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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 기다림

  • 작성일 2010-02-03
  • 조회수 1,790

윤을 기다림
구경미


1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가 봉희동으로 옮겨 앉은 것은 이십여 일 전이었다. 그때는 봉희동이 어떤 곳인지, 현재 봉희동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부모님이 반대한 것도 봉희동은 아니었다. 봉희동에 사는 윤이라는 남자였고, 윤이라는 남자의 집이었다. 윤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는 게 없었으므로 물을 수 없었고 물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가는 곳도 봉희동은 아니었다. 봉희동에 있는 윤의 집이었다. 윤이 미리 말했어도 그녀가 봉희동으로 옮겼을지는 글쎄, 장담할 수 없었다. 윤이 옆에 있었다면 한결 견디기가 쉬웠을 것이다. 윤만 옆에 있었다면 동네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이 봉희동에 죽치기 시작한 것은 이삼 일 전부터였다. 그날,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오전과는 다른, 뭔가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곳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두셋씩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근처의 공장들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몇몇은 쭈그리고 앉아 공장 인부가 일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던 그녀는 몇 초간 멈춰 서 있었다. 골목길 양쪽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새카맣게 앉아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검은 양복을 까마귀로 착각했다. 언젠가 그녀는 벼를 베어내고 난 빈 논에 까마귀들이 새카맣게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황량한 들판과 논, 커다한 몸체를 뒤채듯 꿈틀거리는 까마귀 무리가 묘한 대조를 이뤄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휘파람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사내들 몇이 그녀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 옆의 앳된 얼굴은 무료한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휘파람을 부는 사내들도 앳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보다 몇 살씩은 어려 보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사내들로 아치를 이룬 길을 지났다. 그녀에게 동네로 들어가는 길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물론 다른 길도 있겠지만 그녀는 피곤했고 동네 지리를 잘 알지 못했다. 주택가에도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담벼락에 기대서서 지나가는 주민들을 노려보았다. 말을 걸거나 위협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문 앞에는 서너 명의 여자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딱 한 번 스치듯 보았던 윤의 집주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슈퍼 주인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인사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누군지 확실치 않은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가 무안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여자들이 길을 터주었다. 잠시 대화도 끊어졌다. 그녀는 여자들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여자들을 지나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마당을 거쳐 집 안으로 들어서서야 그녀는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집주인이 찾아온 것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막 세수를 끝냈을 때였다. 주인은 현관 앞에 서서 집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녀가 인사를 하자, 좀 전에는 아는 척도 안 하고 그냥 가더라고 말하며 주인이 섭섭해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여러 분이 계셔서요, 대답했다.

“총각은 안 보이네?”

주인이 물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요즘 바쁜지 집에 잘…….”

주인은 다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큰방 침대 위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외출복이 절규하듯 엎드려 있었다. 작은방에는 미처 풀지 못한 그녀의 짐이 박스에 담긴 채 쌓여 있었다. 그 짐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부터 마련해야 했다. 짐을 본 주인의 눈초리가 꼿꼿해졌다. 그리고 거침없이 서운함을 드러내었다.

“둘이 살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들어오면 들어온다고 말을 해야지. 수도세도 더 걷어야 하고.”

“아, 네…… 죄송해요.”

“그런데 무슨 사이야? 동생인가?”

“아, 그게…….”

“애인?”

“저기…….”

