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밤의 공사

  • 작성일 2005-07-15
  • 조회수 9,796

 

편혜영


무너진 담은 풀숲과 면한 쪽이었다. 풀숲은 돼지풀 군락 같은 덩굴식물과 말라죽은 나무로 담을 쌓은 둥근 습지를 품고 있었다. 그것들은 습지를 비밀의 숲으로 위장할 만큼 키가 컸고 울창했으며 드센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집 바깥에서 보면 담장 한쪽이 귀퉁이를 접은 종이처럼 무너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고분과 면한 쪽이 아니어서 통행인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좁은 회랑과 같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집은 뒤쪽으로는 고분과, 오른쪽으로는 풀숲과 닿아 있었다. 고분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D시에는 고분이 너무 많았다. 대개 연대가 불분명한 것들이었다. D시가 시(市)로 정착되기 이전부터, 지금의 국호(國號)가 사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분은 문화재 관리국에서도 일일이 조사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래서 대개는 어떤 송장과 부장품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 함구한 채 낮은 철책에 둘러싸여 방치되었다. 어느 게 고대 왕의 것인지, 왕의 처형을 모의한 반역자의 것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습지 표면에는 순채나 검정말 따위가 가득 덮여 있었다. 그 때문에 습지는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잔디가 깔린 잘 가꾼 정원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 더 내려오면 이제 막 아스팔트 공사를 해놓은 도로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순채나 검정말의 태반은 이미 까맣게 죽어 뿌리도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표면이 일렁이지 않았다. 습지에 가득 찬 것은 점액질의 뭉클거리는 덩어리였다. 누구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이었다. 가끔 습지 표면이 일렁일 때도 있었다. 아내가 집 안에서 잡은 들쥐의 꼬리를 휘휘 감아 던질 때나 습지에 닿아 있는 마을 하수관으로 오폐수가 쏟아져 나올 때였다. 습지는 그 모두를 잘 받아 넣었다는 신호로 잠깐 쿨렁거렸다. 그러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가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 습지가 벌린 물구멍은 아내의 거웃을 연상시켰다. 더럽고 시커먼 터럭들이 엉켜 있으며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가 냄새까지 풍기는 구멍. 그는 가급적 습지 근처로 가지 않았다. 

아내를 통해 집 옆에 습지가 있다고 들었을 때, 그는 물기를 머금은 순채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순채는 실로 습지 가득 널려 있었다. 지저분하게 뻗은 뿌리만큼이나 물에 떠 있는 잎사귀도 더러웠다. 잎을 둘러싸고 있는 점액질은 누군가 뱉어놓은 가래처럼 탁했다. 청색의 개구리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대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거대한 황소개구리와 그 개구리를 먹이로 삼는 들쥐, 들쥐를 잡아먹는 들고양이들, 작은 들고양이를 노리는 덩치 큰 들고양이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더럽고 시끄러운 것들은 죄다 습지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마을에는 습지에 관한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 중에는 젊은 여자가 빠져 죽었다는 것도 있었다. 하도 오래된 소문이라서 진의는 알 수 없었다. 시체를 찾으려 해도 이미 백골조차 가루가 되어 버렸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했다. 그 여자가 빠져 죽은 후 마을의 장정들이 하나 둘씩 없어진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마을의 장정들은 습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도시로 떠나는 거였다. 정작 마을 사람들이 습지 근처로 가지 않는 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부유하는 잎사귀들과 고인 물이 썩는 냄새였다. 죽은 채 가라앉아 있는 들쥐며 들고양이, 소문대로라면 사람의 사체가 한데 섞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동네를 관통하는 하수관의 끝이 습지로 뚫려 있었다. 습지로는 분뇨와 음식 찌꺼기, 애완동물의 사체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습지의 냄새는 마을 어귀까지 퍼져 있었다. 다소 예민한 사람들과 초행인 사람들은 냄새 때문에 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땡볕에 썩어 가는 송장을 연상시키는 냄새였다. 요즘 같은 날씨에 누가 집에서 송장을 치워, 염치도 없이. 아내는 죽은 부모의 집 어귀에서 냄새를 맡자마자 대뜸 인상을 썼다. 아내의 부모는 태어난 아기를 보러 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아내는 몸도 풀지 못하고 장례를 치렀다. 부모가 동시에 죽으면서 집을 남겼다. 약간 기운 정사각형의 틀 안에 방 두 칸, 좁은 마루, 구식 부엌과 금이 간 벽이 있는 집이었다. 금은 점점 자라 집 쪽으로 뻗어났다. 마당의 담과 집 외벽이 붙어 있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안방이 두 쪽으로 갈라질 판이었다. 

