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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1,116

   손상


지강숙


   차가 안개를 헤치고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반쯤 열린 철문에 ‘출입제한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표지판 앞에서 민호가 머뭇거렸다. 방금 지나온 캠핑장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만원이라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민호는 할 수 없이 철문 안으로 차를 전진시켰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니 샛길이 나 있고 길 끄트머리에 숨어 있던 공터가 나왔다. 공터 한편에는 미니버스 크기의 캠핑카 한 대가 서 있었다. 희수가 자세히 보려 차창을 내렸을 때, 사람 한 명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차를 한쪽으로 몰았다. 희수는 차에서 내려 소나무 숲 건너 언뜻 보이는 캠핑장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차는 여기 두시고, 저어기 계곡 건너편이 조용할 거예요.

   남자는 캠핑카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공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맞은편에 간신히 텐트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였다. 희수는 준비해 온 카메라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캠핑카 앞에도 촬영 장비가 즐비한 것을 보니 남자 쪽도 놀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의 화각을 생각하면 피차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희수와 민호는 텐트와 조리도구, 음식 재료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짊어지고 계곡을 건넜다. 번쩍. 캠핑카 앞을 지날 때,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희수는 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물에 발을 디뎠다.


   백화점의 캠핑 코너는 몇 개의 유명 브랜드를 빼고 대부분 비슷한 물건을 팔았다. 중소 브랜드의 경우에는 전주 매출에 따라 매대 위치가 정해지는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매니저들은 타사에 밀리지 않으려고 백화점에서 금지한 가매출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자신의 카드 한도로 모자라면 신입이나 수습 같은 말단 직원에게 구매를 강요했는데, 다음 달에 실적이 없어 취소를 못 하면 직원이 고스란히 빚을 떠안기도 했다. 희수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대신 자신이 고생하는 편을 택했다. 밤늦게까지 트렌드를 분석하거나 캠핑 용품의 기능을 공부해 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올렸다. 희수의 언변으로 타 매장에서 텐트를 산 고객이 환불을 받고 희수 매장에서 구매한 일도 있었다. 자산 규모가 미미한 업체임에도 희수의 매대는 작년까지 이벤트 홀 가장 좋은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했다. 매일 저녁 블로그나 유튜브로 유행 아이템을 살펴보고 설명할 말을 다듬는 일은 고단했다. 하지만 희수는 자신의 노력에 따른 보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 희수도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신생 브랜드 P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P사는 입점 행사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대의 물량 공세를 퍼부었다. 희수가 봤을 때 기능 면에서 희수의 제품이 훨씬 뛰어났지만 고객들은 희수의 설명에 잠시 멈췄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P사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희수는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고객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대책 없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때도 최악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작년 Y를 만나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


   Y는 유능한 직원은 아니었다. 계약직으로 들어와 재계약에 실패했지만 희수는 팀장을 설득해 종종 Y를 알바생으로 썼다. Y가 백화점 일을 완전히 관두고 본격적으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전 로또 청약에 당첨되었기 때문이었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절 분양권 매매에 성공해 차익을 보았다고 했다. 

   수고 정말 많았네. 

   희수의 말에 Y가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언니.

   Y는 예전부터 희수가 부동산과 관련된 수익을 싸잡아 ‘투기’라고 부르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난은 Y에게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Y는 말하는 내내 만지작거리던 샤넬 토트백에서 카드를 꺼내 희수의 커피값을 먼저 계산했다. 희수는 웃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난한 민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기뻐해 주던 사람이 Y였다. 민호의 진가는 곧 드러날 거라며 Y는 희수를 응원해 줬다. 희수는 결혼을 반대하는 가족들에게 다친 마음을 Y에게서 위로받았다.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던 그들이 멀어진 것은 Y가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희수는 하루 종일 부동산 이야기를 늘어놓는 Y를 곁에 두는 게 불편했다. 차츰 연락이 뜸해졌고 둘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Y는 차분한 목소리로 희수에게 말했다. 

   가매출을 강요하지 않은 매니저는 언니밖에 없었어.

   그녀는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볼륨을 낮추었다.

   좋은 매물 나왔는데 나는 다른 데 투자해서 못 사거든.

   선구안을 가진 사람처럼 Y가 말했다.

   언니가 사. 언니도 이쪽으로 건너와.

   이쪽? 

   그러니까 그날, Y가 떠난 카페에서 희수는 잠시나마 꿈을 꾸었다. 아늑한 30평대 아파트에서 민호와 아이가 뒹구는 풍경. 손에 곧 잡힐 것만 같던 그 장면 때문에 희수는 Y가 말한 분양권을 대출받아 매수했다. 기대와 달리 아파트의 시세는 올해 초부터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출이자로 월급이 통으로 사라진 날이면 희수는 불안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한 엄마의 간병비를 위해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든 상황이었다. 이자를 막느라 적금 세 개를 깼고, 생활비도 카드를 돌려가며 가까스로 버텼다. 요즘 희수는 손님을 응대하다가 문득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버린 거라는 생각에 뒷골이 싸늘해지곤 했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다시 일어나 지친 몸을 일으켜 출근했다. 구겨진 유니폼을 다리며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고심 끝에 희수가 제일 먼저 선택한 일은 피임이었다. 초고금리 대출 상황에 아이까지 생긴다면 가족이 정답게 빚더미 아래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포기가 아니라 미뤄 둔 것이라 생각하자고, 희수는 아침마다 마음을 다독이며 출근 준비를 했다.


   매대는 알바한테 맡기고 캠핑이나 다녀와요.

