 하고 맨날 몸에 좋은 것만 실컷 먹여주니.

수  영

그래도 가끔 식사 시간에 와인은 주잖아. 그것도 최고급으로.

영  란

최고급인지 뭔지 내가 알 게 뭐야. 아니 그리고 무슨 규칙이 계속 늘어나는 것 같아. 조용히만 하면 뭐든 다해줄 것처럼 그러더니 은근히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안 된다. ’ 


갑자기 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  영

비가 오네! 진짜 오랜만에 온다.


이때, 현관문이 열리며 비에 젖은 진순이 옷을 털며 들어온다. 


지  연

어디 다녀오세요? 


진순이 슬쩍 지연을 쳐다보고는 대꾸하지 않고 지나쳐 방을 향해 간다. 


지  연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 날은 뜨끈한 방바닥에 배 깔고 드러누워서 김치부침개 먹으며 만화책 보기에 딱인데.

수  영

내가 만들어 줄게요. 작년에 제가 직접 담근 김장김치로!

영  란

오! 맛있겠다. 난 만화책 찾아와야지!


수영과 영란이 주방 쪽으로 퇴장. 두 사람을 바라보던 지연이 어느 한 곳을 주시하다 주방으로 같이 들어간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음향효과와 조명의 변화와 함께 며칠 후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보성이 책을 보고 있다. 수찬이 방에서 나와 책장으로 간다. 수찬이 나오자 보성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수  찬

책을 좋아하나 봐. 늘 책을 보는 것 같던데.

보  성

여기선 별로 제가 할 게 없으니까요. 다행히 책은 원 없이 볼 수 있죠. 


보성이 지나친다.


수  찬

여기 들어 온 지 꽤 된 것으로 아는데. 여기 생활에 만족해?

보  성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수  찬

왜 아무도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거지? 


보성이 놀라 수찬의 말에 주변을 살피다 수찬을 본다.


수  찬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 


보성이 천천히 수찬에게 다가온다.


보  성

(작은 소리로) 나갈 수 있었다면 나갔겠죠. 

수  찬

노력은 해봤다는 건가?


수찬이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낸다. 


보  성

기분은 이해하지만,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겁니다. 


보성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수  찬

그쪽이 주로 어떤 책을 읽는지 봤어.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봐. 


수찬이 보성에게 책을 건네면 보성이 수찬이 들고 있는 책을 얼떨결에 받아든다. 수찬이 주변을 살피며 퇴장한다. 수찬이 퇴장하면 보성이 책을 펼쳐 읽는다. 접어놓은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보성. 이때 반듯하게 갠 빨래와 수건 등을 들고 거실로 들어오는 성한. 성한이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책을 숨기는 보성. 성한이 지나가자 다시 책을 펼친다. 수영이 거실로 들어오며,


수  영

뭐 하고 있어? 안 자? 

보  성

(책을 덮으며)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자? 

수  영

(조심스럽게) 수찬 형님이랑 얘기를 좀 해봐야 되지 않을까?

보  성

······

수  영

이대로는 너무 위험하잖아. 또 지난번처럼······


수영의 말을 회피하듯 보성이 방으로 가려고 하면,


수  영

왜? 

보  성

피곤해서. 


보성이 방으로 가기 위해 퇴장하면 수영이 일어나 보성이 간 쪽을 쳐다본다. 이때 빨래를 두고 온 성한이 등장한다. 성한이 등장하면 수영이 목례를 하고 퇴장한다. 수영이 퇴장한 후 성한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어느 한 곳을 응시하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성  한

방마다 차를 가져다 놓았으니 아마 곧 잠들 것입니다. 오늘 밤도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성한이 고개 숙여 인사하면 암전. 

저택 밖, 계단에 앉아 있는 수찬과 지연.


수  찬

지낼만해요?

지  연

(미소를 지으며) 뭐 그럭저럭.

수  찬

그러고 보니 지연 씨는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요.

지  연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니까요. 수찬 씨는 이제 좀 괜찮아요? 

수  찬

(지연의 손을 잡으며) 여기서 한 가지 좋은 건 지연 씨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거.

지  연

(어딘가를 의식하며 손을 뺀다) 그러게요.


수찬이 지연의 머리를 쓸어준다. 


지  연

(피하며) 그런데 수찬 씨 요즘 무슨 생각해요?

수  찬

네? 왜요?

지  연

많이 바빠 보여서요.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는 수찬. 잠시 사이. 수찬, 뭔가 결심한 듯.


수  찬

(나직하게) 실은 제가 요즘 알아보고 있는 게 있어요. 


이때 비치가운 차림으로 집 안에서 나오는 영란. 


영  란

뭘 알아보시는 걸까? 지연이 언니 마음 알아보시나?


수찬과 지연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연이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간다. 

장난스럽게 웃는 영란. 이때 진순이 저택의 뒤편에서 등장한다. 


영  란

(기지개를 켜며) 아, 어쩜 이렇게 맨날 날씨가 좋냐.


수찬과 진순이 마주치자 냉랭한 기류가 흐른다. 


영  란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하듯) 나는 수영이나 하러 가야지.


영란, 급히 퇴장한다. 잠시 사이.


진  순

집이 커서 여기, 저기 구경할 곳도 많고 산책하기도 좋으니까 가끔 나오슈. 집 뒤에는 작은 산도 있고 저 앞바다에서는 낚시도 할 수 있으니까. 


잠시 사이.


수  찬

그때 왜 말리신 겁니까? 

진  순

자네가 사람을 죽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서라고 해두지.


사이.


진  순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수  찬

네?

진  순

자네는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진순과 수찬 사이에 냉랭하고 팽팽한 기운이 흐르다 진순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수  찬

왜죠? 

진  순

······?

수  찬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이유 말입니다.


진순이 수찬을 돌아본다. 


수  찬

왜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 거죠? 

진  순

여기를 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진순이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남은 수찬이 생각에 잠긴다. 

조명이 어두워지면 자장가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영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주변을 살피며 어디론가 가는 수영, 퇴장.



<제1막> -2장



조명 밝아지면 거실. 보성이 수찬이 준 책을 유심히 보고 있다. 수찬이 등장한다. 수찬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보성.


보  성

저, 이거. (책을 내민다.) 


수찬이 주변을 살짝 의식하면서 보성 곁으로 가서 책을 받는다. 


수  찬

봤어?  

보  성

네.

수  찬

어때? 동참할 생각이…….

보  성

불가능합니다. 

수  찬

왜 해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지? 

보  성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구요. 그만두시죠.


보성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수  찬

‘세상의 모든 눈’이라는 사진이 있어. 또 다른 눈. 어딘가에서 수 없이 많은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잠시 사이.


수  찬

지금 (강조하며) 현재,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 공간에 존재하는 눈만 200개가 넘어. 아마 훨씬 많을 거야.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어. 철저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보성이 수찬의 말에 놀란다. 그리고 수찬의 말을 들으며 뭔가를 생각한다.


수  찬

(조용하게) 하지만 모든 것에는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이야.       


이때 등장하는 성한. 당황한 두 사람은 성한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돌린다. 


수  찬

(어색하게) 그래서 사진은 각도가 중요하다고들 하지.

