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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5년, 교통사고

  • 작성일 2010-11-16
  • 조회수 3,428


2045년, 교통사고


최제훈

 
 


1


터널 내부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희붐했다. 주황색 나트륨등의 몽롱한 불빛에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이 은은하게 빛났다. 도로에 붓질을 한 것처럼 노란 중앙선을 가로질러 맞은편 터널 출구를 향해 사라져 간 스키드마크. 진초록의 플라타너스와 쪽빛 가을 하늘이 반달 모양으로 잘린 채 맞은편 허공에 걸려 있었다.
허 반장은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최 형사가 다가와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허 반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교통사고란 말이야?”
“예, 시포스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맞은편 차선에서 오던 소렌토를 정면으로 받았어요. 양쪽 운전자 모두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예?”
“낼모레면 집에 가서 손주나 볼 노틀한테 무슨 수사 지휘를 하라는 거야?”
“손주도 없으면서. 저도 연락받고 좀 이상하긴 했는데, 아마 현역 중에 교통사고를 경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마지막 조커 사건도 반장님이 담당했고.”
“조커야?”
“아직은 모릅니다. 시포스 운전자의 신원을 조사 중이에요. 사고 차량은 TMC로 옮겼는데 블루박스까지 걸레가 된 상태라 걔들도 한숨을 쉬던데요.”
허 반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 타이어 자국이 중앙선을 넘어선 지점을 들여다보았다.
“스키드마크를 보니 여기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중앙선을 넘은 후, 정확히 반대편 1차선을 따라 급가속 했어. 너무 깨끗한데.”
“스키…… 뭐요?”
최 형사가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스키드마크. 급제동이나 급출발할 때 타이어가 밀리는 자국. 당시의 주행속도와 핸들 조작을 추정할 수 있지. 사고 조사의 기본이야.”
“그런 거야 센터에 수치로 다 나와 있을 텐데요.”
허 반장은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발음이 폼나잖아, 스키드마크.”
“어쨌든 의도적으로 역주행을 해서 박은 거네요. 블루박스를 뚫는 조커가 나왔다면 꽤나 시끄러워지겠는데요.”
“만일 블루박스 자체의 결함이라면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겠지.”
허 반장과 최 형사는 터널 맞은편 출구의 잘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교통사고라니…… 반장님, 이게 몇 년 만입니까?”


2


남자의 원룸아파트는 깔끔했다. 하늘색 시트를 덮은 싱글침대가 창가에 놓였고 책상에는 스탠드와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장식장 겸 책장에는 두툼한 동물도감과 자연과학 서적들, 소설책 몇 권이 두서없이 꽂혀 있었다. 주방 찬장에는 흰색 코렐 식기 세트가 막 꺼낸 것처럼 크기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단출하게 사는 독신 남자라면 누가 들어와도 그럭저럭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이 곳이 실제 자신의 방이라고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 하민준, 37세, 서울대공원 동물원 육식동물팀 사육사. 3년 전 부인과 이혼한 후 이 곳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부인과는 서로 결혼 생활이 맞지 않아 합의 하에 좋게 헤어졌답니다. 부러운데요.” 최 형사는 수첩을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웃들 얘기로는 조용하고 착실했다고 합니다. 동물원에서도 우수 직원으로 몇 차례 표창까지 받았고. 그런데 최근에 직무 태만이라는 사유로 1개월 정직과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은 상태라고 하네요.”
허 반장은 책장에서 『멸종의 역사』라는 책을 꺼내어 뒤적였다.
“무슨 직무를 태만히 했다는 거야?”
“그게, 호랑이 먹이를 제대로 안 줬답니다.”
“밥을 안 주면 쓰나, 호랑이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조커 혐의는?”
“아무래도 그쪽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 해킹커녕 기계치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전공이나 이력도 무관하고. 차는 세차도 제대로 안하고 다녔다는데…….” 최 형사는 방을 휘둘러보았다. “최소한 레이싱걸 사진이라도 하나 있어야 물고 늘어지죠.”
“이쪽도 깨끗합니다.”
노트북을 살피던 사이버수사대 소속 경장이 의자를 돌리며 말을 받았다.
“센터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적도 없고, 관련 동호회에 가입한 흔적도 없고, 조커로 의심 가는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컴퓨터가 너무 깨끗한데요. 동물들 사진 모아 놓은 폴더 빼고는 하드가 텅텅 비었습니다. 일부러 정리를 한 건지, 혼자 사는 남자가 야동도 하나 없네요.”
“잘 뒤져 봐. 원래 진정한 똘아이는 티가 안 나는 법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 반장도 방의 주인이 조커가 아니라는 것쯤은 직감으로 눈치챘다. 생활공간은 직접 만나는 것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방에 들어설 때부터 위반을 모의하는 불온한 기운 같은 건 감지되지 않았다. 역시 기계 결함 쪽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센터의 아이큐 높고 연봉도 높은 전문 연구원들이 머리 맞대고 원인을 밝혀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난데없이 교통사고가 발생했으니 특별 수사팀을 꾸리는 건 그렇다 치고, 센터가 아닌 수사과 인원을, 그것도 정년이 한 달 남은 자신을 팀장에 앉힌 건 무슨 속셈인지…….
허 반장은 죽은 아들 집의 열쇠를 내주던 하민준의 노모가 떠올랐다. 외형만 빚고 아직 영혼을 불어넣지 않은 듯한 멍한 얼굴, 까만 눈동자가 문장 중간에 불쑥 찍힌 마침표처럼 덩그마니 매달려 있었다. 허 반장에게는 익숙한 눈빛이었다. 사고조사과에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초년병 시절, 불시에 불려 나온 교통사고 사망자 유가족들은 그런 눈빛으로 복도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하염없이 앉아 있곤 했다. 시속 150km로 달려와 정면충돌하는 불행은 그 충격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후 결혼을 앞둔 약혼녀가, 막 대학에 입학한 외동아들이, 시골에서 상경하던 부모님이,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수수께끼에 가까울 터였다. 그 헛헛한 눈빛을 덤덤하게 받아넘길 수 있게 되면서부터, 허 반장은 자신이 아주 오래 살 것 같다는 지루한 예감이 들었다.
“호랑이 밥 한 번 안 줬다고 감봉에 정직이면 너무 심한 거 아냐? 표창까지 받은 직원한테.”
“그렇긴 하죠.”
허 반장은 냉장고를 열어 사이다 캔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따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최 형사, 동물원 가 본 지 오래됐지?”
“예?”
“와이프하고 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솜사탕도 사 먹고, 간 김에 하민준이 최근에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자세히 털어 봐.”
최 형사는 손가락으로 코끝을 갉작거렸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차피 조커가 아니라면 블루박스 복원해서 차량 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텐데.”
허 반장은 사이다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요란하게 트림을 했다.
“궁금하잖아, 죄 없는 호랑이를 왜 굶겼는지.”