   몰래 시세를 확인하던 희수에게 본사 팀장이 말했다. P사의 SNS 마케팅을 따라 본사에서 기획한 캠핑 사진 공모전이었다. 응모작 수준이 시원찮으니 출품용 사진을 찍어오라는 것이었다. 폐업 후 해고 수순인가. 안 그래도 육 개월째 바닥을 찍은 영업 실적 때문에 본사에서 닦달을 해오던 참이었다. 매장 재고를 빼고 상의 없이 알바생을 매장에 데려온 것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다. 희수는 이직을 하게 되면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직을 위해 쉬는 몇 달 동안 쌓이게 될 수백만 원의 대출이자를 생각하면 숨이 콱 막혔다. 다른 지점에라도 가려면 본사에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가매출일 수는 없었다. 

   희수는 그길로 그릇 코너에 가서 그릇들을 샀다. 블로그에서 찾은 갖가지 텐트 사진을 붙여 놓고 테이블 세팅을 연습했다. 2인용 노란 텐트 앞에 씬테이블을 깔고 그 위에 코펠을 올린 모습을 상상했다. 모양이 화려한 밀푀유나베를 끓일 생각이었다. 민호는 그런 희수를 못마땅해 하는가 싶었지만, 며칠 전 술에 취해서는 일하는 매장에서 파는 캠핑왜건을 끌고 집에 들어왔다. 언젠가 희수가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우드 상판의 스틸 왜건이었다. 최고급 아이스박스와 씬테이블, 화로대를 보고 희수는 놀라 가격을 채근했다. 민호는 난감해하며 비상금으로 샀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사실 희수는 속으로 안도했다. 희수는 혹시라도 사진에 자신의 궁색함이 담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잠든 민호를 보며 희수는 찬장 깊이 넣어 두었던 도마를 꺼냈다. 상쾌한 나무 냄새가 몸통 깊이 스며든 캄포 도마였다. 숲에서 뚝 떼어온 것처럼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너를 부유하게 해줄 재산은 없지만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있어. 민호는 창고를 빌려 지그소부터 원형 톱까지 목공장비를 마련해가며 손수 도마를 만들었고, 완성된 도마를 내밀며 프러포즈했다.  자기 손으로 집을 짓는 게 꿈이라던 민호는 뛰어난 손재주를 제품 상자 나르는 데 쓰고 있었다. 하지만 희수는 언젠가 민호가 자신을 위한 집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다. 캄포 도마를 아끼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뛴 전세금을 충당하지 못해 평수가 줄어든 집으로 이사할 때도, 도마만은 찬장 깊숙이 깨끗한 곳에 넣어 놓고 주기적으로 관리했다. 오일이 나무에 스며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희수는 민호와 결혼을 결심했던 마음을 떠올렸다. 노력하며 살면 좋은 날은 온다. 밤새 검색해 찾은 캠핑장을 향해 떠날 때만 해도 아직은 그 마음에 자신이 있었다.


*


   물살을 헤치고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민호는 서둘러 폴대를 설치했다. 희수도 씬테이블에 도마를 얹으며 구도를 잡았다. 캠핑의 느낌만 간신히 낼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둘에게는 그 정도라도 다행이었다. 물을 먹은 안개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았다.

   남자가 건너온 것은 민호가 막 텐트 설치를 마쳤을 무렵이었다. 그는 민호가 세운 폴대를 툭툭 건드리면서 텐트 안을 힐끗 들여다보기도 했다. 희수가 인기척을 내자 남자가 과장되게 웃었다.

   괜찮으시면 합석하실래요? 부탁드릴 것도 있고.

   희수는 망설였지만 민호는 이미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호는 남자가 듣지 못하게 소리를 낮추고 즐비했던 촬영 장비에 대해 수군거렸다. 필요한 물건을 빌릴 수도 있잖아. 민호는 그렇게라도 희수를 돕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까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에 쓰는 촬영 장비도 있을까? 민호는 대답 대신 캠핑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희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계곡을 건넜다. 


   5인승쯤 되는 캠핑카의 그늘막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머물렀는지 접이식 선반 위에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비가 오니 사진이 더 잘 나오겠네요.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부부는 캠핑 용품을 인스타그램에서 판매하는 셀러라고 했다. 방수커버를 씌운 카메라와 조명기는 얼핏 봐도 고가의 장비들이었다. 남자가 자랑스럽게 보여준 계정에 놀랍게도 팔로워가 오만 명이 넘었다. 프로 수준의 구도와 색감에 처음 보는 캠핑 용품도 많았다.

   남자 뒷모습이 필요한데, 모델이 펑크를 내서요.

   직접 모델 하시면 되잖아요? 

   얘가 카메라를 못 다뤄요.

   남자가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아랑 곳 없이 캠핑카 안에 있던 촬영 소품을 그늘막 안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희수네 회사에서 만들지 않는 티타늄 소재의 고급 식기들이었다. 희수가 컵을 만지작거리자 여자가 물을 따라 주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희수와 민호 앞에 앉아 익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나란히 앉으라고 했잖아.

   남자의 면박에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희수가 일부러 밝게 말했다.

   얼굴은 가려 주는 거죠?

