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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로 사라질 테다

  • 작성일 2006-09-28
  • 조회수 4,519

 

외계로 사라질 테다



박 상




-너. 외계인…… 이지?

룸메이트가 말했다. 말하면서 어깨를 들썩거려 발음이 한번 접혔다. 울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울면서 쉽게 TV 화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잘 꺾어진 파워커브처럼 뺨의 굴곡을 따라 휘어지며 떨어졌다.

 

 


 


TV 속에서는 한 남자가 울고 있는 여자를 등지고 어깨를 살랑 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난 남자들을 꽤 많이 아는 편인데 내 주위에서 우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TV 드라마는 남자들조차 참 쉽게 울린다. 슬픔을 과장하고 싶은 거다. 나는 뻔한 장면을 보며 울어대는 지구인의 과장된 정서에 동조할 수 없다.  

-겨우 저런 장면에? 너무 쉽잖아?

내가 간단히 말하자 그녀는 설득하려는 자세로 바뀌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쟤랑 쟤랑 사랑하거든? 근데 신분 차이 땜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거야…… 응? 신분…… 흑…… 사랑하는데……

나는 눈물이 눈사태처럼 번지기 시작한 룸메이트를 보며, 어쩔 수 없는 여자로구나, 라고 생각했다. 신분 차이라는 말은 내게는 서로 구독하는 신문이 달라서 헤어진다는 말처럼 들렸다. 여자를 이해하는 일은 힘들다. 그러나 여자를 위로하는 일은 쉽다. 티슈를 한 장 뽑아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녀는 티슈에 코를 풀었다. 그리고 코를 푸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내게 외쳤다.

-넌 정말 외계인이야. 이게 안 슬퍼?


나도 슬퍼할 줄은 안다. 소주병 속에 소주가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슬픔이 채워져 있는 것이다. 만약 소주병 속에 양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아주 슬플 것이다. 그런데 겨우 드라마 속  이별 장면 따위로 울어주기에는 내가 살아온 얼마 안 되는 날들이 안구가 바짝 건조해질 만큼 너무 빡빡했다.


그래도 울기는 해봤다. 나도 어엿한 눈물샘을 가지고 있고 내게 외계가 아닌 이 세계는 슬픔 투성이다. 슬픔들이 별들의 죽음처럼 도처에서 폭발하고 있다. 폭발한 슬픔은 블랙홀이 되어 모든 슬픔의 흔적들을 안으로 감춰버린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우주에는 두 개의 확실한 블랙홀이 있다.  


첫 번째는 박철순이라는 위대한 야구선수가 은퇴하는 날 생성되었다. 야구장에는 박철순이 있다, 라는 평범한 진리가 야구장에는 박철순이 없다, 로 바뀌는 것이 은퇴라는 용어의 뜻이었다.

그 날 소속팀의 패배가 확정되기도 전인 5회부터 나는 펑펑 울었다. 그 눈물은 9회까지 멈추지 않았었다. 사실 박철순 은퇴 경기에서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4이닝이 더 지나면 야구장에서 박철순이 사라지고 소주병 속에 양말만 남는다는 게 5회부터 견딜 수 없이 슬펐다. 그날 박철순은 등판하지 않았지만, 등판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고 마지막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눈이 퉁퉁 부어 뭘 던지는지 제대로 못 봤을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에게나 슬프다. 사라져 가는 것이 슬프지 않다면, 이 세상에 염소똥만이 슬플 것이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사라지고 싶다. 사람들에게 슬픔을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라져 간 사람들이 사라져 간 곳에 모여서들 뭘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니까.


두 번째 블랙홀은 아빠가 만들었다. 야구장에 박철순이 없다, 라는 것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큰 블랙홀이었다. 이 세상에 아빠가 없다라는 거대한 구멍! 아빠는 나와 할머니의 가슴속에 그런 검은 구멍을 내고 사라졌다.


-이번 주말에 홈경기지롱. *^^* 올 거지?

아는 오빠에게 문자가 왔다. 나는 이 오빠를 그냥 ‘어리버리 오빠’라고 저장해 두었다. 나는 문자를 씹었다. 괜히 아빠를 생각했다. 슬픔 말고라도 삶의 모든 국면이 블랙홀에 빨려들려고 했다. 빨리 벗어나야 한다.

 

나는 인터넷에 시선을 접속했다. 룸메이트의 노트북을 써야 됐지만, 써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땐 뭘 물어보는 게 불가능하다. 내가 인터넷을 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내겐 내 물건이라고 불릴 만한 게 없다. 살 돈도 없긴 하지만 곧 사라질 내가 뭔가를 사고 장만한다는 게 우습잖아.


나는 야구 동호회 ‘우아하고 감상적인 베어스 야구’의 페이지에 들어가 경기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오빠는 이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람인데 워낙 어리버리한 오빠라 확인이 필요했다. 다행히 들은 대로 이번 주말엔 라이벌 팀과의 홈경기가 서울에서 있었다. 토, 일요일 모두 낮 경기였다. 경기를 보고 아르바이트를 갈 수 있겠군.

