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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프리버드

  • 작성일 2013-11-01
  • 조회수 1,070

 

 

빙하기 프리버드

 

 

박상

 


 

 

삽화_빙하기-프리버드

 

 

    ‘이러다 미치는 것 아닐까.’
    눈을 뜬 범준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서 진하고 역겨운 술 냄새가 피어 나왔다. 미간에 주름이 절로 잡혔다.
    ‘어제 또 미친 사람처럼 마시고 말았구나. 이래서야 미치지 않았다고 할 면목이 없겠어.’
    그때 무언가가 꼬리를 세우고 그의 발 앞을 스쳐갔다. 범준의 집에 함께 사는 고양이였다.
    “안녀엉?”
    고양이가 말했다. 딱 사람의 언어로 들렸다. 범준은 깜짝 놀랐다.
    ‘고양이가 하는 말이 들리다니. 나는 이미 미친 걸까.’
    고양이는 뺨에 손을 대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범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 범준은 잠시 후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정말 네가 말했니?”
    “찌르릉 술 냄새!”
    “아아. 정말 고양이가 말을 해!”
    범준은 침대에서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의 통증은 현실적이었다. 범준은 관점을 바꿔 이 일을 신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라도 해서 미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들은 늘 말하고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내가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일 거야.’

 

    “밥 없어, 밥 없다고.”
    일반적으로 ‘냐아아옹’처럼 들려야 할 소리가 동시통역된 듯 범준의 고막을 때려 왔다. 그가 놀라고만 있자 고양이가 발톱으로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범준은 머리를 흔들며 시계를 보았다. 오후 여섯 시였다. 너무 많이 자버렸다. 지금까지 자다니. 배고플 테지.
    범준은 고양이 밥그릇을 깨끗이 닦아 사료를 가득 부어 주고 물그릇에도 새로운 물을 받아 준 다음 자신을 위해서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이번엔 냉장고 문짝이 말했다.
    “얼씨구. 일어나자마자 술부터 꺼내? 미친놈.”
    냉장고의 목소리는 하도 냉정해서 냉면육수 같았다. 범준은 맥주를 든 채 차마 따지 못하고 네? 저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답은 없었다. 냉장고가 낸 소린지 스스로의 양심이 낸 소리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범준의 집 꼬락서니는 꾸에에 거지 같았다. 한쪽 걸개가 터진 커튼은 조악한 무늬와 질감을 뽐내며 방치되어 있었고 방의 모서리마다 빈 맥주 깡통들이 절망적으로 쌓여 있었다. 책장에는 ‘듣보잡’ 소설가 Sang Park의 책들만 몇 권 꽂혀 있어 그 형편없는 풍경에 크게 일조하고 있었다.
    단지 그의 방에는 특별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옛날 축음기처럼 금속 나팔 같은 게 달린 빈티지 턴테이블. 범준이 며칠 전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다.’ 하고 충동 구매해 버린 것이었다.
    ‘이게 있으니 차츰 괜찮아질 거야.’
    범준은 냉장고의 눈치를 보다 캔 맥주를 땄다. 턴테이블은 그가 맥주를 따는 행위를 힐난하지 않았다.

 