   당연하죠, 언니.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민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가 개의치 않고 돌아가며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자기 차례가 오자 여자가 술잔을 든 손을 뻗었다. 남자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흔들었고 여자는 실망한 듯 잔을 내려놓았다. 희수는 비뚤어진 안주 그릇의 각을 맞추며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부부는 어딘지 서로를 기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난한 결혼이었나. 희수는 뜬금없이 둘 사이의 문제가 돈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비가 멈추었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희수를 여자가 붙잡았다. 끊임없이 안주를 내오는 여자 때문에 희수는 바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토망고가 뭔지 아세요? 토마토에 단맛을 주입시킨 맛이죠. 전혀 안 맞아요, 전혀.

   남자가 여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자신에게 뭐라 한 것이 아닌데도 희수는 남자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침묵 사이로 계곡물 소리가 들렸고 테이블 위에 빈 그릇이 쌓여 갔다.


   언니, 저랑 화장실 가실래요?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질 무렵, 여자가 희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희수가 말할 새도 없이 여자가 팔짱을 꼈다. 캠핑장 근처의 공동화장실까지 걷는 동안 여자는 기우뚱 희수에게 몸을 기댔다. 초면에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민망했지만 어물쩍 몸을 밀착시키는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희수는 여자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었다. 여자는 희수가 숱하게 보아 온 말단 직원들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칠고 투박했지만 가식 없이 솔직했다. 희수는 백화점에서 일할 때 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자가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밀었다.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는 희수의 팔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 힘을 주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사방에서 개구리가 울어댔다.

   물건들이 비싸 보이던데, 협찬 받는 거예요?

   다 샀어요. 

   잠시 후 여자가 고쳐 말했다.

   저 말고, 남편이요. 

   둘은 말없이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화장지를 안 가져왔다며 당황스러워했다. 희수가 티슈를 건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 희수는 휴대폰을 높이 들어 계곡 사진을 찍었다. 공모전에 어떻게든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캠핑장의 소음이 들려왔다. 언니 사진 대박 잘 찍는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가 희수 옆에서 감탄했다.

   돌아가는 길에서 여자는 한층 친근한 사람처럼 희수를 대했다. 자신이 즐겨 걷는 아침 산책 코스를 알려준다며 돌아가자고 했다. 나도 일을 해야 해서요. 희수의 말에 여자가 아쉬워했다. 다시 길을 걷던 여자가 소나무 숲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뱀이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여자는 개구리를 피해 여기저기 흙탕물을 튀기며 뛰어다녔다. 여자의 바지가 흙탕물에 젖어 엉망이 되었다. 

   죄송해요.

   개구리가 풀숲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여자는 한숨을 돌렸다. 뒤늦게 희수의 바지에 묻은 흙탕물 얼룩을 발견하고는 주저앉아 손으로 지우려 했다. 

   괜찮아요.

   희수가 여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해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여자가 체념하듯 말했다.

   사업이 쉽지 않죠?

   네? 아아.

   여자는 잠시 멈추어 섰다. 무언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원했던 건 아니고요. 남편이 회사 다니다가 사업해 보겠다고 때려치운 거예요. 

   여자의 말에 원망이 묻어났다. 여자는 이어 남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남자가 밥 먹듯 일을 갈아엎으며 재산을 탕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업 수완이 모자란데 게으르기까지 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사업을 하나 정리할 때마다 쌓여 가는 재고가 처치 곤란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일 화가 나는 문제는 따로 있다고, 여자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을 너무 함부로 해요. 

   여자는 매번 알바생들이 남편을 노동청에 신고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욕하고, 자르고, 제대로 돈도 안 주니까. 

   여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말하듯 중얼거렸다. 희수가 적당히 맞장구를 치자 참아 왔던 불만을 줄줄 쏟아냈다.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과 남편 부모에게 받은 서러움까지, 생각하면 더 화가 나는지 말을 할수록 거칠게 숨을 쉬었다. 격앙됐던 여자가 차분해진 것은 부동산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였다. 남편이 유일하게 잘한 일이 부동산 매도 타이밍을 맞춘 일이라는 것이었다.

   갭투자를 했는데, 집값 떨어지기 직전에 최고가로 처분했어요. 

   여자는 한층 여유로워진 어조로 처음 집주인이 되었을 때의 기쁨을 들려주었다. 살 만한 집을 바랐는데 과분한 집이 왔다고. 희수는 여자의 말에 점점 빠져들었다. 여자는 요즘 뜨는 동네의 입지와, 대출을 잘 받는 방법, 세금을 피할 수 있는 팁까지 재잘거렸다. 남편한테 들은 거라고 했지만 여자도 곁눈으로 익힌 지식이 상당해 보였다. 희수는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시세가 더 떨어지지는 않겠죠? 

   희수는 말을 하고 바로 후회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속내를 들킨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여자는 말을 끊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희수의 괴로움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더 강하게 희수의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캠핑카에 도착할 때까지 조근조근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다. 갭투자의 차익으로 캠핑 장비 판매 사업을 시작한 일과 인스타그램 운영을 업체에 맡겼더니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팔로워가 오만 명이 되었던 일.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생 한 번은 찾아온다는 말을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여자는 자신도 어려운 시절을 지나 이제 겨우 안정이 되었다며 희수를 위로했다. 열심히 설명하는 여자의 손가락이 희수의 눈에 들어왔다. 네일 끝에 달린 은색 파츠가 반짝였다. 희수는 거스러미가 일어난 자신의 손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 진짜 괜찮을까요?

   희수는 여자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다. 여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부동산은 일희일비하는 거 아니래요. 

   여자가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틀림없이 다시 오를 거예요, 언니.

   희수는 여자의 해맑은 얼굴이 좋았다. 그녀의 자신 있는 대답이 좋았다. 설혹 그 말이 틀렸다 해도 두려움 한 줌 없는 그 발랄함이 자신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 같았다. 