 

나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야구행성과 외계를 주제로 한 별들밖에는 가지 않는다. 수능이 얼마 안 남은 신세지만, 지구라는 별에서 대학에 가고 공부를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에는 당최 관심이 없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위해 인터넷에서 안구를 끄집어내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약간 짧은 치마 안에 약간 꽃무늬 레깅스를 덧입었다.

-알바 가?

룸메이트가 물었다. 눈물 자국이 창궐한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욱 그로테스크했지만 예뻤다. 나보다 한 살 많고 대학생이지만, 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대학생이 놀 생각이나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집에서 TV나 보고 있는데 언니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응, 오늘은 술 안 마시고 들어와서 놀아줄게. 드라마 좀 작작 봐.


문을 닫고 나오자, 햇살이 얼음 투성이 남극의 펭귄 털처럼 눈부셨다. 맑은 소주 한잔의 상쾌함이 생각났다.


내가 일하는 삼겹살 가게는 손님들에게 떠밀리고 있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되는 가게란 사장에겐 대박, 알바들에겐 극악이다. 게다가 내가 들어온 지 2주일 만에 이렇게 바빠졌다. 사장 오빠의 말에 따르면 내 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복은 무슨, 개코같다.

-나는 하는 알바마다 왜 이래.

어서 오라고 인사하는 사장 오빠에게 앙탈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는 손님들에게 떠밀려 정신을 꺼내놓고 있었다.

-빨리 옷 갈아입어, 복뎅아. 이따 단체손님 예약도 있어.


사장 오빠는 김치를 더 달라는 손님에게 ‘네’ 하고 외치며 바람처럼 주방으로 달려갔다.

이 삼겹살 가게의 일은 힘들어도 사장 오빠는 퍽 좋은 편이었다. 그는 왜 고3 여자애가 삼겹살집 같은 데서 일해야 하는지 한번도 묻지 않았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계시며, 뭐 하는 분인지, 어디 사는지, 성적은 어느 정도며 대학은 안 갈 건지, 그런 걸 묻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삶을 뻔한 스토리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다른 사람들을 구겨 넣어 뻔하게 만들어 놓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일 외에는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고 알바비는 꽤 진지한 양손으로 건네받았다. 좋은 아르바이트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복뎅이라고 부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내겐 정말 나를 위한 복 같은 건 없다. 남을 위한 개코가 개도 한 마리 없는 내게 무슨 소용이람.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두르자 나 역시 쇼하는 돌고래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며 파도쳐야 했다. 우아한 동작은, 글렀다.


-아가씨, 여기 소주 일병 추가.

-여기 고기 타잖아!

고기가 타면 직접 뒤집든가 불을 줄이면 되지, 바쁜 것 뻔히 보면서, 너무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빨리 달려가 불을 줄이고 고기를 뒤집어 주었다. 고기는 타 버리기 일보직전이었고 손님들은 까탈스런 눈들을 껌뻑거렸다. 갈비집도 아니고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먹기 좋게 다 구워주겠다는 방침을 택한 사장 오빠를 원망할 뿐. 이 세상에 남을 자들과 그들에게 고기를 팔며 남아 있을 사람들의 영원한 세계.


-타긴요, 요 때가 가장 바삭바삭 맛있어욤. 맛있게 드세요. 그리구 놀지 말구 심심하실 때 좀 뒤집으세요.

나는 내 오랜 써빙 노하우대로 기분 나쁜 손님을 기분 나쁘게 대하지 않고 내 아까운 미소를 팔며 잘 구슬리었다.

사장 오빠가 소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들고 나오다 내게 엄지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한다. 하지만 이 세계에 남을 사람들이란 하나도 멋있지 않다. 게다가 오빠라고 부르긴 하지만 서른 살 넘은 남자를 멋있다 할 순 없다. 그러면 내 나이의 멋이 사라진다. 나는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아저씨들 좋아하다가 인생 갑자기 암울해지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바보들, 멋을 몰라.

 

삼겹살집은, 한창 바쁘다가, 순간 정적이 이어졌다. 이미 테이블이 다 찼고, 사람들이 이미 고기들을 뱃속으로 삼켜버렸고, 이미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욕망의 정적이다. 나와 사장은 한숨을 돌리며 카운터 뒤에 기대섰다. 사장 오빠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내 땄다.

-숨 좀 돌리잣.

나는 가쁘던 호흡이 가게를 천천히 한 바퀴 빙빙 도는 상상을 했다. 사장 오빠는 숨을 돌리자더니 땀을 흘리고 있는 주방 이모와 나에게 맥주를 한 잔씩 돌렸다. 자신은 병째 들이켰다.

-기회는 찬스다. 담배 한 대.

사장 오빠가 땀을 닦으며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30대 철학은 갑갑하다. 기회는 찬스다. 오뎅은 어묵이다. 소주는 술이다. 인생은 삶이다. 쳇, 기회는 양말이고 소주는 삶이고 인생은 오뎅이면 안 되나.