“됐어. 도둑만 아니면 됐지 뭐. 이 동네엔 도둑도 안 들어. 가져갈 게 있어야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주인이 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졸지에 도둑과 동급 취급을 당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주인이 어수선한 동네 분위기를 전하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주인은 또 동네의 몇몇 고집불통들이 까마귀를 불러들였다고 투덜댔다. 빨리 진행될 일이 고집불통들 때문에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주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의지도 없었다. 동네도 집도 모두 윤의 것이었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체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윤이 함께할 때 비로소 그녀의 것이 될 터였다. 혼자 있을 때의 그녀는 단지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자 주인이 일어섰다. 그녀는 현관문을 잠그고 침대 위의 옷을 정리했다. 벌써 여덟 시였다. 윤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십여 일 전부터 윤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의 말대로라면, 들어오지 못했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야근을 해야 했고, 어떤 날은 급히 출장을 떠나야 했다. 또 어떤 날은 술 접대를 하다 너무 취해서 못 들어오기도 했다. 저녁마다 상을 차려놓고 기다린 그녀는 아홉 시 반이 넘으면 그제야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었다. 윤은 왜 들어오지 않는가. 그녀를 불러놓고서 왜 정작 자신은 들어오지 않는가. 그녀는 거듭 생각했다. 가능한 모든 이유를 다 대입시켜 보았다. 하지만 딱 이거다, 하는 건 없었다. 그들은 잘 싸우지도 않았고 의견대립을 일으킨 적도 거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했다. 한 번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얼른 양보했다. 그녀가 윤의 집으로 옮긴 것도 양보의 차원에서였다. 그녀는 새로운 곳에서 새 보금자리를 틀고 싶었다. 하지만 윤이 내켜하지 않았다. 윤의 뜻대로 그녀가 들어오자 이제는 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지낸 기간은 고작 십여 일에 불과했다. 그녀는 매일 밤 그 십여 일을 곱씹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와 윤의 행동 하나하나를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둘 다 출근준비로 바빴다. 윤이 먼저 출근하고 십 분 뒤에 그녀가 출근했다. 저녁에는 시내에서 만나 영화를 보거나 외식을 했다. 아니면 비슷한 시간대에 집에 도착해서 쉬었다. 취향도 성격도 비슷해서 그녀는 내심 윤과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유를 생각하다 막히면 그녀는 회사를 비난했다. 집에도 못 들어올 정도로 직원을 부려먹는다고 회사를 욕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그녀가 윤의 회사로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진실과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쌀을 씻어 안쳤다. 찌개를 끓이고 반찬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모든 신경은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 벨소리를 못 들을까봐 물도 크게 틀지 못했다. 눈은 쉴 새 없이 시계를 흘끔거렸다. 저녁준비가 끝나자 그녀는 침대에 기대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홉 시 반이 될 때까지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찌개를 데워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2

 

누군가가 끈기 있게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십 분이었다. 잠깐 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윤이라면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그렇다면 전화를 했겠지. 그녀는 다시 누웠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똑똑똑, 삼 초 쉬고 다시 똑똑똑. 핸드폰도 잃어버렸다면? 그녀는 서둘러 카디건을 걸치고 나가 문을 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깨닫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재개발추진위원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설명을 시작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는 쉬고 여자가 설명을 했다. 번갈아 설명하기 위해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룬 것 같았다. 그녀는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재개발추진위에서 나왔다면서 재개발추진위를 비난했다. 추진위에서 세력 과시를 위해 용역회사 직원들을 불렀다고 했고, 자신들은 최악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또는 맞불작전으로 어쩔 수 없이 경호업체 직원들을 불러야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서류를 내밀고는 사인을 하라고 재촉했다. 엉터리 추진위를 몰아내기 위해 주민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은 이곳 주민이 아니며 친구 집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친구 역시 집주인이 아니고 집주인은 3층에 산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들은 잠시 난감해 했다. 그러다가 이 일은 집주인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친구의 이름을 대신 적고 사인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난감해졌다. 뭔지도 모르는 일에 윤의 이름을 적고 사인까지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용역회사든 경호업체든 그 사람들이 언제 가느냐고 물었다. 퇴근할 때마다 휘파람을 불고 담배를 피워대서 괴롭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저쪽에서 물러서야 끝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녀가 미심쩍은 듯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들은 대대로 이 동네에서 살았고 지금까지 이 동네를 위해 일해 왔으며 앞으로도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생업도 내팽개치고 주민의 이익을 위해 뛰어다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격려는커녕 오해나 받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에 좌절하지 않고 희생자가 될 각오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남자는 정말 결의에 차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친구가 돌아오는 즉시 진정서에 사인을 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할 수 없다는 듯 며칠 뒤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한 시간 뒤 또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문을 열지 않고 안에서 누구시냐고 물었다. 재개발추진위원회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녀가 좀 전에 다녀갔다고 했더니 다녀간 것은 자신들이 아니고 다른 쪽이라고 말하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설명할 게 있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평일에 몇 번 찾아왔다가 못 만나서 일요일에 다시 온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가 문도 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자, 재개발을 이용해서 자기 배만 채우려는 아귀 같은 놈들한테 동네를 넘겨줄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자신은 이곳 주민이 아니며 친구 집에 잠깐 머물고 있고 친구는 출장을 가서 한 달 뒤에 돌아온다고 말했다. 저쪽에 사인을 했냐고 물어서 그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자신은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인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도 했다. 발소리가 3층으로 올라간 뒤에야 그녀는 안도했다.