   캠핑카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쏟아졌다. 민호는 아까부터 통화 중이었다. 

   비 그칠 때까지 저희 계정 구경 하실래요?

   화장실에 다녀온 후로 여자는 희수에게 부쩍 말을 많이 걸었다. 사진마다 설명을 붙이며 희수에게 종알거렸다. 남자 역시 민호가 그늘막 안으로 돌아오자 말을 건넸다.  

   형님은 알바한테 존댓말을 하시는 거예요?

   네?

   방금 알바랑 통화하신 거 아니에요? 

   일을 맡겨 놓은 게 있어서요.

   남자는 민호에게 질문이 많아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호의 말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민호는 다시 전화를 받으러 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심심해하던 남자는 캠핑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테이블에는 희수와 여자만 남게 되었다. 술기운과 졸음 속에서 희수는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콧등이 차가워 고개를 드니 캠핑카 폴대 끝에서 물방울이 매달려 대롱거렸다. 손바닥만 한 문틈 사이로 캠핑카의 내부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우드톤 가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새 걸어 놓았는지 여자의 젖은 바지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비비자, 눈앞 선반에 도마 하나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두나무로 만든 엔드 그레인 도마였다. 체스판 같은 정사각형의 나무를 교차하도록 이어 붙인 도마는, 동일한 간격으로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희수는 술기운으로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뜨려 노력했다. 관리가 되지 않은 도마의 표면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티슈로 먼지를 닦아내니, 물결처럼 이어지는 나이테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최상급이네.

   희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다가와 희수 옆에 앉았다. 

   좋은 거예요? 

   엔드 그레인은 뿌리의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단단하게 서서 물을 빨아들이는 거예요. 희수는 신이 나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도마는 단순한 조리도구가 아니며, 마치 살아 있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진짜 생명처럼 관리 상태에 따라 수명이 달라지므로 소유자가 어떤 사람이냐를 알려주는 척도나 다름없다고. 어느새 돌아온 민호가 테이블 한편에서 희수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몰랐는데······.

   여자의 반응에 민호가 발끈했다.

   야, 내가 만든 건? 

   여자가 놀라며 민호를 바라보았다.

   형부가 직접 도마를 만드셨어요?

   형부요? 

   희수는 여자의 말을 따라 하며 피식 웃었다.

   부러워요, 언니. 

   민호도 긴장이 풀어졌는지 함께 웃었다. 덩달아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런 거 물어 봐도 되려나. 

   친근하게 웃던 여자가 희수와 민호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아이가 없으신 거예요? 

   민호가 희수의 눈치를 봤다. 희수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한테만 할 수 있는 얘기도 있는 거니까.

   희수는 여자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했다. 임신을 보류하기로 선택을 한 것일 뿐, 기회는 언제든 찾아올 거라는 말도 했다. 여자는 꽤 진지하게 희수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여자의 반응에 희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쪽은 아기 낳으면 캠핑카 타고 여행도 다닐 수도 있겠네요?

   말하고 나니 희수는 조금 울적해졌다. 민호는 말없이 술잔만 바라볼 뿐이었다.

   언니. 저는요. 애는 별로 생각이 없어요. 

   여자는 희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희수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비로소 한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남편이랑 세계여행이나 다니지 뭐.

   언니, 저도요. 저도 그럴 거예요.

   희수는 여자가 귀여웠다. 철없어 보이긴 해도 사려 깊은 행동과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의 친절함에 호응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갔다.

   도마 관리하는 법 알아요?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항상 궁금했어요, 언니.

   희수는 여자에게 도마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설명하려다 멈추었다. 설명보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오일을 가지러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희수는 여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오랜 시간 경험으로 알게 된 희수만의 노하우를. 도마를 관리하며 느끼는 소소한 기쁨과, 작은 일상으로 버티는 하루의 고단함까지. 희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계곡을 건넜다. 뒤에서 민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바로 오겠다는 손짓을 하면서 빗속을 뚫고 텐트에 도착했다. 꾸러미 속에서 오일을 꺼내다 도마에 손이 닿았다. 꺼내 보니 밤하늘 아래 도마가 유난히 예쁘게 보였다.

   내 도마. 

   희수는 오기가 생겼다. 가진 건 없어도 잘살고 있다는 것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희수는 도마와 오일을 봉지로 감싼 후 품에 안았다. 거센 물살에 도마를 빠뜨릴 뻔하기도 했지만, 다시 자세를 추스르고 한 걸음 내디뎠다. 빗물이 얼굴에 흘러도 웃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 


   다시 캠핑카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자리에 없었다. 민호와 남자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둘은 간간이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서로를 노려보기도 했다.

   그 새끼가 선수여서요. 노동청에 신고한 것만 세 건이 넘었어요.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요.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형님 같으신 분들은 이해 못 하시겠지만요. 저희도 곤란한 일이 많아요. 

   나 같은 분들이라뇨?

   아니, 그러니까······ 아니에요.

   나 같은 사람이 뭔데요?

   머뭇거리던 남자가 작정한 듯 말했다.

   열심히 사시느라 애도 미루시는 분들이요.

   민호는 희수를 돌아보았다. 이래서 술 마시다 자리 비우면 안 된다니까. 희수가 헛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희수는 여자가 천진한 성격 때문에 남편에게 스스럼없이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호는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민호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장기적으로 못 보고 눈앞의 리스크에 연연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은 사장 마인드를 이해 못 하세요. 