보  성

(약간 어색하나 티 나지 않게) 사진작가이신 줄 몰랐어요. 

수  찬

그쪽은 전공이 뭐야?

보  성

화학과요. 여기저기 취업 잘될 줄 알고 들어갔는데 취업 시험 준비만 몇 년째 하다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성  한

두 분 그새 아주 친해지셨나 보네요. 아주 보기 좋습니다.


보성과 수찬이 어색하게 웃는다. 성한이 복도를 향해 간다. 성한이 사라지면 안심하는 보성과 수찬.

이때, 등장하다가 멈칫하고 몸을 숨긴 채 수찬과 보성의 이야기를 엿듣는 수영.


수  찬

잘 한번 생각해 봐. 지금껏 어떤 시도를 해 봤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보  성

생각할 거 없습니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수  찬

억울하지도 않아? 여기 이렇게 납치돼서 꼼짝없이 지내는 게.  

보  성

전 납치된 게 아니에요. 

수  찬

뭐?   

보  성

기생충 취급받으며 7년간 취업을 준비하다 모든 걸 끝내려고 물에 뛰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요. 원했건 원치 않았건 나를 구해준 건 사실이니까. 납치를 당한 건 아니에요.

수  찬

그래서 계속 여기서 썩겠다고? 규칙인지 뭔지를 지키면서? 제대로 생각해.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건지.


수찬이 밖으로 나간다. 보성, 잠시 뒤 복도를 향해 퇴장한다. 

모두가 나간 무대, 진순이 등장하면 저택의 뒷산으로 전환. 진순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나무를 만져보기도 하고 뭔가를 찾는 듯하다. 진순이 일을 하다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 추억에 잠긴 듯 바라본다. 어느새 조용히 다가온 수찬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수  찬

여기 계셨네요?

진  순

(당황해서 사진을 감추며) 무슨 일인가?

수  찬

가족사진인가 봐요? 

진  순

가족 이야기를 할 정도로 우리가 친했었나?


잠시 사이.


수  찬

가족이 그리우시죠?

진  순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를걸.


잠시 동안의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수  찬

매일 어디를 다니시는 거예요? 다리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진  순

안 그러면 통증이 더 심해져. 이렇게 끊임없이 걸어 다니지 않았다면 지금쯤 불구가 됐을 거야.

수  찬

사고 당하신 건가요?

진  순

(끄덕인다.)

수  찬

무슨 일로.

진  순

자네 참 질문이 많군. 

수  찬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서로 잘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진  순

여기서 서로 잘 알아봤자 무슨 소용인가. (잠시 사이) 자네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만두게. 포기하라고.

수  찬

시도는 해보시고 포기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진  순

있었지. 

수  찬

네?

진  순

나가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어. 

수  찬

어떻게 됐어요? 

진  순

내가 말하지 않았나? 목숨을 걸어야 할 거라고. 그 자리에서 죽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지옥 같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해. 


진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진  순

자네가 계속 이러면 같이 지내는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거라고. 자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만 그냥 내려놓게. 그럼 여기도 지낼 만할 걸세.

수  찬

여기 생활에 만족하신다는 건가요?

진  순

세상일에 다 만족하면서 살 수는 없어.

수  찬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죠.

진  순

(참다못해 화가 치밀어)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한 말 못 알아들은 거야? 자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

수  찬

지금 당장 나가자는 거 아닙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시간을 투자해서 실행하자는 겁니다. 

진  순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걸 알아두게. 나 말고 또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녔지? 

수  찬

······

진  순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포기하게. 그리고 말조심하고. 여기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수  찬

아무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진순에게 건네며) 저택 내부 CCTV 위치에요. 야외에 설치된 CCTV 위치도 알아보고 있어요.


진순이 수찬의 손에 들려있는 지도를 내려다본다.


수  찬

형님이 도와주세요. 


진순, 고개를 들어 수찬을 쳐다본다. 서서히 암전. 

어둠 속에서 거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  란

언니, 결혼했어요? 하긴, 안 했으니까 식사메이트가 있는 거겠지? 

지  연

이혼했어. 아니, 이혼한 건 아니고. 

영  란

네?

지  연

이혼은 안 했지만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같이 살지도 않은지 오래 됐고. 

영  란

왜요?


조명 밝아지면 영란, 지연, 진순의 모습이 보인다. 진순은 책을 읽고 있다. 


지  연

(잠시 사이) 남편이 폭력적이었거든. 결혼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백팔십도 달라지더라고. 더이상 짐승처럼 맞고 살 수 없어서 집을 뛰쳐나왔는데 내가 가는 곳마다 그 인간이 쫓아왔어. 

영  란

경찰에 신고는 했어요?

지  연

소용없어. 남편은 가진 인맥과 재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빠져나왔으니까. 그렇게 힘들어할 때 식사메이트로 만난 사람이 수찬 씨야. 날 많이 도와줬지.


책을 보던 진순이 지연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지연을 쳐다본다.


지  연

(영란에게) 그런 영란이는 어쩌다ⵈⵈ?


이때 등장하는 보성. 


영  란

저요? (말끝을 흐리며) 전 뭐 그냥 이런저런 일 하다가. 그러고 보니 여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 같아요. 나중에는 연예인도 들어오겠어.


보성이 책을 한 권 골라 소파의 앉을 자리를 찾으면, 일어나는 진순. 

진순이 일어날 때 진순이 읽던 책 사이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이를 모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진순. 진순이 떨어뜨린 종이를 발견하는 보성. 진순을 부르려다 포기하고 종이를 슬쩍 보는 보성. 뭔가를 눈치채고 종이를 책 사이에 숨기고 방으로 퇴장.


지  연

그래도 여기 있으니까 좋은 것도 있네.

영  란

뭐가요? 

지  연

자유로워서.


이때 주방으로부터 등장하는 수영.


수  영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자유? 

지  연

네, 자유. 여기 있는 게 자유롭게 느껴진다고.

수  영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있는데 자유라니 재밌는데요.

지  연

나한테는 이런 순간도 자유야. 남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밖의 일은 잊고 지낼래. 

영  란

그래요, 인생 뭐 있어요! 이 순간을 즐기자고요.

지  연

지금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 


모두 작은 소리로 즐겁게 웃는다. 무대 어두워지고, 무대 다른 쪽 진순의 방. 진순과 보성.


보  성

(종이를 보이며) 이거.


진순이 흠칫 놀라 보성을 쳐다보면


보  성

이게 뭐죠? 

진  순

······

보  성

혹시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죠? 

진  순

(종이를 낚아채며) 아니야.

보  성

그럼 그게 대체 뭐냐고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진  순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네.

보  성

아무것도 아니라뇨? 전 아직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구요. 그날 형님도 똑똑히 보셨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보성이 간절한 눈빛으로 진순을 쳐다보다가 나가려고 한다.


진  순

나는······ 나는 여기서 평생 살다 늙어 죽으나, 나가다 잡혀서 죽으나 상관없는 사람일세.


보성이 진순을 본다.


진  순

그래서 굳이 다른 사람 손에 피 묻히는 짓까지 하면서 나갈 생각따위는 안 하네. 

보  성

그럼 그 종이는······

진  순

하지만 자네 같은 젊은 사람들은 여기서 평생을 썩어 지내기 인생이 억울하다는 생각 안 드나? 뭔가 확실한 방법만 있다면. 충동적으로 어설프게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시도해 볼 생각 있나?