3


TMC 중앙통제실. 작은 수영장만 한 전광판이 어스름한 실내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앞의 넓은 홀에 백여 명의 직원들이 단말기 하나씩을 앞에 놓고 앉아 센터의 운영과 관할 통제소 관리 업무로 분주했다. 전광판에는 서울 내외곽의 주간선도로들이 대동맥처럼 퍼져 있었고 보조간선도로와 집산도로, 국지도로들이 사이사이 모세혈관처럼 얽혀 있었다. ‘정체’를 뜻하는 빨간색 흐름은 차량 분산을 통해, ‘한산’을 뜻하는 파란색 흐름은 차량 유입을 통해, 도로들은 끊임없이 보라색으로 수렴되어 갔다. 허 반장은 센터의 전광판을 볼 때마다 보라색 피가 흐르는 거대한 외계 생명체를 떠올렸다.
전광판 오른편에는 아홉 개로 분할된 보다 작은 전광판에 지방 센터와의 차량 유출입 정보가 표시되었다. 아홉 개의 화면 하단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와 영문 이니셜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전광판 왼편으로는 높이 3m 너비 12m에 달하는 슈퍼컴퓨터 ‘제우스 Ⅱ’가 벽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차갑게 번뜩이는 은회색 철갑에 아르고스의 눈처럼 교대로 점멸하는 수십 개의 빨간 램프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단순히 일 잘하는 쇳덩이로 치부하기 어려운 위용이 느껴졌다.
교통사고라…… 허 반장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마지막 조커가 바다로 뛰어든 게 벌써 14년 전이었다. 교통사고는 그에게도 흐리마리하게 지워져 가는 구시대의 불순물이었다.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사람들은 도로 위의 돌발 변수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미 보편화되어 있던 내비게이션에 주변 도로 상황을 파악하는 레이저 스캐너, 수집된 정보를 분석해 차량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인공지능이 결합됨으로써 사람들은 직접 운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목적지만 입력하면 TV를 보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잠을 자는 사이 차량이 경로를 설정하고 알아서 찾아갔다. 이동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음주운전’이나 ‘졸음운전’ 같은 위협적인 단어가 사라졌다.
무인자동차 기술이 상용화되자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발상이 뒤따랐다. 첨단 기술에 의해 움직이는 개별 자동차들을 네트워크로 전부 묶으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이 발상이 현실화되면서 교통의 역사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중앙 통제에 의한 원격제어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이제 모든 차량은 정부의 통제소에 의해 운행되도록 법으로 규정되었다. 경찰청 직속으로 TMC(Traffic Management Center)가 신설되고 ‘제우스 Ⅰ’이 설치되었다. 이 슈퍼컴퓨터는 전체 교통 흐름을 감안하여 개별 차량의 경로, 속도 등 운행의 전반적인 사항을 제어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안전을 오로지 기계에 의탁한 채 도로를 달린다는 사실에 여론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 도로에서 평균 통행속도는 20%이상 증가했고 교통사고는 사라졌다. 길바닥에서 날벼락 같은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초래하던 비극적인 오차를 기계는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전광판을 보며 생각에 잠긴 허 반장에게 정복 차림의 멀쑥한 경장이 다가왔다.
“특별 수사팀에 합류한 이시형 경장입니다. TMC 기술분석팀 선임연구원으로 있습니다.”
거수경례를 하는 섬세하고 하얀 손가락은 경찰이라기보다는 피아니스트를 연상시켰다. 경장은 손에 든 단말기를 내려다보며 바로 설명에 들어갔다.
“데이터에 따르면 HE-1949는 속초로…….”
“사고 차량 말인가?”
“예. 속초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운전자는 그냥 ‘넓은 바다’라고만 목적지를 입력했더군요. 11시 18분에 탑승했고, 사고 지점까지는 설정된 경로를 따라 아무 이상 없이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터널 진입 후 217m 지점에서 급정거를 하며 중앙선을 침범했습니다. 제우스가 즉시 경고 신호를 보내고 경로 복귀를 지시했지만 HE-1949는 이를 무시하고 시속 147km까지 급가속 하던 중 충돌했습니다.”
“블루박스에서는 이상이 나왔나?”
“아직 복원 작업 중입니다. 사실 블루박스에 결함이 있다고 해도 최악의 상황은 주행 중에 멈추는 정도인데, 이번 케이스는 경로를 이탈한 후에도 차량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으니……”
경장은 단말기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해가 안 됩니다. 중앙선을 침범할 때에도, 충돌하는 순간까지도 제우스에 아무런 이상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전송된 기록으로만 보자면 HE-1949는 자신이 극히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다고 인지한 상태에서 충돌한 거죠.”
“기술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블루박스를 해킹해 수동으로 운전하는 게 가능한가?”
경위의 미간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그건 뇌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눈알을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뽑아낸 후에도 앞이 보여야 한다는 거지요.”
“어따, 비유도 살벌하게 드네.”
“현재로선 저희 기술분석팀 연구원을 총동원해도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새로운 해킹 툴을 개발했다면 모를까. 운전자가 관련 분야 전문가였나요?”
“동물원 사육사였어.”
경장은 적이 실망한 표정이었다. 허 반장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골치 아프네. 사람도, 기계도 오류가 없다면 도대체 뭐야?”
“기술적인 부분은 철저히 검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우스가 뚫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경장은 고개를 돌려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선 교통의 신을 바라보았다. 허 반장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은회색 갑옷 속에서 거대한 환풍기가 그르렁거리며 목을 떨었다.
제우스는 4백만 대가 넘는 차량으로부터 운행 정보를 받아 최적의 경로를 설정하고 차량을 원격제어하는 역할을 혼자 도맡아 처리했다. 매 순간 전체 교통량을 계산하여 고르게 분산하는 것은 물론, 개별 차량이 수시로 보내오는 신호를 분석하여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안전하게 운행되도록 지시를 내렸다. TMC의 심장부에 버티고 앉아 서울 내외곽을 운행하는 모든 차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제하는 녀석에게 신들의 우두머리 이름은 결코 과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개 승용차 한 대가 시속 147km의 속도로 달려들어 경이로운 신의 권능에 흠집을 낸 것이다.