홀을 둘러보자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웃거나 울거나 비웃거나 비스듬히 앉아 떠들고 있었다. 나는 후식으로 국수나 냉면을 시키려는 테이블이 있을까봐 홀을 한 바퀴 호흡처럼 걸었다. 불러서 가면, 그건 늦다. 부르기 전에 가서 뭐가 필요한지를 봐야 한다는 게 내 오랜 써빙 철학이었고, 사장 오빠의 철학과 통했다. 그것은 건강한 허파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좋은 가게란, 건강한 허파 같아야 한다. 내가 이딴 걸 알고 있으니 복뎅이라는 소리나 듣고 있는 것이지. 참.


아줌마들끼리 와 있는 테이블에 덤으로 낀 꼬마가 작은 휴대용 게임기로 오락을 하고 있었다. 아줌마들은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정신을 거의 놓고 있었고, 꼬마 역시 게임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게임은 어렸을 때 많이 봤던 것이었다. 슈팅 게임. 비행기 같은 걸 좌우로 조종하면서 상대가 쏴대는 미사일을 피하며 적을 쏴 죽이는 게임. 꼬마의 손놀림은 여느 꼬마들답게 예사롭지 않았고, 게임기 속에선 계속해서 적들의 비행기가 펑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갤러그라는 게임을 떠올렸다. 안 좋은 추억이었다.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블랙홀이 흡수했다. 나는 여자아이라 갤러그 같은 건 못했지만, 아빠가 죽어라 좋아했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아빠랑 손잡고 오락실에 가서 아빠가 깨는 기록들을 뒤에서 물끄러미 보는 것뿐이었다. 아빠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도 장소는 오락실이었다.


-경아도 갤러그는 할 줄 알아야 해. 딴 건 못해도 돼. 그런데 갤러그는 해야 돼.

하지만 어린 여자애가 똥파리 무더기를 쏴 죽이는 갤러그 같은 오락에 흥미가 있을 리 없었다.

-아빠, 난 테트리스 할게, 50원만.

내가 유일하게 하던 게임은 각종 모양의 블록을 맞추는 테트리스라는 게임이었다. 아빠는 한숨을 쉬며 50원을 등 뒤로 내밀었다.

-테트리스로는 안 된대도. 봐라, 요렇게 비행기를 두 대를 붙여갖고. 그렇지. 붙었지. 그럼 미사일이 두 발씩 나가잖아? 그리고 쏴 죽이다가 저게 한 마리 남았을 때, 응? 미사일을 쏠 거 아냐? 그 때 정확하게 비행기 두 대 사이로 미사일을 맞으면 말이야 그 순간에 외계로 가는 문이…….


나는 테트리스를 하러 가느라 아빠의 뒷말을 듣진 못했다. 하지만 내가 세 판 만에 블록이 잔뜩 쌓인 화면에 적힌 GAME OVER라는 글자를 보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구석 자리의 갤러그 기계 앞에 돌아왔을 때, 아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애당초 없었던 엄마 대신에 할머니가 엉덩이를 때리셨다. 할머니가 때리는 엉덩이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데 혼자 돌아다니다 온 기고? 아빠 손 꼭 붙들고 다니라캤지?

-할머니, 아빠가 없어졌어요.

할머니는 엉덩이를 때리던 손을 순간 멈추고 한참을 멍하니 서 계셨다. 나는 움직일 수도 안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때 할머니가 다시 엉덩이를 때리셨다.

-아이고 몬난 자식. 내가 몬 산다.

그 때부턴 할머니가 내 엉덩이를 때리는 손이 꽤 매서웠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룸메이트가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침대는 현관문에서 볼 때 오른쪽 벽면, 내 침대는 왼쪽 벽면에 있었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한 여자를 죽어라 꽉 껴안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있었고 내 침대 머리맡에는 머리맡만 있었다. 오늘은 그녀 머리맡의 사진이 앞으로 자빠져 있었다.


-진짜 술 안 마시고 들어왔네?

룸메이트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고기 냄새 때문에 다이어트가 안 된다며 활기차게 탈취제를 뿌려대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드라마가 그렇게 슬펐져?

-그런 건 슬프지두 않아.

-그럼 왜? 내가 술 안 마시고 들어오니까 이상해?

-실연당했어.

그녀가 실연당한 사람 특유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서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정말이야? 라고 물으며 그녀의 침대로 다가가 얼굴을 또렷이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의 눈물샘이, 화를 내며 부어 있었다. 그녀의 동공만이 정상적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진짜? 재수 오백년이랑 헤어진 거야?

-야, 재수 오백년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미안, 근데 왜 헤어진 건데?


-TV 보느라, 전화벨 소리를 못 들었는데 집 앞에 와 있었대.

-쳇, 뭐 그런 일로 화낸대. 진짜로 헤어져버려.

라고 위로했으나 그녀가 말했다.

