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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발가락

  • 작성일 2007-06-29
  • 조회수 3,754

 

거룩한 발가락



노경실



1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 길 건너편에는 백 미터 정도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편의점들이 줄지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건너편 동네는 세 블록이 모두 오피스텔 단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도 사고 시원한 캔맥주라도 들이키려고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섰다. 새벽 세시가 다 돼가지만 팔월 초순의 열대야는 악마의 발톱처럼 나의 목덜미를 바락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자정쯤에는 거의 가위눌림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몇 번 욕실을 들락거린 다음, 새벽 한 시가 넘어서 겨우 잠이 들었는데 결국은 두 시간도 못 돼서 기분 나쁘게 더운 끈적거림에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지난 밤 늦도록 술을 마신 탓도 있다.


나는 느릿느릿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내가 십대 아이들처럼 게임을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려고 늘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다. 미국에 있는 마누라와 딸 때문이다. 어쩌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전화를 받지 못하면 마누라의 잔소리는 걱정과 야단치는 수준을 넘어 경고와 악담으로 이어진다. ‘돈도 쥐꼬리만 하게 보내면서 맘대로 해! 그렇게만 해! 나랑 미미는 죽어도 한국에 안 들어가! 홀애비로 살든 재혼을 하든 맘대로 해 봐!’

휴대폰을 열었다. 순간, 아찔했다. 어둠 속에서 적의 공격처럼 나의 두 눈을 향해 쏟아지는 작고 네모난 파란 불빛은 밝고 환한 게 아니라 단지 강력한 전자파, 아이들 말대로 공격용 파워 레인저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껌뻑거린 다음, 적의 재공격을 두려워하며 아주 조심스레 옆 눈길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새벽 세시 일분.

그러나 편의점 앞의 하얀 플라스틱 탁자는 이미 또 다른 피서지였다. 나처럼 반바지 밑으로 울퉁불퉁 두 다리를 내놓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인들과 하드를 쪽쪽 빨아먹으며 데리고 나온 강아지와 소리를 지르며 뛰노는 어린 아이들도 플라스틱 탁자의 주인들이었다. 세상이 좋아져서인지 거의 반라의 이십대 여자들끼리 담배를 피며 술을 마시는 모습도 내 눈에 거북함 없이 들어왔다. 더위는 추위와 달리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더우니까 자꾸 벗고, 자꾸 벗다보니, 마음도 풀어지고, 마음이 풀어지다 보니 그리 따지고 가릴 일도 줄어들 것이다. 단, 습도만 조절된다면 말이다.

나는 걸었다. 잘 하면 탁자 한 자리를 찾을 수 있겠지…… 찾았다. 그러나 온전한 내 자리는 아니었다. 내 또래의 사내 셋이서 맥주와 베트남에서 수입해 온 게 틀림없을 쥐치포를 풀어놓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의자는 넷인데 사람은 셋. 당연히 빈 의자는 임자가 없는 것이다. 나는 점잖게 실례를 구한 다음, 가게에서 들고 나온 맥주와 천 원짜리 미니 마른안주, 그리고 담배를 내려놓았다.

딱, 따악! 치르르르…… 경쾌한 소리다. 캬약, 단숨에 거의 반 이상을 마시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며 사뭇 여유로운 눈길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친절한 편의점 주인이 유리창에 바짝 붙여서 설치한 액정 텔레비전 모니터에 눈길을 멈췄다. 케이블 방송 뉴스였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일부러 들어야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나처럼 딱히 누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없는 자들의 귀는 당연히 보통 때보다 서너 배는 성능이 좋아지는 법. 게다가 요즈음은 웬만한 대사나 상황은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자막처리가 되지 않는가.

―오늘 경북 합천의 낮 최고 기온이 삼십칠 도까지 올랐고, 서울도 삼십이 도를 넘는 등 전국적으로 폭염이 이어졌습니다. 말 그대로 수은주가 날마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일 계속되는 가마솥더위에 시민들은 해수욕장 등을 찾았는데요, 어제 오후만 해도 서울 한강 야외 수영장에는 그야말로 물 반 사람 반이었습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이 같은 가마솥더위에 시민들은 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럼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미영. 주부. 38세. 서울 광천구) 집에 있으면 땀만 흐르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수영을 해서 더위를 식히려고 나왔어요. 애들도 데리고 왔는데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 집에 가자고 하는데도 싫다고 하네요. 어쨌든 경제적인 피서 같아요.

