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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연재]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②

  • 작성일 2015-06-01
  • 조회수 621


[중편연재]



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 (제2회)




장강명






2. 이오


이오는 목성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이다. ‘갈릴레이 위성’이라 부르는 목성의 4대 위성 중 테라포밍이 완료되지 않은 유일한 위성이기도 하다.
아스타틴은 이곳에 유전자조작 미생물과 나노 머신을 대량으로 살포해서 대기를 숨을 쉴 수는 있게 바꿔 놨다. 하지만 지질 활동이 워낙 활발하고 수시로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을 뿌려대는 통에 건물을 세울 수가 없었다. 화산 활동과 목성의 강력한 자기장 때문에 통신기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공항에서 훔친 2인승 우주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다. 땅이 꾸물꾸물하고 솟아오르더니 어느 순간 마그마가 터져 나왔다. 중력이 약한 곳이라 용암이 하늘로 수백 킬로미터는 치솟았다. 그 너머로는 거대한 목성이 보였다.
목성은 무시무시하게 컸다. 밤하늘의 4분의 1가량을 덮고 있었다. 그 크기를 의식하면서, 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내가 지금 목성을 본능적으로 지구의 달과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눈으로는 한 번도 지구의 달을 본 적이 없다. ‘지구의 달’은 내 뇌에 심어진 기억이다. 어차피 나는 아스타틴이기에, 그 기억이 전생에 본 것이든 현생에 본 것이든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 보려 했으나…….
용암이 식어 생긴 화산암들이 하늘에서 와르르 떨어졌다. 나는 솜씨 좋게 그 돌들의 우박 사이로 우주선을 몰았다.
우주선의 TV 화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의 화산 폭발 때문에 전파 방해가 심해진 모양이었다. TV는 결국 알아서 그냥 저장해 둔 영상들을 틀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 형제들의 싸움 중 하이라이트 장면들이었다.
이터븀은 란타넘을 망치로 때려죽였다. 그 둘은 목성 위성 중에 가니메데의 지하철 지붕 위에서 격투를 벌였다. 란타넘이 죽으면서 자폭용 폭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지하철이 탈선해 승객이 50명가량 죽었다. 이터븀은 마주 오던 지하철로 건너뛰어 목숨을 건졌다.
프로메튬은 에우로파로 갔다. 에우로파의 수중도시에 있었던 네오디뮴을 잡기 위해서였다. 둘은 각각 잠수함을 한 대씩 탈취해 심해에서 수중전을 벌였는데, 결국에는 프로메튬이 이겼다. 하지만 평가는 좋지 않았다. 잠수함 조종 능력이나 수중전 전술이나 모두 네오디뮴이 우월했다. 수세에 몰린 프로메튬은 가니메데에서 가져간 핵미사일을 잠수함에서 발사했다. 핵폭탄은 잠수함을 비껴가 그 옆에 있던 개척도시를 날려버렸다. 네오디뮴의 잠수함은 그 폭발에 휘말려 가라앉았다. 개척도시 주민 300여 명도 네오디뮴과 함께 사망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터븀과 프로메튬은 모두 ‘통합연대’ 소속이었다. 15명 중 6명이 죽었다. 이제 생존자는 다음과 같았다.
통합연대 소속―디스프로슘(통합연대 지도자), 가돌리늄(어븀을 죽임), 이터븀(란타넘을 죽임), 프로메튬(네오디뮴을 죽임), 사마륨(나, 프라세오디뮴을 죽임).
그 외―세륨, 터븀, 톨륨, 루테튬.
나는 톨륨을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통합연대에 가입하지 않겠느냐는 디스프로슘의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다. 통합의식의 일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경쟁자들과 연대해서 다수파가 된 다음 소수파를 제거하자는 아이디어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통합 직전에 연대를 배신하면 그만 아닌가.
“통합이 되면 지금의 기억은 다 사라지나? 내가 사마륨으로서 경험한 일들 말이야.”
“아니. 모두 남게 돼. 디스프로슘인 나의 기억도 남게 되고, 사마륨인 너의 기억도 남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모두 남게 되지. 나중에 아스타틴이 되어서 이 시기를 떠올려 보면 몸이 여러 곳에 동시에 있었던 기분이 들겠지.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통합 뒤에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느냐는 내 질문에 디스프로슘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내 말을 그는 믿는 것 같았다.
‘그런 조건이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이미 아스타틴이다. 이러한 정체성에는 배타성이 전제돼 있다. 내가 아스타틴이라면,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아스타틴이 될 수 없다. 내가 다시 아스타틴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될 때, 내 기억에 디스프로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섞여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세륨, 터븀, 톨륨, 루테튬도 그렇게 생각했다. 네오디뮴이 죽은 다음날, 루테튬이 ‘독립연맹’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통합연대의 존재를 폭로했다.