-한번만 더 전화 안 받으면 진짜 헤어진다고 그랬었거든. 갑자기 어디 가야 될지도 모르는데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떻게 맘 편히 가겠냐고, 막 그랬었어. 이번이 네 번째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사백 번이라도 참아줄 수 있는 남자가 진짜 멋있는 남자라고, 잘 헤어졌다고, 그런 일로 이별을 통보하는 남자는 찡따오맥주 같은 녀석이자 재수가 500년 동안 없을 거라고 위로하려고 했으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녀를 그냥 꼭 껴안아 주었다. 무언가를 잃는 일은 너무 슬프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도 어렸을 때 아빠와 헤어질 것을 미리 알았다면 갤러그를 하고 있던 그날 아빠의 등을 뒤에서 꼭 껴안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술 마시고 싶어.

-내가 사올게.

나는 집 앞 편의점에 내려가 소주와 훈제칠면조 다리를 샀다. 훈제칠면조 다리를 편의점의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동안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라고는 사실 얼마 없었다. 야구장 갈 돈이었는데, 라고 생각하자 쓸쓸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훈제칠면조 다리의 포장지를 뜯어내자,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소주잔을 갖추고 앉아 있던 룸메이트가 내가 고른 안주에 불만을 터뜨렸다.

-너 외계인이지? 실연당한 여자가 닭다리를 뜯으면 우습겠잖아.

-아니야, 이건 칠면조야.

그러자 그녀는 유려하게 훈제칠면조를 뜯었다.


나는 룸메이트가 툭하면 내게 뱉는 말버릇인 외계인이지? 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정말로 외계의 먼별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외계의 먼별 이름이 뭐라고 하든, 사람들이 아는 별도 아닐 거고, 나도 사실은 잘 모르겠고, 다행히 말해봤자 별로 소용도 없고, 안다고 해도 말하기 싫었다. 다만 반드시 그 별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건 확실하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은 지 한참 되어가던 어느 날 가끔씩 들러 돈을 주고 가던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끊겼을 때 나는 또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이, 아빠는 어디 갔는데 자꾸 안 와?

할머니는 그런 질문에는 항상 슬프고 고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아빠가 없어졌다는 사실보다 할머니가 짓는 슬프고 고된 표정이 더 슬펐다. 그래서 묻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어렸고, 묻고 싶으면 참기도 전에 이미 묻고 있었다.


-느그 아빠는 지 별로 돌아가뿟다. 느그 아빠는 외계인이라서 지네 별로 가뿐 거다.

나는 할머니에게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느 별이며 어떻게 가는 건지 더 질문할 틈도 없었다. 할머니도 그 이상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피곤하다. 디비자라 고마.

할머니는 늘 지쳐 있었다. 나 역시 늘 지쳐 있었다. 쬐끄만한 여자애가 신문배달 수레를 끌고 외계인들이나 입는 것 같은 우비를 입고 비 내리는 새벽에 동네를 도는 건 확실히 지칠 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학교는 안 가도 되지만, 나는 학교까지 가야 했다. 착한 소녀 역할 같은 건 지쳐서 할 수가 없었다. 지쳐 있는 사람들끼리는 원래 말하기도 지친다. 할머니가 악착같이 내다 파는 채소들이 좀 더 돈이 되길 나는 늘 바랐다.


-어제 남자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었어.


룸메이트가 소주를 목구멍으로 천천히 쭈욱 빨아 당기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의 식도가 빨대처럼 변해 소주를 빨아 당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소주 참 맛없게 먹는다. 소주는 단순히 식도로 빨아 당기는 게 아니고 가슴에 막 스며주는 듯 마셔야 하는 것이다. 스펀지처럼 말라비틀어져 있는 가슴이 필요하다. 하긴 아무 걱정 없는 대학생이 술의 진의를 어디서 배우겠어. 내가 주로 같이 술을 마시는 야구 동호회의 오빠들은 다들 술을 대학에서 배웠다고 했다. 자기들 말로는 술 전공들이라고 했고 스펀지 이론도 그 때 들었다. 근데 어린 내가 벌써 술맛을 아니 어떡한담. 이런 건 자랑이 아니라 인생 참 개떡 같았다는 부끄러움이다. 할머니도 종종 나와 술을 마셨었는데 할머니는 술을 노래로 마시는 분이셨다. 한잔 마시고 곡조도 가사도 불명확한 노래를 한 모금 뱉어 놓으시고 또 한잔 마시고. 사실 내가 술을 잘 마시는 건 할머니 때문일 수도 있겠다.

출석만 간신히 하고 아르바이트와 취미생활에 미쳐 있는 내가 대학 가서 술을 전공하긴 글렀으니 미리 잘 배워 둔 거지.

 

-뭐라 그랬는데?

-흐린 날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위에 어떤 징후가 나타날 때가 있대.

-징후가 무슨 말이야?

-싸인 같은 거. 멍청한 고딩아. 그러니까 알파벳 문자로 R자 같은 글자가 희미하게 도로 위에 나타난다는 거야.

