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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①

  • 작성일 2015-05-04
  • 조회수 1,269


[중편연재]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 (제1회)




장강명



삽화-목성


* 아스타틴 : 원자번호 85번. 매우 불안정하며, 30개의 동위원소가 모두 방사성 붕괴를 한다.

* 란타넘족 : 원자번호 57번 란타넘에서 원자번호 71번 루테튬까지의 희토류 원소. 란타넘, 세륨, 프라세오디뮴, 네오디뮴, 프로메튬, 사마륨, 유로퓸, 가돌리늄, 터븀, 디스프로슘, 홀뮴, 어븀, 툴륨, 이터븀, 루테튬이 있다.




1. 칼리스토


칼리스토는 목성에서 두 번째로 큰 위성이다. 이곳에는 분화구가 많은데, 건물들은 대개 그 분화구 안쪽에 짓는다. 물과 빛을 모으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분화구 안쪽일수록 도심이었고, 가장 밑바닥에 해당하는 평평한 땅은 보통 광장으로 썼다.
부활식이 열리는 장소도 그런 광장 중 하나였다. 나, 사마륨은 이번 부활식의 대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목성권과 토성권을 지도하는 총통, 아스타틴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부활식장 무대 자리를 받았다.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들과 함께 부활식에 참석했다. 육체 재생을 마치고 부활 승인만 기다리는 대상자들은 흥분한 표정들이었다. 개중 몇몇은 배우자나 자녀들보다 너무 젊어 보여서 좀 어색했다. 어떤 부부는 부활 이후 신체 나이를 맞추려고 함께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두 사람 다 부활을 무난히 승인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경우에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스타틴 정부에 혁혁한 공을 세워 남다른 충성심을 보였거나, 대단히 뛰어난 기술을 지닌 인재거나.
몇몇 부활 대상자와 가족들이 나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대담한 부모들은 아이를 데리고 무대에 올라와 내게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나는 형제들 가운데서는 인기가 바닥권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아스타틴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우리 형제를 올림포스의 신에 비유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헤파이스토스의 자리를 차지했다.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지만, 인기도 없고 인지도도 낮은 신.
광장 앞에 세워진 전광판에도 내 얼굴이 나왔다. 전광판을 본 사람들이 내가 있는 자리로 더 몰려들었다. 나는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부활을 축하한다”거나 “행복한 새 삶을 맞으세요” 따위의 인사를 건넸지만,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스타틴만 된다면 이 따위 행사에 오지 않아도 될 텐데.
아스타틴은 결코 너희 같은 것들을 상대하지 않아.
전광판에는 목성권과 토성권의 다른 위성들에서 벌어지는 부활식 현장도 나왔다. 목성과 토성의 위성 곳곳에서 부활식이 시작되었다.
내 형제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란타넘, 세륨, 프라세오디뮴, 네오디뮴, 프로메튬, 유로퓸, 가돌리늄, 터븀, 디스프로슘, 홀뮴, 어븀, 툴륨, 이터븀, 루테튬.
진짜 이름을 받지 못해 원소 이름으로 대신 불리는 가짜 인간들.
유전자와 마지막 죽음 이전의 기억을 공유하는 쌍둥이들.
8년째 부활을 기다리는 중인 나의 경쟁자들.
아스타틴의 그림자들.
이 중에 누가 새로운 아스타틴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방송국은 우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능하면 우리 형제들을 골고루 담으려 애썼다. 그러나 가돌리늄과 루테튬을 카메라가 더 자주 비추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사마륨이 인기 없는 대장장이 신이라면 가돌리늄은 태양신 아폴론, 루테튬은 전쟁 신 아레스에 해당했다. 가돌리늄은 우리 중 가장 인기가 높았고, 다음이 루테튬이었다.
부활식은 모두 다섯 천체에서 열렸다. 목성의 위성인 가니메데와 칼리스토, 에우로파, 그리고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과 엔켈라두스. 우리 형제는 모두 열다섯 명이다. 한 천체에 세 사람씩 가 있었다. 모든 부활식장마다 형제들이 세 사람씩 있었다.
칼리스토에는 나와 유로퓸, 프라세오디뮴이 와 있었다. 유로퓸은 부활식이 시작할 때 딱 맞춰 무대에 올라왔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까닥하고 인사를 나눴다.
부활식 개막 공연이 벌어질 때까지도 프라세오디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또 막판까지 버티다가 최후의 순간에야 모습을 드러내 주목도를 높이는 전략을 쓰려는 게 분명했다. 얄팍한 수였다.
부활식은 아스타틴 이사회에서 대상자들에게 부활 승인을 내리는 순간이 클라이맥스가 되도록 식순이 맞춰져 있었다. 오늘 아스타틴 이사회에서 부활 승인은 세 번째 안건이라고 했다.
“우리 형제 중 한 명은 하늘에 있군.”
옆자리에서 유로퓸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말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서 나는 한동안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하늘에는 경비행기가 한 대 날고 있었다. 경비행기는 곡예비행을 하며 칼리스토의 검은 하늘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글자를 멋지게 썼다.
‘축 부활.’
대기 중에 배출되면 오랫동안 고도를 유지하며 빛을 발하는 섬광입자를 사용한 것 같았다. 몇몇 부활 대상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비행기는 더 현란하게 묘기를 부렸다. 더 긴 문구가 하늘에 나타났다.
‘함께 기뻐합니다. 프라세오디뮴.’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옆에서 유로퓸도 한숨을 쉬었다. 프라세오디뮴 녀석은 정말 저런 행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아스타틴 이사회가 개회했다. 이사회 자체는 조용히 열렸을 테지만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에 있는 부활식장에서는 요란한 폭죽이 터졌다. 나는 이사회 의장석에는 무엇이 앉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아스타틴은 공식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다. 아스타틴의 기억과 의식을 보존하고 있는 아스타틴머신이 의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의장석에 아스타틴머신의 단말기라도 가져다놨을까?