    범준이 가진 유일한 엘피인 레너드 스키너드 LYNYRD SKYNYRD의 앨범이 턴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손가락 하나가 뻗어 나와 범준의 고막을 매끄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질감은 귀를 대신 파주시던 어머니 같았다.
    하지만 범준은 잠시 멈칫했다. 음악을 듣는 행위가 더 미치고 싶어서인지 미치지 않고 싶어서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확인해 보자.’
    범준은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레너드 스키너드라는 밴드의 철자를 종이에 써보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의 뇌리에 서먹한 피로감이 찾아왔다. 철자는 까맣게 안 떠오르고 어제 일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홍대 어디쯤이었나,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데 참지 못하고 또 술을 마시러 기어 들어간 바가 있었다.
    오십대로 보이는 바텐더가 잔을 닦으며 눈인사를 했다. 범준은 살짝 비틀린 발음으로 주문했다.
    “오뎅탕에 데킬라 선라이즈를 부어 줘요.”
    “어묵탕이라고 해야 옳아. 아무튼 그런 조합은 이상할 텐데?”
    “상관없어요. 세상이 딱 그런걸요.”
    범준은 취한 와중에도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알아듣는데 웬 맞춤법 교정질이람.’
    범준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바텐더가 눈치 챈 듯 다시 말했다.
    “미안, 내가 그런 세대라서 그래. 우리 땐 옳지 않은 걸 참을 수 없었거든. 자, 여기 레코드가 잔뜩 있지? 신청하면 바로 틀어 줄게.”
    바텐더가 디제이를 겸하는지 자신의 등 뒤에 수북이 꽂힌 레코드들을 가리켰다. 범준은 호기롭게 메모지를 뽑아들고 레너드 스키너드의 음악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까다로운 철자 때문에 뇌가 주먹으로 노크하듯 탕탕 하고 마빡 앞쪽을 두드려 왔다.
    - 어이, 그걸 나보고 기억해 내라고?
    - 당연하지. 좋아하는 밴드의 스펠을 외우는 것은 팬의 의무이자 매혹이며 머리를 쓸 때 뇌가 반항하는 걸 묵과하는 건 네안데르탈인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인간이 두뇌를 쓰는 일을 웃기는 것으로 만들면 안 돼. 더구나 넌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깜빡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머리를 가졌잖아.
라고 자신의 뇌를 설득했지만 범준의 뇌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멍청해져 있었다. 범준은 할 수 없이 한글로 쭉쭉 갈겨썼다.
    - 레너드 스키너드. 프리버드. 꼭 틀어 주세요♡
    그의 신청곡은 범준이 데킬라 선라이즈 어묵탕을 한 모금 마시며 뭐 이런 맛이 다 있나, 하고 기겁한 뒤 이것이야말로 바로 엉망이 된 현실과 똑같은 맛이라며 좌절한 뒤 다시 한 모금 마시기를 다섯 번 반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술에 취해 한글로도 철자를 잘못 적은 게 아닐까 그는 부끄러워하며 쓸쓸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술이 깬 맨정신에도 그 철자를 적지 못하면 자신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취업을 못 하고 있을망정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철자도 모르면 되나.
    범준은 호흡을 가다듬고 종이 위에 영어 스펠을 적어 나갔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하이힐 굽이 부러지는 바람에 발을 삐끗했어요. 중심이 무너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가을볕이 너무 눈부셔서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죠. 균형이 맞지 않는 몸을 애써 곧추세워 가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고, 지하철역까지 다리를 절며 걸음을 옮겼던 거예요. 발목을 접지를 때 투피스 옆 자락이 찢어져 속옷이 내비쳤지만 미처 그걸 알아차릴 틈도 없이……. 부러진 굽이 여전히 내가 걸어온 길의 뒤편에 찝찝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며 계속 타인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해는 왜 그렇게 눈이 부시던지…….”

 

    LENYARD SKINERD

 

    써놓고 보니 어쩐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피 재킷을 보고 잽싸게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재킷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턴테이블은 뱅뱅 돌고 있어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때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다.
    “잘 먹었어. 고마워서 하는 말인데 내 털 좀 핥을래? 아님 거기 오뎅 좀 흔들든가?”
    식사를 마친 고양이가 범준을 빤히 보며 말했다. 농담인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집사의 서열이 고양이보다 낮다지만 핥아 주는 것까진 못 하겠고 그는 고양이가 말한 오뎅을 쳐다보았다. 맞춤법에 맞게 표현하자면 털 달린 어묵 꼬치 모양으로 생긴 고양이 장난감이었다. 범준은 그걸 흔드는 게 낫다고 판단한 뒤 손끝에 쥐고 빙빙 돌리며 흔들었다.
    “얏호, 쥐새끼다. 때찌때찌!”
    고양이는 신나는 표정으로 그 어묵꼬치 장난감을 공격했다. 잡혀 줄 듯 말 듯 희롱하고 쥐가 기어가는 것처럼 흉내 내 주며 놀다가 범준은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뎅이 일본 말이고 잘못 쓴 거라면 어묵은 뭐 중국 한자어 아닌가. 조금이라도 더 웃긴 쪽을 쓰면 되는 것 아냐? 웃기는 음식 이름은 흔하지 않잖아.
    범준은 쥐, 일본, 오뎅 등등을 생각하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오뎅을 구석에 집어던졌다. 고양이가 쫓아가 오뎅을 물고 서서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마치 식민지 시절 친일파에게 똥침을 놓은 독립운동가처럼 보였다.
    “더 안 놀아?”
    “넌 말도 할 줄 알면서 어째서 스스로 놀지 못하는 거니? 내가 안 일어나면 밥도 혼자 못 챙겨먹고. 알아서 하면 배도 안 고프고 좋잖아.”
    고양이는 약간 삐친 표정으로 물고 있던 어묵 장난감을 툭 뱉어냈다.
    “집사. 나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반려동물와 함께 사는 환희를 망각해선 안 돼. 나도 알아서 하고 싶지만 네가 그 역할을 자청했잖아. 길바닥에서 쓰레기봉지를 뒤지던 나를 데려왔을 때부터 그러기로 한 거 아냐? 우린 신세가 비슷하니 서로 위로하고 살자며? 내가 모든 걸 알아서 하면 나로선 뭔가 당신과 약속을 어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리고 당신은 당장 외로워질걸?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 내가 나가버리면 당신은 의지할 게 술밖에 없잖아. 그럼 삶이 얼마나 불행해? 참. 그리고 당신, 생각났는데 멸치를 주방 찬장 안에 넣어 두잖아. 갑자기 내가 막 불행하네. 내가 딱 냄새 맡아 놨어. 하루에 한 마리씩 주기로 했잖아. 속이고, 숨기고 약속을 어기는 게 유행이야? 그런 곳에 숨겨 두고 말을 이렇게 해?”
    고양이는 범준을 앞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귀여운 찹쌀떡 모양의 앞발로는 찬장의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힘들어 보였다. 범준은 미안한 마음에 일어나 찬장 문을 열고 고양이용 저염 멸치 한 마리를 꺼내 주었다.
    “미안, 화 풀어.”
    “얏호, 멸치 춉춉춉!”
    고양이는 방금의 까다로운 눈빛을 언제 그랬냐는 듯 날름 거두고 멸치를 향해 펄쩍 뛰었다.

