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지중해의 노래

  • 작성일 2005-10-18
  • 조회수 4,359

 

구효서


어땠어?

소영에게 사람들은 그렇게 묻는다. 남자든 여자든.

그러면 소영은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대답한다. 좋았어.

얼마나 좋았는데? 두 마디로 물으면 두 마디로 대답한다. 정말 좋았다니까.

사람들의 질문을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영은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지중해. 지중해가 어땠냐고 묻지만 그들은 지중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중해의 느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잘 다녀왔느냐는 인사일 뿐이다. 잘 다녀왔다고 대답할 밖에.

언젠가 정백과 함께 영국 로열발레단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사람들은 물었다. 어땠어? 그때도 똑같이 대답했다. 좋았어. 어땠어?라고밖에 물을 수 없는 그들에겐 좋았어,라는 대답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묻고 대답은 하지만 소영과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데는 소영의 탓이 크다. 정백을 만난 뒤로 소영은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은 것 같다. 밥 먹었어? 부장님께 영수증 제출했어? 그 탤런트 커플 아무래도 결혼 잘못한 것 같지 않아? 수도권에서는 5천만 원짜리 전세는 꿈도 꾸지 말래. 차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친구 크라이슬러를 샀을까. 상대가 정백이 아니라면 어떤 말도 하지도 듣지도 않은 것 같다.

정백하고라면 달랐다. 바람이 불어……. 그의 말은 곧 바람이 되어 소영을 관통하며 흔들었다. 말이 아니더라도 소영은 충분히 반응했다. 그의 눈빛에 소영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정백은 소영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지중해가 보고 싶다.

정사가 끝난 뒤, 땀이 마르지 않은 알몸으로 누워 소영이 말했다. 6년 전 여름, 스물네 살 때였다. 소영은 편백이 흔들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지중해. 정백은 그렇게만 말했다.

어째서 지중해였을까. 소영도 그 까닭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지중해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페드라>라는 영화에서 검은 지중해를 봤다. 흑백영화였다.  <지중해>라는 영화에선 명백하게 검푸른 바다였다. TV 광고나 잡지에서 보았고, 운동 경기 사이사이 보여주는 아득한 바다를 보려고 아테네올림픽 기간에는 늘 TV 앞에 있었다. 바다의 깊은 빛깔을 보면서 거대한 멍 같다고 생각했다. 정백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온전히 정백에게 가지 못하고 그만 지중해로 흘러든 것만 같았다. 외로움과 기다림의 시간들이 지구 저편의 바다에 고스란히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사진 나왔어? 함께 일하는 여자들이 묻는다. 나오면 보여줄 거지? 소영은 대답한다. 응. 대답하고 나서야 여행가방 어디엔가 있을 카메라와 필름을 떠올린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넘도록, 소영은 여행가방을 열지 않고 있다.


토리노에는 마시노 성을 본뜬 특별한 펜쇼네가 있었다. 2층 건물과 3층 건물이 뒤섞인 제법 규모가 큰 숙박업소였다. 대리석 벽마다 짙은 아이비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실제 마시노 성보다 더 고색창연했다.

아치형 현관을 들어설 때까지 업소 직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2층 동편 복도 오른쪽 첫 객실이야.

소영은 나선형 돌계단을 오르면서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건물 내부는 어둡고 습했다. 전기 조명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크 건축을 그대로 모방하려 애쓴 흔적들이 여기저기 드러났다. 나쁘지 않아,라고 소영은 중얼거렸다.

2층 동편 복도 오른쪽 첫 객실이야.

그의 낮은 음성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객실 앞에는 붉은 타월을 한쪽 팔에 걸친 키 작은 사내가 서 있었다. 눈부신 흰 셔츠에선 잘 훈련된 성실함이 튕겨져 나왔다. 소영이 접근하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소리없이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JUVENTUS 201’이라고 음각된 팻말이 객실 문 중앙에 걸려 있었다. 소영은 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얼마간 서 있었다.

그가 방 안에 있고 내가 찾아온 거야.

