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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작성일 2008-03-31
  • 조회수 3,815

 

첫사랑




최용탁




“가다가 출생신고 하고 가지.”

부스스한 얼굴로 미역국을 뜨던 연옥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나가려던 해봉이 돌아서서 잠시 멀뚱히 바라보자, 연옥은 잊었던 일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옆에 앉아 밥을 먹는 둘째 은영이의 턱에서 밥알을 떼어 제 입에 넣는다. 그러나 정작 팅팅하니 부기가 오른 제 입 꼬리에도 밥풀이 붙어 있다. 해봉은 저도 모르게 짜증이 인다.

 

 

“애 이름도 안 지었는데 무슨 출생신고여?”

“지난번에 지어논 거 있었잖어유.”

연옥의 목소리가 더욱 기어들어 갔다. 말끝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건 늘 하는 말본새지만 오늘따라 짜증을 더했다.

“그기 아들 이름이었지, 딸아 이름이었나?”

“그럼 아무거나 지어서 올려유.”

“아무거나? 머시라고 지을까? 삑싸리라고 질까?”

해봉은 너무 심한 소리가 나갔구나 싶어 속으로 아차 했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불퉁거리는 속내가 드러나곤 했다. 셋째도 딸이 나오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배가 불러 오면서 이번에는 틀림없는 아들이라고 동네의 할머니들이 한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해봉이 보아도 위의 두 애들 때와는 배부른 모양도 좀 다른 것 같고, 특히나 전에 임신했을 때는 노상 과일을 달고 살던 연옥이 이번에는 소증이 인 사람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고기를 찾는 것도 그랬다. 아들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미리 이름까지 지어 놓고 기다렸는데 정작 나온 것은 또 딸이었다. 간호원에게 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해봉은 하늘이 다 노랗게 보였다. 면내에 남아 있는 동창들 여섯이 어울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저녁을 먹는 부부 계를 하는데 아들이 없는 건 해봉뿐이었다. 어느 놈 입에서 나왔는지 딸딸이 아빠라는 별명을 얻은 뒤로 이름 대신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된 해봉이었다. 소심하게 굴 수 없어 웃음으로 받지만 속까지 그리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또 셋째를 딸로 보았으니, 뻔히 삼딸이 아빠가 될 판이었다. 요즘 세상에 뭐 딸 아들을 따지느냐고들 하지만 해봉은 정말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아들만 넷인 집안에 둘째로 자라서 그런지, 집에 들어오면 무언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셋째를 가진 것이었다. 해봉의 입맛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럭에 가스통과 커다란 양은솥, 이십 리터들이 물통 다섯 개에 물을 채워 싣자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아침부터 쪄대는 것을 보니 오늘도 불볕인 모양이었다. 벌써 종필이가 나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몸 푼 지 사흘 만에 제 손으로 끼니를 해 먹어야 하는 마누라의 처지가 딱해 보여 괜히 시키지도 않은 아침상을 보아 주느라 시간을 지체한 까닭이었다. 상이래야 북어대가리 우려 끓인 미역국에 시금털털한 열무김치 한 보시기가 다였지만 영 일어나지 못하는 마누라 대신 큰 딸 지영이 챙겨서 학교 보내고 며칠 사이에 먼지 구덩이가 된 마루에 비질도 한 번 하느라 적잖이 늦어진 것이었다.

종필은 이미 도착하여 철제 파이프를 엮어 만든 간이 원두막에 복숭아 박스들을 쌓고 있었다. 그의 트럭 뒤에 바싹 트럭을 대고 해봉은 먼저 가스통을 내렸다. 사십 킬로밖에 안 되는 무게인데도 어깨에 버거웠다.

“제수씨는 좀 어뗘? 아주버님이 요새 바뻐서 제수씨 챙겨 줄 짬도 읎네, 히히.”

요즘 한창 복숭아 수확을 하느라 그렇잖아도 검은 얼굴이 먹장도깨비같이 된 종필이 그것도 우스개라고 헤벌쭉 웃었다.

“형수 걱정은 그만두고 제수씨나 챙겨라. 한참 청춘인데 어째 대꼬챙이 겉이 말르기만 허냐? 밤마다 절구질 하느라고 잠도 안 재우는 거 아녀?”

농으로 받은 말인데 종필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기색이 스쳤다.

“늬가 봐두 그렇지?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 영 밥을 못 먹어. 제 맘대루 입맛에 맞게 해 먹으라  해두 영 못 먹네. 무슨 주스 같은 거나 홀짝대구.”

종필은 지난 겨울에 저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베트남 여자와 국제결혼을 하였다. 몸피는 작아도 야무져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갈수록 바싹 마를 뿐더러 눈빛조차 어딘지 흐리마리해 보였다.

“뱀을 잡아서 좀 구워 줘 봐. 테레비에서 보니께 그 나라 사람들은 그걸 별미로 친다드만.”

“정말여? 온, 말이 통해야 멀 해 주든 말든 허지. 갑갑하기가 아주 웃말 송서방이다.”

