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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백야

  • 작성일 2019-08-01
  • 조회수 236

오늘의 백야

문혜연


밀려오는 너의 등, 가끔 그곳에서 길을 잃는 나. 우리의 입술은 열리지 않고, 초침소리만 들려온다. 가만히 초침을 따라 혀를 차보면, 천천히 깊어지는 입안.


내 이름을 부르면 네가 대답하던 밤들도 있었지. 솜털들이 쭈뼛거리는 맨 어깨가 끝없이 멀어질 때, 너와 나 사이에 시차가 생겨나. 너의 아침이 나의 밤이 될 때, 나는 홀로 백야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 후로 우리는, 같은 시간을 거닌 적이 없어.


우리의 걸음마다, 끊임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미묘한 시간의 그늘들. 각각의 밤은 포개진 입술 아래로 가라앉고, 너의 밤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가까스로 잠이 들 때, 백야가 나를 찾아와. 너의 여름을 건너온 백야는, 나의 겨울에서 얼어붙어.


입을 맞출 때마다 생겨나는, 너와 나의 들쑥날쑥한 시간. 너의 들숨과 나의 날숨 사이를 횡단하는 순록들이 고요한 울음을 울 때면, 네 이름이 내 입안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고,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어져. 빙하처럼 얼어붙은 너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이곳에 얼려 두겠다고, 너의 검디검은 밤을 위해, 나의 희디흰 밤을 선물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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