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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러캔스

  • 작성일 2006-12-01
  • 조회수 3,893

 

실러캔스



 김애현




이곳은 폐쇄되었습니다.

실, 사, 모의 사이트는 사라졌고 컴퓨터 화면에는 짤막한 문구 아래 실러캔스의 사진만이 남겨져 있다. 나는 마우스를 쥔 채 집게손가락을 까닥거린다.

실러캔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처음 그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나는 이만 몇 번째 방문자였다. 입구를 클릭하자 화면은 곧바로 실러캔스의 사진과 설명으로 이어졌다. 삼억 오천만년 전부터 살아온 물고기라니. 공룡보다 일억 년 앞선 것이었다. 1938년, 실러캔스가 마다가스카르 근해에 생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는 설명에서 나는 마우스를 멈췄다. 채집된 실러캔스는 화석과는 다른, 새로운 종이라고 했다. 나는 스크롤바를 움직여 화면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주 오랜 옛날 물속을 누비던 물고기들 가운데 한 무리가 뭍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다른 물고기와 달리 콧구멍이 입안으로 뚫려 있어 공기호흡이 가능했다. 또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가 아주 튼튼해서 땅위를 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뭍으로 올라간 뒤 완전한 등뼈동물이 되기 전 그들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한 무리가 다시 물로 돌아가 살 수 있도록 진화했다. 그것이 실러캔스다.’

설명에 의하면 심연은 삼억 오천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일정한 온도와 변함없는 조류라는 최적의 조건으로 실러캔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등뼈동물의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있도록 돕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지느러미나 비늘의 모양을 바꾸며 번식하도록 허락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실러캔스는 자기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컴퓨터 화면을 비껴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 아래 그녀의 자리를 지나 내가 있는 곳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모로 어부들은 그렇게 귀한 물고기인 줄 몰랐답니다. 학자들이 달려가 보니 살은 모조리 뜯겨 나가고 등뼈와 푸른빛이 도는 비늘만 남아 있더래요. 뼈와 비늘밖에 남지 않은 그 물고기에게 학명을 붙이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죠. 라티메리아 차룸나에. 하지만 그 물고기가 실러캔스인지는 단정할 수 없어서 그냥 정체불명의 화석어를 발견했다고만 했대요. 14년 뒤, 실러캔스는 온전한 상태로 포획되었어요. 이쯤이면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릴 만하죠. 독일에서 발견된 쥐라기시대 석회암에서 새끼 두 마리를 밴 실러캔스의 화석이 나왔어요. 하지만 그 뒤로도 알을 낳느니 새끼를 낳느니 분분했던가 봐요. 1975년이 돼서야 난태생이란 사실이 밝혀졌대요. 새끼들은 삼, 사십 센티 정도 되는데 어미 몸속에서 약 열두 달을 보내고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는군요. 그거, 사람과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모로코 정부로부터 실러캔스의 박제를 기증 받았다는데 그게 63빌딩에 있어요. 아이랑 보러 갈래요?

약속 날짜를 잡는 일로 그녀와의 통화가 길어졌으므로 어쩌면 나는 그 순간부터 실러캔스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그 사이트에서 보았던 실러캔스의 거칠고 푸른 비늘과 굼뜬 몸놀림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다만, 2주 뒤의 약속 날짜가 동그라미 쳐진 탁상달력을 볼 때마다 시간은 실러캔스가 견뎌 온 구원한 시간처럼 더디고 굼뜨게 흘렀다. 


사진 속 실러캔스는 무언가에 놀란 듯 지느러미를 활짝 편 채다. 엽서크기만한 사진이어선지 몸길이가 일 미터를 훌쩍 넘고 몸무게만도 팔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물고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검지손끝으로 실러캔스의 사진을 톡톡, 친다.

모니터 옆에 놓인 전화기에 호출신호가 들어온다. 신호음과 함께 B동 308호의 버튼이 형광빛을 내며 깜빡인다. 잠깐 다녀가우.

