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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의 송곳

  • 작성일 2007-01-31
  • 조회수 4,822

 

입안의 송곳



명지현

 



정수리 위로 노란 빛이 켜진다. 눈을 질끈 감는다. 지이이잉 가느다란 기계음. 등받이가 아래로 젖혀지자 뒤통수가 바닥에 닿을 것 같다. 입을 크게 벌리세요. 의사는 위에 매달린 조명을 얼굴 가까이로 끌어내린다. 더 크게요. 입을 최대한 벌리자 어쩐지 굴욕감이 든다. 혀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다. 치석이 제법 많네요. 의사는 내 입술을 조심스레 잡아 늘인다. 치과에 오기 전 칫솔질을 하면서 나도 봤다. 눈 오는 날 창틀처럼 치아 사이에 허연 것이 끼어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내자 치석이 석필 조각처럼 잘게 부스러졌다.

 


 

의사는 스케일링부터 해야 한다며 달리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묻는다.

“송곳니, 이거 뽑아버릴 수 있나요?”

건조한 손가락이 윗입술을 제친다. 곧이어 감탄사가 터진다. 햐, 정말 크군요. 덧니가 이렇게 크니 마음고생이 컸겠어요. 의사의 굵고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적잖은 위로를 받는다. ‘드라큘라 이빨’의 비애를 이 사람은 알고 있구나. 그간 수없이 많은 말을 들어왔지만 마음고생이라는 표현은 처음이다.

“덧니 옆의 이걸 뽑고 송곳니를 밀어 넣어야죠. 함부로 뽑으면 얼굴 윤곽이 흐트러져요.” 의사는 송곳니를 갈아서 집어넣으면 반듯하게 된다며 내 윗니들을 손톱으로 톡톡 친다. 묵묵한 ‘이빨’을 함부로 만지는 손가락. 콱 물어버릴까. 의사는 내 와이셔츠의 배지와 이름표를 보더니 자신이 자주 다니는 백화점이라고 알은 체를 한다. 거기 물건 왜 그렇게 비싸요? 입에 동그란 거울을 집어넣고 물으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비싸면 다른 데 가서 사면 그만이지. 의사는 교정의 순서를 설명한다. 이건 없애고 이걸 갈아서 위에 교정기를 붙이고. 그는 차트의 치아 그림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친다.

“기차 레일처럼 생긴 쇠줄을 여기에 걸어요?”

“한 이년 동안만 교정기를 끼우면 됩니다. 투명한 브라켓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들 몰라요. 비용만 더 들이면 투명 교정이라는 것도 있어요. 요즘은.”

의사는 교정의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이놈의 ‘드라큘라 이빨’을 없애버릴 궁리는 오래전부터 했었다. 미루고 미뤄온 일이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너는 착해 보여.’ ‘양쪽 집안을 통틀어 이런 이빨이 없는데 얘는 왜 이러지?’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온 얘기다. 이놈을 제거하고 평범한 웃음을 되찾는 게 내 소원이었다. 그런데 간단치 않은 과정을 듣자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가격 또한 만만치가 않다. 엊그제 받은 카드대금 고지서에 든 숫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복잡한 숫자들을 내 속에서 더하고 빼고, 또 빼고. 마침내 수많은 의문부호만 남는다. 섣불리 교정을 시작했다가 해고라도 당하면? 그 다음은? 비용은 둘째 문제다. 이건 길게 자란 발톱을 깎아버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열세 살까지는 드라큘라로, 고등학교 때는 장도리라는 별명을 선사했던 송곳니, 내 송곳니.

나는 혓바닥으로 윗니 전체를 살살 문지른다. 오늘은 칫솔질에 공을 들였기 때문에 표면이 대리석처럼 매끈하다. 양쪽 송곳니의 볼록한 표면을 혀끝으로 핥는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도 세게 문질러본다. 기분이 묘하다. 혀를 사이에 넣고 오른쪽 송곳니로 꽉 문다. 혀가 뻣뻣해진다. 더 세게 물어본다. 살 속 깊이 송곳이 파고드는 것 같다. 이놈을 없애버리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뭐가 되는 건가. 얌전하고 납작하게 되겠지. 지금은 납작하게 엎드려야 살 수 있다. 재교육 대상 1호가 아닌가. 자칫하면 잘려나갈 감원 대상, 블랙리스트의 맨 윗줄. 이런 입으로는 고객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낼 수가 없다. 내 몸에서 날카로운 건 다 제거해야 한다. 꼿꼿한 성질머리도 교정을 하고 싶다.