보  성

그런 희망 없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됐어요. 아시잖아요? 전에 그 사람들도 지금 형님이 말씀하신 거랑 똑같이 말했다구요.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겪고 싶지 않아요.          

진  순

그 사람들과는 달라. 그들은 철저하게 계산하지 못했어. 

보  성

아뇨. 방법은 없어요. 

진  순

방법이 없을 리가 없어. 반드시 빈틈이 있을 거라고.

보  성

형님, 정신 차리세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지금 수찬 형님 때문에도 불안해 죽겠는데.


진순이 벌떡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더니 어느 공간으로 이동한다. 


진  순

이쪽으로. 


영문을 모르는 보성이 진순이 있는 쪽으로 간다. 


진  순

(종이를 펼쳐 보이며) 이거 보게. 이 집안에 설치된 CCTV 위치야. 200개가 넘네. 아마도 더 있겠지. 수찬이 그 친구가 이걸 내게 주고 갔네. 뭔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는 것 같네. 

보  성

수찬 형님이 얼마 전에 저한테도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CCTV 위치만으로 뭘 어쩌자고요?

진  순

빈틈을 찾아보자는 거지. 나도 절대 안 된다고 했네. 하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살면서 단 한 번도 용기 있게 살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세상을 탓하고, 남들을 탓하고, 자신을 탓하면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숨으려고만 했었지.   

보  성

형님, 이건 용기가 아니라 목숨을 건 도박이에요.

진  순

사고로 다리를 잃을 뻔했을 때 난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산으로 들어갔네.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니었어. 세상이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내가 꼭꼭 숨어 버린 거야. 나 혼자 살아 보겠다고 가족도 등진 채 말이지. 그렇게 겁쟁이처럼 숨어 살다가 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곳에 왔네. 속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차피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인생 어디서 죽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네. 하지만 여기서 평생 살다 죽는다면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어차피 한번 죽을 인생이라면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고 미안해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하잖아.  

보  성

······

진  순

자네 같은 젊은이들을 위한 거네. 내가 도울 걸세. 나는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아니, 그래. 나도 나가고 싶네. 이 감옥 아닌 감옥에서 자유를 위장한 가식적인 평온에 숨이 막혀 죽느니 차라리 나가고 싶다고. 

보  성

하지만······

진  순

가족이 보고 싶어. 그동안 내 마음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 집 주변을 살피면서 이곳을 탈출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스스로 확인하고 있었네. 하지만 확실한 방법만 있다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진순과 보성이 마주본다. 조명 어두워지면 무대 다른 쪽 수찬의 방. 어둠 속에 남자의 구역질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명이 밝아지면 욕실 안에서 나오는 수찬. 밖에 서서 찻잔을 들고 수찬을 기다리던 성한과 마주친다. 수찬이 흠칫 놀란다. 


성  한

(의심의 눈초리로) 속이 불편하신가요? 속을 안정시켜주는 매실차입니다. (차를 내밀며) 드시죠.

수  찬

아······ 예. (잔을 받아들며) 감사합니다.


수찬이 찻잔을 받아들면,


성  한

지금 드시지요. 

수  찬

······?

성  한

(웃으면서) 제가 보는 앞에서요. 속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성한의 말에 수찬이 머뭇거린다. 잠깐 동안의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있다가 수찬이 차를 마신다. 


성  한

준비해 드리는 식사와 차가 입에 안 맞으신가 보죠? 

수  찬

아, 아닙니다. 

성  한

습관적인 구토는 몸에 좋지 않습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수  찬

 ······예.


수찬에게서 다 마신 찻잔을 받아들고 성한이 방을 나가면 성한이 나간 곳을 쳐다보던 수찬이 비틀거린다.

거실. 보성이 책을 읽고 있다. 밖에서 골프복차림으로 들어오는 영란과 수영. 골프 장비를 들고 있다. 


수  영

갈수록 실력이 느는데. 

영  란

정말? 골프가 이렇게 재밌는 건 줄 몰랐어. 부자들이나 하는 시시한 운동인 줄 알았더니. 내가 이런 최고급 골프채로 볼을 칠 줄 누가 알았겠어?

보  성

그래서. 좋냐?

영  란

당연히 좋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싫을 리가 있겠어? 

보  성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 착각하지 마. 그런다고 네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영  란

왜?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밖에서는 그저 그런 오영란으로 영원히 살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달라질 수 있다, 뭐. (보성에게 다가가 책을 빼앗으며) 오빠도 좀 누리지 그래? 맨날 책만 파먹지 말고. 2층 테라스 큰 욕실 내가 쓴다! (나가려다 수영에게) 오빠, 우리 씻고 게임 할래? 새 게임 들어왔던데.

수  영

그럴까?


영란 퇴장. 


보  성

참, 둘은 어지간히 붙어 다니네. 사귈 것도 아니면서. 

수  영

왜? 질투나? 

보  성

누가 누굴 질투한다는 거야? 


수영이 웃으며 가려는데 방으로부터 나오는 진순. 진순이 보성을 쳐다보고 밖으로 나간다. 보성이 읽고 있던 책을 가지고 진순을 따라 나가면 수영이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다 주방으로 향한다.



저택 밖 어딘가. 수찬이 설계도를 펼쳐놓고 저택의 주변을 여기저기 살피며 설계도에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리자 설계도를 황급히 치우는 수찬. 진순과 보성이 나타난다. 그제야 안심하는 수찬. 진순과 보성, 수찬이 CCTV를 의식하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려고 하며,


수  찬

오셨어요?

진  순

여기 확실하지?

수  찬

네. 형님이 알려주신 건물 밖을 다 뒤져봤어요. 여긴 안전해요. 

진  순

좀 알아본 건 있나?

수  찬

카메라 위치는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사각지대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경로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게 어느 지점에서 막힌다는 건데 (한숨) 더 찾아볼게요.

진  순

쉽지 않을 걸세. 막히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닐 거야. 이렇게 어느 정도의 동선은 허락되지만 저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 

수  찬

전에 나가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나가려고 했었죠?

진  순

산으로 가면 바다로 바로 통하는 동굴이 있네. 거기서 바다를 통해 탈출을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한 사람은 곧바로 바다로 들어갔지만 죽은 채 발견됐어. 분명한 건 여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감시하는 수단이 많다는 거야. 

수  찬

들어온 이상 나갈 수 없다······ 대체 왜 우리인 거지? 


잠시 사이.


수  찬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의무적으로 차를 마시도록 종용한다······ 큰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 

진  순

자네가 알아보라고 한 거 말이야. 아무래도 홉인 것 같네. 수면 유도 효과와 신경 진정 효과가 있어서 불안증이나 불면증에 약물로 쓰이는 재료지. 뒷산에서도 자라고 있더군. 

수  찬

하지만 그 정도 차 성분으로 이렇게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기는 힘들지 않아요? 특히 저녁에 주는 차를 마시면 한번 잠들면 다들 아침까지 깨지도 않더라구요. 

진  순

자넨 그걸 어떻게 아나? 

