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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 작성일 2019-03-01
  • 조회수 1,466

[단편소설]



은하



명학수




내게는 소설만 끼고 살던 나를 만나기만 하면 소설의 시대는 끝났다고 놀려대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 진학해서 미영과 함께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친구는 보르헤스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면 소설의 유효기간이 좀 더 연장되었을 거라고 중얼거리고는 내 손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낚아채더니 일주일 후에 돌려주겠다며 가져갔다. 그는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가 2주가 지나서야 책을 돌려줄 테니 학교 앞에 있는 cafe afrika에서 보자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친구를 기다렸다. afrika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어떤 여자애, 딱 둘뿐이었는데, 그 애는 햇빛이 한 뼘도 들지 않는 구석의 연두색 소파에 앉아서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 있었다. 꽤나 작위적이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십 분쯤 지나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광고촬영을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인데 촬영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어서 못 온다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천사를 파견했으니 책은 그를 통해 받으라고 말했다. 천사가 누구냐고 물으며 나는 본능적으로 카버의 여자애를 바라봤는데 친구는 천사에게 말은 걸어도 좋으나 손가락 하나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선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그 애와 나를 이어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가 분명했다. 훗날 친구는 절대 아니라고, 그건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고 부인하긴 했지만 말이다. 친구의 이름을 대고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초록색 백팩에서 보르헤스의 『허구들』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젊은 보르헤스의 잘난 얼굴을 빤히 보다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거 재미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카버의 표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 남자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었다. 친구는 쓸데없는 수작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남녀의 호르몬을 과소평가한 요구였다. 레이먼드 카버와 보르헤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의 걸작도 그날만큼은 완전히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다. 나는, 그리고 미영은 오래 전부터 갈구해 온 연인들처럼 서로를 향해 빠져들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미영은 학교 근처의 낡은 재래식 가옥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모두 공용인 데다 세탁은 샤워실에서 손빨래를 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지만, 미영의 말에 따르면 월세가 워낙 싸서 빈방이 나길 기다리는 학생들이 일 년 내내 대기 중인 집이었다. 미영은 여름방학 동안 부모님이 살고 있는 강릉에서 지내려던 계획을 나 때문에 포기했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둘 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늘 붙어 있었고 한쪽만 수업에 들어간 경우에는 빈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기다렸다. 손을 잡는 순간과 입을 맞추는 어느 아찔한 저녁의 찰나들은 아무런 예감 없이 돌연 다가왔다가 격렬한 여운을 남기며 지나갔다. 두 달쯤 지난 어느 여름, 한껏 달아오른 세 평 남짓한 크기의 그녀의 방에서 우리는 캔 맥주를 마시다가 다급하게 서툰 섹스를 치렀다.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이 나의 알몸을 훑으며 지날 때마다 소름이 올라오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내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끝이 아쉽게 식어 가던 내 몸의 열기에 다시 스위치를 켰지만 옆방 학생들이 귀가하는 소음이 들려오자 그 오래된 주택의 가장 끔찍한 약점이 방음이라고 말하며 미영은 쿡쿡 웃었다.


