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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제9회)

  • 작성일 2013-10-01
  • 조회수 732

 


서울(제9회)

 

손홍규

 

 

서울9-삽화

 

    노인의 상처에 코를 갖다 댄 소년은 희미한 악취를 맡았다. 상처가 쉬이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노인은 거기부터 썩고 있었다. 언젠가는 완벽하게 썩어 문드러질 거였다. 죽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쩐지 면죄부인 것만 같았다. 깨진 창으로 소음이 밀려 들어왔다. 개가 움찔거렸다. 소년은 옆으로 누운 채 가볍게 헐떡이는 개의 입가에 묻은 피거품을 닦아 주었다. 개는 눈을 떴다가 감았다. 소총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소년은 다리의 상처를 살폈다. 겉보기에는 아물어 가는 듯했으나 통증은 여전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노인과 여자와 개를 차례차례 보았다. 볼품없이 야위고 기진맥진한 몸뚱어리들이었다. 나지막한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수 없어서였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천장을 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천장에 세월이 만드는 중인 무늬가 있었다. 무겁고 기다란 무언가가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동생은 어디까지 갔을까. 동생은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건너가 버리듯 사라져 버렸다. 동생은 보았다. 소년은 보지 못했으나 동생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동생의 말을 부정하기는 했으나 소년은 장담할 수 없었다. 정말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를.
    지나치다 싶을 만큼 건장했던 아버지의 육체는 신이 어떤 악의를 지니고 허락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몸으로 쓸모없는 삶을 꾸렸으나 그 몸이 주는 위안으로 기쁨을 누렸다. 아버지가 누린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일깨우는 경고였으련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품지는 않았을 거였다. 과거의 어느 순간까지는 소년도 아버지를 경외했으련만 이제 그런 일들이 너무나 아득한 과거에 속한 일인 것만 같았다. 실제로 겪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혹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자주 상상하는 바람에 생겨난 거짓 기억인지조차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동료들도 대체로 비슷했다. 그중에는 키가 작고 마른 사람도 있었으나 육체적으로 왜소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이 착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그럭저럭 즐기는 편인 듯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아파트 옥상에서 던져버리려 했거나 혹은 그럴 예정인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소년이 보기에 그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그 일에 성공하지는 못할 듯했다. 그 일에 성공한 건 바로 이 세계였다. 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의 동료들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두 타고난 좀비였다. 세상사에 무관심했으나 무관할 수는 없었으므로 세상이 시키는 일만 의무를 수행하듯 꾸역꾸역 치러내면서 아무런 열망 없이―그러나 이 세상이 자신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좋겠다는 간절한 열망만은 잃지 않은 채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산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소년은 몇 차례 헛구역질을 했다. 오후에 대낮을 소유한 자들이 침입을 시도했다. 잠에서 깨어난 여자와 노인의 눈에 예전에는 엿볼 수 없었던 체념이 깃든 걸 소년은 보았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들 가운데 오직 개만 홀로 벌떡 일어나 탁자와 의자를 쌓아 막아 둔 문을 노려보았다. 문 너머에서 익숙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문이 덜컹거렸다. 이윽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창턱에 걸리면 탁 소리를 냈다. 소년은 벌떡 일어났다. 사다리였다. 지금 막 사다리를 놓고 맨 아래 칸에 발을 딛고 오르려던 자와 소년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수역 네거리 부근 오피스 빌딩 옥상에서 보았던 자였다. 물론 그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자의 눈은 맹렬하게 이글거렸다. 그자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를 소년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뒤따라 일어선 여자와 함께 소년은 사다리를 밀어냈다. 사다리는 묵직했다. 노인이 소총을 거꾸로 쥐고 개머리판으로 사다리를 옆으로 밀었다. 중간까지 올라왔던 그자가 사다리와 함께 한강둔치로 추락했다. 그자의 비명은 소름끼치도록 서글펐다. 추락한 그자 주위로 대낮을 소유한 자들이 몰려들었다. 이윽고 그자가 일어났다. 그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사다리를 들었다. 절룩거리면서 다시 한강대교로 올라왔다. 사다리는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다리는 가운데가 휘어져 창턱 아래 벽면에 간신히 꼭대기가 닿았으나 밑에서 잡아 주지 않으면 제대로 기댈 수조차 없었다. 그자의 벌린 입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한강에 노을이 드리워질 때까지 그자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 헛되이 애썼다. 그자는 여러 차례 추락했으나 매번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해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저물었다. 그자는 완전히 망가진 사다리를 옆구리에 낀 채 절룩거리면서 한강대교를 건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인생의 적을 내버려둔 채 귀가해야 하는 그자의 참담한 심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자의 뒷모습은 절대적인 고독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그자가 어두워 가는 도시로 완전히 스며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들은 깊은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거리는 적막해졌다. 어디선가 짐승이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고 있을 거였다. 소년은 땀에 젖은 노인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들은 몇 모금의 물을 마셨다. 노인의 숨결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끈적거렸다. 그들은 배낭을 꾸린 뒤 좀 더 어둠이 농밀해지길 기다렸다. 노인은 소총 멜빵을 목에 걸고 손으로 총신을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시죠?”
    “그래, 그자에게 총이 있었다면 우린 살아남지 못했겠지.”
    “언젠가 그자는 사다리 대신 총을 들고 올 거예요.”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개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 늘 우리 주위를 떠돌았으나 우리가 결코 볼 수 없었던 유령들이 한꺼번에 이 도시로 출근하는 걸 본 기분이야.”
    “그 유령도 한때는 우리 자신이었겠죠?”
    “저기에…… 내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
    “그럼 여기에 있는 우리는 뭐죠?”
    “저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저들의 유령.”
    “이 도시는 우리를 기억해 줄까요?”
    “그럴 거야. 그리고 언젠가 우리 역시 저들처럼 이곳에 다시 출몰하겠지.”
    “그때가 되면 제가 할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내가 널 알아볼 수 있다면 너도 그럴 수 있겠지.”