수  찬

여기 온 이후 한동안 차를 마시지 않았어요. 마시더라도 바로 토했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차를 마신 날은 저 또한 바로 잠이 들더라구요.

보  성

약물을 사용하는 거 아닐까요? (책을 펼쳐 보이며) 벤조다이제핀 계열 중에서도 트라조돈이라고 항우울제로 쓰이는 약이 있는데, 수면 유도와 수면 유지효과를 동시에 가져오는 약이거든요.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도 아니고요. 아니면 졸피뎀 성분을 의심해 볼 수도 있구요.

진  순

우리가 잠든 사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보  성

그렇다면 우리가 먹는 음식도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영이 형이 우리 중 유일하게 주방에서 음식 준비를 돕고 있으니까 뭔가 아는 게 있을지도.

수  찬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주지 않았겠어? 

보  성

제가 형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수  찬

괜찮을까? 그 친구는 나가고자 하는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보  성

적어도 우리가 도모하는 일을 발설하지는 않을 거예요. 

진  순

그래도 조심하게. 아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조명 서서히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 성한의 모습. 저택 안 어딘가를 응시하며,


성  한

현재 4명을 통해 실험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중 한 명은 반응을 보이지 않아 실험 대상에서 제외 시키기로 했습니다.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새로 온 대상자는 아직 실험을 못 한 상태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성한이 목례를 하면 암전. 어둠 속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방으로부터 나온다. 수영이 랜턴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어디론가로 향한다. 수영의 랜턴 불빛이 사라질 때쯤 무대 한쪽에서 수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진순의 모습이 보인다. 

수찬의 방. 어둠 속에서 수찬의 목소리가 들린다. 


수  찬

당신 누구야? 대체 나한테 뭐 하는 거야?


방의 불이 켜지면 한 손에 주사기를 들고 있는 지연이 수찬에게 손목이 잡혀있다. 


수  찬

(몹시 놀라) 당신······ 당신이 왜?

지  연

(당황하여) 그게······


지연이 들고 있던 주사기가 떨어지고 그 주사기를 수찬이 재빨리 집어 든다. 


수  찬

(지연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지  연

······

수  찬

(흥분하여 고함을 치며) 씨팔! (지연을 잡고 흔들며) 얘기하라고! 

지  연

수찬 씨,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수  찬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수찬이, 지연을 끌고 밖으로 나가 CCTV가 있는 곳 앞에 선다. 지연이 목을 잡고 주사기를 지연이 목에 갖다 대며 CCTV를 향해


수  찬

보고 있어? 니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지금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이 여자,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야. 


수찬, 지연의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젖히고 주사기를 더 위협적으로 갖다 댄다.


수  찬

이 여자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야. (지연에게) 누가 시켰어? 애당초 한패였던 거야? 대답해! 


이때 성한의 목소리가 들린다. 


성  한

좀 늦었습니다.


성한은 수찬의 뒤에 서 있다. 그리고 수찬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멈칫하는 수찬. 음악과 함께 암전.



<제2막> - 1장



조명 밝아지면 거실에 모여 있는 수영, 보성, 영란, 진순, 지연. 아무도 말이 없다. 긴 침묵.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영란.


수  영

어디 밖에 있는 거 아닐까요?

보  성

다 찾아봤어요.

진  순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곳 말고 더 갈 곳이 어디 있겠어. 

보  성

우리가 모르는 곳이라면 모를까.  


보성의 말에 진순이 놀라고, 사람들 역시 보성을 쳐다본다. 


수  영

그게 무슨 소리야?


잠시 사이. 진순이 보성에게 다가가 눈짓을 한 후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지  연

두 사람 어디 가게요?

진  순

여기 이렇게 모여 있는다고 사라진 사람이 갑자기 나타날 것도 아니잖아. 

수  영

그래도 사람이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할 지 다 같이 얘기라도 나눠봐야······

진  순

무슨 얘기? 우리가 무슨 해결책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림없어. 이곳에서 우리 목숨은 개미 목숨보다 못하다고.      


진순과 보성이 밖으로 나간다. 영란이 어딘가 불편해한다. 


수  영

너 어디 아파? 왜 그래?

영  란

아무것도 아니야. (일어서며) 나 좀 쉬어야겠어.

지  연

(잠시 사이) 나도 방에 가 있을게요.


영란과 지연이 퇴장하면, 수영이 혼자 남아 공간의 여기저기를 살피다 털석 주저앉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성한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한을 발견한 수영이 놀라 벌떡 일어난다. 성한이 눈짓을 하면 성한을 따라 식당 쪽으로 사라지는 수영. 

무대 다른 쪽. 진순과 보성.


진  순

수영이 그 친구한테 물어봤나?

보  성

아뇨. 기회가 없어서 아직.

진  순

잘했네. 그 친구 조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

보  성

형이요? 어떤······

진  순

밤에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몇 번 봤네. 집사하고 같이. 

보  성

예? 

진  순

아무튼 당분간 수영이 그 친구,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진순의 말에 보성이 생각에 잠긴다. 잠시 사이.   


보  성

수찬 형님은 괜찮을까요?

진  순

알 수 없지. 우리가 여기 잡혀 온 이유처럼. 하나같이 다 알 수 없는 것들뿐이야. 

보  성

(갑자기 떠오른 듯 팔을 걷어 올리며) 저, 이거 좀 보세요. 

진  순

(보성의 팔을 들여다보며) 이게 다 뭔가?

보  성

여기 오고부터 계속 생기는 자국이에요. 형님도 한 번 보세요.


진순도 팔을 걷어본다. 진순의 팔에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진  순

난 없는 것 같은데.

보  성

(진순의 팔을 살피며) 아니요. 형님도 있어요. 자국이 오래돼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주삿바늘 자국 같아요. 

진  순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우리 몸을 가지고 뭔가를 한다는 건데. 

보  성

피를 뽑았다면 혈액으로 뭔가를 검사하거나 연구하는 걸 거예요. 그리고 뭔가를 주입하는 거라면 우리 몸 자체를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거겠죠.

진  순

역시 뭔가가 있어. 아무 이유 없이 여기 가둬놓은 게 아니야.

보  성

그렇다면 수찬 형님은ⵈⵈ.


잠시 사이.


진  순

일단 상황을 보자구. 이럴 때일수록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돼.


보성과 진순 퇴장.

조명 어두워지면 밤.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던 수영, 보성과 마주친다. 놀라는 수영과 보성. 


보  성

형.

수  영

안자고 무슨 일이야?

보  성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 쉬어. 


보성이 가려는데,


수  영

너 괜찮아?

보  성

그럼. 그러는 형은 괜찮아?

수  영

나?

보  성

식은땀 좀 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수  영

(땀을 닦으며) 아니.  

보  성

그래, 그럼. 


보성이 돌아서려다 수영을 다시 쳐다본다. 


수  영

왜 그래? 뭐 할 얘기 있어? 


보성이 말없이 다시 돌아선다. 수영이 보성의 팔을 잡는다.


수  영

잠깐. 너 뭐 있지? 

보  성

뭐가.

수  영

혹시 위험한 생각하는 거야? 

보  성

(뿌리치며) 이거 놔. 아무것도 아니야.

수  영

대체 왜 그래? 정신 차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그냥 조용히 지내던 대로 지내. 그게 가장 안전해. 