미영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12월에 태어났고 혈액형은 B형이었으며 술은 한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다. 히치콕의 영화는 좋아했지만 공포영화는 싫어했고 코끼리는 좋아하면서 동물원은 싫어했으며 너바나에 열광했고 하루키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걸 불편해했다. 당연히 다른 점도 있었는데, 특히 독서의 취향과 방법이 그랬다. 미영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빠르게 읽었으며 소설가 중에는 배수아와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는데, 특히 그녀에게 카버는 거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나는 마음에 꽂힌 일부 작가의 제한된 작품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느리게 읽는 편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3년 내내 카프카를 읽다가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에 우연히 보르헤스와 만났는데 그의 소설들을 읽을수록 어딘가 모르게 카프카와 닮은 면이 보여서 미영을 만나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카프카의 『성』과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반복해서 읽던 중이었다. 미영도 카프카의 작품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몇몇 단편들에 국한되었고 보르헤스에 대해서는 이게 소설이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단 한 번, 우리의 서로 다른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킨 소설이 있었다. cafe afrika에서는 손님이 별로 없는 평일 밤에 카페 문을 잠그고 고전 예술영화를 DVD로 틀어 주고는 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본 영화가 <프라하의 봄>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줄리엣 비노쉬에 반했고 미영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푹 빠졌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지만,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내기 연인들답게 주인공들의 사랑 어딘가에서 우리의 연애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고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영화의 여운을 길게 곱씹었다. 우리는 바로 다음날부터 영화의 원작 소설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빈 강의실에서, 그리고 학교 곳곳에 놓인 벤치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오직 그것만 읽었다. 먼저 읽기를 끝낸 미영은 내가 아직 절반도 못 읽은 걸 확인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부분에는 밑줄을 그었다. 나는 파란색 볼펜으로, 미영은 연필로. 내가 다 읽었다고 말하자 미영은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아당겼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모텔에 갔다. 다음날 오전에 거기서 나올 때까지 우리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섹스를 하다 지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서 밑줄 친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섹스를 하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읽다 다시 섹스를 하고. 우리의 독서는 황홀했고 우리의 오르가즘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소년과 소녀는 열일곱 살의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들른 노래방에서 우연히 만나 일주일 후부터 교제를 시작한다. 한 달 후, 뱃속에 아기가 생겼음을 알게 된 소녀는 전에 6개월 동안 사귀었던 오빠가 아기 아빠인 것 같다고 소년에게 털어놓는다. 소년은 소녀가 오빠라고 부르는 남자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오히려 화를 낸다. 소년은 주먹을 휘둘러서 그의 이빨 두 개를 부러뜨린다. 소년은 소년원으로 보내지고 소녀는 학교와 집을 떠나서 아는 언니들의 집을 전전한다. 소년이 소년원에서 나와 다시 소녀를 만났을 때 소녀는 작은 이모가 한 달만 쓰라며 내준 좁은 방에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과 아이가 한 식구가 되는 과정을 싸이월드의 미니홈피에 사진과 글로 게시했다. 미니홈피의 방문자들 중에는 철없는 청소년들의 문제적 행동이라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고 순수한 두 영혼의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라며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쓸거리를 찾아서 인터넷을 떠돌다 우연히 들른 소설가에게 그들의 기록은 그럴듯한 서사를 잉태한 씨앗이었다. 소설가는 그것을 소설로 재창조했다. 그의 소설에서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가져다 아이의 이름을 '은하'라고 지었고 그것이 소설의 제목이 되었다. 소설 『은하』는 등단한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출간 초기에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다가 소설의 주인공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소문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관심을 모으더니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의 상위권에 들어갔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마침내 미영의 손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미영은 내게 생일선물이라며 『은하』를 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선물도 『은하』이기를 바란다고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사실 『은하』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십대들의 일탈과 방황이라는 소재도 식상한 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문학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미영은 달랐다.
"그게 왜? 그러니까 재미있는 거지. 허구가 아니라 진짜라는 뜻이잖아."
미영은 내가 반론을 내놓으려 하면 일단 읽은 다음에 얘기하자며 내 입을 막았다. 『은하』는 지루하고 평범했다. 작가는 두 청소년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꼼꼼하게 서술했지만 특별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겨우 이런 소설 때문에 우리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미영이 내 의견을 물었을 때 나는 내 생각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좋은 말만 골라서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녀도 동의할 것이 분명한 부분만 조심스레 언급했다.
"소년 말이야. 겨우 열일곱이잖아. 그렇게 어린애가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게 말이 돼?"
내 예상은 빗나갔다. 미영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말투도 이내 차가워졌다.
"사랑하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했는데 그걸 모른 척해?"
"사랑? 십칠 세 아이들이 사랑? 좋아, 그렇다고 쳐. 하지만 소설에는 그들이 정말 그럴 정도로 사랑하는지 나와 있지 않아.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고, 개연성이 없어."
