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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OTEL⑥] 민달팽이

  • 작성일 2015-10-05
  • 조회수 2,690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⑥]



민달팽이




김혜나



삽화-민달팽이



기름 냄새. 유화油畵는 완성된 그림에 물감이 다 굳은 뒤에도 기름 냄새를 숨기지 못했다. 기름을 원료로 한 물감이 덩어리진 채 말라붙은 그림은 그래서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죽은 자의 몸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는 모습,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굳은 상태에서도 훅 피어나는 냄새와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때면 언제나 똑같은 향수만 뿌리고 나간다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언젠가 연인과 헤어져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도 과거의 연인에게서 맡았던 향수 냄새를 맡으면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타인에게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미련과 집착이 때때로 두렵게 다가왔다.
닭고기나 새우, 오징어, 야채 등속을 튀기는 기름 냄새에는 침이 고이기도 하지만, 유화 물감 냄새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후각보다는 촉각과 육감으로 다가오는 냄새. 그런데 왜 하필……. 유화 물감 냄새를 너무나 싫어했기 때문일까? 좋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고, 싫다고 생각하면 가까워지는 일들. 피해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절대로 피해 가지 못하는 자기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나선 형태의 문양만 그렸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달팽이 화가’라고 불렀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선들은 모두 매한가지 모양이었지만, 가까이에서 그림을 마주해 보면 꽤나 다채롭게 다가오는 듯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림 보는 취미는 오래전에 버렸는데도 나는 그의 그림들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눈동자가 핑핑 돌아가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나선형 문양들이 속을 메스껍게 만드는데 어쩐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가 달팽이 화가로 불리는 것은 꼭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말도 느리게 하고 밥도 느리게 먹었다. 모든 말과 행동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하고 흐물흐물한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나는 밥알을 최대한 천천히 씹어 보지만, 아무리 천천히 먹어도 밥숟가락을 먼저 내려놓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그와 밥 먹는 속도를 결코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뒤로 나는 더 이상 그와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혼자서 먼저 밥을 먹고 그를 만나서 곧바로 술을 마시든가, 안주를 대충 집어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하나 최근에는 그와 함께 술을 마시는 일조차도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와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너무 힘든 까닭이다. 그의 말투는 단순히 느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절마다 긴 공백을 두고 뚝뚝 끊어 말하는 식이었다. 나는 한 마디 말을 듣기 위해 그 기나긴 공백을 묵묵히 참아 줄 만큼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를 만나고부터 나는 모든 것에 매우 조급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몸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곰곰 돌이켜보면 그와 나의 관계에 있어 대화라는 것이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누던 대화라 봤자 일일드라마 속 인물들의 흔한 갈등구조마냥 뻔하디 뻔한 것들뿐이었다. 그는 나에게 사는 곳과 학교, 전공, 나이 따위를 물었고, 부모님은 무얼 하는지,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물었지만 나는 딱히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왜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작업실에서만 지내는지,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 것인지,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는지에 대한 것들을 물어봤다. 그도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고, 생각하고 싶을 대로 생각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어차피 다 허상이었다. 우리의 존재에,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 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알아봤자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만한 감정의 기복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처럼 잠시 묵고 가면 그뿐, 이곳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그런 그에게 반드시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다면 오직 이 호텔에 있는 작업실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그를 만나던 날 그는 나에게 명동역으로 오라고 했다. 명동역 어디요? 내가 묻자 그는, 그저 ‘명동역’이라고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명동역으로 가서 전화를 걸자 어디선가 그가 툭, 나타났다. 여, 여기로……. ‘가지’라는 말을 대신하듯 그는 자신이 빠져나온 문을 보며 손짓했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어 가리키는 곳은 대형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통하는 측문이었다. 갈색 시트지를 붙여 놓은 유리문 위로 ‘이곳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통하는 측문입니다. 고객 분들께서는 가급적 호텔 정문을 통하여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여기 왜 가요? 지금 밥 먹을 거예요? 밥 먹을 거면 정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연이어 물었지만 그는 내처 문 쪽으로 손짓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그가 가리키는 문을 향해 걸어가자 그가 먼저 나아가 문을 열어젖혔다.
