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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롭까

  • 작성일 2011-01-26
  • 조회수 571

 

까롭까 коробка, 러시아어. ‘상자’라는 뜻이다

- 수로2

 

이은선

 

 
 

 



배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인간들이 나에게 하는 거수 경례였다. 홉뜬 두 눈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서둘러 이마 위에 붙여 놓은 오른팔들. 내 속에 대령의 팔뚝을 던지던 얼굴이 보였다. 뚝뚝 끊어 놓은 대령의 내장을 모아서 팔뚝 위에 얹어 두던 손들도 있었다.

갑판의 난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간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갑판 여기저기 고여 있는 대령의 피에 신발들이 찌걱대는 소리, 혀 꼬인 채 부르는 노랫소리, 술이 엎질러지는 소리들이 모두 배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갑판 한쪽에 가만히 몸을 붙이고 그것들이 하늘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처 따라 오르지 못한 소리들이, 소리 없이 내 쪽으로 밀려왔다.

배에 저장된 보드카를 모조리 꺼내다 마신 인간들이 흰자위를 번뜩이며 피범벅이 된 대령의 몸통을 발로 짓이겼다. 누군가 대령의 머리 위로 고꾸라졌고, 얇은 칼을 쥐고 있던 요리사는 피와 육즙이 뚝뚝 흐르는 엉덩이 살을 잘게 저며 배 위를 맴돌던 갈매기 떼에게 던져주었다. 살점을 문 갈매기 부리 위로 다른 부리들이 날아들었다. 먹이를 뺏긴 갈매기 울음과 깃털 서너 개가 갑판 위로 내려앉았다. 갈매기 똥이 녹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갑판 위에 놓인 대령의 의자에 걸터앉아 보드카를 마시며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흰 손이 다가와 한 팔로 나를 붙안았다. 요리사가 얼른 흰 손의 배 위에 내 몸을 얹어 주었다. 배 위의 모든 눈이 나와 흰 손을 주시했다.

흰 손이 걸음을 멈춘 곳은 배의 난간이었다. 잔잔한 물살이 배를 떠밀어 가는 중이었다. 찢어진 돛대 천이 물에 닿을 듯 늘어지며 바람을 탔다. 천 끝에도 대령의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흰 손이 움직이자 내 속에 담겨 있던 대령의 몸이 쿨렁거려 피와 시즙이 흰 손의 바지 위로 흘러내렸다. 나를 향해 장엄하게 서 있던 인간들이 오른손을 일제히 이마 위에 올렸다. 배 위의 모든 것이 하나 둘 허공으로 둥실, 두엉실 떠올랐다. 내가, 푹… 떨어, 졌… 다.

인간들은 내가 그들이 탄 배에서 아주 멀어질 때까지도 이마 위에 붙인 손을 떼지 않았다. 커다란 배가 저 멀리서 검은 점이 되고, 기다란 수평선이 끝내 그 점을 삼켜 버릴 때까지 나도 다른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는 달리 바다의 물살이 무척 거칠었다. 끊임없이 다가드는 파도 탓에 내 속에서 이리저리 물살을 따라 뭉쳐 다니던 부푼 내장과 대령의 팔뚝이 뒤집어졌다. 수평선의 검은 점이 하는 경례에 하늘을 향해 일갈하는 쉬엇.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떠밀어 가는 것이 파도인 줄로만 알았다.

소라 두 마리와 작은 피뢰침처럼 반짝이는 은갈치 한 마리, 뾰족한 주둥이로 내 몸을 샅샅이 훑고 있는 학꽁치 셋. 지금 내 밑바닥에 달라붙은 물것들이었다. 곧이어 거대한 몸을 활짝 편 문어 한 마리도 가세했다. 대령의 팔과 내장을 빨아들이려는 흡반의 기세에 내 몸 전체가 다 딸려 들어갈 지경이었다. 나는 제대로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물것들의 아귀다툼에 휘말렸다.

출러덩. 몸이 뒤집어지려다 마주오던 파도에 부딪쳐 간신히 바로 섰다. 나는 막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파도에 기대 한쪽으로 쏠린 내 속의 것들을 바로잡으려다 뒤집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내 밑에 붙어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수면 위로 솟구쳤다. 그 바람에 대령의 팔뚝이 물속으로 떨어졌고, 뒤늦게 쏜 화살같이 헤엄쳐 온 학꽁치 한 마리가 막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내장 속에 처박혔다. 물것들이 떨어진 팔뚝을 향해 돌진했다. 내장 속에서 맹렬히 제 살길을 찾고 있는 학꽁치의 몸부림에 죽은 내장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다시 파도가 몰려와 내 몸을 뒤집어 놓았다.

파도 따라 흔들리며 이제나 저제나 때를 노리던 문어가 내장을 욱여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 삼켜지지 않은 내장 끄트머리가 물살을 따라 너풀너풀 흘러갔다. 그것을 따라 아득히 멀어지는 물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주둥이 바깥으로 학꽁치 부리가 비죽 솟아나온 문어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문어의 땡땡한 두 눈과 날카로운 학꽁치 부리가 나를 응시했다.

멀리 수평선을 뚫고 막 사라진 검은 점의 함성이 들려왔다. 대함 경례. 배 위의 인간들이 대령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였다. 콰르르릉, 부아앙! 먼 듯 가까운 인사말들이 수면 위로 유유히 흘러왔다.

그제야 나는 잤다.

 

한껏 부풀어 오른 목화송이가 새하얗게 밭을 밝히는 밤이었다. 무심결에 목화 숲을 파고든 바람이 한동안 그 곳에 머물다 뭉실해진 몸을 이끌고 바다 쪽으로 훌렁훌렁 날아갔다. 목화 숲에서는 바람도 목화를 닮아 날아간 자리마저 뭉근했다. 바람을 맞은 곳에서는 파도가 일렁이며 먼 바다를 향해 긴 숨을 내뱉었다. 여기는 바다와 목화밭 사이, 목화가 만든 하얀 지평선과 늘 해와 달을 삼키는 둥근 수평선이 있는 동네, 무이낙.