"사랑만큼 선명한 개연성이 어디 있어? 그 애가 그런 결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의 증거잖아. 그만큼 사랑한다는 거잖아."
대화를 할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나는 미영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든 게 『은하』 탓이었지만 『은하』는 한 권의 소설에 불과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은하』를 두고 자주 싸웠는데 결론 없는 논쟁은 늘 나의 잘못으로 귀결되는 느낌이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그 시간에도 눈이 쏟아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은하』 때문에 말다툼을 했다.
"그건 그냥 소설이야. 작가가 지어낸 얘기라고."
"잊었어? 그건 실화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지. 일부만 실화고 나머지는 작가의 창작이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은하에 나오는 그런 사랑은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바보 같은 인간이 남의 남자의 애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겠나, 그런 말이지?"
"내 말은, 그러니까, 소설에 개연성이 없다는 것뿐이야."
"또 개연성이야. 그래서, 네가 보기에 우리는 개연성이 있어 보이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미영은 분명 내게 화를 내고 있는데 나는 미영이 그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간의 침묵이 지나간 뒤에 미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알아? 이 아이들이랑 우리랑 겨우 세 살 차이야."


그해 1월은 지독하게 추웠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며칠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 무렵, 소설 『은하』의 실제 주인공들이 출판사와 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들이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작가가 무단으로 인용 또는 일부 변형하여 사용했으며 자신들과 식구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했고, 출판사에게 해당 소설의 판매중지와 적절한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우리는 1월이 끝나 갈 즈음, 거의 열흘 만에 만났다. 미영은 두 팔로 나의 허리를 감으며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돈가스를 먹고 007영화를 보고 떡볶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은 다음, 모텔에 가서 국산 에로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미영은 잠들었다. 나는 그녀의 들숨과 날숨이 빚어내는 나른한 숨소리를 들으며 미처 채워지지 못한 욕구를 달래려 카프카의 『성』을 펼쳤지만 계속 같은 페이지만 맴돌고 앞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미영은 이번 설 연휴는 강릉에서 지내야 할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휴학계를 내고 군에 입대하기로 했는데, 어차피 갈 거면 일찍 갔다 오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부모님과 상의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 얘기를 다소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집어서 입 안 가득 넣고 천천히 씹으며 『은하』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그거 표절이래. 미니 홈피에서 토씨 하나 안 고치고 그대로 갖다 쓴 문장들이 꽤 있었나 봐. 네 말이 맞았어. 은하는 쓰레기야. 소설이 아니라 쓰레기."
나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아직 재판 중이니 정확한 건 모른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은하』가 쓰레기라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생각일 뿐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고, 그저 해장국만 크게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설 연휴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록 미영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나는 휴학계를 제출한 후에도 학교에 나갔다. 신문방송학과 강의실 앞에서 서성이는 나를 본 친구가 미영이 휴학한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더니 친구는 혀를 찼다. 미영의 방에는 이미 다른 학생이 살고 있었다. 나는 집에 처박혀서 보르헤스를 읽었다.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지운 포스트 모던한 소설이라는 평가는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감상과는 별개로 출판사의 오도된 선전 문구에 불과했다. 보르헤스의 장광설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였으며 출구 없는 미로였다. 나는 책을 집어던지고 침대에 누워 미영의 벗은 몸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사정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친구가 미영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내게 필요할 거 같아서 보냈다고 그는 말했지만 친구의 선의가 반갑지는 않았다. 핸드폰 액정 위에 떠 있는 미영의 주소는 낯설었다. 그리고 너무 멀었다. 강릉이라니. 다음날이 되자 강릉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거기 미영이 있을 테니까, 어쩌면 거기서 미영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다음날에는 다시 부질없는 짓처럼 여겨졌다. 미영이 나를 기다릴 리가 없었다. 나는 매일 망설였다. 그러던 중에 『은하』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왔다. 소설은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고 작가와 출판사는 실화의 주인공들에게 일정 금액을 배상해야 했다. 표절이라고 볼 만한 상당한 근거가 인정된다는 것이 재판부의 최종적인 판단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실화의 주인공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떠돌았다. 그들이 현재 별거 중이고 아이는 줄곧 여자의 부모가 떠맡아서 기르다시피 했으며 남자는 폭력 사건에 휘말려서 경찰에 입건되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미영의 말처럼 『은하』는 쓰레기였던 것일까? 나는 끝내 강릉에 가지 않았다.