   민호는 피식 웃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남자가 쉬지 않고 계속 떠들었다. 희수는 귀가 윙윙거리는 통에 둘을 등지고 돌아앉았다. 시선이 선반 위 먼지 쌓인 엔드 그레인 도마가 놓인 곳에 이르렀다. 희수는 여자를 깜짝 놀래 주고 싶었다. 자신의 도마를 내려놓고 여자의 도마를 집어 들었다. 깨끗한 티슈로 다시 한 번 먼지를 닦아낸 후 가지고 온 오일을 정성스럽게 도마에 적셨다. 평소 즐겨 하던 것처럼 맨손으로 오일이 고루 퍼지도록 문질렀다. 희수는 여자가 완전히 바뀐 도마를 보고 놀라는 얼굴을 상상했다. 비싸서 아껴 쓰는 천연 오일이었지만 바닥과 윗면, 모서리까지 아낌없이 발라 주었다. 도마를 타고 내려온 오일이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희수가 얼른 자신의 도마를 남은 오일에 갖다 댔다. 요사이 바빠 오일링을 못한 탓에 표면이 거칠거칠했다. 희수는 그 까칠한 감촉마저 좋았다. 덜 마모된 캄포 도마의 까슬까슬한 면을 만질 때면 도마를 다듬던 민호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몇 방울 남지 않은 오일을 캄포 도마의 표면에 떨어뜨렸다. 도마의 결을 따라 손으로 쓸어냈을 때 미세한 나무 가시 하나가 희수의 검지를 파고들었다. 희수가 소리를 질렀고 어둠 속에서 여자가 달려왔다. 여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언니, 어떡해요······. 여자의 입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여자는 맨손으로 희수의 가시를 빼려 했다. 하지만 긴 손톱이 가시를 비껴 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살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희수는 이를 악물다가 어느새 비가 그친 것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여자에게서 손가락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벌써 가려고요? 

   여자는 희수의 소매를 잡다가 주저앉았다. 여자 앞에 희수가 오일을 발라 놓은 도마가 있었다. 여자가 자신의 도마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이거 왜 이렇게 번쩍거려요?

   도마는 오일을 발라 줘야 오래 써요. 

   기다렸다는 듯 희수가 말했다. 여자가 잘 볼 수 있도록 반들거리는 도마를 들어 그녀 앞으로 가져갔다. 여자가 찬찬히 도마를 살폈다. 만져 보고 쓸어 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공터에 울려 퍼졌다. 

   언니, 진짜 재밌네요. 

   여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왜 웃지? 희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희수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술 냄새를 맡고 몹시 당황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여자의 손을 잡고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희수 부부가 밖에서 기다렸지만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수와 민호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뒤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쿵 소리가 났다. 희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캠핑카가 홀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심하다, 한심해. 희수가 계곡을 건너며 중얼거렸다. 몸이 자꾸만 땅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 텐트로 돌아온 희수는 사진을 찍으려다 어지러워 그대로 뻗어버렸다. 공터에 울려 퍼지던 여자의 웃음소리만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도마를 놓고 온 것을 알게 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비가 그쳐 사진을 찍기 위해 냄비를 닦았지만, 막상 냄비를 플레이팅 할 도마가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캠핑카 안에 들어간 부부의 무례함이 떠올랐다. 다시 마주치기 꺼려졌지만, 도마가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같이 가자는 말에 민호는 희수보다 더 찜찜해 했다. 그 자식 어딘지 재수가 없어. 하지만 더 이상 사진 작업을 미룰 수 없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희수는 민호와 함께 계곡을 건넜다.

   계세요?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희수는 선뜻 차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개구리 사체를 보면서도 꼬박꼬박 아침 산책을 나간다는 여자의 말이 떠올랐다. 희수는 엉거주춤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본체가 분리되는 일본제 스테인리스 가위, 화구가 세밀하게 디자인된 독일제 토치, 피막 처리가 된 프라이팬과 폴대용 경량 해머가 놓여 있었다. 백화점 진열대에서만 보던 물건들을 그들은 함부로 방치하고 있었다. 

   희수는 조심스럽게 토치에 불을 붙였다. 길고 가느다란 화구에 불이 붙는 모양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민호가 제지하려 했지만 가위를 들어 그립감을 느껴 보기도 했다. 민호가 미간을 찌푸리자 희수는 보란 듯이 가위로 허공을 갈랐다.

   이런 가위 하나 갖고 싶었는데. 

   민호가 위험하다며 가위를 빼앗았다. 민호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붉은 상처투성이였다.

   밴드 붙이고 다니랬잖아. 

   민호의 손은 볼 때마다 엉망이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박스 처리를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희수와 같은 층 다른 매장에서 일하는 민호는 평소 친절직원으로 뽑힐 만큼 평판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말단 직원을 괴롭히는 매니저만 보면 참지 못했다. 특히 월급으로 메꿔 주겠다며 직원의 카드로 매상을 긁고 손 터는 매니저들과는 자주 시비가 붙었다. 한번은 직원의 카드도 모자라 알바생 카드까지 긁은 매니저가 있었는데, 한마디 했다가 감정이 격해져 주먹다짐을 한 일도 있었다. 어떤 매니저들은 진상 고객보다 민호를 더 싫어했고 대놓고 별종 취급을 했다. 하지만 직원이나 알바를 막론하고 일을 막 시작한 막내들은 억울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민호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매니저보다 민호를 더 따랐다. 그 상처 난 주먹이 좋아 민호와 결혼했지만, 희수는 때로 민호가 자제하길 바랐다. 고객을 다루는 기술도 젬병인 데다가 주먹질로 문제나 일으키는 민호를 자르려고 본사에서 벼른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대출로도 자금이 모자라 첫 아파트 입주에 실패하면서 희수는 민호를 더욱 단속했다. 그때부터였나. 민호는 자신을 찾아오는 막내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참으라고 어르거나 담배라도 같이 피우다가 돌려보냈다. 위로랍시고 한참 어린 직원들에게 떠들고 온 날이면 민호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을 했다. 