상품용 이십 박스와 시식용으로 따로 담은 흠집짜리 두 궤짝을 내려놓고 종필은 담배를 물었다. 그 사이에 해봉은 가스 불을 켜고 양은솥을 올렸다.

“야, 담배 필 시간 읎어. 빨리 옥수수 까. 근데 왜 세 자루 뿐이여?”

“복숭아 따랴, 옥수수 꺾으랴 콩 튀듯 팥 튀듯 해서 그나마 세 자루 꺾은겨. 점심참에 더 가져올 테니께, 오전 장사는 그걸루 되잖여?”

“점심 전이라도 얼른 꺾어 와. 쪄서 파는 거야 되겄지만 날로 사 가는 사람두 있으니께 택두 읎다.”

 

오늘은 올해 장사 첫날이다.

면소재지 뒤쪽으로 난 4차선 큰 도로가에 포장마차 비슷한 원두막을 차려 놓고 복숭아와 옥수수를 팔기 시작한 것이 작년부터였다. 길을 다니다가 그런 것을 여러 차례 보긴 했어도 해봉의 면내에선 아무도 염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해봉에게 아직도 그런 노다지를 모르느냐는 핀잔과 함께, 자신은 길 양쪽에 두 개나 간이 판매대를 만들어 놓고 몇 해째 마누라와 하나씩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은 아예 농사를 작파하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다고 큰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속삭이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그길로 오십 리는 좋이 되는 동창의 판매대에 가보니 과연 허름하게 지어 놓은 판매대에 연신 자가용들이 멈춰 서서 세 통에 이천 원 하는 삶은 옥수수를 사대는 것이었다. 한 나절을 앉아 구경해 보니 보통 장사가 아니었다. 

스무 통들이 옥수수 한 자루를 농협에 올리면 오천 원 정도가 나오는데, 그 안에서 경매 수수료와 상하차비, 운임에 쓰레기 유발 부담금 따위를 빼면 손에 쥐는 것은 사천 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것을 가스 값만 들여 쪄서 팔면 무려 세 배 장사가 되는 것이었다. 찌지 않은 옥수수를 자루째로 사가는 사람도 꽤 있었다. 한 자루에 만 원이었다. 해봉이 보기에는 장사가 아니라 거의 도둑 수준인데도 자가용 트렁크에 자루를 싣는 사람들은 “역시 농사 짓는 사람들하고 직거래를 하니까 싸기도 싸네.” 하고 요령부득의 말을 하곤 했다. 거기에 대고 동창 녀석은 “지가 농사 진 거니께 그리 드리는 거쥬. 또 오셔유.” 하는 사기 멘트를 날려 주는 것이었다. 좀 전에 자신은 옥수수 농사라곤 단 한 평도 짓지 않으며, 함께 파는 복숭아도 모두 농가에서 사다 파는 것이라고 했던 동창의 얼굴을 해봉은 자꾸만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해봉에게 녀석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했다.

“주말이나 피서 철에는 양쪽 합쳐서 하루에 이백만 원 올리는 날두 있어!”

적게 잡아도 이문이 반은 넘는데, 이백만 원이라면 하루에 백만 원 넘게 번다는 소리였다. 해봉은 정신이 다 아뜩해지는 것이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실 그때 해봉은 돈만 된다면 범의 굴이라도 들어가야 할 처지였다.

  

도장공으로 구 년을 다닌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한다고 퇴직 신청을 받을 무렵, 석 달을 사이로 고향의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셨고 해봉은 이천 만원의 퇴직금을 받고 귀농하였다. 쉽게 고향으로 돌아올 마음을 먹은 것은 연거푸 닥친 불행에 삶의 의욕을 잃은 탓도 있었다. 그 전해에 마른하늘의 날벼락으로 결혼도 못한 채 부모님을 모시며 농사를 짓던 형이 밤에 경운기를 몰고 가다 시멘트 탱크로리에 받쳐 즉사한 일이 있었다. 해봉보다 두 살이 위였고 어렸을 때 화로에 넘어져 귀 하나를 녹여 없앤 외짝 귀였다. 해봉과 달리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일만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리 허망하게 세상을 떴다. 부모님도 모두 갑자를 겨우 넘겼으니 큰 아들의 죽음이 수를 감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 년도 못 되어 마음의 의지였던 세 식구를 떠나보내자, 도무지 발이 허방을 딛는 것 같고 아득바득 회사에 다니는 일조차 꿈인 듯 생시인 듯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회사의 구조조정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아내는 고향으로 가자는 말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요즘 여자답지 않게 자기주장이 거의 없는 연옥이 때로 답답하다가도 그럴 때면 그래도 앙탈하는 것보단 낫지 싶기도 했다. 조그만 인쇄소의 경리였던 연옥과 친구 소개로 만난 지 석 달 만에 동거를 시작했다. 체구가 말 좀 보태면 해봉의 곱절은 되는 여자였는데, 이상스레 해봉은 전부터 덩치가 큰 여자에게 끌리곤 했다. 캐묻지 않아도 살다 보니 알게 된 그녀는 과거도 기구하였다.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가 백 일도 넘기기 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이모네 집에 얹혀 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하자마자 지하 셋방을 얻어 혼자 산 것으로 미루어 남의집살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혼자 산 사 년 동안 몸무게가 배로 늘었다고 했다. 과연 동거를 시작할 때 보니, 월급을 다 먹는 데에 썼는지 모아 놓은 돈이 고작 백만 원 남짓이었다. 어쨌든 연옥은 월급을 다 먹어치운 덕에 큰 덩치가 되었고 큰 덩치를 좋아하는 해봉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첫 월급이 나오던 날, 해봉은 일부러 현금으로 몽땅 빼서 봉투에 넣었고, 피자 한 판과 통닭 한 마리 소주 두 병과 함께 선물을 하듯 연옥에게 안겨주었다. 만난 이후 처음 눈물을 보인 그날 밤, 연옥은 해봉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처음으로 참기름 짜듯 어렵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일곱 살이라는 적잖은 나이 차도 있었지만 연옥은 해봉이 하는 일이라면 두말없이 무조건 따랐다. 그녀로선 평생 처음 시골에 가서 사는 것인데도 그랬다.