4


“직장에서도 똑같은 얘기만 하네요, 조용하고 착실한 친구였다고. 9년간 근무하면서 결근 한 번 하지 않았고, 동료들과도 원만하게 지냈답니다.”
최 형사는 큐에 초크를 칠하며 당구대 위의 공들을 노려보았다.
“사육사 업무라는 게 각자 맡은 동물이 다르다 보니 서로 부딪칠 일은 많지 않은가 봐요. 다들 좋은 사람이라고는 하는데, 그렇게 깊이 아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사내 동호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가끔 술자리에 끼기는 했지만 소주 서너 잔 마시는 정도였답니다. 그래도 동물에 대한 애정만큼은 각별했다는데요. 반장님, 이거 점심 내깁니다. 쿠션 딱 떴어요.”
최 형사는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샷을 날렸지만 당구대를 한 바퀴 돌아온 흰 공은 두 번째 빨간 공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평범한 공일수록 신중하게 쳐야지.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 하는 법이야.”
“사자 아닙니까?”
“사자나 호랑이나.” 허 반장은 큐를 들고 당구대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그 호랑이 박해 사건은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좀 이상합니다. 역시 징계가 과하다 싶었는데, 처음이 아니었답니다.”
최 형사는 자신이 들은 얘기를 자세하게 옮겼다. 동물원에는 네 살짜리 백호(白虎)가 한 마리 있었다. 백호는 상서로운 영물로 대접받고 있지만 자연에서는 열성유전자끼리 만나 태어나는 변종일 뿐이었다. 신체적으로는 다른 호랑이와 차이가 없으나 눈에 잘 띄는 색깔 때문에 사냥이 힘들어 야생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어쨌든 동물원에서는 인기 동물이라 다른 호랑이들과 격리하여 특별 관리를 했다. 녀석의 담당 사육사가 하민준이었다. 그런데 그가 몇 차례 백호의 먹이를 건너뛰는 게 적발되어 주의를 받았다. 동료들은 별도로 관리하다보니 생긴 실수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긴 팀장이 CCTV를 설치한 결과 하민준이 고의로 먹이를 절반 이상 버리는 장면이 찍혔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원장까지 나서서 하민준을 면담했으나 묵묵부답, 결국 중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거기 경비원 하나가 이상한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허 반장은 공을 치려다 말고 최 형사를 보았다.
“며칠 전 야간 순찰을 돌다가 백호가 야외 방사장에 나와 있는 걸 발견했답니다. 밤에는 실내 사육장에 있어야 하는데. 즉시 당직 사육사에게 연락했고 녀석은 다시 자신의 사육장으로 돌려보내졌죠. 관리 소홀로 인한 문책 사유였으나, 사고가 발생한 것도 아니어서 팀장 선에서 적당히 넘어갔답니다. 그런데 그 경비원 말이 백호를 발견할 당시 그 옆에 뭔가 움직이는 물체를 봤다는 거예요. 거리가 멀어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벌거벗은 사람의 형체였답니다. 그자가 겁도 없이 백호에게 시비를 걸듯 콧잔등을 때리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하고, 호랑이는 귀찮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뒤로 웅크리기만 하고. 보름달 아래서 그런 광경이 펼쳐지는데 무슨 괴기영화 같았답니다. 놀란 경비가 손전등을 비추며 소리를 지르자 그는 재빨리 방사장 뒤쪽으로 달아났다는 거예요. 경비원은 자기가 허깨비를 본 것도 같고 괜히 문제가 커질까 봐 입을 다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벌거벗은 자가 죽은 하민준이 같았다는 겁니다.”
허 반장은 큐에 몸을 지탱하고 서서 생각에 잠겼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말이야, 맹수를 검투사와 싸우게 할 때 야성을 자극하기 위해 며칠씩 굶겨서 내보냈지.”
“하민준이 검투사 놀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허 반장은 당구대 위로 허리를 숙이고 자세를 잡았다.
“검투사라면 갑옷이라도 입고 들어갔어야지.”
휴게실 문이 열리며 빳빳한 정복 차림의 이시형 경장이 들어섰다. 그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허 반장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반장님, HE-1949 데이터 복원 결과가 나왔습니다.”
“잠깐, 이것만 치고. 마지막 쿠션이야.”
“안 됩니다.”
경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허 반장은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치면 키스가 납니다. 대회전으로 돌리는 게 더 확실합니다.”
경장은 허 반장에게 길을 알려 주고 정확한 당점과 힘 조절까지 조언해 주었다. 허 반장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의 지시대로 공을 쳤다. 노란 공은 절묘하게 흰 공과 쿠션 사이를 빠져나와 당구대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두 번째 빨간 공을 맞혔다. 최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구는 방정식입니다. 정확히 계산하면 단 하나의 답이 나오죠.”
경장은 무뚝뚝한 수학 교수처럼 말하고 서류철을 내밀었다. 방정식, 허 반장은 중얼거리며 얌전한 학생처럼 서류철을 받았다.
“데이터만 보자면 블루박스의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해킹한 흔적도 없고 자체 방어 시스템도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었습니다. 목적지 이외에는 다른 지시도 입력되지 않았고요. 그런데도 사고를 일으킨 겁니다.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설정된 경로를 벗어나 역주행을 하면서도 제우스에는 계속 정상 신호를 보냈다는 게…….”
“기술적으로 사고 원인을 밝혀내기는 어렵겠군.”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일단 블루박스 부품을 하나씩 분해하여 점검해 보고 있습니다. 희박하지만, 부품의 물리적 결함이 인공지능에 착란 증상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 치면 정신질환 같은 거죠.”
허 반장은 각종 문자와 그래프와 수치가 빽빽하게 나열된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사고 당시에 노래를 틀어 놓고 달렸네.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avens' Door)>. 하민준이는 아무런 지시도 입력하지 않았다며?”
“예. 블루박스가 운전자의 바이오리듬과 심리 상태를 감지해서 스스로 음악을 틀기도 합니다. 운전자의 성향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분위기에 맞게 선곡을 하죠.”
“방정식처럼.”
“노래에 무슨 문제라도…….”
“나도 예전에 좋아하던 노래라서.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했지만 역시 원조인 밥 딜런이 최고지.”
허 반장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경장은 추가 지시를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한 게임 할 텐가? 점심은 우리 최 형사가 살 거고, 저녁에 소주 내기 어때?”
경장은 근무 중인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미 제복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큐를 고르기 시작했다. 최 형사는 입을 꾹 다물고 당구대 위의 공들을 그러모았다.