스케일링을 하러 간호사를 따라간다. 치료실을 가로질러 들어가자 안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칸막이마다 기다란 의자에 누운 환자와 간호사, 의사가 셋씩 들어 있다. 노란 불빛과 기계 소음도 칸칸이 똑같다. 마치 자동차 수리 센터를 지나는 것 같다. 환자의 얼굴은 천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미 운명하셨거나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몸을 숙인 의사가 밝은 빛 아래서 부산하게 손을 움직인다. 커다란 고글을 쓴 의사는 용접공과 비슷하다.

모두가 고장 난 부품을 고치러 여기에 온 거다. 수리를 맡긴 몸체들은 줄줄이 누워 아무 말이 없다. 초록 덮개의 벌어진 틈으로 타인의 입안이 보인다. 조명을 받아 훤히 들여다보인다. 나는 멈춰 서서 축축하고 붉은 동굴을 내려다본다. 가까이 볼수록 그것은 살점을 도려낸 끔찍한 환부 같다. 입이란 몸의 현관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니다. 열린 내장, 관능의 구멍이다. 가급적 다물고 살아야겠다. 내 것도 들키지 말고 남의 것도 함부로 보면 안 되겠다.

지정해준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댄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천천히 다가온다. 초록색 천이 내 얼굴을 덮는다. 시작합니다. 사무적인 여자 목소리. 치석 제거는 간호사 전담인가보다. 낯선 화장품 냄새를 들이마시며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떠올린다. 이왕이면 내 얼굴에 젖가슴을 바짝 붙여 작업을 하면 좋겠다.

“입을 벌리세요. 크게요.”  

곧바로 드릴이 무지막지하게 파고 들어온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기계의 진동음에 머릿속에서 전기 스파크가 튄다. 입안으로 물이 흘러들면서 동시에 물을 빨아들이는 펌프 소리가 반복되자 귀가 멍멍하다. 날카로운 금속은 치아의 구석구석을 가차 없이 고문하고 학대한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튄다. 몸을 움찔거려도 그녀는 냉혹하기만 하다. 여자가 내 속살을 만져주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나는 발가락을 꼬아대며 참는다. 고통은 쾌락과 맞물려 있다. 일그러진 내 얼굴은 사정 직전의 표정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입 가까이로 들이댄다. 물고 싶지만 물 수가 없다. 뭐라도 씹고 싶다. 고무공이 있었으면 마구 물어뜯을 텐데. 내 손등에는 작지만 뚜렷한 흉이 있다. 자위를 할 때마다 손등을 깨문 자국이다. 몸을 들썩이자 간호사가 조금만 참으라고 말한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지만 물고 싶은 건 참기가 어렵다. 사정을 할 때면 여자의 비릿한 살에 이를 박아 넣었다. 목덜미나 어깨살을 물면 여자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그곳이 세게 조여졌다. 송곳니는 아주 야비한 놈이라서 볼일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놔주지 않는다. 내게 물린 여자는 나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다들 떠나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물었어야 했는데. 

“참을 수 없이 아프면 손을 드세요.”

간호사는 뒤늦게 우리끼리의 의사소통 방법을 일러준다. 그녀는 오른쪽 송곳니 사이에 큰길을 내려는 듯 한곳만 반복해서 판다. 겹쳐진 덧니 사이가 치석의 소굴이라고 중얼거리며 막무가내로 후벼 판다. 뒤통수에서 찌릿찌릿 불꽃이 터진다. 차라리 손을 들까. 그새 손 대신에 다른 것이 벌떡 일어나 있다. 스케일링하다가 발기하는 환자들을 위한 대응책이 있는지 궁금하다. 팽팽해진 아랫도리를 가리려고 무릎을 세운다. 거의 다 끝나가요. 목덜미에 그녀의 입김이 부어지자 더 미칠 것 같다. 아랫도리로 몰려든 피는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는다. 애국가를 4절까지 읊조리면 발기가 누그러질지도 모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빌어먹을, 지금은 어느 누구도 물어뜯을 수 없다. 그래서 미치겠다. 간호사여, 내 몸 위로 올라와! 제발 입으로 들어와. 드릴이라도 씹어버리고 싶다. 보란 듯이 우적우적 씹어버리고 싶다. 

“양치 한번 하세요.”

등받이가 위로 오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다. 아랫도리를 감추는 게 목적이다. 종이컵을 타구에 대자 물이 저절로 흘러내려온다.

이를 드러내고 입으로 숨을 쉰다. 시원하다. 치아 사이로 바람이 드나든다. 치아와 치아 사이에 오솔길이 생겼다. 나는 그 좁은 잇새로 슬그머니 들어간다. 어두운 점액질의 길을 걷는 나를 느낀다. 아무도 없다. 누구도 없다면 나는 자유롭다. 내 자신을 바꿀 필요도, 억지로 웃을 필요도 없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피투성이다.