사무실 밖으로 나와 계단참에 선다. 빗줄기가 제법 굵다. 휴대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들여다본다. 10:32. 약속시간은 아직 멀다. 고개를 돌려 비에 흠뻑 젖은 B동 건물을 바라본다. 대연회장에 나가 있는 박 주임을 부를 걸 그랬나, 싶다. 하지만 308호의 호출이라면 박 주임은 고개부터 젓는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려다본다.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습한데도 목이 말라온다. 마른침을 삼키며 B동을 향해 걷는다. 사실 이 시간, 노인이 있어야 할 곳은 308호가 아니라 일요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대연회장이다. A동과 B동 사이에 있는 대연회장에서는 실버타운의 입주자를 위한 각종 이벤트가 2주 간격으로 치러진다. 모두 실버타운의 입주자인 노인들을 위한 것이다. 오늘 공연은 꽤나 이름난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몇몇의 성악가들이 출연한다.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은 308호 노인뿐이다. 박 주임은 음악회가 실버타운 측의 무료이벤트임을 노인에게 거듭 설명해야 했다. 노인은 바쁘다고 했다.   

-참 내. 공짜라는데도 꿈쩍을 안 하셔. 보아하니 잘난 아들집에서도 평생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살았을 양반이야. 이런 지상낙원에서도 일이라니, 지겹지도 않나.

308호 노인은 실버타운이 생긴 이래로 가장 저조한 이벤트 참석률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박 주임은 앞으로도 노인의 기록을 깰 만한 입주자는 없을 것이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한다. 308호 노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독거노인들이 입주해 있는 B동은 부부가 함께 입주해 살고 있는 A동보다 참석률이 낮은 편이다. A동의 세대보다 동선이 짧고 움직임도 적다. 때문에 이벤트 참석률뿐만 아니라 각종 부대시설의 이용 빈도수도 가장 낮고 입주자 절반가량이 가벼운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글쎄, 뭐가 불만이냐고. 떡 벌어진 잔칫상에도 웃지를 않더라구. 아닌 말로다 자식들이 못 살아봐, 그런 생신잔치가 가당키나 해? 여기가 얼마짜리 실버타운인데. 게다가 전화 한 통이면 냉큼 자식들이 달려올 가까운 거리에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B동 노인들은 상담만 하면 멀리 떨어져 나왔느니 버려졌다느니, 왜 그런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 자식들이 이런 데로 가주십사 하면 뒤도 안 돌아보겠다, 나는.

그런 박 주임이 제일 신경 쓰는 사람은 308호 노인이다. 박 주임뿐만 아니라 실버타운 직원들에게 308호 노인은 주요 관리대상 1호로 꼽힌다. 실버타운의 각 세대 현관출입문에는 입주자의 문밖출입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 12시간 동안 입주자의 문밖출입이 감지되지 않을 때 생활리듬체크 시스템이 가동되어 그 사실이 관리사무소에 전달된다. 노인은 입주한 후 처음 한 달 간 무려 네 번씩이나 생활리듬체크 경고를 받았다.

-이거 보이시죠? 이런 게 화장실 위쪽에도 있어요.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반드시 드나드셔야 저희들이 안심해요. 안 그러시면 지금처럼 저희들이 달려오게 돼요. 별일 아니라고 하시지만 별일 아니어도 관리규정 상 와 봐야 하는 게 저희들이죠. 그런데 이건 뭡니까?

그때 박 주임은 노인에게서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음식을 건네받았다.

노인은 음식을 만들 때마다 긴급버튼을 눌렀다. 308호로 달려간 박 주임과 내가, 때로는 응급조치 요원이 노인에게서 건네받은 음식을 들고 사무실로 되돌아오곤 했다. 적절한 주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직원들의 생각이 모아졌고 박 주임은 나를 노인에게로 떠밀었다. 그 날 오후 나는 308호의 현관 벨을 눌렀다. 노인이 문을 열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리모컨을 사용하세요. 이렇게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까진 좋은데 이러시면 생활리듬체크에서 문밖출입을 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거든요. 그러면 일일운동량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요.

노인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이내 부엌으로 갔다.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이 아니어서 나는 머쓱해진 채 소파에 앉았다. 노인이 탁자 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미안혀, 오늘은 만든 게 하나도 없어서 줄 만한 음식이 읎어. 그렇게 말하고는 노인은 유리창을 닦던 중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베란다 유리창 밑에 구겨진 신문뭉치가 몇 개 떨어져 있었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베란다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닦는 일이라면 청소대행 업체 서비스를 요청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은 입주 시 계약조건에 명시되어 있는 무료서비스였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쓰지 않는 리모컨처럼 그 또한 무용지물일 것이었다. 안방으로 들어갔던 노인이 무언가를 꺼내들고 나왔다. 노인이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반듯하게 다려진 정사각형의 손수건은 모두 열장이었다. 하나씩 나눠 써.