5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밥 딜런 버전으로.”
계기판에 장착된 블루박스가 푸른 눈을 깜빡였다.
“처음 요청하시는 곡이네요. 반장님 취향에…….”
“쉿!”
허 반장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포크 록의 끈적한 기타 반주 위로 밥 딜런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엄마, 이 배지를 떼어 주세요. 난 더 이상 이걸 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이젠 너무 어두워 앞을 볼 수도 없어요. 나는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허 반장의 눈앞에 노란 중앙선을 무례하게 가로지른 검은 스키드마크가 스쳐갔다.
센터 초창기부터 많은 전사들이 신의 권능에 도전했다. 추월도 과속도 없이 모든 차량이 한 마리 뱀의 비늘처럼 정연하게 뭉쳐 전진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은 자신의 차와 TMC 사이의 원격제어 시스템을 해킹하여 수동으로 운전하며 스릴을 즐겼다. 그들에게는 ‘조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네 개의 문양, 열세 개의 숫자 대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열외의 카드, 악이 좋다는 이유로 악을 행하는 배트맨의 천적. 조커들은 난폭 운전을 일삼으며 크고작은 사고를 일으켰고 센터의 전광판에는 군데군데 붉은 피딱지가 엉겨 붙었다. 전체 차량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해야 하는 센터 입장에서 이 바이러스들은 여간한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방어 수단도 없이 당하는 운전자들이 늘어날수록 시스템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되었다. 센터는 해킹당할 때마다 업그레이드된 방패를 내놓았고, 새로운 창으로 이를 뚫는 조커는 그들 세계에서 영웅으로 군림했다. TMC와 조커 사이의 공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센터는 매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컴퓨터와 자동제어 분야의 우수 인력들을 쓸어 모았다. 시스템에 이중 삼중으로 철책을 둘렀고 해킹에 대한 처벌도 강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커의 저항은 한계에 부딪쳤다.
TMC의 승리가 공인되고 여론이 잠잠해지던 시점에 마지막 조커가 나타났다. 그녀는 센터의 철옹성 같은 방어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던 엘리트 연구원이었다. 자신의 애마 렉서스 SC430을 몰고 동해안 해안도로를 달리던 그녀는, 주행 도중 시스템을 해킹한 후 시속 180km의 속도로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들었다. 미끈한 은빛 스포츠쿠페가 한 마리 갈매기처럼 날았다고,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던 목격자는 진술했다. 그녀가 차와 함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기 때문에 해킹 방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다시 요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고 재야의 조커들은 새로운 여전사의 등장에 흥분했다. 14년 전, 공식적으로 보고된 마지막 교통사고였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연구원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센터는 또다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최후의 방어막을 쳤다. ‘제우스 Ⅱ’의 등장과 함께 모든 차량에 블루박스를 장착한 것이다. 가정용 로봇의 4세대 인공지능을 탑재한 블루박스는 목적지만 센터에 전송하던 이전의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 차량을 스스로 관리하고 제어했다. 운행 정보부터 타이어 공기압, 잠금장치 하나까지 일체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제우스에 전송했고, 목적지 입력 이외에는 운전자보다 제우스의 지시를 우선시하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유형의 대화는 물론 기본적인 정서적 반응과 농담까지 가능했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을 위해 차량 상태를 상시 점검하고 이동 중의 시간을 더욱 유익하게 활용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차량마다 센터의 직원을 한 명씩 파견한 셈이었다. 블루박스는 출발 전에 차량에 이상이 있으면 아예 움직이지 않았고, 주행 중에는 약간의 해킹 시도만 감지해도 안전지대에 차를 세웠다. 물리적 파괴 시도에 대해서는 탑승자를 전기 충격으로 기절시킬 수 있는 은밀한 기능까지 구비했다. 운전자는 센터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블루박스를 장착한 이후 단 한 건의 해킹 사례도 보고되지 않았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막의 효과만은 아니었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 하기 힘든 얘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 언제나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차 안의 비밀 요정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갔다.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버전이 출시되었고, 운전자들은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요정을 직접 디자인하고 키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밀폐된 사적 공간에서 해킹의 스릴보다는 충직한 전자두뇌와 교류를 즐겼다. 조커는 궤멸된 것이 아니라 교화되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엄마, 내 총들을 땅에 내려놔 주세요. 난 더 이상 그들을 쏠 수가 없어요. 넓게 퍼지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나는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2절의 가사를 흥얼거리던 허 반장은 실눈을 떴다. 블루박스도 리듬에 맞춰 파란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자신과 짝지어지는 바람에 과묵하고 어수룩해진 블루박스가 가끔 안쓰럽기도 했다. 어쩔 수 없어. 난 구식이야. 허 반장은 옛날 사고조사과 시절을 떠올렸다. 구식으로 부딪치고, 구식으로 싸우고, 구식으로 조사하던 시절을.