“디스프로슘이 주축이 되어 통합연대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연대에 가입한 사람은 가돌리늄, 이터븀, 프로메튬, 그리고 사마륨이다. 이들은 아스타틴이 추구한 독립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루테튬에 따르면, 아스타틴은 언제나 초월을 꿈꾸는 단독자였으며, 그의 사상 역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에 기반하고 있다. 아스타틴의 천재성, 상상력, 용기, 의지력, 결단력, 격정,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 대담함, 승부근성, 과시욕은 온전히 한 사람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위대했으며, 여러 명에게 분산되는 순간 그 위대함은 사라진다. 그 역시 마찬가지라고 루테튬은 주장했다. 여러 사람의 천재성, 상상력, 용기, 의지력, 결단력, 격정, 급한 성미, 모험심, 독립심, 대담함, 승부근성, 과시욕을 합쳐 보았자 아스타틴에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타협주의자들의 팔다리를 잘라 붙여 보았자 영웅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기에 예쁘지만 가능성이 제한된 공장 물건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덕성과 함께 비열한 열정, 추악한 욕망, 그리고 괴팍한 습성을 지닌 한 사람의 초인이 되려 하는 것이다!”
루테튬은 아스타틴 이사회에 의식통합 기술을 사용한 자를 아스타틴의 후보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의식통합을 한다면 그는 이전과 다른 인격체가 되므로 아스타틴이 될 자격이 있는 애초의 15명 중 1명이 아니라는 논거였다.
“당연히 아스타틴 이사회가 이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고 믿는다. 세 살짜리 아이 눈에도 자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이사회가 뭐라고 판단하건 게임의 승부가 바뀔 일은 없을 거다. 우리가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알아냈겠는가? 통합연대에는 배신자가 한 명 있다. 조만간 그 인물이 통합연대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다.”
루테튬은 독립연맹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독립연맹은 통합연대와 달리 한시적인 협력관계라고 했다. 통합연대 회원들이 다 쓰러지기 전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을 하지 않지만, 통합연대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전투를 벌일 거라는 얘기였다.
미묘한 주장이었다. 이제 생존자는 아홉 명이다. 그중 다섯 명이 통합연대 소속이다. 그러나 이 중 한 명이 배신자이고 실제로는 독립연맹 편이라면, 다수파는 독립연맹이다. 첩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해도, 수적 우세에 있는 건 독립연맹이라는 얘기다.
“물론 허풍이지.”
디스프로슘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통합연대의 존재를 알아챈 거지?”
내가 물었다.
“홀로그램 통신을 해킹했을 수도 있고, 그냥 대충 추측한 걸 수도 있지. 우리 다섯 명의 움직임이 너무 일사불란하잖아. 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연대의 존재가 들통 날 거라고 예상했어. 그때 적들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흔들어 놓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디스프로슘, 현실을 직시해야 해. 이제 연대의 장점은 사라졌어. 설사 첩자가 있다는 주장이 마타도어라고 쳐봐. 그래도 언제라도 배신자가 생겨날 수 있어. 우리가 맡은 역할이나 동선을 모조리 꿴 누군가가 독립연맹에게 그 정보를 팔 수 있다고. 우리 연대를 담보해 줄 만한 보상이나 벌칙이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잖아. 내 생각에는 이미 그런 배신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반반이야.”
내가 반박했다.
“너도 그런 유혹을 느끼는 건가, 사마륨?”
“아니, 아직은. 지금으로서는 난 통합연대 편이야. 가능하면 신의를 지키고 싶군.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남을 믿는 일은 그만두겠어. 내 역할은 받아들이되, 동선이나 구체적인 실행 계획에 대해서는 상의하지 않겠어.”
“이런 건 어떨까? 우리끼리는 앞으로 시각 기억을 서로 공유하는 거야. 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어도, 적어도 눈앞에서 숨기는 건 없게 하자는 거지.”
디스프로슘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돌리늄이 제안했다. 디스프로슘도 나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좋아.”
이터븀이 말했다.
“나도 찬성.”
프로메튬이 말했다.
“괜찮은 아이디어군.”
디스프로슘이 말했다.
‘젠장.’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내가 이오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표면상으로는 톨륨을 죽이겠다는 명분을 댔다. 톨륨을 죽이러 이오에 온 것이 사실이긴 했다.
톨륨은 생존자 중 유일하게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위치추적 장치가 위치를 발신한 것이 이오에서였다. 그가 극심한 통신장애를 노리고 이오로 일부러 숨어든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이오에 왔다가 통신이 두절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내 경우는 반쯤은 통신장애를 노리고 이오에 온 것이었다. 24시간 내 눈으로 보는 것을 남들과 함께 본다는 상황은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화장실에서 밑을 닦는 모습까지 녀석들에게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 녀석들이 밑 닦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고?
다른 경쟁자들이 그 상황을 감내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스타틴이라면 분명히 짜증을 내고 폭발해야 할 상황인데. 어쩌면 우리들의 성격이 벌써 미묘하게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먹고 마신 것 때문에 장내 세균 분포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목성 방사능의 영향으로 내 머릿속에 돌연변이 세포가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인내심이 아스타틴에 못 미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오에 가겠다고 나섰을 때 통합연대의 다른 회원들은 주저했다. 내가 자신들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겠다는 이야기를 돌려 하고 있음을 모두 즉각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나의 이오행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연맹이 출범하면서부터 아스타틴 게임은 심각한 교착 국면에 빠져들었다. 통합연대와 독립연맹은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서로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통합연대 소속 한 멤버가 움직이면 독립연맹에서는 즉각 누군가가 그에 대응하는 위치로 이동했다. 독립연맹의 한 회원이 새로운 기술이나 무기를 습득하면 통합연대에서도 그 파해법을 익히거나 영향을 무효화할 수 있는 방어무기를 사들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중에는 게임 전체가 바둑이나 체스처럼 지정학적 유불리를 다투는 일종의 보드게임이 되어 갔다. 양측 모두 조금이라도 상대편에 포위될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피했고, 독자 행동을 꺼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내가 혼자서 이오에 가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우리가 도와줄 수는 없어.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디스프로슘이 말했다.