예전에는 소영이 방 안에 있었고 그가 찾아왔었다. 문손잡이를 바라보며 그를 기다릴 땐 늘 가슴이 옥죄었다. 언제나 기다림에 지칠 때쯤 딸깍, 하고 문이 열렸다. 영영 문이 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땐 뒤늦게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은 그냥 철수해.

제삼자를 통한 일방적 통보. 정백과의 관계가 확연해지면서 자신의 딱한 존재가 각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소영은 다시 그 양재동의 객실에서 정백을 오랫동안 기다리곤 했다. 그가 프랑스의 그레노블로 떠날 때까지. 보고 싶다고 소영이 먼저 말하지 못했다. 그런 관계였다.

이번엔 그가 방 안에 있고 내가 찾아온 거야.

소영은 자신의 속말을 다시 음미했다. 서울과는 반대의 경우지만, 관계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양재동에서든 토리노에서든 그들이 만나는 장소는 객실 안이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이 너무 깨끗하고 고와서 소영은 신발을 벗고 말았다. 벗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얼굴이 빨개진 뒤였다.

제가 이래요, 늘.

그 말이 6년만의 첫인사가 되어버렸다.

어때서? 어차피 모두 벗을 건데.

다른 상대였다면 느물거린다고 여겨졌을 말투가, 여섯 해가 지나서도 여전히 소영의 몸을 닳게 했다. 소영에겐 언제나 그가 특별한 존재였다.

다시 객실 문으로 돌아가 신발을 신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소영은 허둥거렸다. 정백은 그런 소영을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같은 여자는 없을 거예요. 이곳은 다들 예쁘고 세련된 여자들뿐이잖아요. 그죠?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귀에 낱낱이 들렸고, 소영은 그게 싫었다.

소영이 같은 여자는 없어. 내겐 언제나 소영만이 특별하고 유일해.

객실에서 만나는 여자 누구에게나 쓰는 말일 거라는 짐작을 해보지만, 소영은 자신이 여러 여자 중 하나여도 좋다는 생각에 금방 빠져 들었다. 소영은 늘 그런 식이었다. 내가 당신께 그런 존재라면 어째서 날 객실에서만 만나는 거죠?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래서였다. 그에게 정말로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이고 싶을 뿐이었다. 평생 딱 한순간만이라도.

지중해는…… 보았나?

그가 창가로 가 커튼을 걷으며 물었다.

아직…… 보면 되지요, 뭐. 내일이라도. 아니면 모레라도.

음.

정백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그새 그의 머리카락은 반나마 세어 있었다.

지중해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소영이 어제 그랬잖아. 지중해를 보러 이탈리아에 온 거라고.

제가 그랬던가요?

그가 옛일을 기억할 리는 없어. 소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자신의 건망증을 먼저 탓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는 그가 야속하기는커녕 무작정 좋았다. 6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자신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싫었고, 금방 괜찮아졌다.

그의 말대로 내가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라면 지중해를 보고 싶다던 내 말을 잊지 않았겠지. 함께 보자고 했겠지. 펜쇼네의 객실이 아닌, 밀라노의 공항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겠지. 언제나 말했던, 특별하고 유일하다는 뜻은 대체 무얼까. 내 몸의 일부분이거나 나의 성적 취향 중 어떤 요소를 말하는 것뿐일지도 몰라. 아니 아니, 상관없어. 어쨌든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걸.

정백이 소영 앞으로 다가오며 웃옷을 벗었고, 그것을 바로크풍의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다.

돌로 지어서 그런가요. 건물의 외관이며 객실의 분위기가 무거워 보여요.

소영이 말했다.

안정돼 보이기도 하지. 곧 적응이 될 거야. 좋아하게 될 걸.

