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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름 짧은 이름

  • 작성일 2014-11-01
  • 조회수 641

긴 이름 짧은 이름

정익진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보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이렇게 긴 이름을 가진 그녀, 정말 오래 살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리아뇨’ *의 아내로…
밀림에서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돌로레스, 넌 일기를 왜 나뭇잎에 새기는지 알 수 없구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압도적으로 뛰어날 수 없다면 평범해지든지.
너의 동생 엔카르나시온을 봐라. 말을 거꾸로 하는 재주가 있어. 그리고
거짓말쟁이 흉내를 얼마나 잘 따라하는지 앵무새의 혀가 굳어버렸지.
강 건너 오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델 산티시보네 꽃집으로 가, 가서
사크라멘토 세 다발을 사와라. 돈 대신 손톱 하나를 빼주고 와야 해.
삶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란다. 꽃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주문을 외워야 한다. 에스투피냔, 에스투피냔, 에스투피냔 이렇게 세 번.
우린 사크라멘토의 향기가 있어야 목숨을 유지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아콩카과 山, 천사의 계곡을 찾아 십 년 전 등반 도중
눈 속에 파묻힌 너희들 오빠 오타발로의 시신을 반드시 찾아오도록 해라.
그의 영혼을 달래 주어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단다.


그러므로,


돌로레스… 집중해라 그리고 황금사과를 두꺼비로 변신케 하라.
엔카르나시온… 태양과의 눈싸움에서 지지 말라.
델 산티시보… 히아신스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꽃들도 골고루 섭취하라.
사크라멘토… 입술보다 눈 화장에 더 신경 쓰기 바란다.
에스투피냔…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문을 열어 주지 말아라.
오타발로… 죽었어도 살아나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린다.


두얼, 창얼, 칸, 카라, 려원…
結, 淨, 隱… 그리고… 빛으로 충만한 이름 모를 존재들이여…


what’s your name? 주어진 이름이 길든 짧든… 모두 오래오래 살기를…


*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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