“안 그래도 독립연맹 놈들 중에서는 톨륨 녀석만 뭘 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되어서 찜찜하긴 했는데…….”
가돌리늄이 말했다.
“24시간 시야를 공유한다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한 거야. 통신장애 때문에 실시간 공유는 어렵다 해도, 나중에 돌아와서 녹화영상을 보여주면 좋겠군. 이오에서도 녹화영상을 담은 로봇을 수시로 대기권 밖으로 발사해 주면 고맙겠어. 수거는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프로메튬이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요구에 따를 마음은 물론 없었다. 둘러댈 핑계야 얼마든지 있었다.


극지방으로 가는 길에 외부 통신이 완전히 끊겼다. 아스타틴 방송을 통해 마지막으로 접한 소식은 프로메튬이 쏜 핵미사일 때문에 통째로 날아간 에우로파 수중도시의 희생자들에 대해 부활 심사가 시작되었다는 뉴스였다.
화산이 하나 더 폭발했다. 용암 윗부분은 이오의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공간으로 퍼졌다. 그러자 밤하늘에 현란한 오로라가 나타났다. 그 오로라를 보고 있으려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오의 테라포밍에 관한 기억들이었는데,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오의 화산 활동은 목성과 다른 위성들이 만들어내는 기조력(起潮力) 때문이다. 지구의 바다에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바로 그 힘 말이다. 태양과 달이 지구를 양쪽에서 잡아당길 때 지구의 바다는 옆으로 부풀어 오른다. 지구는 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달은 지구에 비하면 질량이 크지 않은데도 그 정도다. 목성과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고, 주변에 가니메데와 칼리스토처럼 자기보다 더 몸집이 큰 천체가 있는 이오에서는 바다가 아니라 땅이 수십 미터씩 솟구친다. 귤을 손에 쥐고 힘을 주었을 때와 비슷하다. 귤껍질이 찢어지고 과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스타틴은 그런 이오의 지표면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귤껍질의 조성 성분을 바꾸고, 과즙을 보다 끈적끈적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땅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런 대공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대공사였다. 아스타틴은 이오의 대기를 두텁게 해 목성 방사능을 막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목성의 거대한 자기 폭풍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이오는 여전히 통신이 되지 않는 위성으로 남았고, 아스타틴은 이 천체에서 손을 뗐다. 그때까지 실패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던 아스타틴은, 이때 어찌나 화가 났던지 아예 당시의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이후 이오는 화산 폭발만큼이나 거대하고 화려한 오로라를 만들어내는 위성이 되었다. 테라포밍의 부작용이었다.
남극을 살핀 다음에 북극으로 갔다. 톨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도 통합연대가 무인탐사선을 몇 대 보냈지만 톨륨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노 머신 구름을 수천 개 만들어 이오 표면 곳곳을 탐색했는데도 허탕이었다. 우주선과 함께 유황 강물에 빠져서 완전히 녹아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북극의 오로라는 굉장히 이상했다. 나는 아스타틴이 이오의 대기에 손을 댄 뒤로 이 위성의 오로라가 좀 이상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오는 이제 태양계에서 오로라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천체였다. 이오의 북극과 남극에는 수십 개의 오로라가 쉬지 않고 동시에 생겨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데 그런 점을 감안해도 북극의 오로라는 남극 오로라들과는 좀 달랐다. 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남극의 오로라들은 커튼이나 날아다니는 해파리를 연상케 했지만, 북극 오로라는 그것과 달랐다. 마치……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빛줄기들이 무언가 형상을 그리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극 상공을 두 번째로 돌고 있을 때 북극 오로라에 사람 얼굴이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빛으로 그린 그림이 하늘에 나타난 것은 채 일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으나, 그림의 모양은 분명했다. 그것은 내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 얼굴은 내가 한 번도 지어 보지 못한 성스럽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분위기마저 드는 숭고함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나를 알아보는 듯 내가 탄 우주선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성층권을 넘어 오로라가 나타난 고도까지 우주선을 타고 날아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에 나타난 얼굴이 그렇게 뚜렷하지만 않았더라면 잠깐 내가 뭔가 잘못 봤던 거라고 여겼으리라.
잠시 뒤에는 혼란스러운 모양들의 오로라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우주선 주변에 나타났다. 나는 기이하게도 그 오로라들의 일부가 순간적으로 가는 빛의 실이 되어 지표면으로까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 하강했다. 오로라가 사라진 곳에는 화산의 분화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우주선을 분화구 바로 위까지 몰았다. 분화구 근처로 가자 누런색의 유황 연기가 우주선을 온통 감쌌다. 그러다 화산이 폭발하면 피하고 말고 할 틈도 없이 골로 가겠지만, 오로라의 미스터리가 너무 강렬하게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우주선의 엔진 바람으로 연기를 밀어냈더니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 호수의 표면이 보였다. 나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했다. 우주선 해치를 열고 맨눈으로 그 용암 호수를 살핀 것이다. 후끈한 열기가 피부에 느껴졌고, 황 특유의 달걀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용암 깊은 곳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기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질겁해서 급히 해치를 닫고 우주선을 안전한 높이까지 상승시켰다. 화산이 다시 유황 연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기를 두세 차례 반복했다. 나는 분화구 속으로 레이저포를 쏘고 물병 같은 물건을 던져 보기도 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그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본능을 믿었다.
