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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경로

  • 작성일 2020-11-01
  • 조회수 2,455

[단편소설]



태풍의 경로



김선재




누구일까.
우편물을 든 채 조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온 것이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건 발신인인 라라라는 이름 때문이다. 아직 해가 길게 남아 있는 저녁의 현관은 적막하다. 드는 사람도 나는 사람도 없는 다세대 주택의 입구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매미 울음뿐이다. 담벼락을 감은 잎사귀들이 불그스름하게 타들어가는 여름. 조는 그 깊고 환한 적막의 한가운데서 혀끝으로 라라라는 이름을 굴리고 있는 거다. 라라라……. 매일 여러 이름과 상호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래서 여러 이름들 - 도도나 는는, 시시, 미미와 같은 - 을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라라라는 이름은 없다. 물론 두툼하고 큼직한 우편물의 겉면에 적은 손글씨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조의 주변에는 손수 주소를 적어 우편물을 보낼 사람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받는 우편물이라고는 돈을 내야 할 날짜가 다가온다거나 돈을 어서 내라거나 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겠다는 용건이 대부분인 것들이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보낸 우편물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쪽이 더 자연스러운 시절이다. 그러나 업무 처리 과정에서 생긴 분쟁으로 언젠가 혈서를 받은 기억이 있는 조로서는 이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직장이 아닌 집으로 온 이 낯선 우편물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최근 조의 삶이 지나치게 단순해졌기 때문일 거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는 마침내 봉투를 개봉한다. 조심스럽게 봉투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는 조의 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잠시라도 이곳의 일을 잊어버릴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이 무엇이든 조에게는 지금 그것이 필요하다.


어떤 오후의 시始.
봉투에서 나온 책의 제목은 그랬다. 조는 잠시 은박을 입힌 그 글자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제목에 쓰인 단어 중 내용을 유추할 단어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 비해 ‘민간위탁의 문제점과 방안’이나 ‘녹지와 온실가스’ 같은 것들은 얼마나 명쾌하고 간결한가. 최근 자신이 접한 책들의 제목을 떠올리며 조는 후루룩 책을 넘긴다. 한 면에는 사진이, 다른 한 면에는 활자가 인쇄된 페이지들에서 시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오래 잊고 지냈지만 그건 조가 익히 아는 냄새였다. 한때 그런 냄새에 익숙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별로 인상적이랄 것은 없는 시절이었다. 책을 주고, 책을 받던 시절. 누구에게나 한 번은 있을 법한 어떤 시절의 어린 연인들은 이제 생사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냄새가 끌고 온 기억은 깊고 어두운 구석에서 굴러 나온 먼지 덩어리가 그런 것처럼 여전히 한데 엉킨 채 다시 다른 구석으로 굴러간다. 그것들을 파헤쳐 시간과 얼굴과 목소리 들을 낱낱이 떠올려 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에 잠깐 옛날의 다락방을 떠올릴 뿐이다. 낡고 낮고 작은 곳. 그런 다락방이 있는 집에 산 적이 있었다. 그곳은 전 주인이 버리고 간 잡동사니들이 계단부터 촘촘하게 쌓여 있던 곳이었다. 그 다락으로 오를 때도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그때의 일이 지금인 것처럼 자욱하게 머릿속을 떠돈다. 안방의 벽장 안에서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나무 계단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조는 아직도 기억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하던 공동 출입문 바닥으로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조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쉰다. 뜨끈한 숨이 그의 볼 주위를 어른거리다 흐려진다. 회사와 현장과 집을 줄긋듯 오가는 나날이다. 조는 쥐고 있던 몇 개의 고지서와 책을 봉투와 함께 가방에 쑤셔 넣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달라붙는 뜨끈한 온도가 그의 숨을 막는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오후 내내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탓이다. 몇 번이나 세수를 했지만 몸에 앉은 소금기와 땀 냄새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땀 냄새를 의식한 조는 씻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퇴근을 했어도 여전히 쉴 여유는 없다. 유고 씨 때문이다.