냄새보다 사나운 것은 들쥐였다. 코는 곧 냄새에 무뎌졌다. 지독한 냄새 속에서 숨을 쉬었고 밥을 먹었으며 하품을 했다. 들쥐에게는 무뎌지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간혹 들고양이가 나타나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을 쳤다. 잠시 후에는 떼로 몰려와 들고양이에게 덤볐다. 설치류에게 유별난 공격력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들쥐와 들고양이가 친구라도 된 것처럼 함께 집 안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집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부엌이나 마루청 밑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다 이빨이 날카롭고 검은 털이 긴 커다란 들쥐였다. 살쾡이처럼 큰 들고양이보다 쥐가 더 성가셨다. 고양이는 쥐를 잡았지만, 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5월 중순까지가 번식기인 들쥐는 겨울이 다가오도록 새끼를 낳느라 담장 아래서 낑낑거렸다. 들쥐는 새끼를 낳기 위해 금이 간 담장 아래 구멍을 팠다. 금은 점점 더 번졌다. 갈라진 틈을 메우거나 아예 담을 부숴버리지 않는다면, 슬금슬금 기어서 집까지 뻗어올 것만 같았다. 털이 없는 분홍색 들쥐 새끼 수십 마리가 담장 아래에서 꼼지락거렸다. 아이는 그 새끼들 중의 한 마리를 가져다가 방에서 길렀다. 아이의 살진 팔뚝보다 더 크게 자란 들쥐가 귀를 물어뜯어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기 전까지도 그들 부부는 아이가 들쥐를 기르는 줄을 몰랐다. 이불 아래서 들쥐가 뛰쳐나오기도 했다. 세상에 그렇게 크고 더러우면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동물은 처음이었다. 아내는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쥐를 몰았다. 아이는 들쥐를 쫒아 좁은 방 안을 뛰었다. 심약한 그는 기절해버렸다. 누운 그의 가슴 위로 쥐가 몇 차례 오르락내리락했다. 도망가려고 우왕좌왕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불을 털자 검은 쥐똥이 우르르 쏟아졌다. 들쥐의 타액이나 배설물이 호흡기로 들어갈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아내와 그는 고열에 시달렸다. 열이 없을 때에도 연일 해열제를 먹었다. 옷가지와 이불을 태우는 검은 연기가 집을 뒤덮었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검은 연기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검은 연기는 단지 그들의 집 상공에 잠시 머물다가 습지 너머로 사라졌다. 아내는 타 들어가는 이불 속으로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들쥐를 던져 넣었다. 몸통에 불이 붙은 들쥐가 집 안을 뛰어다니는 통에 아내와 그는 물통을 들고 쫓아다녀야 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벌레의 울음소리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모기떼들은 겨울이 다가오도록 귓가에서 날개를 윙윙거렸다. 귀뚜라미와 여치, 매미들은 이른 봄부터 울었다. 잠자리들은 봄이면 벌써 습지에 알을 낳았다. 마당의 수돗가에 잠자리가 낳은 알이 하얗게 쌓였다. 하루살이 떼가 하품을 하거나 밥술을 떠 넣는 입 속으로 날아 들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침을 뱉을 때면 까만 날벌레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모든 것은 무너져가는 담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이 모든 것과 동거해야만 했다. 그는 담을 다시 쌓기로 마음먹었다. 단단하고 갈라지지 않는 담, 무엇도 넘나들 수 없는 담을 쌓으리라. 할 수만 있다면 집 뒤의 풀숲도 다 불태워 버리리라. 습지를 황토로 매워 평평하게 일꾼 땅에 상추라도 심으리라. 거기서 나는 상추는 똥개에게나 줘 버리리라.

그는 무너진 담에서 가루로 부스러지는 벽돌을 한 줌 쥐고는 입을 열었다.

이것 좀 봐. 벽이 이지경인데도, 이걸 공사하려면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니 말이야. 이깟 담장 하나에……. 다 저 쓸모없는 고분 때문이야. 저기 뭐가 묻혔는지 알게 뭐야.

그의 시선 끝에 납작하게 엎드린 고분이 닿았다. 그것 말고도 서른 개가 넘는 고분이 마을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 고분들 때문에 마을은 사적지구로 지정되었다. 사적지구의 거주자들은 집의 신?개축은 물론이고 구조와 관련된 보수의 경우에도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매장 문화재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터에서 설사 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물보다 연대가 빠른 토기가 발견되거나 최고(最古)의 기마 인물상 같은 게 출토된다고 해도 쉬쉬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동네 어귀의 팻말에 적혀 있는 문화재보호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발굴된 유물은 국가가 소유했다. 발굴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건축주였다. 공연히 관청에 신고를 했다가는 문화재 출토에 대한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되고, 출토된 문화재를 관청에 뺏겨 버릴 수 있었다. 문화재 일부를 훼손하거나 혹여 유출 의혹을 받으면 재판도 없이 D시 외곽에 있는 교도소에 들어갈 수도 있다. 땅만 파면 유물이 출토되던 때가 있었다. D시가 도시로 정착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하도 땅을 파대서 D시는 파종 직전의 밭고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의 집이 있는 지구(地區)는 파헤쳐진 땅을 다진 후에 세운 곳이었다. 땅을 팔 때마다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예산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을 그냥 다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다져진 집터 밑에 누구의 사체가 숨어 있는지, 부장품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집터에 깔린 것이 왕의 부장품인지 한 세기 전의 미라인지, 아니면 전쟁 때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유골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관청에 신고만 하지 않는다면 훨씬 간단하고 저렴하게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관청에 신고하면 산업규격마크와 세금납부필증이 찍힌 벽돌을 사다가 시간 단위로 일당을 계산하는 문화재 관리청 산하 소속 인부에게 공사를 맡겨야 했다. 공사를 허가받는 절차도 무척 까다로웠다. 그깟 담장 하나 다시 짓자고 이 모든 번거로운 절차를 떠맡고 싶지는 않았다. 벽돌은 세 배나 싼 값에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벽돌 공장 관리자는 은밀한 루트를 통해 비허가 벽돌을 싸게 팔았다.