6


센터의 차량 보관소 한구석, 허 반장은 처참하게 찌그러진 은회색 시포스를 마주하고 섰다. 무방비로 집단 린치를 당한 몰골이었다. 운전석 앞유리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렸고 구멍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파열 흔적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했을 보닛과 범퍼는 구겨지고 찢어져 날카로운 예각을 너덜너덜 매달고 있었다. 엔진룸 내부는 엉망으로 짓이겨져 부품들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잘린 호스가 뱉어낸 시커먼 피가 여기저기 말라붙었다. 교통사고가 사라진 후 안전성은 더 이상 차량의 우수성을 가름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자동차 회사들은 연비를 높이기 위해 차체에 강판을 줄이고 강화 플라스틱의 비중을 높여 갔다. 차는 더 적은 연료로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고, 더 연약해졌다.
허 반장은 납작하게 짜부라진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과거 숱하게 보았던 만신창이 사체들의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았다. 육체의 강도는 강판과 강화 플라스틱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가슴팍을 향해 달려드는 핸들, 칼날처럼 절단된 프레임, 운전석으로 밀고 들어오는 쇳덩이 엔진, 적재함에서 튕겨 나온 H빔 철근, 보닛을 타고 덮치는 덤프트럭의 육중한 타이어, 작은 불꽃을 기다리는 휘발유……. 무도한 사신(死神)으로 돌변한 차량은 인간의 존엄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질주의 끝에서 맞닥뜨린 찰나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인간의 몸뚱이와 함께 구겨지고 뒤섞이면서. 생명이란 요소만 배제한다면, 그건 차라리 교감에 가까웠다.
허 반장은 차량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살핀 후 너덜거리는 범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이 녀석뿐이었다. 한때 HE-1949의 육체였으며 한 남자의 관이 되었고 또 다른 남자를 덮친 살인 흉기. 허 반장은 차체에서 튀어나와 가느다란 전선에 매달려 있는 왼쪽 헤드라이트를 제자리에 밀어넣었다. 이봐, 천국의 문을 너무 세게 두드렸어. 허 반장은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닛에 손바닥을 얹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흉하게 일그러진 보닛을 쓰다듬었다. 보닛이 종잇장처럼 접힌 부분에 은회색 페인트 아래로 검은 막이 보였다. 허 반장은 검지손톱으로 은회색 페인트 딱지를 벗겨냈다. 사포로 문지른 듯한 검은 칠이 드러났다. 옷을 갈아입었구나. 허 반장은 무릎을 털며 일어섰다.
 