최근 조는 현관문 앞에서 자주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과 이제 없는 것에 대해. 혹은 문을 여는 순서 같은 것에 대해.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현관문의 숫자판이 발광發光하면 그 판에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문을 여는 순서랄 것도 없는 순서는 그게 다다. 유고 씨는 그 순서를 외우지 못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아니, 유고 씨는 한사코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계단에서 미끄러진 경험으로 유고 씨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비단 계단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동차나 자전거는 물론이고 방화문이나 문턱, 또는 난간 앞에서도 벌벌 떨기 일쑤였다. 유고 씨는 언제나 토끼처럼 웅크린 채 안에 머문다. 현관문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조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다. 조는 문틈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유고 씨가 즐겨 보는 프로를 진행하는 남자의 목소리일 거다. 유고 씨는 하루 종일 TV와 대화하고 TV에 대고 화를 내고 TV 앞에서 운다. 언제나 당신 곁에 있습니다. 지금 전화 주세요. TV 속 남자가 유고 씨에게 그렇게 말하면 유고 씨도 따라 말한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 지금 전화 주세요.
조는 문을 연다. 뜨끈하고 비리고 시큼한 냄새가 달려든다. 유고 씨는 조가 집을 나설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끈적끈적한 햇빛이 길게 드리운 실내는 고인 물처럼 완강하고 잠잠하다. 한 손에는 TV 리모컨을,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쥔 채 졸고 있는 유고 씨와 TV 소리가 점령한 실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겨드랑이에서 울컥 땀이 솟는 걸 느낀다. 올 봄에 구입한 에어컨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처서가 지났다. 에어컨 바람을 질색하는 유고 씨 탓이다. 그의 벌어진 입가에서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제발, 좀. 목적어도 주어도 없는 제발과 좀. 그 사이에서 유고 씨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천천히 거실로 들어서는 조를 본다.
왜 이렇게 늦었어.
흘러내린 침을 닦을 생각이 없는 유고 씨가 그렇게 말한다. 틀니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그의 말은 조금 느려졌고 발음 또한 불분명해졌다. 모음들의 경계가 흐려지고 받침들이 천천히 지워지는 시간. 언젠가 조는 그게 노년의 시간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유고 씨가 조의 집에 온 건 사 주 전이었다. 그가 머물던 요양원이 장마로 인해 산사태 피해를 본 직후였다. 죽을 뻔했다. 유고 씨는 조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밤중에 자신이 목도한 날벼락과 그로 인해 겪는 고통을 호소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조가 생각하기에 그건 다소 과장된 반응이었다. 필로티 공법으로 지은 별관 건물의 지상 주차장과 2층에 위치한 식당 전체가 흙더미에 파묻힐 만큼 큰 사고임에는 분명했지만 정작 유고 씨가 머물던 본관 건물은 티끌만큼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걸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까지 했던 조로서는 유고 씨가 왜 그렇게 과장된 반응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걸핏하면 네가 뭘 아냐고 화를 내기 일쑤인 유고 씨의 억지를 교정할 힘과 의지가 조에게는 없다. 그저 유고 씨를 달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챙기거나 식전 사과와 식후 토마토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할 뿐이다.


한 달이야. 한 달이면 충분해.
유고 씨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한 날 조는 윤정과의 통화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해?
윤정은 그렇게 물었다. 조가 생각하기에 윤정이 할 일은 없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한 달은 금방이니까…… 한 달만 기다려 줘. 그러면 돼, 자기야.
윤정과 조가 만난 이래, 그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 밥을 먹고 도심을 산책했고 영화나 공연을 관람한 후에는 서로의 집에서 와인을 마시곤 했다. 그게 언제부터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는지는 따져 보지 않았다. 다만 윤정이 차린 아침을 먹는 일이나 윤정을 위해 상급의 원두를 준비하는 일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유고 씨가 조의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런 자연스러운 일상을 지속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사실이 그를 우울하게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젊은것들이 참아야지.
윤정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이해나 공감에서 비롯된다는 걸 조는 알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명하고 사려 깊은 사람. 누군가 윤정을 한 마디로 소개하길 청한다면 조는 기꺼이 그렇게 대답할 거였다. 유고 씨의 일방적인 결정을 별말 없이 받아들인 것도 그런 윤정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당신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야.
조는 가끔 윤정에게 그렇게 고백했다. 그게 조의 술버릇이었다. 물론 진심이 반복되면 버릇이 된다는 걸 알 나이였으므로 그런 말을 하는 건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이었다. 그런 성숙한 사랑이 주는 안정과 평화가 가끔 기적처럼 여겨지는 게 비단 자신만은 아닐 거라고 조는 자주 생각했다. 지금은 그 평화와 안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간 조는 아무렇게나 옷을 갈아입고 바쁘게 주방으로 향한다. 유고 씨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걸 알지만 아는 척을 할 생각이 없다. 고백하자면, 언젠가부터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사고로 요양원에 딸린 부속시설 한 동과 식당이 폐쇄됐을 뿐, 요양원이 아예 문을 닫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고 씨는 한사코 퇴소를 고집하며 보호자로 등록된 조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끼니 때문이었다. 복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임시로 근처 식당에서 배달식을 제공하기로 한 요양원의 방침을 수용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런 걸 먹다간 곧 죽고 말 거다.
유고 씨는 평소와는 달리 또박또박 그렇게 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 심지어 새벽에도 - 전화를 걸어와 절박한 목소리로 반복하는 유고 씨의 ‘그런 것’이 어떤 것인지 조는 알 수 없었다. 모른 채로 묵묵히 들었다. 평생 세 끼를 정해진 시간에 대령하다 부엌에서 쓰러진 채 삶을 마감한 엄마를 떠올리며 잠깐 명치가 뜨거워지기는 했지만 그걸 유고 씨에게 상기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다. 유고 씨와 조는 묻고 대답하는, 그런 일반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 살았다. 이제 와서 그게 바뀔 리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한 달 동안 군말 없이 정해진 시간에 삼식三食을 대령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조와 윤정은 꽤 오랜 상의 끝에 휴가지에서 자신들이 머물 숙소를 결정하는 것으로 통화를 끝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ㅋㅋ ♥.
매일 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며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표현하거나 확인했다. 하트나 ㅋㅋ 따위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이라도 해야 했다. 통화와 메시지를 번갈아 나누며 휴가지에 챙겨갈 준비물들 - 와인이나 치즈, 오리발, 릴랙스 체어 따위 - 의 리스트를 교환하다가 잠드는 날도 있었다. 한 달 후 어느 한적한 해변에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조는 그곳에서 윤정에게 청혼을 할 생각이다. 그날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이 최근 조의 유일한 낙이다.