―(김철준. 8세.) 너무 너무 시원해요. 맨날, 맨날 왔으면 좋겠어요. 집에 있으면 더워서 죽을 거 같아요.

―(한분순. 82세. 월계동) 아이고, 노인정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 쐬다가 보면 머리도 아프고, 다리도 쑤셔서 차라리 한강에 왔지. 늙어도 더위 타는 건 마찬가진 거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마다 짜증스러워하는 때는 사람들의 ‘같아요’ 남발이다. 물론, 주차 시비로 옆집 사람을 살해하고, 신도시 예정지 부동산 가격이 요동치고, 정치인이 사채업자보다 더 질이 안 좋은 것은 우아하게 구린내를 풍기기 때문이고, 북한에 쌀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 오늘도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몇 명이 숨지고…… 하는 반복되는 뉴스도 지겹다. 그러나 나 같은 소시민에다가 신경 예민한 사람을 심하게 자극하는 것은 바로 저 놈의 ‘같아요’이다.

사람들은 모든 조건의 구별 없이 제 스스로 확신한다, 믿는다, 백프로다, 진짜다, 틀림없다, 사실이다, 정말이다, 나를 믿어라, 맹세할 수도 있다, 진실이다, 분명하다,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단언한다, 그리고,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똑똑히 보고 두 손으로 직접 만졌다 하면서도 결국은 ‘같아요’ 라는 후렴구를 빠뜨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 민족의 타고난 기질 탓으로 자기 확신에 대한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또는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을 때, ‘아님 말고!’ 라고 말할 출구 하나를 준비하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술?

나는 다시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 구조대원들이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내는 장면이었다. 비록 화면처리는 되었지만 가족들의 울부짖는 장면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은 구조된 자가 아닌 익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제 오후 들어 서울을 벗어나 주요 해수욕장이나 유원지로 가는 차량들이 크게 늘어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일부 구간이 지체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에 따른 물놀이 인명사고가 잇따르는 등 시민들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이번 이틀 사이에 물놀이로 숨진 사람이 다섯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더운 날씨에 대한 뉴스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철도의 레일 온도가 높아져 고속철도가 감속 운행하고, 각 자치단체마다 폭염에 취약한 홀로 사는 노인과 고령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폭염대피소’를 운영하기로 했고, 합천군은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한 곳이 합천이라는 기상청 조사를 믿을 수 없다며 자체 기온 측정에 나섰는데 그 이유는 찜통도시라는 오명이 더해지면 여름철 관광객 유치에 악재로 작용할 것을 우려해서이고, 한국도로공사는 다음 주는 휴가 절정이라 수도권에서만 모두 백만 대의 차량이 빠져나갈 것이고, 해외 출국자 수도 사상 최고치를 나타냈다고…….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더위는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지만, 한편 모든 이들을 무차별 마비시킨다. 마비는 때로 환각상태이기도 하다. 나는 편의점을 새벽 내내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다. 환각상태에 빠진 이들이다. 집단 몽유병자들이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빈 맥주 깡통은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리고, 뜯지도 않은 미니 안주와 담배는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왼쪽 발가락 다섯 개가 죄다 몸부림을 쳤다.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왼쪽 발가락만 무좀에 걸려 있다. 마누라가 미국으로 간 뒤부터 내가 왼손으로 그 짓을 자주 해서인가 하고 자가진단도 해보았지만, 그 짓거리의 횟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발가락의 근질근질함은 더 해가니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샤워도 샤워지만 왼쪽 발가락을 마음껏 긁고 싶어 나는 슬리퍼 소리를 요란히 내며 잰걸음을 했다. 