공사는 내일 밤부터 하기로 했다. 새벽 일찍 벽돌을 실은 트럭이 그의 집 앞에 닿을 예정이었다. 벽돌은 다른 도시에 사는 친척의 선물처럼 박스에 담겨 집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가 사는 동네는 인근의 U시, P시와 항구 D시를 잇는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었다.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차들은 기차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고속도로를 지나갔다. 화물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지층이 흔들렸다. 밤이 되면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웃의 일에 무심한 마을 사람들은 밤의 소음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방음벽을 높여 달라는 탄원서를 넣지 않았다. 소음으로 인한 불면증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밤의 소음은 마을에 수없이 솟아 있는 고분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또 다른 구성원이었다. 그 소음이라도 없다면 마을은 괴괴한 정적만 감돌 터였다. 소음이 생기는 일을 하기에는 밤이 적당했다. 이 지구에 동네가 생긴 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때 한꺼번에 지어진 주택들은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내려앉은 지붕으로는 물이 샜고, 꺼진 방구들은 불을 지펴도 데워지지 않았다. 콘크리트가 갈라진 마당으로는 비만 오면 하수가 역류했다. 불법 공사를 신고하면 관청에서는 포상금을 지급했다. 아이들 과자값 정도는 되는 액수였다. 이웃을 팔아먹고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집은 내놔도 팔리지 않았다. 간혹 부동산 업자들이 들어왔지만 불경기를 탓하며 곧 문을 닫았다. 부동산 거래가 경기와는 상관없다는 걸 마을 사람들은 다 알았다. 돈을 벌어 낡은 집을 비워 두고 다른 시(市)로 떠나기 전에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거주민들이 정착지를 벗어나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집을 수리하지 못하기를, 돈을 벌지 못하기를 바랐다. 불법 공사를 확인하면 서둘러 관청에 신고했다. 드물게 계약이 성사된 부동산 거래는 웃돈을 줘 훼방을 놓았다. 그러니까, 그가 목소리를 낮춰 다시 말을 꺼냈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일은 되도록 밤에 해야겠어.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D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두운 풀숲에서는 밤의 기운에 들뜬 벌레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붉은색 진흙 위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은 잡초 군락이 담 안을 굽어보았다. 키가 2미터는 넘는 것들이었다. 귀화성인 그것들은 대나무처럼 굵고 단단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먼 듯 가까운 듯 화물차 지나가는 소리가 길게 들렸다. 집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내가 화물차 불빛이 사라지는 길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 L이라는 사람, 믿을 수는 있는 거야?

L은 벽돌 공장 관리인의 은밀한 루트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의 큰 목소리가 못마땅한 듯이 일부러 소리내어 걸었다. 갑작스런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 마루청 아래를 들락거리던 쥐들이 잠시 숨을 죽였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있는 펌프로 다가가서 요란하게 펌프질을 했다. 녹이 슨 펌프에서는 쇳내가 났다. 힘껏 녹슨 쇠뭉치를 아래로 밀어내리자 양은 대야 속으로 물이 쏟아졌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밤이 되면 D시는 한겨울만큼이나 기온이 내려갔다.

그는 U시 사람이잖아. 이 도시에 있는 사람 중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아내는 요란한 펌프질 소리를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문제야. U시로 간 L을 믿을 수 있겠어? L이 이 동네를 떠나 U시로 이사를 간 게 다 포상금 덕분이라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이 다 그의 소행이라고 했어.

그는 아내 쪽으로 최대한 몸을 기울여 말했다. 

도리가 없다는 걸 알잖아. L 말고 우리에게 공사 장비를 대줄 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가 가진 것은 날이 무딘 삽과 자루가 흔들리는 낡은 곡괭이뿐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벽돌과 시멘트, 모래와 자갈뿐만 아니라 소음 발생률이 낮은 수동 드릴까지 모두 빌려야 했다. 아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느리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그림자가 부엌 유리문에 가득 찼다. 부모가 죽은 이후로 아내는 이전보다 45킬로그램이나 살이 쪘다. 갑자기 찐 살로 관절과 내장이 망가졌다. 팔과 다리가 시렸고 관절염과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늘어난 위장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먹어야 했다. 아내는 물컹한 몸의 연체동물, 그 중에서도 딱딱한 껍질에 미끈거리는 살을 가진 달팽이를 연상시켰다. 쉴새없이 점액을 분비하면서 근육 발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꿈틀거려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달팽이. 아내는 실로 달팽이처럼 느릿하게 걸어다녔고, 지나간 자리에 음식물 찌꺼기를 남겼다. 그는 부쩍 살이 더 쪄가는 아내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뚫어지게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는 때가 낀 살갗 밑의 퍼런 멍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힐끗 아이의 멍을 들여다보았다. 멍 때문에 아이는 더욱 더러워 보였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누구를 닮았는지 헛갈렸다. 지금은 명백히 아내를 닮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아내 부모의 주검이 있는 이 집으로 갓 태어난 아이를 데려오면서 품에 안았던 것이 아이와 함께 한 유일한 외출이었다. 아이를 능원에 데려간 적도 없었다. 그는 23구의 고분이 모여 있는 능원의 관리사무소에서 일했다. 문화재관리공단 산하의 계약 별정직 사원이었다. 능원에 관람 온 딸아이 또래들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져서 뛰어다니며 고분의 잔디를 망가뜨렸다.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그를 놀라게 했다. 찾기 어려운 곳에 쓰레기를 남겼으며 아무데나 오줌을 눴다. 그는 아이들이 싫었다.