측문 안으로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레스토랑으로 오르는 계단이 아닌 그 아래쪽으로 난 회색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곧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가 나왔다. 복도 안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철문마다 ‘전산실’, ‘기계실’, ‘비품실’이라고 쓰인 문패들이 붙어 있었다.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철문을 열자 기름 냄새가 훅 풍겨 나왔다. 방 안에는 붓을 빨아내는 데 쓰는 백등유 통이 바닥 여기저기 놓여 있고, 커다란 나무 판에 아무렇게나 짜놓은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굳어 말라붙어 있었다.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들이 흡사 허여멀건한 돼지고기의 비곗덩어리처럼 붙어 있고, 벽과 면한 바닥마다 세워 둔 수많은 캔버스들 속에서 형형색색의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이 꾸덕꾸덕 말라 가는 중이었다.
만약 이 방에 문패를 붙인다면 ‘화실’보다는 ‘연료실’이라고 적어 넣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곳곳에 세워진 나무 이젤은 물론 캔버스의 틀, 붓, 팔레트, 나무 의자와 선반 등 거의 모든 것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천장에 가까운 나무 선반 위에도 서너 개의 석고상을 비롯해 정물화를 위한 도구들이 올려 있는데, 화병, 운동화, 테니스공, 인형 등 모든 것이 불에 타기 좋아 보였다. 털이 북슬북슬한 곰 인형마저도 기름때에 잔뜩 찌들어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 불을 제대로 끄지 않은 담배꽁초라도 무심코 바닥에 툭 떨어트린다면,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 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흔적 하나 없이, 빠르고 간단하게, 모든 것을 다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작업실을 얻었어요?
내가 묻자 그는 더듬더듬, 사업을 하는 어릴 적 친구가 3년 전 이 호텔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업실을 구하고 있던 자신에게 지하의 이 공간을 흔쾌히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호텔 직원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식사도 무료로 할 수 있게 배려해 줬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왜요? 라고 묻자 처음에는 자신의 식사 시간이 불규칙해 정해진 시간에만 이용할 수 있는 직원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가 불편하다고 대답했다. 그게 뭐 불편해요? 혼자서 사 먹는 게 불편하지.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다시, 사, 사람들이…… 불편…… 이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진짜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자신은 이 호텔의 직원이 아닌데 직원들이 이용하는 공간에 같이 있는 것, 그리고 이 호텔의 투숙객이 아닌데 투숙객들이 있는 공간에 같이 있는 것. 오, 올라가면…… 모두가, 아, 나, 나를…… 쳐다, 보는, 것…… 같, 아……. 로비에 있는 데스크 직원과 접수계 직원, 카페 직원, 벨 보이, 도어맨, 심지어 청소부까지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사람들의 환대, 친절, 예의가 담긴 시선이 온종일 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 은, 모두…… 내 것 아니……. 그래요.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것도 아니죠.
그럼 돈은 하나도 내지 않아요?
내가 다시 물으니 그는 그렇다는 의미로 눈꺼풀을 끔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림, 줬…….
완전히 준 것은 아니고, 팔리지 않는 그림들을 호텔 객실과 복도마다 전시하듯 걸어 두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눈에 띄면 종종 팔리기도 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여태껏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작업실 구석 한편에 누군가 쓰다 버린 듯한 낡은 가죽 소파와 나무 탁자, 책꽂이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습관적으로 옷을 벗었다. 몸이나 가슴이 달아오르는 식의 섹스는 해본 적이 없다. 서로를 흥분시키기 위한 애무도 키스도 없는 정사가 짧게 이어질 뿐이다. 심지어 그의 성기는 너무도 자그마해 나는 단 한 번도 그와의 섹스에서 만족을 하거나 흥분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의 관계에 이끌리는 건,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섹스는 아프고 지루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 애, 경태 때문일 것이다. 3년 전 여름, 열아홉 살 때 만난 연하의 남자 친구. 그 애와 만난 지 백일 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처음인 나와는 달리 나보다 두 살 어린 그 애가 섹스에 더 능숙했다. 그래서인지 경태와의 섹스에 대해 떠올려 보면 ‘했다’기보다는 ‘배웠다’는 느낌만 들었다.