만개한 목화 봉오리들이 간신히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나무 위에 달려 있던 시간, 낮에 따놓은 목화 더미 위에서 한 소녀가 피를 흘렸다. 피에 눅진 목화솜과 젖은 사타구니를 어찌할 바 몰라 하던 소녀는 목화송이에서 솜을 떼어내 다리 사이를 닦았다. 너무 힘을 준 까닭에 솜이 지나간 자리마다 벌건 발진이 일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붉은 줄 여러 개가 소녀의 허벅지에 남았다. 목화 씨였다. 보드랍고 하얀 솜 틈에 검고 단단한 씨가 숨어 있었다. 소녀는 눈물 때문에 사타구니가 젖어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별일 아니라고만 여기고 싶었다. 소녀가 아직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나무의 목화송이를 헤집어 씨를 꺼냈다. 목화 껍질 부스러기가 소녀의 몸으로 후드득 후드득 떨어졌다. 딱, 따각. 소녀가 씨 두 알을 입에 넣고 힘껏 씹었지만 입속이 따갑고 혀가 아려 금방 뱉어냈다. 혀끝에 젖은 나무 맛이 남았다.

‘괘, 괘괜찮… 나무, 바다, 목…화. 이, 이거… 아냐, 아니야!’

소녀의 마음은 서둘러 괜찮아지는 말들을 생각해 내느라 애가 탔다. 그러나 소녀의 손은 붉게 젖은 솜을 목화 상자 속에 재빨리 파묻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꽤 많이 젖었다. 소녀는 얼른 마른 목화송이로 그것을 덮어 두었다. 감쪽같지는 않지만 누구라도 구별할 수가 없을 목화 상자였다. 딱히 그 모양새를 기억하는 이도 없을뿐더러 이 밭고랑을 넘어가면 저런 상자는 수십, 수백 개도 더 넘게 쌓여 있으니까.

상자 더미 뒤에서 말없이 소녀를 지켜보던 흰 손이 달빛을 등지고 섰다. 대령의 일이 끝나면 으레 흰 손도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곤 했지만 오늘은 대령이 돌아간 것도, 달이 이미 중천인 것도 알지 못했다. 소녀가 몸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자꾸 부옇게 희어지는 두 눈만 비비고 서 있었다. 흰 손은 대령이 소녀와의 일을 마치는 동안에도 그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써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목화더미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자꾸 눈을 감았다 뜨고, 감았다가 실눈 뜨기를 반복했다. 그는 두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다 나중에는 계란처럼 둥글게 말아 제 입 속에 넣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대령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흰 손. 어디로 간 거지? 움직일 때마다 발에 걸리는 상자들을 서둘러 넘고 또 넘은 흰 손이 황급히 목화밭을 벗어났다.

탱탱하게 몸이 부푼 목화가 가쁜 숨을 참아내느라 상자 속에서 벌겋게 핏발이 선 밤이었다. 소녀가 열심히 묻어 둔 젖은 솜들이 상자 바깥으로 비죽이 솟아나와 달빛에 몸을 말리던 더운 밤이었다.

 

바다가 공기를 들이마시자 물속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위로 솟았다 다시 내려앉으며 옆으로 한두 걸음씩 옮겨갔다. 너울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뻘에 박힌 지 어느덧 닷새가 지났다. 은은한 달빛과 쨍한 햇빛의 교차에도 물것들은 아랑곳없이 내 주위를 맴돌다 유유히 제 갈 길을 갔다.

흰 손이 갑판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선원들과 흰 손, 바다와 갈매기들을 넌지시 내려다보는 대령. 흰 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령이 옆에 놓아 둔 보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더운 나라에 사는 동물의 뼈로 만들었다는 자그마한 것이었다. 다시 눈을 돌리니 무이낙 항구의 선착장이었다. 선원 두엇이 나를 맞들고 수백 개의 상자가 선적되어 있는 큰 배에 막 올라타고 있었다. 다른 상자들 위로 올라가다 몇 번이나 떨어지는 바람에 내 몸 한 귀퉁이를 조이고 있던 못이 툭 튀어나왔다. 다시 몸이 잘 추슬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모조리 튀어나왔다. 나를 옮기던 인간들의 발이 꼬여 일어난 일이었다. 용상어와 바다장어, 학꽁치 뱃속에 숨기고 있던 콩만 한 보석들을 담아 둔 주머니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를 어쩌나. 난감해할 새도 없이 어느새 나는 대령의 집 앞에 가 있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던 대령의 집이었다. 나는 온몸의 잔가시들을 바짝 세우고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집사가 나와서 나를 받아 안고 들어갔다. 집 안을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항구 한쪽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비를 쫄딱 맞은 목화상자로 되돌아왔다. 비에 푹신 젖어 늘어질 대로 늘어진 목화송이들을 떠받치느라 온몸이 삐걱거렸다.

가만, 가만히 눈을 떴다 감았다 했을 뿐인데 수많은 일이 내 몸을 훑어갔다. 맨 처음 가라앉았던 곳에서는 이미 까마득하게 멀어진 다음이었다. 내 몸이 긁어 놓은 모래 뻘 위의 가느다란 길이 물살에 흔적 없이 지워졌다. 아무리 위를 올려다보아도 물 바깥과 내가 있는 곳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무엇인가 내 몸을 지그시 감싸며 온몸을 스사삭 스사삭 쓸어내렸다. 자잘한 치어 떼였다. 내 속에 들어와 나갈 곳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을 위해 물살을 따라 몸을 살짝 들어 주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내 속에서 갈 길 몰라 하던 어린것들이 그 틈으로 모두 빨려 나갔다.