복도에 깔린 특수타일 때문에 내 발소리가 희미하다. 실버타운 복도 전체에 깔린 타일은 응급 시 휠체어나 구급침대가 용이하게 움직일 수 있는 미끄럼방지용이기도 하지만 소리에 민감한 노인들을 고려한 시스템 중 하나다. 나는 내 발소리를 먹어버리는 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타일은 가끔씩 내가 허방 위를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내 두 발을 내려다보게 된다. 나는 타일 위에 굳건히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발을 굴러 내 발소리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타일이 발소리를 먹어버린 것은 어쩌면 실버타운 전체가 공중에 들려져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상으로부터 멀어진 낙원. 308호의 현관문 앞에 서서 두 발을 내려다본다. 저절로 발가락이 움츠러든다.

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이 손을 내민다. 나는 들고 간 종이가방을 건넨다. 노인은 그 안에서 내 옷을 빼내고는 종이가방을 돌려준다. 그리고 내게 거실로 가 소파에 편히 앉으라고 말한다. 거실 바닥에는 앉은뱅이 다리미대가 펼쳐져 있다. 그 옆에 잔뜩 구겨진 마른 손수건 여러 장이 놓여 있다.

안방으로 들어갔던 노인이 옷을 들고 나온다. 반듯하게 다려진 직원용 잠바다. 비번이었던 누군가는 얼마 후 노인이 다려준 말끔한 웃옷을 입게 될 것이다. 옷 주인뿐만 아니다. 노인은 비번인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옷을 늘 세탁하여 다려준다. 직원들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보았지만 그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308호에서 호출이 오면 직원들은 하는 수 없이 비번인 누군가의 옷을 노인에게 가져다주곤 한다.   

노인이 옷걸이를 안방 문손잡이에 걸며 갈 때 잊지 말고 가져가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다리미대 앞에 앉는다. 잠시 기다리라는 노인의 말에 나는 소파에 앉아 그러마, 대답한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바깥세상보다 조금 더 어둡다. 나는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본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잠깐잠깐 몸을 기댄다. 베란다 유리창에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빗물은 노인의 완만한 등선에서 사라진다. 몸속 어딘가로 속속 스며들고 있는 것 같다. 노인이 분무기를 들고 마른 손수건 위에 물을 뿌린다. 노인의 몸속에 한껏 차오른 빗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노인은 손수건의 한 귀퉁이를 잡고 다리미를 서서히 민다. 고열의 다리미 밑에서 물기는 빠르고 가쁘게 증발한다. 노인은 손수건을 이리저리 매만져 가며 다린다. 손놀림이 노련해 보인다. 평생을 옷 다리는 일만 하던 사람 같다. 생각건대 노인은 전생에 다리미가 아니었을까.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한마디로 반들거린다. 특수타일이 필요한 곳은 바깥복도가 아니라 308호인 것 같다.

-깔끔한 분이세요.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맏아들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깔끔한 노인에게 진력이 난 것처럼 들렸다. 다리미 같은 노인이 지나간, 구김살 없는 곳을 내딛을 때마다 아들 내외는 저절로 발가락이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보폭이 허용되지 않는 집이란 편히 쉴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깔끔하냐면 집이 닳아 없어질 정도예요, 라고 말하며 웃던 며느리의 농담에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맏아들 내외는 지금 유럽여행 중이다.

노인이 다린 손수건을 반으로 접고 접힌 부분을 다리미로 누른다. 손수건이 정사각형의 모양이 될 때까지 접고 다리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다린 손수건을 이미 다려놓은 정사각형의 손수건 위에 포개어 놓는다. 