그날 오후, 욕실 벽의 타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한쪽 벽면의 삼분의 일가량이었다. 그 바람에 화분이 하나 깨졌고 세숫대야에 구멍이 났다. 그녀는 한동안 샤워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샤워기를 자신의 다리에 대보았다. 물줄기는 결코 세다고 할 수 없었다. 청소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타일이 떨어져나간 벽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쓸자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손가락에 힘만 살짝 줘도 벽이 힘없이 부서졌다. 구멍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그럴까봐 그녀는 벽에서 물러났다. 청소한 보람도 없이 욕실은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윤을 생각했다. 욕실은 윤의 것이었다. 윤의 것인 욕실이 일정부분 상했다. 당연히 윤이 알아야 했다. 그녀에게는 알려야 할 의무가 있고 윤은 알 권리가 있었다. 그녀는 욕실에서 나와 핸드폰을 들고 작은방으로 갔다. 박스 위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했다.

우려와는 달리 윤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욕실 벽의 타일이 떨어졌어, 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욕실에서 벌어진 사태를 시간 순서대로 설명했다. 깨진 화분과 세숫대야 얘기도 했다. 시멘트 가루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이러다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라는 말로 그녀는 설명을 마쳤다. 몇 초간 그녀는 윤의 숨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윤이 말했다.

“나 지방에 있어. 일 때문에.”

“언제 오는데?”

“모르겠어. 며칠 걸릴 것 같아. 어쩌면 더 오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럼 이건 어떡해?”

“걱정 마. 방법을 알려줄게. 우선 주인아줌마한테 얘기해. 청소 얘기는 빼고. 저절로 그렇게 됐다고 해. 아줌마가 다 알아서 해줄 거야. 주인이니까. 화분은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려. 흙도 식물도 다. 세숫대야는 사야겠다. 그래야 세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당장 사. 옆 동네에 시장이 있어.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릴 거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다 알아. 동네 길도 알아둘 겸 걸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힘들면 버스 타고. 한 코스니까 버스에서 졸지 말고.”

“갈아입을 옷은 있어?”

“내려와서 샀어.”

“집에 옷 있는데 들러서 가져가지 그랬어.”

“시간이 없었어.”

“짐을 정리해야겠는데 자리가 없어.”

“작은방에 내 교재들 있지? 버려도 돼. 책장도. 공간 더 필요하면 적당히 알아서 버리고 정리해.”

윤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문제 출제자고 윤이 답변자여서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윤의 재빠르고 성의 없는 대답이 그녀는 서운했다. 그 서운함이 울컥, 하는 심정을 만들었고 그래서 묻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을 묻고 말았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심란한가 보구나. 그럼 주인한테는 나중에 말하고 우선 좀 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대답해봐.”

“없어.”

“그런데 왜 집에 안 들어오는 거야?”

“회사일이 바빠서 그래. 갑자기 일이 많아졌어.”

“자기 물건 손대는 거 싫어하잖아? 그런데 적당히 알아서 버리라고?”

“그까짓 물건들, 아무려면 어때. 안 그래? 소모품일 뿐이잖아. 그런 데까지 신경 쓸 정신 없어. 아무거나 버리고 싶으면 버려.”

그녀는 백기를 들었다. 알았다고 말하고 밥 잘 챙겨먹으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봉희동으로 들어온 지 하룬가 이틀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가 설거지를 하다 컵 두 개를 깨뜨렸다. 무심코 겹쳐놓았다가 빠지지 않아서 힘을 줬는데 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에 다 금이 가고 말았다.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는 척하며 그녀가 하는 양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던 윤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윤이 황망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것은 그녀의 손이 아니라 두 개의 컵이었다. 그녀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제야 윤이 황망한 얼굴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끼던 거라서…….”