나는 군에 있는 동안 단 한 줄의 소설도 읽지 않았고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모든 하루가 꽉 짜인 일정에 따라 숨 쉴 틈 없이 돌아간 건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이 소진해 버린 시간은 많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단지 시간이 많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제대를 하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는 친구도 없고 미영도 없었다. 미영이 어찌 된 건지 궁금했지만 그런 사정을 안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쌓여 있는 책들을 끄집어내서 정리하다가 소설 『은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마치 미영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은하』와 다른 모든 소설들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서 대문 밖에 내놓았다. 그것들은 폐지 줍는 노인들의 손을 거쳐 고물상에게 팔려가야 마땅했다. 그런데 밤에 돌아와 보니 책들이 고스란히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비싼 책들을 왜 버리느냐고, 버릴 거면 자기가 읽을 테니 그냥 두라고 엄마는 말했다. 과연 엄마가 읽을 수 있을까? 카프카를, 보르헤스를, 밀란 쿤데라를, 그리고 『은하』를. 갈피마다 땀과 정액의 흔적으로 얼룩진 그것들을, 거기 밑줄 쳐진 문장들을 엄마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소설로부터 멀어졌다. 합평 수업 때문에 단편 하나를 겨우 완성했지만 사뮈엘 베케트의 여러 소설들을 어설프게 모방했다고 욕을 먹은 뒤에 폐기처분해 버렸다. 4학년 학기 초부터 선배가 운영하는 논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복사, 채점, 청소. 이런 단순한 일들이 좋았다. 선배는 가끔 내게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 강의를 할 기회도 주었는데, 덕분에 남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적성 따위는 나의 유전자에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졸업 후 나는 출판사에서 중고생용 국어 교재를 만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주어진 일만 하면 되었으니까. 어떤 여자와 연애도 했다. 그 여자와 야구장도 가고 스키도 타고 홍콩으로 여행도 갔다. 그런데 재미가 없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많은 게 부족한 관계여서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반쯤 지나서 인터넷 강의 업체로 옮겼다. 출판사보다 직원 수도 많았고 월급도 30만 원이나 더 많았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외박도 많이 했다. 사모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자금이 두둑하다고 소문난 경쟁업체의 무슨 과장이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파격적인 연봉 인상과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약속하며 이직을 제안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회사로 옮겼다. 그곳은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원칙도 순서도 없었다. 매달 월급날만 지나면 출근을 하지 않는 직원들이 속출했다. 그 와중에 20대 중반의 여자 강사와 6개월 정도 사귀었다. 항상 바쁜 척하고 딱히 그런 거 같지도 않은데 부자인 척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오럴을 좋아했다. 내가 해주는 것도 좋아했고 나를 해주는 것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절정에 오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뿐이다. 친하게 지내던 논술 강사 두 명이 나까지 포함한 세 사람이 공동투자 하는 형태로 대치동에 학원을 차리자고 제안을 했다. 그들은 강의를, 나는 학원 관리를 맡고 수익도 투자비율에 따라 나누는 구조였다. 이번에도 나는 별 고민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치동 학원가의 한복판에서 야심차게 시작한 학원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학생들의 반응이 기대보다 미지근하자 강사들은 경력이 짧은 강사들에게 강의를 떠맡겼고, 약속했던 투자금도 절반만 내놓았는데 어차피 지분에 따라 수익을 나누기로 했으니 자기들이 그만큼 적게 가져가면 되지 않느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손해는 늘어났고, 학원을 정리했을 때 내게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군 제대 후 10년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차라리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 지랄을 하더니 결국 이 꼴이구나."