벽시계를 바라본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건물 밖을 나서기가 싫다. 약속은 괜한 것이었고 허튼짓처럼 느껴진다. 노인이 네 번째 손수건을 다린다. 노인에게 차라리 이 궂은 날씨를 말려 달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녀와의 지지부진한 관계를 고열의 다리미로 바짝 당겨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리미가 지나갈 때마다 지글대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린다. 수신 상태가 지극히 불량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깍지 낀 손에 힘이 쥐어진다. 목이 마르다. 마른침을 삼켜보지만 부질없다. 신, 경, 에, 거, 슬, 린, 다, 생각하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무엇인가 내 속에서 툭 끊어져 버리고 만다.

“뭐 하시려고 그걸 또 다리세요?”

어쩌면 노인에게 그 말은 왜 사냐고 묻는 것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대답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답답한 심정으로 또다시 묻는다. 꼭 한번쯤은 풍선에 바늘 끝을 대고 싶은, 어릴 적 심정으로 돌아가서였을까. 노인이 무슨 말이라도 시원하게 내뱉어 주었으면 싶다. 내 맘이다, 혹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는 어깃장 놓는 말이라도 듣고 싶다.

“여기 일하러 오셨어요? 편히 쉬시라고 아드님 내외분이 이곳으로 모셔온 거잖아요. 보세요. 여긴 그냥 집이 아니라 최첨단 주거공간이에요. 모든 것이 최적의 조건으로 맞춰져 있단 말이죠. 이젠 여기가 집입니다. 아드님과 살던 그곳이 아니고요. 다시 가고 싶어 하신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거긴 지금 아무도 없어요. 여행 중인 거 아시잖아요. 아드님이 돌아온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거긴 잊으시고 그냥 여기서 편히 사세요. 김 기사가 그러더군요. 세탁기에 전혀 물기가 없었던 것 같다구요. 손빨래 하시는 거죠? 그러지 마세요. 앞으로는 세탁기를 사용하세요. 그리고 남은 시간은 자신을 위해 쓰셔야 해요.”

그 마지막 대목에서 노인이 고개를 돌린다. 노인의 얼굴은 그 말이 무슨 말이냐고 내게 묻고 있다. 정말 몰라서 묻는 표정 같다. 내 자신을 위해 살라고? 이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야.


*


하필이면 골프우산을 집어 들게 뭐람. 사람들이 들고 날 때마다 전철 안으로 습한 기운이 몰려든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바닥 여기저기에 발자국이 어지럽다. 기다란 우산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다. 애써 출입문 위쪽에 매달린 텔레비전 모니터에 눈길을 붙박아 둔다. 요리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백색의 앞치마를 두른 연예인은 누구에게든 아, 저 요리 잘하는 남자? 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조리대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느긋하고 노련하게 손을 놀리고 있다. 가끔 마른 행주에 손을 닦을 뿐 앞치마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가 두른 앞치마는 잘 차려 입은 옷 같다. 구김살 하나 없는 앞치마를 보다가 노인을 떠올린다. 

남자는 재게 놀리는 손만큼이나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인다. 볼륨이 낮게 고정되어 있어 그의 목소리는 깨알 구르는 것처럼 작게 들린다. 화면 아래쪽에 푸른 줄이 뜬다. 그 위로 하얀 글씨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흐른다. 오늘의 기상 속보나 주식시황 같은, 요리와는 상관없는 자막방송은 주기적으로 반복해 흐른다. 고개를 돌린다. 흔들리는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고 눈을 감는다. 온갖 잡음들이 쉴 새 없이 귓가에 닿는다. 실로폰 소리가 잡음들 사이를 비집고 부표처럼 떠오른다.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수신음이다. 우산을 의자 옆 구석에 세워두고 휴대폰을 꺼낸다. 상이와 지금 출발.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삭제한다. 문이 닫히고 전철이 출발한다. 세워 놓은 우산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나둥그러진다. 그녀의 늦은 출발과 나둥그러진 우산과 전철 안의 습기가 음식은 비율이 아니라 손맛이라는 남자의 말과 어지럽게 내 머리 속에서 버무려진다. 의자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바닥에 길게 누운 우산을 내려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눈을 감아 버린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우산을 집어 든다. 흘끔 올려다 본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남자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조절하려고 허리를 구부린 채다. 그 모습 뒤로 손 때 묻지 않은 부엌이 보인다. 그 어딘가에서 노인이 왈칵,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다.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어룽댄다.