1970년대에 말이지, 그 능원을 조성하면서 담을 쌓은 일이 있었어. 거기서 기반 공사를 하는데 족히 수천 년은 된 무덤이 나왔어. 돌무지덧널무덤보다 수백 년은 앞선 것이야. 조성 예정이던 담장을 따라 땅 밑에서 열댓 개는 나왔다고 했어.

그는 식은 밥을 떠 넣으며 중얼거렸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게 기원전 몇 세기의 유물인지는 몰랐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매표소 옆 게시판에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는 23구 중 내부가 공개된 고분들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도 줄줄이 외울 수 있었다.

혹시 알아? 우리 집 담장 밑에서도 고대 왕의 부장품이 나올지……. 담을 부수고 땅을 파기 전에 재라도 올려야 되는 거 아닐까? 억울하게 죽은 왕이라면 그 귀신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가 그를 향해 숟가락을 던졌다. 밥풀이 묻어 있는 숟가락에 왼쪽 눈이 맞았다. 아이가 낮게 키득거렸다. 아내는 죽은 부모의 귀신이 아이에게 들러붙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부모의 혼령이 기갈 든 귀신이 되었다고 믿었다. 염치없는 혼령들,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저 어린것에게…….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를 쓰다듬거나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그는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숟가락을 집어왔다. 아내는 이미 그의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고 있었다. 이럴 때는 아내를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아내는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화가 풀릴 때까지 아이를 때렸다. 더 화가 나면 그를 때렸다. 매질하는 아내는 무서웠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이였다. 아이는 찡그리지도 않고 아내가 때리는 매를 다 맞았다. 참을 수 없을 때면 아내의 팔목을 물었다. 아내와 아이는 거대한 육식동물처럼 엉겨 붙어 싸웠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에 밥을 쑤셔 넣었다. 머릿속에 반달 모양의 푸른 옥이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금관이 떠올랐다. 처음에 담장을 수리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들쥐 때문이었다. 점차 파헤쳐진 담장 밑에서 고대 왕의 부장품이 출토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이 집은 고대 왕의 무덤을 다진 땅에 지어졌을 것이다. 지층 밑에 무엇이 숨겨 있는지는 실로 아무도 모른다. 그는 히죽 입술을 당겨 웃었다. 묵묵히 남은 밥을 입에 쑤셔 넣으며 내일 시작될 공사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배는 불렀지만 포만감은 들지 않았다.


새벽에 도착하기로 한 트럭은 오지 않았다. 사실 당장 벽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벽돌뿐만 아니라 공사에 필요한 다른 것들, 이를테면 자갈이나 모래, 시멘트, 드릴 같은 것도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이 없어도 그는 곧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담을 쌓자고 해도, 일단 일부가 무너져 있는 담장을 치워야 할 것 아닌가. 우선 금이 가 붕괴되고 있는 담장을 부숴야 했다. 그러고 난 후에야 벽돌과 시멘트, 모래 따위가 소용에 닿을 터였다.

생각해보면 해머나 드릴은 쓰지 않는 게 좋아. L이 당장 그 모두를 빌려준다고 해도 쓸 수 없었을 거야. 

드릴도 없이 어떻게 벽을 허물 거냐고 묻는 아내에게 그가 대답했다.

그럼 무술이라도 써서 벽을 허물겠다는 말이야?

아내는 L을 믿은 게 잘못이라며 투덜대듯 대꾸했다.

드릴을 쓰는 건 안 돼. 그 소리를 들으면 당장 주민들이 달려올 거야. 날마다 조금씩, 소리나지 않게 벽을 부숴야 해.

관청과 마을 사람들을 피하자니 일을 하기 위한 규칙이 까다롭고 복잡해졌다. 비허가 벽돌을 쓸 것, 트럭믹서를 쓸 수 없으므로 적당량의 시멘트와 모래, 자갈을 비율에 맞게 섞어 손수 혼합용 콘크리트를 만들 것. 담을 부술 때도 드릴이나 해머와 같이 소리나는 장비는 쓸 수가 없음. 그러므로 이 모든 공사는 인적이 끊긴, 고속도로의 소음이 심한 밤에 할 것.