보  성

형은 뭐 알고 있지? 

수  영

무슨 소리야?

보  성

밤마다 어딜 가는 거야? 

수  영

(놀라며) 그······ 그게 무······ 무슨······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보  성

수찬 형님 어디 있어?

수  영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보  성

말해. 형이 알고 있는 것들.

수  영

······ 

보  성

설마 저들하고 한패가 된 거야? 

수  영

아니야, 그런 거. 내가 어떻게 그래. 다만 그날 있었던 지옥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보  성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수  영

너, 괜히 의심받을 짓 하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있어. 저들이 다 보고 있어. 조심해. 

보  성

형 분명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잖아.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수  영

······  

보  성

(수영을 위협하며) 말해.    

수  영

오해하지 마. 난 다만 이곳에서 지금처럼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야.

보  성

뭐? 

수  영

어차피 여길 나가봤자 난 틀렸어. 자신 없어.

보  성

그날 일 때문이야? 나도 그런 지옥 같은 일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렇게 저들의 손아귀에 붙잡혀서 평생 살 수는 없잖아.

수  영

그렇다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나가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 저들이 그렇게 둘 것 같아? 살인, 살인 방조, 교사. 지난번 그 일이 우릴 범죄자로 만들어 버렸다고.

보  성

······  

수  영

서로 못 들은 거로 하자. 가서 자. 


수영이 방으로 들어가면 음악과 함께 서서히 암전. 

밤. 아무도 없는 저택의 거실. 누군가 방에서 나오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보인다. 불빛이 어딘가로 향하면 또 다른 불빛이 그 불빛을 따라간다. 

조명 밝아지면 며칠 후. 거실. 모여 있는 지연, 영란, 수영, 보성, 진순.


영  란

벌써 일주일째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진  순

어딘가에 있겠지.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아니면 정말 죽었거나.

수  영

다들 그런 무서운 얘기 하지 말아요. 

영  란

혹시 수찬 아저씨가 규칙을 어겼나? 그래서······ 


수영이 보성을 쳐다본다. 보성과 진순이 눈빛을 교환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지연. 


영  란

(팔을 긁으며) 규칙을 어기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왜 말해주지 않았지? 

지  연

왜 자꾸 죽었다고 생각해. 무사할 거야. 걱정하지 마.


영란이 계속 팔을 긁자 보성이 영란의 팔을 붙잡고 옷을 걷어 올린다.


영  란

뭐 하는 거야?

보  성

가만있어 봐. (팔을 확인하고는) 역시. 


진순도 함께 영란의 팔을 보고 보성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영란이 팔을 뿌리치며,


영  란

왜 이래? 미쳤어?


보성이 수영의 팔도 확인한다. 


수  영

뭐야? 


보성과 진순이 지연의 팔도 확인하려고 하자, 지연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친다. 


진  순

팔 좀 잠깐 보여주겠나?

지  연

네? 

진  순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지  연

······


순간 지연이 의심스럽게 느껴진 보성이 지연의 팔을 걷어 올리려고 한다. 


지  연

(뒷걸음치며) 왜 그러세요? 

보  성

걷어보시라고요.


지연의 행동에 나머지 사람들도 지연을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지연이 천천히 팔을 

걷어 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데. 이때 차를 들고 등장하는 성한. 


성  한

(싸늘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무슨 일이십니까? 상당히 소란스러우시네요. 


성한의 등장에 모두 흠칫 놀란다. 


영  란

수찬 아저씨 어디 있어요?

성  한

모른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영  란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분이잖아요. 이 집에서 사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성  한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모릅니다.

영  란

설마 죽인 건 아니죠?

성  한

차들 한 잔씩 하시죠.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한이 퇴장하면 각자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모습. 영란이 차를 마시려고 한다.


보  성

(찻잔을 빼앗으며) 마시지 마.

영  란

왜 이래? 진짜 짜증 나게. 

보  성

마시지 말라면 좀 마시지 말라고!

진  순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살고 싶다면.

영  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차를 마시면 죽는다는 거야?


보성이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간다. 


영  란

무슨 소리냐니까?

수  영

진정해. 

영  란

다들 이상해. 다 미친 것 같다고.


영란이 방으로 들어간다. 수영도 영란을 따라 들어간다. 지연과 진순이 남아 있다. 

진순이 지연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간다. 홀로 남은 지연이 그제야 안심하듯 큰 숨을 쉰다. 

무대 다른 쪽, 성한의 실루엣.


성  한

다들 뭔가 낌새를 눈치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실험도 제대로 끝내지 못할 수가······ 예? 예. 처리하겠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지연.


지  연

호출 받고 왔어요.

성  한

처리하라고 하시네.

지  연

(당황하며) 네?

성  한

계획대로 진행되기 힘들 것 같으니 일단 지시대로 신속하게 처리합시다.

지  연

이러다간 제가 의심받게 생겼어요. 

성  한

그러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처리하라고 하지 않았소?

지  연

만약 이런 상황에서 같이 있던 사람이 죽었다고 알려지면 일은 더 커질게······

성  한

(지연의 어깨를 붙잡으며) 정신 똑바로 차려. 당신이나 나나 여기서 이 짓거리 하는 이유, 그거 하나만 생각하라고. 

지  연

저도 알아요. 그런데 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일만 계속······

성  한

(더 강하게 지연을 붙들며 간절하게) 난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이길 밖에 없다고. 당신도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잖아. 우리가 흔들리면 안 돼. 어차피 우리 둘다 여기서 살아서 나갈 길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성한이 초조한 표정으로 퇴장하고 지연이 어딘지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다 퇴장한다. 무대 다른 공간에 진순과 보성의 모습이 보인다. 


진  순

뭔가를 하나씩 알아갈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야. 누구를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보  성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  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  성

의심이 가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진  순

수영이랑 지연이라는 여자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 

보  성

······

진  순

지연이라는 여자는 팔을 확인할 때 눈빛이 흔들렸다고. 숨길 수 없는게 사람의 눈빛이야. 


잠시 사이. 


보  성

수찬 형님은 정말 괜찮을까요?

진  순

모르지. 하지만 아직 그들이 수찬 그 친구에게서 얻으려는 게 남아 있다면 무사할 거네. (자신의 팔을 의식하며) 이곳에서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보  성

······


사이.


진  순

내일부터는 움직여야 할 것 같네. 수찬이 그 친구가 조사한 곳을 토대로 집 안 구석구석을 조사해야겠어. 

보  성

위험할 텐데 괜찮을까요?

진  순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당하느니 뭐라도 하다 죽는 게 낫지. 


무대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엿듣고 있는 수영의 모습이 보인다. 

무대 다른 쪽, 성한의 방. 음악을 틀어놓고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고 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영란.


성  한

무슨 일이지? 이렇게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영  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천국이라면서요. 

성  한

그래서?

영  란

그런데 이게 다 뭐냐고요? 이러려고 데리고 왔어요?

성  한

(일어나며)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널 데리고 온 게 아니라 네가 네 발로 온 거지. 안 그래? 

영  란

난자만 채취하게 해주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게 해주겠다면서요. 아무 일 없이.

성  한

그래서 아무 일 없잖아. 

영  란

사람이 없어졌잖아요. 어쨌어요? 죽였어요? 