2


아침이지만 이제 나는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오늘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강남에 있는 케이유 파이낸스라는 회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석 달만 미친 듯이 여기를 들락거리면 대개는 연봉 일억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들었다. 한 동료는 케이유가 악명 높은 다단계니, 피라미드니 하며 뒷걸음질쳤지만 지금 나는 피라미드건, 히말라야건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마누라 배 위에 올라가 본 기억이 이제는 전설처럼 되었다.

강남역 근처에서 비싼 빌딩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삼십칠 층의 대륙빌딩에 케이유 파이낸스가 있다. 케이유는 회사 규모가 제법 커서 삼십삼, 사, 오층을 통째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는 지난달에 결혼한 서른여섯의 박진국과 나와 동갑내기인 인사팀의 강 부장과 함께 대륙빌딩 지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정 부장님, 아무래도 수상해요.”

“뭐가? 아줌마, 여기 담배 돼요?”

나는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이 건물 전체가 금연이에요.”

박진국의 대답은 아줌마의 말보다 한 발 늦었다.

“피라미드 회사들은 모두 건물 꼭대기에 사무실을 차린대요. 도망가기 어렵게요. 그런데 여기도 그렇잖아요. 삼십삼, 삼십사, 삼십오! 엘리베이터를 타도 일층까지 내려오는 데 몇 분은 걸리겠죠. 그리고 계단으로 내려간다면 내려가다가 지칠 테구요.”

“이런! 아님 말고지, 별걸 다 걱정하네. 어쨌든 우리 셋 다 집에는 아직 말 못했는데 아침마다 나와서 갈 곳은 있어야 하잖아. 그런 의미에서라도 일단 나와는 보자구.”

강 부장의 말에 박진국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겨우 신혼 일 개월이잖은가.

“그런데 자네 혼인신고는 했어?”

내 물음에 박진국은 갑자기 굳어진 얼굴을 흔들었다.

“요즘 여자들은 동거를 하거나, 결혼해도 적어도 일 년은 살아보고서 애도 낳고, 혼인신고도 한대요.”

“뭐, 일 년? 이거 미치겠군. 막가는 세상이야. 이봐, 진국 씨. 여하튼 혼인신고 하기 전까지는 회사 문 닫은 거 비밀로 하고, 어디서 딸라 빚이라도 얻어서 달마다 꼬박꼬박 마누라한테 월급을 갖다 줘야 해. 아무리 죽자살자 연애해서 하는 결혼이라고 해도 남편이 실업자가 되면 가차없이 떠나는 게 요즘 여자들이니까. 사십이 다 된 우리 마누라도 모를 일이야. 나도 무서워서 말하지 못하는데, 자넨 겨우 신혼 한 달이니……”

나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며 박진국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이미 이혼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정 부장. 그만 해. 방금 밥 먹었는데 체하겠어. 일단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라가자고. 강연 시작하려면 이십분 정도는 여유 있으니까.”

우리 셋은 대륙빌딩 밖으로 나와 빌딩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웠다.

“정 부장네 딸은 미국에서 언제까지 공부해야 해?”

심하지는 않지만 자폐아 판정을 받은 막내아들 때문에 아예 두 아이를 모두 대안학교에 입학시키고, 집까지 경기도로 옮긴 강 부장이 물었다. 대안학교라 해서 학비가 저렴하지도 않아 강 부장 역시 늘 돈으로 시달리는 사람이다.

“이제 겨우 일 년 했는데 뭘…… 언제나 끝날지……”

“부장님. 우리 와이프도 애 낳으면 조기 유학시킨다고 하는데 걱정이네요.”

박진국은 담배 한 개비도 아껴 피우는 듯 담배를 빠는 입술이 여간 느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술 모양이나 거기서 흘러나오는 말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억지로 웃었다.

“이봐, 진국 씨. 지금 조기유학이 문제야? 잘 못하면 조기이혼 당하게 생겼는데. 자, 올라가자구.”

나는 앞장서며 손목시계를 봤다. 아직 육분 전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한산했다.

“이상하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했는데…… 이 시간에 이렇게……”

“우리가 잘못 온 거 아냐?”