L은 은밀한 공사를 끝낸 후에 집을 팔아 U시로 이사를 간 사람이었다. L이 주택 매매 계약에 성공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그동안 왜 아무도 L의 불법 공사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했는지, 왜 부동산 거래를 훼방 놓지 못했는지, 왜 L이 돈을 벌도록 방치했는지에 대한 한탄이었다. 

일은 무척 쉽네. 단지 줄에 맞춰 벽돌을 늘어놓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L은, 그것은 성냥을 쌓아올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담이라는 게 얼마나 쌓기가 쉬운데 그러나. 평평한 바닥에 네모난 벽돌을 한 장 올리지. 그 사이사이에 반죽한 시멘트를 발라줘. 그 시멘트가 굳기 전에 벽돌 한 장을 더 올리고 다시 시멘트를 바르지.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어느새 담이 되지. 단 D시에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도 금지된 게 있다는 걸 알아둬. 무너진 담을 보수하거나 마당에 펌프를 들어내고 수도관을 연결하는 일 따위 말이야.

L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연거푸 강조했다.

장비가 오기 전까지 우선 집에 있는 삽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둠이 짙어지기를 기다려 쇠로 된 날을 벽에 내리쳤다. 담은 꽁꽁 얼어 있었다. 삽으로 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삽을 내려놓고 발길질을 했다. 발이 얼얼하게 아파 왔다. 어두웠기 때문에 그가 발길질을 하는 것이 담장인지, 그의 아내인지, 들쥐인지, 담 안으로 고개를 내민 돼지풀 군락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해댔다. 고속도로에서 화물차의 전조등이 비칠 때마다 벽에서 피어난 먼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펌프에서 물을 길어 벽에 뿌렸다. 물을 먹은 담장은 부스러뜨리기가 훨씬 쉬웠다. 벽돌에 물을 잔뜩 먹인 후에 삽으로 끝부분을 슬슬 내리쳤다. 발길질을 해댈 때는 미동도 않던 벽돌은 비교적 쉽게 부스러졌다. 비가 와준다면 이 공정은 빨리 끝날 터였지만 비가 오려는 기미는 없었다. 펌프질로 벽에 뿌릴 물을 충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아침에는 맹렬한 기세로 지하수를 퍼올리던 펌프는 밤이 되면 물줄기가 약해졌다. 게다가 몸에 튀긴 물은 몸을 얼어붙게 했다. D시는 오후에는 너무 덥고 지표가 뜨거워서 바깥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해가 지면 모든 게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다음 날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아내는 그가 삽질하는 모습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그를 방으로 불렀다. 아내는 휘장처럼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던 치마를 걷어올렸다. 걷어올라간 다리 사이에 검은 음모가 들쥐의 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바지를 내리고 아내의 몸에 올랐다. 질액이 습지의 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듬거려 늪 속으로 시커먼 쥐 한 마리를 밀어 넣었다. 흥분한 아내는 그의 등을 할퀴며, 좀더 빨리, 빨리, 하고 그를 다그쳤다. 그는 재게 엉덩이를 놀렸다. 아내의 살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일으켜진 상반신이 몹시 추웠다. 벌거벗은 아내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내가 힘을 주어 그의 팔을 꽉 쥐었다. 팔이 끊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팔을 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흥분한 아내는 듣지 못했다. 사정의 순간은 짧았다. 바지를 추슬러 입고 팔뚝을 걷어보니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아내는 헐떡이며 옷을 벗은 채 누워 있었다. 음부의 털이 뭉텅 빠져서 이불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벌거벗은 아내에게 이불도 덮어주지 않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문 앞에 아이가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아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내는 치한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벌거벗은 몸을 이불로 가렸다. 아이의 두 다리 사이로 뜨끈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아이의 오줌에서 나는 김이 다 보였다. 아이는 오줌이 묻은 다리를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 사이로 침을 찍, 뱉었다. 가래가 섞인 침은 마루에 떨어졌다. 아내는 벌거벗은 채 걸어 나와 아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아내가 손을 들어 닥치는 대로 아이를 때리는 모습이 문에 비췄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는 벽을 향해 되는 대로 삽질을 했다. 아내가 아이를 때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가 내는 소리는 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잠을 깨고 말아. 애를 잡는다고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제발 조용히 해. 