나는 우주선을 탄 채로 분화구 안으로 돌진했다.


용암 호수 표면을 통과하자마자 요격 미사일이 수십 개 날아왔다. 분화구로 보인 것은 지하터널의 입구였고, 화산은 정교한 홀로그램이었다.
미사일들은 느리지만 끈질겼다. 인공지능의 회피 기동으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조종 모드를 수동으로 바꾸고 멀미가 날 때까지 우주선을 상하좌우로 심하게 움직여야 했다. 결국 다 처리하기는 했지만 미사일을 피하다가 날개 한쪽을 지하터널 벽면에 세게 부딪혔다.
우주선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거미 모양으로 생긴 전차 로봇이 달려들었다. 녀석의 장갑은 광자총에는 끄떡도 없었다. 나는 플라스마 채찍 하나만 들고 이 괴물 로봇과 육탄전을 벌였다. 장갑이 하도 튼튼해 완전히 부수진 못했지만 녀석의 다리 관절을 플라스마 채찍으로 모두 태우는 데는 성공했다.
그다음에 나타난 것은 곤충들이었다. 로봇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짜 곤충들이었다. 이오의 환경에 맞게 유전자를 조작한 놈들이었는데 말벌처럼 생긴 것도 있었고 사마귀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사실 이게 제일 큰 위협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살아 있는 곤충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나는 곤충을 무서워했다. 게다가 이 개량 벌레들은 몸집들이 굉장했다. 말벌은 사람 주먹만 했고, 사마귀는 꼿꼿이 서면 머리가 내 무릎쯤 올 것 같았다. 사슴벌레나 지네 같은 것들은 어린아이만 한 덩치였다.
몰려드는 벌레들을 플라스마 채찍으로 정신없이 후려치다가 마지막에는 우주선 안으로 도망쳤다. 날개가 부러져서 덜덜거리는 우주선을 타고 곤충 위를 지나 겨우 터널 반대편으로 갔다.
괴물 벌레들로부터 멀어지니 겨우 두근거렸던 가슴이 가라앉았고 정신도 돌아왔다. 한 손으로 땀을 훔치면서 나는 이 상황을 점검했다. 산 하나를 통째로 홀로그램으로 위장하려면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들 것이다. 이런 지하터널도 톨륨 혼자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독립연맹 전체가 달려들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톨륨이건 독립연맹이건, 우리 형제들의 목표는 다른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어야 했다. 전파가 닿지 않는 위성의 지하에 터무니없이 비싼 은신처를 만들어 두는 게 이 서바이벌 게임에서 어떤 유리한 점이 있을까? 혹시 이건 일종의 덫인가? 다른 참가자들이 서로 죽고 죽여서 한 사람만 남았을 때, 그 한 사람이 이리로 와서 함정에 빠지길 노리는 건가?
도대체 그 오로라는 뭐였을까?
지하터널 끝은 막다른 벽이었고, 그 아래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벽에 대고 레이저를 쏴보았으나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X-선으로 벽 너머를 투시해 보려 했으나 그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개인 장비만 갖춘 채 우주선에서 내렸다.


문을 열자 얼토당토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술탄의 궁전 같은 공간이 거기에 있었다. 거대한 돔에서 가짜 햇빛이 은은하게 내려오고 있었고, 그 아래 흰 돌기둥과 아치로 지붕을 올린 건물 안의 건물이 있었다. 곳곳에 분수대가 있었는데 그 분수대들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흘렀다. 벽과 기둥에는 우아하고 세련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은 간혹 반짝반짝 빛났다.
부서진 대리석 기둥을 덩굴이 감고 있었고, 화강암 타일 사이에서는 잡초가 올라와 있었다. 이곳이 폐허인지 아니면 유적 분위기가 나도록 의도적으로 그런 조경을 한 것인지 헷갈렸다. 공기는 상쾌했다. 유황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버려진 장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쾌적했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에는 너무 고요했다.
기둥 뒤에서 전투 로봇이 한 대 튀어나왔다. 나는 플라스마 채찍을 휘둘러 그 로봇을 부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로봇이 몇 대 더 튀어나왔다. 천장에서 두 대가 기묘한 자세로 떨어졌고, 화단과 대리석 벽 뒤에서도 로봇들이 두어 대씩 튀어나왔다.
전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로봇들은 전에 가니메데에서 싸웠던 경찰 로봇들보다 훨씬 구식이었다. 그리고 가돌리늄이 단도의 대가가 된 것처럼 나도 플라스마 채찍의 마에스트로가 되어 있었다. 통합연대가 뒤를 봐주는 동안 수련을 거듭했다.