“설마! 총무과 이 과장이 어제 다녀왔는데 자리가 없어서 두 시간 내내 서서 듣느라고 죽는 줄 알았대잖아.”

“그건 어제고……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이 왜 이리 텅텅 비었어? 저 퀵서비스맨 빼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우리뿐이잖아.”

그제야 강 부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진국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일층, 오층, 십층……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초조와 불안지수가 증가하는 듯 그의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그나마 퀵서비스맨이 이십 층에서 내리자, 마치 우리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유형의 땅으로 끌려가는 자들처럼 침통한 얼굴로 말도 나누지 않았다.

버려진 자, 혹은 다른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 자, 또는 자살 외에는 모든 가능성을 박탈당한 자. 그들이 우리 아닌가? 이십 층에서 내린 퀵서비스맨은 행운아다. 박진국은 그래도 젊다. 하지만 나와 강 부장은 마흔에 실직했고, 받을 유산도 없고, 저축은커녕 사 놓은 주식도 없다. 자동차는 그럭저럭 할부를 끝냈지만 아파트는 아직도 융자 상태이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마흔이다. 대한민국에서 마흔의 사내라는 것은 베트남이나 러시아로 수출되는 중고 버스나 분실 휴대폰만도 못한 존재이다.

―띵똥! 삼십오 층입니다.

낯모르는 여자의 경쾌한 음성이 나오자, 문이 열렸다. 그러자, 단정하지만 주먹 냄새가 물신 풍기는 양복 차림의 젊은 두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케이유 파이낸스입니다!”   

두 남자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안도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아직 안 늦었죠?”

박진국은 직장 동료를 만난 듯 두 남자를 향해 벙긋 웃음을 퍼부으며 물었다.

“이제 곧 시작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저희는 정시에 시작합니다.”

두 남자는 우리에게 회사 선전 팸플릿을 나눠주었다. 화려한 올칼라 인쇄의 팸플릿은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책받침처럼 두껍고 번들번들한 종이 덕에 마치 한 권의 책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일 미터 팔십은 껑충 넘는 키에다가 벗지 않아도 잘 발달된 근육이 저절로 보이는 듯한 단단한 몸의 두 남자의 예의바른 언행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느긋하면서도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두 남자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뭐야?”

강 부장이 갑작스레 멈춰서는 바람에 내 왼쪽 구두 앞코가 그의 구두 뒷굽에 찍히듯 밟혔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나 역시 강 부장처럼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박진국은 황홀한 듯한 표정이었다.

백 평이 넘는 듯한 사무실, 아니 강당 안의 모든 자리는 꽉 차 있고, 그 외의 공간은 서 있는 사람들로 빽빽해서 마치 품질 좋은 인공잔디밭처럼 보였다.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겨우 서서 강연을 기다려야 했다.

“정 부장님, 굉장한데요? 그런데 여기 온 사람들이 모두 실업자인가요?”

“시꺼! 그랬다가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취직 혁명이 일어나지. 내가 알기로는 반은 실업자고, 반은 직장은 있지만 명예퇴직 없는 안전빵 인생을 위해 새 길을 찾으려고 온 사람들이야. 그러고 보면 국회의원들이 여길 한 번씩 견학해야 하는데. 그래야 지들 직장인 국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거야. 허긴 그런 작자들은 직장 없어도 평생 골프치고 살면서 편하게 살겠지.”

“정 부장님은 정말 날카로우세요. 정 부장님 같으신 분이 서울대만 나왔어도 삼성 같은 데서 벌써 이사 자리 하나 맡으셨을 거예요.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를 나와야 된다니까요. 대통령 될 게 아니라면요, 힛힛힛……”

박진국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둥 마는 둥 했다. 예상 밖의 풍경에 놀라기도 했지만 조금 전에 강 부장이 눌러버린 왼발의 다섯 발가락이 슬근슬근 간지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큰일이다. 이놈들이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참을 수 없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피가 나도록 긁어주든지, 연고를 발라주며 살살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내가 점잖은 얼굴로 말없이 구두 속의 다섯 발가락을 열심히 움직거리며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귀가 먹먹할 정도로 박수가 터졌다. 