 

    고양이가 멸치를 아작아작 씹어대는 동안 범준은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하루 종일 햇빛에 두들겨 맞아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것 같은 저녁 공기가 그의 허파로 밀려들었다. 발코니에 놓인 티 테이블에 레너스 스키너드의 앨범 재킷이 있었다. 앨범은 마치 팬티를 반쯤 올리다 딱 걸린 듯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그는 재킷을 뒤집어 스펠을 확인했다.

 

    LYNYRD SKYNYRD

 

    범준이 노트에 쓴 철자와 달랐다. 그는 틀리고 말았다는 자책감에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저질렀다.
    ‘아아! 난 정말 미친 걸까.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맨정신이어야 해. 이제 곧 즐거운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전화가 올 거야.’
    그는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잠시 취업했던 회사를 떠올렸다. 군대식으로 조직을 꾸리며 그의 상식을 짓밟던 회사, 계약직으로 쥐어짜내다 껌처럼 그를 내뱉어버린 회사.
    “매너가 없어. 매너가.”

 

    범준은 자신이 견디지 못한 부조리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노트를 꺼내 레너스 스키너드의 제대로 된 철자를 써나갔다. 학창 시절에 영어 단어를 갈겨쓰며 외울 때처럼. 하지만 아무리 써도 이 낯선 철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아저씨들은 밴드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범준은 허공에 대고 질문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어려운 스펠로 밴드 이름을 지은 이유는 단순히 팬의 의무를 무겁게 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야. 그것은 인간의 축복받은 지능을 실수로라도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일깨우려는 밴드의 배려일 수도 있어. 레너드 스키너드의 철자도 쓸 줄 모르는 비이성적인 상태를 경계하라는 거지.”
    대체 누가 말하는 걸까. 범준은 윤발이를 돌아보았다. 멸치를 춉춉춉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양이와는 목소리도 달랐다. 냉장고도 침묵하고 있었다.
    “누구시오? 누가 떠드는 겁니까?”
    범준은 사방을 둘러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쁜 사람은 쉴 틈 없이 머리를 쓰고 있어. 계속 나쁜 짓을 일삼아야 하니까. 하지만 더 나쁜 사람은 누군가 머리를 써주길 기다리면서 당하고만 있는 놈들이지. 바로, 너 같은 놈 말이야. 불평만 하거나 막연한 희망에만 사로잡혀 사는 건 정의롭지 않아. 맞서 싸우지도 않고 회피하면서 술만 마시고 있잖아. 넌 정말 형편없어. 타조 같아.”
    타조? 그런 저속한 표현을 쓰다니. 대체 어떤 놈일까. 범준은 다시 주위를 360도 돌아보았다. 고양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은 생명이 없는 사물이었다. 설혹 개수대나 침대, 커튼이 말을 하나 싶었지만 방금 말한 어조와 같은 표정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아, 정말 왜 이래. 이젠 환청까지 듣는 건가. 아니면 집에 귀신이?”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파뿌리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신같은 소리하네. 나는 너 자신이다.”
의자 앞에 놓인 거울을 무심코 쳐다보자 거울 속의 범준 자신이 입을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범준은 무서워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들고 있던 캔 맥주가 주르르 흘렀다.

 

