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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

  • 작성일 2013-11-11
  • 조회수 260

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

정한아


당신과 오솔길에서 마주친 그는
고통의 역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혀를 물어갔으므로
누구라도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텅 빈 눈
게슴츠레한 눈
충혈된 눈
반짝이는 눈


그런 작은 한 쌍의 눈들은
실수로 숲에 들어왔다가는 황급히 발길을 돌리게 마련이지요
거기엔
휴식보다
상상보다
너무 많은 것들이 있거든요
직박구리 박새 멧비둘기 노루오줌 산동백은 물론이고
등산객 탈영병 신분증 없는 시신 낡은 소매의 실업자 빨간 모자를 쓴 해병 전우 난폭한 걸인 죽을 자리를 찾으러 왔다가 신선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져 급히 하산하는 실연한 청년 그러나
우는 눈,
상수리나무에게 꿀밤을 맞으며 오래 울고 있는
벙어리 신이야말로 가장 기이한 풍경이지요
당신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으며
무례하게 안아줄 수도 없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혀를 물어갔으므로
증언할 수도
욕할 수도 없는


진눈깨비
막바지에 다다른 활엽수림의 낙엽 무더기가
붉고 노란 비명을 지릅니다
젖어서 왁왁 쏟아집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당황한 눈으로 이미 무언가 쏟아진 당신은
돌아서는 순간
등 뒤의 숲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젖은 도시의 아스팔트는
진눈깨비에 젖어 두 배로 휘황하겠지요
배후가 없는


당신의 눈꺼풀은 오늘밤도
안도하며 당신의 눈을 삼킬 겁니다
실수로 새벽에 깨어 자기 얼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지요


그는 어제 젖은 상수리나무 아래
이마의 혹을 의혹처럼 오래 쓰다듬으며
우연히 마주친 당신의 이름을 발음해보려
밤새 낑낑거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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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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