조타실의 불이 꺼졌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다 대령이 어젯밤에 미처 닫아 두지 못한 내 뚜껑에 발이 걸렸다. 또 다른 그림자가 조타실 문 앞으로 다가왔다. 잔뜩 어깨를 움츠린 작은 그림자는 대령의 열다섯 번째 아이를 낳은 나르샤였다. 그 때 나는 대령의 팔뚝만 한 네 마리의 용상어 뱃속에 총천연색 보석과 두툼한 외국 돈다발을 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작은 손전등으로 조심스럽게 내 속을 비추었다. ‘누군가’가 잘 벼린 칼로 용상어 뱃가죽을 도려내었다. 얼어 있던 얇은 가죽이 썩썩 잘려 나갔다. 간혹 불 꺼진 조타실 안을 어슬렁어슬렁 헤엄치기도 하던 녀석이었다. ‘누군가’가 녀석의 뱃속에서 꺼낸 주머니 안에는 새파랗게 빛나는 돌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르샤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나르샤가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조타실의 불이 들어왔다.

나르샤의 목을 힘껏 비틀어 놓은 대령이 흰 손이 가지고 있던 칼을 뺏어 ‘누군가’의 손목을 뎅겅 잘라 버렸다. 도망치지도, 떨어진 제 손목을 줍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 신음하던 ‘누군가’의 목덜미에 이번에는 흰 손이 칼을 꽂았다. 대령은 ‘누군가’를 죽일 마음은 없었다는 듯 흰 손을 다그쳤다. 흰 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구의 주검을 조타실 구석에 몰아 두었다. ‘누군가’가 나르샤의 몸을 안을 때, 나는 문 바깥에 흰 손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흰 손이 왔으므로 곧 대령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도.

흰 손이 조타실의 소란을 수습하고 나와 다른 상자들을 살피며 냉동고의 냉각 온도를 조절하는 사이에 ‘누군가’의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대령을 한 번 돌아본 흰 손이 조용히 ‘누군가’의 목덜미를 밟았다. ‘누군가’의 목에 꽂혀 있던 칼이 살과 뼈 사이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젯밤 대령의 방에 ‘누군가’가 들어갈 때도 문을 열어 주었던 흰 손이었다. ‘누군가’가 한참이 지나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자 방문 앞을 서성대다가 조타실에 들어와 나에게 등을 기대 앉아 있던 흰 손이었다.

대령이 조타실을 나가고 흰 손이 문을 닫아 버리자 다시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다. 막 몸을 빠져나온 나르샤와 ‘누군가’의 혼이 조타실 안을 서성거렸다. ‘누군가’는 죽어서도 소심했다. 나르샤가 ‘누군가’를 힐난하는 얼굴로 입을 벌렸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시린 바람이 쇡, 쇡 뿜어져 나왔다. 상자 안의 용상어들이 슬며시 빠져나와 어두운 조타실 안을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르샤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나르샤가 두 팔을 제 가슴 쪽으로 오므렸다. 나르샤의 가슴팍에서 파란 돌이 반짝거렸다. 그 빛을 따라 용상어들이 몰려들었다.

조타실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나는 얼른 뻘 속에 몸을 묻었다.

검은 뻘이 순식간에 조타실 곳곳을 메웠다.

 

빈 목화 나무 사이로 찬바람이 쉴 새 없이 지나던 날이었다. 빈 나무는 바람을 타고 우는데, 소녀의 아이는 울지 않았다. 목화밭에서 돌아온 지 여덟 달 만에 소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젖을 물려도,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가 훨씬 지나도 아이가 울지 않았다. 아이의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붉은 반점이 돋아 있었다. 제 팔뚝보다도 작은 아이를 안고 소녀가 울었다. 젖이 분 가슴이 덜덜 떨리도록, 울지도 못하는 아이 대신 그녀가 울었다.

대령의 코를 닮은 아이였다. 마을 안에 대령을 닮은 아이들이 어느덧 스무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십여 호가 사는 무이낙에 몇몇 처녀들이 대령의 아이를 낳고 옆 마을과 먼 항구로 시집을 갔다. 처녀가 아이를 가져도 아비를 따져 묻지 않았다. 처녀들의 아이는 암묵적으로 모두 대령의 아이여야만 했다. 아이를 낳으면 목화밭 한 뙈기가 주어졌다. 먹고살 만해도, 살비듬 버석거리게 가난해도 목화밭 꼭 한 뙈기였다. 아이는 대령의 집 집사가 데려갔다. 무이낙을 비운 대령 대신 대령의 큰아들인 집사가 마을 일을 진두지휘하던 참이었다. 대령의 아이가 태어나면 몇 푼의 돈과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 몇 채를 가져다주는 것도 나서서 챙겼다. 집사는 되도록 평등하게 목화밭을 나눠주려 애썼지만 받은 사람들의 입에는 늘 불만의 말들이 한 움큼씩 물려 있었다.

소녀의 집에도 목화 이불을 담은 상자와 얼마간의 돈이 돌아왔다. 아이를 데려가려고 온 집사는 젖을 물리고 앉아 있는 소녀, 보를라를 바라보았다. 아예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와 보를라의 세간에 대해 이왈 저왈 참견을 하던 집사가 그녀의 맥없는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두 손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곱고, 고와… 곱다. 움찔한 보를라가 아이를 안은 채 앉은걸음으로 이불을 담아 둔 상자 뒤쪽으로 물러났다. 집사가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때 맥없이 어미에게 안겨 있던 아이가 눈을 뜨려다 힘이 빠진 듯 다시 감았다. 집사는 보를라를 쳐다보던 눈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츠, 쯧.

집사가 손바닥만 한 은궤 하나를 이불 위에 던졌다. 그가 돌아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보를라가 아이를 내려놓고 상자 뒤에서 무릎걸음으로 빠져나와 은궤를 목화 이불 상자 맨 밑에 감춰 두었다.