 

    그들은 밤이 깊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의 탁자와 의자를 치우고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 한강대교 북단에 섰다. 노인과 소년은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잠시 사방을 둘러보더니 서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소녀가 사라졌던 방향을 향해 강변북로를 따라 걸었다. 한강을 굽어보는 아파트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한껏 움츠린 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강변북로와 경부선 철로가 만나는 곳에서 그들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철로를 따라 걷던 그들은 삼십 분 뒤 용산역에 이르렀다. 무너진 역사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철도회관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맞은편 차량기지에서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그들은 차량기지 쪽으로 우회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잠시 의논했다. 삼십 분 뒤 그들은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우선 건물이 무너지면서 내려앉은 옥상 주차장을 지났다. 차량들이 뒤엉킨 탓에 그곳을 지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캄캄하기 이를 데 없는 입구를 보았다. 역사를 떠받치던 기둥들 사이로 입을 벌린 어둠 속에서 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그들의 얼굴로 훅 끼얹어졌다. 어둠이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바닥은 미끈거렸다. 소년이 손전등을 켰다. 고속열차의 매끈한 차체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들은 열린 문을 통해 기차에 올랐다. 곰팡이 냄새가 흥건했다. 그들은 기차 객실을 통과하며 비교적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거기를 통과해 간 사람이 많은 듯 객실 복도에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다. 열두 번째 객차를 통과했을 때 맨 앞에 선 개가 멈췄다. 오른쪽 창 밖에서 무언가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소리가 난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짐승의 눈동자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노인이 철커덕 소리를 내며 소총의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 짐승은 플랫폼의 대합실 뒤편으로 돌아간 듯했다. 다음은 식당 칸이었다. 그곳을 통과하자 무너져 내린 천장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차례차례 창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소년은 손전등으로 계단을 비추었다. 그곳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듯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신음을 참으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랐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도 다른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 거였다. 그들은 개찰구 부근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소년은 손전등을 껐다. 짐승이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아니 한강대교를 벗어나던 순간부터 그들은 줄곧 짐승을 의식하고 있었다. 짐승이 이처럼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사실도 알았고 언젠가 그들을 습격하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출 수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피로했다. 밤새 걸었던 것만 같은데 이제 겨우 자정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화를 신은 사내아이 무리들과도 가까워졌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물을 한 모금씩 마신 뒤 가만히 앉은 채 귀를 기울였다. 역사의 붕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건물의 관절들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노려보는 건 퍽 고달픈 일이었다. 어둠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탓에 시선이 어둠의 속살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어둠의 피부 층들을 통과해야 했다. 시선이 한 겹 한 겹 어둠의 피부 층을 통과할 때마다 왜곡이 일어났다. 설령 무사히 어둠의 속살에 이른다 해도 거기에 그들이 보려고 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어둠을 노려보는 이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럴 때는 눈을 감는 게 훨씬 나았다. 어둠 속에서는 소리가 형체를 갖고 나타났다. 눈을 감으면 짐승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곳이었다. 짐승이 느끼는 불안도 감지할 수 있었다. 짐승이 느끼는 고통도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 고통이 짐승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스스로가 이미 고통과 무관할 수 없었으므로 고통은 무언가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없어 무너진 천장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식당가인 그곳에는 퀴퀴한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쥐 울음이 들렸다. 