그의 목소리는 담장 밑에 웅크린 들쥐에게나 들릴 만큼 작았다. 그는 얼른 담장을 쌓아 올리고 싶었다. 잡초나 날벌레들이, 들쥐가 넘보지 못하는 단단한 집을 갖고 싶었다. 어디까지가 집이고, 어디까지가 습지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잡초 군락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집 뒤의 고분을 파서 습지를 메워 버리고 싶었다. 아예 집을 버리고 도망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L처럼 U시로 가든지, 아니면 P시나 D시 같은 곳도 상관없었다. 그는 다시 묵묵히 벽에 삽질을 계속했다. 아내더러 내일은 집 뒤에 있는 고분의 잡초라도 뽑으며 운동을 하라고 말할 참이었다. 어차피 다 무덤뿐이거든. 그게 D시를 먹여 살리지, 우리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그는 중얼거리며 삽을 재게 놀렸다. 힘껏 달려 금이 간 담장에 몸을 부딪쳤다. 견딜 수 없이 몸이 저렸다. 셔츠로 가린 몸 안에서 푸른 멍이 점점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고속도로에서 쿵쾅거리며 화물차들이 지나갔다. 그럴 때면 마당으로 깜빡거리며 빛이 들어왔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지반이 흔들리는 소리도 이어졌다. 빛과 소리는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밤새 반복하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벽돌은 오지 않았다. 아내는 트럭을 기다리느라 밤에도 잘 자지 못했다. 낮에도 외출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담을 다 허물지도 못했다. 당장 필요한 건 벽돌이 아니라 물이었다. 그는 아내더러 낮 동안 담장에 물을 좀 뿌려 놓으라고 했다.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물기는 오후의 햇살에 금세 증발해버렸다. 퇴근해 돌아와 보면 아내는 부엌의 수도에서 연결한 긴 호스를 담장 쪽으로 향하게 해놓고 대문 밖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다. 건성으로 호스를 잡고 있어서인지 물은 담장에 뿌려지는 것보다 풀숲에 떨어지는 게 많았다. 흠뻑 물을 머금은 잡초들은 담 안으로 한껏 고개를 드밀고 있었다. 바닥은 호스에서 샌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수도관과 호스 연결 고리가 느슨했다. 주저앉은 아내의 엉덩이에 물이 묻어 있었다. 앉은 채로 오줌을 눈 것 같았다. 물이 새기는 했지만 호스는 요긴하게 쓰였다. 펌프질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이 훨씬 빨리 진척되었다. 왼손으로는 호스를 잡아 물을 뿜고, 오른손으로는 금이 간 벽돌을 내리쳐 가루를 긁어냈다. 담은 눈에 띄게 기울어져 갔다. 웃자란 잡초들이 무너져가는 벽을 공고히 막아주었다. 잡초들은 담보다 더 견고하게 집을 감싸 안았다. 어느 누구도 잡초 군락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거였다.

그는 일을 하다가 지치면 집 뒤에 있는 고분에 올라갔다. 자신이 일하는 능원에서는 한 번도 고분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고분에 올라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딸아이 또래의, 그보다 크거나 더 작은 아이들은 쉴새없이 고분을 오르내렸다. 그는 호루라기를 불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고분 위에 올라간 아이들을 쫓아야 했다. 아이들을 쫓기 위해 고분 위에 올라가려면 아이들은 아저씨도 올라오면서 왜 우리는 못 올라가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는 고분 밑에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들은 고분 꼭대기로 올라가 미끄럼틀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뿔뿔이 도망쳤다. 그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잡으려다가 결국 한 아이도 잡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가 계약 별정직 사원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각이 접힌 모자를 쓰고 누런 제복에 관리라고 쓰인 완장을 찼다. 사납게 호루라기를 불어댈 때도 많았다. 그래도 아무도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고분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무서웠다. 무엇보다 고분이 무서웠다.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더없이 고마웠다. 덕분에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D시의 고분으로 먹고살았다. 한식날 고분에 심을 잔디를 팔아 1년을 먹고사는 집도 있었다. 고분의 잡초를 제거하는 공공근로사업이 무의탁 노인들의 생계가 되기도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D시 전체에 산만하게 흩어진 고분 앞에 좌판을 벌리고 솜사탕이며 냉차를 팔았다.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모형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실로 고분은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밥벌이였다.

가로등도 없는 이 마을에서 깜깜한 밤에 의지할 만한 것이라곤 고속도로를 오가는 화물차의 전조등 불빛이 전부였다. 도로 위에 차가 지나갈 때마다 전조등 빛은 유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동네를 비추었다. 고분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집이 간신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평기와 지붕에 덧댄 슬레이트 끝으로 굳게 닫힌 대문이 보였다. 집은 어둠 속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 마당 끝, 무너져 가는 담 한쪽에 잡초 군락이 뒤엉킨 모습이 꼭 오래 손보지 않아 퇴락한 무덤을 연상시켰다. 그는 쇠락한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 석물(石物)을 다듬는 기술공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에야 담을 다 부술 수가 있었다. 이제 바닥의 콘크리트 기단을 파내고 다시 단단하게 기단을 올린 후에 L씨의 말대로 차곡차곡 벽돌을 쌓으면 될 터였다. 아내는 자주 습지로 갔다. 담을 부순 가루를 자루에 담아 들고 가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가는 동안 질질 흘린 벽돌 가루는 다시 돌아올 길을 찾기 위해 일부러 흘려 놓은 표식처럼 보였다. 아내는 습지에다 벽돌 가루를 쏟아 부었다. 습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것들을 빨아들이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습지에 다녀오면 아내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풍겼다. 모든 쓰레기는 습지로 모여들었다. 빨래한 물이나 음식 쓰레기, 요강의 내용물이나 동물의 배설물, 심지어는 애완동물의 사체까지. 습지에 고인 물은 낮 동안 높아진 기온에 기대어 농밀하게 부패한 후에 서둘러 냄새를 풍겼다. 아내가 습지에 빠진 적도 있었다. 벽돌 가루를 쏟아 붓기 위해 너무 바짝 습지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내는 돼지풀 군락을 잡고 간신히 기어 나왔다. 아내는 목이 터져라 그를 불렀다고 했다.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내의 목소리보다 벽을 향해 내리치던 쇠삽의 울림이 더 컸다. 덜컹거리며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화물차의 소리가 더 컸다. 아내는 온몸에 구정물을 묻힌 채 돌아왔다.