그때는 별거 아닌 일로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어떻게 된 거냐고 건성으로 물었을 뿐 집주인이 보일 법한 반응, 의심이나 변명은 전혀 없었다. 내심 즐긴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욕실을 둘러보고 나온 주인은 일단 신문지를 발라두라고 했다. 그러더니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가 따라 나가 열쇠를 드려야 하냐고 묻자 주인은 무슨 열쇠를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공사를 하려면 열쇠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하자 이번에도 주인은 무슨 공사를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녀가 욕실요, 하고 모기소리만 하게 대답했다. 주인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곧 헐어버릴 집을 뭐 하러 돈 들여 공사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타일 몇 개 떨어진 거 신문지로 대충 가리고 살라고 했다. 그러더니 총각은 왜 안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출장을 갔다고 하자 이 동네만 해도 일 없어서 노는 사람 천진데 총각은 일 많아 좋겠다고 추켜세웠다.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서 그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이, 총각은 월급 많아 좋겠네, 하더니 3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녀는 주인의 엉덩이만 쳐다보다 포기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깨진 타일을 치우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이 낡고 좁은 집에 버려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이곳은 윤의 집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집에다 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버리려면 진작, 그녀가 봉희동으로 옮겨 앉기 전에 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혹시 집지킴이로? 그녀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쓸고 담았다. 도대체 왜? 그녀는 물로 바닥을 씻어내며 생각했다. 이 동네와 이 집과 이 집의 주인에게 환멸을 느끼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지. 이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벌써 나만 해도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녀는 바닥 청소를 끝내고 식탁에 앉아 달력을 오리기 시작했다. 풍경사진이 담겨 있는 달력이었다. 날짜는 버리고 풍경만 살렸다. 이 년 치 달력을 오려서 욕실로 갔지만 결국 붙이지는 못했다. 시멘트 가루가 푸슬푸슬 떨어져 내려서 붙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작은방의 커튼을 떼어와 천장에다 고정시킨 뒤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자 그럭저럭 흉물스러운 벽이 가려졌다. 부모님 집에 있을 때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는,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윤이 뭔가를 공약한 적은 없지만 봉희동에서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뿌듯함이 없을 수 없었다. 그녀는 뿌듯해하다가 지금의 이 상황이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라는 걸 깨닫고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3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은 극도의 긴장감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보이지 않았다. 공장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오가는 사람마저도 거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숫자가 줄었고 다들 지쳐 보였다. 머리에 붕대를 감았거나 양복이 찢어진 사내들도 있었다.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두 짝 다 잃고 맨발인 사내들도 있었다. 그렇게 외관은 후줄근해졌지만 눈빛은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길 한쪽에는 쇠파이프와 각목이 쌓여 있었고 공중에는 부연 먼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역시 퇴근하는 직장인들 외에는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구두 굽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집 앞까지 갔을 때 창밖으로 몸을 반이나 내밀고 있던 집주인이 그녀를 보고는 이제 오냐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대문으로 들어섰다.

집주인이 문을 두드린 것은 그로부터 일 분 뒤였다. 주인은 들어서자마자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타박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평소보다 십 분 늦은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녀 잘못이 아니라 연착한 지하철 때문이었다. 퇴근시간이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주인이 현관 앞 마루에 앉았다. 그것은 주인의 얘기가 길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잠시 옷을 갈아입고 나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맘대로 하라고 했다. 그녀는 큰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주인이 목소리를 높여, 오늘 아주 동네에 난리가 났었다고 말했다. 까마귀들이 서로 쫓고 쫓기며 동네를 휘젓는 통에 무서워서 하루 종일 밖에도 못 나갔다고 투덜댔다. 문이 닫혀 있어도 주인의 말은 너무 잘 들렸다. 그녀는 벽을 만져보았다. 벽과 벽지 사이가 일어나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른 손을 떼고 마루로 나갔다.

“그놈들 아직 있지?”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어떻더냐고 물어서 다치고 깨졌더라고 대답했다. 주인이 함박 웃으며 고소해 했다. 주인이 웃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더 컸다. 그녀가 모처럼 궁금해 하자 주인은, 이제 한쪽이 물러났으니까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겠어? 하고 말했다. 주인은 평생 소원이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는 거라고 했다. 이제 소원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좋아했다. 그러다가 주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아쉽다는 듯 쩝쩝, 하는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시내였으면 얼마나 좋아.”