강연자가 나왔다. 나보다는 대여섯 살은 어린 듯한 그 역시 깔끔한 차림이었다. 이미 확보한 정보이지만 강남역 김 부장으로 통하는 김 부장은 케이유 안에서 가장 유능한 성공 사례자이다. 그래서 그는 강연만으로도 억대 연봉을 받으며, 경제전문 케이블 방송의 인기 강사이기도 하다. 그는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날씨가 더운데 와줘서 고맙다, 휴가는 잘들 다녀왔냐, 요즈음 경기가 안 좋아 살기 힘들지 않느냐, 오늘 아침 신문은 읽었냐……  따위의 인사말은 없었다. 그의 강연은 곧바로 우리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가뜩이나 실직으로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우리 셋의 심장은 비명도 없이 항복한 채 그의 혀의 칼질에 통째로 자신을 맡겨버렸다. 그러나, 나의 다섯 발가락만은 아예 구두를 뚫고 나올 것처럼 힘차게 요동쳤다. 그러고 보면 내 몸뚱이에서 시도 때도 없이 가장 기운차게 발기하는 것은 바로 이 놈들인 셈이다. 



3


―샤또 라꼬망드리, 루삭 쌩떼밀리옹, 샤또떼르데그랑메독, 케서린 쥴리앙 메독, 샤또 메독, 보르도 레드, 보르도 화이트, 피두코크릭 리져브, 샤또슈페리어보르도, 벨빈야 빈야드, 샤또존게이흐, 벨아시스꼬리오, 돔브리얼르뱅디쉬, 샤또레오드뽕떼, 샤또보세주루베꼬, 끌로로 라꾸달, 샤또피숀 롱귀빌 꼼떼세, 샤또 무똥로췰드, 샤또 오메독…… 이게 뭔지 압니까?

난데없이 불어 단어를 줄줄 말하는 그의 혀는 뱀이나 개구리의 혀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단 한 번도 꼬이지 않았다. 청중들은 이미 기가 죽었다.

―자, 여러분. 대략, 대충, 대강! 말 그대로 프랑스 와인이 대강 이 정도입니다. 즉, 프랑스 와인의 일부분밖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호주, 캐나다, 미국, 이태리, 스페인, 칠레, 독일, 아르헨티나, 남아공, 포르투갈 것까지 다 말하자면 끝이 없죠. 아하! 우리나라 것도 있죠. 이왕 와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죠. 디오니소스는 포도주를 창조한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디오니소스가 길을 가다 나뭇가지 하나를 줍게 됩니다. 그는 이 나뭇가지를 새의 뼈 속에 한 번, 그리고 사자의 뼈 속에 한 번, 마지막으로 당나귀 뼈 속에 넣었다 뺍니다. 이 나뭇가지가 나중에 그리스의 낙소스 섬에 심어져 최초의 포도나무로 자라나게 되고, 이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로 최초의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면 처음엔 새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다음엔 사자처럼 난폭하게 변했다가 마지막으로 당나귀처럼 우매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내가 말한 와인 중 몇 개나 마셔 보았나요? 솔직히 말해 그저 죽으나 사나 쏘주, 쏘주 인생 아닙니까? 중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그 무식한 쏘주가 이제는 지겹지 않습니까? 한 여자와 평생을 사는 것도 지겨울 텐데 왜 쏘주까지 갈아치우지 못하는 거지요?

순간, 여기저기서 가벼운 박수와 웃음소리가 흘렀다.

―즉, 여러분의 신분은 언제나 천민 수준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거나, 또는 그런 줄 알아도 아무 대책 없이 중년을 지나고 노년을 맞는다는 겁니다. 믿는 거라곤 보험 몇 개 들어놓은 거겠죠. 하지만 그 보험, 여러분이 저승 갈 때나 나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저승 노잣돈으로도 못 써보는 허망한 것이지요.