녹슨 쇠의 맛이 입안에 그득하다. 입안을 물로 헹군다. 피를 맛본 혀는 벌어진 잇몸 새로 들어가 선혈을 핥는다. 잇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피투성이로 만들곤 했다. 고객과의 불화는 나의 주특기. 정직원이 된 지 삼십이 개월 십팔일 째. 올봄부터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 명함을 자신의 지갑에 넣고 다닌다. 상스럽게 구는 고객들 때문에 점점 마모되어 가는 나, 그런 나의 명함……. 소속이 없어지면 나는 뭐가 되나. 전체에서 조각으로 떨어져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나는 컴컴한 잇새에 쪼그리고 앉는다. 아무도 없으니 조금은 외롭다. 구차한 고민은 치석처럼 긁어내버렸으면 좋겠다. 편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종이컵에 든 물을 반은 뱉고 반은 삼킨다. 뱉어낸 물에 회색 알갱이와 작은 핏덩어리가 보인다. 체리주스를 먹은 것처럼 진홍빛 침이 타구에 동그랗게 모였다가 휩쓸려 내려간다.


오늘따라 매장은 한산한 편이다. 오전 내내 창고와 매장을 오르내리며 하반기 세일 품목을 체크했다.〈호주산 무릎담요〉에 새로운 가격표와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고 제품 박스의 개수를 체크했다. 바코드 스티커를 떼면서 손톱 사이를 긁혔는지 글씨를 쓸 때마다 조금씩 쓰라리다. 손톱 아래 맞붙어 있는 속살점이 붉은 피를 머금고 있다. 이렇게 작은 상처도 신경이 거슬리는데 생니를 어떻게 뽑나. 수선스런 아줌마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다. 매장에 서 있다 보면 뼛속 깊이 외로움이 밀려든다. 내 자신이 제품이라는 양떼를 관리하는 양치기 개가 된 것 같다.

자꾸만 이가 근질거린다. 포장지를 벗겨 껌 두 개를 연이어 입에 넣는다. 단물이 빠진 입안의 껌과 딱딱한 새것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려고 부지런히 씹는다. 입안이 단물로 질척인다. 감질만 더 난다. 덩어리가 큰 놈을 씹고 싶다. 찰고무공. 주먹만 한 고무공이 있으면 좋겠다. 마침 후배 녀석이 전표를 들고 식기 매장 앞을 쏜살 같이 지나간다. 놈을 불러 세운다.

“너 아동 코너 가서 공 하나만 사 와. 요만한 거. 알지?”

“또? 이제는 4층 갈 일 없으니까 형이 직접 가요.”

“헤어졌어? 또 바꿔쳤구나. 재주도 좋다.”

바로 얼마 전까지 완구부의 스무 살 난 여자애와 커플링을 끼고 난리를 치더니. 이놈은 신촌의 제화점에서 내가 발탁해온 놈이다. 부장은 걸핏하면 이놈과 나를 비교한다. 여자 홀리는 재주가 좋아 손님들도 이놈 말이라면 깜빡 넘어간다. 그 덕분에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정직원이 되었다. 

“너, 이 해봐.”

“고춧가루 꼈어요?”

녀석은 신분증의 알루미늄 판에 치아를 비춰보며 말한다.

“본부장은 명예퇴직 신청한다던데. 뭐 해먹고 살려고 그러지? 애가 셋이잖아.”

지금이 남 걱정 할 때인가. 말짱한데 뭘 그래, 하며 녀석이 신분증 모서리로 치아 사이를 긁는다. 나는 녀석의 이만 본다. 놈의 앞니는 어린아이 유치처럼 작다. 마지못해 웃어도 작은 치아가 언뜻 비치면 녀석의 모든 행동이 순수하고 꾸밈없어 보인다.

“여기는 몇이나 나간대? 영업부 통폐합 한다더니 조용하네?”

“내가 회장인가? 그걸 무슨 수로 알겠어.”

녀석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내 앞을 가로질러 간다. 야, 이따가 한잔 할래? 라고 묻자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건방진 놈 같으니.