그 점은 그녀도 아쉬워하는 부분이었다. 윤의 집에서 회사까지는 한 시간 십 분이 걸렸다. 출근시간대의 지하철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붐볐다. 환승구간에서는 모든 통로가 개미들로 꽉 차 한없이 느리게 움직였다. 회사에 도착할 무렵이면 하루치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듯 피로했다. 하지만 주인이 아쉬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변두리보다야 시내가 더 오르지 않겠어?”

주인은 한 아파트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었다. 값이 오를 때까지만 살다가 팔고 다른 아파트로 옮길 거라고 했다. 그렇게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이윤을 남기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주인의 최종적인 꿈은 돈 많은 복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 인간 때문에 내 인생 다 망쳤어.”

그 인간이란 주인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는 주인의 남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주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주인은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제발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어.”

주인의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고 했다. 그녀가,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또 일이 없느냐고 묻자 일이 없는 게 아니라 일할 의지가 없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낮잠을 잔다고 했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서 술 마시고 취해서 또 잔다고 했다. 그랬다가 밤늦게 일어나서 또 술 마시고 취해서 잔다고 했다. 어떨 때는 아침부터 술 마시고 취해서 잔다고 했다. 말하자면, 기분 내키는 대로 시도 때도 없이 마시고 시도 때도 없이 잔다고 했다. 마시고 자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있어도 없는 것과 같고 없어도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찌개든 김치든 먹다 남은 반찬 하나만 안겨줘도 불평 없이 잘 마신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윤의 집으로 들어오고 첫 번째로 맞는 주말 아침이었다. 그녀는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신혼 분위기를 내고 싶었고, 실제로 신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윤을 택했다. 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상에 버금가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닷새를 기다려 마침내 주말 아침이 되었다. 그녀는 김밥을 말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피크닉의 정석대로 샐러드와 와인도 한 병 챙겼다. 도시락 준비가 끝나자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어디로 갈지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이제 윤만 깨우면 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윤의 몸을 흔들었다. 윤이 눈을 떴다가 그녀를 보고는 다시 감았다. 그녀가 피곤하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잘게.”

그렇게 말하는데는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에서 물러났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윤은 전날 취해서 들어왔다. 직원들과의 회식이 있었다고 했다.

윤이 조금 더 자는 사이 그녀는 윤의 책장을 구경했다. 경제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경제 관련 서적이 많았다. 자기개발서도 꽤 되었다. 대학교재로 쓰였을 법한 책도 보였고 소설도 몇 권 있었다. 아침이 어느새 오전이 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윤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윤이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조금만 더, 했다. 그녀는 모질지 못했다. 방에서 물러나왔다. 그녀가 다시 방으로 들어간 것은 막 정오가 지났을 때였다. 오전과 달리 오후가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 길이 막힐 거였다. 삼십 분 안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즐거운 소풍이 아니라 교통체증 체험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윤은 다시 조금만 더, 했고 그녀는 포기했다. 아직 일요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김밥을 먹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윤이 일어난 것은 정오도 한참 지나 오후 세 시가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윤은 한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보았다. 네 시가 되자 벌떡 일어나더니 산책이나 가자고 했다. 세수도 안 하냐고 놀리는 그녀에게 윤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산책은 십 분 만에 끝났다. 동네를 빙 돌아 걸어가니 제법 넓은 냇가가 나왔다. 그 주변으로 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둑길을 걷던 윤이 가건물 중 한 곳으로 쑥 들어갔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서야 그곳이 식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건물 앞에 안주류가 한없이 나열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윤은 일어난 지 한 시간 십 분 만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자리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윤은 만취했고 그녀의 한쪽 어깨를 빌려서야 간신히 걸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윤은 코를 골며 잤고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이튿날 윤이 깨어난 시각은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좁은 집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윤이 자는 동안 그녀는 빨래를 하고 큰방을 제외한 집 안을 청소했다. 잠에서 깬 윤은 침대에 기대앉아 한 시간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런 다음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음식을 배달시켰다. 음식이 도착하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윤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이틀째 술만 마시고 있다는 거 알아?”