하긴 고향에는 열세 평짜리 주공아파트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새 집이 있었고 그것을 그냥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형은 죽기 전에 국제결혼 알선회사에 등록을 하여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준비의 하나로 마지막 남은 논 한 뙈기를 팔아 새로 집을 지었다. 제법 전원주택 흉내를 내어 지은 삼십 평짜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번듯하였다. 원래 해봉의 집은 농토가 별로 없어서 형이 이앙기며 탈곡기, 트랙터 등을 갖춰 놓고 주로 남의 농사일을 하였다. 그것만으로 세 식구 먹고 살기에 별 부족함이 없었다. 논을 팔아 집을 짓고 나니 남은 땅이라곤 팔백 평짜리 밭 하나가 전부였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내려오긴 했어도 살 길이 막막하였다. 형이 하던 대로 농기계로 남의 일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일 년 넘게 방치된 기계들은 하루 일하면 이틀 수리해야 할 정도로 이미 수명을 다한 상태였다. 게다가 농사일에 그다지 익지 않은 해봉의 손에 일을 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연옥의 뱃속에는 둘째가 들어섰고 해봉은 농협에서 일하는 친구의 조언을 받아 팔백 평 땅에 비닐하우스 두 동을 지었다. 거름을 넉넉히 한 다음 시세를 보아 가며 풋고추나 오이, 가지 따위를 제 철이 아닐 때 내면 몇 천 평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는 거였다. 그는 지난 몇 해 동안의 겨울철 농산물 시세를 뽑아 보여 주었는데, 특히 풋고추는 십 킬로 상자에 평균 오만 원을 웃돌았다. 비닐하우스 짓고 연탄과 기름 겸용 보일러를 놓는 데에 퇴직금 이천만 원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트럭까지 한 대 사고 나자 그야말로 무일푼이 되었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생활비를 내 쓰면서도 해봉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연이은 불행으로 마음이 좀 약해졌을 뿐이지 해봉은 원래 한없이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붙임성이 좋아 어디를 가도 쉽게 사람을 사귀는 편이었다. 고향 마을이니 더욱 그러했다. 모두들 어릴 적부터 보며 살아 온 어른들이고 형님들이었다.

그해 마을 대동계가 있던 날, 해봉은 소주 한 박스에 돼지고기 열 근을 내었다. 스물다섯 가구뿐인 작은 마을이니 그만하면 술안주로 넉넉하였다. 이어서 이장을 뽑는다는 동계장의 말에 해봉은 선뜻 손을 들었다.

“지가 객지에 있다가 고향에 돌아왔는데, 인제 맘 잡구 제대루 농사를 지어 볼랴는구먼유. 맘두 잡구 어르신들 심부름도 할 겸, 지가 한번 해 보겠시유.”