“그렇게 우습게 볼 건 아냐. 저 비행 솜씨는 상당한 수준이거든. 저 경비행기는 제트엔진은 최소한으로 쓰는 형태의 글라이더야. 칼리스토는 중력이 약하지만, 대기도 희박하잖아. 그래서 부력(浮力)을 얻기가 쉽지 않다고.”
유로퓸이 옆에서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프라세오디뮴에 대해 생각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꾸하는 게 귀찮아서 “그렇군.”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이사회 안건보고 앞부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충 듣기로는 첫 번째 안건은 어느 살인 용의자에 대한 판결이었다. 목성과 토성권에서는 17년 만에 벌어진 살인사건이었고, 사형이 구형돼 있어서 특별히 판결을 이사회에서 내리게 돼 있었다.
두 번째 안건은 목성 고리에 몇 천 대를 숨어 있다는 행성 간 유도미사일 제어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이었다. 그 미사일들은 목성 고리를 이루는 우주먼지들 사이에 떠 있는데, 유지비가 꽤 많이 들었다. 원래는 지구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설사 지구의 핵공격으로 목성과 토성의 위성이 궤멸하더라도, 그래서 이곳의 모든 주민이 죽더라도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려는, 이제 와서 보면 좀 지나치지 않느냐는 게 몇몇 이사들의 생각이었다. 지구의 경제 상황이나 기술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목성이나 토성까지 핵미사일 수백 발을 보낼 수준이 못 되었다. 그러니 이주 초기의 공포심을 버리고, 미사일의 반응시간을 조금 길게 잡되 유지비를 덜 들이는 방식으로 운영체제를 바꾸자는 것이 오늘의 안건이었다.
나는 아스타틴머신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다. 제안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아스타틴머신은 자신이 아스타틴의 기억일 뿐, 아스타틴 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스타틴머신이 인간 이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대립각을 세운 적은 지금껏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스타틴머신이 이 안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는지 듣지 못했다. 프라세오디뮴이 탄 경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행사장으로 급강하했기 때문이다. 거의 무대에 부딪칠 기세였다.
“뭐 하는 거야, 저 녀석?”
비행기의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 사이로 유로퓸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처음에 프라세오디뮴이 뭔가 치명적인 조종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부활 승인 안건이 논의될 때에 맞춰 무대 앞에 멋지게 곡예비행으로 착륙하려다 실패한 거라고.
몇 초 뒤에 나는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다. 이건 조종 실수가 아니었다. 경비행기는 무대를, 무대 뒤편에 있는 유로퓸과 나의 자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건 가미가제 공격이었다. 과대망상증 환자, 터무니없는 야심가, 과시욕과 권력욕의 화신인 내 형제가 바보 같은 계획을 꾸민 것이다. 너무 바보 같아서 아무도 대비하지 못한.
내가 유로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나는 무대 뒤편의 철골 구조물로 몸을 날렸다. 경비행기가 무대를 덮치며 굉음을 냈고, 금속 파편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철골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았고, 충격이 거기까지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몸을 던졌다. 강화된 운동신경과 반사속도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높이와 시간이었다.
흙먼지가 시야를 온통 뒤덮었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부활식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활 대상자나 그들의 가족에게 이 사고는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부활식장에 모인 대상자들은 부활 승인이 확정된 사람들이었다. 설사 이 사고로 생명을 잃는다 해도 다음 부활 심사의 대상 자격을 얻는다. 따지고 보면 부활의 순간이 좀 늦춰진 것뿐이다. 이 사고는 오직 우리 형제들에게만 치명적이다. 우리는 부활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중력이 약한 곳이라 흙먼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먼지 연기 속에서 유로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마륨! 거기에 있나? 젠장, 난 부상을 당했어! 한쪽 팔이…….”
그 순간 붉은색으로 빛나는 반원과 녹색으로 빛나는 반원이 한데 엉켜 빙글빙글 돌아가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와 짧은 한숨소리 같은 것이 났다. 적색과 녹색으로 빛나는 비행 물체는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가 균형을 잡더니 목표에 두 번째 타격을 가했다. 뼈와 살이 내려앉는 둔탁한 소리는 이번에도 들렸지만 한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행 물체는 한동안 공중에 떠 있다가 처음에 날아왔던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
부메랑 토마호크였다. 유도장치가 달린 제품이다. 프라세오디뮴 녀석이 이 기계로 우리를 사냥하고 있다. 비행기가 땅에 추락하기 전에 뛰어내린 듯했다. 그도 다른 형제들만큼이나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반사 속도가 빠르니까.
부메랑 토마호크는 적색과 녹색 불빛이 빛나는 걸로 봐서는 따로 개조한 물건은 아니었다. 스포츠용품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의문이 하나 떠올랐고, 곧이어 해답도 알게 되었다.
먼저 떠오른 의문은 이것이었다.
‘저 기계에 달린 유도장치는 시민을 겨냥할 수 없게 돼 있을 텐데. 갑작스러운 경우에도 안전장치가 있어서 시민이나 등록 애완동물에 가까이 가면 감속하게 돼 있을 텐데.’
답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시민이 아니다. 부활을 아직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스타틴의 기억 중 내게 들어온 것은 68퍼센트 정도다.
나는 내가 이미 아스타틴이며, 지금은 단지 내가 나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완전한 아스타틴인 나’와 ‘아스타틴이자 사마륨으로서의 나’가 실은 같은 존재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잠시 제3자의 시각에서 아스타틴을 설명해 보겠다.