갖가지 풍문을 주워 모아도 당장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 누가 충치처럼 뽑혀나갈지 몰라 납작 엎드리는 중이다. 임원이나 말단이나, 감원의 시퍼런 칼날 앞에서는 함께 숨을 죽이지만 대량학살은 말단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가지 굵은 몇 놈이 잘려 나갔다는 소식에도 우리 같은 말단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임원들이 제 목숨을 보전하려고 축소를 단행하자 불안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회사는 조직 개편을 서둘렀다. 매장을 줄이고 온라인 쇼핑몰로 전환한다는 소문은 꽤나 구체적이다. 전체에서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라고 했다. 정직원이 된 지 삼십이 개월 이십일째. 임시직 때부터 두 달에 한번 꼴로 소동을 일으켰다. 감봉 처분을 받은 적도 있지만 월급은 어김없이 제때 나왔다. 어김없이 제때 보상해준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해봤기에 안다. 미친 고객들과 고약한 사규의 틈바구니에서 나 자신만을 물어뜯으며 버텼는데. 물론 큰소리 칠 입장은 아니다. 이렇게 생겨가지고 고분고분하질 않으니 미움을 산 거다. 나는 매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입을 꼭 다물고 입아귀를 올려 미소를 짓는다. 웃으면 웃을수록 울상이 된다. 인상을 쓰며 이를 드러낸다. 위아래 치아를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낸다. 불뚝 튀어나온 송곳니가 칼처럼 빛난다. 누렇고 커다란 이! 으르르르 혀를 굴려 소리를 낸다. 나는 늑대다! 라이온 킹, 굶주린 사자다! 짐승 소리를 내면 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험상궂게, 아주 험악하게! 멍청하게 웃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전체에서 옥석을 가린다면 나는, 나는 치석 같은 존재인가? 다시 이가 근질거린다. 서른두 개의 이가 잇몸부터 뾰족한 끄트머리까지 간질간질 조바심이 난다. 아주 센 걸 씹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매장을 슬그머니 빠져 나와 4층의 아동코너로 향한다. 지금의 내겐 고무공이 필요하다. 바글거리는 아이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아동 코너는 이맘때가 제일 북적인다. 하릴없는 애 엄마들이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찾아드는 시간이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아이의 무릎이 보인다. 윗주머니에 든 껌을 다시 꺼낸다. 서둘러 포장을 벗긴다. 동그란 무릎이 눈에 들어온다. 남의 살을 처음으로 물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연거푸 집어넣은 껌을 급히 씹는다. 껌은 부드럽게 엉기며 이내 한덩어리가 된다. 싸한 국물을 삼키며 치과에서 봤던 붉고 축축한 동굴을 떠올린다. 관능의 구멍, 열려진 내장. 이 속에 든 놈 때문에 그동안 여럿 다쳤다. 놈은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물었다. 윗집 사는 여자애였다. ‘토끼이빨’ 계집애. 

그 애와 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우리 엄마와 여자애의 엄마가 함께 앉은 그 뒷자리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서 속이 울렁거렸다. 엄마들은 웃고 떠들었고 내 옆의 여자애는 크래커를 먹고 있었다. 딸기향이 나는 산도 크래커의 가운데 크림만 핥아먹었다. 여자애의 몸에서 달짝지근한 향기가 났다. 산도 크래커의 인공적인 딸기향보다 더욱 뭉클하고 강렬한 냄새였다. 차멀미 때문에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몽롱한 기분이었다. 여자애의 동그란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껍질을 벗겨낸 배처럼 여자애의 무릎은 촉촉하고 향기롭게 빛났고 그 위로는 붉은색 치마가 위태롭게 물결치고 있었다. 내 속에서 뭔가가 자꾸 부추기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슬그머니 그 무릎을 만졌다. 의외로 단단했다. 여자애는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크림을 핥았다. 버스가 오른쪽으로 기우뚱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여자애의 무릎을 물어버렸다. 비명소리가 나고 나를 떼어내려 엄마가 목덜미를 잡아채도 나는 무아지경으로 여자애의 무릎 살을 물어뜯었다. 까슬까슬한 여자애의 치맛단이 내 코를 간질였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치아의 감촉 같은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올 때까지 여자애의 무릎에는 바늘땀 같은 자국이 여리게 남아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이거나 실컷 씹으라고 찰고무공을 내게 던져주었다. 고무공이 방바닥을 치고 튀어 올라 내 볼을 세게 때렸다. 개처럼 씹으라고? 순간 내 속에서 일어난 수치심도 나를 아프게 때렸다. 물론 고무공을 씹느라 금세 잊어버렸다. 아무리 씹어도 상처 하나 남지 않는 고무공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건 꽤나 재미가 있었다.