누나, 다리 좀 접어 봐. 가만히만 있지 말고 조이기 좀 해봐. 거기에 힘 좀 줘보라고. 뒤로 돌아봐. 이제 허리를 좀 들어야지. 위에 올라가 봐. 입으로 해봐.
첫 경험이 이루어진 뒤부터 나는 매일 경태에게 섹스를 배웠다. 극장, 놀이동산, 카페 따위를 전전하던 데이트 코스도 노래방, DVD방, 룸 카페, 여관, 빈집 등으로 옮겨갔다. 그 애는 섹스를 할 때마다 굉장히 오랜 시간을 끌었고, 한 번 사정을 하기까지 중간 중간 성기를 빼내어 쉬었다가 다시 삽입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 애가 사정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너무 버거웠다. 무엇보다 아팠고, 익숙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는 버거움보다 지루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마저 사라질 즈음 나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섹스를 할 때마다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자로 누워 있기만 하자 경태는 나를 채근하며 어떻게든 섹스를 더 가르쳐 보려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질 뿐이었다.
경태는 경태 나름대로 이런 나와의 섹스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그 애가 이런 식의 섹스에 익숙해졌을 즈음 나는 그만 이별을 통보했다. 경태가 싫은 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애는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 중에 가장 출중한 외모를 가진 연하의 남자 친구인 데다가 돈이 많고, 섹스를 잘하는 애였다. 경태 이후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경태만 한 남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섹스를 빼어나게 잘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싫었다.
달팽이 화가인 그와의 섹스에서 나는 늘 그가 더 깊이 들어와 주길, 더 오래 해주길 바라곤 한다. 끝나고 나면 한없이 부족한 느낌. 섹스를 계속, 더 많이 하고 싶은 느낌. 그래서 그 화실로 자꾸만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들. 그러나 아무리 섹스를 많이 해도 그는 나에게 조금도 더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섹스가 끝난 뒤 서둘러 화실에서 빠져나왔다. 피자나 치킨이라도 시켜서 먹고 가라는 그의 제안을 뿌리친 채 서둘렀다. 그리고 화실에서 나오자마자 온몸에 향수를 뿌렸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한 번 더 향수를 잔뜩 뿌린 뒤 현관문을 열었다. 그와 만나기 시작한 뒤로 50밀리리터 향수 한 병이 한 달 만에 동이 나곤 했다. 엄마는 나의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지만 별수 없었다. 그 화실의 눅눅한 기름 냄새를 달고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신, 그림 다시 그려 보는 건 어때?
뚝배기 속의 순두부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을 때, 아빠가 말했다. 엄마는 식탁으로 날계란을 가지고 와 뚝배기 모서리에 툭 갖다 댔다. 날계란의 껍데기가 갈라지자 양손으로 그것을 잡아 벌렸다. 콧물 덩어리처럼 몽글몽글한 계란의 속이 찌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숙은 싫은데.
그림이라뇨?
당신 대학 다닐 때 부전공으로 미술 했잖아. 집에만 있지 말고 화실에 나가서 그림 다시 그리고 친구들도 사귀고 그랬으면 좋겠네. 이제 애도 다 컸는데.
투명하던 계란 흰자가 하얗게 익어 갔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뚝배기 속의 계란을 건져냈다. 그러자 미처 다 익지 못한 계란 노른자가 식탁 위로 죽 흘러내렸다. 역시 반숙은 싫었다.
다음날 엄마는 바로 화실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처 망설였다.