쥐떼들이 어디론가 한꺼번에 달려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무너진 벽을 통과해 극장이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저마다 조금씩 떨어져 관객석에 앉았다. 의자는 아직 푹신했다. 소년은 손전등으로 스크린이 걸렸을 벽을 비췄다. 군데군데 찢어진 스크린은 한쪽이 기울어진 채 걸려 있었다. 소년과 동생은 딱 한 번 돈암역 근처의 극장에 간 적이 있었다. 조조할인이었다. 관객은 그들 형제를 제외하고는 대여섯뿐이었다. 형제는 졸기는커녕 영화의 장면 하나라도 놓칠세라 두 눈을 부릅뜨고 관람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에 극장에 고였던 냄새는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밤새 의자에 스며들었다가 슬금슬금 피어나던 사람들의 체취에 영화 시작 십 분 만에 형제가 다 먹어치워 버린 팝콘세트의 봉지에서 풍겨나던 달콤하면서도 메스꺼운 냄새가 뒤섞였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날은 동생의 생일 다음날이었다. 생일 다음날 극장에 갔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왜 그랬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으나 때늦은 위로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동생도 몰랐을 것이다. 동생은 위로받은 듯한 얼굴로 극장을 나섰다. 위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로받지 못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걸 동생은 스스로의 결점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복잡한 표정을 보고서야 소년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그와 비슷한 실수를 전에도 저지른 적이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게 될 거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얼마 뒤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자정도 지나 우르르 몰려온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은 방을 다 차지하고 앉았다. 소년과 동생은 집 앞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가로등보다 커다랗게 보이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술 취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기고만장했다. 이따금 아버지보다 늙어 보이는 아버지의 동료가 한 사람씩 나와 형제에게 돈을 쥐어주고 편의점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은 어디에선가 날마다 그처럼 모여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서로의 멱살을 잡으면서 모종의 파렴치한 일을 계획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며 살 거였다. 심부름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집과 편의점을 오가는 길에서 동생과 나눈 대화를 소년은 기억했다. 형도 가끔 까닭 없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적이 있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가 기울어서 그래. 지구의 자전축은 23.5도 기울어졌으니까. 형은 그걸 느낄 수 있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형, 믿지 못하겠지만 난 느껴. ……그런 건 몰라도 괜찮아. 괜찮지 않아.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린 거기에 적응해서 살게끔 태어났으니까. 적응에 실패한다면? 실패했다면 이렇게 살아 있을 순 없겠지. 형은 우리가 진짜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 숨을 쉬잖아. 숨을 쉰다고 다 살아 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살아야 진짜 살아 있는 건데? 동생은 지구처럼 고개를 갸웃 기울였고 그때 소년은 동생의 내부에서 맹렬한 속도로 자전하는 생각들을 볼 수 있었다. 동생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소년은 알았고 소년이 그런 사실을 안다는 걸 동생도 알았으므로 동생이 실제로 고민한 건 소년이 짐작할 수 있는 생각 너머의 또 다른 생각, 동생 스스로도 한 번도 다다른 적 없는 미지의 생각을 어떻게 포획하여 표현하느냐였다. 그런 이유로 동생은 소년에게 한 번도 명백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혀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은 말할 수 없었고 동시에 말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동생은 소년을 항상 넘어섰으나 자신이 붙잡은 생각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그럴수록 동생은 시에 집착했다. 만약 동생이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년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시를 거부하거나 몰랐던 것이 아니라 시를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동생이 선택한 길이었으므로. 만약 동생이 그처럼 심사숙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소년이 질문했을 때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을 거였다. 어쨌든 이건 사는 게 아니야.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식의 화법이 사실은 어머니의 화법임을 깨달았을 테고 어머니의 혼잣말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소년과 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구나 서로를 왼손만큼은 증오했다. 누구나 서로를 오른손만큼은 사랑했다. 그리고 나머지만큼은 무관심했다. 손바닥 크기만큼 증오하고 사랑했으므로 오래 견딜 수 있었다. 아무 일 없이 세월이 흐를 수는 없겠으나 특별한 일 없이 흐를 것이므로 먼 훗날 돌아보았을 때 손바닥만큼만 허락된 증오와 사랑이 무척이나 현명한 가르침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며 저 볼품없는 부모조차 그런 현명함에 의지해 삶을 견뎌 왔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였다. 이 모든 가능한 미래를 동생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소년과 동생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단절이 생겨났고 이 단절을 모른 척함으로써 소년과 동생은 형제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소하고 익숙한 일일수록 심오했다. 그 일이 사소해지고 익숙해지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므로.