부엌으로 들어서는 조는 문득 윤정과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게 어제였는지 그제였는지를 따져 본다. 오전에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아직 아무 반응이 없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윤정은 서너 달에 한 번씩 잡지 발행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기간에는 통화는커녕 메시지도 몰아서 확인하는 윤정의 업무 환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내 볼까 생각하며 식탁을 바라본 조는 욕지기가 치민다. 먹다 남은 반찬과 뭉개진 밥풀이며 씹다 뱉어 놓은 채소 줄기는 물론이고 콩나물국이 담겼던 국그릇까지 뒤집힌 채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다. 세 살짜리 어린애가 앉았던 자리도 이보다는 나을 텐데. 조는 표정을 지운 채 그것들을 음식물쓰레기 봉지에 쓸어 담고 물과 국물이 흥건한 식탁을 닦아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얼굴과 목덜미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초파리들을 신경 쓰지 않게 된 지도 이미 여러 날이다. 이제 상온에 노출된 음식들이 상하는 일이나 그 상한 것들에서 초파리가 생기는 걸 막을 길이 없다는 걸 안다. 어떤 말로도 바뀌지 않는 일들이 있다. 유고 씨는 평생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치우거나 정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악의는 없단다. 생전의 엄마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조는 그 악의 없음이 결국 엄마를 죽게 했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낸 적은 없다. 평화는 깨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저녁은 일곱 시에 먹는다.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며 유고 씨가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하루에 두 번, 좁은 거실을 몇 바퀴 왕복하는 그것을 유고 씨는 운동이라고 했다. 두꺼운 트레이닝복에 털실 슬리퍼를 챙겨 신은 유고 씨가 좁은 거실을 더듬더듬 오간다. 조는 마음이 급해진다. 새처럼 줄어든 몸집을 가진 유고 씨의 식성을 만족시키는 게 날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아니, 조는 자신과 무관한 일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지난 39년 동안 유고 씨의 식성을 살피는 건 조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린 새가 붉은 주둥이로 요란하게 어미 새를 부르는 것처럼 유고 씨는 조가 조금만 늦으면 어김없이 전화를 해대고 식성에 맞지 않는 반찬을 내밀면 타박을 하기 일쑤다. 결혼한 지 4년, 맞는 게 진짜 하나도 없어요. TV 속에서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의 등 뒤를 서성이던 유고 씨가 그 말을 따라 한다. 진짜 하나도 없어요. 조도 아는 광고다. 남녀가 서로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자신들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끝나는 그 광고를 보며 윤정과 킬킬거리던 시절이 꿈처럼 아득하다.
근데, 왜 연어를 안 굽냐. 왜 한 번도 안 줘.
문득 생각났다는 듯 등 뒤의 유고 씨가 조에게 그렇게 묻는다. 이 집에 온 첫날부터 유고 씨는 계란프라이와 연어를 찾았다. 아침저녁으로 그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 놓고 또 다음날이면 전날 자신이 했던 말이나 먹었던 걸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유고 씨의 최근 형편이어서 조는 매번 그가 뱉는 그 단어들을 처음인 것처럼 들어야 한다. 왜 안 굽냐. 왜 안 주냐. 왜. 왜. 왜. 조는 유고 씨를 향해 돌아서며 한숨처럼 대답한다.
안 주긴 누가 안 줘요. 지금 굽고 있잖아요. 보세요, 이리 와서 보시라고요.
유고 씨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조를 바라본다. 창백하고 얇은 피부에 뚫린 그 입은 캄캄해서 안이 보이지 않는다. 씹고 흘리고 내뱉고 또 씹어 모조리 삼켜버리는 입. 조는 그 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시간을 떠올리며 잠깐 몸을 떤다.
내 말은…… 노인은 단백질을 잘 섭취해야 한다는 말인 거야.
기세가 꺾인 유고 씨가 타이르듯 또박또박 그렇게 말한다. 오래 사는 것. 조가 보기에 지금 그에게 삶의 목표는 그거였다. 평생 유고 씨의 그 목표를 위해 살았던 엄마가 죽고 난 이후에는 일곱 살 터울의 누나가 그걸 대신하다가 집을 나갔고 이제는 그걸 한시적으로나마 조가 하고 있다. 결국 모든 문제가 밥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연어가 익길 기다리며 조는 생각한다. 압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한다. 거실을 점령한 TV에서 7시 뉴스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온몸의 구멍이 한꺼번에 열린 것처럼 땀이 끝없이 흘러내린다. 아무렇게나 얼굴을 쓸어내리며 조는 정말 더럽게 더운 날이라고 중얼거린다.