당신과 함께라면 뭐든지 좋아요,라는 말이 왠지 성급하게 느껴져 소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던 그의 웃옷을 집어 들고 옷장처럼 보이는 가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때 정백의 손이 소영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와 닿았다. 소영은 습관처럼 생각했다. 옷을 벗어야 할 것인지. 특별하고 유일하다는 말, 그리고 지중해에 대한 환기는 정사를 나누기 전에 주고받는 무의미한 의례적 대화가 아니었을까. 다른 점은 토리노와 서울이라는 사실뿐, 그와 나라는 것과 객실에서의 만남, 그리고 그의 옷을 챙기는 행위까지 한결같지 않은가……. 정백은 아주 뜸하게 찾아오던 소영의 손님이었다.

소영은 천천히 걸어가, 안심하고 그의 옷을 옷장 안에 걸었다. 그는 급히 서두르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카펫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무거운 느낌들이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소영의 나이 스물에 정백을 처음 만났다. 옅은 회색 세로줄무늬 드레스 셔츠에다 노란색에 가까운 금빛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금방 사 입고 온 것 같은 그의 깨끗한 양복에서 신상품의 예리한 서슬이 느껴졌다.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굴지의 기업에서 비중 있는 업무를 담당하는 듯한 사람의 중후함이 엿보였다.

그는 소영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친절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돈을 주고 얼마간의 은밀한 시간을 샀을 뿐이라고, 비즈니스맨다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소영의 옷을 벗길 때마다 그는 자신의 옷도 하나씩 벗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소영의 가슴을 쓰다듬지도 않았고, 유별난 방식으로 하지도 않았으며, 이것저것 난감한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기분 나쁘지 않을 몇 마디 말들, 몸을 나누고는 있으나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듯한 완강한 감촉, 끝나고 난 뒤 민감한 기계를 조립하는 듯한 옷 입기. 그가 옷을 다 입었을 때는 과연 그와 정사를 나누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어딘가 다르군요.

손님의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의외라는 듯 그는 잠깐 소영과 눈을 맞추었다.

다들 이렇게 하지 않나?

그리곤 말했다.

나는 정백이라고 해, 임정백.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때 제 말이 정확치 않았나 봐요.

창문 밖으론 이탈리아의 남쪽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라니? 무슨 말?

생각 안 날 거예요. 처음 만났던 날 제가 말했거든요. 선생님은 어딘가 다르다고.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요?

정백은 말없이 냉장고로 가 몇 개의 유리 용기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다들 이렇게 하지 않나?라고 했어요.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요? 미안. 사실 그때 저에겐 약간의 혼동이 있었어요. 어딘가 다르다는 건 행위를 뜻한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음, 전체적으로 음, 뭐랄까, 인상이 달랐다는 뜻이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도 말을 정확하게 할 수 없네요. 저 말이 많죠?

설레고 반갑고 부끄러워서 그래요. 서울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소영은 늘 그 앞에서라면 수줍음을 탔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백은 두 개의 도자기 찻잔에다 용기 안의 내용물들을 차례로 따라 배합했다.

정백이 다녀간 뒤로 소영은 그를 기다렸다. 그를 안기 전, 새 옷의 예리한 서슬이 느껴졌을 때부터 소영은 이미 그를 맘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랬다. 여자를 안는 그의 취향과 습관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의 손길과 몸짓과 숨결만이라면 그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조심스럽고 성실한 동작들도 자신의 욕구에 따른 것이었을 뿐 소영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소영은 그만을 기다리고 싶었다. 그에게만은 자신의 존재가 특별하기를 바랐다. 옷을 벗고 그와 함께했던 침대 위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 그것이 소영으로 하여금 그를 기다리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객실이 아닌, 길 위에서의 우연한 일별이었더라도 충분히 맘을 빼앗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영에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더디게는 두 달에 한 번 소영을 찾았다. 더러는 다른 업소의 다른 여자를 찾기도 하는 모양이었으나 소영은 오로지 그만을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 뒤로 소영은 손님을 뜸하게 상대했다. 소영은 업소 소속이 아니라 부장과의 개별적 계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출타가 자유로웠다. 가끔씩이나마 그가 소영을 찾았던 것은 소영을 잊지 않고 있었다거나 보고 싶어서였다기보다는,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그 업소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을 뜸하게 상대하다 보니 수입이 줄어들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외식을 하는 대신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며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았다.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무료하고 외롭고 슬펐으나, 그를 기다리는 일이었으므로 아픔조차 소중했다. 허망하지 않았다. 쓸쓸함으로 충일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기다림의 아린 맛을 알아가는 건가? 소영은 그런 자신이 오히려 대견했다.