서로 맡지 않으려는 자리였다. 농사철에도 노상 면사무소 출입을 해야 하고 공무원들이 마을에 오면 커피라도 타 내야 하는 것이 그 자리였다. 당연히 박수 한 번 치는 걸로 해봉은 동네 이장이 되었다. 그런데 맡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해부터 이장의 월급이 배로 뛰어 한 달에 이십사만 원이 되었고 게다가 석 달에 한 번씩 백 퍼센트 보너스가 나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골에선 이장이 농협과 관계되는 일도 함께 하는데 그에 대한 수당조로 농협에서 따로 십만 원을 매달 통장에 넣어 주었다. 해봉의 고향엔 또한 마을 공동 소유의 논이 닷 마지기 있었다. 그것은 이장을 맡은 사람이 도지 없이 부쳐 먹는 게 관례였다. 이래저래 계산해 보니 별로 하는 일도 없이 한 달에 오십만 원은 들어오는 셈이었다. 쏠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첫해에는 농사도 괜찮았다. 비닐하우스 두 동에 청양과 진미를 나누어 심고 풋고추로 따 인천 구월시장으로 올렸는데 매일 일고여덟 박스씩 따니, 난방비를 빼고도 한 해 겨울에 칠백만 원을 모을 수 있었다. 초짜가 방짜라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면내의 여럿 중에 해봉의 고추 농사가 제일로 잘 된 덕이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그만한 노동이야 펜대 굴리고 살 처지가 못 되는 터수에 쓰니 다니 할 계제가 아니었다. 고향에서 흙 파고 농사를 지으니 그 동안 마음속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농사지어서도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다 싶은 자신감이 생기자 무시로 콧노래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고춧대를 뽑고 갈아엎은 밭에 곧바로 가지를 심었다. 오월이 되자 가지가 열리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하루만 걸러 따면 빨래방망이만 해져서 박스에 들어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노지보다 한 달 이상 일찍 나온 가지는 백 개들이 한 박스에 이만 원이 넘게 나왔다. 이틀에 한 번 보통 이삼십 박스씩은 따니까 보통 큰돈이 아니었다. 농사가 아니라 노다지를 캐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날만 새면 밭에 가서 살아야 할 정도로 일도 많았고 가지 잎에 붙은 솜털 같은 가시가 날려 연방 재채기를 해야 했지만, 통장에 돈 쌓이는 재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다들 농사지어서는 먹고살 수 없다고 야단들인지 모를 일이었다. 저마다 두둑한 주머니를 감춰 두고 괜한 엄살을 부리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거기까지가 다였다.

여름이 되어 노지에 심은 가지가 쏟아져 나오자, 가격은 내리막길로 들어서더니 나중에는 헛웃음만 나오는 사천 원까지 내려갔다. 그러니까 가지 하나에 사십 원이 된 것이었다. 거기서 박스 값 육백 원, 운임 오백 원, 수수료 칠 퍼센트, 상하차비 이백 원을 빼면 그야말로 뼈 빠지게 농사지어서 거저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을걷이 끝나고 농협에서 갖다 쓴 농약, 비료, 박스 등의 자재 값을 갚고 나니 다시 빈손이었다. 도시와 달리 쌀이나 푸성귀를 사먹지 않아 생활비가 훨씬 줄었는데도 그랬다. 좋아하는 술도 되들이 소주를 사다 놓고 몇 번씩 갈라 마시며 손톱 여물을 썰었지만, 이듬해부턴 더욱 상황이 나빠졌다. 난방비는 한없이 오르는데 고추 값은 외려 전만 못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연리 3%의 일 년짜리 영농자금을 한도껏 끌어다 쓰고 이듬해 다시 영농자금을 빌어 갚는 식을 해봉도 되풀이하게 되었다. 그렇게나마 근근이 몇 해를 버텼는데 재작년 겨울, 밤사이 내린 폭설에 하우스 한 동이 무너져 내리며 해봉의 발밑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한창 자라던 고추가 몽땅 얼어 죽은 하우스 앞에 털썩 주저앉은 해봉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해에 삼 년 임기의 이장자리도 남 차지가 되었다. 가만 있어도 당연히 연임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전날까지만 해도 형님 아우 해가며 마을회관에서 술추렴을 하던 덕수가 나선 것이었다. 일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해봉은 느꼈다. 속으로는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겉으로는 짐을 떠맡겨 홀가분하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며 앞장서서 박수를 이끌어냈다. 다른 큰 동리에선 서로 이장을 하겠다고 나서 투표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대대로 울타리 없이 이웃을 사촌으로 여기고 살아온 해봉의 마을에선 안 될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손을 내어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이미 반농사는 날아간 뒤였다. 이장으로 있으면서 꼬박꼬박 들어오던 돈도 끊기고 논농사도 없어졌으니, 그 액수만큼 고스란히 빚이 될 터였다. 오이 농사를 지어볼 요량으로 고랑을 타고 오이모를 심으면서도 해봉은 맥이 풀려 영 일손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창 오이가 순을 뻗어 올라갈 무렵에 예의 그 동창을 만난 것이었다. 워낙 절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그길로 고물상으로 달려가 건축용 파이프를 사서 이리저리 엮고 그 위에 천막 지붕을 얹은 다음, 합판을 깔아 바닥을 만들었다. 마침 친한 친구인 종필이가 복숭아와 옥수수 농사를 많이 하고 있었다. 그도 적극 찬성이었다.

“그 자리서 을매나 팔릴지는 몰러두, 복상이랑 옥시기는 내가 대주께. 내가 늬 사정 아니께 돈은 나중에 갈에 가서 계산해두 돼.”

종필이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준 덕분에 간이 판매대는 한 나절 만에 뚝딱 완성되었다. 해봉이 차고앉은 자리는 사차선 도로가 쭉 이어오다가 시내버스 정류소를 중간에 두고 난 백여 미터 갓길의 끝이었다. 정류소의 벽에 <살믄 옥수수 복숭아 팜니다>라고 크게 써 붙여 놓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장소의 선택과 광고 문구는 모두 동창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일단 맞춤법을 틀리게 써야 진짜 농사꾼이라고 믿으며, 빨리 달리던 차들이 멈추어 설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가는 차들을 보며 오히려 제가 장사하는 곳보다 낫겠다며 격려를 한 다음 동창 녀석은 돌아갔다.