아스타틴은 초(超)지능을 얻은 최초의 인간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를 불사(不死)를 획득한 최초의 인간으로 보기도 한다. 법적으로 아스타틴은 3세기 이상 살았으며, 현재는 죽은 상태다. 아스타틴 이사회가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아스타틴은 현재 두 번째 죽음과 세 번째 부활 사이에 있다.
아스타틴은 20세기 후반 지구의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왕치헌이었고, 남자였다. 그는 MIT에서 뇌과학을 전공했고, 자기 몸을 상대로 불법 인체실험을 벌였다. 아마도 나노 머신을 직접 몸에 주입해 뇌신경을 재조직하는 방법으로 초지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나노 머신 알레르기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데, 운 좋게도 그는 나노 머신에 대한 거부 반응이 없는 특이체질이었다.
왕치헌은 초지능을 얻은 뒤 이름을 원자번호 53번인 아이오딘으로 바꿨다. 그리고 연구 주제를 컴퓨터과학으로 틀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인공지능이었던 아이오딘머신을 설계했다. 아이오딘머신이 보급되면서 지구 곳곳에서 인간형 로봇이 사람들의 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아이오딘은 이윽고 분자생물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인간 복제기술과 인간 기억을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연구에서 혁명적인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는 이 연구 결과 대부분을 비밀에 부쳤다.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연구였다.
다음으로 그는 우주물리학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아스타틴드라이브의 전신인 아이오딘드라이브를 개발했다. 아이오딘드라이브는 기계장치 없이 전자기력을 그대로 추진력으로 전환했다. 지구의 물리학자들은 아이오딘드라이브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엔진’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이 드라이브를 사용한 유인 우주선이 보름 만에 토성에 도달하자 그런 비난은 쏙 들어갔다. 우주선 안에는 물론 아이오딘 자신이 타고 있었다.
토성 착륙 과정은 TV로 생중계되었다. 지구의 중남미 국가들이 의회를 포기하고 병렬아이오딘머신에 주요 정책 결정을 맡긴 것도 이 즈음이다.
토성에서 돌아온 아이오딘은 자신이 병렬아이오딘머신 600대와 의식을 통합해 아스타틴이라는 새로운 인격체로 거듭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아스타틴은 병렬아이오딘머신 3만 대와 기능이 맞먹는 아스타틴머신을 개발했으며, 이후 아스타틴머신과 자신의 의식을 다시 통합했다.
이때쯤 지구에서는 이미 아스타틴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비판자들은 아스타틴이, 또는 왕치헌이,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될 영역을 마구 휘젓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신문에 사설을 쓰고, 비판 결의안을 채택하고, 아스타틴 빌딩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물론 아스타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스타틴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다수였다. 아스타틴의 팬클럽도 있었고, 아스타틴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왔다.
아스타틴 그룹이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테라포밍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마침내 대중도 폭발했다.
“목성의 위성들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어느 천체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반드시 전 인류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설사 그 사람이 아무리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초인이라 해도!”
사람들은 외쳤다.
아스타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목성의 위성들을 사람이 살기 적합하게 바꾸든 폭파시키든 그게 나머지 인류와 무슨 상관이지? 여태까지 이 위성들로 조금의 이익이나 손해를 본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나? 목성의 위성이 인류 전체의 것이라고? 그러면 와서 테라포밍을 막아 보든가? 지금은 못 오더라도 인류의 후손들은 목성에 올 수 있다고? 그 후손들은 목성의 위성을 살기 좋게 바꾼 데 대해 내게 감사할걸? 이게 아스타틴의 생각이었다.
국제연합이 아스타틴에 대한 규탄 성명서를 채택했다. 환경단체들은 거리에서 아스타틴의 얼굴 위에 X자를 그린 포스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 목성으로 우주선을 보낼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국제연합에서도 규탄 성명서를 채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많은 국가들이 아스타틴 그룹과 무역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스타틴 그룹은 지구의 강대국 네 나라를 합친 것보다 경제 규모가 더 컸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부메랑 토마호크는 허가된 싸움터나 전투장에서 유전자조작으로 만든 괴물을 사냥하거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뇌(無腦) 인간들과 구식 전투를 벌이는 데 쓰는 물건이다. 안전장치는 아마 시각과 청각을 활용할 것이다. 어쩌면 적외선도 이용할지 모르지만 열(熱)카메라는 해상도가 그리 높지 않으니 무시해도 괜찮을 거다. 즉, 내가 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시민들과 분간이 안 가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저 토마호크가 나를 겨냥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만약 프라세오디뮴이 기계를 불법 개조하지 않았다면.
나는 바닥에 몸을 굴려 흙먼지를 얼굴에 잔뜩 묻혔다.
“형제여! 거기 있지? 우리 얘기나 하자고!”
프라세오디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조금 전에 자신이 죽인 사람이 유로퓸인지 나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궁금하지 않나?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래도 미친 것 같은 프라세오디뮴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얼굴에 바른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나려 했지만 꾹 참았다. 바닥에는 무너진 철근 ― 재질은 철이 아니라 탄소섬유지만 어쨌든 철근이라 부른다 ― 자재들이 굴러다녔다. 나는 그중에 창 대신 쓸 만한 길이의 파이프를 몇 개 조용히 집어 들었다.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 헬기들이 날아오는 소리. 남은 기둥으로 버티고 있던 무대가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
피어오른 먼지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앞은 안 보이고,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렸다. 이런 때 부메랑 토마호크의 센서들은 사람의 감각기관에 비해 얼마나 더 정교하게 목표를 찾아낼까? 경찰 로봇들이 와서 프라세오디뮴을 제압할 때까지 그냥 숨죽인 채로 기다리는 게 나을까?