고무공을 잘근잘근 씹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찰고무공은 이름대로 아주 찰지고 질긴 놈이었다. 아무리 세게 물어뜯어도 흔적하나 남지 않는 탄성으로 고무공은 내게 저항을 했고 나는 그것의 노련함에 지기 싫었다. 고무공과 내 송곳니는 걸핏하면 대결을 벌였다. 이래도 멀쩡해? 이래도 끄떡없어? 자다가도 심심하면 베개 속에 넣어둔 고무공을 꺼내 벽에 대고 치다가 씹기를 반복했다. 나는 고무공으로 나를 단련했다. 불끈거리는 욕망을 달랠 때도 고무공은 늘 함께 했다. 고무공은 단순한 대체품이 아니라 내가 대하는 우주 전체였다. 세상은 나와 타인들이 아닌 나와 고무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있어도 없는 셈이었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재교육자명단공고.해당자는인사과로.’ 드디어 시작이로구나.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몰아쉰다. 6층 사무실에 가서 명단을 확인해야겠다. 보나마나 내 이름이 들어 있겠지. 골칫덩이 ‘드라큘라 이빨’은 블랙리스트 맨 윗줄이다. 너무 몰리면 보란 듯이 사표를 낸 다음 본보기로 한 놈만 패줘야겠다. 독이 오르면 못할 일이 없지. 에스컬레이터는 아이들로 북적인다. 비상계단으로 향한다. 평소대로 계단을 두 칸씩 오르려는데 다리 힘이 풀린다. 오늘 예약했던 교정치료는 야근을 핑계로 미뤘다. 송곳니를 갈아버리는 게 옳은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체념할 것인가, 실행할 것인가. ‘드라큘라 이빨’을 없앤다고 뭐가 달라질까. 무엇 때문에 달라져야 하나. 치과에 갈 생각을 하면 내 몸 전체를 대패로 미는 것이 떠오른다. 밀고, 후려치고, 뽑고, 갈고……. 납작해지다 못해 아예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나.

계단 손잡이를 붙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날이 궂어 하늘이 거무튀튀하다. 아침에 내렸던 비 때문에 도심 전체가 물기에 젖었다. 검은 도로가 윤기 나게 번들거린다. 건물이고 길이고 고무질처럼 탱탱해 보인다. 어디 한군데를 찔러도 흠 하나 생기지 않겠다. 어림없겠다. 나는 유리창을 밑으로 젖혀 얼굴을 내민다. 매연 그득한 습한 바람이 목구멍으로, 잇새로 슬슬 파고든다. 억지로 침을 그러모은다. 창틀을 손으로 부여잡고 힘껏 침을 뱉는다. 퉤!

  

“발치하고 송곳니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죠. 마취부터 합니다.”

“잠깐만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가 머뭇거리자 의사는 입매가 바뀌면 좀더 지적인 얼굴이 된다고 말한다. 입이 들어가면 젊게 보인다고도 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혀끝으로 양쪽 송곳니를 문지른다. 속으로 교정을 미룰 변명거리를 찾는다. 이런 식으로 휩쓸려서 될 일인가. 송곳니를 없애면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되는 건 아닐까.

“혹시 이가 작아지면 씹는 데 지장이 없나요? 그게 걱정이 되네요.”

의사는 사이드 탁자에 커다란 주사와 솜뭉치를 늘어놓으며 느끼하게 웃는다.

“씹는 건 송곳니가 아니라 어금니거든요. 교정하는 동안은 몰라도 이후에는 씹는 기능이 더 좋아질 겁니다. 남자 성기도 그렇잖아요? 크기와 기능은 관계가 없어요. 외려 작은 놈이 더 세요. 작으면 작을수록 청양고추처럼 매워지죠.”

더는 나눌 얘기가 없다는 듯 의사는 제멋대로 등받이를 밑으로 내린다. 나는 드러누우며 한 가지 생각만 한다. 안 봐도 다 알아. 네 건 작구나, 작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성기든 치아든, 뭐든 큰 게 좋다. 내 것은 너무 대단해서 시련을 겪는 거다.

“자, 양쪽으로 주사가 들어가요. 따끔하면서 잠깐 아프거든요.”

두껍고 기다란 주사바늘이 잇몸 깊숙이 파고든다. 꽤나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마치 대나무 죽창이 잇몸을 통해 골속으로 천천히 관통해 오는 것 같다. 순간, 바코드 스티커 붙이다가 벤 손톱 사이가 덩달아 쑤신다. 아픔끼리는 연결된 신경이 있나? 저쪽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니까 이쪽에서도 아차, 나도 아프다는 걸 알려줘야겠다면서 동시에 설치는 것 같다.

“덧니 옆의 치아부터 뽑을 겁니다.”