 

대령이 돌아왔다. 배에 싣고 갔던 상자에 금과 도자기, 타지의 먹을거리들과 마을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공산품들을 가득 담아왔다. 잔잔했던 항구가 새로운 활기에 들썩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난전이 벌어지고, 멀리 떨어진 마을의 사람들까지 무이낙을 찾아왔다. 대령을 닮은 크고 작은 아이들이 항구에 나와 갑판 위의 대령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보를라도 아이를 담요에 말아 안고 항구로 왔다. 대령은 보를라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를 힐끔, 일별했을 뿐이었다. 뒤돌아서던 대령이 다시 한 번 보를라가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대령이 흰 손을 향해 손짓을 했다. 움찔한 흰 손이 보를라 뒤쪽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대령이 눈을 크게 떴다. 아예 고개를 숙여 버린 흰 손 대신 여러 가지 장부를 들고 서 있던 집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에 등불을 내다 놓거나 담벼락에 촛불을 밝혀 오래간만에 돌아온 대령과 선원들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마을 꼭대기에 있는 대령의 집에 많은 사람이 몰려와 밤늦게까지 놀다 돌아갔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노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집사가 보를라를 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손님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보를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몰래 집을 빠져나갈 틈도 많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보를라의 분 젖 위로 대령의 두툼한 입술이 내리꽂혔다. 보드카에 절어 있던 대령은 목이 말라 자꾸만 보를라의 젖을 빨다 핥다 주무르며 밤새 노래를 불렀다.

그 밤 내내 흰 손이 배의 상자들을 모두 대령의 창고에 옮겨 두었다. 마지막으로 대령이 늘 가까이하던 보석 상자를 품에 안은 흰 손이 대령의 집으로 향했다. 잔치 끝의 너저분한 고요만이 집 안으로 들어선 흰 손을 맞이했다. 막 문을 열려던 흰 손의 귀에 대령의 웃음소리가 말려들었다. 딱히 어디로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곳에 왜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흰 손이 밤새 대령의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실컷 놀다 취해 잠든 대령의 손에서 저 혼자 타다 만 담뱃재가 부스스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집사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흰 손의 손등에 찍혀 있던 물고기 문신이 흩뜨려졌다. 사정을 두지 않고 무자비하게 염산을 뿌려댄 까닭에 문신의 문양이 뭉개지고, 살점이 녹아 흘렀다. 일을 마친 수하들이 ‘손을 자르지 않는 건 대령의 크나큰 선처’라고 떠들며 저희들끼리 짓까불다 돌아갔다. 방 한쪽에 쌓아 둔 상자에 등을 기댄 흰 손이 흘러내린 살점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피와 진물이 흐르는 손을 어쩌지도 못한 채, 아이처럼 울었다.

 

땅이 운다. 물속의 모든 것들이 서서히 내려앉고, 떠오르고, 가라앉는다. 출렁이는 느낌들이 천천히 지워진다. 속을 비워낸 그 흔적마저 씻겨 나간 내 안의 텅 빔. 다시 눈을 뜨면 내가 놓여 있는 곳과, 내가 보아야 하는 것들이 모두 휩쓸려 버리기를. 내 앞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나마저…… 사라지기를. 빈속에 울렁이는 내 몸이 물속, 뻘의 그 어둡고 깊은 데까지 꺼져 주기를. 눈가 귀가 완전히 멀어 버리기를.

차라리.


어느덧 목화 수확을 앞둔 가을의 초입이었다. 대령이 마을 안의 목화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자잘하게 목화를 심어 둔 텃밭이나, 관상용 가로수처럼 줄잡아 심어 둔 곳은 제외하더라도 마을 안의 밭은 어림잡아 스무 군데가 넘었다. 목화를 사려고 이국의 배들까지 무이낙에 찾아왔고, 그 곳에서 생산되는 목화의 질이 다른 곳보다 뛰어나다는 말도 널리 퍼져 나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목화의 질감에 영향을 준다는 말도 생겨났다. 급기야 대령은 마을을 가로질러 바다로 흘러드는 강의 물줄기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목화를 따던 손들이 마을의 수로를 바꾸는 공사에 투입되었다. 조용했던 마을이 하늘에서 뻗어내려 온 거대한 손에 의해 부잡스럽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목화를 심어댄 까닭에 밭과 밭 사이의 경계가 없어지고, 집과 집 사이의 자투리땅도 남아나질 않았다. 마을 전체가 한 덩이의 목화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거대한 솜뭉치 같은 마을을 둘러보던 대령은 한껏 부풀어 오른 제 배를 껴안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사십오 년 전, 맨손으로 밭과 마을을 일구었던 보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여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 더불어 그가 여기저기 뿌려 놓은 아이들의 일생까지도. 대령의 뒤를 따르며 달콤한 솜뭉치같이 부드러운 말을 내뿜고 있는 집사의 말이 대령의 마음을 더욱 높이 띄워 주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비의 귀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안 그래도 매일 밤 소녀들 사이에서 무리를 하고 있던 탓에 기력이 점점 쇠해지고 있는 대령이었다. 집사가 가져다준 몸에 좋은 것들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전 같지 않은 건강이 조금씩 신경이 쓰이던 터였다. 하지만 대령은 마을을 둘러볼 때마다 신이 났다. 목화솜을 쑤셔 넣은 듯이 눈앞이 부옇게 변해 가도 그쯤이야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더 신나게, 더 많이, 더 더, 더더더, 더, 더! 목화진액 같은 대령의 정액이 찔끔 찔끔 새어나와 그 이듬해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집사는 더 이상 아이들을 거두지 않았다.