    여자가 객석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허리를 숙였다. 여자는 갑작스레 찾아온 복통에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십 분 뒤 여자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자의 배가 좀 더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이 여행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알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개가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 앞으로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소년은 손전등을 비췄다. 짐승은 극장 앞문에서 퇴장하는 배우처럼 손전등 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다가 문을 통과해 사라졌다. 그동안 소년은 한 손으로 개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노인이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소년은 노인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월이 사람을 벼리면 노인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날이 섰다. 그러나 노인이 되면 알게 된다. 너무 벼리어진 칼은 무디어지기도 한다는 걸.
    “점점 때가 다가오는구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얘야, 너도 알잖니? 언제까지나 저 짐승에게 쫓겨 다닐 수는 없어.”
    “일정한 거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한평생 쫓겨 다녀도 상관없어요.”
    “거리를 유지하는 건 네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란다.”
    “할아버지,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아요.”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이요?”
    “내가 전생부터 저 짐승을 알았던 것만 같아.”
    “그게 사실이라면 다음 생에도 알아보시겠지요.”
    “다음 생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는 말씀이세요?”
    “언제나 전생뿐이었다는 말이지.”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슨 생각 말이냐?”
    “기억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인 것 같아요.”
    “퍽 신비롭게 들리는구나.”
    “할아버지 때문이에요.”
    “난 기억을 물려받지 않았어.”
    “물려주실 기억은 있잖아요.”
    “그런 게 있다 해도 나는 기억을 물려주지는 않을 거야.”
    “점점 때가 다가와요.”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저 짐승도 기억을 물려받았다는 걸요.”
    조금 뒤 그들은 붕괴된 건물 내부를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손전등을 껐다. 그들은 조심스레 짐승이 사라졌던 앞문 쪽으로 내려갔다. 짐승의 나지막한 으르렁거림과 누군가의 비명이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그 소리는 벙커미사일이 뚫고 지나가며 생긴 듯한 구멍을 통해 들려온 탓에 더욱 음산했다. 이윽고 비명은 질질 끄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살려 주세요. 짐승은 곧바로 숨통을 끊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저 짐승은 죽어가는 자의 근처에 몸을 숨겼을 거야.”
    “동료를 구하러 오는 자들도 짐승에게 당하겠군요.”
    “그자들은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우리가 아는 걸 그자들도 알 테니 말이다.”
    “죽어가는 자는 우리를 기다린 거겠죠?”
    “아마도 그랬을 테지.”
    “그 사람은 왜 몰랐을까요?”
    “그 사람한테는 개가 없으니까.”
    노인과 소년은 개를 돌아보았다. 개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들은 극장 앞문 근처에 앉아 기다렸다. 삼십 분이 지났다. 더 이상 신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구멍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의 머리와 배낭과 어깨 위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흘러내리며 부딪혔다. 두 층을 내려가니 구멍 아래 선로에 폭발로 생긴 구덩이가 보였다. 개가 죽은 사람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들이 시체 곁에 다가가자 그 주변에 부유하던 피비린내가 흩어졌다. 소년 또래의 사내아이였다. 여자는 구역질을 하다 침을 뱉었다. 소년은 여자의 등을 쓸어 주었다. 노인은 죽은 자의 코에 귀를 갖다 댔다. 노인의 행동은 의례적이기는 했지만 엄숙함을 잃지는 않았다. 노인과 여자가 쉬는 동안 소년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옮겨 시체 위에 쌓았다. 삼십 분 뒤 그들은 죽은 사내아이가 원래 보초를 섰던 자리라 짐작되는 곳을 발견했다. 옆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 부근이었다. 여러 개의 가판대를 옮겨 참호처럼 만들어 놓았다. 물이 반쯤 든 수통과 먹다 남긴 비스킷과 담요 한 장이 있었다. 소설책도 한 권 있었다. 책은 펼쳐져 있었고 십여 쪽이 한꺼번에 구겨져 있었다. 