종일 잠만 자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에 찬밥을 물에 말아 휘젓고 있는 내 앞에 달걀부침을 내려놓으며 엄마가 한 말이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내쉬다가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듯 책을 펼쳐 들었다. 그녀는 동네 도서관에서 주관하는 독서모임의 열성 회원이어서 매달 한 권씩 책을 읽고 감상을 발표해야만 했다. 식탁에 머리를 처박은 채 밥을 퍼 넣다가 엄마에게 요즘은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책의 제목을 말했다.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 손에 있던 책을 낚아채서 표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신미영 소설집 『은하』. 책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소개에 따르면 미영은 강원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3년 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함께 실린 조그만 사진 속 미영은 갈색 뿔테 안경을 썼고 얼굴에도 살이 붙어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은하』는 네 달 전에 출간된 미영의 첫 번째 소설집이었다. 거기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 중 표제작인 「은하」의 내용이 꽤 흥미진진했다. 어느 소설가가 가출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은하』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어떤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그 소설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집을 나갔다며 작가를 스토킹 하는 내용이었다. 여인은 작가가 사인회나 북토크를 할 때마다 행사장에 나타나서 소란을 피우고, 강연을 하면 이상한 질문을 던져서 작가를 곤혹스럽게 만들더니, 급기야 작가의 뒤를 밟아 밤늦게 집까지 찾아와서 딸을 찾아내라며 행패를 부린다. 소설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문학적 자극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미영이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도중에 몇 번이나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라야만 했다. 「HeHisHimHis」라는 제목의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화자인 젊은 여자의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가서 종적을 감춘다. 젊은 여자는 과거에 남자와 사귀다 임신을 했었는데, 수술을 하라는 남자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자 남자는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린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의 두 사건을 평행하게 놓고 서술하는데, 여자가 아버지를 찾을 필요 없다고 어머니를 설득하는 장면이 절정이었다. 또 다른 단편인 「그 여자의 전쟁」도 30대 초반인 여자의 1인칭 시점이고, 임신한 여자가 혼자서 출산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고 홀로 아기를 돌보며 산후조리를 하는 이야기다. 출산을 전후해서 여자에게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변화들을 아찔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해 놓아서 남자로서 읽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나머지 소설들의 주인공도 모두 여자이고 그들은 절대 남자에게 기대지 않는다.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모아 놓고,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온 식구가 다 함께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일갈한다.
"당신 돌았어? 우리가 왜 당신이랑 같이 죽어야 하는데? 당신이 뭐라고 우리까지 끌어들여. 한 식구?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식구였어? 우리가 언제부터 같이 목숨도 끊을 만큼 그렇게 절절한 사이였냐고.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미영의 소설들은 그녀가 그토록 흠모했던 레이먼드 카버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한 가지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은하」에서 작가와 여인은 이런 설전을 나눈다.
"그게 사실인가요?"
"뭐가요?"
"당신 소설, 실화라면서요?"
"실제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건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열일곱 살짜리 애들이 가출하고 섹스하고 임신하고 살림까지 차려요. 그게 말이 돼요?"
"애들도 어른들처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 그걸 표현한 것뿐이고요."
"사랑? 열다섯, 열일곱이 사랑? 그게 사랑이야? 그래서, 내 딸도 길바닥에서 남자애들이랑 그 잘난 사랑을 하느라 집에도 안 들어오는 거니?"
"전 소설을 썼을 뿐입니다.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요."
"진짜 있었던 일이라면서? 실제 사연이라고 했잖아, 방금!"