목화 농사에 열 일 제치고 달려든 사람들은 목화밭이 무섭게 늘어남과 동시에 바다가 점점 마을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밭의 면적을 늘리기에 정신이 팔려 누구도 바다를 신경 쓰지 않았다. 새롭게 밭을 개간하면 대령의 집에서는 영롱한 빛의 보석과 얼마간의 돈을 보내왔다. 사람들은 더 힘을 내었다. 마을의 새로운 활기가 바다의 수평선을 가늠하던 눈들마저 가려 버렸다. 멀든 가깝든, 어쨌거나 바다는 늘 거기 있는 것이었으므로. 바람의 방향을 따라 배의 동선을 살펴보던 등대지기가 이상한 느낌에 집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곧 함구령이 떨어졌다. 집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있으면 된다고 했다. 집사가 보내온 작은 상자 안의 보석들이 등대지기가 마음을 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풍작이 된 목화밭에서 돌아올 줄 모르던 대령은 더욱 신나게 밭 개간을 몰아붙였다. 바다로 나가려던 어부들도 목화밭으로 돌려보냈다. 크고 작은 목화 배들이 먼 항구로 떠날 때마다 대령은 아이를 낳았던 처녀들을 함께 태워 보냈다. 먼 항구에서 돌아온 배가 처녀들을 맞은 곳에서 보낸 상자들을 무이낙 선착장에 부려 놓았다. 집사의 명령을 받은 대령의 아이들이 그것들을 대령의 창고에 쟁여 두었다. 하지만 선물들이 쌓여 갈수록, 날이 지날수록 대령의 눈이 침침해졌다. 눈 속에 쉴 새 없이 부유물들이 날아드는 듯한 환영과 백태가 끼어 모든 것이 희부윰하게 보이는 증상이 점점 심해진 탓에 대령은 자주 넘어졌다.

자신의 몸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대령이 앓아누웠다. 대령이 잠든 사이에 보를라가 찾아왔다. 집사에게 아이의 약과 돈을 부탁하러 온 길이었다. 약 사발을 들고 가는 집사를 따라 보를라가 대령의 방에 들어섰다. 대령의 머리맡에 약을 놓고 뒤돌아선 집사가 보를라에게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보를라는 잠든 대령의 얼굴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런 얼굴이었구나……. 보를라가 한 손으로 대령의 얼굴을 짚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다시 아이 쪽으로 손을 옮겼다. 대령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눈곱이 몇 겹이나 덕지덕지 들러붙은 늙은 얼굴과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이를, 두 돌이 가까운데도 아직 눈도 한 번 똘망똘망하게 떠 본 적 없는 아이를 잠든 아비 곁에 놓아두었다. 보를라는 제 아이에게 하듯, 아비의 얼굴을 혀로 쓸어 주기 시작했다.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과 눈곱이 끼어 있는 눈두덩을 아주 오랫동안 핥아 주었다. 대령이 눈을 떴다. 말간 얼굴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곱고, 곱다. 보를라의 혀가 막 감기려는 대령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충혈 되고 백태가 낀 눈알 위에 촉촉한 혀를 살포시 얹었다. 대령이 보를라의 몸을 안아 제 배 위에 올렸다. 보를라의 혀뿌리에서는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그 때 아이가 어미를 찾아 뒤척이기 시작했다. 보를라가 서둘러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대령은 한결 맑아진 눈으로 방 안의 사물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매일 밤과 낮, 엄청난 양의 강물이 목화밭으로 흘러들었고, 그에 따라 내륙 해안인 그들의 ‘바다’가 조금씩 해변을 떠나고 있었다. 그 ‘강물’로 자란 수확물이 배에서 하역된 상자들을 채우고 남아 마을 창고에 쌓여 갔다. 상자 위에 흰 솜뭉치를 얹고 또 얹은 까닭에 목화솜이 상자 바깥으로 거품처럼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타실을 나간 흰 손이 제대로 지그려 두지 않은 탓에 문이 다시 열렸다. 한 발 늦게 나갔지만 대령보다 먼저 방문 앞에 도착한 흰 손이 숨을 헐떡이며 문고리를 잡는 게 보였다. 대령이 방으로 들어가고, 흰 손이 그 뒤를 따르며 문을 닫았다. 철그덕.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밤새 조타실까지 흘러오는 흰 손과 대령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죽은 용상어들이 소리 나는 쪽으로 헤엄쳐 갔다가 계단을 통해 인간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서둘러 조타실로 돌아왔다. 제가 누웠던 자리를 찾지 못한 용상어 세 마리가 내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흰 손의 웃음소리가 끝내 울음으로 변할 때까지도 나는 가만히 귀를 열어 두었다.

그 흰 손이, 대령이 다니는 길목 곳곳을 한 발 먼저 달려가 문을 열어 주곤 하던 흰 손이 여기 있, 다.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뻘 속에 반쯤 잠긴 몸을 더 이상 빼낼 생각도, 땅 속으로 더 깊이 꺼져 버리고 싶은 마음도 무시한 채 망연히 흰 손을 바라보았다. 흰 손의 얼굴 위로 대령의 얼굴이 겹쳐졌다. 다시 눈을 돌리니 ‘누군가’가 막 대령의 얼굴 속에 들어앉는 중이었다. 거대한 물보라가 내 앞에 우뚝 멈춘 듯 서 있었다. 흰 손과 대령의 얼굴이, 막 제 몸을 빠져나오던 얼벌벌한 표정의 ‘누군가’의 얼굴과 하나가 되었다. 물보라 속의 소용돌이가 그렇게 그들을 섞어 두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섯 조각으로 나뉜 얼굴들이 물보라 한가운데 서 있는 대령의 팔뚝에 손가락처럼 들러붙었다.

물것들과 흰 손, 대령과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 있는 물기둥이 물속의 압력을 뚫고 위로 치솟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무게를 느껴 본 적이 없는 나무처럼, 내가 지금의 나이기 전보다 더 오래된, 물을 빨아올리던 생생한 뿌리의 기억으로 힘껏 물기둥 위로 솟구쳤다.