책을 읽다 습격을 당했거나 습격을 당했을 때 엉겁결에 책을 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구겨진 책장에는 짐승의 습격을 받아 당황하고 놀란 그자의 흥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찰나의 순간 손을 뻗어 꽉 움켜쥐었을 그 페이지들에 새겨진 최후의 감정은 쓸쓸하게 격렬했다. 여자는 머뭇거리다 죽은 사내아이의 소총을 들었다. 그들은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갔다. 그곳은 풋살 경기장이 있는 백화점 옥상이었다. 옥상의 동쪽이 무너진 탓에 경기장의 펜스는 그쪽 방향으로 비틀리며 기울어졌고 바람에 흔들리며 끊임없이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소년은 터진 축구공을 주웠다가 내려놓았다. 커다란 광고판에서 해외 유명 축구선수가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조 잔디 위를 절룩이며 가로지른 개가 팔각정으로 들어가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팔각정에는 방금 전까지도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소년은 개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닥에 흩어진 흰 가루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핫케이크 가루였다. 적어도 소녀가 속한 무리는 버너를 피워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만큼의 여유는 누렸던 셈이다. 소년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소년 옆에 쭈그려 앉았다. 여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노인은 소년과 여자 뒤에 섰다.
    “황급히 떠난 것 같지는 않구나.”
    “우리가 아는 걸 그자들도 알 테니까요.”
    “오늘 떠나려 했던 거야.”
    “우리가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았겠지요?”
    “알았겠지.”
    “그럼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면 왜 총을 쏘지 않을까요?”
    “그건 어르신께 여쭤 봐야 할 것 같구나.”
    “짐승과 우리를 한꺼번에 처치하려는 거야.”
    “저라면 그런 방식을 택하지는 않겠어요.”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이니?”
    “예…… 아주머니.”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이건 제 문제니까요.”
    “네 문제가 우리 문제야.”
    “아니에요. 이건 제 문제예요.”
    “우리 모두가 아는 걸 너만 모르는구나.”
    그들은 축구용품을 판매하는 상점과 샤워실 등을 둘러보았다. 상점은 유리파편 탓에 머물기에 좋지 않았고 샤워실은 무언가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철근 구조물 아래 제법 아늑한 공간을 찾아냈다. 벽과 철근 사이의 폴리카보네이트 천장은 부서지지 않아 이슬을 막아 주었다. 관중석이었을 나무 벤치는 비바람에 삭아 있었지만 파라솔이 부러진 나무탁자는 그런 대로 쓸 만했다. 그곳은 건물 내부로 통하는 문을 관찰하기에도 좋은 위치였고 건물의 다른 옥상들에서 누군가 감시를 한다 해도 적당히 은폐가 되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용산을 바라보았다. 남산의 한 자락이 서남쪽으로 뻗으며 생긴 구릉지인 용산은 이름처럼 어둠 속에 웅크린 용 같았다. 그들은 건빵을 두어 개씩 먹고 물을 한 모금씩 마셨다. 노인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조금 뒤 노인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여자가 노인의 상처를 살폈다. 여자가 소년에게 건넨 수건에는 송진 같은 피고름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어르신, 더는 움직이시면 안 돼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네.”
    “그 말씀이 더 걱정스러워요.”
    “그럼 마음껏 걱정하시게나.”
    “어쩔 수 없군요.”
    여자는 노인의 상처를 소독해 준 뒤 노인의 배낭에서 침낭을 꺼냈다. 노인은 침낭 속으로 힘겹게 들어갔다. 바람은 쌀쌀하지 않았으나 기력을 소진한 노인의 육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훈풍도 아니었다.
    “늙으면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속으로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다네.”
    “성한 몸이 아니시잖아요.”
    “성한 몸이었을 때도 그랬다네.”
    “바람은 태어난 곳으로 불어간다죠?”
    “위로가 되는군.”
    “위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위로가 된다네.”
    노인은 한동안 기침을 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송곳으로 명치를 후벼 파는 느낌이 들게 하는 소리였다. 여자와 소년은 오랫동안 노인의 양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새벽이 깊었다. 도시를 떠도는 음울한 소리들은 아련했다. 소년은 출발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여자가 소년을 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소총을 쥐고 일어나 서성이다 다시 주저앉아 배낭에 기대앉았다. 소년은 노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저 얼굴을 그리워하게 될 거였다. 여자가 소년 옆으로 다가와 슬며시 손을 내밀어 소년의 눈꺼풀을 내려 주었다. 두어 시간 뒤 사위가 희끄무레해졌다. 소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의 몸도 허물어지는 중이었다. 여자는 푸석한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소년의 발치에 배를 깔고 엎드린 개가 고개를 들었다. 소총을 내려놓은 여자는 노인 옆에 자리를 잡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날이 밝았으나 구름 탓에 어둑어둑한 편이었다. 개가 몸을 일으켜 소년 옆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오라기의 메마른 터럭이 개의 주둥이 주변으로 떨어졌다. 개는 다시 배를 깔고 엎드렸다.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았다.