내 입술은 석고를 부은 듯 굳어진다. 혀가 마비되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금속 소리를 내며 뭔가가 입안에 들어온다. 발치 기구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뺨 안쪽에서 울린다. 곧이어 격렬한 힘이 가해진다. 얼굴 전체가 들썩인다. 버스럭 치아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의사가 어, 하며 놀란다. 뭐가 잘못되었나, 불안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사의 재빠른 손놀림을 느끼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또 한 번 머리통이 반동으로 젖혀진다. 짤깡. 금속성 접시에 뭔가를 던지는 소리가 난다.

발치한 다음에는 양치를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치아 양쪽에 솜을 물고 스테인리스 쟁반에 놓인 피묻은 이와 부서진 조각을 본다. 팔을 뻗어 팝콘처럼 생긴 칼슘 덩어리를 만져본다. 부서진 치아 부스러기는 힘을 주지 않아도 결대로 잘게 쪼개어진다. 형편없군. 어금니의 힘은 50Kg의 무게를 감당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외톨이로 따로 떨어진 어금니는 무력하다. 조직에서 잘려 나온 조각이란 이렇다. 의사는 내 얼굴에 천을 덮어씌우고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송곳니가 워낙 건강해서 한참 갈아야겠어요.”

입속으로 기계가 들어오고 드릴 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거린다. 마른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난다. 살점을 지지는 건가? 의사는 거침없이 손을 움직인다. 얼굴이 뒤로 밀렸다가 앞으로 당겨지며 정신없이 휘둘려진다. 왼쪽으로 고개를 비틀어주세요. 아주 잘하시는군요. 칭찬은 정겹지만 손작업은 거칠기 짝이 없다. 의사는 내 머리통을 마구 흔들며 우악스럽게 다룬다. 나는 그의 방식과 소음에 점점 익숙해진다. 몸이 나른하다. 내리 쬐이는 조명이 햇살처럼 따스하다.

어릴 때 우리 집에 드나들던 ‘야매’ 의사는 대청마루의 햇살 아래 나를 누이고 충치를 갈아냈다. 내 머리는 아저씨의 허벅지 위에 놓여 아저씨가 다리를 흔들며 발 저리니까 이쪽으로 바꾸자고 하면 나는 느릿느릿 몸을 뒤집었다. 아팠던 기억은 전혀 없었다. 아저씨의 허벅지를 괴고 누워 마당을 내다보면 엄마는 한가롭게 무청을 다듬고 있으니까 내 입속에서 벌어지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었다. 

“아앗!”

소리는 내가 지른 게 아니다. 의사의 낮은 외침에 눈을 떴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기계 소리는 멈추었다. 그의 가쁜 호흡이 불안하기만 하다.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며 내 입안으로 뭔가가 쑤셔 박혀진다. 비릿한 물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그의 침묵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입안에 물려진 것이 점점 무거워진다. 다시 새것으로 갈아 넣는 손을 붙잡고 흔들어본다. 왜 그러느냐는 수신호를 보내자 소곤거리는 그의 음성이 들린다.

“주사실로 가시지요. 실수로…… 혀를 조금, 아주 조금 건드렸어요.”    

내 얼굴에서 천을 벗겨낸 간호사는 얼굴을 닦아준다. 의사는 피묻은 거즈와 솜뭉치를 재빠르게 휴지통에 은닉한다. 의자를 세워 앉자 핑그르르 어지럽다. 의사는 무어라 계속해서 변명을 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만 또렷하다. 나는 두툼한 거즈로 입을 막고 간호사를 따라간다. 줄줄이 늘어선 치료실은 오늘도 만석이다. 다른 의사들은 환자의 입안을 파헤치느라 내게는 관심도 없다.       

나는 주사실에 누워 간단한 처치를 받는다. 선홍빛 거즈를 떼어내자 뜨듯한 국물이 금세 입안에 흥건해진다. 지혈제, 파상풍 주사, 깨끗한 거즈 등이 내 앞에서 바쁘게 오고 간다. 이번에는 혀야? 원장님한테 저 선생 또 깨지겠군. 간호사들의 대화가 주사실 커튼 뒤에서 들린다. 무감각한 혀를 간신히 움직이자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진다. 커튼 안으로 들어온 의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내 옆에 앉는다. 그의 얼빠진 표정이 내게 우월감을 심어준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고를 친 거냐?

“오늘밤 열이 많이 나면 이 병원에 연락부터 하시고 꼭 치료를 받으세요.”

나는 콧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며 그가 준 종이를 받는다. 긴급할 때 연락할 여러 종류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자잘한 숫자들이 처음 보는 기호처럼 낯설다. 이 숫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끝이야? 한바탕 퍼붓고 싶지만 말을 할 수 없다. 쇠뭉치를 입에 물고 있는 것 같다. 의사의 어눌한 변명을 귓등으로 넘기며 나는 갈아낸 송곳니를 슬며시 만진다. 사포처럼 표면이 거칠다. 많이 얇아졌다. 작아지고 뾰족해지고. 이놈은 진짜 송곳이 되었다.