이걸 읽으며 과거에 있었던 미영과 나의 대화가 떠올랐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하지만 다른 소설들 이곳저곳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골프채로 집 안을 때려 부수는 남편과 이혼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에서는 두 사람의 좋았던 연애 시절을 묘사하면서 영화 <프라하의 봄>과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용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소설이란 결국 작가의 기억과 경험에서 나오는 거니까, 미영에게 나와의 연애가 그토록 강렬한 경험이었다는 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적어도 미영의 소설에 내가 도움을 준 셈이니, 무조건 기분 나빠할 일만은 아니다. 엄마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이거 다 네 얘기지? 라고 다그칠 가능성도 제로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하지만. 임신을 했다고? 미영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혼자서 아이를 길렀다고? 물론, 소설 속 이야기다. 일곱 개의 단편들을 다 읽고 나면, 이건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고, 또 실제로 그런 부분이 적지 않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도,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때, 미영이 『은하』에 대해 예민하게 굴고 겨울 내내 내 곁을 떠나 있었던,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이 사실은 『은하』가 아니라 임신이었다면, 그게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아무리 12년 전 일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미영의 『은하』를 펴낸 출판사에서는 작가의 개인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지방에 있는 독립 서점인데 작가와 독자가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려 한다고 둘러댔더니 작가님께 여쭤 보고 연락 주겠다며 내 전화번호를 요구해서 통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미영은 그 흔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도 안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지며 돌아다니다 작가 신미영을 초대해서 '소설과 맥주가 있는 저녁'이라는 북토크를 한다는 블로그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장소는 용인에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서 차는 더디게 나아갔고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 주변을 빙빙 돌다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걸어서 서점 앞에 도착했다. 통유리 너머에 있는 미영은 가는 은테 안경을 썼고 사진으로 본 모습보다 다소 야위었지만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뭔가를 말할 때 그녀의 낯빛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안에서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점 문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북토크는 이미 30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쏟아질 테고 미영도 크게 놀랄 게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길 건너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은하』에 대해 검색했다. 미영의 소설에 대한 블로그의 리뷰나 인터넷 서점의 독자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남녀관계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단순 치환해 버리는 무식한 시도. 항상 을의 입장이었던 여자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이 책은 분명 페미니즘의 폐해를 지적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읽어라. 과대망상과 피해자 코스프레로 똘똘 뭉친 3류 소설. 같은 여자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아 읽는 내내 화도 나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특히 남성들의 반응이 유독 안 좋았는데 작품에 대한 반감은 작가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이어졌고, 늘 그렇듯 전문가들의 참고할 만한 비평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나와 서점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얼마 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서점에서 나왔다. 나는 차도를 건넜다. 미영이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서점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나는 그들로부터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미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듯 미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점의 불이 꺼지며 미영의 주위가 어두워졌고 나이든 여자가 마지막으로 나와서 열쇠로 서점의 문을 잠갔다. 그러는 잠간 동안 미영은 나를 보고 있었다. 흐린 가로등뿐이어서 미영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아마도 내 얼굴 또한 그녀의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건네기도 전에 미영은 돌아섰고, 나이든 여자가 그녀의 팔짱을 끼더니 한 무리의 여자들과 함께 미영을 나로부터 멀리 데려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미영은 꽤 잘나가는 작가였다. 분당에 있는 백화점의 이벤트홀에서 '작가와의 대화'와 사인회를 하는데 초대 작가가 신미영이었다. 나는 예정된 시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행사장으로 갔다. 지나다 우연히 들른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손에는 『은하』를 들고 있었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미영은 다소 중후해 보이는 정장 원피스를 입었고 머리나 화장에도 꽤 공을 들인 것 같았다. '작가와의 대화'는 사회자가 질문하면 미영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여성이 1인칭 화자인데 「은하」만은 3인칭이더군요."
"처음에는 「은하」도 여인이 1인칭 화자였습니다. 그런데 써가면서 계속 뭔가 부족한 게 느껴졌어요. 그 당시 제 안에서는 작가와 여인 모두를 이해하는 측면들이 공존했었거든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 결국 3인칭으로 가기로 했죠."
"이 소설 속 여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혹시 작가님의 실제 경험인가요?"
"경험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거 같은데요,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공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직접 겪은 일이라고 우겨도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냥 허황된 얘기가 되고 마니까요.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일들을 어느 한 사람이 혼자서 겪어냈다고 하면 너무 끔찍하지 않나요? 나보코프의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더 사실적이다.1) 저도 동의하는 말이에요."