성  한

언제부터 그렇게 오지랖이 넓었어? 여기 네발로 기어들어 온 이상, 너도 우리한테 협조해야 되는 사람이야. 

영  란

무슨 협조? 나를 속인 건 그쪽이 먼저라고.

성  한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으려고 하면 안 되지. (영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기억 안 나?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머리에 피도 마르기 전부터 사기에, 살인에. 온갖 전과로 너덜너덜하게 쫓기며 살고 있던 너를 이렇게 좋은 곳에서 아무 대가 없이 살게 해주고 있는데 뭐? (영란의 머리를 밀치며) 속였다고? 이런 건방진 년! 온전히 목숨 건사하면서 계속 지금의 오영란으로 살고 싶으면 까불지 말고 조용히 있으란 말이야.


성한이 방을 나가려는데.


영  란

아저씨도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보죠? 아저씨도 길바닥에서 거지처럼 살던 사람이었다면서요. 주제를 알아야지. 같은 처지끼리 마치 주인이라도 된 듯 행동하지 말란 말이에요. 당신 자식을 저들이 제대로 건사해 줄 거라고 믿어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당신도 나랑 똑같아!


성한이 영란의 뺨을 때린다. 


성  한

미친년!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면 안 되는 거라고 하는 거야.


성한이 방을 나가고 영란이 억지로 분을 참고 있다. 암전. 

다음날. 거실에 모여 있는 수영, 진순, 보성.


수  영

영란이가 하루 종일 안 보이네. 

보  성

그러게. 종일 밥도 안 먹고. 또 어디 아픈가?


수영이 일어난다. 이때 등장하는 성한.


성  한

오늘은 남성분들 세분이 거실에 모여계시네요. 

수  영

혹시 영란이 어디 아픈가요?

성  한

영란 씨가 이번 일로 인해 적잖은 충격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같이 지내던 사람이 없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죠. 별일 없을 거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기분이 안 좋은지 혼자 있고 싶다고 하네요.

수  영

제가 한 번 얘기해 볼게요.

성  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답니다. 혼자 있게 두시죠.


성한이 수영에게 눈짓을 하자 순순히 자리에 앉는 수영. 그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진순.


보  성

저기, 애가 종일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성  한

때에 맞춰서 제가 식사를 챙겨드리고 있습니다.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 있잖아요. 너무 걱정들 마십시오. 뭐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모두 말이 없다. 


성  한

그럼 편히 쉬십시오. 오늘은 참 평화로운 하루군요. (퇴장)

진  순

유지연 그 여자는 어디 있어?

보  성

모르겠어요. 종일 안 보이던데요.


수영이 일어나 가려고 할 때,


진  순

자넨 어디 가나?

수  영

예?

진  순

어디 가냐고.

수  영

그냥 방에요.

진  순

얘기 좀 하지.


진순이 수영을 데리고 나간다. 보성도 주변을 살피며 따라 나간다. 



무대 다른 쪽 온몸이 결박된 채 몸부림치고 있는 수찬의 모습이 보인다. 소리치지만 결박되어있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잠시 후 여자의 실루엣이 살짝 보인다. 여자를 발견한 수찬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몸부림치며 소리친다. 


건물 밖. 진순, 보성 그리고 수영. 진순이 수영을 가까이서 붙잡고 있고 보성은 주변을 살핀다.


진  순

(위협적으로) 알고 있네. 자네도 이 집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

수  영

네? 


수영이 보성을 쳐다본다. 보성이 고개를 숙인다.


진  순

속일 생각 말게. 밤마다 자네가 어디론가 몰래 가는 걸 봤어. 

수  영

그건······

진  순

따라 가보려 했지만, 집사가 지키고 있어서 실패했지.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보  성

형, 얘기해줘. 이 집에 있는 이상 우리 모두 안전하지 않아.

수  영

나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진  순

(흥분하여 수영의 멱살을 잡고) 그러니까 대체 시키는 대로 뭘 하는 거냐고? 결국 저들하고 한패였다니.

수  영

무서워서.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날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나도 여기 있는 누군가에 의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진  순

그래서? 네 발로 저들 편에 서기를 자처한 거야? 

수  영

······

진  순

대체 저들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 뭐냐고? 


진순이 더 폭력적으로 수영을 붙들며


진  순

어서 말해! 말하라고! 

보  성

(진순을 저지시키며) 형님. 


진순이 수영을 놓아준다. 


진  순

같은 일을 겪었어도 이렇게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니. (수영에게) 네 놈은 네 목숨 하나만 중하지? 여기서 이렇게 똑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하냐고.

수  영

시키는 대로 하면 같이 있는 사람들의 안전도 보장해 준다고 했어요.

진  순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보  성

수영이 형은 제가 죽을까 봐 사람까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에요. 분명히 악의를 품고 행동할 사람은 아니에요.

진  순

아니, 이 집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수  영

이 집에는 우리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보성과 진순이 수영의 말에 집중한다. 


수  영

밤에 제가 가는 방에는 아무도 없지만. 그 방에 있는 저를 보고 있는 존재가 있어요.

보  성

그게 무슨 소리야?

수  영

나는 밤에 환자식을 만들어서 어디론가 가야 해. 환자식은 집사에게 전달해 주고. 난 그 방안에서 혼자 동화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야 해. 그럼 누군가가 내 모습을 지켜보는 거고. 그 사람이 잠이 들었다는 신호를 받으면 방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가.


수영의 뜻밖의 말에 놀란 진순과 보성. 잠시 사이. 


보  성

형, 그 방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수  영

지하. 그리고 어디론가 오랫동안 걸어갔어.

진  순

가는 길을 말해 줄 수 있겠나?

수  영

(망설이다) 두 사람,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일이에요. 

보  성

누군가가 있고 그자를 위해 우리를 감금해놓은 것이라면 우리 몸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개연성이 들어맞아. 어쩌면 우리가 그 자를 위한 실험 대상일 수 있어. (수영에게) 형, 내 생각에는 이대로 여기 계속 있다가는 실험 도구가 돼서 죽임을 당할 게 분명해. 그전에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진  순

이런 젠장할!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들. 이 많은 사람들을 가둬놓고 실험을 해? 

수  영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집에 있을지도 몰라요. 지하에 내려갔을 때 인기척을 들은 것 같았어요.

보  성

그럼 우리 말고도 실험 대상으로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가?

수  영

그건 모르겠어. 

진  순

대체 이 집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지금까지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수영에게) 지하로 가는 길을 알려주게.

수  영

······

보  성

형, 말해줘. 수찬 형님도 구하고, 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자.

수  영

설명하기 힘들어. 눈을 가리고 내려가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거든.

진  순

그래도 얘기해주게. 이대로 있을 시간이 없어. 

수  영

그럼 지하 방으로 갈 때 어떻게든 제가 수찬 형님을 찾아볼게요. 

진  순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수  영

어떻게 하면 믿으시겠어요? 


잠시 사이.


진  순

내가 같이 가지. 

수  영

위험해요. 감시카메라에 바로 찍힌다구요.

진  순

방법이 있을 거야. 의심받지 않을 만한 방법. 