  

“생고기 이인 분 줘요.”

메뉴판을 덮어 아줌마에게 건네준다. 후배 녀석은 저녁 약속이 있다며 사이다만 한 병 시킨다. 주방에서 고기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도끼로 뼈를 부서뜨리는 건가. 퍽, 퍽 둔탁한 소음이 내 시선을 주방으로 끌고 간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간하고 천엽도 방금 들어와서 싱싱한데요.”

“그건 별론데. 이인 분이 작나? 흐벅진 거 말고 단단한 거 있죠? 씹는 맛 나는 질긴 걸로 삼인 분 줘요.”

“우리 집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는데요, 그럼 심줄 있는 걸로 드려볼까.”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다. 녀석은 바로 전에 점심 먹고 뭘 그리 많이 시켰냐고 참견을 한다. 그러면서 아줌마가 내준 삶은 메추리알을 부지런히 까먹는다. 후배 녀석과 나는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우리는 조금 지쳤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를 덮으려고 텔레비전 볼륨을 올린다. 아프리카 풍경은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늘 익숙하다. 〈동물의 왕국〉은 적자생존의 교과서. 늑대에게 쫓기던 영양이 이번에는 사자에게 몰린다. 결과는 뻔하지. 나는 잔인한 영상을 미리 떠올리며 오늘 교육 시간에 나눠준 책자를 꺼낸다. 영어로 된 문장이 너무 많아 읽을 수가 없다.

“되지도 않는 교육 믿지 마. 제 풀에 지쳐 포기하라고 빡세게 구는 거라고. 판매직이 전자상거래를 뭐 하러 공부하냐?”

“그래도 절반은 남겨두지 않을까. 반타작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절반보다 더 구제해준다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반도 안 남길 걸? 아까 봤지? 강의실이 어제보다 비었더라. 인터넷 쇼핑몰은 최소 인원으로도 잘 돌아가잖아. 눈치 빠른 놈들은 벌써 치고 나갔어. 나도 처음엔 컴퓨터 학원을 다닐까 했는데, 그게 아냐. 선수들은 벌써 다 뽑아놨대.”

불안한 음악이 고조된다. 사자는 소리도 없이 단숨에 날아 영양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이어서 갈빗대를 물고 몸 전체로 덮치기. 영양의 거센 저항과 버둥거림을 보고 있자니 내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여기저기 부탁해보자고. 까짓 거 우리도 경력잔데 일자리 못 구하겠어? 내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브아이피 고객이 여기 다 들었거든. 이게 내 재산이야.”

검정색 다이어리를 내보이며 큰소리를 치는 녀석을 물끄러미 본다. 녀석의 조그마한 이에 메추리알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붙었다. 강의시간 내내 졸더니 지금은 내 앞에서 선생 노릇을 한다. 손님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 개인적으로 만든 자신의 명함을 이용해 손님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 인연을 지속해 판매로 연결시키는 기술. 아무렴, 잘하고 있다. 나는 성의껏 고개를 끄덕이며 텔레비전을 다시 본다. 사자는 파헤친 내장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아프리카의 영양은 이제 시뻘건 고깃덩이가 되었다. 저렇게 간단히 요절을 내면 얼마나 좋아. 사람은 너무 복잡하게 산다. 한 끼 밥 때문에 못할 짓 많이 하지. 아줌마가 상 위에 음식을 차린다. 허연 지방과 선홍빛이 물결무늬로 교차된 살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며칠 전부터 내내 먹고 싶었던 생고기다.

기름장에 찍은 고기를 입에 물자 눈물이 날 것처럼 행복하다. 단번에 씹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 뒤로 숨어 있던 비린내가 슬며시 배어나온다. 고기를 찢고 잘게 다지는 것은 어금니지만 살점을 날카롭게 찍는 건 송곳니만이 할 수 있다. 송곳니의 역할은 처녀지 정복. 이놈은 살점 깊숙이 들어간다. 이제는 더 날카롭고 뾰족한 놈이 되었다. 송곳은 심줄을 끊고 조직을 가른다. 꼭꼭 씹는다. 단단한 살이 이내 으깨어진다.

“이 뺐다더니 잘만 먹네. 하긴 주머니가 비면 고기부터 당기더라.”

“너도 먹어.”

“난 생살은 싫어. 회도 안 먹는다.”