두 개의 도자기 찻잔은 갈색 액체로 가득 찼다. 정백은 그 갈색의 수면 위에다 불을 붙였다. 투명하고 푸른 불꽃이 너울거리다 시나브로 사라졌다.

마셔 봐. 커피야.

불을 붙이는 커피도 있어요?

그롤라.

그롤라?

정백이 먼저 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소영은 선명한 그의 입술선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커피는 달고 시고 씁쓰름했다. 솔직히 별 맛은 없었다.

커피를 마시느라 앞이마로 흘러내린 소영의 머리카락을, 정백이 손끝으로 쓸어올렸다. 소영의 희고 맑은 이마가 드러났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고급 펜쇼네. 창밖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고, 실내엔 레몬과 알코올이 섞인 커피향이 퍼지고 있었다. 남자의 다정스런 손길. 연인들의 해후이기에 충분한, 그리고 훌륭한 장면이었다. 서울에서도 정백은 언제나 다정하고 온후했다. 그래서 소영은 그가 자기를 많이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또다시 적막한 기다림이 시작될 때, 그는 그저 한 사람의 손님이었음을 절감해야 했다. 소영을 한 인격체로서 존중했을 뿐, 매너와 에티켓이 몸에 밴 것이었을 뿐, 그는 소영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대하지 않았다. 실망과 허탈감이 소영을 후려치곤 했지만, 상관없이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다.

조금 있으면 말이야.

그가 말했다.

저 안젤리카 분수 위로 해가 지나가거든. 그러면 멋진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거야.

그 멋진 무지개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토리노 광장이 내다보이는 펜쇼네의 객실을 예약한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실은 그가 거주하고 있는 그레노블에서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의 도시가 토리노였기 때문이다. 그의 부드럽고 다정스런 말투의 이면에는 그처럼 완강한 실제적 이유가 숨어 있는 거였다. 오랜만의 만남이라고 해서, 이곳이 이탈리아라고 해서 달라진 건 없었다. 소영은 입 안에 든 달고 시고 씁쓰름한 커피를 온 힘을 다해 넘겼다. 목구멍이 얼얼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백은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애무하고 다리 사이를 헤치며 몸속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소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안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쁘고 황홀했으나 기다림과 설렘, 그리움과 환희가 배제된 상황이란 생각하기도 싫었다.

무지개라고요? 무지개를 본 적이 없는데 당신과 함께 무지개를 보게 되다니…….