TMC의 설립은 사망 원인 통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교통사고가 빠져나간 자리를 자살이 빠르게 메웠다. 많은 사람들이 유서도 없이 홀가분하게 죽어 갔다. 환경단체에서는 대기오염에 의한 일조량 부족을 원인으로 지적했고 야당은 빈부격차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며 여당의 정책 실패를 규탄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현대인의 만성화된 우울증을 지적했고 유교 단체에서는 결혼 기피에 의한 가족의 붕괴를 한탄했다. 어느 사회학자는 TV에 나와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것은 자신도 자살의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곧 ‘묻지 마 자살’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졌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이러한 자살 열병은 앞으로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가장 먼저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 쪽은 경찰 강력계였다. 자살과 타살을 구분해 주는 중요한 단서인 유서가 없으니, 자살이라는 확증이 나올 때까지 모든 사망 사건에 대해 부검을 실시하고 수사를 진행해야 했다. 강력계 업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경찰청 주도로 ‘자살은 유서와 함께’ 같은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 농담이 나왔고, 몇몇 간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자살은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을 낮춰 가는 암과 심장질환을 제치고 수년째 한국인 사망 원인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죽고 싶을 때, 죽고 싶은 곳에서,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에 있어서만큼은 불확실성의 문제가 확실히 해소된 셈이었다.
때문에 사고 차량의 이전 소유주 두 명이 모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허 반장은 그리 놀라운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봤던 사람을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시 만나는 정도의 확률. 검은색 시포스의 첫 번째 주인은 지방 국립대학 독문학과 교수였다. 그는 화장실 거울에 독일어로 유서 비슷한 걸 휘갈겨 놓고 송곳으로 심장을 찔렀다. ‘나는 두려움 없이 차갑고 무서운 술잔을 들어 황홀한 죽음을 들이켭니다. 당신이 손수 내어준 잔입니다.’ 이후 차를 구입해 은회색으로 도색한 이는 프로야구 2군 선수였다. 그는 한밤중에 연습장의 배팅케이지 안에 기대앉은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만취 상태였고 피칭머신에서 최고 속도로 뿌려지는 야구공이 그의 얼굴을 계속 짓이기고 있었다.
두 건 모두 확실한 자살이라 파일에는 사실 관계만 간략히 정리되어 있었다. 허 반장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스탠드만 켜놓은 채 자살 현장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았다. 도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다가 선명한 스키드마크만 찍어 놓고 사라진 대학교수와 야구선수를.


7


사모님이 그러시는 것도 당연하죠.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내고 싶겠어요? 조교인 저도 막상 얘기하려니 민망한데. 그렇게 점잖고 인자하시던 분이 어쩌다……. 학생들한테도 인기가 좋았어요.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교수님은 흔치 않거든요. 물론 가정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요. 저도 몇 번 초대받아 갔는데, 사모님하고 딸, 아들, 네 식구가 어찌나 단란하게 보이던지. 꼭 아파트 CF에 나오는 가정 같았어요. 딸은 벌써 대학에 들어갔겠네요, 그 때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참,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예요. 그런 교수님이 왜 스무 살짜리 날라리 신입생한테 홀딱 빠진 건지. 나이를 초월한 사랑,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사랑은 무슨, 아무도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교수님 빼고. 그 백여시조차 그랬다니까요. 자기가 근엄한 괴테를 꼬셔 보겠다고, 몸으로 학점 한번 따 보겠다고, 지 입으로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다니까요. 미친……. 걔 유명했어요. 그런 게 여자 망신 다 시키는 거죠. 그 백여시야 그렇다 치고,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 교수님이었어요. 학교에도 집에도 소문이 쫙 퍼지고 사람들이 공공연히 손가락질해도, 신경도 안 쓰고 걔한테만 매달렸어요. 그렇게 학자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시던 분이. 그 땐 이미 제가 아는 교수님이 아니었죠. 사모님도 어이가 없었는지 화도 안 내시더라고요. 누구나 한 번쯤 실수하게 마련이다, 다 덮어 두겠으니 돌아오라고 했지만, 교수님은 막무가내였어요. 결국 평생 이뤄 놓은 걸 한순간에 다 잃으셨죠. 부인에게 이혼당하고 자식들까지 아버지를 안 보겠다고 하고 학교에서도 권고사직 형태로 파면당하고. 조그만 오피스텔 하나 얻어서 혼자 지내셨어요. 그것도 학교 근처에. 그 여우도 이제 거치적거렸던지, 아니면 보기 안쓰러웠던지 그만 정신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누차 충고했대요. 하 참, 충고라니. 그래도 소용없었어요. 폭주기관차처럼 완전 일방통행이었죠. 그러니 걔도 슬슬 겁이 났죠. 막판에는 전화번호를 몇 번이나 바꾸고 교수님 피해 다니느라 바빴어요. 그러다가 결국……. 거울에 써 놓은 글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평생 괴테를 연구하시더니……. 진짜 베르테르가 되고 싶으셨던가 봐요.
 
참 아까운 녀석이었는데. 공은 빠르지 않았지만 제구가 좋고 배짱이 두둑했어요. 머리도 영리하고. 몸집 불려서 구속 조금만 끌어올리면 대성하겠다 싶었죠. 또 내가 2군에서 가르쳐 보니 애가 워낙에 성실하더라고. 운동밖에 몰라.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집념이 대단했어요. 선배들도 기특하니까 붙잡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 하지, 실력이 쑥쑥 늘었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나, 고졸인데 너무 일찍 1군에 올렸나 봐. 아니, 그런 것도 아닌데. 2년 반 다듬고, 가서도 침착하게 잘했거든요. 첫 해 반 시즌 뛰고 5승에 3점대 방어율 찍었으니. 구단에서는 내심 다음 시즌에 3선발까지도 기대했죠. 그런데 시즌 시작하자마자 그게 온 거라. 블래스 신드롬이라고, 들어 보셨나? 이게 예전에 메이저리그에 블래스란 선수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뭔 블래스더라……. 아무튼 투수가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병이에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멘탈적인 문제라고 추측만 할 뿐 아직 정확한 원인도 몰라요. 팔이 잘못됐으면 수술이라도 하지, 이건 방법이 없어, 방법이. 가끔 신인이 포스트시즌 같은 큰 게임에서 뛰다가 중압감 때문에 그런 경우는 있지만, 걔는 그것도 아니었는데……. 시즌 첫 게임부터 사구에 폭투를 남발했어요. 점점 심해져 포수도 못 잡는 공을 던져대니, 어떡해, 일단 2군으로 다시 내렸죠. 그때까지만 해도 일시적인 슬럼프라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밸런스도 좋았고, 투구 폼에도 문제가 없었고. 난 그냥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체력 관리나 하면서 맘 편히 쉬라고 했죠. 그런데 그게 되나. 자기도 충격이 컸겠지. 슬럼프를 이기는 건 훈련뿐이라고 아주 전보다 더 독하게 하더라고요. 내가 말릴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훈련을 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죠. 구단에서 정신과 상담의까지 붙여 줘도 소용없고.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투수라니, 그걸 어디 쓰겠어. 결국 2년 정도 그러다가 스스로 무너지더라고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더니, 무단이탈로 징계 먹고, 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또 술 처먹고 도망치고……. 결국 구단에서도 포기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그 꼴로 발견된 거예요. 쯧, 아까운 친구였는데.