녀석은 명함을 펼쳐놓고 휴대전화에 번호를 입력해가며 줄곧 전화질이다. 안녕하세요? 아, 별고 없으시죠? 형님, 접니다…… 나는 제일 큰 고깃덩어리를 골라 집는다. 입아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살점을 씹고 또 씹는다. 씹는 힘은 그 자체로 맛이 된다. 육즙이 입안 가득 고인다. 지방의 단맛이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온다. 고무공으로 단련된 내 ‘이빨’들이 제 능력을 발휘한다. 생고기와 고무공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고기는 씹어서 먹는다는 점. 내 속으로 들어와 내가 된다는 점. 그런데 이 뽑은 빈자리에 자꾸만 고깃덩이가 낀다.

이제 내 치아는 전부 합해 서른 개가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좌우 대칭이 무너진 치열부터 눈에 들어온다. 발치해버린 양쪽도 허전하고 언밸런스하게 한쪽만 삐죽한 송곳니가 어색했다. 내 꼴은 우스워졌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양쪽 균형을 맞춰야죠. 송곳니를 복원시킬 방법은 없나요? 내가 통사정을 하자 의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발치한 부분 때문에 치아 전체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 남은 작업을 빨리 마무리 짓자고 했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느냐고 묻자 의사는 원래보다 나아지는 방법만 있다고 했다. 나머지를 갈자며 나를 치료실로 이끌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치과를 빠져나왔다. 차라리 이대로가 낫다. 혀를 다치는 바람에 하나라도 남긴 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하나 남은 고깃점을 두고 망설이는데 후배 녀석이 신이 나서 떠든다.

“여기저기 찔러 놨으니 곧 연락 올 거야. 형도 같이 뛰자고. 개인 명함도 찍고 경력 증명서도 만들어둬. 더 좋은 직장 잡아야지.”

나는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미안하다, 나 혼자 다 먹었다. 녀석은 두툼한 명함철을 주며 구직 부탁 전화를 나눠서 하자고 말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하나라도 걸리면 우리는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맨땅에 헤딩하기 전법. 내키지 않아도 일단 그것을 받아 넣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간판에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후배는 약속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러 가고 나는 어슬렁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퇴근 시간이라 도시를 빠져나가는 버스는 벌써부터 미어터진다.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골목은 쓰레기범벅에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 바닥에 물기가 흥건하다. 빈 캔과 종이컵이 마구 버려진 쓰레기더미에 명함철을 던져버린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갈피에서 빠져 나온 명함이 우수수 쏟아진다. 반듯하게 인쇄된 자잘한 이름과 숫자가 땅바닥에 함부로 흩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발로 밀어 쓰레기 사이에 숨긴다. 내가 모르는 김기철 과장과 송영근 부장, 보험설계사 이만희 등등이 누렇게 젖는다.

내 명함도 지갑에서 꺼내 바닥에 부어버린다. 쓸데없는 걸 많이도 넣고 다녔다. 우수수 쏟아지는 영업 1과 김진호, 팔랑팔랑 떨어지는 김진호. 내 것도 누렇게 젖는다. 사람은 죽어 이름으로 남는다고? 아니다. 남길 만한 업적이 없는 사람은 짐승처럼 이빨로 남는다. 내가 죽은 다음, 살은 썩어 흙이 되고 앙상한 뼈다귀가 오롯이 남을 때 내 송곳니만은 뚜렷하고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누군지 알려주는 건 송곳니다. 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포효하는 사자를 기억한다. 초원, 햇빛, 커다란 이빨, 생생한 피비린내…… 이왕이면 사자가 되고 싶다. 사자는 두려움 때문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이빨을 사용한다. 그래야 한다. 포획하고 물어뜯고 목구멍으로 넘기고. 고무공 같은 이 세상을 잘근잘근 씹어줘야지.

다시 큰길로 나와 정류장으로 향한다. 생니를 뽑은 자리에 혀를 밀어 넣는다. 텅 비었다. 좁은 잇새를 따라 걷던 나도 이제 없다. 외로움에 웅크리고 앉았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다. 찬란한 것을 좇아 먼 길을 떠났을 것이다. 날카로운 송곳니 밑에 혀를 넣고 힘껏 문다. 정신이 번쩍 든다. 발도 아프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았다. 사람들은 천천히 걷는 나를 제치고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마주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오래된 증명사진처럼 무표정하다. 입안에 든 흉기를 숨기느라 입을 꼭 다물고 다들 바쁜 척 오고간다. 나도 입을 굳게 다물고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문장 웹진/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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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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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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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좋은 글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작가님의 노래실력은 대단해요. ^^

    • 2010-09-06 12:56:1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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