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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사랑의 미래

  • 작성일 2020-04-01
  • 조회수 5,131

재와 사랑의 미래

김연덕


구멍 난 빛


축소된 세계가 마주 선 유리만큼 견고해


보존액의 무심함 세세하고 아름다운 수식 같은 상처로
무섭게 쪼그라들 나의 뇌는
근현대관 한가운데
전시될 것이다


도시는 숨긴다
바삐 뛰며
규격대로 배워 온 언어
최대한의 최소한의


팽창의 시간


꿈 없이 새로
부서지는
커다란 어깨


해 지는 거실 비스듬히 세워 둔 키 큰 식물이 흐르는 빛 잃어버린 정신에 집중하듯 조금씩 기울어지면 나는 불타는 도로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나의 할머니가 아내 앞으로 남긴 편지를 읽네 버석거리는


너무 많은 꽃들로 뒤덮인 아내의 이마 실밥 풀린 아내의 소매와 밑단이 흙속에서 어둡게 움직일 만큼 지친 리듬
평평한 잠에 빠져들 만큼 서정적이고 고전적인 문장들로 조합된 편지
느리고 차가운
환하고 사나운


시간처럼 스며드는 도로의 난폭함과 열기를 전등 삼아 나는 아내 대신 기나긴 답장을 쓰네


사람들은 이제 조명이나 조각난 영혼 같은 단어 숨과 숨 사이를 무모하고 상징적인 모양으로 잇는 문장부호와 교정부호 잘 쓰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 편지는 내 손녀의 손녀들에게 손녀들의 강한 손끝에게 전달될 마지막 샘플이 될 것입니다


감춘 눈물 암호가 될 것입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작은 잉크병


교정되듯
빈 거실이 간략해진다


-


아내와 나는 때때로 이곳에 말없이 누워 뇌 주름 사이사이 연결된 영사장치로 언어 너머 뒤엉킨 부끄러움을 서로의 빛과 절망을 천천히 건너다보곤 했네


들이치는 빗줄기를
긁힌 과거를


주석과 잡음 산발적인 그림자를 극복하고 여러 차례 보완된 이 영사장치는
실제보다 선명하고 진실 돼 보여
우리는 입을 열어 우리다운 문장을 만들거나 편지를 교환할 필요가 없었네
안전한
긴 전선으로 흘러들던 슬픔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고이거나 굳어버리곤 했네


보던 것을 듣게 되면
뜨거운 숲에 노출되면


미립자가 만들어내는 희미한 풍경 반복되는 기억무늬에 사로잡히면
순간을 늘려 송출하던 얇은
유리판 번갈아 깨어나던
눈동자들을
내부가 다 부어버린 짧은 침묵을
왜 기대 없이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일까


이해하고


이해받게 되는 것일까


커튼을 찢고
차갑게 빛나는 식물


도로가


아내가 부드럽게 헝클어트리던 노을 내 얼굴


씻고 싶어요


저 증기 숲 같은


센서 그만 꺼줘요
서로의 평면거실에 평소보다 오래 접속했던 어느 겨울 낮 두 손 가득 전선을 말아 쥔
아내는 말했고


나는 집 안 곳곳 흩어져 녹아내린 문장부호와 산산조각 난 서로의 입김들 속에 꼬박 한 계절을 보내야 했네


쉼 없이 새로 얼어붙던


작아지던 해


우리는 마주 앉아 연필 깎는
유일한 부부가 되었네


-


창과 창을
이어 달리는


수척한 빗물


늦은 잠 환한
전쟁을 치르는
아내의 소매


당신 너머 도시들을 봐버렸어요 눈 감은 당신 자꾸 넘어졌어요


실수로만 돌아오는 아내 곁에서
나이 든 나 조금 남은
빛을 지운다


-


낮과 밤을 어린 시절을 조용한 분노로 이글대던 덤불과 숲을 어떻게 건너왔나 어떻게 이토록 따뜻한 햇빛 어지러운 평화 속에서 멀쩡히 요리하고 청소하고 누워 있을 수 있나 아무 일 없던 얼굴로 텅 빈 질서로 회복도 고통도 모르는 몸으로 멈춰 있을 수 있나 생각하면 불현듯 겁이 나, 할머니는 몇 개의 바닥 투명한 소음들을 겨우 듣기 시작한 나를 앉혀 놓고 자주 중얼대곤 하셨죠 비유나 긴 단어 이상한 주기로 잘려 나가던 온점과 침묵 그 사람 말버릇이에요 알다가도 모르죠 어쩌면 꼭 할머니처럼 말하는 여자를 만났을까 자도 자도 뜨거운 잠이 쏟아지는 오후 끝까지 우려낸 찻잎이 까맣게 눌어붙은 주전자를 씻을 때면 생각해요 우린 할머니와는 다른 밤을 지나왔다고 흩어진 장면 조각난 영혼들 이어 맞추며 고장 난 조명은 고장 난 대로 늘어진 행복은 늘어진 대로 두면서 부산스럽게 늙는 데엔 실패했다고 이곳은 계절이 잘 구분되지 않아요 네 계절이 똑같이 길고 어둡죠 평생에 걸쳐 건설된 저 도로들처럼 뒤늦게 발견한 할머니 편지처럼요 언젠가 영원한 네 아내를 맞게 되거든 안전하고 평범한 날을 골라 전해 주거라 거센 비나 둘 이상의 유령이 유리창을 때리는 날엔 뭐냐고 물어도 모른 척해라 이것을 읽다 울거나 소파에 기댄 채 작아지거든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이불을 꺼내 덮어 주어라 눈 뜬 새벽은 몰래 치워 두고 지붕 없이 소리 없이 안아 주어라 … 식 올리고 첫 몇 해는 정신없이 지나가 뜯어 볼 생각조차 못 했어요 편지가 든 서랍도 서랍의 끝없는 깊이도 잊었죠 저녁 외출이나 단풍놀이 차게 식어버린 저녁식사 없이도 우린 할 게 많았어요 아내는 키 큰 식물을 좋아했어요 모르는 외국어나 과학 용어들 무서운 단어로 바꿔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할머니 할머니는 늘 내 아내가 될 여자에게 관심이 많았죠 고요한 그리고 가파른 미래에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을 아내 말을 내 말만큼이나 듣고 싶어 하셨죠 정직하게 식어 가는 시간을 불타는 세계와의 단절을 존중하며 슬퍼하셨죠 …………… 우리는 잘살아 보고 싶었답니다 주어진 빛 무리 부드러운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답니다 잘 말하고 잘 이해하고 싶었답니다 과잉된 영혼 울퉁불퉁한 반응속도를 길고 무심한 공업용 가위로 다듬어 자제력 있는 태도와 자세로 우리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답니다


-


스스로도


무너지는 밤의 흰 도로


공평하게 찾아오는


이해의 시간


사람들은 거실에서 한평생 싸운 두뇌가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다
유리막에 둘러싸인 흔한 구조물 아름다운
대과거를


단체로 보러 올 것이다


-


시대처럼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


도시는 숨긴다


최대한의
최소한의 팽창의 시간



눈앞에서 규격대로


터지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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