8


허 반장은 호출을 받고 TMC 소장실로 갔다. 머리가 정수리까지 벗어진 소장은 반갑게 악수를 건네며 그를 소파로 안내했다.
“허 경위, 퇴임식이 내달 말일인가?”
“예.”
날짜까지 미리 챙겨 놓고 말문을 꺼내는 걸 보니 일없이 부른 건 아니지 싶었다.
“그래, 퇴직 후에 계획은?”
“친구하고 조그만 낚싯배 한 척 사서 거문도로 내려갈까 합니다.”
“거문도?”
“예, 거기 경치가 예술이죠. 섬에서 낚시나 하고, 텃밭도 가꾸면서 설렁설렁 지내려고요.”
소장은 좋지, 좋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고조사과 시절 허 반장의 선임자였다. 부서가 폐지되고 TMC가 신설되자 그는 발 빠르게 움직여 센터의 핵심에 자리를 잡았다. 직속 부하인 허 반장이 애매한 위치에서 허둥대며 수사과 경위로 정년을 채우는 동안 그는 탄탄대로를 달려 소장 자리까지 올랐다.
소장은 사고조사과에서 함께 근무하던 시절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그 때는 복잡해도 활력이 있었다는 둥, 말년에 골치 아픈 수사를 맡겨 미안하다는 둥, 난데없이 교통사고가 터지니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는 둥, 의례적인 이야기만 빙빙 돌리다가 불쑥 본론을 던졌다.
“그래, 사건은 어떻게 됐나?”
소장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걸 허 반장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 곧 중간보고서 작성해서 과장님을 통해 올리겠습니다.”
“아니야. 이번 특별 수사팀은 내 직속으로 구성된 것이니 나한테 직접 보고하면 되네. 가능하다면 지금 보고를 받고 싶군, 구두로.”
무슨 꿍꿍이야? 허 반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기로 했다.
“자살을 한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런데 그자가 어떻게 블루박스를 뚫고…….”
“운전자가 아니라…… 그의 승용차가 자살을 한 것 같습니다.”
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걸이의 포도 문양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재미있군. 그건 기계의 결함에 대한 낭만적 표현인가?”
“아뇨, 기계의 감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입니다.”
소장은 허 반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운전자가 시스템을 해킹했다거나 기계가 오류를 일으킨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블루박스가 자발적으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결론밖에 안 나옵니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블루박스가 운전자와의 오랜 교감을 통해 정서적 동조 현상을 일으켰다고 가정한다면.”
허 반장은 사고 차량의 이전 소유주 두 명의 자살과 최근 하민준이 보인 자살 징후에 대해 설명했다. 블루박스의 모태가 된 4세대 인공지능 가정용 로봇의 경우 주인과의 정서적 동조 현상이 종종 보고됐다는 것과, 주인의 감정이나 취향은 물론 버릇과 행동까지 자발적으로 따라했다는 사례도 덧붙였다.
“블루박스는 지속적인 대화를 위한 기본적인 학습과 응용 능력이 있습니다. 자체 방어 개념을 안다면 자체 파괴의 개념도 배울 수 있겠죠.”
“증거가 나왔나?”
“말씀드렸듯이 가정일 뿐입니다. 다만, 블루박스가 사고 당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노래를 틀어 놓고 달렸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하민준이 차에서 한 번도 들었던 적이 없습니다. 과거 데이터를 검색해 본 결과 앞의 두 소유주가 이 노래를 종종 들었더군요. 교수는 에릭 클랩튼, 야구선수는 건즈 앤 로지스 버전으로. 그래도 역시 원조인 밥 딜런 버전이 좋은데.”
“소유주가 바뀌게 되면 관련 자료를 모두 제우스에 전송한 후 하드를 포맷했을 텐데?”
“그러니 이상한 일이죠. 기억을 모두 지웠는데도 자발적으로 그 노래를 다시 틀었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의식 속에 무언가 남아 있었던 게죠.”
“무의식…….”
소장은 애매하게 웃으며 검지로 포도 알갱이를 톡톡 쳤다.
“그러니까, 차량을 통제하도록 설치한 블루박스가 운전자와 교감을 통해 자살 성향을 배웠고, 사는 게 지겹다며 스스로 사고를 내서 죽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결국은, 기계 결함이라는 얘기군.”
허 반장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소장은 창가로 가서 뒷짐을 지고 밖을 내다보았다. 손가락 두 개가 교대로 까딱거렸다. 허 반장은 앞에 놓인 녹차를 홀짝거리며 기다렸다. 소장이 헛기침을 하고 돌아섰다.
“수고했네, 허 경위. 수사는 여기서 종결짓게. 최종보고서는 기술적인 사고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과 운전자가 자살 징후를 보였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작성하게. 동물원에서 있었다는 그 괴상한 사건도 빼놓지 말고. 내일 자네가 간단히 브리핑을 하게. 기자들이 난리야. 위에서도 계속 닦달이고.”
허 반장은 왜 수사팀장으로 자신을 택했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너구리 같으니. 역시, 소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어쩌실 작정입니까?”
“어쩌다니? 명확하게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우리는 조사 결과 그대로 발표하는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언론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이건가요? 14년 전처럼.”
“그래, 언론에서 온갖 추측 기사를 쏟아내겠지. 조커들은 새로운 영웅의 출현에 흥분할 테고. 한동안 시끄럽겠지만 더 이상의 사고가 없다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14년 전처럼. 허 경위, 중요한 건 시스템이야. 소수의 불순분자가 나타나더라도 시스템 자체는 안전하다는 걸 시민들이 계속 믿어야 하네. 이미 죽어버린 한 사람을 활용해서 모든 시민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경찰의 소임 아니겠나.”
“모든 자동차의 불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네 말대로라면 센터에서 기술적 보완을 통해 해결해야지. 블루박스가 운전자와 정서적 동조를 일으키지 않도록.”
“이번에는 다시 기계를 기계답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겠군요.”
“위험한 변수를 통제하는 기술이지. 참, 브리핑 이후에는 인터뷰 요청이 오더라도 나서지 말게. 제풀에 지치면 잠잠해지겠지. 어차피 자네는 연금 받으며 거문도에서 편히 쉬고 있지 않겠나. 낚시도 하고, 텃밭이나 가꾸면서.”
소장은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허 반장은 벽에 붙은 전지 크기의 전광판을 흘끗 쳐다보았다. 중앙통제실 전광판과 똑같은 화면이 축소되어 나오고 있었다. 보라색 피가 흐르는 외계 생명체. 허 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장과 짧게 악수를 나눴다. 그는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말했다.
“나중에 거문도에 한번 내려오십시오. 참돔에 소주나 한잔 대접하죠.”