“내버려둬. 스트레스를 푸는 중이야.”

“술 마시면 스트레스가 풀려?”

“조금은. 같이 마실래?”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려고?”

“출근 잘 해. 걱정 마.”

먹고 잠만 잤는데도 이틀 사이 윤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유기하는 사람을 그녀는 처음 보았다. 보다 못한 그녀가 주말마다 이러느냐고 물었다.

“아니. 몇 달에 한 번 정도.”

“그 한 번이 왜 하필 지금이야?”

그녀가 따지자 윤은 그 한 번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했다.

“나 때문이야?”

“아니.”

조금 후에 윤은 회사일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사일이 왜?”

“……”

“회사에 무슨 일 있어?”

“기밀사항이야.”

월요일 아침, 윤은 자신의 말대로 정말 출근을 잘 했다. 일요일 적지 않은 술을 마셨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이틀 동안의 때를 씻어내고 말끔해진 얼굴로 출근했다. 초췌했던 얼굴도 밤사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충혈됐던 눈은 총명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까치집을 지었던 머리는 윤기가 흘렀다. 슬리퍼 대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었고, 늘어진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빳빳하게 다림질된 양복을 입었다. 이틀 동안의 노숙자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노숙자에서 직장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데서 오는 것인지, 직장인에서 노숙자의 모습으로 너무나 쉽사리 전락했던 데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 좀 있으면 줘봐.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아프네.”

목을 그러쥐고 캑캑거리는 주인에게 그녀는 물을 가져다주었다. 주인은 물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더니 목을 길게 빼 큰방 작은방을 두리번거렸다.

“요즘은 통 총각이 안 보이네?”

“출장 가서 아직 안 왔어요.”

“그으래? 무슨 놈의 회사가 출장이 이리 길어?”

주인은 의아한 듯 몸을 일으키며 다시 큰방 작은방을 기웃거렸다.

“그러게요. 무슨 놈의 회사가 출장이 이리 긴지…….”

주인이 올라간 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닦는데 문득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의 저녁이었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윤이 들어가더니 그녀가 사용한 수건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세탁기에다 던져 넣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도 윤은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지켜봤다는 걸 알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지금 깨달은 바이지만, 그것은 무언의 항변이었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게 항변이었든 아니든 수건 하나 때문에 집을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살다 보면 문 닫는 습관에서부터 신발 벗어놓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일로 무수하게 싸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었다. 누구나 겪는 일로 집을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윤과 그녀에게는 서로 양보할 의지가 충만했다. 말 한마디만 했으면 그 즉시 상대의 뜻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어.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욕실에서 마루로 나갔다.

 

 

4

 

내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요일 아침,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하얬을 벽지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모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도 보였다. 파리채를 들고 펄쩍 뛰어올라 모기를 잡는 윤을 상상했다. 불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잉여의 몸짓, 만용, 잡담, 바퀴벌레, 파리, 모기를 경멸하는 윤은 아마 모기를 잡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지 않았을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모기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깨어나기 직전까지 그녀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가벼운 입씨름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윤의 팔과 닿았던 감촉이 꿈에서 깨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돌아간다면 설마 부모님이 쫓아내지야 않겠지만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기는 힘들 터였다. 금 간 유리에게는 깨지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못할 노릇이었다.

정말 내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녀는 눈을 떴다.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왜? 고작 십여 일 함께 살았다. 연애는 삼 년을 했다. 삼 년 내내 그녀는 부모님과 부딪혔다. 부모님은 윤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윤의 집은 그냥 가난한 게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것은 윤의 표현이었다. 뭐가 어떻게 가난한지는 말하지 않았다. 윤이 자신의 집에 관해 말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었다. 윤만 봐서는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난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부모님 역시 부자는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조금 덜 가난할 뿐이었다.

정말 떠나기를 원하는 걸까? 차마 말을 못하고 내가 알아서 눈치 채 주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쓸데없는 희망인 줄 알면서도 그녀는 혹시 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의 기대는 곧 여지없이 무너졌다. 안에 있지? 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분명 집주인의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오늘 문, 벽 다 페인트칠 할 거니까 조심해서 다니라고. 특히 계단 오를 때 손으로 벽 짚지 말고. 금방 사람 올 거야.”