로봇들을 모두 제거하자 이 ‘궁전’의 반대편에서 보라색 빛의 장막이 하늘하늘 날아올랐다. 빛줄기는 돔 천장을 뚫고 더 위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땅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오로라의 끝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오의 오로라 일부는 대기에서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이 괴상한 지하 유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가까이 갔더니 잔디 정원 위에 지붕 없이 돌기둥이 불규칙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로라는 그 돌기둥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돌기둥에 새겨진 아라베스크 문양은 극도로 섬세하고 복잡했다. 돌기둥은 모두 스무 개였는데, 두께나 모양,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기둥 몇 개는 땅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서인지, 아니면 오로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이었는지, 기둥들은 풀밭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기둥들 중 하나가 내 앞에 다가와서 섰다. 기둥에 새겨진 아라베스크 문양 중에는 사람의 손바닥 모양을 한 것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내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랬더니 그 주위의 문양이 잠시 밝아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기둥들이 물러났다. 내가 정원으로 내려가려 할 때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멈춰!”
멀리 수염을 기른 톨륨이 서 있었다. 그는 광선검을 켜더니 내게 겨누었다. 나도 플라스마 채찍의 전원을 켰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저 기둥들은 뭐야,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기둥들의 문양이 인간 뉴런을 흉내 낸 전기회로 패턴임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말하자면 저 정원 전체가 거대한 컴퓨터인 셈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톨륨은 인공지능 컴퓨터를 정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기술을 쉽게 구할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까의 전투 로봇들이나, 그 전에 맞닥뜨렸던 거미 모양의 전차 로봇이나, 모두 개발된 지 시간이 꽤 지난 구형들이었다.
“그냥 떠나 줘. 굳이 싸우고 싶지 않다. 난 아스타틴이 될 생각이 없어.”
톨륨이 광선검을 사용하고 내가 플라스마 채찍을 쓴다면 승산은 내게 있었다. 플라스마 채찍은 출력을 줄이면 잘 구부러지는 광선검과 다를 바 없다. 칼의 이점과 채찍의 이점이 모두 내게 있다는 얘기다. TV 중계 카메라들을 여기까지 갖고 오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 놓고는 뒤통수치게? 저런 엄청난 무기를 갖고 있는 걸 알았는데 그냥 놔두고 떠나란 말이야? 저거, 아스타틴 머신보다는 못해도 아이오딘 머신 수천 개를 합친 것보다는 나은 컴퓨터인 거 같은데.”
“저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야. 떠나 줘. 부탁이다.”
톨륨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내가 채찍을 휘둘렀다. 멋진 공격이었지만 톨륨은 그걸 피했다. 눈썰미 하나는 칭찬할 만했다.
광선검이라는 불리한 무기를 지니고도 톨륨은 나와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쳤다. 게다가 톨륨은 내게 별다른 살의를 보이지도 않았고, 나와는 달리 야비한 공격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전력으로 싸우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겠지. 하지만 이제는 나도 점점 한계다. 돌아가. 경고한다.”
톨륨이 말했다. 그때 나는 오로라가 그린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라 그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조금 슬프고, 어딘지 성스러운 느낌의 얼굴. 나는 결코 그런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다.
“변태 같은 녀석. 자기 얼굴을 하늘에 그리면서 좋아했냐?”
톨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엄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간신히 광선검을 피했지만 그의 발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았다. 다음에 이어진 날카로운 찌르기를 피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처음으로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아스타틴의 중요한 본성 하나가 내 안에서 눈을 떴다. 위기에 닥쳤을 때 머리가 더욱 맑아지고,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려는 그 본성 말이다.
나는 톨륨이 자기 위치에 따라서 내 공격에 다르게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채찍질을 간단히 피하면 될 텐데도 굳이 광선검으로 그걸 쳐내는 경우가 있었다. 움직이는 기둥들이 있는 정원을 등지고 섰을 때였다. 마치 플라스마 채찍이 정원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내 짐작은 옳았다. 내가 플라스마 채찍을 최대 출력으로 높여 정원의 돌기둥을 공격하자 톨륨은 불리한 위치를 감수하면서 그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지리적 이점을 얻게 되었다. 이제 톨륨과의 싸움은 산에서 평지를 공격하는 것과 비슷해졌다. 내가 돌기둥을 몇 개 부수자 톨륨은 자제력을 잃었다.
마침내 톨륨이 졌다. 그는 나의 채찍질을 막으려다 무리하게 검을 휘둘렀고, 채찍은 검을 휘감고 올라가 그의 손목을 베어버렸다. 그의 손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가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려 할 때 나는 그 손목까지 베어버렸다.
“자, 말해. 배신자가 누구지?”
나는 플라스마 채찍을 땅 위로 끌며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배신자? 뭘 배신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야?”
톨륨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동맥혈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타오르는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 피였다. 목성권 주민 대부분은 헤모글로빈이 개조되어 피가 지구인들보다 훨씬 더 붉었다. 산소대사를 더 효율적으로 해 운동 능력을 강화하고, 옅은 대기에서도 불편 없이 숨을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톨륨의 머리를 들어 잠시 관찰했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유전자를 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의 얼굴에만 숭고함이 배어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잘린 머리를 집어던진 뒤 나는 정원으로 걸어갔다. 일부 부서지긴 했어도 돌기둥은 여전히 잘 작동하는 것 같았다. 기둥들이 배치를 바꾸자 그때까지 가려져 있던 돌 제단이 보였다. 그 돌 제단에는 내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놓여 있었다.