드디어 콘크리트 기단을 파낸다고 생각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기단을 파내면 속살처럼 부드러운 흙이 나올 것이다. 지하수를 머금어 몰캉몰캉하고 질척이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흙. 그 흙 속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그 흙들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음 공정은 즐거웠다. 단단한 콘크리트를 파내자니 할 수 없이 곡괭이를 써야 했다. 아내는 소리가 덜 퍼지도록 콘크리트 위에 물에 절은 낡은 담요를 깔아 주었다. 일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자루가 흔들리는 곡괭이로 물에 젖은 담요를 파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안방에서 전선을 연결하여 마루 한가운데 매단 백열등은 조도가 높았다. 유난히 눈이 시렸다. 그는 눈을 감고 감각에 의지하여 자연스럽게 자루를 놀렸다. 담요의 물기가 얼굴에 튀었다. 동네 사람들은커녕 잠들어 있는 아이도 깨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벽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곧 벽돌이 쓰일 때가 올 것이다. 공장 관리인은 머지않아 도착할 예정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요새는 허가된 것보다 허가를 못 받은 벽돌의 물량이 더 딸린다고 했다. 공장 관리인은 이렇게 되면 허가를 받지 않은 벽돌의 가격도 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아내는 가격을 올린다는 말에 더 이상 닦달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도착할 수 있게 힘써 달라고만 말했다.

담이 낮아질수록, 풀숲의 잡초들이 점점 집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보니 집 안으로 들어오는 들쥐나 벌레들의 수도 놀랄 만큼 많아졌다. 백열등을 연결해놓은 줄에는 30센티미터 간격으로 파리를 잡는 끈끈이가 달렸다. 처음에는 끈끈이에 숱한 벌레들이 달라붙었다. 모기, 파리뿐만 아니라 잠자리와 하루살이, 비행을 시도했던 귀뚜라미와 여치까지. 아내는 아침이면 저녁에 달아 놓은 끈끈이를 치우고 새로운 끈끈이를 달았다. 끈끈이들은 혓바닥을 길게 내민 도롱뇽처럼, 줄을 쳐놓은 거미처럼 주위로 날아오는 것은 모조리 잡았다. 그것은 거대한 식충식물의 잎사귀처럼 보였다.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벌레뿐이 아니었다. 무너지긴 했지만 담이 남아 있을 때는 구멍으로 드나들던 들쥐가 무시로 드나들었다. 담이 무너지면서 들쥐가 출입하던 구멍도 사라져 버렸다. 들쥐들은 더 큰 구멍이 생긴 것에 쉽게 자족했다. 아내는 곳곳에 덫을 놓았다. 덫에는 과연 쥐가 자주 걸려들었다. 그러나 쥐들은 발목이나 목이 덫에 물린 채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덫에 걸렸다고 해서 당장 활동을 멈출 만큼 나약한 것들이 아니었다. 덫을 끌고 마루청 밑을 활보했다. 덫을 끈 채 습지 쪽으로 도망쳐 가는 놈도 있었다. 간혹 덫에 걸려 동작이 느려진 쥐를 잡기도 했다. 아내는 잡은 쥐를 삽으로 쳐서 죽였다. 날을 세운 후 머리통을 내리쳤다. 피와 내장이 터져 나오는 걸 확인하고 난 다음 꼬리를 잡아 빙빙 돌려서 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습지의 악취는 나날이 심해졌다.