전철 안에서 행선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흐른다. 출발이 늦은 만큼, 그녀는 나와의 약속시간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와의 동행에는 반드시 자가용을 이용한다. 비 오는 일요일의 교통체증이라니. 전철이 약속시간을 지켜주는 지름길이란 광고 문구에도 그녀는 아랑곳없다. 기관지가 썩 좋지 않은 아이 때문에 먼지 가득한 지하 전철역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주말에는 하나뿐인 아이와 함께. 단 한 번도 그 말을 어긴 적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그녀는 아이에 대해 각별하다. 그런 그녀에게 금요일 저녁, 약속을 청하는 것은 실버타운의 직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금기사항이다. 홍보이벤트실의 회식 또한 모두 그 날을 피해 정해진다. 금요일은 그녀가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한 예비단계로 주말 못지않게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참, 유별나기도 하지. 사람들은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뒷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직장여성인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고 하나뿐인 지구와 맞먹을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으며 홀로 된 채 심한 관절염에 시달리는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 각별함이 유별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에 고개를 끄덕인다. 실버타운에 입사한 후 ‘그녀는 어떤 상사인가’라는 내 질문에 꼬리말처럼 누군가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조차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웃기지 말라고. 밑도 끝도 없이 툭, 뱉어 놓은 그 말의 주인을 향해 나와 누군가는 술잔을 들다가 내려놓았다.

-실적 없었어 봐. 그깟 모성? 기본 값으로도 안 쳐줘, 이 바닥에서.    

문득, 내가 앉아 있는 싸구려 술집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더러운 바닥이었다. 시험 삼아 딱 한번, 나는 그녀에게 금요일에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청한 적이 있다.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매번 놀라우리만치 독특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 그녀와,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어머니인 그녀와, 나의 연인인 그녀가 하루일과표처럼 꼬박꼬박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많이 막히네. 그녀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비가 오고 하필이면 긴 우산을 들고 나오고 하필이면 그녀가 자가용을 타고 나오고 하필이면 그녀가 통화 대신 문자메시지만 날리고 또 하필이면 텔레비전 모니터의 볼륨은 모기 소리만할까, 하필이면, 정말이지 왜 하필이면 나는 아이에게 실러캔스를 보여주자고 했을까. 연신 하필이면, 이란 말이 신 침처럼 입안에 가득 고여 소용돌이친다. 어쩌면 아이를 이용해 그녀와의 지지부진한 관계를 조금이라도 당겨보려던 내 속내가 수포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하필이면 그때 내 시선은 텔레비전 모니터에 가 닿는다. 지진참사, 육개월 동안 복구는 지지부진……앞으로 최소 52억 달러의 복구비 소요 예상……지원금은 턱없이 모자란다고 피해복구대책위원회가 밝혀.

그 때, 나는 알몸으로 침대에 앉아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은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의 여파로 진앙지역에서 무려 95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시의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느 아파트는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앞가슴에 여민 대형수건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쥔 채 텔레비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한 순간, 저 많은 것들이, 사람들이, 형체도 없이……. 어째, 이를 어째.

그녀는 연신 끝말을 되풀이했다.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이미 불룩해진 아랫도리 때문에, 아니 그것이 언제 수그러들지 모를 것이어서 그녀를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서둘러 벗어 놓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쫓기듯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여몄다.

-갈 거예요? 이제 막 들어왔는데?

-애가 걱정 돼.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에요.

-봤어? 저기 저 아이, 축 늘어진 저 아이……. 가야겠어. 아이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놀란 것까진 알겠는데 충격치고는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몸을 곧추세웠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뭐랄까, 너는 죽었다 깨나도 모를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가버린 모텔 방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나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가 끝나고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까지 광고가 이어졌다. 지루했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었다. 