소영은 정백을 당신이라 부르고 있었다. 손님의 통칭은 선생님이었다. 그를 세 번째인가 네 번째 만나던 날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당신이라 불러놓고 너무 놀랐다.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정백은 호칭이 바뀐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영의 부모는 서로를 여보나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호칭이 없었다. 소영의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나이가 스물두 살이나 많았다. 아버지는 떠돌이 악단의 기타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소위 양가집 규수였다. 길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만남은 극적이고 낭만적이었던 만큼 현실적이지 못했다. 소영은 아버지가 기타를 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소영이 여섯 살이었을 때, 그녀의 남동생이 네 살이었을 때, 배우처럼 예뻤던 어머니는 또 다른 길 위의 남자를 따라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틀 뒤에 약을 먹고 죽어 버렸다. 갑작스런 사태에 남매는 슬플 겨를도 없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슬픔이나 아픔이 아니라 현기증이었다. 세상이 무시로 노랗게 변했고 그럴 때마다 동생과 함께 쓰러졌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소영을 이웃이 거두었다. 동생은 시설로 보내졌다. 열여덟이 되도록 이웃은 그녀를 잘 돌보았다. 실은 소영이 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왔고 어머니는 그녀를 빼앗아 업소로 넘겼다. 다행히 업소의 부장이 그녀를 좋아하여 함께 살림을 차렸으나 1년이 못 되어 계약관계로 변질되었다. 수입의 삼분의 일을 부장에게 지불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초부터 계획적이었다는 사실을 소영은 몰랐다. 그때부터 소영은 자신의 삶을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한 로맨티스트들이었다. 교양이 성적 만족도를 높인다는 공통된 생각을 그들은 갖고 있는 듯했다. 소영은 몸을 가꾸는 대신 음악을 들었고 책을 읽었고 공연을 관람했다. 때론 혼자서 때론 그들과 함께였다. 그럭저럭 소영의 취향에도 맞았으며 마침내는 그들의 속된 교양 취미를 공박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소영에게 오히려 흥분했다. 몸보다 소영의 노래와 춤과 ‘양식(良識)’을 더 좋아했다. 괜찮은 직업이라고 소영은 생각했다. 교양과 자부심에 스스로 갇힌 남자들은 소영을 결코 고단하게 하지 않았다. 외려 환심을 사려고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비굴한 그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들의 욕구를 적당히 들어주며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조건에 감사했다. 소영은 자신의 독립적인 삶에 아무도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소영은 정백을 만났다. 특별할 게 없는 그에게 특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때부터 소영은 그를 기다리며 그를 그리워하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는커녕 행복했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의 드문 방문과 무관심과 초연함, 그리하여 문득문득 서글퍼지는 것조차도 소영은 나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이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땐 엑스터시마저 느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꼼짝없이 창가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를 위해 배운 노래들을 몇 차례씩이나 반복해 불러도 그는 오지 않았다. 기약없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죽느니만 못했지만, 정백과 관련해 죽음을 떠올리는 게 싫지 않았다. 그에게 당신이라고 말했던 순간만큼은 자신의 특수한 처지와 형편과 신분 따위를 까맣게 잊었다. 곧 깜짝 놀랐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관용이 아니라 무관심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고 정백이 객실의 출입문을 열었다. 룸 서비스였다. 두 명의 펜쇼네 남자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진열했다. 그들의 동작은 시체 처리반처럼 엄숙했다. 음식에서는 마늘 냄새가 풍겼다. 풍부한 전채요리.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진열이 끝나고 돌아갈 때까지 직원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서울과 다를 게 없었다. 양재동 객실에서도 언제나 룸서비스를 받았고 음식과 맥주, 혹은 흑미주를 마신 뒤 천천히 차를 마셨다. 가을과 겨울에는 커피와 재스민차를 마셨고 봄과 여름에는 오미자차와 이슬차 따위를 마셨다. 독한 술은 마시지 않았다. 와인은 늘 반병쯤 남겼다. 소영은 맥주 한 잔 정도를 맛있게 먹을 뿐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며 정백이 말했다.

퐁뒤. 퐁타나 치즈와 우유를 섞은 거야. 끓인 뒤에 백 토리프와 빵을 찍어 먹으면 돼. 퐁뒤는 뭐 어디나 똑같아.

서울로 돌아가면 또 이런 걸 만들어 먹을까. 정백과 만난 뒤로 소영은 그와 함께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그가 없는 식탁에 홀로 앉아 그와 함께 먹던 음식을 먹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는 것이고, 먹으려면 만들어야 하니까,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천천히 꼼꼼히, 재료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음식을 만들었다. 이왕이면 그와 함께 먹던 걸 먹자.

혼자 살며 혼자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해 소영은 지루해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만들어 먹든 사 먹든 혼자 무언가를 먹는 건 다 힘들었기 때문에 일부러 손수 재료를 구입하고 철저하게 조리 순서를 지켰다. 혼자 자고 혼자 일어나 이따금 남자들을 상대했다. 오지 않는 정백을 기다리는 일도 골몰하기로 하면 힘들고 후회되었다. 걸을 땐, 나는 지금 걷고 있다고 속으로 뇌었다. 물건을 살 때도, 나는 지금 물건을 사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밥을 먹는다, 혼자 영화를 본다, 잠을 자려고 한다, 양치질을 한다, 그뿐이다.