    범준은 한참 기절해 있었다. 잠시 후 멸치를 다 먹은 고양이가 다가와서 범준의 발가락을 깨물었다. 그가 반응이 없자 고양이는 범준의 배 위에 올라타 앞발로 꾹꾹 가슴을 눌러댔다.
    “또 자? 안 일어나면 할퀸다.”
    범준이 눈을 뜨자 고양이가 말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깨웠구나. 고마워.”
    고양이는 범준의 배 위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범준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폴짝 뛰어 책장 위로 올라갔다.
    범준은 그 능력이 부러웠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 나도 머리를 지킬 수 있을 텐데.
    “나는 깨어 있지도 못하고, 너처럼 점프를 잘하지도 못하는구나.”
    고양이는 책장 위에서 그루밍을 하며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범준은 고양이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제는 워낙 추워서 뜨끈한 오뎅탕이 먹고 싶었어. 그래서 오뎅을 사러 나갔는데 그만 오징어를 사고 말았어. 이상한 현수막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그만 찰리 채플린 흉내를 내며 걸었어. 나는 견디면서 오징어를 들고 오다가 현수막을 또 보았어. 두 현수막엔 공통적으로 아주 화가 났거나 광기에 찬 문구들이 적혀 있었어. 좌익용공, 근절, 애국충정, 총살 같은 단어들이 마구 섞여 있는데 한국말인데도 문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 이성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거나 이성을 박살내고 싶어 하는 문장 같았어. 대체 누가 왜 그런 궁서체 문구를 만들어서 길거리마다 걸어 놓는 걸까. 혼란이 극에 달했어. 절대 웃기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어.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아서 막 무시하고 싶었어. 그때 누군가 뒤에서 어이, 사이코! 하고 불렀어. 돌아보니 중학교 동창생이었어. 중학교 때 내 별명이 사이코였지. 중학생들은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별명을 붙이지. 난 그냥 생긴 게 그렇게 생겼대. 재미있는 건 그 녀석이 어이, 사이코! 하고 뒤에서 부를 때 길에 다섯 명 정도 걷고 있었는데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돌아보는 거야. 세상엔 사이코가 참 많나 봐. 그 친구와 나는 뜨뜻한 김이 훨훨 풍기는 오뎅바에 들어가 환담을 나누었지. 거긴 새치름한 오뎅바였어. 어묵바 따위가 아니었다고. 그곳이 얼마나 융숭한 곳이었는지 설명해도 고양이들은 잘 모를 거야. 이 빙하기에 그토록 따듯한 곳이 존재한다니 나는 눈물이 났지. 친구와 나는 정치적 견해가 비슷해서 이 시국의 갖은 추행과 겁탈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술을 마구 마셨지. 그러나 한숨만 나오고 답이 안 나와 좋아하는 연예인의 성생활을 상상하는 토크쇼로 화제를 전환했다가 기분이 추접해지는 바람에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이차로 호프집에서 땅콩에 맥주를 많이 마셨던 것이지. 그러고는 둘 다 완전히 취해버려 땅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버렸어. 절대 웃기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어. 점프는커녕 땅바닥 쪽으로 더 가라앉아 버렸지. 오징어 봉지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그러니까 오뎅을 사러 갔다가 동창생을 만나 취해버리는 건 본질을 놓치는 것이었지.”

 

    윤발이는 범준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책상머리에 앉아 레너드 스키너드라는 철자를 다시 써 갈겨 나갔다. 하지만 밴드의 철자는 미칠 것 같은, 아니 미친 것 같은 그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음악이 멈춰 있었다. 범준은 벌떡 일어나 엄숙한 심정으로 프리버드라는 곡을 턴테이블에 다시 건 뒤 볼륨을 높였다.
    “그래도 내겐 이게 있어. 레너드 스키너드의 Freebird 앞부분을 듣고 있으면 이 세상의 알쏭달쏭 골치 아픈 고민들을 잊어도 돼.”

 

    음악을 크게 틀자 범준의 몸은 슬슬 전날 마신 술의 식민지배에서 깨어났다. 이래서 음악을 듣는 거지. 갑자기 스피커에서 새들이 튀어나와 펄펄 날아다녔다.
    “이건 또 뭐임?”
    범준은 깜짝 놀랐다.
    “너에게 자유를 줄게. 우리들처럼.” 그 새들이 지저귀었다.
    “자유?”
    스피커에선 더 많은 프리버드가 튀어나왔다. 새들은 마음껏 날아다녔다. 고양이가 눈이 동그래진 채 내려와 새들을 잡으려고 점프해댔다. 범준은 자신의 눈에만 그 새들이 보이는 건 아니라는 점에 안도했다.
    “우리들이 널 위로해 주지. 많이 봐준 거야.”
    범준은 음악에 몸을 맡겼다. 음악은 공간을 점점 지배해 갔고, 그의 자취방에 있는 사물들이 하나씩 떠오르더니 급기야 새들과 함께 휩싸이며 날기 시작했다. 방 안의 라면 냄비가 날고 변기에선 뚜껑이 날고 앨범에선 후반 기타 솔로 부분이 날고 범준의 몸도 붕 떠올라 날아다녔다.

 

    Cause I'm As a Bird Now

 

    범준은 음악소리와 함께 마구 허공을 유영했다. 머리가 고통스럽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음악소리가 바깥으로도 나갈 수 있게 해줬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자유로워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때 앞집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어떤 건장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줄을 세운 군복을 입고 있었다.
    “미친놈. 공공주택에서 정숙을 지키지 않다니! 음량을 즉각 감량한다. 실시!”
    범준은 그 말을 듣지 못하고 계속 춤을 추다 남자에게 로킥 세 대, 하이킥 다섯 대를 얻어맞았다. 그제야 범준의 정신줄이 돌아왔다. 그리고 앞집 남자에게 피해를 끼쳐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음악을 껐다. 갑자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담배나 사러 가지.”
    그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허파였다. 그 말투는 명령조였다. 이제 내 신체 장기가 하는 말까지 들리는 건가? 범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뇌의 명령체계는 가차 없이 범준의 몸을 움직여 갔다. 범준은 자신의 신체를 이루는 기관들이 이미 뼛속까지 한통속이라는 걸 알았다. 딱 한 군데만 아파도 다른 부위들마저 꼼짝 못하는 걸 보면 서로 짜고 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범준은 할 수 없이 터덜터덜 거리로 나섰다. 밤이 깊어 가는 거리는 답답할 만큼 어두웠고, 술에 취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최신 유령 댄스를 추는 것 같았다. 범준은 어제 오뎅을 사러 나왔던 시간과 비슷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때도 어두웠고 몇몇은 술에 취해 걸어 다녔으니까. 이런 시간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담배를 사러 나오는 심정은 몹시 괴팍했다.
    “오오, 레너드 스키너드 아니야?”
    범준의 귀가 벙긋했다. 귀는 담배 가게 지하에 있는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가리켰다. 범준은 방 안에서 하도 레너드 스키너드를 들어서 환청이 공명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귀가 화를 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지금 현장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그래 레너드 스키너드 맞는 것 같아. 바 이름이 프리버드잖아.”
    시각이 청각을 도와 말했다. 과연 범준에게도 Free Bird라는 간판이 보였다.