전공도 아니고, 취미나 교양처럼 배운 건데, 게다가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
괜한 소리였다. 엄마가 떠들어대는 걱정들은 별 무리 없이 다 해결됐다. 엄마는 어차피, 아빠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렇게 엄마가 시내에 있는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로 집 안 곳곳에 캔버스가 널렸다. 완성된 그림이 완전히 굳기까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쪽에 놓아두어 유화 물감의 기름 냄새는 금세 집 안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밖에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코를 찌르듯이 훅 끼쳐 오는 기름 냄새. 코뿐만 아니라 눈과 귀, 입, 피부의 모공 속까지 파고 들어오던 냄새……. 그 냄새에 중독이라도 된 듯 엄마는 유화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서 살았다. 화실 사람들과 함께 지방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느라 사나흘씩 집을 비우는 일도 잦았다. 그런데 엄마가 화구를 모두 가지고 나가는 날도 집 안의 유화 물감 냄새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기름 냄새가 유난히도 진동하던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교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난데없이 아빠한테 가자고 말했다. 황태죽을 끓였는데, 아빠가 아침 회의가 있다면서 먹지 않고 나가버렸다는 것이었다. 내일 먹으면 되잖아,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너무 많이 끓였다며, 뜨거울 때 바로 먹어야 한다며, 지금 당장 죽을 갖다 주어야 한다며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엄마 혼자 가. 내가 다시 말하자, 엄마는 내가 함께 가야 아빠가 좋아할 것 같다며 자꾸만 나를 앞세웠다.
학교는?
아프다고 전화해 줄게.
엄마의 승용차를 타고 아빠의 사무실로 향했다. 엄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초조하게 운전을 했다.
엄마, 왜 이렇게 떨어?
말 시키지 마, 운전하는데.
나는 머쓱해진 손으로 안전벨트를 채운 뒤 슬며시 눈꺼풀을 닫았다. 철컹철컹, 승용차는 마치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차 안에서 자면 멀미가 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곧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 건물의 지하주차장 안이었다. 엄마는 나를 깨우지도 않고 그저 운전대에 고개를 푹 처박은 채 앉아만 있었다. 언제 도착한 걸까. 내가 일어나 안전벨트를 풀자 엄마도 고개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엄마와 나는 나란히 승강기에 올라탔다. 11층. 11층의 사무실. 하지만 건물 구조는 혼자 살기 딱 좋은 원룸텔 같아 보였다. 11층에 도착하자 엄마는 나에게 사무실 문을 열어 보라고 말했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자, 어제, 경태가 일시정지 버튼을 클릭하던 장면이 드러났다.
누나, 이 장면이야. 옆치기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앞치기나 뒤치기면 모를까, 웬만한 포르노에도 안 나오는 거야. 보통 애들은 하기도 힘들고. 우리 오늘 이거 해보자, 응?
경태는 일시정지 된 화면을 마우스로 드래그 해 확대시켰다. 그래서 어제 처음으로 경태와 시도해 봤던 그 자세로 섹스를 하고 있는 아빠와 여자가 그 안에 있었다. 저렇게 하는 거였구나. 나는 동영상을 보며 아무리 따라해 봐도 잘 안 돼서 경태가 내내 짜증스러워했는데.
엄마는 죽을 담아온 보온병을 떨어트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내 귀에는 엄마가 내지르는 소리보다 보온병 속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모든 게 정지됐다.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는 엄마도, 섹스를 하고 있던 아빠도, 이런 상황을 예감했을 법한 여자도, 모든 상황을 서서 지켜보는 나, 까지도.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일시정지 되어버리는 컴퓨터 화면 속 동영상처럼 우리의 삶은 이렇게 멈추는 것이었다. 삶은, 그런 것이었다.
정지된 화면을 가정 먼저 작동시킨 건 아빠였다. 아빠는 서둘러 옷을 입고 엄마와 내가 서 있는 현관으로 걸어왔다. 엄마는 내가 구겨 신은 운동화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아빠가 복도를 둘러보더니 경찰은 안 왔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이 상황이 정리되지 않는 듯한 세 사람 틈에서 나는 괜히 담담했다. 마치 나만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그 상황을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허리까지 늘어진 긴 생머리. 하얀색 슬리브리스 속옷을 서둘러 꿰어 입은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어려 보이는 여자애였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으려나? 키도 작고 몸도 깡말라 청순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얼굴 생김새 자체는 못생긴 편이었다. 살이 좀 찌긴 했지만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미인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자였다.