후회와 반성, 의문과 확인, 기대와 실망 따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창밖의 편백나무처럼, 외로워도 외로움을 모른 채 한 생을 나려면 골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의 상념과 가슴속의 욕정을 걷어내고 나무처럼 바위처럼 살고자 했다. 그리운 이에 대한 열정도, 한 곳에 붙박여 바람을 이겨내는 식물성의 의연함을 닮길 바랐다.

안초비, 백 토리프, 적포도주 욜리뇨, 바롤로 와인조림, 로비올라 치즈…….

정백은 식탁 위의 것들을 일일이 손끝으로 짚으며 이름들을 외웠다. 그것들은 연인과 함께 다정하게 나눌 음식이라기보단, 그가 소영의 몸을 열고 들어오기 전에 거쳐야 할 절차거나 계단 같은 것이었다. 얼른 갖고 싶은 것을 일부러 저 뒤쪽에 밀어둠으로써 조바심을 키우려는 의도. 스스로 애를 태워 성애의 집중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 소영은 한 줄로 놓인 음식들 끝에 알몸으로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것은 소영의 상상이 아니라 정백의 상상일지도 몰랐다.

어서 드세요.

소영이 말했다. 태양이 안젤리카 분수 위를 지나고 있었지만 무지개는 보이지 않았다.

정백은 음식들을 차례로 입에 넣고 씹었다. 감탄도 불만도 없이 조용히 음미했다. 소영을 대할 때도 그랬다. 몇 마디 의례적인 말을 빠뜨리지는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절차였고 순서였을 뿐이다. 소영은 지중해가 그리웠다. 여객기에서 내려다보던 지중해는 비현실이었다. 땅에 내려 토리노에 당도할 때까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지중해를 볼 수 있다면 소영은 자신의 사랑의 실체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비올라……. 치즈를 입에 넣어 녹이면서 소영은 그것의 이름을 가만히 외웠다. 적포도주 한 모금을 혀로 적시면서는 욜리노,라고 속삭였다. 외로웠다.

지중해는 어떤가요?

소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지중해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숨이 가빠오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떨 때는 그를 만나고 있으면서도 그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를 안고 있으면서도 그를 기다렸다. 지중해가 지척에 있는 이탈리아건만 소영은 영영 지중해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조바심쳤다.

지중해는 어때요?

소영이 다시 물었다.

아, 그렇지. 지중해.

음식을 씹으면서 그가 말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이 어떨까 싶어. 아니 그 앞의 무라노 섬이나 부라노 섬은 어떨까 싶네. 유리박물관도 괜찮지만 물 위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마리아 도나토 교회도 볼 만하지. 섬에서 섬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워. 무라노 섬에서 산 조르조 마조레 섬을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이야.

소영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지중해는 어떠냐고요?

그가 되물었다.

음, 지중해?

소영이 말했다.

당신, 내게 지중해를 보여줄 순 없을까요.

그가 말했다.

물론. 소영이 말마따나 보면 되지 뭐. 내일이라도. 아니면 모레라도.

정말 당신이 내게 지중해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 말을 소영은 하지 않았다.

태양은 안젤리카 분수를 지나 저쪽 산 조반니 교회의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 푸르던 하늘이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카펫 위에 커튼의 긴 음영이 드리웠다.

후회와 반성, 의문과 확인, 기대와 실망 따위가 그녀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소영은 감촉할 수 있는 사물들에 기댔다. 상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나무와 바위, 바람과 비, 많은 찻잔들과 음반들을 불러들였다. 실재하는 것들만이 자신의 존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소영의 방은 많은 사물들로 넘쳐났다. 범람하는 외로움을 사물의 둑으로 막아보려는 몸짓이라는 걸 소영은 알지 못했다.