드디어 콘크리트도 거의 다 파헤쳐졌다. 처음에 기단 공사를 할 때 거푸집을 형편없이 낮게 잡은 모양이었다. 기단이 약하니 담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이제 다 끝났다며 소리 높여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습지로 쓰레기를 버리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곡괭이 끝에 둥근 자갈이 닿았다. 그는 마치 부장품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밀도가 낮은 자갈을 깨는 일은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 것에 비할 게 아니었다. 천천히 곡괭이를 놀렸다. 끈끈이에 달라붙은 벌레들이 윙윙대는 소리도 즐겁게 들렸다. 풀숲에서 풍기는 악취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숨을 크게 내쉬고 자루에 힘을 실어 곡괭이를 내리꽂았다. 순간 차가운 것이 뿜어져 나와 얼굴을 강타했다. 처음에는 발등에서 솟아오르는 피인 줄 알았다. 곡괭이로 발등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발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얼굴에 닿는 것은 피처럼 따뜻한 게 아니었다. 백열등 아래에서 그것은 오줌 줄기처럼 누렇게 보였다. 하수(下水)였다. 힘껏 내리친 곡괭이 끝이 하수관에 닿은 모양이었다. 오물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온몸이 금세 젖었다. 갑작스레 추위가 밀려왔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며 일단 뚫린 구멍을 담요로 덮었다. 물줄기는 금방 담요를 적셨다. 하수구로 빠져 나가지 못한 오물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이 오물이 솟구쳐 마당으로 스며들고 풀숲의 각종 잡초에게로 흘러들었다. 키 큰 돼지풀들이 아우성치며 물을 받아 마셨다. 그는 곡괭이를 던져 버렸다. 왕의 부장품이나, 반역자의 해골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집 밑에는 오물을 실어 나르는 하수가 길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집 바깥으로 나왔다. 화물차의 전조등이 비추는 따뜻한 고분 위로 올라가 잠시 쉴 생각이었다. 그깟 하수가 넘쳐난다고 해서 집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분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몸이 덜덜 떨려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마당에 거대한 살덩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그림자를 향해 소리쳤다. 얘야, 얼른 집으로 들어가거라. 마당에는 나오지 말거라. 그림자는 솟구쳐 나오는 하수를 건너 습지 쪽으로 건너갔다. 그는 습지로 간 거대한 그림자를 데리러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고분을 내려왔다.

딱딱한 돼지풀 군락의 줄기를 헤쳤다. 가늘고 딱딱한 가시가 손바닥을 찔렀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에 피가 맺혔다. 가지 끝에 옷이 걸렸는지 북 찢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습지 가까이 갔다. 습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까 본 그림자는 아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막 돌아서 가려는 순간 습지 한가운데에 희뿌염하고 둥그스름한 물체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썩어가는 순채 덩어리들과 시커멓게 떠 있는 죽은 들쥐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습지에 빠져 죽었다는 여자의 오래된 사체일지도 모른다. 단지 거대한 쓰레기 더미일 수도 있었다. 그는 돼지풀 군락의 잎들을 벗겨 긴 막대를 만들었다. 긁힌 팔뚝에 피가 맺혔다. 피보다는 손바닥에 닿은 끈끈한 점액질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피는 덜덜 떨리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는 긴 가지 끝으로 허옇게 등을 보이고 있는 물체를 찔러 보았다. 가지가 짧아서 잘 닿지 않았다. 그는 습지 가까이로 더 다가갔다. 다시 긴 가지로 찔렀다. 움푹 들어갔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자신의 한쪽 발이 습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무릎 정도나 닿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는 발에 힘을 주었다. 발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 덕분에 균형을 잃고 습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습지는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깊었다. 그는 넘어져서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균형을 잃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완고하고 단단하게 등을 보인 채 누워 있는 그 거대한 물건을 향해 팔을 뻗었다. 뭐라도 지탱하지 않으면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 물체를 지지대 삼아 습지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의 손이 닿자, 식빵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그것이 출렁거렸다. 그는 물체를 꽉 부여잡았다. 덩어리는 조금씩 움직여서 그에게로 가까이 왔다. 아내였다. 아내는 이제야 그를 만나 유감스럽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여기서 만난 것이 뜻밖이기도 하고, 아내가 눈을 뜬 채로 죽어 있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도대체 언제 아내가 죽은 것인지 의아스럽기도 해서, 게다가 뜬 눈에 오물이 시커멓게 낀 것에 놀라서 그만 소리를 질렀다. 그가 지른 소리는 습지를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돼지풀 군락을 넘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 트럭이 온다면, 그때 목청껏 소리를 높여 습지에 사람이 빠졌다고 말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아내의 살덩이를 더욱 꽉 부여잡았다. 고속도로에서 화물차들이 불빛을 뿜으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내의 몸이 순간 환하게 빛났다. 그는 담이 다 부서진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다. 어디까지가 집이고 어디부터가 습지인지 알 수 없었다. 하수는 아직도 콸콸 쏟아 넘치고 있을까. 애당초 땅 밑으로 하수가 흐르는데다가 인접한 습지 때문에 기단은 단단하지 못했다. 아무리 단단한 기단을 세운다고 해도 땅 밑으로 끊임없이 새어 들어온 물 때문에 언젠가는 벽에 금이 갈 것이고, 담장이 휘어질 것이고, 삽자루를 세워 벽을 부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철통같은 담벼락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조금씩 더 깊이 습지로 빨려 들어갔다. 언젠가 한 번은 꼭 습지의 깊이를 재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뚱이로 습지의 높이를 재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아내를 부여잡았다. 아내의 살이 너덜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그 바람에 그는 균형을 잃고 속으로 더 빠져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담처럼 집을 감싼 잡초 군락이 지붕에까지 닿을 듯 자라 있는 것을 보았다. 풀숲은 나날이 우거지고 습지는 그 자리에서 계속 썩어갈 것이다. 그와 아내의 너덜너덜해진 살가죽을 먹은 개구리들은 더욱 크고 시끄럽게 울 것이다. 그 개구리를 잡아먹은 들쥐들은 더욱 사납게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습지는 그의 몸을 완전히 감싸안고 점점 집 쪽으로 뻗어나갔다.《문장 웹진/2005.8》



추천 콘텐츠

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