-그런 게 길에 왜 나타나?

-몰라. 여하간 어떨 때 나타난대. 그때 시속 60킬로로 차로를 천천히 세 번 바꾸면 갑자기 눈앞에 새로운 길이 열린대. 차로를 세 번 바꾸는 동안 완전 시속 60킬로를 유지해야 하고 그 동안 절대 아무 말도 하면 안 된대.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말에 눈과 귀로 신경들이 솨,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했다.

-새로운 길이 열리면?

-몰라, 이런 얘기 재미있지도 않아.

-말해 봐. 그 다음엔?

-남자친구 말로는 열린 길로 좀 달리면 외계의 어떤 도로에 떨어진대. 쳇.

-그래서? 그 재수 오백년이 외계인이었대?

-몰라. 재수 오백년이라고 얘기하지 말랬지?

-미안, 헤어지자는 얘기를 그렇게 한 거라면, 상투적이진 않네.

-그게 헤어지자는 얘기였던 거야?

-뭐, 헤어지자는 징후였겠지.


룸메이트는 소주를 반 병도 채 마시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더니 재수탱이, 재수오뎅꼬치, 재수삼수 백수똥구멍 어쩌고 하면서 소릴 질러대더니 뻗어버렸다. 뻗어버린 45킬로짜리 여자를 들어 침대에 올려놓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외계인이다, 라고 세 번 정도 속으로 생각하자 그녀가 쉽게 들렸다. 나는 그녀를 눕히고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 주었다. 지쳐 잠든 그녀의 얼굴이 한없이 슬퍼 보였다. 비록 룸메이트로 시작한 사이지만, 정이 들어버려서 내가 그녀를 떠나 사라지면 또 이렇게 슬퍼할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옆에 누워서 그녀를 한참 껴안아 주었다. 하지만 소주와 안주가 남아 있어 벌떡 일어나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은 삶이고 인생은 오뎅이다.


낮 경기로 열리는 주말 홈경기는 오래간만이었다. 야구장의 넓게 펼쳐진 시야가 펭귄들의 남극처럼 자유로웠다. 나는 어제 룸메이트의 헤어진 남자친구가 말했다던 도로 위의 R자를 생각했다. 야구장 그라운드에도 R자가 징후처럼 새겨진다면 좋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나를 야구광 소녀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호회의 내 아이디이기도 하다. 여자애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주민등록증 잉크도 안 마른 여자애가 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지만 처음부터 야구광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짝이 야구 선수의 아들이었다. 그 애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야구장에 가는 소녀가 되었다.  

-그 얘기 알아?

라고 그 애가 꺼냈던 말은 이제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의 무슨 징후였던 것 같다.


짝꿍의 아빠는 이름 없는 투수였다. 별명만 있었다. 짱아찌였고, 정말로 통산 방어율이 짰다. 내 짝꿍에게도 변변한 가방이나 필통을 사 주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아빠도 없는 나보다 그 애가 하고 다니는 꼴이 더 꼬질거렸으니까.


-야구는 외계인들이 만든 스포츠래.

-외계인들이 왜 만들어.

-외계인들이 필요해서 미국 사람들한테 시킨 거래. 뭐냐면, 지구에서 활동하는 외계인들이 UFO를 띄우면 자꾸 걸리잖아. 그러니까 안 걸리고 다시 외계로 돌아가고 싶을 때 야구라는 우주적인 공식을 이용한다는 거야.

-내가 바본 줄 알아? 우주적인 공식이랑 야구가 무슨 상관이야?

-바보, 야구 자체가 우주적인 공식이야. 너는 공부도 잘하는데 그것도 모르냐.

-잠깐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 우주에도 야구장에도 스타가 있으니까.

-근데 외계인들이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활동을 하니까, 프로야구 경기를 만든 거지. 외계인들은 야구 경기에 우주를 관통하는 룰을 새겨놓았고, 그들이 거의 경기 내용을 주관할 수 있대.

-관통이 뭐야?

-국어사전도 좀 봐. 꿰뚫는 걸 말하는 거야. 간통도 비슷한 뜻이래.

-몰라. 국어사전은 너무 두꺼워.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어. 7회 말, 반드시 7회 말이어야 한다고 아빠가 그랬어. 외계인들이 7을 되게 좋아한대. 그 때 공격하는 팀 타자가 두 명 아웃되고 나서 세 번째 타자가 나와서 스트라이크아웃을 당하는 거야.

-아웃은 죽는다는 얘기지?

-응 그래. 나가는 거니까 죽는 거지. 그런데 그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포수가 놓쳤을 때 말이야, 타자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이라는 룰에 따라 1루로 뛸 수 있거든. 바로 그 상황이야. 원래는 아웃인데 포수가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놓쳤으니까 스트라이크가 아닌 걸로 치는 거지. 멋진 룰이지 않아? 야구에선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빈번하지는 않아. 그래서 그 놓친 공이 오기 전에 1루에 도착하면 세이프야.

