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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덕

  • 작성일 2023-06-01
  • 조회수 2,016

러브덕

박소란


한 사람이 영상을 보내 주었지
어미 오리와 갓 태어난 새끼 오리들의 올망졸망한 산책을
귀엽지?

너무 귀엽다
고물거리는 저 털 뭉치에서 눈을 뗄 수 없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상 속 오리들은
영원히 귀여울 텐데

틈날 때마다 재생한 탓인지
채널을 돌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꽥꽥거리는 오리들
쉼 없이 곁으로 헤엄쳐 오는

저리 가, 손을 내저어도 자꾸만

너무 가까워지면 어쩌나 행여 내가 쓰다듬으면
저 뜨거운 몸을
저 따가운,

이런 상상은 도무지 귀엽지 않고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 이 대책 없는,
초록을 머금고 살아 뻐끔거리는 개천을
어떻게 벗어났을까

잠들기 전
천장에 거꾸로 떠다니는 오리들을 보며
하나 둘 셋, 새끼는 어느새
어미만큼 자라 불행한 어미의 어미만큼 새끼를 낳고

화면에, 아니 수면에
빛은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끊어지며
잠시도 동작을 멈추지 않아

저리 가, 저리,
이런 상상은 왠지 서글퍼서
무거운 몸을 거푸 뒤척인다 혼자 진창을 절벅이듯이

깊은 곳에 잠기듯이

괜찮아,
내 젖은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는 누군가
비밀처럼 속삭인다 익숙한 내레이션을 흉내 내며
나아지고 있다고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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