소리를 지르던 엄마는 기어이 울기 시작하며 그 여자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어쩌자고, 뭘 어쩌려고, 라는 말들을 하는 것 같은데 울음소리에 가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여자는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강단 있게 대답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난 안 헤어져요. 아니, 못 헤어져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였다. ‘죄송해요’라는 말에 제법 악다구니가 들어 있기까지 했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짓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는 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미리 준비하고 별러 오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또박또박 내뱉을 수 있을까. 물론, 엄마의 대사도 마찬가지긴 했다.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이도 어린년이, 어떻게, 너는 에미도 없어? 너희 부모님도 너 이러는 거 알아? 너 나중에 결혼해서 네 남편이 너처럼 새파랗게 젊은 년이랑 바람났다고 생각 좀 해봐.
여자는 고개를 돌린 채 미안해요 소리를 내뱉으며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진부한 장면이었다. 채널을 돌려 뉴스라도 보고 싶을 만큼 지루하게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결국 그 여자의 긴 머리칼을 붙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여자는 더욱더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 엄마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며 눈물을 떨구었다. 아빠는 엄마의 팔을 뜯어 말릴 엄두가 나지 않는지 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애비 닮은 년.
아빠와 헤어지고 난 뒤로 엄마는 그저 멍한, 그러나 노려보는 것이 분명한 눈으로 나에게 애비 닮은 년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코가 어쩜 이렇게 높을까? 아주 그냥 제 애비랑 똑 닮았네. 이마가 왜 이렇게 반듯하고 넓지? 아 맞다, 넌 네 아빠 닮았지.
엄마는 하루에 두세 번 정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내 얼굴이 아빠를 닮았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었다. 내 얼굴은 누가 뭐래도 엄마와 판박이였다. 어릴 적에 엄마가 공연히 장난 삼아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야”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을 만큼 내 얼굴은 엄마를 빼다 박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의 코와 이마가 아빠랑 꼭 닮았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엄마는 확실히 나보다는 코가 좀 낮고 이마가 좁았다.
그런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하고 난 뒤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아갔다. 자다가도 놀랄 정도로 혼자서 살아가는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태초부터 혼자서 살아온 사람마냥, 남편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 양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마가 혼자서도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엄마가 비정상적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그랬다. 엄마는 비정상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은, 아빠라는 사람 없이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어야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에는 무척 정상적인 사람처럼 살아가는 엄마가 사실은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서는 바로 음식이었다. 엄마는 요리를 매우 잘하는 여자였다. 잘하는 건 밥 짓는 것밖에 없잖니, 라고 말하던 엄마가 어느 때부터인가 음식의 간을 전혀 맞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겉모양은 예전 그대로지만 속맛은 전혀 달라져 버린 음식들. 나는 그런 엄마의 음식을 꿋꿋이 먹었다. 간이 안 맞아서,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는 말 같은 건 한 번도 하지 않고 모두 먹어치웠다. 그것들을 먹으며 나는 절대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어느 누구도, 절대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남자 친구든 간에, 어느 누구도 나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간이 맞지 않는 엄마의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나는 점점 더 결연해졌다.
중년의 나이에 딸 같은 계집애에게 홀려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떠난 아빠를 나는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대상은 바로 엄마였다. 어째서 엄마는 아빠가 아니면 그 흔한 섹스 한 번 하지 못하는 여자로 살아왔을까? 대학 동기로 만나 졸업한 뒤 바로 결혼한 엄마와 아빠. 엄마의 사랑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고, 그 한결같은 사랑에 숨이 막혀서 아빠가 떠난 거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한 남자만 사랑하지 않겠다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이런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아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제 애비 닮아서 차가운 년.
제 애비 닮은 년. 제 애비 닮아서 머리숱도 없고, 제 애비 닮아서 귓바퀴도 뒤집어지고, 제 애비 닮아서 팔도 길고, 제 애비 닮아서 발도 크고, 제 애비 닮아서 냉정한 년……. 나는 엄마의 그 말을 한 번만 더 들으면 정말이지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도 알아,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그래, 나 아빠 닮았어. 아빠 닮아서 성격도 더럽고, 차갑고, 뻔뻔해. 더 알려줄까? 손가락의 손톱도 아빠를 닮아서 반달형이고, 목 뒤에 사마귀 점이 있는 것도 아빠를 닮아서 그래. 아빠 닮아서 운동도 싫어하고, 아빠 닮아서 글씨체도 괴발개발이야. 나도 다 아니까, 알고 있으니까, 제발 그 소리 좀 그만 해! 그렇게 시시때때로 각인시켜 주지 않아도 알아, 다 알고 있어, 다 안다고! 나는 부엌에 있는 식기와 조리도구들을 집어 거실 바닥에 내던지며 마구 소리 질렀다.