-세이프는 산다는 얘기지?

-그래. 그런데 그런 상황이 오면 우주가 비로소 열릴 준비를 하는 거래.

-우주가 열려?

-그렇다니까. 그런데 다음 타자가 진짜 중요해. 다음 타자는 무조건 파울을 두 개 쳐야 해. 볼은 하나도 없어야 하지. 파울을 두 개 쳐서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 그때 스르릉, 하고 우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네가 봤어?

-우리 아빠가 여러 번 봤대. 다음 세 번째 공을 투수가 던지려는 순간, 그 순간에 외야 전광판 뒤쪽에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길이 열린대. 그 쪽으로 눈 감고 달리면 그때 우주로 가게 되는 거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난 야구광이야. 그건 우주광이랑 같은 거야. 제발 국어사전을 좀 봐. 


나는 그때 환희에 찬 표정으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 짝을 외계인 취급했다. 우주로 가는 과학적 방법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걔가 나에게 관심을 끌려고 헛소리를 지어낸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꼬시는 거라면 넘어가 주고 싶지 않았었다. 난 똑똑한 척 하고, 말수가 많고, 꼬질꼬질하고 나보다 몸무게가 작게 나가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걔가 한 얘기에는 은근한 관심이 오래 남았다.


'도대체 그런 얘기는 왜 지어내는 걸까?'부터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관심만으로는 그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내게 답을 쥐어주지 못했다. 나는 직접 야구장에 가서 뻥인지 아닌지 확인해야만 했다.


야구장의 날씨는 시원한 맥주만큼 좋았다. 하늘 위의 맥주 거품도 햇빛을 막아줄 만큼 훌륭했다. 룸메이트랑 같이 야구장에 오려고 했으나 그녀는 오후 1시까지도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뭘 믿고 실연 같은 걸 당하는 걸까, 연구했다. 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래간만의 라이벌전이라,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승부는 팽팽했다. 야구장 위의 구름이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덕분에 그라운드는 땡볕이 되었다. 관중석의 열기도 땡볕처럼 후끈거렸다. 나는 동호회 사람들을 외야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그들과 맥주를 한잔 마셨다. 내가 야구 동호회에 가입한 것은 고등학생 여자 혼자 야구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있으면 꼭 이상한 아저씨들이 집적댄다. 아저씨들이란 존재는 세상 어디에서나 기분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불쾌한 짓들이 부끄럽다는 걸 잊은 것이다. 야구장에서든 삼겹살집에서든, 지하철에서든, 자기들 집에서든. 그리고 아줌마들은 그런 아저씨들과 같은 집에 산다. 맙소사.


7회 말이 되었다. 0-0. 바짝 긴장되는 투수전 양상의 게임이었다. 야구장을 몇 년쯤 다니다 보니 좋아하는 팀도 생겼고 야구라는 스포츠의 재미도 알게 되었다. 변변치 못한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것들, 슬픔을 떨칠 수 있는 방법들을 외계인들이 아는 것이다. 야구장에 다니는 동안 중학교 짝꿍이 말해줬던 상황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애의 말을 여과 없이 믿게 되었다.

오늘은 우리 팀 투수가 갑자기 미쳐서 잘 던지고 있었는데 상대팀 투수도 똑같이 미쳐서 내가 응원하는 팀 타자들은 헛방망이를 붕붕 그려대고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아웃되었다. 나는 승부욕 때문에 미쳐가고 있었다.

-오빠랑 같이 보면 꼭 타자들이 못해.

나는 옆에 있던 어리버리 오빠를 실컷 꼬집었다.

투아웃이 되고 세 번째 타자가 들어섰다. 그도 역시 두 번이나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해댔다. 우리 동호회를 비롯해서 우리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응원의 목소리를 갑자기 높였다. 빰빰빠바밤 빰빰밤 안경현~ 홈런! 그 소리가 내게는 RRRRR RRR 하고 울렸다.

그러나 그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유인구에 속아 끝내 삼진아웃이 되었다. 그런데 변화구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땅볼이 되면서 포수가 놓친 공이 뒤로 빠졌다.

내 눈이 활짝 재부팅되었다.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황. 그가 일루로 전력질주했다.


세이프가 선언되었다.

-오빠 지금 7회 말이지?

-응.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버럭 긴장했다. 하지만 긴장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는 전광판 뒤쪽으로 와락 달려가기 시작했다. 


-경아, 어디 가?

어리버리 오빠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대답할 틈이 없었다.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려하고 있었다. 제발 파울 두 개만! 제발.

내가 전광판 뒤쪽에 거의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미친 듯이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관중석은 흥부네 집에 박씨가 터진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타자가 친 공이 어떤 아저씨의 손을 맞고 내 발 앞으로 굴러왔다. 내가 기대했던 파울 두 개가 아니라 홈런이었다. 나는 그 공을 집어 들었다. 공을 향해 달려들던 남자들이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나는 그 사람들보다 더 아쉬웠다. 대체 이곳엔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외계인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다들 뭘 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결혼하고 애 낳고 직장생활하면서 알콩달콩 살고 있는 거야? 이런 곳에서?