주인은 들떠 보였다. 생기가 넘쳤고 힘이 넘쳤다. 그녀는 곧 헐릴 집인데 페인트칠은 왜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야 감정을 잘 받는대. 옆집 뒷집도 다 칠했어. 페인트칠만 해도 새 집처럼 보이잖아. 맞선시장에 딸내미 화장시켜서 내보내는 엄마의 심정이랑 똑같지 뭐.”

그녀는 불쑥 궁금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딸이 있으세요?”

“없어. 아들만 둘이야. 딸 없다고 그 심정 모를까봐?”

“아니에요. 열쇠 드려야 해요?”

주인은 벌써 3층 계단에다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생기가 넘치는 만큼 마음도 급한 모양이었다. 계단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열쇠는 왜?”

“페인트칠……”

“바깥하고 계단 쪽 벽만 할 거야. 설마 세사는 사람들 집까지 보겠어?”

“저기, 수도꼭지가 고장 났는지 며칠 전부터 물이 잘……”

“나 바빠. 나중에 얘기해.”

주인은 3층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멍하니 빈 계단만 쳐다보다 현관문을 닫았다. 며칠 전부터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졸졸거리며 흐르다가 그나마도 나오다 말았다 했다. 수도꼭지 고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배관이 막혔거나 아니면 좀 더 심각한 부분의 고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수도꼭지라고 한 것은 집주인 때문이었다. 큰돈이 들어가는 고장이라면 곧 헐어버릴 집인데 그건 고쳐서 뭐 해, 하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무대야에다 물을 받아놓고 썼다. 주말에는 더 물이 나오지 않았다. 집집마다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역시나 물은 졸졸 흐를 뿐이었다. 그 물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밥을 하고 청소를 해야 했다. 이런 물 사정을 윤에게 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녀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윤의 집이라는 걸 감안하면 알려야 하는데, 현재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또 알릴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인부들이 도착한 듯 바깥이 왁자지껄해졌다. 그들의 목소리가 건물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집주인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가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바깥의 소음이 심장에 와 박히는 걸 느끼며 그녀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동네는 나날이 지저분해지는데 집들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이는데 각자의 집 주위에는 휴지조각 하나 없었다. 인심은 흉흉해지는데 사람들은 부푼 꿈을 주체하지 못했다. 떠도는 소문에 따라 오늘은 환호했다가 내일은 울분에 휩싸였다. 오늘은 모두 친구였다가 내일은 적이었고 다음날은 또 모두 친구가 되었다. 점점 쓰레기가 쌓이는 골목골목마다 흥분과 긴장, 불안이 뒤섞인 묘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 모든 것들과 철저하게 무관한 그녀는 동네에 들어서면 되도록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보지 않는 것은 가능했으나 듣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듣지 않기 위해 집 안에만 들앉아 있어도 바깥의 소리가 다 들렸다. 동네가 지저분해질수록 바깥의 소음도 덩달아 커졌다. 노랫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는 물론이고 집 근처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벽이 점점 얇아지고 있는지 몰랐다. 햇빛에 오징어가 건조되듯 집도 수분을 빼앗기고 말라 쪼그라들고 있는지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인부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녀는 페인트칠하는 일이 끝나지 않는 이상 소음도 줄어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출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핸드폰에 윤의 이름이 떴다. 그녀는 마침 정차해 있던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가 모르는 동네였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 달 만에 듣는 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윤이 어디냐고 물어서 그녀는 몰라,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벨이 울리기에 버스에서 무작정 내렸다고 덧붙였다.

“난 회사야.”

“물론 회사겠지. 알아, 회산 거. 회사 아니면 어디 있겠어.”

“내일부터 출장을 가야 해서 자료 챙기고 있었어.”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출장이야? 이번엔 어디야? 부산? 광주?”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튀어 오르려는 목소리를 억눌러 저음에다 묶어놓았다.

“해외야.”

“해외 어디?”

“기밀이라 알려줄 수가 없어.”

“걸핏하면 기밀……. 솔직하게 말해줘. 지겨우면 지겹다고 말해. 깔끔하게 떠나줄게.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더 비참하니까.”