한 달 후, 그녀는 실버타운의 로열슈트(Royal Suite) 세 채의 분양을 성사시켰다. 40평형대의 로열슈트는 실버타운에서 가장 값비싼 곳이었다. 분양 공고를 낸 지 일 년이 다 되도록 입주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실버타운에서는 입주자를 찾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던 차였다. 그녀는 홍보이벤트실의 총괄책임자로 승진했다. 나는 인터넷 메일로 축하한다는 글을 보냈다. 답신은 그 다음날이 돼서야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그 짤막한 문구는 내가 그녀로부터 얼마나 멀리 퉁겨져 버렸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저리친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내게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고개를 돌려 빌딩을 올려다본다. 까마득하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녀는 아이가 차안에서 아침에 먹은 것을 게워냈다고 말한다. 나는 지갑 안에 든 종합관람권 석장을 떠올린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가 안 되겠어,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나는 빌딩 입구 앞에 서서 핸들을 움켜 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다. 우연히도 그녀의 차는 유턴 차선에 잘못 들어서 있다. 또 그때 반대편 차선은 너무도 한가해 불현듯 그녀는 차를 되돌리기엔 그만한 장소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 적당한 곳. 그녀는 반대편 차선으로 핸들을 힘껏 돌린다. 내 머릿속에서 그녀의 차는 점점 멀어지고 깨알처럼 작아진 뒤 마침내 사라졌다. 

몸에 한기가 돈다. 옷을 추스르다가 젖어 있는 바지 밑단을 내려다본다. 바지 주름선이 어느새 둔해져 있다. 차들이 빠르게 지날 때 고열의 다리미 밑에서 지글대던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지금쯤 노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갑에서 종합관람권 한 장을 꺼낸다. 그리고 빌딩 입구로 걸어간다.

지하 수족관 안은 견학 온 아이들로 제법 붐비고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탄산가스처럼 여기저기서 보글거린다. 수조 안에 뿜어져 나오는 불빛들은 탐조등 같다. 줄지어 선 아이들이 수조 앞을 물결처럼 떠밀려간다. 누군가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아이들은 물고기 떼처럼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몰려간다. 쇼 다이버가 펼치는 환상의 수중 묘기. 수조의 유리막 너머에서 쇼 다이버가 손을 흔든다. 아이들이 활짝 편 손으로 유리막을 두들겨댄다. 잠수복을 입은 쇼 다이버는 검은 물고기처럼 수조 속에서 헤엄친다. 아이들이 쇼 다이버를 따라 움직인다. 내게서 아이들이 멀어진다.

나는 실러캔스의 화석이 있는 출구 쪽을 향해 걷는다. 

살아 있는 화석. 실러캔스는 바싹 말린 커다란 생선 같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하다. 동영상에서 보았던 형형한 푸른빛은 찾아볼 수 없다. 노인의 분무기를 떠올린다. 반쯤 벌리고 있는 실러캔스의 입안으로 물을 잔뜩 뿜어주고 싶다.

박 주임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박 주임은 내게 308호의 노인이 콜택시를 불렀다고 말한다. 운전기사가 실버타운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며 어째야 하는지 묻는다. 나는 박 주임에게 노인의 맏아들 내외가 유럽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때문에 집은 비어 있으며 당연히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노인을 말려 보라는 내 말에 박 주임은 발끈, 화를 낸다. 왜, 안 말렸겠어. 노인이 키 번호를 알고 있다며 고집을 피운다고 박 주임은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아무튼 누구 하나 붙여 보내야겠지? 박 주임이 내게 묻는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한쪽 손을 유리에 갖다 댄다. 검지손톱 끝으로 유리를 톡톡, 친다.

“정 가시겠다면야 하는 수 없죠. 본인이 싫다는데 눌러 앉힐 수는 없잖아요.”  

휴대폰 플립을 닫으며 나는 실러캔스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왜, 왜 그러는 건데요. 다시 되돌아가려는 이유가 뭔데요. 거긴 어둡잖아요. 빛이 닿질 않아요. 그런데도 제 발로 가야겠어요?

나는 오래도록 실러캔스 앞에서 머물렀다.


고속 엘리베이터 앞에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무심코 그곳으로 향한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아이들과 섞여 떠밀리듯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분속 460미터의 고속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나를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아이들이 유리창에 바투 붙어 있다. 문이 열리자 아이들은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나간다. 나는 아이들을 따라 전망대에 발을 들여 놓는다. 