요정처럼 생긴 젊은 여자가 돌 제단에 반듯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돌 제단으로 다가갔다.
완벽한 외모였다. 그냥 아름답다거나 예쁘다거나 선이 곱다거나 하는 말로는 불충분했다. 완벽했다. 피부는 희었고 머리칼은 연한 회청색이었다. 청순하다고 해야 할지, 요염하다고 해야 할지,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악마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분위기에 나는 압도되었다.
잠을 자던 여자가 몸을 조금 뒤척였을 때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여자의 머리에서 빛이 한 줄기 솟아올라 돔 천장으로 사라졌다. 오로라는 그녀가 꾸는 꿈이었다.
잠시 뒤 여자가 눈을 떴다.
파란 눈동자. 도톰한 입술.
“내 사랑, 수염은 왜 깎았어요?”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내게 물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는 내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는 내게서 눈을 돌려 정원 너머를 보았다. 톨륨의 잘린 머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의 이름은 에오스였다.
나는 정원 모양의 컴퓨터를 해킹해서 그녀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녀가 자기 입으로는 이름을 내게 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타틴이 그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오에 가두었다.
그녀의 이름을 에오스라고 지은 게 아스타틴의 고약한 유머인지, 아니면 그녀의 운명이 공교롭게 자기가 이름을 따온 그리스 여신을 따라갔는지는 모르겠다. 그 부분의 기억은 내가 부숴버린 돌기둥에 저장돼 있었다. 돌기둥은 천천히 복구되는 중이었지만, 거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정원과 돌기둥은 아스타틴 머신과 비슷한 인공지능이었으며, 그녀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아스타틴처럼, 그녀 역시 인공지능과 의식이 통합돼 있었다. 그러나 정원 컴퓨터는 아스타틴 머신과는 매우 달랐다.
가니메데와 칼리스토에 지구와 흡사한 생태계를 조성한 아스타틴은 목성권에 지구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정돈된 사회를 건설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구로부터 유능한 이민자들을 가려 받았다. 거기까지는 아는 내용이다. 내가 몰랐던 건, 아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몰랐던 건, 아스타틴이 결혼을 계획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배우자를 설계할 생각을 했다. 그는 창조주와 아담의 역할을 동시에 할 참이었다. 그는 비밀리에 이오에 연구소를 차리고 ‘이브’를 제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자기 자신의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인간을 하나 만든 다음, 그 인간의 성별, 외모, 성격, 지성을 꼼꼼히 바꾸고 가다듬고 조율했다. 톨륨과 내가 에오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그녀는 아스타틴이 현실 세계에 구현한 이상형이었고, 우리는 아스타틴의 그림자들이었으니까.
아스타틴 본인도 에오스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결했으며 지적이었다. 아스타틴이 숭배했던 모든 덕성이 그녀의 정신과 육신에 들어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스타틴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스타틴에게 평생 충성하는 프로그램이 뇌 속에 삽입돼 있었는데도.
그녀의 빼어난 지성과 고상한 품성이 프로그램을 누른 것인지,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양자역학적 한계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부분에 관한 데이터는 아스타틴이 지워버렸다.
“날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당신을 사랑할 일은 없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그게 진실이에요.”
에오스로부터 처음 이런 고백을 들었을 때 아스타틴은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그래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고장 난 기계는 수리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을 수술하는 것은 아스타틴으로서도 만만찮은 과제였다. 에오스의 사고(思考)를 좀 더 뚜렷이 보고 좀 더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그는 정원 컴퓨터를 만들었고, 이를 에오스의 의식과 통합했다. 정원 컴퓨터는 확대경이자 메스에 해당하는 기구였다. 수술용 고정대이자 감옥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에오스는 아스타틴에게 영원히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스타틴은 돌기둥의 문양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직접 읽어낼 수가 있었다.
첫 번째 수술을 할 때 에오스의 숨이 멎었다. 아스타틴은 부활장치를 써서 그녀를 살려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요? 그러면 나를 놓아 줄 순 없나요? 아니면 차라리 그냥 나를 죽여 줄 수 없나요?”
살아난 에오스가 애원했다. 그녀가 자살을 할까 봐 두려워진 아스타틴은 부활장치를 정원 컴퓨터 속에 깊이 삽입했다. 아스타틴 외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생체정보 암호를 거기에 걸어 두었다. 에오스가 자기 자신의 육신과 의식에 어떤 훼손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코드도 같이 넣었다. 정원 컴퓨터는 이오의 지열에서 에너지를 얻었다. 이제 한 몸이 된 에오스와 정원 컴퓨터와 부활장치는 이론상 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에오스는 지하 궁전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그 윤회와 감금 상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아스타틴 자신밖에 없었다.
수백 번에 걸친 뇌-컴퓨터 수술에서도 에오스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울면서 다음 수술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는 사랑을 흉내 내거나 거짓으로 연기할 수도 없었다. 자기 뇌 속을 아스타틴이 들여다보고 있었으므로. 아스타틴은 그녀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거듭되는 실패와 실연의 아픔, 치욕감에 넌더리가 난 아스타틴은 결국 에오스와 이오를 모두 포기했다. 그는 어느 날 연구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충동적으로 이오 표면으로 날아오른 아스타틴은 에오스와 관련된 기억을 스스로 삭제했다. 그렇게 그는 이오를 잊어버리고 가니메데로 돌아갔다.