첫날 해봉은 육십 오만 팔천 원의 매상을 올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매상의 팔 할 가량이 복숭아를 판 것이었지만, 바쁘기는 오히려 옥수수 파는 일이었다. 복숭아야 굵은 놈으로 한 박스만 팔아도 삼만 원인데 옥수수로 삼만 원을 올리려면 불이 나게 나대야 했다. 첫날이 주말이긴 했어도 예상을 뛰어넘는 매상이었다. 어느 기다란 자가용이 한꺼번에 복숭아 다섯 박스, 그러니까 십오만 원어치를 사간 덕이 컸어도 어쨌든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날 저녁에 다시 온 종필도 제 일처럼 기뻐했다. 옥수수 한 자루에 오천 원을 치고 복숭아는 한 박스에 오천 원씩을 떼고 계산을 해 주었다. 종필은 펄쩍 뛰며 옥수수는 그리 하더라도 복숭아는 박스 당 만원을 이문으로 치라고 하였다. 그래도 자기는 농협에 올리는 금보다 훨씬 낫다는 거였다. 과일 시세에는 어두운 해봉이 그래도 되냐고 거푸 물어도 오히려 많이만 팔아 주면 제가 읍내 룸살롱에서 술을 사겠다고 희떠운 소리까지 하였다. 그렇게 계산을 해 보니, 첫날 순수익만 이십 오만 원이 넘었다. 처음 하우스 고추 따서 내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때도 노다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장사에 대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선 들어가는 밑천 없이 남이 지어 놓은 것을 앉은 자리에서 받아 파는 것이고, 무엇보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하우스 안이나 땡볕에서 땅강아지처럼 기어 다니며 고추를 따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중노동이었다. 농약을 한 번만 거르면 창궐하는 각종 병해충 때문에 애간장을 태울 일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딘가 말이다. 해봉은 이런 비밀을 알려 준 동창 녀석이 옆에 있다면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날부턴 연옥까지 나섰다. 아무래도 여러 대가 같이 몰릴 때면 혼자 하기가 버거웠다. 해봉은 워낙 생김도 그렇고 아직 도시물이 덜 빠져 농사꾼보다는 장사치로 보이기 십상이었지만, 도시에서만 살다 온 연옥은 누가 보아도 소 대신 쟁기라도 끌 아낙으로 보였다. 오가는 사람은 늘 다를 텐데도 매상은 매일 엇비슷했다. 평일 날은 삼십만 원 정도, 주말엔 육, 칠십이었다. 팔월 초순 한창 피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꼭 한 번 백만 원을 넘긴 날도 있었다. 이미 딸 때가 된 오이 농사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몇 번 따서 내다가는 노균병이 번진 것을 농약도 치고 않고 그냥 두었더니, 며칠 안 가 충이와 균이가 사이좋게 오이 밭 전체를 나눠먹고 말았다. 종필의 복숭아가 떨어질 때까지 두 달 반 동안 해봉은 알토란같은 돈 천만 원을 손에 쥐었다. 그 뒤로도 추석 무렵부터 배와 사과를 팔았는데 이문은 복숭아나 옥수수에 못 미쳤어도 11월 초승에 장사를 접을 때까지 삼백만 원을 더 통장에 넣을 수 있었다. 통장에 돈이 들고 화수분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하자, 진작 포기했던 아들 욕심이 슬금슬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가을께부터 힘닿는 대로 연옥의 놀란 눈을 감겨가며 용을 쓰곤 했는데, 그 결과가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셋째가 된 것이었다.


아직 옥수수가 다 익지도 않았는데 몇 대의 차가 섰고 그 중의 하나가 복숭아 두 박스를 사갔다. 올해 첫 개시인 것이다. 두 부부가 아침을 걸렀는지 맛보기로 놓아 둔 흠집짜리를 대여섯 개나 먹고 나서 겨우 산 것이긴 해도 첫 번째로 들어온 차가 개시를 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종필은 거의 무제한으로 흠집짜리를 공급해 주었다. 복숭아는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거나 딸 시기를 놓쳐 무른 것은 아예 시장에 낼 수가 없으므로 어차피 두엄더미로나 갈 수밖에 없었다. 맛은 오히려 더 좋은 그런 흠집짜리를 마음껏 먹으라고 하니, 일단 차를 세운 사람들은 무엇이든 사게 마련이었다. 때로 그런 것을 사려는 사람도 있어 예닐곱 개를 담아 만 원씩 팔기도 했다. 물론 두어 개나 먹고도 그냥 가는 사람이 있긴 했다. 하지만 해봉은 마음속으로라도 욕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면 새로이 찾아온 이 행운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점심참에 종필이 복숭아와 옥수수를 더 가지고 왔을 때는 거의 삼십만 원 가까이가 전대에 찼다. 라면에 막걸리 한 사발로 점심을 때우고 종필과 시답잖은 농을 나누고 있을 때, 멀리 갓길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웬 트럭이 하나 섰다. 트럭 뒤를 개조한 탑차였다. 금방 다시 가려니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한 사람이 내리더니 옆을 트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내리는가 하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나왔다 하며 무언가 분주하게 나대는 모습이었다. 얼핏 불안한 느낌이 해봉의 머리를 스쳤다. 올해는 정류장 벽 뿐 아니라, 그 트럭이 선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입간판을 세웠던 것이다. 멀리서 달려오는 차들은 트럭에 가려 그 입간판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씨벌눔이 저기다 차를 세우구 지랄이여? 글구 지금 뭐하는 겨? 대체.”