김 부장의 말에 박수와 웃음소리는 단번에 사라졌다. 마치 수치심에 황급히 몸을 감추거나 아무 데고 얼굴을 파묻는 듯했다. 대신 김 부장의 얼굴에 슬쩍 웃음기가 서렸으나, 그 역시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듯 재빨리 다음 말로 닦아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자가 되라! 아랫목이 따뜻해지면 윗목도 따뜻해지는 법이니까!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서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여러분, 이것은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의 변신을 주도한 중국 덩샤오핑의 선부론입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 경세가의 삶과 사상은 관 뚜껑을 닫은 후에 평가된다는 말처럼 그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그 누가 덩샤오핑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장쯔민을 오너라고 평가한다면, 덩샤오핑은 씨이오라고 합니다. 중국은 천구백칠십팔 년부터 시작된 개혁과 개방 이후 서서히 이념보다는 지식과 기술을 강조했죠. 그렇다면 그 지식이니 기술이니 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쉽게 말해 돈 버는 지식이자 기술입니다!

김 부장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마자 서너 사람의 힘찬 박수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동서남북의 네 진영에서 골고루 들려왔다. 그러자 그 네 진영 전체가 박수소리로 진동했다. 나도 박수를 쳤다. 맞는 말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게 무어던가. 요순시대가 달리 태평성대였던가? 집집의 굴뚝에서 날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면 그게 요순시대 아니었던가. 이십일 세기라 하여 뭐가 다른가.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준다면 그가 네눈박이 괴물이건, 애초에 양심을 악마에게 저당 잡힌 자이건, 이중, 팔중, 십중 국적 소유자이건, 카츄사 출신이건 군 면제자이건 개의치 않는다. 대중은 이토록 순진하고, 아량이 넓으며, 처절하다. 

―훗날, 후진타오가 균부론을 말하면서 ‘세 개에 가까이’ 가자고 했지요. 그 ‘세 개의 가까이’는 실제와 가까이, 군중과 가까이, 생활과 가까이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한발 늦은, 아니 돈에 미친 십이억 중국인들에게는 헛소리로만 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중국 부의 칠십 프로를 십이억 인구 중 단 영점 삼 프로의 부자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 영점 삼 프로의 부자들은 그야말로 아무리 아무리 먹어도, 아니,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가 심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걸 유식한 말로 에리직톤이라고 하지요. 에리직톤을 모르면 여러분 자녀들이 즐겨보는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를 보면 나옵니다. 공부 좀 하십쇼. 그러니 마누라는 물론 애들까지 무시하지 않습니까!

김 부장은 또 탁자를 내리쳤다. 또, 동서남북에서 박수가 터지고, 곧이어 모두들 따라서 손뼉을 부딪쳤다. 나도 가만 있지 않았다.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에리직톤이 뭐지? 미미가 어느 날부터 졸라대길래 한 권, 한 권씩 사주긴 했지만 속으로는, 나 어렸을 때에는 공부 못 하는 애들이 보던 게 만화책이었어, 하면서 만화책과 딸아이를 싸늘한 눈초리로 흘겨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따가 집에 가면 당장 그 만화책을 꺼내 봐야지. 재빠르게 주위를 훑어보니 나처럼 단단한 결심을 하는 아비들이 꽤 여럿 보였다.

―여러분, 덩샤오핑은 이런 극심한 양극화는 혁명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지만 이제 농민혁명이나, 노동자혁명 같은 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부자들이 앞서가고 나머지는 따라간다, 라는 말처럼 십이억 중국인의 혁명이란 돈을 향해 애걸의 하소연을 하며 울부짖으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하메른의 배고픈 어린아이들의 무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피리 부는 부자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혁명이라면 혁명일 것입니다. 돈맛과 돈의 위력을 아는 현대의 농민과 노동자, 서민들은 혁명 대신, 자포자기하거나 부자들에게 순종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은 이미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돈! 돈! 돈! 그 돈이 있으니까 목욕 자주하면 복 달아난다고 하던 중국인들이 이제는 세계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부자박람회까지 열었습니다. 하아,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니까 교양인 행세라도 하려고 미술전시회 관람 차 아침부터 몸단장하는 마누라가 야속하면서도 할 수 없이 김 기사 노릇 하는 게 여러분 아닙니까?