나는 부메랑 토마호크에 대해 생각했다. 우주사냥 게임과 우주전투 게임에서 그런 무기로 유전자조작 생물들을 학살하던 동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목성과 토성의 주민이라면 누구든 한번 봤던 것, 한번 들었던 것을 모두 아스타틴 기억저장소에 저장해 둔다. 그 덕분에 뇌가 완전히 사라지는 사고를 당하더라도 기억저장소에 있는 디지털 기억들을 이용해 그럭저럭 부활할 수 있다. 뇌 안에 있는 신경 칩을 이용해 무선 접속을 하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생생한 기억을 언제나 재생할 수 있다.
“사마륨! 거기 있는 거 사마륨이지? 설마 얼굴에 흙을 바른 거야? 무서워서? 내 공격을 피하려고? 아스타틴이 될 사람이 겁을 먹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이야?”
프라세오디뮴이 외쳤다. 나는 그가 대충 넘겨짚고서 허풍을 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보인다면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바로 토마호크를 던졌을 테지.
나는 우주사냥 게임에 대한 비디오 클립을 찾았고, 머릿속에서 그 클립을 재생시켰다. 부메랑 토마호크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시각과 청각 센서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동작인식 센서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센서는 보다 빠른 물체를 추적하도록 프로그램된 것 같았다. 합리적이다. 우주사냥이건 우주전투건 참가자들은 칼이나 방망이 따위의 근접전용 무기를 따로 지참하는 게 보통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는 목표를 죽을 때까지 쫓아가는 도끼로 잡고, 덜 움직이는 목표는 칼로 상대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나는 허리를 낮추고 조금 전까지 토마호크가 떠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한 손에는 절단면이 뾰족한 탄소섬유 철근을 든 채였다.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을 보고 유로퓸의 시체를 찾았다. 죽은 내 형제는 다행히 뒤통수가 뭉개져 있었다. 앞쪽은 비교적 멀쩡했다. 나는 왼손으로 시체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오른손으로는 철근을 쥐었다.
“원하는 게 뭐지, 형제?”
시체를 든 채 나는 프라세오디뮴을 향해 외쳤다. 반응이 있었다. 붉은색과 녹색의 반원이 곧장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강화된 근육이 저리도록 힘껏 유로퓸의 몸을 하늘로 집어던졌다. 부메랑 토마호크의 궤적이 커브를 그리며 시체를 따라 날아 올라갔다. 나는 토마호크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철근을 투창처럼 던졌다. 세 개를 연속으로 던지고 하나는 호신용으로 손에 쥔 채 앞으로 돌진했다.
운이 좋았다. 앞으로 달려 나가자 탄소섬유 철근 셋 중 하나가 프라세오디뮴의 어깨를 맞힌 것이 보였다. 부메랑 토마호크가 유로퓸의 시체를 공중에서 다시 공격하고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홈런 타자처럼 손에 쥐고 있던 철근으로 부메랑 토마호크를 때려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 철근도 프라세오디뮴을 향해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목표가 보이니만큼 훨씬 더 정확하게 던질 수 있었다.
목표는 프라세오디뮴의 오른쪽 가슴이었다. 그 녀석의 심장을 찌르고 싶지는 않았다. 한쪽 허파를 망가뜨리는 걸로 족했다. 법적인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녀석을 살려 둬야 심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프라세오디뮴에게 다가갔을 때 부메랑 토마호크가 다시 날아왔다. 나는 프라세오디뮴의 가슴에서 철근을 뽑아 그걸로 토마호크를 찍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프라세오디뮴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웃기만 했다. 그가 웃을 때마다 폐에 뚫린 구멍으로 핏방울과 공기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탄소섬유 파이프를 그 구멍에 넣어 한 바퀴 휘저은 뒤 다시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멀리서 경찰 로봇이 어깨에 달린 경광등을 켜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삼십 분 전까지는, 내가, 이런 일을, 벌일 줄, 몰랐지.”
프라세오디뮴이 헐떡이며 말했다. 그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게 계획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삼십 분 전과 지금 이 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스타틴 이사회의 안건들. 프라세오디뮴은 공중에서 이사회 중계방송을 듣다가 무대로 돌진했다. 부활 승인의 건에 앞서 테이블에 올랐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안건에 대한 이사회 결정이 결정적인 동기였을 것이다.
나는 아스타틴 기억저장소에서 삼십 분 전의 기억을 내려 받아 검토했다. 두 번째 안건, 목성 고리에 숨은 행성 간 유도미사일 제어 프로그램의 업그레이드와 프라세오디뮴의 폭주 사이에는 별 연관성이 언뜻 생각나지 않았다. 첫 번째 안건, 목성에서 17년 만에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안건은…….
그 사건은 생각보다 꽤 복잡했다. 그리고 이사회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기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 결정이 의미하는 바는…….
프라세오디뮴의 폭주는 폭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위험이 따르는 도박이긴 했지만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우리 형제들 간의 경쟁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검토에 걸린 시간은 2초 정도였다. 내 표정이 갑자기 달라진 걸 눈치 챈 프라세오디뮴이 누운 채로 킬킬 웃었다. 내가 그의 가슴에서 철근을 뽑아내자 허파에서 다시 바람소리가 났다. 나는 그 철근을 프라세오디뮴의 왼쪽 가슴에 꽂았다. 심장을 완전히 망가뜨리도록 충분히 깊게 꽂았다.
경찰 로봇이 거의 가까이까지 왔다. 나는 로봇의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도망쳤다.