통로 한가운데에 한국 고사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아이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 빌딩의 유일한 특징이랄 수 있는, 한강과 서울 인근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에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둔탁한 악기소리와 동물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관광망원경 앞에 몇몇의 여자들이 아이들과 줄을 서 있다. 아이들의 시선은 자꾸만 노래하는 징검다리나 신비의 소리 쪽으로 향한다. 여자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아이를 들어 올려 두 눈이 망원경에 잘 맞춰졌는지 큰 소리로 묻는다. 보여? 잘 보여? 아이를 들어 올린 여자의 휜 허리께를 바라보다 그녀를 떠올린다.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는 먼 데서 달려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쉰다. 시큰한 냄새가 밴 아이의 속옷을 빨던 중이라고 그녀가 내게 말한다.

“세탁기는요?”

지금껏 속옷은 푹 삶아 손빨래를 해왔다고 그녀가 대답한다. 이제 막 잠든 아이가 깰까봐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까지 아끼는 눈치다. 나는, 삶는 기능은 물론 건조까지 풀코스형 최신 세탁기가 흔한 세상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그녀도 말이 없다. 갑자기 서먹해진다. 통화가 끊길 것 같아 조바심이 인다. 나는 그녀에게 좀 쉬라고, 주말인데 푹 쉬라고 서둘러 말한다. 그녀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왜요? 왜 웃는데요?”

그녀는 할 일이 태산이라고 대답한다.

“그러게 나랑 여기 왔으면 좋았잖아요.”

그녀가 또 말이 없다. 나는 그녀를 부른다. 그녀가 아주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자신이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잊었느냐고 내게 말한다.

“그럼 나는 기억해요? 내가 어디 있는지 알기나 해요?”

아아, 안 되겠어. 수화기 저편의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빨래가 식어버린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조망대 밑의 계단은 모두 여섯 개다. 유리창을 두들기거나 기대지 마세요. 계단 입구 안내 팻말에 쓰인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다. 나는 사람들과 섞여 차례를 기다린다. 인솔교사와 함께 계단에 올라선 어린 여자아이는 자꾸만 엉덩이를 뒤로 뺀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는 수 없이 여자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계단을 내려온다. 계단을 오르는 몇몇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조망대의 통유리창 앞에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내 앞에 선 남자아이 두 명이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조망대 앞에 선다. 한 아이가 발꿈치를 들고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댄다. 다른 아이는 유리창을 툭툭 치며 키득거린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있던 아이가 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는 쓰러질 것 같은 포즈를 취한다. 옆에서 키득대던 아이가 그에 질세라 새라도 된 듯 두 팔을 벌려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 이내 두 아이는 자신의 손자국을 유리창 높은 곳에 남겨두려고 제자리에서 뛴다. 누군가 아이들을 향해 위험하다고 말한다.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이는 아직도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다른 아이의 옆구리를 찌른다. 두 아이는 계단을 뛰듯 걸어 내려와 나를 지나쳐 간다.

나는 계단을 오른다.

조망대 앞에 선 나는 마치 어떤 힘에 떠밀려 공중에 들린 것 같다. 자꾸만 발가락이 움츠러든다. 가까스로 발아래를 내려다본다. 나는 한 순간,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릴……것만 같다. 경고 문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리창에 두 손을 댄다. 얕은 떨림 같은 것이 손목으로 그리고 서서히 양팔로, 어깨로 퍼진다. 나는 잠시 호흡을 고른 뒤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도시의 잔상이 먹빛으로 물든다. 안 되겠어. 먹빛 속의 그녀는 시큼한 냄새가 밴 아이의 속옷을 집어 든다. 이제 막 맏아들의 집에 도착한 노인은 아무도 없는 어둑한 거실에서 소매 끝을 걷어 올린다. 욕실로 들어간 그녀는 솥을 꺼내고 노인은 세면대 앞에서 마른 걸레에 물을 적신다. 물이 끓고 젖은 걸레에는 오래된 먼지가 들러붙는다. 욕실에서 부엌으로 욕실에서 거실로. 삶는 기능에 건조까지 가능한 풀코스의 세탁기와 최대흡입력의 진공청소기를 등진 채 그들은 쉬지 않고 몸을 놀린다. 움찔, 실러캔스가 움직인다. 먹빛 심연 속에서 천천히 헤엄친다.《문장 웹진/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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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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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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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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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전개 스타일이 무지 맘에 듭니다 약간의 전율까지 생길 정도로.

    • 2010-02-03 16:26:0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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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