연구소의 자기관리 프로그램은 이후에도 조용히 임무를 계속했다. 전차 로봇은 연구소 입구를 지키고 전투 로봇들은 침입자가 없는지 살폈다. 에오스는 동면에 들어갔다. 톨륨이 와서 그녀를 깨우기 전까지.
에오스의 뇌신경 중 일부는 홀로그램 발생 장치와 연결이 되었다. 그녀가 자고 있는 동안에는 꿈들이 오로라가 되어 날아갔다. 나는 연구소에 있던 아스타틴이 살짝 미쳤거나 사디즘에 빠졌던 게 아닌가 의심한다. 연인의 뇌신경을 홀로그램 발생 장치에 연결해야 할 이유가 뭔지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로마에서는 아우로라라고 불렀다. 오로라의 어원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여인에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아스타틴은 잔인한 장난을 쳤던 게 아닐까? ‘네 이름이 오로라라고? 그럼 진짜 오로라가 되게 해주지.’ 그렇게. 그리고 그녀의 뇌 패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사랑에 관한 패턴을 시각화해서 온 우주가 알아볼 수 있게 하늘로 쏘아버린…….
아스타틴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에오스에게 내려진 저주도 알고 있었을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불행해진다는 저주 말이다.


“당신도 아스타틴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군요. 당신은 결코 내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식사를 하다 말고 에오스가 조용히 말했다. 슬픈,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톨륨은 당신 마음을 얻었죠.”
내가 대꾸했다.
“톨륨은 당신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는 아스타틴과도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면서 외쳤다.
“우리는 다 똑같은 인간들이었어요. 똑같은 육체에, 똑같은 기억, 똑같은 성향을 갖고 있었단 말입니다!”
여자 취향도.
에오스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당신도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아스타틴이 아니라고, 당신만이 아스타틴이라고 주장했던 거 아닌가요?”
“저는 아스타틴입니다.”
나는 고집했다.
“그렇다면 이제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군요. 당신의 아스타틴스러움 때문에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못하나 봅니다. 아스타틴스러움에 있어서 톨륨은 당신에게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내가 좋아했던 거고요.”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 밖으로 나갔다. 전투 로봇인 줄 알았던 하인 로봇이 내가 내팽개친 식기를 바닥에서 주웠다. 나는 사춘기 소년마냥 달려서 궁전의 끝으로 갔다. 거기서 지하터널로 나가 홀로그램을 뚫고 이오의 표면으로 뛰쳐나갔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폭풍이 일고 있었다. 화산이 폭발했다. 목성에서 방사능 입자들이 쏟아졌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나는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암석을 주먹으로 부쉈다. 플라스마 채찍으로 협곡을 무너뜨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자 나는 위성 표면에 쓰러져 누웠다. 목성이 하늘 정중앙을 다 가리고 있어서 다른 별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9시간 55분이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대적반이 목성 표면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당신도 아스타틴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군요. 당신은 결코 내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처음 한 달 동안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다음 한 달 동안은 그 말을 믿지 않으려 애썼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려 했다. 나는 톨륨을 흉내 내 수염까지 길러 보았다. 물론 그에 대한 에오스의 반응은 순수한 경멸이었다. 이제 나도 돌기둥의 문양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톨륨은 당신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는 아스타틴과도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톨륨 역시 이오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나와 별다를 게 없는 인간이었으리라. 에오스와의 만남이 그를 바꿔 놓은 것이다. 그는 행운아였다. 나는 마음속 깊이 그를 질투하고 저주했다. 내가 그보다 먼저 이오에 왔더라면 에오스의 사랑은 내 차지가 되었을 거다. 나도 톨륨처럼 변할 수 있었을 거다. 나도 내면의 평화에서 우러나오는 숭고한 표정을 띠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인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스타틴이 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던 그의 말을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었다.
‘저는 아스타틴입니다.’
나는 이제 내가 아스타틴인지 자신도 없었고, 과거의 아스타틴과 같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도 없었다. 아스타틴이 에오스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다 보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추악하고 비열한 고문이었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아스타틴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다.
아스타틴스러움에 대해 혐오를 처음 느꼈던 건 톨륨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직 그의 시체가 부패되지 않았을 때, 에오스는 정원 컴퓨터 깊은 곳에 있는 부활장치를 이용해 톨륨을 되살려 달라고 내게 애원했다. 자신은 정원 컴퓨터의 코드에 손을 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나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겠어요. 그이를 살려 주시기만 한다면.”
그 말을 들은 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플라스마 채찍으로 톨륨의 시체를 갈가리 찢은 뒤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 어차피 톨륨의 기억은 아무 곳에도 저장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제대로 부활시킬 도리도 없었지만.