   소나무에 붙어 있던 물방울이 정수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새 한 마리가 파드닥거리며 나무 사이로 날아갔다. 다시 비가 올까 봐 희수는 조급해졌다. 도마를 찾기 위해 그늘막 아래 박스들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팔을 뻗어 안을 휘적여 보니, 미끈하고 차가운 그릇이 손에 잡혔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얼른 손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부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그늘막의 폴대가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마침내 바닥 못이 뽑히고 연결된 스트링이 풀리면서 폴대가 땅에 쓰러졌다. 아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민호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폴대를 함부로 밟았다.

   그 새끼가 얼마나 양아치인 줄 알아?

   희수는 최고급 캠핑 도구 앞에서 남자의 얘기를 구시렁거리는 민호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부부가 돌아올 기색이 안 보이자 캠핑카 안까지 살펴보려 일어섰다. 민호가 희수를 제지했다. 하지만 희수는 민호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상기시켰다. 민호가 마지못해 물러나고 희수는 차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한 평 남짓한 캠핑카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아기방 같았다. 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편백나무의 시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겨자색 소형 냉장고와 나무 침대, 핑크와 주황 소품들이 한데 어우러져 포근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반면, 촬영용으로 멋을 낸 쪽의 반대편은 너저분했다. 어젯밤 술자리의 빈 잔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천장 선반에 올려놓은 박스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희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캠핑카 안을 둘러보다가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것 좀 봐! 

   희수의 외침에 민호가 캠핑카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린 박스 안에 한 번도 쓰지 않은 엔드 그레인 도마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포개져 있었다. 희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다시 부부의 캠핑카 안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손이 닿지 않는 구석까지 몸을 기울여 박스를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테이블 아래 서랍에서 자신의 도마를 찾아냈다. 희수의 도마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랍 안에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민호는 희수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희수는 도마를 품에 안고 모서리를 쓸어 보았다. 캄포 나무 특유의 무늬는 여전했지만 숲 내음을 풍기던 도마에서 미세하게 다른 냄새가 났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김치 얼룩도 보이는 듯했다. 얼른 걸레로 닦아 보았지만 붉은 기는 더 도드라질 뿐이었다. 희수는 불안한 마음으로 부부의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부부의 계정에서 업데이트된 피드를 뒤진 끝에, ‘새벽 캠핑 라면’이라는 해시태그와 냄비 아래 함부로 깔려 있는 희수의 도마를 발견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희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 어젯밤 손수 닦아 주었던 반들반들한 여자의 도마가 놓여 있었다. 

   우리도 가져갈까? 

   희수가 즐비한 캠핑 도구를 둘러보며 말했다. 캠핑카 안의 물건 몇 개만 세팅해도 그럴듯한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도 근사하게 좀 찍어 보자.

   희수는 민호에게 부부의 계정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사진들을 보니 갑자기 자신감이 솟았다. 공모전 일등 직원을 매장에서 쉽게 자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인정받기만 하면 부동산에 관심을 쏟느라 부진했던 판매 실력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민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차 안으로 들어와 희수가 열어 놓은 박스의 뚜껑을 하나씩 닫기 시작했다. 그러다 밖에서 요란한 경적이 들리는 바람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그대로 멈추었다.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희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사진만 찍고 갖다 놓자. 산책 좋아한다고 했으니 좀 더 있다 올 거야.

   희수가 도마 두 개를 집으려 하자 민호가 차갑게 말했다.

   제발 그만 좀 해.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더 좋은 도마 사줄게. 그럼 됐잖아?

   민호는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보지 않고 계곡 쪽으로 걸어갔다. 사진 한 장만 찍으면 되는데. 희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바위에 부딪히는 계곡물 소리가 어제보다 커진 것 같았다. 

   물이 불어난 건가. 

   혼자 남은 희수는 자신의 도마와 여자의 도마를 만지작거리다가 두 개 다 집어 들었다. 자신의 도마는 품에 안고, 여자의 도마는 손에 들었다. 지난밤 가시에 찔렸던 상처가 잔뜩 부어올랐다. 별것 아니라고 되뇌면서 희수는 도마를 고쳐 들었다. 자세히 보니 여자의 도마는 무늬의 경계에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갈라진 부분은 가리고 찍으면 되겠지. 엔드 그레인 도마라면 틀림없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물방울 하나가 툭, 눈두덩에 떨어졌다. 


   텐트로 돌아오자 우드 왜건 위에 씻어 둔 배춧잎의 숨이 죽어 있었다. 미리 설치해 놓은 캠핑 의자와 아이스박스, 씬테이블이 단출하게 배치되었고 그 위에 코펠과 각종 조리도구가 오밀조밀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 왕으로 불리는 희수의 수완이었다. 희수는 엔드 그레인 도마의 갈라짐이 보이지 않도록 각도를 잡았다. 코펠 안에 배추와 고기를 포개고 물을 붓는 사이, 민호가 버너에 불을 붙였다. 온도가 오르자 가스 판의 파란 불꽃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희수는 정성스럽게 여자의 도마 윗면을 수건으로 닦았다. 피어오른 연기가 축축한 공기와 어우러져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하나, 둘, 셋. 고독한 캠퍼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도록 희수는 도마를 중심으로 배치한 사진에 셔터를 눌렀다. 