그렇게 싸운 날이면 엄마는 내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와서 울었다. 울면서 더듬더듬 내 얼굴을 만졌다. 엄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닮지 않은 부분, 코와 이마를 만지는 것이었다. 엄마는 나의 반듯하고 넓은 이마와 높은 코를 항상 부러워했다. 아빠 닮아서 좋겠어, 라면서 말이다. 엄마의 손은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귀로 넘어갔다. 바깥쪽으로 벌어진 귓바퀴는 복이 달아난다고 했던가. 외할머니는 아빠의 귓바퀴가 바깥쪽으로 헤벌어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네 어미처럼 안쪽으로 똘똘 말려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복이 달아나지 않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귀를 만지는 것은 못내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하다. 나는 엄마가 그만 나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떠날 줄을 몰랐다. 엄마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사람이다. 언제나 한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있는 것만이 엄마의 최선이었고, 나는 어디라도 좋으니 제발 떠나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그가 있는 호텔로 향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지만, 나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 존재조차도 모르는 그곳, 그 어두컴컴한 복도에 있는 철문을 열어젖혔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기름 냄새, 그리고 뒤이어 따라오는 알코올 냄새. 나는 구석진 자리 소파 위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 옆에 앉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브래지어 훅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손가락이 내 가슴을 주무르자 조그맣게 말라붙어 있던 젖꼭지가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가 입으로 내 젖꼭지를 물고 빨아 당겼다. 나도 그의 자그마한 성기를 손에 쥐고 단단하게 일으켜 세운 뒤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벌려 앉았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젖지 않는 메마른 질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의 지문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처럼 그의 몸을 더듬었다.
섹스가 끝나고 난 뒤 나는 평소처럼 곧바로 호텔에서 나가지 않고 그의 낡은 가죽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가 대충 조립해 만든 나무 탁자 위의 술병을 집었다. 술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나를 보며 엄마는 애비 닮아서 술까지 잘 마신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병 안에 절반 정도 남아 있는 술을 물 컵에 모두 따라낸 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몸속에 불이 붙고, 모든 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술이라도 못 마셨다면 그놈의 애비 닮은 년 소리 한 번은 덜 들었을 텐데.


귓속의 달팽이관이 흔들려서 멀미를 하는 거야. 정신력이 흐려서 그래. 무언가에 집중하면 괜찮아져.
이래서 여행 가는 게 싫다고 했잖아. 아빠, 나 아직도 더 토할 것 같아.
차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다. 발밑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내가 게워낸 토사물이 한 가득이다. 나는 멀미가 심해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속이 울렁이곤 했다. 어릴 적에는 내 옆에 꼭 붙어 뒤치다꺼리를 해주던 엄마도 점차 나를 더럽고 귀찮게만 여겼다. 엄마는 내가 늘 주변 사람을 힘들게만 한다며 짜증을 냈다.
잠을 좀 자봐.
이렇게 토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잠을 자. 아무래도 봉지가 더 있어야겠어. 아빠, 아빠.
봉지 하나를 다시 가득 채우고 나자 곧 피곤이 몰려왔다. 잠이 들었던 걸까? 아빠가 운전하고 있는 차는 또 다른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속이 또 울렁, 하려는데 아빠가 뭐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거지? 잘 안 들려 아빠.
어른이 되면, 멀미를 안 하게 될 거야.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어른이 되면.
아빠는 룸미러를 통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도 그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꺼풀 속의 눈동자는 유난히도 크고 까맣다.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의 그 눈동자를 나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을 떴다. 아빠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눈을 감았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 눈을 떴다. 아빠, 아빠, 그만 쳐다봐. 운전해야지. 그러다 사고 나겠어, 안 그래도 좁다란 길에서, 아빠, 아빠……?