 

    거기 너, 걸렸어. 따라와. 음악소리가 말했다. 평소 레너드 스키너드의 말투와는 조금 달랐지만 범준은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새로 생긴 바인가 보네. 담배를 뜯으며 바 문을 열자마자 한대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앗, 속았다. 범준의 무릎이 실망감으로 잠시 휘청했다.
    그래도 술집이잖아. 나쁠 건 없어. 목구멍이 외쳤다. 글쎄 난 좀 그런데. 간이 말했다. 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홀 중앙에 커다란 디지털시계가 걸려 있었다. 오후 7시였다. 그는 바텐더 앞에 나열된 의자들 중에서 가장 인상 좋아 보이는 놈에게 앉았다. 제기랄. 하고 의자가 말했다. 꼬마들은 모두 미쳐버렸네. 한대수의 노랫말이 섬뜩하게 범준의 귓불을 스쳐갔다.
    “미안. 진짜 레너드 스키너드인 줄 알았어.”
    앉자마자 시각이 범준에게 사과했다. 청각은 모른 체하며 열심히 한대수의 음악을 듣는 척했다. 범준은 청각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
    그는 잭다니엘을 더블로 주문했다.
    왜 술을 주문하는 거냐? 마음이 말했다. 기분이 안 좋아. 범준은 대답해 줬다.
    기분? 그놈은 또 누구야? 마음에게서 질투심이 느껴졌다. 질투심은 또 누구야? 범준은 끝이 없을 것 같아 강제로 마음을 닫았다.

 

    “박범준이 오늘 또 왔네. 어젠 엄청 취했던데.”
    바텐더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보니 안면이 있는 대학 선배였다.
    “오, 선배!”
    “매일 술 마시러 오고, 요즘 뭐 해?”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럼 백수인 거야? 정치인인 거야?”
    “실은 취업준비 중이에요.”
    “그랬구나. 그럼 우주여행은 다른 사람이 준비하고 있겠군. 잭다니엘에 얼음 넣을까?
    “아예 빙하를 넣어 줘요.”
    “빙하라, 요즘 세상엔 안 웃기는 유머가 넘쳐흐르지.”
    바텐더 형은 잭다니엘과 빙하를 가지러 돌아섰다. 벽에 레코드가 잔뜩 꽂혀 있었다. 범준은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조금 욱신거렸다.

 

    범준의 옆 테이블에는 촌스러운 점퍼를 걸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인상은 악동 같은 눈매에 어쩐지 탐욕의 샘처럼 보이는 모공들과 날름거리는 혓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범준은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옆에 앉은 여자에게 안마를 받으며 못생긴 게 서비스는 좋네. 라고 말하고 있어서 딱 싫었다.
    범준은 잭다니엘을 한 번에 다 비운 뒤 바텐더 선배에게 다섯 잔이나 더 주문해서 마셨다. 취기가 돌자 범준의 머리가 무례해졌다. 그는 대뜸 촌스러운 점퍼에게 말을 걸었다.
    “닮았네. 악당. 거짓말쟁이.”
    “거기 자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욕심꾸러기, 사기꾼.”
    촌스러운 점퍼 사내는 범준을 잠시 노려보더니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대노했다.
    “감히 시건방을 떨어?”
    범준은 재떨이를 가까스로 피했지만 넘어지면서 신발이 벗겨져 버렸다. 뛰어라 염소야 새날을 맞으러. 한대수가 계속해서 노래했다. 범준은 쓸쓸한 마음에 맨발로 염소처럼 뛰었다.
    “날씨가 추우니까 밖에서 들어오면 술이 빨리 취하나 봐요. 어쩜 좋아. 이런 빙하기가 계속되면 아이스크림들도 다 얼어 죽을 텐데.”
    바텐더가 촌스러운 점퍼의 화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범준에게 다가와 어깨를 잡고 진정시켰다.
    “제발 염소처럼 뛰는 것 좀 그만둬.”
    범준은 간절히 새날을 맞고 싶었지만 그만 뛰고 바텐더에게 물었다.
    “선배, 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지금 내 상태가 말이 돼?”
    바텐더 형은 범준에게 한숨을 뱉어냈다.
    “아, 어디서 머리를 맞고 왔니? 넌 지금 도대체 지능이 없어. 새 대가리 같아.” 바텐더 형이 말했다.
    촌스러운 점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건방진 자식. 인생이 장난인 줄 알아! 젊은 놈이 조금 춥다고 정신줄을 놓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범준은 가뜩이나 촌스러운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울컥했다. 그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모든 추위가 모든 폐해잖아. 조금 춥다고? 나는 사람들이 모두 따듯하게 살길 바랐어. 하지만 따듯한 건 아주 일부뿐이야. 난로도 그들이 다 가지고 있잖아. 나머진 모두 추워서 얼어 가고 있지.”