김 부장은 탁자를 내리치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연신 우리들을 ‘여러분’이라 부르면서 싸잡아 비야냥거리는 듯하여 속이 울렁거렸다. 쨔샤, 왜 너는 너고, 왜 우리는 비참한 여러분이냐고? 하지만 나는 김 부장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얼른 그에게 집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섯 발가락의 가려움증에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하루에 일억을 벌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다고 말하는 어느 중국 부자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부자의 경지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부자는 루이뷔똥이나 구찌 물건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루이뷔똥과 구찌와 샤넬을, 심지어는 영국과 프랑스와 이태리를 통째로 사들이려고 합니다! 우리가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더러운 민족이라고 깔보던 중국인들이 이러한데,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죄송하지만 솔직하게 말할까요? 단 몇 백만 원의 카드빚이나 사채 일 이백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며 고통에 떨다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 눈에 다 보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적어도 십 프로는 오늘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한강 다리이건, 지하철이건, 냄새나는 여관방이건 혼자 외롭게 생을 마감했을 인생이 보입니다. 아…… 참으로 암담한 현실입니다. 교회요? 교회 문 나오는 길로 지하철에 몸 던진 사람은 있었어도, 여기 왔다가 비참하게 저승 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도! 마누라랑 어린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먼저 간다라는 유서 한 장 외에는 남겨 줄 재산 하나도 없이 내일 죽으려고 했던 가장들이 이곳을 통해 새 삶을 얻고 새 출발하는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바로 여기가 진정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매주 금요일 밤마다 성공사례 발표 시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금요일 밤마다 철야기도를 하며 하나님한테 부자 되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얼굴이 퉁퉁 붓도록 통성기도를 한다지만, 희뿌연 새벽에 교회를 나서는 그들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입니다. 무엇 하나 약속된 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금요일 밤은 다릅니다. 우리의 금요일은 갱생의 밤입니다. 성공의 밤입니다. 돈을 내 하인으로 삼는 밤입니다. 단언하건대 돈은 죄가 없습니다. 죄인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김 부장은 이제껏 탁자를 내리쳤던 것보다 더욱 거칠고 당당하게 주먹을 꽂았다. 게다가 목소리도 더 크고, 더 날카로웠다. 김 부장은 물 한 잔 마시지 않고도 막힘없이 꾸역꾸역 말을 토해냈다. 놀라운 것은 모두들 나누어준 회사 선전 팸플릿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는데도, 김 부장은 땀을 흘리기는커녕, 방금 초상집 방문을 마치고 나온 듯한 새까만 양복저고리와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 하나 열지 않았다. 심지어는 오직 돈만 생각하기 위해 황금빛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는 김 부장은 그것조차 느슨하게 여미지 않았다. 김 부장이 양복을 벗으면 땀구멍 대신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고 작은 비닐로 온몸이 덮여 있을 것 같았다. 파충류? 순간, 등즐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김 부장에게 잘못을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팔십년 대에 학생운동 한다고 말이 경영학 전공이지, 경영학원론, 회계원리, 생산관리, 품질관리, 인적자원관리, 조직행동론, 국제경영학, 경영전략, 관리회계, 재무관리, 재무분석, 기업법, 마케팅, 광고론 따위의 제목은 달달 외우지만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졸업장을 땄습니다. 그나마 명문대학 졸업생이라고 어찌어찌 들어가게 된 중소기업 회사를 다니며, 결혼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착착 승진도 했지만, 틈만 나면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그놈의 남들처럼, 남들처럼은 살아야 한다는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중형차도 사고, 아파트 평수도 늘리고, 여름에는 바다로, 겨울에는 스키장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물론 양가 부모님들 해외여행도 보내드리면서 어깨에 힘도 넣었죠. 그런데다가 지금 마누라랑 딸은 미국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외로운 기러기 아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회사가 일주일 전에 문을 닫았습니다. 일주일 전, 간부 회식 때 함께 술 마시고 단란주점에서 여자 하나씩 우리들한테 붙여주고 질펀하게 놀았던 사장이 가족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내뺐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 참, 미국이란 묘한 나라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마누라랑 애새끼를 만나고, 사장 놈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당장 비행기 표가 없습니다. 지난주에 마누라한테 월급 몽땅 부쳐주고 한 달 생활비로 얼마 남은 것마저 사장 찾으러 다닌다고 동료들이랑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변호사를 세우고, 진정서를 제출하고 뭐 그런 거 하고 다니며 홧술 마시다보니 다 써버린 겁니다. 카드요? 다음 주면 돌려막기 주간입니다. 다들 미국으로 갔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새 김 부장에게서 흥미를 잃자마자, 나는 발가락의 근질거림을 결국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등 뒤에 강 부장과 박진국을 남겨 둔 채.