커다랗고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일어…… 났……. 아빠…… 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옷조차 제대로 꿰어 입지 않고 철문을 향해 뛰었다. 내 행동에 놀란 그가 서둘러 쫓아와 내 팔뚝을 붙잡았다.
갑자…… 왜…… 어…… 옷…….
그의 한 손은 내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내가 벗어둔 양말을 붙들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강하게 털어내고 도망치듯 뛰었다. 그가 완성해 놓고 말리는 중이던 캔버스가 발에 걸려 미끄러졌다. 아직 덜 마른 기름 덩어리들이 신발에 다 달라붙었다. 그의 그림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미안함도 잊은 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바로 이어 회색 철문이 이어진 복도 위를 달려가는데, 철문은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나타나고,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나타나는 형식이라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현기증이 일어 나는 잠시 이마에 손을 짚고 멈춰 섰다가 다시 발걸음을 뗐다. 신발에 묻은 유화 물감이 바닥에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흔적을 남겼다.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
엄마는 아침부터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더니 어느새 마트에 다녀온 모양이다.
스파게티는 네가 잘 만들잖아.
그렇게 말하며 식재료가 잔뜩 들어 있는 장바구니를 나에게 내밀었다.
스파게티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아빠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으레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도 물론 스파게티를 만들 줄 안다. 그러나 엄마는 미트 스파게티를, 나는 해산물 스파게티를 잘 만들었다. 그리고 아빠는 미트 스파게티보다 해산물 스파게티가 깔끔하고 개운해서 입에 잘 맞는다며 항상 나에게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는 능숙하게 조개의 해감을 풀고 끓는 물에 스파게티를 삶았다. 그의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어째서, 자고 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뜨거워진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 삶은 스파게티 면을 건져 팬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토마토퓌레와 해물을 차례로 넣어 볶았다. 중간 중간 조개 육수로 간을 맞춘 뒤 이내 완성된 스파게티를 크고 둥그런 접시에 담았다. 말린 파슬리 가루까지 뿌린 뒤 식탁으로 가져가 내려놓자 엄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엄마는 포크로 스파게티를 둘둘 말아 입 안 가득 집어넣으며 말했다.
맛있다, 너도 먹어 봐.
엄마는 입 안 가득 말아 넣은 스파게티를 오물오물 씹어 삼킨 뒤 환하게 웃었다. 나도 엄마처럼 포크를 들어 스파게티 면을 둘둘 감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파게티를 포크에 감을 때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지만 복이 오는 것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손은 좀체 왼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아가던 포크를 억지로 왼쪽으로 돌리자 스파게티 면이 다 풀어졌다. 나는 다시 오른쪽 방향으로 스파게티를 둘둘 감아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맛있다’, 라는 말이라도 기다리는 사람마냥 쳐다보았다. 미간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나는 스파게티 면을 씹기도 전에 그대로 다시 접시 위에 내뱉었다.
왜 그래? 맛있게 먹어 봐. 맛있잖아. 우리 딸이 만든 거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문을 열고 양변기 속에 스파게티를 모조리 쏟아버린 뒤 물을 내렸다.
뭐 하는 짓이야!
엄마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만든 스파게티는 간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3인분이 아닌 2인분을 만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엄마는 스파게티 접시 위에 고개를 처박고 제 애비 같은 년, 이라고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찬장에서 아빠가 종종 꺼내 마시던 위스키를 꺼내어 유리잔 가득 따른 뒤 단숨에 들이켰다.


여…… 여보, 여보…….
몸이 무거웠다.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상체를 내 가슴에 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엄마, 좀 일어나 봐.
나는 고개를 세우며 엄마의 상체를 밀쳐 봤다. 그러자 잠에서 깬 엄마가 부스스 일어나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여보!
엄마, 그만 방으로 가서 자.
어? 여, 어 그래.
나는 그대로 다시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집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새벽 2시였다. 그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통화 버튼을 길게 눌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띄엄띄엄한 그의 말투가 휴대전화 저 편에서 들려왔다.