 

    “나한테 그러지 말아요. 난 춥지 않아.”
    멀리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외국인처럼 생겼는데 조금 고약해 보이고 다부진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엉망으로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저 사람 누구예요?”
    범준은 바텐더에게 물었다.
    “저스틱스.”
    “무슨 저스틱스가 술이 떡이 돼 있어요?”
    “몰라, 저런 지 꽤 됐어.”
    가까이 가보니 저스틱스라고 불린 존재는 마구 혼잣말을 정의하고 있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건 망령이야. 망령이 여기저기서 마구 부활해서 날뛰어. 아아, 망령이 날마다 나를 겁탈해. 아아, 이놈들이 내 똥구멍을! 아아 거긴 안 돼.”
    정의는 눈이 돌아간 채 엉덩이 쪽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미 늦었어.” 바텐더 형이 말했다.

 

    범준은 저스틱스가 불쌍했다.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고 싶었다. 저스틱스에게 다가가자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났다. 몸 여기저기는 피멍과 찢긴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상태로 술이나 퍼마시고 해롱거리면 곤란해요. 치료를 받아야 해요.”
    범준은 저스틱스를 들쳐 업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땅이 흔들렸다. 아, 땅을 흔들리게 하다니!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이 동시에 말했다. 뭐, 그쯤이야. 술기운이 대답했다. 범준은 저스틱스와 함께 자빠져 그를 더 다치게 할까 봐 그냥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력감에 휩싸여 술을 마구 마셨다. 범준은 다시 프리버드를 듣고 싶었다.
    “선배, 프리버드 좀 틀어 줘! 어서! 빨리! 프리버드!”
    범준은 바텐더에게 부탁했다.
    “프리버드? 취했으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꺼져.”
    촌스러운 점퍼 사내가 바텐더 대신 대답했다.
    “세상에. 지금 헛소리 아니면 도대체 무슨 소릴 해야 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빙하기를 만들었어. 미래, 희망, 행복 같은 단어를 예비군 훈련에 보내버렸어.”
    촌스러운 점퍼 사내는 범준을 한참 주시하더니 말했다.
    “이놈 봐라. 말 많은 걸 보니 종북 아냐?”
    범준은 그 말을 듣고 그 논리력과 사고체계의 어이없음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뇌의 판단력 부분이 디스코 팡팡을 탄 것처럼 비틀거렸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미치거나 취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범준은 생각했다. 신체 조직이 제대로 근무를 서지 못하고 급기야 태만해진다. 그래서야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다.
    범준은 바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가혹한 슬픔이 그를 업어치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 해야 했다. 범준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다시 일어섰다. 그러자 촌스러운 점퍼 사내가 다가왔다.
    “술이 깨게 해주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최고야.”
    사내는 범준에게 브라질리언 킥 한 대, 사커 킥 두 대, 레인보 어택 세 대를 날렸다. 범준은 처맞는 순간 세상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범준은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촌스러운 점퍼도 저스틱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눈을 뜨니, 의식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미안,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다녀왔어.” 의식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자 범준은 화가 났다.
    “어째서 다 거짓말만 해.”

 

    의식이 돌아오자 범준은 지난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바였고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버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오. 이건 정말 멋진 음악이야. 선배, 혹시 스펠은 쓸 줄 알아?”
    바텐더는 범준에게 잭다니엘을 한 잔 건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레너드 스키너드의 스펠을 바텐더가 왜 쓸 줄 알아야 돼? 그런 건 앨라배마 주 고위공무원 기출문제 아니야?”
    “미안해요.”
    “사과는 필요 없어. 그딴 걸 왜 해. 아무도 안 하는 걸.”

 

    범준은 술을 입안으로 한 모금 흘려 넣었다. 몹시 술이 마시고 싶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술이 마시고 싶었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술이라고 하더라도 술이 마시고 싶었다. 잭다니엘을 완전히 비운 뒤 타조를 생각했다. 불쌍했다. 타조는 생긴 걸로 웃길 수 있는데 날지도 못한다.
    “한 잔 더 주세요!”
    바텐더는 고개를 저으며 범준에게 더 이상 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술을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술로는 안 돼.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바텐더가 지적했다.
    “견디긴 뭘 견뎌요. 전 이제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아요.”
    바텐더가 한숨을 쉬었다.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아름다움이여. 이 날지 못하는 타조처럼 웃기는 세상이여.”
    범준은 계속 헛소리를 하며 바에서 나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자제품 대리점 앞에 멈춰 섰다. TV에서 심층 분석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빙하기가 한창인데요, 추위에 미쳐 가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 미친 사람들이 대거 발생했고 그들을 상대하다 보니 연쇄적으로 미쳐 가는 분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미친 건 누굽니까?”
    “오래된 욕망들입니다.”
    범준은 뭐라는 거야, 하며 지나쳤다.