아스타틴은 오만한 과학자였다. 그에게 인문학은 과학자가 될 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대신 매달리는 변방의 유사학문에 불과했다. 역사, 종교, 철학, 문학, 미학, 법학에 대해 아스타틴은 학부생 정도의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지구의 철학자들이 그에게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격을 가하고, 거기에 법학자들이 가세했을 때 아스타틴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철학자들은 부활장치를 써서 부활한 아스타틴이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인간을 바로 그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단지 유전정보와 기억만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부활장치가 조립한 새 육체의 소유자는 부활장치에 들어가서 해체된 노인과 과연 같은 사람인가?
철학자들이 만든 균열에 법학자들이 달라붙었다. 법학자들은 심신상실과 다중인격, 쌍둥이, 복제인간에 대한 판례들을 연구했다.
여기에는 큰돈이 걸려 있었다. ‘자신을 아스타틴이라고 부르는 목성의 남자는 아스타틴이 아니다’라고 지구의 법원이 판단한다면, 그 남자는 지구에서 아스타틴으로서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 있는 아스타틴의 유산은 주인 없는 것이 되어 각 국가들이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아스타틴의 각종 지식재산들도 공짜가 된다. 아스타틴에게는 후손도 없었으니까.
여기에 아스타틴에 불리한 과학적인 증거들도 발견되었다. 인간 기억의 일부는 디지털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손실되거나 열화(劣化)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났다. DNA 복제에서는 세포 100억 개당 하나 꼴로 돌연변이 세포가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격이나 체질이 장내 세균 분포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설사 부활장치로 DNA를 완벽하게 복제하더라도 장내 세균 분포까지 똑같이 만들 수는 없다. 면역 기억은 뇌나 DNA가 아닌 면역계에 저장되며, 부활장치로 복제할 수 없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페로몬 일부는 인간 유전자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겨드랑이 땀샘의 미생물이 분비하는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급기야 지구법원 1심에서는 아스타틴은 죽었고, 새로 아스타틴이라 칭하는 사람은 아스타틴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아스타틴 그룹은 비상이 걸렸다. ‘아스타틴임을 인정받지 못한 2대 아스타틴’은 당장 항소했다. 아스타틴 그룹은 전 세계 대장암 환자와 중증 치매 환자에게 무료 수술을 제공했다. 대장암 환자에게는 줄기세포를 이용해 배양한 새 대장을 이식시켜 주었다. 이렇게 하면 DNA는 똑같지만 장내 세균 분포는 전과 완전히 다른 대장을 갖게 되는 셈이다. 중증 치매 환자들에게는 기억 일부 또는 전부를 디지털로 전환해 뇌에 삽입하는 수술을 제공했다. 그런 다음 아스타틴 그룹은 이들이 모두 과거와는 다른 인물이라며 예전의 인물들은 모두 법적으로 사망했음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아스타틴 대 국제연합’ 소송은 한 세기를 끌었다. 이 소송은 결국 국제연합이 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소송의 결과로 ‘세계인간정체성협회’가 출범했다. 지구의 철학자, 법학자, 심리학자, 임상의, 뇌과학자, 생화학자, 컴퓨터공학자들이 모여 만든 이 학회는 4, 5년에 한 번씩 ‘인간정체성 진단 및 통계 편람’을 출간한다.
인간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너무 심오해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은 통일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뚜렷한 규정 대신 어느 정도 합의된 정보와 현상, 기준들을 하나하나 풀어 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인간정체성 진단 및 통계 편람’이다.
이 책은 인간정체성이 크게 네 가지 축이 합쳐져서 이뤄진다고 본다. 뇌 기억, 육체 기억,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의지다. 뇌 기억은 부활장치로 거의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다. 육체 기억은 보다 미묘하지만, 어느 정도 닮은꼴로 복구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와 의지는 그렇지 않다.


나는 칼리스토 공항에 와 있었다. 이곳은 다른 목성권 위성으로 가는 우주선들이 주로 정박하는 곳이다. 경찰 로봇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굴 주변에 변장용 홀로그램을 두르고 있었다. 변장이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TV 화면에는 가돌리늄이 어븀을 죽이는 장면이 팬클럽 편집본으로 나오고 있었다. 재방송이었다. 어딜 가나 TV 한 대 정도는 가돌리늄 대 어븀의 결투 하이라이트 장면을 틀어 주고 있었다.
아스타틴 이사회가 열리던 날 형제들을 습격한 것은 프라세오디뮴만이 아니었다. 나와 유로퓸은 멍청했다. 유로퓸은 운도 없었고. 모든 형제들이 그날부터 다른 형제를 죽이는 작업에 착수했고, 다 같이 경찰 로봇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들의 혈관 속에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격정,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은 ‘아스타틴스러움’의 중요한 본성이다.
가돌리늄은 TV 카메라를 시신경에 달고 어븀의 아지트로 쳐들어갔다. 자신의 습격을 생중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븀은 경비 로봇을 몇 대 고용하고 있었지만, 가돌리늄은 광자총으로 그 로봇들을 모두 박살냈다. 그는 광자총을 양손에 들고 현란하게 광자총알을 뿌렸다. 하늘로 날아올라 손으로 원을 그리며 쌍권총을 발사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로봇들을 모두 처리한 가돌리늄은 쌍권총을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넋이 나가다시피 한 어븀에게 단도를 하나 쥐어 주었다. 가돌리늄 자신도 허리춤에서 똑같이 생긴 단도를 꺼냈다.
“한번 겨뤄 보자고. 누가 아스타틴이 될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그는 어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둘은 십오 분가량 칼싸움을 벌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돌리늄의 칼싸움 실력이 어븀을 압도한다는 게 명백해졌다. 하지만 아지트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어븀은 기둥을 무너뜨리고 선반에 놓여 있는 자재를 쏟는 식으로 가돌리늄에게 대항했다.
기계 부품들이 머리 위로 떨어졌을 때 가돌리늄은 위기를 맞았다. 가돌리늄이 두 다리를 못 쓰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븀은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적에게 걸어갔다.