어디……?
집이요.
오, 오늘 안……?
지금 갈게요.
택시를 타고 그가 있는 호텔의 이름을 말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덕분에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퇴계로까지 10분 만에 도착했다. 나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려 퇴계로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8차선 도로 위로 차들이 드문드문, 그러나 매우 빠르게 지나다녔다. 도로 위로 차들이 빠르게 달려오고 또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텅 비는 듯했다가 곧바로 다시 차올랐다. 낮에는 수많은 이국 사람들로 북적이다가도 밤이면 이렇게 텅 비어버리는 곳……. 아무도 없는 이 거리의 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길 건너편의 호텔과, 전철역과, 쇼핑몰까지도.
나오면 안 돼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
좀 씻고 싶어서요.
이내 그가 호텔의 측문을 열고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나란히 서서 텅 빈 거리를 걸어 나갔다. 길을 건너고, 또 건너고, 또 건너다 보니 어느덧 종로 거리에 다다랐다. 술집이 줄줄이 이어진 거리와 문 닫은 상점들이 이어진 대로변을 지나 인사동 뒷길에 자리한 모텔로 들어갔다.
콘돔 한번 써볼까요?
그가 피식 웃었다.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그의 얼굴이 말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다. 너무나 많은 말을, 수없이 많은 말을, 퍼내고 또 퍼내도 영원히 다 퍼낼 수 없을 말을 쏟아 놓고 싶었다.
있잖아요, 나는 말이에요.
그가 멀뚱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콘돔의 포장지를 벗겨 그것을 손가락 안에 끼우고 움직여 보았다. 나는 계속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잘 알 수가 없는데.
왜 자꾸 나를……. 아빠가요, 우리 아빠가. 그러니까 나는…… 어른이 되면, 아, 왜 이렇게 속이 미슥거리지. 꼭 토할 것 같아요. 어른이 되면, 멀미 안 한다고,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벌써 스물두 살인데, 왜 이렇게 계속 토할 것 같…….
그가 어느새 다가와 버릇처럼 내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만 콘돔을 손가락에서 빼내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잠깐만요, 씻고 올게요. 씻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씻고, 해요, 우리.
나는 방문을 닫고 현관과 면한 욕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면대 가득 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그가 텔레비전을 켠 모양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울려 왔다. 나는 샤워기 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쏴아 물발이 떨어지는 소리에 귀가 울렸다. 나는 샤워기의 물을 틀어 놓은 채로 화장실에서 나와 홀로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은 새파란 새벽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찬 공기를 내뱉고 다시 들이마셨다. 기름 냄새가 빨려 들어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향수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어깨 언저리로 돌려 기름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저 유화 물감 냄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젤과 팔레트의 나무 냄새, 목 언저리까지 바르던 스킨 냄새, 하루에 두 갑씩 태우는 담배 냄새, 삶 냄새.
내가 항상 뿌리고 다니던 향수 냄새도 그의 몸에 배어 있을까? 먼 훗날 나와 같은 향수를 쓰는 여자를 만나면 정말로 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까.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 길을 걸어 나갔다. 아직 가을의 초입인데 벌써부터 플라타너스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거리마다 플라타너스 가지를 쳐내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앙상한 가지 하나 남겨 놓지 못한 채 장승처럼 어둡고 습하게 서 있겠지. 그리고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성한 잎들을 자랑스럽게 꺼내 놓는, 생과 사를 미친 듯이 반복해댈 것이다.
메스껍던 속이 울렁이며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나는 그만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꺽꺽 소리와 함께 안에 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인지 기름인지 알 수 없는 것들. 너무나 많은 냄새가 풍겨 오는 것들. 사실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들. 그것들을 모두 다 쏟아 두고, 둥그렇게 말린 플라타너스 이파리 위를 나는 계속 걸어 나갔다.



작가소개 / 김혜나(소설가)

- 1982년 서울 출생. 2010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장편소설 『제리』, 『정크』, 『그랑 주떼』, 산문집 『나를 숨 쉬게 하는 것들』 출간.


《문장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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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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