공이 전광판 뒷길까지 날아왔으니 큰 홈런이었다. 스코어는 2-0. 내가 야구장을 다닌 이래, 7회 투아웃 이후에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이 나온 장면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첫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야구장을 빠져나왔다. 

-점쟁이 빤스라도 입었냐? 홈런일 줄 알고 공 챙기러 간 거야? 라고 동호회 오빠가 문자를 해댔지만 그냥 갑자기 나와 버렸다. 나오자 갈 곳이 없어서 삼겹살집에 두 시간이나 일찍 출근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훅 하고 끼치는 고기냄새가 징글맞았다. 사장 오빠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어, 일찍 왔네?

사장 오빠가 히틀러처럼 손을 한번 폈다. 나는 그 손에 야구공을 쥐어주었다.

-삼겹살 지겹지도 않아요?

-이게 웬 야구공?

-알바비 땡겨 준 선물.

-야구장 갈려고 땡겨 달랬던 거였어?

-오빠. 난 매일 야구장에 갔으면 좋겠어. 왜 평일에는 꼭 내가 알바하는 시간에 경기하나 몰라.

-네가 일 안 하는 시간엔 야구선수들도 야구가 하기 싫은 거야.

-흥, 말도 안 돼.

-진짜야, 우리가 삼겹살을 팔고 있으니까 야구선수들은 야구를 하고 외계인들은 열심히 UFO를 타고 비행한단 말이야. 우주는 이 삼겹살집을 중심으로 도는 거야.

-사장님, 장사가 너무 잘 돼서 머리가 이상해지신 것 같아요.


삼겹살집이 우주의 중심이면, 나는 그런 지긋지긋한 우주 말고 딴 우주로 이민가고 말겠어, 내 별자리는 야구선수좌. 9명의 선수가 부채 모양의 그라운드에 서 있지. 매년 16월에서 17월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갖는 별자리지, 라고 생각하는 내가 머리가 이상한 것일까? 세상은 그냥 세상이고 소주는 그냥 술이고 인생은 그냥 삶일까.


한창 일하고 있을 때 룸메이트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남친 차사고 쳤어. 어쩜 좋아!〉

나는 바로 답 문자를 보냈다. 한 손으로 써빙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 문자를 보내는 건 외계인이 아니더라도 다 할 수 있다.

〈많이 다쳤대?〉

〈다치진 않았는데 강변북로에서 차선을 급하게 바꾸다 옆차를 받아버렸대.>

〈널 버리더니 고소하다.〉

답 문자를 다시 보낸 뒤 마음이 텁텁했다. R자의 징후가 강변북로에 새겨져 있다 사라져버리는 영상이 보였다.


오늘도 손님은 많았다. 주말이니 당연했다. 내일은 손님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이야 오래 해서 힘들지 않았지만, 남아 있다는 것, 여기 남아 있는 것이 힘들었다. 힘든 모든 것들로부터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내 룸메이트의 남자친구 재수덩어리도 그러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남자 날 보자마자 고딩이라고 말을 놨었지. 세 살 차이인 주제에 재수 없어. 인생이 고단한 척은 혼자 다 하고. 멋을 몰라.

 

나는 다음 날 주말 3연전의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야구장에 갔다. 어제 경기는 내가 좋아하는 팀이 8-2로 대승을 거두었다.

나는 외야의 한적한 자리에 앉아 핸드폰에 내장된 벽돌 깨기 게임을 했다. 동호회 어리버리 오빠가 일찍 와서 응원도구들을 챙기고 내 옆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학교 졸업하고 너 치어리더 하면 간지 작살이겠다.

-칫, 치어는 이쁜 언니들만 하잖아.

-이뻐. 너 첨 봤을 때보다 키도 많이 컸어.

-오빠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나는 이 오빠가 좀 어리버리하긴 해도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졸업하면 뭐할 거니? 같은 질문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심심하면 나중에 이런 거 해볼래? 라고만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 중에 하고 싶은 건 하나도 없었으므로 오빠와 사귀지는 않았다. 장내 아나운서, 돌고래쇼 조련사, 은행 청원경찰이라니. 게다가 빤스니 간지니, 하는 멋대로 된 용어를 쓰는 점도 너무 별로였다. 국어사전을 통 안 보는 사람이다.

   

핸드폰을 열어 나는 알람을 알바에 꼭 가야 하는 5시로 맞추어 놓았다. 웬만한 경기는 5시 안에 끝난다. 그리고 웬만한 7회는 3시간 안에 펼쳐진다.

동호회의 다른 오빠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오빠와 나를 번갈아 보며 오빠를 놀렸다.

-이원식! 걔 지금 꼬시면 원조교제야.