“휴, 깜짝 놀랐네. 이런 때 쓰는 속담이 뭐였더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이 아지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털어놓으면 고통 없이 죽여주지. 쉽게 깨질 보안장치들이 아니었는데.”
어븀은 그렇게 전형적인 악당 대사를 읊었다.
어븀이 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가돌리늄은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단도는 어븀의 목에 정통으로 꽂혔다. 어븀은 꽥 소리도 못 내고 즉사했다. 엄청난 칼 던지기 실력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싸움 전체가 가돌리늄이 잘 연출한 쇼였다. 가돌리늄은 처음부터 총으로 어븀을 죽일 수 있었는데 칼싸움을 벌였고, 칼싸움이 박진감 있게 보이도록 제 솜씨를 전부 다 발휘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칼을 던지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데도 마지막 순간까지 참았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나와 같은 의견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가돌리늄에 열광했다.
“저 대담함! 승부근성! 과시욕! 가돌리늄이야말로 아스타틴이다!”
사람들은 외쳤다.
아스타틴 이사회가 17년 만의 살인사건을 ‘범인 없는 살인’으로 규정한 뒤에 우리 형제들 간에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 싸움을 일리아스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고, 보르지아 가문의 유혈극에 빗대는 사람도 있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TV 예능프로그램의 무규칙 서바이벌 쇼에 더 가까웠다.
아스타틴 이사회에 올라온 살인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소행성대에서 희소 광물을 채굴하던 엔지니어 두 명이 가스 누출 사고로 죽었다. 그들이 머물던 우주선에는 부활기계가 있어서 두 사람의 육체는 금방 재생되었고, 그 둘은 우주선 안에서 부활 승인이 있을 때까지 아무 일도 않고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우주선이 운석과 충돌하는 큰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또 죽었다. 이번에는 부활기계까지 같이 부서져 버렸기 때문에 두 번째로 죽은 사람의 부활이 늦어졌고, 생존자는 먼저 부활을 인정받아 다시 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그 생존자가 우주선과 함께 목성권으로 돌아왔을 때 경찰은 사고 흔적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운석 충돌 사고는 위장이었고, 실은 부활 대상자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 게 사건의 실체였다.
증거는 틀림없었고, 범인도 범행을 시인했다. 변호사는 이런 법리를 들고 나왔다. 아스타틴 정부는 목성과 토성의 ‘시민’들을 보호한다. 또 모든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범인은 지금은 시민이지만 범행 당시에는 시민이 아니었다. 부활 승인을 받기 전이었으니 법적으로는 시민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부활 대상자에 불과했다. 피해자는 범행 당시에도 시민이 아니었고 여전히 시민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피해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인 범인을 처벌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시민인 사람이 시민이 아니었을 때의 행동으로 처벌받는 것도 법적으로는 불합리하다.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아스타틴 이사회는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인간 이사들은 그런 주장이 자신들의 도덕적 직관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아스타틴머신의 의견에 감히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 판결이 의미하는 것은?
부활 대상자인 우리는 부활 대상자인 형제들을 죽여도 괜찮다는 뜻이다. 부활을 승인받을 때까지 경찰에 붙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부활을 승인받는다면, 그래서 아스타틴으로 인정받는다면, 시민이 되기 전에 저지른 일에 대해 면책을 받게 된다.
아스타틴은 우리 형제 중에서만 나올 수 있다. 또한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아스타틴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다른 형제들을 다 죽인다면,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날 때까지 검거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확실하게 아스타틴이 된다.
프라세오디뮴은 경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던 중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해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로 유로퓸과 내가 있는 무대로 돌진했고, 충돌 직전에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뒤 때마침 가지고 있던 무기인 부메랑 토마호크로 우리를 공격했다.
나는 아스타틴머신이 이 같은 일을 내다봤을 거라 생각한다. 초지능을 지닌 아스타틴머신이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니, 나는 아스타틴머신이 이런 골육상잔을 유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초지능이 생각하는 바를 가늠한다는 게 무의미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 후계자 선정 작업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지루해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생각 같았지만 의외로 말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아스타틴머신 역시 아스타틴의 성격을 얼마간 품고 있을 것이다. 격정과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 말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바람에 경찰 로봇들이 내게 접근하는 것을 한 호흡 늦게 알아차렸다.
‘홀로그램 변장을 어떻게 꿰뚫어봤지?’ 하고 의아해할 틈도 없었다. 경찰 로봇 중 하나가 내게 총을 쐈기 때문이었다. 사용이 금지된 21세기식 구식 화약총이었다. 경찰 로봇들은 나를 검거하려는 게 아니었다. 녀석들은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세포 재생술이 노화와 죽음을 상당히 미뤄 주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걸레와 빗자루로 아무리 꾸준히 청소를 해봤자 집은 점점 더러워진다. 집 구석구석을 새집 같은 상태로 만들려면 새집으로 이사를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사를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새집을 내 집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곳은 당신 집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행정 서류에 새 주소를 올려 주지 않고, 어떤 우편물도 새집으로 보내오지 않는다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도 그들이 새집으로 오지 않고 이미 떠나온 옛 집으로만 간다면? 가족들조차 나를 따라오지 않고 옛 집에 머무른다면?
아스타틴이 부활장치로 새로운 육신과 뇌 조직을 얻었을 때 처한 위기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 방법으로 아스타틴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사회적 승인’이었다.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형이하학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아스타틴은 먼저 지구로부터 이민자들을 받았다. 어차피 테라포밍을 마친 위성들에 주민들을 받아야 할 시점이었다. 이민자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물론 반발이 심했다. 우생학의 부활이니, 엘리트 선별 정책이니 하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지구의 많은 젊은 인재들이 희망을 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지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신천지인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을 누리며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꿈을.