 

밤새 술에 취해 소녀들 사이를 오가던 대령이 방문 앞에 섰다. 뒤따르던 집사는 장부를 손에 쥔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령이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는 다른 곳으로 묵묵히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이 막 흐르려던 그 때 방문이 화들짝 열렸다. 대령의 열여덟 번째 아들이었다. 어느새 걸음마를 시작한 녀석이 함부로 아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아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령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집사가 손을 뻗어 방문을 닫았다. 힘껏 숨을 참고 눈에 힘을 주고 있던 대령이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 손을 사용해 문을 열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최근에도, 몇 년 전에도,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을 연 기억이 없었다. 늘 누군가가 제 곁에 있었으므로. 물끄러미 방 한쪽에 쌓인 보물 상자들을 쳐다보던 대령은 그 상자들을 날라 주던 흰 것을 생각했다. 희디, 희고, 희었던 그 손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쪽 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상자 위로 하얀 손가락들이 어른거렸다. 눈이 침침해서 그런 건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상자 몇 개가 비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집사가 다 알아서 관리를 해 두었을 테니까.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방문 밖을 기다, 걷다 하던 열여덟 번째 아들이 다른 문 앞으로 기어갔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이가 방문 손잡이를 두 팔로 안았다. 비뚜름히 열려 있던 문이 앞으로 확 쏠리면서 아이가 방 안쪽으로 고꾸라졌다. 등대지기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집사가 깜짝 놀라 곁에 있는 상자 하나를 집어던졌다. 동물의 뼈로 만들었다던 작고 단단한 상자였다. 그와 동시에 등대지기가 재빨리 들고 있던 장부 몇 개를 옆에 놓인 큰 상자에 담았다. 아이는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집사가 다가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의 머리가 이렇게 말랑했나? 고작 저 작은 상자에……. 집사는 서둘러 아이를 이불에 둘둘 말아 빈 상자 안에 담았다. 함께 있던 등대지기의 입을 단속시킨 집사가 목화밭 한 귀퉁이를 떠올렸다. 목화 수확이 끝난 밭이라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만약에 어느 때고 이것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아니라고, 나는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거나 입을 막아 버리면 될 거였다. 목화 상자가 밭으로 옮겨지는데도 마을 사람 누구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목화 상자일뿐이었다. 보통의 것보다는 조금 컸지만 그렇다고 저게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만한 크기도 아니었다. 다만 집사가 직접 상자를 옮겨 가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집사는 품속에 넣어갔던 보드카 한 병으로 아이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조용히 아이를 기리며 보드카를 마시던 집사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대령 대신 제 손으로 옆 마을로 시집을 보낸 아이 어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마을이 맞긴 한 건가. 저 파란 지붕 집 처녀였나. 속으로 아이와 그 어미의 얼굴을 맞춰 보던 집사가 뒤늦게 따라와 뒷수습을 하고 있는 등대지기의 하얀 머리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출항이 임박해 있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외따로이 떨어져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고작 일 년 남짓 살다 간, 동생인지 아들인지 모를 것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지만 그 역시도 그것의 운명. 집사는 다시 냉정한 얼굴로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작은 구덩이가 봉분도 없이 메워졌다.

 

등대 지하로 대령의 집에 있던 갖가지 상자들이 옮겨졌다. 상자들은 제각각의 색으로 지하의 어둠을 달랬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 보물들이 제 몸의 색들을 상자 바깥으로 뿜어냈다. 지폐다발이 들어 있는 상자는 훨럭이는 종이 소리를 내었고, 희귀한 도자기들이 들어 있는 상자에서는 희부윰한 빛이 상자들을 에워쌌다. 상자들을 원 없이 잔뜩 쌓아 둔 등대지기가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색의 빛을 등지고 등대 계단에 걸터앉아 낮술을 마셨다.

집사는 대령의 배에 목화 상자들과 얼마간의 보물,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들을 잔뜩 실어 두었다. 승선할 선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집사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을 태우기로 했다. 아주 오래 전에 퇴역한 대령의 군인들도 합류시켰다. 대령의 집과 척을 진 이들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번 항해에는 다른 때의 열 배나 되는 후한 임금이 약속되었다.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던 퇴역군인들도 낡은 군복을 입고 배 위로 올라갔다. 모든 일은 다 ‘대령’이 지시한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출항이었다. 다시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을의 모든 문을 볼 때마다, 집 안 곳곳에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누군가 열어 주어야 할 때마다 대령은 흰 손이 생각났다. 아무도 모르게 흰 손의 집에 따뜻한 빵 한 상자 보내 주고 싶었지만 그 때마다 집사가 대령이 해야 할 다른 일을 앙칼지게 상기해 주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늘 협상을 몰아치거나 명령을 하고, 모든 일에 대해 지시를 했어도 누군가를 애잔하게 챙기는 일에는 서툰 대령이었다. 이 때 흰 손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게 흰 손인가?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는 법을 모르는 대령이었다. 아무리 몸을 많이 섞은 여자라도 절대로 곁을 내주는 법이 없었다. 헛헛한 마음에 괜히 두 손을 맞대었다. 그러다 벽 한쪽 가득 쌓아 둔 상자더미를 바라보았다. 상자 위로 겹쳐지던 하얀 손길들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안 돼! 대령이 손을 뻗어 보았지만 둔탁한 나무상자가 만져질 뿐이었다.

대령이 출항을 앞둔 저녁, 부푼 배로 인하여 치마 앞섶이 불뚝 올라간 보를라가 그 배 위에 축 처진 아이를 얹고 대령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내 몸에 엉겨 있던 작은 물것들이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꾸덕꾸덕 말라 갔다. 배 위의 인간들은 나와 함께 딸려온 물것들 중에 큰 놈들은 거두어갔지만 자잘한 것들은 그물에서 떼어내지도 않고 그물과 나, 다른 잡것들과 함께 뭉쳐 두었다. 대령의 내장과 팔뚝처럼 괴상한 냄새를 풍기던 자잘한 것들이 피들 피들 시들어 갔다. 얼기설기 찢어진 그물이 강한 햇빛에 오그라들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나는 그물에 갇혀 뻘 속에서보다 더 옴짝달싹 못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은 고깃배 위에 바다 쓰레기처럼 얹혀 있는 내 위로 서서히 대령의 배가 다가왔다. 거부할 틈도 없이, 나는 다시 대령의 기억에 휘말렸다.