보  성

무슨 실험을 하는 건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수  영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내가 그 방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이 방금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준비한 밥을 먹고 내가 노는 모습을 보다가 다시 잠들기까지 늘 한두 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아.

진  순

오늘 밤에도 그 방에 가나?


수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  순

내가 같이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지.

보  성

방법이 있을까요?

진  순

CCTV 설계도를 좀 들여다봐야겠어. 


진순이 퇴장한다. 보성이 수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가려 할 때,


수  영

도와줄게. 두 사람이 계획하는 거 내가 도울게. 

보  성

같이 나가자, 형.

수  영

아니, 난 나가진 않을 거야. 나는 여기 있겠어.

보  성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래? 형 두고 안 나가. 

수  영

난 바깥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더 두려워. 

보  성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수  영

나가면 다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도 없는걸. 사기에 마약에 변태 성욕자로 대중에게 낙인찍힌 순간 내 인생은 이미 끝났어.

보  성

형 잘못이 아니었잖아. 누명 쓴 거라며.

수  영

누가 내가 하는 말 따위 믿어줄 것 같아?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수영 퇴장. 보성이 홀로 남아 잠시 생각한 후 뒤따라 퇴장한다. 

무대 다른 쪽 성한의 모습.


성  한

지시하신 대로 오늘 밤 처리하겠습니다. 실험군에서 제외된 실험자도 마찬가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병원에 추가 실험 대상자 목록을 신청해 놓았으니 연락이 오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제2막> - 2장



음악. 어둠 속. 어린 여자아이의 힘없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불빛이 보이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불빛이 도착한 곳에서 보이는 수영의 실루엣. 그 옆의 진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조명이 밝아지면 어느 방. 수찬이 온몸이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상태이고, 지연이 수찬을 죽이기 위한 주사를 놓으려 하고 있다. 이때 들이닥치는 수영과 진순. 놀란 지연. 진순이 재빨리 지연의 팔을 제압하고 주사기를 빼앗는다.


수  영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진  순

이게 네 본 모습이었군. 그동안 감쪽같이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야?

지  연

이거 놔. 

수  영

어떻게 이럴 수가······ 

진  순

언제부터야? 처음부터 네가 다 꾸민 일이야? 

지  연

나도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거 놔. 왜? 장수영 너도 그랬잖아. 시키면 시키는 대로. 너나 나나 똑같아.

수  영

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  연

이거 놔!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이렇게 망칠 수 없어.

진  순

돈이야? 돈 때문이냐고? 그깟 돈 때문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대하듯 하는 거야? 


진순이 지연을 결박한다. 


진  순

(수영에게) 뭐 하고 있어? 수찬이 데리고 얼른 나가. 


수영이 수찬을 데리고 나가려는데 성한이 가로막는다. 


성  한

어딜 가려고? 


이때, 진순이 성한을 가격한 뒤 들고 있던 주사기를 성한의 목덜미에 찌른다. 성한이 힘없이 쓰러지면 성한이 떨어뜨린 총을 주워들고 지연을 끌고 나간다. 수영은 수찬을 데리고 나간다. 


무대. 거실로 전환. 어둠 속에서 서성이던 보성. 진순과 수영을 발견한다. 진순이 지연을, 수영이 수찬을 데리고 등장한다. 수영이 수찬을 소파에 앉히고 보성이 정신을 차리도록 수찬의 얼굴을 두드린다. 진순은 팽개치듯 지연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보  성

어떻게 된 일이죠?

진  순

이 여자가 수찬이에게 뭔가 주사를 하려고 하고 있었어. (지연에게) 뭘 주사하려고 했던 거지? 

지  연

······


진순이 지연의 머리채를 잡으며,


진  순

어서 말하라고.

지  연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진  순

미친년.


이때 등장하는 영란, 벌어진 상황을 보고 놀란다.


수  영

시간이 없어. 집사가 곧 깨어날 거야. 

영  란

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보  성

설명할 시간이 없어. 여길 빨리 빠져나가야 해. 

지  연

(웃으며) 여기를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진  순

닥쳐! 이 여자는 우리처럼 납치된 게 아니야. 우리 같은 피해자로 위장을 한 거지. 그동안 우리가 멍청하게 속은 거야. 

보  성

대체 왜, 왜 우리를 실험하는 거지? 원하는 게 뭐야? 

영  란

실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  영

빨리 여기서 나가세요. 서둘러야 해요. 

보  성

그래요. 감시카메라 전선을 몇 곳 끊어 놓아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지  연

어림없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깨어나는 수찬. 


수  영

괜찮아요? 

보  성

형님, 정신 차려 봐요. 

수  찬

여기서 나가야 해. 여기 있으면 다 죽어.

진  순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한 거야?

수  찬

우린 실험실의 쥐처럼 저들에게 실험당하고 있었던 거야. 다른 시체들도 있었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시체들한테서 살을 도려내고 장기를 꺼내는 걸 봤어.

지  연

너희가 여기서 누렸던 모든 것들이 다 공짜였다고 생각해? 그런 건 없어! 

진  순

(지연의 멱살을 잡으며) 대체 무엇 때문이야? 왜 하필 우리들이냐고?

지  연

당신들은 선택받은 거지. 모두 같은 혈액형, 같은 항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여기 다 모이게 된 거야.

보  성

그런 정보는 어디서 알고.

지  연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인 거 몰라? 

수  찬

한국병원! 저년이 한국병원 간호사야. 우리 정보를 돈으로 빼내서 이리로 납치해 온 거야. 납치해 와서는 실험을 하다가 실험 대상으로 의미가 없어지면 죽여버리고 장기를 꺼내 한국병원에 조달하고 있어.


모두 충격에 휩싸인다. 


보  성

한국병원이면 나도 가본 적이 있는데. 

수  영

나도. 

진  순

내가 입원해 있던 곳이 거기야.

수  찬

아마도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한국병원에 신체 정보를 남긴 사람들일 거야. 

수  영

서둘러요. 집사가 곧 올 거야. 

지  연

소용없다고. 너희들은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문밖을 나가는 순간 죽게 될 거니까. 


수찬이 지연에게 달려들며,


수  찬

닥쳐! 이런 미친. 어떻게 네가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지  연

나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수찬이 분노에 소리치며 지연을 흔든다. 이때, 권총을 들고 등장하는 성한.


성  한

이런 식으로 규칙을 깨시겠다.

진  순

(총으로 성한을 겨냥하며) 아직도 규칙 타령이야? 

성  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규칙을 지키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옥이 될 거라고. 첫째, 정숙할 것. 둘째, 탈출하려 하지 말 것.

보  성

(떠오른 듯) 그래, 로스토프 증후군. 


모두 보성을 본다.


보  성

그거였어. 조용히 하라는 이유. 일백만 명 중에 한 명이 걸린다는 희귀한 병. 그 병에 걸린 사람은 하루에 2시간밖에 깨어있을 수 없어. 22시간 이상을 자야 해. 깨어서 근육을 조금이라도 쓰게 되면 죽게 되는 병이야.  

성  한

역시 영특하군.