 

    집에 도착한 범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바텐더 선배였다.
    “너, 술값을 내지 않고 튀었어. 바른생활 교육이 덜됐군.”
    “형, 나는 냈다고 생각하는데? 오해하는 것 아니에요?”
    “요즘엔 말만 하면 다 오해래! 냈다고 생각하는 너의 생각이 오해야. 난 네가 돈을 내지 않고 째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 우린 서로 술값을 눈감아 줄 만큼 친하진 않아. 난 지긋지긋한 학연, 지연을 경멸해. 난 미치지 않았거든.”

 

    범준은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조금 전까지 바에서 술을 마셨는데 일부는 기억이 나고 일부는 죽었다. 술에 취해 바에서 진상을 부리다 얻어맞은 것만 기억나고 나머지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범준의 뇌세포들 중 하나가 갑자기 범준에게 동료들의 장례비를 요구했다.
    “미안해요, 선배. 저 돈 없어요. 부자들은 세금도 안 내는데 그냥 세상을 원망하세요.”
    “원망? 나는 원망은 절대로 안 해. 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하면 뭐가 달라지나? 원망이 술값이 되나? 이 자식. 우리 세대는 너 같은 놈을 못 참아. 지금보다 훨씬 절망적일 때도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고.”
    “당신들은 세월과 변화에 졌잖아요.”
    “졌다고? 그래. 나는 꿈도 버리고 대의만 쫓으며 살았어. 그랬는데도 이 모양이야. 힘껏 싸운 게 다 허무해.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 너희들은 이런 기분 절대 모를 거야. 그나저나 먹고 살기 힘든데 제대로 긁는군. 너 거기 그대로 있어. 너네 집 알아.”
    바텐더 선배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범준은 바텐더 형이 오길 기다리며 턴테이블에 레너드 스키너드의 프리버드를 재생했다. 볼륨을 적당히 높였다. 고양이가 나타나 말했다.
    “어딜 가서 또 술을 마신 거야? 백수 주제에 술값은 어디서 자꾸 나?”
    범준이 고양이를 잡아 잔소리 수염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동작 그만. 면담이다.”
    범준은 어안렌즈로 문 밖을 보았다. 다시 앞집 군복 사내였다. 면담은 무슨, 다시 폭력을 휘두르겠지?
    범준은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문고리를 마구 잡아당겼다.
    “자네는 퇴폐적인 금지곡을 반복적으로 청취했다. 이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상당한 위해가 되므로 조속히 시건장치를 해제하기 바란다.”
    밖에서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범준은 시끄러운 것이 혐오스러울뿐더러 남자의 어법이 미치도록 거슬려 문을 확 열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시끄러워.”
    군복 사내는 갑자기 범준에게 경례를 했다.
    “송구스럽다. 자녀가 깰 줄은 몰랐다.”
    남자는 범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보니 상당한 각도로 돌아가 있었다. 입에선 침이 흐르고 있었다. 미친 사람 같았다.
    “나도 딸이 있다.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지만 난 한평생 조국을 위해 살았으므로 후회는 없다. 자네에게도 아이가 있었다니. 나는 이제 당신의 두발 상태와 절도 없는 행동을 눈감아 주고 가정에 구보로 귀환한다.”
    범준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빙하기니까.

 

    남자가 가버리자 범준은 자유로워졌다. 프리버드를 다시 틀어 놓았다. 레너드 스키너드는 비행기 사고 때문에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프리버드라는 곡의 첫 부분을 들으며 범준은 구름 속에서 그들이 내미는 손과 악수했다. 새들이 자유로이 나는 하늘.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은 프리버드의 이승이자 저승. 새콤한 사랑을 나누고 프리버드는 구름 속에서 죽고 구름 속에서 다시 태어나 다시 사람들에게 프리버드를 날리지. 세상은 아름다워. 아직 레너드 스키너드의 음악이 흐르잖아.
    사람들에게 프리버드는 항상 메시지를 전달하지. 그 메시지는 욕처럼 들릴 수 있어.
    - Pronounced 'leh-nerd' 'skin-nerd'

 

