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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위령학(慰靈學)

  • 작성일 2023-08-01
  • 조회수 979

   겨울의 위령학(慰靈學)

   서요나


   꿈속에 나는 엄마

   내 엄마는 아니고

   아니 알 수 없었다 눈이 없었으므로

   자녀의 더운 몸을 어루만진다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쉽게 젖었고

   물 냄새가 났다

   내 손끝이 쉽게 그 애를 아프게 해서

   내 손을 자꾸만 할퀴다가

   할퀴다가 달아나 버렸다

   물 냄새가 머물러 떠나가지 않았다




   두 시간 넘도록 풀지 못한 물리 문제 적힌 참고서 끌어안고

   농구공과 럭비공 축구공들이 늙어 가는 사람의 얼굴처럼 쌓여 올려진

   체육관 구석 앞에 쓰러져 있네

   아직 울지 않는 나는


   감옥으로 쓸 수 없는 내 흉곽

   꿈이 막 내릴 때까지 네가 깨지 않을 수 있는 신분을

   이 두 손으로 선물해 줄 수 없고

   사랑은 번역되기도 전에 혈액보다 빨리 이 안으로 쳐들어오지 


   모든 과목은 언젠간 여러분들의 빛나는 도구가 됩니다

   모든 과목이 언젠간

   사람을 살리는 날이 올 겁니다

   나 성장하여

   이 척추의 돌기가 씨앗 되어 누군가의 에메랄드빛 사원으로 피어나는 그날 와도

   나는 너의 고작 목숨만 지켜주는 사람인데

   잠기지 않은 체육관 문으로 눈발이 소금처럼 스며들어올 때

   이 오래된 겨울은 미루나무 멸종한 땅에 박힌 미루나무 가지 같은 우리를 보호하는

   거대한 갈비뼈일까

   아득히 먼 세월부터 삼켜오고 있는 아가리 속일까 궁금했다

   나의 흉곽은 요새로 쓸 수 없고

   사랑은 번역도 없이 하나의 척추 속에서 나를 만나 태어나고

   눈물도 흘리지 않고 물리 문제를 끝없이 틀려댔지

 

   세계로부터 형태가 다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끌어안는 품속에

   유일하게 그 그늘 안에 홀로 남은 물리학 

   풀어내지 못한 공식으로 흘려보내지 못하는 눈물이 나야

 

   모든 과목은 언젠간

   누군가를 살린다

   모든 과목은 언젠간

   우리를 선지자로 만든다

   지금 이 문제는 기압에 관한 문제

   기압의 선지자가 되면 

   누군가 뒷짐 지고 다가와 더빙해 줄까? 너의 마음속


   기압 때문에 죽기 직전인 사람이거나

   살기 싫은데 살아나기 직전인 누군가를 내가 죽이거나 살리려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는 다 살리는 문제들이야

   완전한 계산으로 

   자신이 깃들어야 할 나라와 우회해야 할 나라를 겨울밤이 찾아내듯

   정확한 답을 내리고 나서도

   신이 아닌 한 뼘 큰 어른이 되지

   숨구멍 하나가 더 늘어날 것처럼


   그래 나의 긴 숨 천사의 해골을 불어 연주할 수 없고

   비둘기의 깃털들이

   파충류의 발톱들이 화폐가 되는 나라에서도 나 자본가가 될 수 없고

   원어 없는 사랑에 매달리지


   지긋지긋한 여기 청춘에게 손을 흔드는 인체들

   독일말도 스페인말도 서울말도 일본말도

   서로의 키와 가슴 허리둘레와 발 치수를 재는 시간에 하나도 필요 없었지

   지겨운 내 청춘의 사람들

   심은하와 이미연 김희선에 관한 이야기들을 두 배로 더 떠들고 싶어 희랍어를 배우지

   모국어가 필요한 건 오직 헛소리뿐


   당신 머리 위 사과가 굴러 떨어질 때까지

   나를 떨리게 만들어 볼래요?

   사과보다 더 아찔하게 이 어깨가 흔들리도록


   그러나 이젠 아무도 번역해 주지 않을 이야기로 너에게 말할게

   정말로 사람을 살리는 문제를

   풀어야 했던 적이 있었어

   그 사람의 이름은 모나였어

   문제 속에서 모나 씨는 중력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어

   내가 중력으로부터 모나를 살려야 했는데

   십 오 분이라는 시간 안에 살려야 했는데

   물리 선생님의 팔꿈치가 짓누르는 교탁소리가 십 오 분간 삐걱 삐걱

   나는 중력을 몰라


   중력의 비밀을 안다는 말과 중력의 원리를 안다는 말이

   거대한 칼을 들고 내 뒤에 선 몸과

   앞에 선 몸의 마음을 구분하는 일처럼 어려워서


   어렵다는 말을 머릿속 욕조 한가운데에 먹처럼 떨어뜨리기가 무섭게

   교실 유리창 깨지며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지

   아이들 모두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망가고

   나만 홀로 책상 위에 올라서서 새가 돼 돌아온 모나를 까딱이는 고개로 기다리고 있었어

   새가 된 모나를

   이 이야기를 

   머리 위에 푸른 사과 올려놓고

   내 머리 위 사과보다 네가 더 떨리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며

   오후 10시에 여기로 오겠다던 너에게 들려줄 준비를 하는데


   반쯤 열리는 체육관 문으로

   흰 눈에 뒤덮인 검고 커다란 새 한 마리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야 말았네


놀라지 마

 내 아이가 너를 꼭 닮았어

그 애가 몸속에 있던 시절의 기억이

몸 밖에 있던 시절의 기억보다 길었어

내가 자리 비운 숲이 불타서 죽었어

너희들이 지른 불이었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어

 나 사람을 좋아해

 누군가의 시야 속에서 뜨거워지는 사람

 창백해지는 사람

잠드는 사람

모두를

너는 창백해지는 사람이구나

창백한 사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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