종필이 먼저 핏대를 올렸다.

“너 잠깐 여기 좀 봐라. 내가 좀 가봐야겠다.”

해봉은 득달같이 일어나 발걸음을 놀렸다. 마음 같아선 차를 몰고 가고 싶지만 유턴을 하려면 멀리 돌아야 했다. 점차 가까워지면서 보니, 사내가 아니라 여자였다. 불뚝성을 내며 오기는 했지만 혹시 멱살잡이라도 벌어지는 일이 생길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는데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더 가까이 가보니 여자가 차 앞에 내려놓은 것은, 맙소사, 옥수수자루와 가스통, 솥단지 등이었다. 입간판을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직 그렇게 막돼먹은 동네는 아니니 면내의 누군가는 아닐 것이었다. 잠시 진정되던 가슴에 이번에는 일종의 전의가 타올랐다. 조금 과장하면 다섯 식구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대여섯 발자국 앞으로 다가선 해봉을 여자가 흘낏 보았다가 다시 하던 대로 옥수수껍질을 깠다. 숫제 동네 똥개가 한 마리 지나가나 보다 하는 태도였다. 여자의 등 뒤까지 가니, 어럽쇼, 차 안에는 복숭아까지 쌓여  있었다. 해봉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아줌씨, 여기서 뭐하는 거요?”

“보면 몰라요? 장사 좀 해 보려는 거지.”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하는 여자에게 해봉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소리로 제압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사람이 얘기를 하면 돌아보기라도 해얄 것 아니오? 보아하니 타동사람 같은데 남의 동네 와서 이런 법이 어딨소? 나, 참.”

그제야 여자가 옥수수 까던 손을 멈추고 돌아앉았다. 얼굴 양옆과 목을 가리는 농촌 여자들이면 누구나 쓰는 모자를 그 여자도 쓰고 있었다.

“내가 아저씨 얼굴 봐서 뭐한대요? 그리구 이 길이 나라 길이지, 이 동네 길이요? 이 동네 사람만 장사 해먹으란 법이래두 있슈?”

고개를 발딱 들고 따지고 드는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해봉은 흠칫하고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 얼굴은 아무리 변한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신지은, 바로 그녀였다. 눈앞이 하얘졌다. 그렇잖아도 땀이 찬 머리에서 순식간에 진땀이 솟아 줄을 지어 이마로 흘러내렸다.

“저기, 저기. 그러니까…… 맞지유? 저기, 저기 살던……”

“뭐라는 거유? 갑자기 침 맞은 배암모냥……”

그녀도 뭔가 이상한지 모자를 젖히며 일어났다.

“저기, 그 실고 앞에서 가게 하던, 그 신지은, 맞지유.”

“맞긴 맞는데, 가만, 나도 아는 사람 같네. 이름이 뭐였더라?”

“해봉이, 이해봉이여. 근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래여?”

그녀가 먼저 말을 놓자,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녀도 해봉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봉의 먼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치 샘물이 퐁퐁거리는 듯한 그 음성도 변치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녀와 길거리 옥수수장수가 된 그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목단 꽃처럼 환했던 그녀는 열일곱의 나이에 서울로 가지 않았던가. 그럼 지금 까무잡잡해진 얼굴로 옥수수를 까는 이 여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해봉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그 뒤죽박죽을 한 마디로 풀어냈다.

“살다 보믄 뭔 일이 읎냐?”

그때 종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뭔 일이여? 나두 가 볼까?”

“아니여. 아무 일도 없다. 참, 너 얼른 가 봐야 되지?”

지은이 해봉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별로 안 변했네. 나보단 곱게 살았나 부다. 얼른 가 봐. 내 이따 들를께.”

하고 다시 주저앉아 옥수수를 집었다. 돌아오는 길은 마치 허공을 밟는 것만 같았다.

“먼 일이여? 얼굴은 또 왜 그러냐?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종필의 말대로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뒤를 돌아보니 멀리 등을 구부린 지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보다 몸피가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아녀. 가서 보니 아는 사람이더라구. 그래서 늦은겨.”