    그런데 군복 사내가 다시 찾아왔다. 남자의 손에는 모형 소총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짜고짜 총검술을 펼치며 말했다.
    “내 딸을 내놔. 이 방탕한 놈. 내 세월을 돌려 놓아라.”
    범준은 깨달았다. 나는 아직 미친 것도 아니구나. 이 사람이 제대로구나. 이런 남자가 앞집에 사는 건 후쿠시마 앞바다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군복 사내는 범준을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턴테이블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어버렸다. 프리버드가 끊어졌다.
    범준은 빠른 수비전환을 위해 뭔가 방패가 될 만한 것을 들었다. 라면 끓일 때 쓰는 조그마한 냄비의 뚜껑이었다. 그는 남자가 거칠게 펼치는 총검술을 냄비 뚜껑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미친 사내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가마솥 뚜껑이라고 해도 벅찼을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미친 사내에게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한 명 한 명 다 미쳐버리면 누가 남아요?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우선 개인들이 건강해야 한다고요. 저것 봐요, 내 고양이가 냉장고에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잖아요. 겁과 짜증에 잔뜩 움츠려 있는 게 불쌍하지도 않아요?”
    남자는 난폭하게 휘두르던 모형 소총을 두어 번 더 힘없이 휘두르다가 시동이 꺼져 가는 낡은 자동차처럼 쿨럭거렸다. 그리고 범준의 거실 한복판에 소주를 두 병쯤 토했다.
    “이런 나쁜 새끼!” 내 거실이 당장 남자를 욕했다. 거실은 참지 못하겠는지 나쁜 일을 당하고 말았다고 즉시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하지만 경찰보다 먼저 찾아온 사람은 바텐더 선배였다.
    “뭐야, 이 자식 그대로 있잖아? 쫄았나 본데?”

 

    바텐더는 범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하이킥 두 대 로킥 다섯 대를 날렸다. 그 순간 경찰이 출동했다.
    “꼼짝 마라, 이 나쁜 놈.”
    “아냐, 나는 술값을 받으러 왔을 뿐이야.”
    “웃기지 마. 폭력적인 인간들. 여긴 제정신인 놈은 하나도 없는 것 같군.”
    경찰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한 발 발사했다. 공포탄이었다.
    “아니야. 왜 늘 잘못 추산해. 제정신인 놈도 있다고.”
    범준이 외쳤지만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놈은 낯이 익은데?”
    바텐더 선배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게 질질 끌려 나갔다. 경찰 중에는 존경할 만한 사람도 많고 바보도 많지만 이 사람은 후자인 것 같았다.

 

    범준은 주섬주섬 일어나 미친 남자를 소파에 뉘었다. 정수리가 꼭 하이킥에 맞은 것처럼 아팠다. 손으로 만져 보니 피 같은 게 배어 나왔다. 많이 아파? 그의 머리카락이 물었다. 정수리는 피를 흘리며 말을 아꼈다.

 

    범준은 토하다 자빠진 군복 사내를 보자 문득 이렇게 정수리나 아파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친놈이 언제 미친 짓을 리바이벌할지 몰랐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 레너드 스키너드의 음악을 다시 틀었다. 스피커로부터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새는 범준의 어깨에 앉았다가 소파에 누인 남자의 배 위에 내려앉았다가 더 이상 아무데도 내려앉기 싫어졌는지 마구 공중만 날았다. 프리버드의 궤적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창 밖에서 타조가 한 마리 뛰어다니다 쿵 하고 자빠졌다. 세상에! 타조가 자빠지는 걸 보고 말았어. 고양이가 환호했다. 허파가 담배! 하고 소리쳤다. 범준은 담배를 물었다.

 

    그런데 경찰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실수할 뻔했군. 누가 시켰나? 배후가 누구야? 이오네스코? 브라우티건?”
    경찰이 다짜고짜 범준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그의 멱살이 빽 하고 울었다.
    “이것 놔요. 난 레너드 스키너드의 스펠을 쓸 수 있어요.”
    그러자 경찰은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그랬군. 그럴 줄 알았어. 레너드 스키너드 이 녀석. 언젯적 악당이 아직도 활개를 치나.”
    경찰은 눈빛을 부라리며 레너드 스키너드의 앨범을 찾았다. 앨범은 발코니 쪽으로 달아나려다 딱 걸렸다.
    “얍삽한 놈, 거기 서지 못해?”
    경찰은 레너드 스키너드 앨범을 붙잡아 수갑을 채웠다. 팔을 뒤로 꺾인 앨범은 젠장, 이게 몇 번째야, 하고 말했다. 앨범의 다른 곡 심플 맨 Simple Man이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으나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미친 군복 사내가 일어나 경찰과 수갑을 찬 레너드 스키너드를 보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봐주시오. 난 수출 백억 불 달성의 역군이었소.”
    “좋아. 당신은 집에 가. 내 판단이 옳아. 난 단순한 경찰이 아니야.”
    경찰은 범준을 노려보며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게 말이 돼?” 모두가 간 뒤 고양이가 벌떡 점프하며 범준의 머리를 때렸다.
    몹시 아팠지만, 다행히 범준은 기절하지 않았다.

 

    범준은 머리를 심하게 맞고도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우선 내가 추위를 먹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는 잡혀간 레너드 스키너드 앨범에 대한 구명신청을 하려면 서류에 철자를 바르게 적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범준은 노트를 꺼내 LYNYRD SKYNYRD라고 똑똑히 썼다. 이만 번쯤 썼다.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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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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