4


어찌된 일인지 대륙빌딩에서 나오는 동안 나의 발가락은 평온을 되찾았다. 대신 후끈한 더위가 숨을 막히게 했다. 나는 빌딩의 그늘진 구석에 걸터앉았다. 순간, 오후 내내 달궈진 대리석 바닥의 뜨거운 기운이 내 엉덩이를 감싸 안듯 휘감았다. 놀라 벌떡 일어났으나 달리 갈 데도 없는 나는 마치 잠자는 사나운 개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눈치를 살피며 다시 대리석 바닥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런대로 앉을 만했다. 일부러 돈 주고 한증막에 가기도 하는데 이까짓쯤이야 하고 생각하며 담배를 빼물었다. 먼저 나오긴 했으나 강 부장과 박진국을 기다려야 한다. 딱히 그들을 만나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아쉬워서이다. 지금 상황에 같은 처지의 그들이라도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나는 두 번째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확실히 피서 막바지 철이라 그런지 강남역 주변인데도 다른 때만큼 붐비지 않았다. 오히려 한산한 듯하여 숨쉬기가 한결 편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여자의 웃음소리는 무조건 그녀들에게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는 강력한 공포탄처럼 요란했다. 등의 절반은 훤히 드러내놓은 채 간신히 가슴과 엉덩이만 가린 옷차림의 여자들은 시원해서일까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부러웠다. 얼마나 시원할까. 나는 지금 엉덩이까지 뜨뜻한데…… 하지만 그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여자들의 하얀 발가락이었다. 우리네 여자들은 여성인권이니, 페미니즘이니, 뭐니 하면서 틈만 나면 남자들과 사회제도를 싸잡아 비야냥거리고 질타하지만 그네들은 이미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 하얀 열 발가락을 보라. 눈부신 태양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에 그 얼마나 당당하게 열 몸뚱이를 벌거벗은 채 내놓고 있잖은가. 당당함과 자유로움과 시원함에 이 텅 빈 도시를 뒤흔들며 웃고 있잖은가. 그런데 또 무엇이 아쉽고 무엇을 더 얻어야겠다고 소리치는지. 언제부터 우리 여성들이 곱디고운 아랫배와 작디작은 열 발가락을 아낌없이 세상에 드러내놓고 느긋이 도시 한복판을 걸어가게 되었는가. 갑자기 나의 왼쪽 발가락이 근질근질 움직거렸다. 육이오 한국전쟁 때부터 그랬을까? 나는 구두를 벗었다. 나의 발가락은 그제야 안도의 깊은숨을 내쉬었다. 팔일오 해방 때부터? 양말도 벗었다. 신경 쓴다고 까만 구두에 맞게 까만 양말을 신었는데, 햇살 아래에서 보니 꽤 멋스러운 색깔이었다. 나의 발가락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한일합병 때부터? 임진왜란 때부터…… 어느새 나의 몸뚱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빌딩 경비원인 듯한 제복의 두 남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잘못 한 것도 없는데도 벌떡 일어나 뛰었다. 그리고 얼핏 뒤돌아보는데, 쫓아오는 두 경비원 뒤로 한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보고 싱긋 웃고 있었다. 이 더운 날 양복은 물론 까만 구두에다가 멋스러운 까만 양말까지 빠뜨리지 않고 잘 챙겨 입은 사내가. 《문장 웹진/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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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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