종필이 누구냐고 캐물었지만 해봉은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 얼른 그를 보냈다. 그날 오후 장사를 어떻게 했는지 몰랐다. 더러 차들이 와서 옥수수를 팔고 복숭아도 팔았지만 정신은 온통 딴 데 가 있었다.


해봉이 지은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첫날이었다. 대학에 갈 엄두는 꿈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고 거기에 맞춰 공부도 하지 않았으니 갈 곳은 읍내의 실업고등학교 하나뿐이었다. 버스로 삼십 분 넘게 가야 하는 학교였다. 입학식이 끝나고 버스를 타기 위해 가던 길이었다. 앞에서 한 여학생이 마주 오고 있었다. 어떤 예감처럼 가슴 한편으로 싸늘한 바람 같은 것이 칼날처럼 지나갔다. 점차 가까워지는 여학생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잠시 비껴 지나가는 그 순간, 해봉은 석상처럼 멈추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것을 갑자기 발견한 것 같은, 절대의 아름다움과 대면한 것 같은, 무언가 자신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스쳐갔다는 느낌 등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체불명의 감정과 함께 어떤 향기가 맡아졌다. 향기를 따라 해봉은 돌아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해봉보다 커 보이는 몸피를 봄 햇살이 감고 있었다. 해봉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그녀가 조그만 가게로 들어갔다. 해봉은 가게 앞의 플라타너스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렸다. 그저 한 번만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해봉의 눈앞에서 폭죽처럼 터졌다가 사라진 그 빛을 확인하지 않으면 영원한 회한이 될 것 같았다. 꽤 긴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들어가 본 가게에 그녀는 없었다. 하늘색 스웨터를 입은 한 여자가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해봉은 또 가슴을 지지고 가는 불길을 느꼈다. 간신히 볼펜 한 자루를 사고 그녀의 손바닥에 동전을 건네주었다. 손끝과 손바닥이 짧게 마주친, 해봉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고 열병의 시작이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해봉은 가게 앞을 서성였다. 그러면서 몇 개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게 안쪽의 안채가 그녀의 집이며 실질적으로 가게를 꾸리는 것은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의 부모였다. 그녀는 종종 가게를 보았지만, 아무 볼 일 없이 들어갈 수가 없어 멀찍이서 기웃대는 해봉에게는 참으로 안달이 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매일 그녀를 볼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다. 삼십 분 먼저 오는 버스를 타면 등교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해봉은 아침잠을 줄이고 학생 중엔 아무도 타지 않는 이른 버스를 탔다. 그리고는 그녀의 가게 옆 골목을 서성이다 그녀가 나오면 짐짓 학교에 가는 척 그녀를 마주 보며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존재했다. 그녀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은 뜻밖에도 같은 반의 친구에게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해봉과 같은 열일곱이고 언니와 오빠가 많은 집의 막내딸이며 초등학교 때에도 덩치가 커서 하마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는 등의 사실이 그녀와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의 얘기였다. 신지은이란 이름은 명찰을 보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다지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는데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은 감히 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터지는 기쁨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갈망이 자라났고, 한 번 자라난 갈망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되어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자, 해봉은 마침내 첫 편지를 썼다. 초조한 여러 날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에 간신히 버스비를 타내 가게까지 가기도 했지만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글재주가 있을 리 없건만 애타는 마음을 전하려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나와 주기도 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이 그녀와 남은 유일한 끈이라는 사실이 밤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이제 편지는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해봉 자신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길고도 길었던 방학이 끝났다.

개학 첫날도 해봉은 어김없이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가 해봉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고 느꼈다. 편지를 읽은 것이 틀림없었다. 해봉은 그녀의 부모가 편지를 중간에서 없앴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스쳐지나가는 시간은 너무 짧고 많은 학생들이 주위에 있었다. 그 날 오후 그녀가 가게에 있는 것을 보고 해봉은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들어가긴 했지만, 아무 말도 나와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길을 피해 또 볼펜만 한 자루 들고 가게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때 그녀가 다가왔다.

“얘, 너지? 나한테 편지 보낸 거.”

해봉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이따가 나올 테니까, 나 따라 와.”

편지를 쓰던 숱한 밤들이 떠올랐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해봉은 가슴이 뛰다 못해 눈물이 나오려 했다. 얼마 후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나와서 해봉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해봉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녀를 따랐다. 십 분쯤 걸어 그녀가 멈춘 곳은 개울가 둑에 놓인 벤치였다. 해봉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너 정말 대단하더라. 나하고 말 한 마디 해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편지를 보내?”

지은의 말투는 힐난하는 듯했지만 얼굴엔 엷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고백해야 했다.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좋았어. 그래서 편지 한 거야. 나 매일 너 보려고 학교도 일찍 와.”

“내가 모르는 줄 알았니? 진작 알고 있었어. 아님 어떻게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애를 마주치겠니? 호호, 너 참 재미있다.”

“재미로 그러는 거 아녀. 난 진짜 널……

“날 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웃음기가 싹 가셨다.