9


백호는 바위에 태평스럽게 누워 자고 있었다. 네 개의 다리와 꼬리까지 축 늘어뜨린 모습은 벽난로 앞의 호랑이 가죽을 바위에 걸쳐 놓은 것 같았다. 자기는 털가죽이 아니라는 듯 이따금 귀를 쫑긋거려 낮잠을 방해하는 파리를 쫓았다. 백호는 다른 시베리아 호랑이들과 떨어져 소형 방사장 하나를 독채로 사용하고 있었다.
저 멋진 털 때문에 야생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니……. 허 반장은 분홍색 솜사탕을 입에 뜯어 넣으며 생각했다. 만년설처럼 하얀 털을 가로지르는 검은 줄무늬에서는 강인하면서도 유려한 기품이 느껴졌다. 백호가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녀석은 만사가 귀찮은 듯 귀만 쫑긋거릴 뿐이었다. 허 반장은 교교한 보름달 아래서 녀석의 크고 날카로운 발톱이 아이스크림을 푸듯 하민준의 심장을 도려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허 반장은 손가락에 묻은 솜사탕 찌꺼기를 혀로 핥고 전화기를 꺼냈다. 센터의 이시형 경장이었다.
“반장님, HE-1949의 분해 조사 도중에 이상이 발견됐습니다.”
경장은 평소보다 약간 빠른 말투였다.
“내장된 메모리칩 중 하나가 드림캐처라는 하청업체에서 2032년 6월에 생산한 제품입니다. 그런데 당시 드림캐처 공장은 환경 평가에 문제가 있었거든요. 4월부터 6월까지 생산한 메모리칩에 대해 전량 폐기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유출되어 그대로 장착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당시 기록을 면밀히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블루박스의 기능에 영향을 미쳤단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메모리칩 자체에 결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10년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다가 그렇게 교묘한 오작동을 유발한다는 건 좀……. 다만 블루박스가 워낙 섬세한 첨단 부품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속단하긴 힘듭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불순물이 섞여 들어가면 다른 부품에 영향을 미쳐 착란을 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정신질환 같은.”
“예. 그 부분을 조사하자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어쨌든 HE-1949는 조립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할 불량품이었습니다.”
“그렇군. 그 내용은 소장님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게, 구두로. 특별 수사팀은 조금 전에 해체됐으니까.”
허 반장은 어, 어, 하며 말을 잊지 못하는 경장에게 거문도에 한번 놀러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불량품…….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드는 순간, 허 반장은 저도 모르게 뒤로 움찔 물러섰다. 어느 틈에 단잠에서 깨어 철창 앞으로 다가온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은 푸른빛이었다. 그 속에 단단한 씨앗처럼 박힌 까만 눈동자가 그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두툼한 앞발에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길게 삐져나와 있었다. 허 반장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창이 튼튼한지 곁눈질로 확인했다. 앞다리로 상체를 꼿꼿하게 받치고 털을 곤두세운 녀석은 누워 있을 때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 보였다. 녀석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붉은 아가리를 가로지르는 하얗고 긴 송곳니가 드러났다. 철사를 마구 박아 놓은 것 같은 수염이 미세하게 떨렸다. 크르렁, 목을 떠는 소리가 땅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발밑을 울렸다. 허 반장은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훑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백호의 푸른 눈을 마주 노려보는 허 반장의 눈에도 묘한 열기가 번들거렸다. 녀석이 금방이라도 바위를 박차고 뛰어올라 철창을 훌쩍 넘어올 것 같았다. 앞발로 자신을 찍어 누르고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아넣는 상상에 허 반장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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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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