소영은 결혼 따위 생각지 않았다. 아파트와 고급승용차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는 그녀를 더욱 혼자 있고 싶게 했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기혼자였다. 그들 기혼자들에게서 결혼의 필요성은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혼자 사는 자신이 너무도 다행스러웠고 행복했다. 성적 욕구 해소라는 것도 결혼의 요구 조건은 아니었다. 기혼자들은 그것을 결혼에서 해결하지 않았다. 상대가 정백이라도 소영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또 그 나름대로 살아갈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혼해서 사는 것과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 인생은 그렇게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했고, 소영은 그 중 결혼하지 않는 삶을 택했다. 다만 그녀에게는 지중해가 남아 있었다. 지중해. 이탈리아에 가면 지중해를 볼 수 있을까. 과연 그곳에 지중해가 있을까.

언제나 그랬듯이 정백은 소영의 배스가운을 부드러운 손길로 열었다. 가벼운 가운은 금방 카펫 위에 소리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길은 섬세하고 부드러웠으나 곧 그레노블로 돌아가야 한다는 암시가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지중해를 볼 수 없을 거란 예감은 애초부터의 확신이었다.

정백은 소영의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뉘었다. 오후의 잔광이 창문으로 비쳐들었다. 바람이 창틀을 가볍게 흔들었다.

6년만이었지만 정백의 몸짓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지나칠 만큼의 세심한 배려. 어딜 봐도 그의 몸은 중후한 편이었지만 소영에게는 그의 중량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차렵이불이 몸을 감싸는 듯한 촉감. 그와의 거리가 한국과 이탈리아 사이만큼이나 아득했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육박해 들어오는 몸짓이 간절했던가. 소영의 기억은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가 돌아간 뒤, 아무리 되짚으려 해도 감촉되지 않던 그의 존재감. 어린 나이에 웃음과 노래와 성희를 제공하는 소영을 측은하고 안타깝게 여겼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을 그는 품지 않았다. 소영의 그리움과 기다림은 소영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에 대한 사랑마저도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소영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그가 몸을 열고 들어왔지만 소영의 의식은 점점 더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창문은 저녁 빛깔로 푸르렀다. 가볍게 흔들리던 창틀이 조금씩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영은 주문을 걸듯 입 속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일본인 바이어가 가르쳐 주고 간 노래였다. 곡조와 함께 바이어의 인상은 까마득히 잊혀졌다. 노랫말만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노랫말을 음미하며, 소영은 더욱 거칠게 창틀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밤은 어둡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처음 사랑이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말했죠. 우리 둘만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자고.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려요. 꿈조차 어두운 밤, 베개 위에 나란히 머리를 뉘면, 우리들 속삭임조차 고요한 어둠 속에 잠긴답니다…….

맘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소영은 점차 커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창밖에는 바다가 일렁이고, 파도에 밀려온 강한 바람이 거칠게 창틀을 흔들었다.

……오늘 밤 나를 찾아온 손님과 함께 긴 복도를 달려 딸깍, 빗장을 닫아걸고 오직 한 사람,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되었네. 그러나 이제 돌아가야 하네. 나의 외로운 안식처와 침묵 속으로. 딸랑딸랑 야경꾼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바다가 창밖에 밀려와 건물의 외벽을 때렸다. 허연 이빨을 드러낸 파도가 으르렁거렸다.

……당신이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후회하며 돌아오곤 하죠. 너무나 창백하고 슬픈 얼굴로, 밤에 쉴 곳이 필요한 나비처럼…….

잠깐, 잠깐만요.

소영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가 동작을 멈췄다.

소영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뛰어갔다. 그리곤 서둘러 여행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냈다.

찍어줘요. 자, 어서.

창밖에는 끝없이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은 짙푸른 지중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소영은 알몸인 채로 창가에 기대섰다. 그녀의 가녀린 몸뚱어리가 저녁 빛에 파랗게 물들었다. 소영의 몸에서 금방 빠져나온 정백의 번들거리는 성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무룩 꺼져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부장이다.

준비해. 4시까지.

소영은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5분 뒤에 다시 전화가 온다.

취소됐어. 뭐해?

알 것 없어요. 그냥 있어요.