하늘에 달도 별도 없는 밤이었다. 집 안팎을 저인망으로 훑고 다니던 집사는 다른 방에 가서 노는지 기척이 없었다. 갑자기 문 밖이 소란스러워 나와 다른 상자들이 모두 눈을 떴다. 거대한 짐승이 씩씩대는 소리, 방문 손잡이가 잡아당겨지다가 내쳐지는 소리, 문이 열리지 않자 제 성질대로 분기를 발산하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종종거리며 뛰어오는 집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술에 취한 대령과 그를 부축한 집사가 한 몸이 되어 들어왔다.

저벅저벅 벽 쪽으로 다가온 대령이 나를 집어 들고는 집사를 향해 거침없이 지시를 내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무이낙에 돌아온 뒤로는 늘 집사의 눈치를 보며 소리를 치던 대령이었다. 곧이어 내 몸 속으로 빵과 술, 양고기 한 두름과 종이 한 장이 들어왔다. 저 상자를, 흰 손에게 가져다주고 올 것! 집사가 방문을 나간 뒤 대령이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대령은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을 멀뚱히 들여다보았다.

출항 준비를 위해 대령의 집에 와 지내던 등대지기가 집사 대신 나를 들고 흰 손에게 향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고 힘이 있는 대령의 말이었으므로 집사도 이번만큼은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나를 옮기던 등대지기가 아무도 모르게 내 속에 있던 값나가는 것 하나를 제 주머니 속에 넣었을 뿐이었다.

흰 손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염산을 맞았던 손은 살이 뭉개지면서 뼈까지 상했던지 아예 움직이질 못했다. 그는 한쪽 손만 이용해 천천히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들춰보다 물고기가 그려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한때는 그의 손에도 아주 진한 코발트블루 색으로 그려져 있던 물고기 문양이 거기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막 떠나려는 배 위에 나를 안은 흰 손이 맨 마지막으로 올라탔다. 제지하는 선원들을 물리쳐 준 것은 대령이 보내온 물고기 그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배 위에 올라서도 한동안 대령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년 넘게 세워 둔 대령의 배가 들썩들썩 움직이기만 할 뿐 힘차게 물을 박차고 떠오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배를 내려갔던 선원 하나가 다시 올라와 대령에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사장이 눈에 띄도록 커졌고, 대령의 큰 배가 세워져 있던 깊은 물은 본래보다 상자 다섯 개 정도 쌓아 둔 길이만큼이나 얕아져 있다고 했다. 배에 탔던 선원들과 그들을 배웅하려는 가족들 그리고 뒤늦게 올라탄 흰 손마저 나를 갑판 위에 내려 둔 채 배 밑으로 내려갔다. 허리까지 잠겨오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모래를 파고, 지렛대로 배를 떠미는 소리가 갑판 위로 올라왔다. 으이영차, 으이여엉차!

끄아아아앙! 겨우 몸을 뒤채인 배가 참았던 뱃고동 소리를 내질렀다.

 

강의 수로를 바꾼 지 삼 년째였다. 대령의 목화 배가 막 항구를 떠났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자꾸 마른기침을 했고, 대령이 떠난 집과 항구에는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기운이 머물렀다.

 

출항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잠깐 잠깐씩 배가 멈췄다 다시 출발하는 기척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뚜껑을 들썩였다. 잠시 어느 항구의 시장에 내려갔던 대령이 다시 배 위로 올라왔다. 어떤 상자나 인간도 뭍으로 내려지지 않은 채 배가 또 출발했다. 몇 번이나 다른 항구에 정박했지만 대령은 선원들이 항구에 내려가는 것도, 목화 상자를 하역하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흰 손이 대령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몇 번이나 흰 손의 물음을 피하던 대령이 입을 열었다. 이미 물량이 넘친다는 곳이 부지기수고, 심지어 무이낙의 목화보다 다섯 배는 낮은 가격을 제시한 이국의 상인들도 많았다고 했다. 말을 마친 대령이 어깨를 내려뜨리자 흰 손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답답해진 선원들이 하나 둘씩 술에 취해 갑판 위에서 춤을 추었다. 하늘을 향해 취한 몸을 날리다 떨어지거나 서로의 몸을 물어뜯는 소리들이 차츰차츰 조타실에 차올랐다. 춤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며칠 뒤, 조타실 선원 두 사람이 춤을 추다 서로를 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서로의 발을 밟고 넘어졌을 뿐인데, 사소한 다툼이 심상찮은 몸싸움으로 변한 것이었다. 대령은 죽은 이를 바다에 던지지도, 어떻게 처리하라는 지시도 없이 무력하게 방 안에만 틀어박혔다. 대신 흰 손이 상자 몇 개를 덜어 죽은 이의 몸을 수습한 다음 냉동 창고에 가져다 두었다. 여러 항구에서 몇 번이나 목화를 거절당한 뒤 배에 오른 대령은 이제 조타실 안의 우리들을 쳐다볼 때도 눈을 빛내지 않았다. 나는 무력해진 대령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 가만히 뚜껑을 닫고 눈을 감았다. 조타실 안의 용상어들도 꼼짝 않고 제 상자 속에 누워 있었다.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이들 몇몇을 빼놓고는 그 누구도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술에 취한 흰 손이 조타실에 들어왔다. 내 맞은편 상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그날 밤, 흰 손이 대령에게 다음 항구에서 배와 상자들을 모두 넘겨 버리자는 제안을 해 보았지만 단번에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그들이 거친 말싸움을 벌였고, 대령이 흰 손 보란 듯이 지나가던 선원 하나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난 흰 손이 조타실로 들어와 문을 닫아걸었다. 나는 흰 손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는 것을 보았다. 갑판에서 춤을 추는 선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쿵쿵 쾅쾅쾅 계단을 내려온 이들이 대령을 끌고 갑판 위로 올라가는 것도 흰 손은 말리지 않았다. 어느 틈에 조타실 안에까지 들어온 선원들이 냉동고 안의 우리를 모조리 꺼내들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취한 인간들이 목화 솜 가득 든 상자에 불을 붙여 하늘로 날려 보내며 비틀거렸다.