정말? 12년 전에는 달랐잖아. 너는 그때 내 앞에서 사실이 곧 개연성이라고 주장했잖아. 왜? 어째서 생각을 바꾼 거니? 그때는 독자였고 지금은 작가라서? 한 시간가량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미영과 나의 시선은 두 번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미소를 지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웃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영의 얼굴도 굳어졌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틀림없이 그랬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고 미영의 시선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참석자들은 사인을 받기 위해 『은하』를 들고 줄을 섰다. 그들의 대열에 남자는 없었지만 나도 미영을 만나려면 줄을 서야만 했다. 미영은 환한 얼굴로 여자들이 내미는 책에 사인을 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미영과 나를 너무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나는 대열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문장이 도처에서 삐걱거렸고 단어 선택도 거슬렸다. 도대체 왜 그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파란 밑줄들은 내가 남겨 놓은 실수와 실언처럼 도처에서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며칠 후에 참석한 마포의 북토크에서는 참석하는 데 별다른 자격이나 절차도 필요 없고 대형 서점 내에 마련된 행사장도 개방적인 탓이어서인지 작은 소란이 있었다. 몇 개의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후 사회자가 미영이 페미니스트인지 물었고, 미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요즘 고민 중이긴 한데, 사실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하는 게 저의 일이고 그러기 위해 여자로서 가장 잘 아는 걸 소설로 옮겼을 뿐인데, 여자가 여자에 대해 쓰면 페미니즘이고 남자가 남자에 대해 쓰면 안티 페미니즘인가요?"
미영이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할 때, 어떤 젊은 사내가 손을 들며 불쑥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질문 있습니다. 결혼하셨습니까?" 사회자가 잠시 후에 질문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출산 경험은요? 혹시 미혼모인가요?" 사회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당신 아버지가 집을 나가도 안 찾을 겁니까? 대답해 보세요!" 직원들이 다가가 제지하자 그는 욕설을 뱉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미영의 반응이 궁금해서 시선을 옮겼더니 놀랍게도 그녀는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란을 피운 건 내가 아닌데 나를 탓하는 눈빛이었다. 남자가 직원들과 함께 행사장에서 사라지고 사회자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하자 미영도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참석자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대화를 끝낸 뒤 미영은 질문도 받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서둘러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남자의 서투른 행동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건 나였음이 분명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미영은 외부 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파주 시립도서관에서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네 명의 작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총 4회에 걸쳐 강연을 하는데 두 번째 강연자가 미영이었다. 120명이 앉을 수 있는 소강당에 40명이 조금 넘는 참석자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내 인생 단 하나의 소설'이라고 사회자가 소개했다. 미영이 가방에서 꺼내 청중들을 향해 들어 보인 책은 『은하』였다. 미영의 소설집 『은하』가 아니라 장편소설 『은하』. 서점에서 사라진 지 오래라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유물이 되어버린 『은하』. 미영은 실제의 사연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현실을 흔들다 끝내 소설마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과정을 차분한 말투로 들려주었다.
"저는 이 소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화가 났어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이해는 가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도 있었죠. 그래서 그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했습니다."
미영은 두 개의 『은하』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말했다.
"한 쪽은 소설 속 아이의 이름이고 다른 쪽은 소설 속 소설의 제목이지만 두 개의 은하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한 쪽의 은하가 나를 찾아와서 나를 통해 다른 쪽의 은하가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하나가 없었으면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어지는 미영의 말 속에서 두 개의 『은하』는 책의 제목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의 이름처럼 들렸고, 미영은 그런『은하』를 지키기 위해 소설을 둘러싼 현실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라고 거듭 다짐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딱히 작가 신미영이나 그녀의 소설 때문에 모인 게 아닌 탓이었을까? 하품을 하거나 아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자는 노인도 있었다. 나는 미영의 강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왔다.