   도둑들인가?

   카메라 액정을 확인하며 희수가 중얼거렸다. 가장 좋은 도마를 방치하면서 남의 도마를 탐내다니.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아까부터 어딘지 불안해하던 민호는 조금 착잡한 표정으로 국그릇을 받아 들더니 국물을 마셨다.

   신고해 버릴까. 

   희수의 말에 민호가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희수는 국그릇을 통째로 입에 갖다 댔다. 따끈하고 시원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저 새끼, 마음에 안 들면 애들 잘라버렸대. 일 년 동안 세 명한테 신고 당했대.

   타격이 컸겠네.

   민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비웃더라. 거지들이 용쓴다고.

   민호가 입을 닦으며 물었다.

   혹시 백이 있나?

   백은 무슨. 쓰레기인 거지.

   저런 쓰레기들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어. 

   내가 도와줄게.

   희수는 화가 난 민호가 귀엽게 느껴졌다. 민호도 긴장을 풀고 희수를 보며 웃었다.

   맛있어? 

   희수가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숙취가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무사히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희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한 모금 국물을 마시려 했을 때, 물소리를 뚫고 캠핑카의 경적이 들려왔다. 희수는 반사적으로 여자의 도마를 보았다.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모른 체하자.

   침착한 희수와 달리 민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새끼, 해코지할 것 같은데.

   민호가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씬테이블이 옆으로 넘어졌고, 동시에 코펠이 와르르 쏟아졌다. 흙탕물과 국물이 민호의 옷에 튀었다. 희수는 할 수 없이 아무 가방이나 집어 들고 여자의 도마를 쑤셔 넣었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민호가 먼저 허겁지겁 계곡을 건넜다. 건너편에 이르자 여자가 희수 부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언니는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여자의 말에 희수는 손에 든 가방을 뒤로 감추었다.

   어젯밤 옆 캠핑장에 도둑이 들었대요.

   남자가 쓰러진 폴대를 만지작거리더니 땅을 파고든 바닥 못을 들여다봤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캠핑장을 조사 중이라고 했다.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남자가 캠핑카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민호의 시선이 남자의 동선을 좇았다. 

   아마 우리가 술 마시던 그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도둑 운운하는 여자는 약간 들뜬 것처럼 보였다. 그 앞에서 희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여자가 공터에 머물기를 얼마나 잘했냐며 떠드는 사이, 희수는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여자의 도마가 가방 안에 덩그러니 담겨 있었다.

   내 도마를 찾으러 왔다가 아무도 없길래. 두 사람 오기 전까지만 쓰려고 했어요.

   희수는 여자의 도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수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기한 물건을 보듯 도마의 표면을 만지더니 바로 손을 뗐다. 

   이런 게 나한테 있었나?

   무슨 소리야. 어제 내가 오일도 발라 줬잖아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도마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쪽이 웃기도 했잖아······.

   어느새 남자가 여자 곁으로 왔다. 그들은 금이 간 채 번들거리는 도마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이 메아리처럼 들렸다 사라졌다.

   그냥 언니 가지세요.

   여자가 희수의 손에 도마를 쥐여 주며 말했다. 희수는 엉거주춤 도마를 받아 들었다. 얼굴이 한 대 맞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내 도마는 왜 가져간 거야?

   네? 무슨 도마요?

   희수는 자신이 발견한 피드를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아, 이거 제 도마인 줄 알았는데?

   여자가 순진한 표정으로 웃었다.

   도마 얘긴 그만하시고, 밥이나 드시고 가세요. 제가 어제 언니한테 너무 고마워서······.

   여자는 어제처럼 희수의 팔에 매달렸다. 희수가 여자의 손을 뿌리치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휘청하면서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때 여자의 볼록한 배가 처음으로 희수의 눈에 들어왔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여자가 재빨리 희수에게 다가갔다.

   언니, 사실 제가 임신 중이에요.

   여자는 떨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두렵지만 주눅 들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여자는 곧 아이를 지우려 한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릴 수 없어 헤어지려 한다고. 무슨 일이 닥쳐도 한번 겪어 보겠다는 말에 결연함이 묻어났다. 희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 순간 희수는 자신이 아이를 몹시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임신을 미루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며, 선택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희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쥐고 있던 여자의 도마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묵직한 도마가 여자의 발 옆에 떨어지는 바람에 놀란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한걸음에 다가와 희수를 밀어냈다. 희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 새끼가.

   민호가 남자의 어깨를 밀쳤다. 둘은 일촉즉발로 마주섰다. 민호가 남자보다 반 뼘은 더 컸다. 한 발 민호가 다가서자 남자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여자는 테이블 쪽으로 몸을 피하고, 희수는 그 모든 광경을 쓰러진 채로 지켜보았다. 

   건드리지 마라.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남자는 민호의 기세에 약간 눌린 듯했지만 여자 쪽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민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민호를 보고 씩 웃고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닥쳐. 도둑질하는 거지새끼야.