선원 두엇이 대령에게 보드카를 먹이고 두 발을 놀려 춤을 추게 만들었다. 셈이 재빠른 요리사가 제 앞으로 우리들을 끌어다 놓았다. 춤이 점점 빨라져 갔다. 눈 속에 눈물을 담고 서서히 두 팔을 올리는 대령의 주변으로 선원들이 한꺼번에 몰려갔다. 어깨를 들썩이며 한 발 한 발 제자리걸음을 하던 대령이 다가서는 이들을 모두 안아 주기라도 할 듯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신이 난 인간들의 춤이 더욱 격렬해지며 대령의 몸 가까이 바투섰다. 갑판 위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대령의 가지에 목화 봉오리가 만개했다. 그 봉오리 위에서 대령의 목이 툭, 떨어졌다. 인간들이 더욱 요란한 춤을 추며 몸에서 막 뿜어져 나오고 있는 핏물을 짓이겼다. 목화 봉오리가 서서히 핏물을 머금었다. 그 위로 대령의 의자에 걸터앉은 흰 손이 하얗게 겹쳤다.

나는 뚜껑을 활짝 열고 그들의 춤이 잦아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대령의 배는 돌아오지 않았고, 바다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수평선을 가늠하던 눈들이 서서히 지평선을 짚어 가기 시작했다. 때가 되어도 목화를 따려는 사람이 없어 마을의 밭들은 목화 폭탄이 터진 것처럼 환했다.

 

드드드득. 배가 땅에 닿았다. 물고기 상자를 모두 내려놓은 인간들은 마지막으로 나와 그물을 분리하려다 그물이 더 찢어지는 바람에 그냥 모래사장 위에 내팽개쳤다. 모래 위에 떨어지던 그 충격에 내 몸 한 귀퉁이가 쪼개져 나갔다.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한 코, 한 코 나를 옥죄던 모든 것에서 드디어 떨어져 나온 것 같은 가벼움. 나는 갓 나온 새 잎처럼 가만히 내 앞에 펼쳐진 마을의 모습을 생경하게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 이미 물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 되어 버려 검붉은 녹이 뚝뚝 흐르는 배들, 마을 전체를 먹어 들어간 부연 목화밭. 나는 이대로 가만히, 이제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내가 무이낙에 돌아온 것이었다.

 

보를라가 다시 대령의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배는 더 부풀었고, 아이는 아예 새카맣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보를라가 대령의 집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한참이 지나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문 좀 열어 달라고, 약 좀 달라며 미친 듯이 우는 보를라. 딸깍. 잠겨 있는 줄 알았던 문이 열렸다. 텅 비었다. 집사도, 집 안팎을 종종거리면서 오가던 사람들도, 언제나 시끄럽게 뛰어다니던 대령의 아이들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깔려 있던 괴괴한 적막과 여기저기 잔해처럼 흩어져 있는 집기들이 그들의 부재를 말해 주었다. 허리를 짚으며 뒤뚱뒤뚱 걸어간 보를라가 대령의 방과 집사의 방문을 차례대로 가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보를라가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 오던 모든 힘을 잃고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시간, 등대지기가 등대 지하에 쌓아 두었던 상자 맨 위로 집사의 머리를 담은 상자 하나를 새로이 얹었다. 상자들로 가득한 지하에는 이제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진물을 뚝뚝 흘리던 집사의 상자가 그 틈을 비집고 쌓여 있는 상자들 맨 위로 올려졌다. 내내 담담한 얼굴이던 늙은 등대지기의 얼굴에 웃음이 고였다. 막 위로 올라간 상자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빛이 등대지기의 얼굴을 비추었다.

등대지기가 지하실 문을 닫자 서서히 상자들이 꿈틀댔다. 모든 뚜껑이 활짝 열렸다. 상자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제각각의 빛을 내었다. 지하실이 금세 환해졌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들이 지하의 계단을 뚫고 등대지기가 막 올라선 등대 입구까지 들려왔다. 늙수그레했던 얼굴이 집사처럼 팽팽해진 등대지기.

 

누군가 내 몸을 들어올렸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얼굴이 새카맣게 탄 보를라였다. 그녀가 맨손으로 내 속의 구석구석을 짚어 가며 모래를 털어냈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 속에 누인 보를라. 대령을 담았을 때처럼 내 몸의 결들이 다시 빳빳이 섰다. 보를라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 몸을 친친 감고 있던 그물이 보를라의 손잡이가 되었다. 비가 오는 건가. 툭, 툭.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보를라가 뒤뚱거리며 이끄는 대로 끌려가며 물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보를라의 다리 사이에서 흐르던 맑은 물이 모래사장에 하나, 하나 점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점점이 찍어 놓은 물 점을 따라 모래 위에 가느다란 길을 내었다. 간간이 허리를 꺾은 채 걸음을 쉬던 보를라는 맑은 물이 핏물로 바뀔 때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 짚어 볼 수도 없을 만큼 아이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아이의 두 볼에 핀 거무스름한 얼룩 위로 대령과 집사의 얼굴이 앞 다투어 다녀갔다. 아비들이 지워지자 죽은 얼굴에 흰 점이 돋아났다. 점이 점점 커졌다. 나는 그물 사이를 헤집고 뒤를 돌아보았다. 등대의 빛이었다. 거무튀튀한 등대 주위에 희푸른 빛이 어룽져 있었다. 그 때 보를라가 그물을 놓치며 주저앉았다. 갑작스런 멈춤에 덜컹, 아이가 내 몸에 부딪치면서 돌아누웠다. 등대 주위를 교교히 일렁이며 시린 손짓으로 아이를 향해 내뿜은 빛의 인사. 죽은 아이가 내 속에서 온몸으로 일갈하는 쉬엇. 입술을 앙다문 보를라가 덜덜 떠는 손으로 다시 그물을 집어 들고 걷기 시작했다. 산통을 시작한 보를라가 걷다 쉬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아이의 몸이 등대를 향해 거듭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내 몸이 모래사장 위로 그어 놓은 길 위로 고여 오는 빛의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아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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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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