나는 도서관 주차장에 세워진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용인, 분당, 마포, 파주. 모두 대중교통만으로 다니기에는 먼 거리이니 미영도 차를 가지고 다닐 거라고 짐작했다. 30분쯤 지나자 두 권의 『은하』가 들어 있을 큼직한 가방을 손에 든 미영이 도서관 건물에서 나왔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차장으로 걸어왔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걸음이 하얀 경차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미영은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도서관에서 흘러나온 불빛과 주차장 여기저기에 서 있는 가로등 덕분에 사방은 대낮처럼 밝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미영이었다.
"왜 그래?"
미영은 지쳐 보였다. 그리고 예민했다.
"뭐가?"
"계속 나를 쫓아다녔잖아."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에 간 것뿐인데."
"벌써 네 번째야. 도대체 왜 그래?"
"반가워서 그러지."
"반가운 마음만으로 오기엔 너무 멀지 않니?"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몇 대의 차들이 주차장에서 빠져나갔다. 어색한 침묵이 불편한 듯 미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곤해. 가야겠어."
미영은 차문을 열어 뒷좌석에 가방을 실었다. 나는 말했다.
"네 소설을 읽었어."
내 말은 독자가 작가에게 건네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소설이 적어도 우리에게는 평범한 소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미영은 운전석의 문을 열려다 손을 떼고 물었다.
"그래? 넌?"
"나? 내가 뭐?"
"소설 안 써?"
미영의 재주는 여전했다. 상대의 입을 단숨에 틀어막는 재주. 미영은 말했다.
"나는 너야말로 소설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나? 나는 네가 소설가가 될 거라곤 전혀 예감하지 못했는데 너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차마 뱉지 못하고 삼켰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묻든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변명일 게 분명했다. 미영은 차문을 열었다.
"갈게."
미영은 차에 올라탔고 나는 돌아서서 내 차가 있는 곳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떠날 것 같던 미영의 차가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창을 열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담배가 반쯤 줄어드는 동안 미영의 하얀 차는 미동조차 없었다. 전화통화 중인가, 설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서 살펴봐야 하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차 안에 앉아 남은 담배를 피웠다. 그러나 미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 퍼뜩, 어쩌면 내가 먼저 가길 기다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영이 먼저 출발하면 내가 뒤를 쫓을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소설처럼, 내가 그녀의 집까지 따라가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상상에 사로잡혀 핸들을 움켜쥔 채 내가 앞서 가길 기다리는 건 아닐까. 나는 거의 필터만 남은 담배를 밖으로 내던졌다.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려는데 미영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빠른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시동을 끄고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영이 지나간 도로를 따라서 달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만 미영은 이미 내게 답을 말한 셈이었으니 더 이상 그녀를 쫓아다니는 건 무의미했다.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사흘 낮과 밤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이것을 썼다. 쓰는 동안 나는 즐거웠다. 나의 텍스트 안에서 허구와 사실은 다르지 않았고, 그것들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서로 이어지고 서로 쳐다보며 서로를 반영했다. 글이 이어질수록 멀어진 건 미영과 나뿐이었다. 그녀는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혹시 자신의 작품들을 표절했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완전히 짜깁기 수준이라고, 제목마저 똑같으니 너무 파렴치한 만행 아니냐고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제목은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더구나 그녀 또한 나의 소중한 추억들을 아무런 동의 없이 가져다 썼으니 그렇게 기록된 것들을 내가 똑같이 쓴다고 해서 무조건 나의 잘못만 지적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어떠한 반응이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작정이다. 나의 소설이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려서 그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그로 인해 하나의 세계가 바뀌는 셈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은하』를 둘러싼 모든 가정과 추론과 소문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우리가 마침내 진실을 공유하게 된다면, 나는 다시 한 번 소설이라는 마법을 믿고 의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1) 천신만고 끝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문학동네) 139쪽에서 이 문장을 찾아냈을 때, 내가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당신이 알 수 있을까?















작가소개 / 명학수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폴이라 불리는 명준」이 당선되어 등단.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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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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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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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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