소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소파로 가 앉는다. 창밖에 바람이 분다.

오디오에 전원을 넣는다. 안에 들어 있던 시디가 돌아간다. 토미 엠마뉴엘의 기타 연주. 중간에 끊긴다.

수리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지 한 달이 넘고 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또 왜요?

사진 가져다 드리려고요.

집 앞 7분 현상소다.

배달도 해주나요?

어제 찾으러 오시겠다고 하고선 안 오시길래요. 바로 옆이니까 갖다 드릴게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사진 나왔느냐고 사람들이 묻지 않았다면 필름은 언제까지고 여행가방 안에 있었을 것이다.

거실 귀퉁이에 놓여 있는 여행가방을 바라본다. 다녀온 여행가방이 아니라, 다녀올 여행가방처럼 보인다. 어제 저녁에 장만한 물건처럼 깨끗하고 반듯하다. 저것을 들고 이탈리아에 다녀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갑자기 들이닥쳤던 바다와 파도와 바람. 알몸인 채로 부랴부랴 찍은 필름이 가방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지중해가 아니었던가.

소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가로지른다. 여행가방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어딘가를 다녀온 가방 속이 아니다. 옷가지와 속옷, 여름용 샌들이 한 번도 풀지 않은 것처럼 놓여 있다.

초인종이 울린다. 현상소 직원으로부터 얄팍한 사진 봉투를 건네받는다. 요금을 지불하고 소파로 가 앉는다.

바람이 거실 창문을 흔든다. 봉투를 열어 사진들을 확인한다. 사진은 열 장이 채 안 된다.

그랑 파리디소의 웅장한 산봉우리가 찍혀 있다. 소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프레토리아 문, 원형극장, 아우구스투스의 개선문에도 그녀는 없다.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스칼라 광장, 보카치오 거리, 최후의 만찬 앞에 서 있는 그녀의 포즈가 한결같다. 배경에 비해 인물이 지나치게 작은 사진들. 어딘가 어색하고 쑥스러운 듯한 표정.

소영은 빠르게 사진을 넘긴다. 마시노 성을 본뜬 펜쇼네의 객실을 찾는다. 거실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린다. 사진이 없다. 소영은 처음부터 사진을 다시 훑는다.

멈추었던 오디오가 갑자기 작동을 시작한다. 토미 엠마뉴엘의 격정적인 기타 연주에 따라 창틀이 흔들린다.

마침내 사진을 찾는다. 인광처럼 푸른 창을 등진 채 알몸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소영. 뭉크의 <사춘기> 같다. 소영이 본 <사춘기>는 세 가지다. 1893년 것과 1894년 것, 그리고 1914년 것. 그 중 1893년 것에 가깝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배경도 그와 같다. 어둡고 더러운 벽에, 인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지중해는 없다.

소영의 손에서 사진들이 힘없이 미끄러진다. 그것들은 거실 바닥에 흩어진다. 쥐어뜯는 듯한 엠마뉴엘의 연주가 절정에 이른다. 누군가가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처럼 창틀이 흔들린다. 세찬 물방울이 유리창에 흩뿌려진다.

소영은 바닥에 흩어진 사진들을 밟으며 베란다 쪽으로 걸어간다. 아래쪽으로부터 푸른 기운이 융기한다. 창문 앞에 가슴을 펴고 선다. 창 밖에, 끝도 없는, 거대한 바다가 일렁인다. 배도 섬도 보이지 않는다. 물 위를 나는 바닷새도 보이지 않는다. 웅장한 한숨을 뿜어내며 거칠게 몸을 뒤채는 멍빛 해양이 있을 뿐이다.

소영은 작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밤은 어둡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만을 사랑하게 되었네……. 바다는 그 먼 곳에 있지 아니하고, 이곳에 있었네. 그러나 이곳도 지금 이곳이 아니라 언제나 옛날 그곳, 추억 속에만 있었네. 바다는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랑하는 내 맘에 있었네. 이곳, 나의, 기억 속에…….《문장 웹진/2005.11》


추천 콘텐츠

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