“사실 네 편지 그저께 보았어. 방학 내내 서울 가 있었거든. 우리 엄마가 다 모아 놓았더라. 무려 스물세 통이데. 그런데 어쩌냐? 우리 다음 주에 서울로 이사 가거든. 오빠네 집으로. 벌써 집도 팔렸어.”

놀라운 말이었다.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해봉에게 그녀는 먼저 편지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봉은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해봉은 오래 괴롭고 애타는 세월을 보냈지만, 언제나 그렇듯 긴 시간은 모든 것을 둥글고 밋밋하게 마멸시켰다.


기나긴 여름해가 넘어갈 무렵, 지은이 트럭을 몰고 해봉에게로 왔다.

“참, 오랜 세월이 흘렀어. 그렇지?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러고 보니 여기가 너네 동네였구나.” 

그 때쯤엔 해봉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들어 보니 그녀의 인생도 기구하였다. 이사를 갈 때만 해도 잘 살던 그녀의 오빠가 부도나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형제를 믿고 보증을 섰던 다른 남매들까지 연쇄적으로 파산이 되었다. 부모는 헤어져 각기 다른 자식 집에 얹혀야 했고 그녀도 오빠와 언니 집을 전전하며 겨우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하였다가 중매로 만난 사람이 고향에서 가까운 O읍 출신 남자였다. 결혼하고 서울에서 오 년을 살다가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 시골로 왔다고 했다. 농토도 꽤 있는 집안이었는데, 술 없이 못사는 남편이 간경화에 걸리며 재산 다 날리고 결국 세상을 뜬 게 삼 년 전이었다. 아직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애들 때문에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다가, 작년부터 여름철엔 길거리 장사를 한다는 거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해봉은 마음이 짠하기 그지없었다. 자신과는 다른 팔자를 타고나 인연이 안 되었거니 했는데, 오히려 그녀가 더 불행한 삶을 살아온 것이었다. 옛 생각이 밀려왔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여자, 신지은에게만 연애편지를 써 보았다. 그것도 불덩이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밤을 지새며 쓴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다니, 참으로 애잔하였다.

“나 낼부터 딴 데로 갈까? 어차피 판매대가 아니라 차에 싣고 다니는 거니까, 딴 데 알아 봐도 돼.”

지은이 일어섰다. 

“아니, 그냥 해. 같이 먹고 살아야지.”

해봉이 다급하게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왠지 열일곱 살 때처럼 그녀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그럼 내일 봐.”

지은이 떠나고 해봉도 대충 정리를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쓸고 나간 집안은 엉망이었다. 연옥은 한결 기운을 차린 것 같았지만, 아직은 갓난애 하나 보는 것도 힘겨워 했다. 서발 막대를 휘둘러 봐도 산후 수발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신세가 스스로도 딱하였다. 설렁설렁 집안을 치우고 부엌엘 가보니 그 몸으로도 해봉이 좋아하는 두부찌개를 끓이고 새치도 한 마리 구워 놓았다. 밥에 소주 몇 잔을 비우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방에는 모녀가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있었다. 갓난애의 입에 물렸던 한 쪽 젖이 그대로 밖으로 나와 있는 채였다.

다음 날 아침 전쟁 같은 북새통을 치루고 나가 보니 지은이 벌써 나와 옥수수 삶는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어 종필이 오고 해봉도 둘째 날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요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해봉의 자리가 좋은 목인 줄 알았는데, 지은의 자리에 더 많이 차들이 서는 것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해봉의 판매대에 서는 차는 지은의 반절도 되지 않았다. 어제 매상도 겨우 사십오만 원이었다. 분명 오전에 삼십만 원 정도 올랐는데, 그렇다면 오후에는 거의 공을 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동창 녀석의 주장과는 달리 역시 앞자리가 더 좋은 목이었다. 오후 세 시가 되도록 겨우 십오만 원어치가 팔리자,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 없었다면 사십만 원은 올라갔을 터였다. 이럴 수는 없었다. 시골로 내려온 지 육년 만에 이제 남은 희망은 이 장사뿐이었다. 몇 해만 더 악착같이 모아서 읍내에 식당이라도 내자고 연옥의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다짐을 두었었다. 그러지 않고는 애들 셋을 키우고 가르칠 방도가 없었다.

지은의 트럭 앞에 줄 지어 서는 차들을 보며 해봉은 점점 약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무슨 똥배짱으로 같이 먹고 살아야지, 어쩌고 했는지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었다. 저녁이 다 되도록 삼십만 원도 못 올린 해봉은 마침내 꼭지가 돌아버렸다. 일요일이면 육, 칠십이 기본이었다. 해봉은 종일 달구어져 뜨끈뜨끈해진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곤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지은에게 당장 여기서 가 달라고 할 참이었다. 

“흥, 제 입으로 다른 데로 가겠다고 했으니, 가라면 가겠지. 먼 얼어 죽을 첫사랑이구 연애편지여? 에이 쓰버럴.”

해봉이 가래침을 돋워 창밖으로 뱉으며 쌔앵, 하고 트럭을 출발시켰다.《문장 웹진/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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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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