오늘 경기는 화끈한 타격전이었다. 선발투수들이 모두 3회에 고개를 푹 숙인 채 강판되었고 타자들이 외계인들처럼 홈런을 쳐댔고, 투수가 자주 교체되느라 경기가 길어졌다. 

4시 50분경에 7회가 왔다. 나는 7회가 빨리 시작되었으면 했는데 그라운드에 기구 풍선이 떨어져 정리하느라고 조금 지연되었다. 제발 오늘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 날씨가 흐려졌다. 우산도 안 챙겨 왔는데, 라는 걱정과 삼겹살집 출근하기 싫다는 격정이 솟구쳤다.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했다. 가방을 손에 들고 가방 속의 핸드폰을 확인하다 짜증이 났다.

-나 알바 안 갈래.

-저런. 그래도 돼?

그런데 7회 말이 시작되자마자 타자들이 두 명 아웃되고 마지막 타자가 낫아웃 상태로 1루로 뛰어나갔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가 1루에서 세이프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공과 거의 동시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심판이 세이프를 선언했다.


나는 꺄아아아아, 하고 고함질렀다. 그 선수가 홈런을 친 것보다 더 좋아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전광판 뒤쪽으로 뛸 수 있게 스탠드 맨 위로 올라섰다.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서인지 갑자기 일어나서인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는 내 손에 가방이 제대로 들려있는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제의 RRRRR RRR 하는 소리는 오늘의 징후였구나, 라는 생각만 들었다.


기회가 오는 거야? 오늘 드디어 되는 거야? 만약 외계에 가면 외계에서도 알바를 해야 할까? 그치만 다 똑같다고 해도, 거긴 아빠가 있을 테니, 괜찮아.

다음 타자는 초구를 강하게 때렸다. 나는 그 타구가 홈런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타구는 오른쪽 폴대를 살짝 빗나갔다. 관중석에서 대형 파울을 아쉬워하는 탄성이 펑펑 터졌다. 다음 공은 포수 머리 뒤로 날아가는 파울이었다. 파울 두 개! 그런데 포수가 일어나 그 파울타구를 쫒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잡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포수가 주저앉아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 타구를 잡았으면 내가 몹시 아쉬워했을 것이다. 나는 포수가 그 공을 놓치는 순간, 파울 두 개다! 라고 속으로 외치며 쿵쿵쾅쾅 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더욱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낫아웃에 파울 두 개. 짱아찌 아빠가 얘기해줬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이런 상황이 오리란 것을 믿고 있었다. 야구장에 올 때마다 한 번도 안 믿은 적이 없었다. 심장 뛰는 소리는 너무나 벅차 그 소리만으로도 우주공간이 열리고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 사라진 자들의 공간과,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투수가 호흡을 한참 가다듬은 뒤 다음 공을 던지려고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광판 뒤쪽으로 달렸다. 룸메이트와 삼겹살집과 야구장들과 지구와 슬픔과 고통 들이 귀 밑을 휙휙 스쳐갔다. 모두 작별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외계로 가는 추진력이 모자랄까봐 2루 도루를 막 출발한 선수처럼 죽어라 뛰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 정말 오래 기다렸어. 모두 안녕.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나는 무언가에 부딪힌 듯 몹시 아팠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눈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바지였고 인간들의 다리였다. 그 중에서 동호회 어리버리 오빠의 어엿한 카고바지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아연실색 실망했다.


-왜 아직 지구인 거야? 왜 실패한 거야? 이 모든 게 뻥이었던 거야?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빠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자세히 보려고 눈을 뜨자 아빠의 얼굴이 또렷하게 현실감을 띠며 다가왔다. 나이를 많이 먹은 얼굴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내 아빠라는 건 틀림없는 100% 현실이고 사실이었다. 그리워하던 아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딸이 있을 수는 없다. 그는 정말로 아빠였다.


아빠가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빠는 아저씨들 같은 말투를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자기 가슴께를 아픈 듯 주무르고 계셨다. 나는 무한정 기뻤다. 아빠가 있는 외계로 돌아오다니. 드디어 내가 사라져버린 것들,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세계에 도착하다니. 그러나 손을 잡고 일어서자, 순간적으로 멈추어 있던 청력이 다시 소리들을 뇌파로 바꿔 뇌에 전달해 주었다. 관중들의 환호소리, 안내방송 멘트, 응원가, 막대풍선 탕 탕 부딪는 소리들이 인식되었다.


나는 야구장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앙, 하고 울먹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그냥 여기였던 것이다. 사라져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는 않는 이 지긋지긋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 때 아빠가 말을 이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왜 그래? 다쳤어요?

나는 울먹이다 눈을 들어 다시 아빠를 보았다. 다행이었다. 아빠는 놀란 표정을 하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아빠인 채로 그대로 있었다. 나는 아빠 품에 안겨 헝, 하고 울었다. 《문장 웹진/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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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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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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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 ...하지만 저 역시 소름이 돋았습니다. 좋은 작품 접할 기회 주신 점 정말 고맙습니다.

    • 2009-06-04 20:17:0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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