 

    노인은 헛소리를 했다. 소년은 노인을 깨워 물과 약을 먹였다. 노인은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나 정신이 말짱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소년은 노인의 눈가에 붙은 눈곱을 떼어 주었다. 노인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목덜미 아래로 땟물에 푹 전 속옷이 삐죽 솟았다. 하루가 지났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노인은 깨어났으나 일어나지는 못했다. 여자가 소년에게 떠날 거냐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여자는 소년의 눈빛에서 많은 걸 읽었다. 혼자 보내지는 않겠다는 여자의 말에 소년은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만 언제 가야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노라고 덧붙였다.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소녀가 속한 무리는 지난밤에 떠났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소년의 상처를 살폈다. 여자의 손이 환부를 지날 때마다 소년은 신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 했다. 여자는 두개골에 금이 간 소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소년은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통증은 없다고 말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기적이야.”
    “모든 걸 잃어버린 기적이죠.”
    “되찾게 될 거야.”
    “자신이 없어요.”
    “기도해라.”
    “기도하기는 싫어요.”
    “내가 너라면 신을 믿었을 거다.”
    “……아주머니도 믿지 않으시잖아요.”
    “난 너처럼 기적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건…….”
    이 세상 도처에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바뀐 뒤로는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이 사태의 책임을 신에게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안전해질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소년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신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예요.”
    “부드럽게 매정한 대답이구나.”
    짐승의 울음이 바람에 실려 왔다. 침낭에서 빠져나온 노인이 배낭을 꾸렸다. 소년이 고개를 저었지만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들은 각자의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붕괴된 거대한 빌딩의 내부는 미로나 다름없어 지상으로 내려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그들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철로에 들어섰다. 그 아래 지하의 이마트에서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주변에서 몇 개의 식료품 깡통을 챙길 수 있었다. 철로를 따라 걸었다. 한 시간 뒤 남영역을 지났다. 괴괴한 역사를 등진 채 그들은 한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믐과 초승 사이였고 하루 가운데 부처마저 잠든 시간이었다.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여전했으나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밤이었다. 그런 시간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들 역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일마저 너무 자주 한 탓에 지겨웠다. 노인은 여자에게 소총 다루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여자는 퍽 진지하게 노인의 지시를 따라 탄창을 뺐다가 끼워 보기도 하고 조종간을 움직여 보기도 하고 노리쇠를 당겼다 놓아 보기도 했다. 총구를 겨냥할 때는 마치 오랫동안 총을 다뤄 온 사람 같은 연륜마저 엿보였다. 다시 철로를 따라 걸어 한 시간 뒤 서울역에 이르렀다. 서울역은 원래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파괴된 탓에 우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국철 노선이 지하로 이어지는 곳에서 역사 오른편을 따라 서울역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 앞 차도는 무너진 고가도로로 막혀 있었다. 게다가 자동차들이 뒤엉켜 있는 탓에 거기를 넘어가려면 또 한참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들은 서울역사 쪽으로 되돌아갔다. 비교적 도로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은 서울스퀘어 옥상에서 불빛을 발견했다. 사람의 형체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들도 불을 피워 깡통 옥수수를 끓여 먹었다. 아침이 되었고 대낮을 소유한 자들이 거리를 분주히 오갔다. 햇살이 눈부셨다. 여자는 그늘 아래 침낭 깊숙이 들어갔다. 소년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의 행렬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노인은 며칠 사이에 더욱 핼쑥해진 얼굴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노인의 어깨를 부축해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노인은 물을 두어 모금 마신 뒤 무심한 얼굴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평온해 보였다. 너무나 평온해서 그 거리를 걷는 이들에게 원래부터 그 거리를 소유할 권리가 주어졌던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얘야, 난 죽는 게 두렵지 않단다.”
    “저는 무서워요. 할아버지가…… 죽는다는 게 무서워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렴.”
    “약속하지 않겠어요.”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원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난 사람답게 죽고 싶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사는 게 아니야.”
    “이것도 사는 게 아닌 건 마찬가지잖아요.”
    “하지만 우린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다르게 살 수 있어요. 어쩌면 제 동생처럼요.”
    “네 동생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야.”
    서울스퀘어 옥상에서 총성이 들렸다. 거리를 걷던 이들이 모두 걸음을 멈춰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총을 쏘는 자들은 옥상 오른쪽에 몰려 있었다. 그들이 겨냥한 곳은 남대문 경찰서 오른편의 서울시티타워 옥상 부근이었다. 조금 뒤에 총성은 그쳤다. 소년은 서울시티타워 옥상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기에 동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년의 눈빛은 사나웠다. 오래된 증오와 분노 같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 한 덩어리로 굳어버린 듯한 눈빛이었다. 노인은 기침을 하면서도 여자의 총기를 분해해 손질했다. 여자는 잘 손질된 소총을 건네받은 뒤 소년 옆으로 다가왔다.
