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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사관(史官)

  • 작성일 2015-08-01
  • 조회수 233

꽃들의 사관(史官)

박형권


그때는 나무이기보다 꽃이었을 것이다
꽃 지는 소리에 잠을 깨는 두려운 가슴의 새였을 것이다
그녀가 포장마차에 앉아 최루탄 냄새를 안주로
이십 년 간직한 처녀를 바닥까지 마셔버린 그날
대세는 청춘의 반대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세상을 피하여 입대하는 어느 놈팡이에게 순결을 내주고 와서는
나와 하룻밤 눕고 싶다고
아무 일 없이 허리에 손만 얹어 보자고
뿌연 담배연기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해당화였던가
능소화였던가
잘 응답하지 않는 잎맥을 흔들며 겨우 광합성을 했던 밤
꽃들은 부름켜로 돌아가 산발적으로 수음을 했다
단 몇 미터 앞에서 이십 세기 말엽은 분신하였고
유탄에 맞아 거꾸러졌다
어둠과 어둠이 은밀히 살을 섞는 꽃들의 유배지에서는
검은 점퍼 차림의 사내들이 튀어나온 돌부리를 툭툭 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신념은 단지 꽃들의 전설로 완성되었다가 다음날 꽃이 졌고
다음날은 다시 피었다
그러나 그걸로 그뿐이었다
죽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기록하지 않았고
무수히 많은 사마천들이 백척간두에서 궁형을 당했다
몸을 피한 몇몇은 한 구비를 지나가는 고갯마루처럼 앉아
오래된 사서(史書)의 후반부를 찢고 그 길로 쓰러졌다
미리 적어 놓은 역사는 예언이 되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라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다고만 썼다
나는 꽃들을 기록하는 일은 천기누설임을 알고
201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부끄러운 향기를 음독했다
마침내 졸(卒)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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