   민호는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남자는 전혀 기죽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적의가 흘렀다. 남자가 힘으로 밀자 민호는 그를 밀쳐내고 바닥에 떨어진 여자의 도마를 발로 찼다. 도마가 돌부리에 부딪히더니 쩍 갈라졌다. 희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민호의 팔을 잡았다. 손끝에 민호의 떨림이 느껴졌다. 민호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그때 희수는 결혼 후 처음으로, 민호가 상대를 때려눕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희수 안의 분노가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희수는 잡았던 민호의 팔을 가만히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하지만 민호는 멈칫거리기만 할 뿐, 선뜻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주먹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희수와 민호는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가야 하고, 둘이 살 만한 집을 꾸리기 위해서라도 이 모든 비루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희수도 민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손가락 끝이 잘려 나갈 것처럼 아팠을 뿐이다.

 

   텐트로 돌아가는 길, 한층 굵어진 비가 내렸다. 희수는 계곡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까 본 여자의 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발!

   희수는 허벅지까지 물에 홀딱 젖은 채로 일어났다. 민호의 손을 잡고 참담한 심정으로 바위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계곡물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민호는 옆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주먹이라도 날리지 그랬어.

   민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희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민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바위 사이에 텐트가 보였다. 물이 불어난 계곡에 휩쓸릴 것같이 아슬아슬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계곡을 건너기 위해 희수는 다시 일어났다.

   그래도 신고 안 할 거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지금 신고 때문에 이래?

   말하고서, 희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희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민호가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말고 애꿎은 돌멩이 하나를 물에 던졌다. 희수를 바라보는 민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희수야. 우리 왜건, 알바 카드로 긁은 거야.

   빗물이 민호의 정수리에서부터 턱까지 흘러내렸다.

   네가 너무 급해 보여서.

   희수는 잠시 멍해졌다.

   내가 하도 고민하니까 우리 매장 알바가 자진해서 긁은 거야.

   민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가매출을 그냥 가져왔다고?

   희수의 손가락이 다시 아려 왔다. 희수는 허리를 구부려 계곡물에 손을 넣었다. 찬물에 손가락이 얼얼해졌다. 희수는 상처 난 손을 내려다봤다. 내 손이 이렇게 더러웠었나. 희수는 물속에서 이리저리 손을 살피다가 주먹을 쥐어 보았다. 민호가 주먹을 날릴 때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씩씩거리던 민호의 표정. 단 한순간에 희수를 매료시켰던 환한 얼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희수와 민호는 무거운 걸음으로 계곡을 건너 텐트 앞에 도착했다. 희수가 완벽하게 정리해 놓았던 씬테이블 위에 배추와 고기가 함부로 어질러져 있었다. 희수는 애지중지 챙겨 왔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반짝거리던 물건들이 손상되고 더러워졌다. 소매 끝으로 흙탕물이 튄 씬테이블을 닦다가 문득 희수가 물었다.

   이것도 알바 카드로 긁은 거야?

   응.

   아이스박스도?

   응.

   화로대도?

   민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희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의 모든 물건이 꺼림칙했다.


   비는 피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거세지고 있었다. 희수는 흙 묻은 배추와 고기를 손으로 주워 담았다. 희수의 어깨에, 두 손에, 온몸에 빗물이 떨어졌다. 입술이 덜덜 떨리며 오한이 왔다. 희수와 민호는 짐을 나누어 들고 조심조심 계곡을 건넜다. 문이 굳게 닫힌 부부의 캠핑카를 지나 공터 구석에 세워 둔 차에 이르렀다. 비좁은 트렁크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희수는 트렁크를 열고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도구들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서울까지 가는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민호가 지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다. 희수는 멍해진 채로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 차창 밖으로 경찰차가 소나무 숲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희수는 무엇이 생각난 사람처럼 급히 문을 열고 내렸다. 다시 트렁크를 열고 물건을 하나씩 들추기 시작했다. 텐트와 씬테이블, 아이스박스, 화로대와 코펠까지 맨땅 위에 꺼내 놓았다. 침낭 속, 가방 속, 베갯속까지 샅샅이 살핀 끝에 희수는 겨우 자신의 도마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텐트와 테이블을 접어 놓은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희수가 찾기를 멈추지 않자 민호가 차 밖으로 나왔다.

   뭐가 없어졌어?

   희수는 품에 안은 도마를 확인하고 다른 물건들도 재차 확인했다. 민호는 엉거주춤 서서 희수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희수야.

   희수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희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민호에게 말했다.

   뭔가 도둑맞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희수와 민호는 옷이 다 젖은 채로 차에 올라탔다. 카시트에 빗물이 스며들었다. 도마를 꼭 쥔 희수의 손이 덜덜 떨렸다. 희수는 아직 아이를 포기하지 못했다고 민호에게 말하지 않았다. 가끔 아이를 생각하며 겨우 잠든 밤에 배시시 웃다가 잠을 깬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민호는 글로브 박스에서 밴드를 꺼내 손가락 끝에 돌돌 말아 주었다. 차에 가까스로 시동이 걸렸다.

   서울 가면 차 수리부터 해야겠어.

   희수는 지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차가 신호를 받기 위해 캠핑장 입구에 멈추었다. 차창 밖으로 캠핑장의 북적거리는 인파가 보였다. 희수는 차창을 열고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내밀어 품에 안고 있던 자신의 도마를 흙탕물 위에 툭 떨어뜨렸다. 민호는 희수를 바라보다가 잠잠한 표정으로 차창을 닫아 주었다. 희수는 눈을 감았다. 살 깊이 박혀버린 가시의 통증이 깊숙하게 전해져 왔다. 차가 안개 속으로 서서히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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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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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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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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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구도윤
    최고에요

    무언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감각을 깨닫는 것만으로! 추천합니다. 감명 깊게 읽었어요.

    • 2024-03-02 14:11:53
    구도윤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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