    “너는 이 도시를 너무 무정하게 대하는 것 같구나.”
    “도시가 저를 살갑게 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생각해 주세요.”
    “하지만 네가 태어난 도시잖니?”
    “서울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여기가 제 고향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가보질 못했으니까요.”
    “너의 미래도 너의 고향은 아닐 거란다.”
    “제 과거가 그랬던 것처럼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소년은 고개를 돌려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밤이 되자 도로를 따라 걸었다. 한 시간 뒤에는 남대문 근처에 이르렀다. 그들은 남대문을 통과했다. 수천 년은 된 듯한 어둠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삼십 분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한 시간 뒤 시청 앞 서울광장 왼편을 지나쳤다. 프라자호텔 중간층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소년은 동생과 함께 그 길을 걸었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보다는 밤눈이 그리 어둡지 않던 때였다. 그들 모두 조금씩 밤길을 걷는 속도가 느려졌고 그 사실을 모두 알았다. 밤조차 인간의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언젠가 인간은 모든 걸 잃게 될 거였다. 완벽하게 잃은 뒤에야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노인은 소년의 그런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인간은 지난겨울 이전에도 많은 걸 잃는 중이었다는 걸 덧붙여 상기시켜 주었을 뿐이다. 노인의 생각에 여자도 동의했다. 덕수궁 돌담 아래를 지나며 돌담 너머 뜰에서 풍겨오는 싱그러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람이 성공회 교회의 종탑을 휩쓸고 지나갔는지 종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거기에서 밤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삼십 분 뒤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 이르렀다. 음산한 네거리였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상의 형체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그 너머에는 세종대왕상도 있을 거였다. 일렬로 주차된 채 방치된 경찰버스 안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관광안내소 뒤편에 몸을 숨겼다. 여자는 개를 붙잡았고 노인은 눈을 감았다. 소년은 경찰버스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 경찰버스 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나오더니 바닥으로 사뿐 뛰어내렸다. 고양이는 구슬프게 울면서 버스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그들은 세종문화회관 쪽을 바라고 길을 건넜다. 그들 주위에서 총알이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총알은 그들의 뒤쪽에서 날아왔다. 조선일보 사옥 옥상쯤인 듯했다.
    “대응사격을 하면 안 된다.”
    “위치가 너무 불리해요.”
    “움직이지만 않으면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어.”
    사격이 그친 뒤에도 그들은 한동안 꼼짝도 않은 채 엎드려 있었다. 노인은 사격의 사각지대를 가늠해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다. 승용차와 버스를 은폐물로 삼아 이동하면 교보빌딩 앞으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숙인 채 천천히 움직였다. 이따금 무의미한 사격이 있었지만 총탄은 그들 쪽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이 내려앉은 비각(碑閣) 뒤편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소년은 비각의 잔해들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선일보 사옥 옥상에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얼마 뒤 그 형체는 사라졌고 더 이상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노인은 소년이 깔고 앉은 돌이 도로원표라고 일러주었다. 소년은 손으로 돌에 새겨진 글자를 쓰다듬었다.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만져졌다. 여자가 기댄 우체통에는 광화문 우체국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우편물을 거두는 시간은 평일 오후 두 시며 토요일과 공휴일에는 거두어 가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투입구는 종로구 우편물과 타 지역 우편물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소년은 타 지역으로 가야 할 우편물이 종로구 우편물 투입구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어쩐지 그것이 소년의 운명인 것도 같았다. 소년은 우체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둔탁하지만 울림이 있는 텅텅 소리가 났다. 우체통의 내부는 완벽하게 보호받은 또 다른 세계일 듯했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교보빌딩을 바라보았다. 교보빌딩은 외관으로 보았을 때는 파괴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커튼월도 대부분 무사했다. 그 덕분에 건물은 투박하고 견고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내부에서 화재가 일어난 적도 없는 듯했다.
    “네가 이곳을 지나올 때는 어땠니?”
    “오싹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어요.”
    “……이상하리만치 멀쩡하구나.”
    “누군가 관리라도 하듯이 말이죠?”
    “저 건물은 살아 있는 것 같아.”
    “처음에는 군인들이 있었을 거예요.”
    “누구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거다.”
    “나중에 사람들이 드나들었겠지요.”
    “지금도 그런 것 같구나.”
    “저긴 피해야겠군요.”
    “우리가 저기로 들어가길 바라는 사람들이 없다면 말이다.”