보  성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이상했어. 왜 우리는 수면유도제가 든 차를 먹고 일찍 잠들어야 하고 이 집에서는 왜 큰소리를 내면 안 되는지. (팔을 걷는다) 이 자국. (성한을 보며) 그리고 항체를 찾고 실험하고 연구하는 너희들. 이 집 어딘가에는 그 병을 앓고 있는, 어떤 한 인간이 있을 거야. 그 인간이 22시간을 자야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거고. 왜? 그러지 않으면 그 인간이 죽으니까. 씨발! 근데 왜 누군지도 모르는 그 인간 때문에 우리가 이 감옥같은 곳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보성이 분노하며 소리친다. 영란이 허무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영란을 부축하는 수영. 성한이 보성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진순은 성한을 향해 총을 겨눈다.


성  한

조용히 해. 어차피 너희나 나나 이제 이 집 밖으로 온전히 나갈 수 없어. 너희들이 다 망쳤어. 이십 년 만에 당당한 모습으로 내 딸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는데.

보  성

그동안 우리를 애완동물처럼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실험 대상으로 잘 키우고 있었는데 일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안타까워서 어떡하지? 이제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말이야. 

수  영

보성아, 가만히 있어. (성한에게) 그 총, 총 내려놔요.

성  한

(수영에게 총을 겨누며) 왜, 네가 대신 죽게?


진순이 성한이 움직이는 사이 성한을 향해 총를 쏘지만 총알이 없다.


진  순

이런 제길.

수  찬

넌 쓰레기야!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이나 치는 비열한 쓰레기!

성  한

(처음으로 큰소리를 치며)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로 지껄여? 쓰레기? 너희들처럼 지들 아픔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쓰레기 취급받으며 산다는 게 뭔 줄이나 알아? 

영  란

그래서 우릴 죽이시겠다고? 하하하. (성한에게 다가가며) 그래, 죽여. 죽이라고. 어차피 여기서 나갈 생각도 없었어. 나가봤자 또 경찰에 쫓기겠지. 




영란이 성한에게 달려들자 영란의 다리에 총을 쏘는 성한. 그 자리에 쓰러지는 영란.  놀라서 영란에게 달려오는 수영과 보성. 


영  란

(성한에게) 너도 노숙 생활 끝내보자고 여기 제 발로 들어온 거잖아. 네가 뭔데 나를 협박해! 너 따위가 뭔데!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성  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난 가족을 만나고 싶은 순수한 이유 때문에 온 거지만 넌 아니잖아. 넌 살인자라는 전과를 피하려고 네 발로 자진해서 들어 온 거잖아. 난 적어도 너처럼 불순한 이유는 아니라고. 



성한의 말에 놀라는 수영과 보성.


성  한

그러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 까불지 말라고. 

지  연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처리하고 나가요.



성한이 지연을 결박하고 있는 끈을 풀어준다.


성  한

아직 나갈 수 없어.

지  연

왜요? 증거 인멸 후 빠져나가기로 했잖아요.

성  한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한 배가 오지 않았어. 

지  연

뭐라구요? 그럼 A는? A도 아직 여기 있어요?

성  한

그건 모르겠어.

지  연

빨리 가 봐요.



성한과 지연이 대화하는 사이 성한에게 접근한 진순이 총을 빼앗기 위해 성한을 공격하려는데 지연이 총으로 진순을 쏜다. 


수  찬

형님! 

수  영

형님! 정신 차려 봐요.

진  순

(숨을 헐떡거리며) 내가 말했었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난 그래도 만족해. 적어도 희망이란 걸 품을 수 있었으니까.



진순이 결국 정신을 잃는다. 보성, 수영과 영란은 비탄에 빠져 오열한다. 그 사이 성한이 퇴장한다.


수  찬

형님! 형님! 



총을 들고 있는 지연. 


수  찬

왜 죽였어? 우리는 피해자야. 우리가 왜 죽어야 되냐고!

지  연

난 명령을 따를 뿐이야.

수  찬

너는 인간도 아니야!

지  연

그렇게 힘든 일이었어? 간단한 규칙만 지키면 되는 거였는데. 

수  찬

네가 이 짓을 해서 얻으려고 했던 게 대체 뭐야? 돈이야? 돈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지  연

그래. 중요해! 난 돈이 중요해. 어릴 때부터 지금껏 지긋지긋하게 가난했어. 가난해서 부모에 의해 팔려 가듯 애정 없는 결혼도 했어. 가난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 당해본 적 있어?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성한이 다시 등장하며,


성  한

없어. 없다고.

지  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성  한

우리만 두고 가버렸어. 의료진도 직원들도 다 사라져버렸다고.



지연이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고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며


지  연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다 망쳤어!

보  성

이제 우린 같은 처지가 됐군. 

성  한

그래. 다 끝났어. 여기서 다 같이 죽게 될 거야.

지  연

아니, 난 그렇게 못 해. 난 포기 못 해. 원래 계획대로 너희들을 다 죽이고 살아서 빠져나갈 거야. 

영  란

그래, 죽여. 죽으면 죽었지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단 한 순간도 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죽일 거면 빨리 죽이라고.

지  연

그렇게 죽고 싶다니 소원대로 해주지.



지연이 영란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고 장전을 한다. 그때 성한이 지연에게서 총을 빼앗으며,


성  한

(무너지며) 그만해! 이제 그만하라고. 다 끝났어.

지  연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성한이 빼앗은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보성이 총을 재빨리 낚아챈다. 그리고 지연을 향해 총을 발포한다. 총성. 쓰러지는 지연. 지연이 쓰러지자 총을 들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며 스스로 놀란 보성이 총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지  연

누구나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아. 이게 내가 찾은 방법이야. 그런 너희들은? 너희들은 나랑 크게 다를 것 같아? 



이때, 차갑게 돌변한 영란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들어 성한에게 총을 겨누며


영  란

병신들. 별것도 아닌 게 더럽게 잘난 척하는 꼴 못 봐주겠네. 



영란이 성한을 향해 총을 발포한다. 쓰러지는 성한. 놀라는 사람들. 


사이. 영란이 천천히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수  영

안 돼! 

보  성

뭐 하는 짓이야!   



잠시 사이. 

총성. 영란이 그 자리에 쓰러진다. 보성이 영란에게 달려간다. 수영이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른다. 수찬이 넋이 나가 이 상황을 쳐다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는다.    

음악 점점 고조되고 저택 안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다 서서히 암전된다. 



<epilogue>




BGM이 흐르고 사방이 정적으로 고요해지면 어디선가 휠체어 바퀴 소리가 들려온다. 희미하게 들리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휠체어 바퀴 소리. 그리고 잠시 후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휠체어 소리를 따라 함께 움직이듯 지나간다. 어둠 속에서 어린아이의 

노랫소리. 그리고 곧이어 들리는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쉿! 이제 자야해.”

무대가 밝아지면, 또 다른 대저택의 어느 공간. 건장해 보이는 한 남자가 저택을 두리번거리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서 있다.


남  자

저기요, 여긴 어딘가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 


소  리

이곳은 당신에게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몇 가지 규칙만 잘 지켜주신다면 이곳은 당신이 주인입니다. 그럼, 편하고 자유롭게 지내십시오.



남자는 만족한 미소를 보인다. 

화면에 다양한 각도에서 그 남자를 지켜보는 cctv 화면이 수십 개가 보인다.


암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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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붉은 여인의 초상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현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현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현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현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현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현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현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현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현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현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현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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