그런데 내가 그렇게 분노한 것은 에오스가 여전히 톨륨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나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에오스가 그런 제안을 던졌을 때, 내 안의 아스타틴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저 여자의 몸을 맘껏 취하라고. 그리고 정원 컴퓨터의 구조가 너무 복잡해 톨륨을 쉽게 부활시킬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그런 기만극을 평생토록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아스타틴이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고. 그게 바로 아스타틴스러운 거라고.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북극 하늘 위로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회청색, 연푸른색, 연보라의 세 줄기로 된 오로라였다. 내 눈에는 에오스가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그녀를 포기해야 한다. 그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다. 그리고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비통했다. 대적반이 목성 표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톨륨이 거의 다 해놓은 일이에요. 그냥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내가 그녀와 정원 컴퓨터의 의식통합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에오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당신은 이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요.”
이 설명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서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우주선이 격납고에 몇 대 있어요. 조종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오를 떠나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가세요. 저는 쫓아가지 않겠어요.”
에오스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무척 놀란 듯했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어떤 함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 보는 것, 그녀와 별 의미 없는 대화를 하는 것조차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외면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에오스는 파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정원 컴퓨터와 당신을 분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분리 작업 중에 부활장치를 건드리게 됩니다. 부활장치를 제거하면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 그걸 자동으로 복구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게 됩니다. 당신 몸은 유전자 수준에서 너무 섬세하게 조작돼 있기 때문에 가니메데에 있는 부활장치로도 똑같이 되살려낼 수는 없어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예요!”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분리 수술은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
“괜찮으십니까?”
“모르겠어요. 약간 어지러워요.”
에오스가 수술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는 더 이상 오로라가 발생하지 않았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여태까지 귀의 전정기관 기능 일부를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었어요. 소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약간 당황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돌기둥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사라진 걸 보고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이제 아무도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마 벌거벗고 있다가 옷을 걸친 느낌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가능할까요?”
“말씀하십시오.”
나는 그 지독한 긴장감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제 몸의 자동복구 기능이 사라졌다고 하셨죠? 그러면 제 머리색이나 눈 색깔을 바꿀 수도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나노 머신을 사용하면 몇 시간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떨어져 나온 정원 컴퓨터를 이제 조수처럼 활용했다. 성형수술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에오스는 광대뼈를 높이고 입술을 더 얇게 하거나 가슴 크기를 줄이는 시술도 받고 싶어 했다.
“평범한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수술이 끝났을 때, 에오스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인이 되어 있었다. 키도 조금 작아졌고 목소리도 허스키해졌다.
“당신 형제들이 저를 쫓을 일은 더 이상 없겠군요. 저는 이제 당신들의 이상형이 아니니까.”
에오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연하고 부드러운 회청색 머리카락과 파란색 눈, 흰 피부, 상냥한 목소리, 봉긋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그런 취향은 아스타틴스러움의 일부였다.
그러나 아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깔이 아닌, ‘에오스스러움’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 속에도 에오스스러움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스란히 남아서 나를 사로잡고 유혹하고 내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격납고까지 걸어갔다. 격납고는 궁전 밖, 야외에 있었다. 궁전의 경계를 지날 때 에오스는 잠시 망설였으나 용감하게 선을 넘었다. 나는 격납고의 문을 열었다.
“더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우주선 탑승구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혹시나 그녀가 내게 작별의 키스를 해주지 않을까 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우주선에 올라타다가 잠시 뒤를 돌아, 내게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털어놓으라고 다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우주선에 올라탔다.
우주선이 목성 아래로 날아올랐다. 나는 그 우주선이 하늘의 점이 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이오의 땅 위에 서 있었다. 나는 우주선에 타기 직전에 본 그녀의 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 눈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다 말았는지 평생 고민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점이 되어버린 에오스의 우주선 옆으로 또 다른 점이 하나 날아오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그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전 속력으로 달리면서, 헐떡이면서, 나는 에오스의 우주선에 교신을 시도했다. 하필 그때 목성에서 어마어마한 방사능 입자 폭풍이 쏟아지는 바람에 통신은 전혀 되지 않았다.
에오스의 우주선에 다가가는 작은 점은 행성 간 유도미사일이었다. 아스타틴이 지구권의 공격에 대비해 목성 고리에 몇 천 대 숨겨 놓았다는 그 물건 말이다. 그것이 어째서 갑자기 작동한 것인지, 누가 발사를 명령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였다. 저 물건은 아스타틴의 후계자인 우리들에게도 접근이 금지돼 있었다. 아스타틴 머신과 통합한 다음에야 위치나 사용법을 익힐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수께끼 따위는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절망 속에서 에오스의 우주선을 향해 달려갔다. 에오스가 초인적인 비행술로, 또는 유도미사일에 내장된 컴퓨터의 갑작스러운 고장으로, 아니면 외계인이라도 갑자기 공습해서 그 두 점이 비껴가기를 빌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두 점은 착실하게 서로 가까워졌다. 마침내 에오스의 우주선은 미사일에 맞아 폭발했다. 새벽의 여신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 두 번 다시 살려낼 수 없는 육체를 갖자마자.
“안 돼!”
나는 목이 터져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근처에서 이오의 화산이 폭발했다. 발밑의 땅이 갑자기 수백 미터를 치솟는 바람에 나는 공중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불붙은 돌덩어리에 머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계속)




작가소개 / 장강명(소설가)

2011년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표백』, 『열광금지, 에바로드』, 『호모도미난스』, 『한국이 싫어서』, 연작소설집 『뤼미에르 피플』이 있다.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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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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