무엇보다 큰 인센티브는 바로 부활장치를 통한 영원한 젊음이었다. 목성권과 토성권의 시민이 되면 자동적으로 부활의 권리를 얻는다. 불사의 저주 같은 것은 없다. 더 이상 부활하고 싶지 않을 때 부활장치를 거부하면 되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아스타틴 이사회는 시민들의 전생을 평가해 부활장치를 가동시킬 자격이 있는지 심사했다. 또 몸이 예전 모습대로 살아나도, 살아난 그 육신이 과거와 같은 정신을 지녔다는 승인이 있을 때만 부활을 인정했다. 부활을 인정받지 못한 육신은 파괴되었고, 그런 경우에 아스타틴 정부는 다시 부활장치를 가동했다. 승인은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이사회의 판단을 거쳐 실시했다.
아스타틴 본인의 경우에는 지구권에서 이런저런 견제가 들어올 것에 대비해 처음부터 부활장치를 열다섯 번 가동했다.
우선 아스타틴이라는 초지능통합체에서 인간적인 부분을 분리해 냈다. 그리고 인간적인 부분만 부활장치로 열다섯 개체를 만들어냈다. 그런 다음 그 열다섯 명을 당분간 각자 살아가게 놔둔다. 장내 세균 분포 같은 것은 저절로 구성되도록. 아스타틴머신은 그 정도면 그중 한 개체는 99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아스타틴의 정신과 장내 세균 분포 따위를 재현할 거라고 계산했다. 그러면 그때 가서 그 개체를 골라내면 된다. 자연인 아스타틴이 보여줬던 천재성, 상상력, 용기, 의지력, 그리고 결단력을 가장 비슷하게 발휘하는 개체를. 격정,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 대담함, 승부근성, 과시욕을 옛 아스타틴처럼 드러내는 육신을. 지구의 어느 누구도 트집 잡지 못할 몸뚱이를.
그렇게 선택된 사람에게 아스타틴머신이 봉인한 아스타틴의 나머지 기억을 돌려주고, 최종적으로는 그 사람이 아스타틴머신과 다시 의식을 통합한다. 그것으로 아스타틴의 부활이 완료된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부활을 약속받지 못한 부활 대상자이자 아스타틴 후보들인 우리 형제들이다. 우리 형제들에는 란타넘족 원소의 이름이 붙었다. 형제의 머릿수와 란타넘족 원소의 수가 열다섯으로 같았기 때문이다.
목성권과 토성권의 주민들은 이 아이디어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그들의 부활 문제가 여기에 걸려 있었으니까. 철학적·과학적·신학적 차원에서 아스타틴의 부활과 그들의 부활은 같은 문제다. 어느 한쪽만 지지하고 다른 쪽을 반대할 수는 없다.
부활은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력한 지배도구이기도 했다. 지구의 법이 뭐라고 하건 목성·토성권의 주민들에게 부활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들은 부활을 보고 만져서 믿게 되었다.
부활은 부활장치라는 기계와 이사회의 승인이라는 의식을 포함한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었다. 그 시스템은 인간이 맞는 최후의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약속했다. 지난 삶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공동체에 헌신했던 자들, 아스타틴에 충성했던 자들만이 부활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불공정하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거나 원래 인생은 한 번만 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나를 포함한 우리 형제들 역시 이런 조건에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나는 내가 이미 유일무이한 아스타틴이라고 느꼈다. ‘사마륨’이라는 정체성은 어느 특정 기간에 잠시 사용해야 하는 코드네임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나임을 증명해서 나로 돌아가는 시험 과정에 불과했다.
우리는 세 사람씩 목성과 토성의 다섯 위성에 흩어졌다. 한 사람이 아스타틴 그룹의 사업 부문 하나씩을 맡아 운영했다. 그렇게 기업 경영을 하면서 아스타틴다운 능력과 개성을 보여주면 아스타틴머신이 대중의 여론을 보아 가며 적임자를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아스타틴머신은 우리가 서로 죽이기를 바랐다. 그 살육이 바로 아스타틴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격정,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 대담함, 승부근성, 과시욕. 그것이야말로 아스타틴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제일 먼저 내게 총을 쏜 경찰 로봇은 군중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단백질 피부를 입힌 인간형 로봇이었다. 나는 그를 피해 달아나면서 터미널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었다. 경찰 로봇은 모두 다섯 대, 아니 여섯 대가 있었다. 한 대는 대합실 2층에 있었다.
나는 변장용 홀로그램을 끄고 재빨리 뛰어올라 2층에 있던 경찰 로봇을 먼저 처치했다. 로봇의 목을 비틀어 꺾은 뒤 녀석이 가지고 있던 총을 빼앗았다.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린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셀카를 찍거나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로봇 다섯 대가 2층으로 날아 올라왔을 때, 나는 로비로 뛰어내리면서 그중 한 대를 무릎으로 찍어 바닥으로 깔아뭉갰다. 남은 로봇 네 대는 전략을 바꾸었다. 녀석들은 나를 포위하고 내가 멀리 이동하지 못하도록 동선을 차단했다. 2층에 두 대, 1층에 두 대가 있었다.
포위망이 더 좁혀지기 전에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판대 쪽에 있는 로봇에게 먼저 몸을 던졌다. 로봇과 내가 격투를 벌이느라 가판대가 박살이 났다. 다른 로봇이 우리를 향해 주먹을 발사했는데, 운 좋게도 중간에 날아온 방송사 카메라가 그 주먹에 맞았다. 나는 가판대 기둥을 앞에 있는 로봇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한쪽 주먹이 없는 로봇에게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조금 전까지 가돌리늄과 어븀의 결투가 나오던 TV 화면들은 온통 내 모습으로 가득 찼다. 정작 나 자신은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보일까 따위는 고민할 틈도 없었다.