“회사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뿐이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회사에 직원이 당신뿐이야?”

“직원은 많지만 누구나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금방 후회했지만 먼저 걸지는 않았다. 윤이 다시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이번에 전화를 받으면 좀 더 따뜻하게 대할 작정이었다. 칼날을 세우지 않고 일상적인 대화들, 가령 아파트 꿈에 부푼 집주인에 대한 얘기라든가 동네에 유행하고 있는 페인트칠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이튿날 그녀는 오전 내내 망설이다 결국 정오가 되기 직전에야 윤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상냥한 목소리의 여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 역시 상냥한 목소리로 윤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여직원은 즉각 윤이 출장을 갔다고 말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출장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여직원의 목소리가 꼿꼿해졌다. 꼿꼿한 목소리로 누구시죠? 되물었다. 그녀는 또 머뭇거리다 친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직원이 이번에는 조금 거만한 목소리로, 출장지는 기밀이에요, 하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그녀가 출장지 따위가 무슨 기밀이냐고 따지자 여직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출장지가 기밀이 아니라 윤이 기밀이기 때문에 윤의 출장지 역시 기밀에 속한다고 아나운서 같은 말투로 설명했다. 그녀는 실소했다. 윤이 기밀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그녀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 윤의 회사 동료마저 기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기밀이라는 말은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쓰이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도 윤의 회사 동료도 모두가 다 한통속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발음했다.

“윤과 곧 결혼할 사람이에요. 윤이 어디 있는지 말해줘요.”

“윤의 행선지는 회사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몇 번을 물으셔도 마찬가지예요.”

철벽수비에 막힌 그녀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날, 회사에 사흘 휴가를 낸 그녀는 이튿날부터 집 안에 틀어박혔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며 보냈다. 깨어 있을 때면, 윤의 회사로 직접 찾아가 볼까, 퇴근시간에 맞춰 기다려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너무 구차해서 차마 그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이 큰 만큼 경멸의 나락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 역시 컸다. 윤을 잃고는 살 수 있지만 자신을 잃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윤이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면서 얼마쯤 기운이 났다. 하지만 곧 의심과 불안이 마음을 갉으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여행 같은 것이었다. 전국지도를 펼쳐놓고 지명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우선은 차가 없었고 평일이라 함께 갈 친구가 없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행을 가지 않기 위한 핑계 만들기에 분주했다. 여행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는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집중할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넓지도 않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큰방 창문을 통해 작은방과 부엌이 다 보였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으나 뭘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그녀는 또 반사적으로 윤을 생각했다. 하지만 윤일 리가 없었다. 윤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출장을 떠났다. 그것도 국내도 아닌 해외였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똑똑똑, 소리에 맞춰 그녀의 심장도 똑똑똑, 뛰었다. 할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집주인이 마루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주인은 우울해 보였다. 주인이 말했다.

“이럴 때 남자가 나서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

주인은 언짢아 보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하루 종일 가슴에 담고 다녔던 말을 꺼내놓았다. 말의 대부분은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고, 나머지는 순전히 주인의 불안한 마음에서 태어난 것들이었다. 불안의 중심에는 단연 아파트가 있었다. 옆집 영이엄마는 감정가가 엄청 낮다는 소문을 전했고, 뒷집 춘미엄마는 집값에 비해 아파트 분양가가 너무 높아 몇 억을 더 내놓지 않으면 집도 날리고 아파트도 날린다더라는 소문을 전했다. 세탁소를 하는 윤수아빠는 돈 몇 푼 쥐어주고 주민들 쫓아내자는 정책이라며 목소리를 높인 반면, 정호아빠는 건물이 실평수보다 작게 등재돼 있는데 등기부 기록대로 보상을 하는지 실평수로 하는지 몰라 애를 태웠다. 봉희동에 있어 지난주가 환희의 주간이었다면 이번에는 불안의 주간인 모양이었다.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살이 내린 주인은 끊임없이 한숨과 신세한탄과 봉희동에 떠도는 소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식탁 의자에 앉은 그녀는 추위에 어깨를 떨며 카디건 자락을 여몄다. 집주인이 재개발을 기다리고, 그녀가 윤을 기다리는 동안 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와 있었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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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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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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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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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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