삼십 분 뒤 그들은 비각 뒤편을 떠났다. 교보빌딩 앞을 지날 때 그들은 다시 총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현대해상과 스타벅스 사이였다. 총구 화염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모두 두 명인 듯했다. 그들은 포탑이 떨어져 나간 탱크 뒤로 숨었다. 어두운데도 그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훤히 아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잠시 갈등했다. 결국 여자가 가리킨 곳은 그들을 덮칠 듯이 우악스럽게 버티고 선 빌딩이었다. 소년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꼭대기 층까지 오르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세종로가 내려다보이는 쪽의 어느 사무실에 들어선 그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 모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빌딩 내부는 적요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들렸다. 소년은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잠깐 둘러보았다. 그들은 사무실 문을 잠근 뒤 사무집기들로 그 앞을 막았다. 어느 정도는 침입을 막아 줄 수 있을 거였다. 잠시 후 그들은 안쪽의 작은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문을 봉쇄하면 침입이 어려운 유일한 장소였다. 먼동이 텄다. 소년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어슬렁어슬렁 그들이 왔던 길을 따라 걸어왔다. 여자와 노인도 소년 옆에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짐승을 가리켰다. 그들은 말없이 짐승을 주시했다. 짐승은 장애물을 만나면 날렵하게 기어올라 뛰어내렸다가 사라진 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세종로 네거리에 이른 짐승은 마치 그들이 있는 곳을 안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짐승은 비각 앞을 지나 종로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의자와 탁자를 이용해 문을 막은 뒤 잠자리를 만들었다. 노인은 기침을 하다 피를 토했다. 여자는 하혈을 했다. 뭉근한 피 냄새가 공기 중에 섞였다. 마지막으로 소년이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들은 방금 지루한 회의를 마친 사람들처럼 몸을 뉘었다. 그러나 누구도 쉬이 잠들지는 못했다. 소년의 옆구리로 개가 파고들었다. 소년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인이 먼저 잠들었다. 이윽고 여자도 잠들었다. 조금 뒤 개도 잠들었다. 소년은 노인과 여자와 개의 신음을 차례차례 들었다. 신음은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그리고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소년은 이리저리 뒤척였다. 두통이 강렬해졌다. 그럴수록 잠들고 싶은 욕망도 사나워졌다. 소년은 비몽사몽 상태에서 사무실로 출근하는 이들의 소리를 한쪽 귀로 들었다. 분주한 발소리와 더불어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에 냉장고나 정수기가 가동되는 듯한 소음도 들렸다. 전기주전자가 김을 뿜어내는 소리, 찻잔에 커피를 따르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걸레질하는 소리, 화분에 물을 주는 소리,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날린 종이들이 허공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전화기가 울어댔고 컴퓨터가 켜졌으며, 팩스가 수신된 정보를 출력했고 예열을 마친 복사기의 정보창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오래된 형광등이 징징 울어댔고 가벼운 진동이 건물 전체를 몇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이 모든 소리들이 영상으로 바뀌었다. 망사로 된 커튼을 통해 바라보는 것 같은 영상들이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잠들기 전에 들었던 소리들이 여전히 들려온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자 적어도 회의실 밖의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규칙적으로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려 시도하지는 않았다. 노크를 한 자들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무례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몇 번 문을 두드렸다가 얌전히 뒤돌아섰으니 말이다. 그렇게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몇 번의 노크 뒤에 멀어져 갔다. 소년은 쓰라린 눈을 비비며 블라인드 틈을 벌려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대낮을 소유한 자들은 엉망이 된 거리를 아무런 불평 없이 무심한 듯 그러나 바쁜 일에 쫓기듯 오갔다. 저 멀리 서울역사 박물관 위로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광화문은 모두 열렸고 근정전 앞은 관람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리들로 가득했다.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삼삼오오 모여 앉았고 누군가는 세종대왕상에 기어올랐다. 어느 누가 저 광경을 보고도 이 세계가 멸망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소년은 창 아래 기대어 앉았다. 모욕 받은 사람처럼 소년의 얼굴은 엷게 달아올랐다. 오후가 저물었다. 저녁이 되었어도 노인과 여자는 깨어나지 못했다. 이대로 숨을 거둔다 해도 별일이 아닐 듯했다. 소년은 노인의 이마를 짚어 본 뒤 여자의 배에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해가 지자 소음이 사라졌다. 소년은 노인에게 물과 약을 먹였다. 여자는 약병에서 영양제를 두 알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누구도 원하지 않아 끼니는 걸렀다. 노인과 여자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밤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해질 무렵 노인과 여자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승달이 재빠르게 떴다가 사라졌다. 어김없이 밤이 되었다. 노인과 여자가 기운을 되찾은 걸 본 소년은 까무러치듯 바닥에 누웠다. 이틀 동안 긴장한 채 보초를 선 탓이었다. 첫새벽에 노인과 여자가 소년을 깨웠다. 소년은 귀를 기울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소년에게 물을 먹여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훤히 밝았지만 아무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년은 의문에 휩싸인 채 잠들었다. 소년은 몇 번씩이나 깨어났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휴일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정말 그날이 휴일인 것만 같았다. 소년은 어느 날처럼 휴일 내내 열병을 앓았다. 곪은 상처에서 진물이 흘렀다. 진물은 굳어 벌어진 상처에 눈곱처럼 끼었다.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그 차가운 칼날을 심장에 박아버리고 싶은 열망에 시달렸다. 소년도 헛소리를 했다. 그 사이 식수는 바닥을 보였다. 개가 혀를 내밀고 헐떡였다. 도시의 하늘에 떠오른 해는 개의 혓바닥을 닮았다.

 

 

 

    《문장웹진 10월호》

 

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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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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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소년의 모습이 애처로워보여요..

    • 2013-10-22 04:39:1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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