2층에 있던 로봇 두 대의 팔과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로봇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더니 한 로봇의 팔을 다른 로봇의 팔에 이어 붙였다. 로봇은 곧 몸뚱이는 두툼해지고 머리는 두 개가 달린 괴물이 되었다. 팔은 세 개가 되었는데, 그중 한 팔은 보통 사람의 두 배 길이였다. 근접전용 팔이 두 개, 원거리 격투용 팔이 한 개인 셈이었다. 다리는 네 개였다. 두 개는 이동용, 두 개는 전투용인 것 같았다.
이건 절대로 경찰 로봇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형제 중 누군가가 경찰 보안망을 뚫고 로봇들을 조종하는 중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조금 전에 내가 허리를 꺾어버린 로봇의 몸체에서 팔과 다리를 한 짝씩 뜯어냈다. 고대 인도의 신과 같은 형상이 된 괴물 로봇이 2층에서 로비로 뛰어내렸을 때 나는 들고 있던 로봇 다리를 풀 스윙으로 휘둘렀다.
괴물 로봇의 자세가 조금 흔들렸을 때 나는 전 속력으로 달렸다. 나는 로봇의 다리 하나를 붙잡고 그대로 항공사 카운터로 돌진했다. 로봇과 나는 카운터 벽을 뚫고 화물 투입구 아래로 떨어졌다. 고속 컨베이어벨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짐을 운반 중이었다. 나는 컨베이어벨트의 트레이 사이에 로봇의 다리를 끼워 넣었다.
괴물 로봇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녀석은 긴 팔로 나를 낚아채려 했지만 내 목을 조금 할퀴었을 뿐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내 앞으로 개인용 홀로그램 통신 화면이 켜졌다.
“아, 훌륭한데? 방송사 카메라가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해서 유감이군. 마지막 마무리가 정말 환상적이었는데.”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화면 속에서 박수를 쳤다.
“디스프로슘? 네 녀석이 경찰 로봇을 해킹한 거야?”
내가 물었다.
“솔직히 놀랐어. 네가 이길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거든. 그래서 너한테 기회를 주기로 했는데 말이야…….”
디스프로슘이 싱긋 웃었다. 나는 홀로그램을 무시하고 로비로 올라가는 통로를 찾았다. 몇 걸음 걸어가니 내 앞에 다시 홀로그램 화면이 켜졌다.
“이봐, 끝까지 들어 보라고. 내가 저런 경찰 보안망을 어떻게 뚫고 경찰 로봇을 해킹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가돌리늄이 어떻게 어븀의 아지트를 찾아냈는지, 어디서 그런 칼솜씨를 익혔는지, 이상하다고 여겨 본 적 없어?”
나는 사다리에서 손을 떼고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사실 굉장히 궁금한 문제였다.
“어떻게 한 거지?”
내가 물었다.
“분업의 힘이지.”
디스프로슘이 대답했다.
“분업?”
“그래. 우리. 우리는 이미 연대를 시작했어. 가돌리늄과 나는 같은 편이야.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지. 이름은 ‘통합연대’라고 해두지.”
“연대를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뭘 말하려는지 알아, 이 친구야. 그런데 잘 생각해 보라고. 선대 아스타틴이 아스타틴머신과 통합할 때의 기억이 자네한테 있나?”
“통합 당시의 상황은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거잖아. 기억이 있어 봤자 초지능체의 경험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통합 이후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통합 직전을 말하는 거야. 기억을 더 더듬어 봐. 초대 아스타틴이 아이오딘머신이나 아스타틴머신을 개발했을 때의 기억이 있어? 초지능체라는 걸 구상하고 개발했을 때의 기억이 있어?”
나는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써 보았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디스프로슘이 빙긋 웃었다.
“그 기억은 지워진 거야. 의식 통합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지워졌어. 난 이렇게 생각해. 인간과 컴퓨터가 의식을 통합할 수 있다면, 인간과 인간의 의식도 서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스타틴은 인간 정신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코드로 바꿔 놓았어. 자르고 붙이고 편집할 수 있는 코드지. 아이오딘머신은 수백 대를 병렬로 연결할 수도 있었어. 아스타틴이 아스타틴머신을 한 대만 만든 건 초지능을 독점하기 위해서지, 그 머신을 여러 대 만들거나 서로 연결하는 게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었어.”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정신을 아이오딘머신과 통합할 수 있고 그런 아이오딘머신을 수백수천 대 연결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래. 인간 정신을 통합하는 것도 가능해. 우리들끼리 굳이 싸울 필요가 없어. 그냥 보는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열 명 정도 적당히 죽인 다음 남은 사람들끼리 의식을 통합해서 아스타틴머신을 찾아가면 되는 거야.”
“거부한다면?”
“그러면 너는 우리 통합연대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지. 그리고 넌 결코 우리를 혼자 상대할 수 없어. 어븀이 그토록 공들여 숨긴 아지트를 어떻게 들켰느냐고? 우리 중 한 명이 온 시간을 그 녀석의 아지트를 찾는 데만 썼기 때문이지. 그동안 가돌리늄은 칼싸움을 열심히 연습했고 말이야. 나는 경찰 보안망을 뚫었어. 지금 우리는 너를 위해 마지막 표 한 장을 발급하기로 한 거야. 어때, 받아들이겠어?”
디스프로슘이 물었다.
(계속)




작가소개 / 장강명(소설가)

2011년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표백』, 『열광금지, 에바로드』, 『호모도미난스』, 『한국이 싫어서』, 연작소설집 『뤼미에르 피플』이 있다.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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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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