*


아홉 시가 다 될 무렵에야 방으로 돌아온 조는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대리운전 광고 메시지가 두 개. 식품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이커머스 회사에서 온 할인 쿠폰 메시지가 하나. 택배 배송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하나. 조에게 온 메시지는 그게 다다. 조는 미간을 찡그리며 윤정과 나눈 메시지 창을 연다. 약 12시간 전에 자신이 굿모닝이라는 문자와 함께 보낸 커피 쿠폰이 메시지 창의 맨 마지막에 떠 있다. 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가 아는 윤정은 상대의 성의에 어떤 식으로든 답할 줄 아는 사람이다. 3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윤정의 행동이 결코 가식이나 의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분명 연락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맞을 거다. 퇴근 후 갑작스레 쏟아진 피로에 못 이겨 까무룩 잠이 들었거나 한 것과 할 것을 혼동할 만큼 바쁜 상황에 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게 내륙을 관통하는 어느 고속도로에서 난 8중 추돌 사고 뉴스에 솔깃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일 거다. 그걸 알면서도 불안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벌써 4주째 윤정과 만나지 못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탓이다. 이 모든 게 밥 때문이라니. 조는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자신의 이런 속내를 털어놓으면 윤정은 아마 큭큭거리며 웃을까. 아니, 어쩌면 맥락 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윤정의 목소리가 간절해진 조는 전화를 걸지만 윤정은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조는 침울하게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최근 들어 종종 짜증과 우울이 반복되는 걸 느낀다. 오늘만 해도 단속을 나갔던 식당에서 시비가 붙을 뻔했다. 씨발, 정말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폐기물 무단투기를 적발한 조를 향해 식당 주인은 앞치마를 집어던지며 그렇게 내뱉었다. 구청의 청소행정과에 근무한 지난 6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건 정말 별일 아닌 상황이었다.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나 새우젓 따위가 아닌 게 어딘가. 평소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길 일이었다. 하지만 조는 울컥했다. 자신이 뭘 잘못해서 이런 모욕을 견뎌야 하는 건가 싶었다. 왜 나만. 왜 내가. 밑도 끝도 없는 그런 말들이 떠올라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발밑에 떨어진 더러운 앞치마를 똑같이 주인의 면상에 내던지고 싶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는 윤정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 멍하니 앉아 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고 그다음 날도 오늘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시간. 과연 한 달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까. 언젠가부터 그런 불안과 의심이 조를 흔든다. 이것은 마술인가, 예술인가. 문틈으로 새어드는 목소리가 그렇게 묻는다. ……상술이지. 반사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조는 미간을 찌푸린다. TV와 대화를 하다니. 이런 멍청한 반응을 하는 건 전적으로 유고 씨 탓이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TV 리모컨을 손에서 놓지 않고 TV와 대화하는 유고 씨 덕분에 생활도, 정신도 엉망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거라도 있어서 내가 이 감옥을 견디는 거다.
누구도 가둔 적은 없지만 갇혔다고 주장하는 유고 씨는 그렇게 말했다. TV를 방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는 조의 의견에도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다고 했다. 이 집에서 가장 큰 방을 내어주고도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더 편안하게 해주세요. 가족이니까. 1분 남짓의 광고들이 쏟아내는 말들의 꼬리를 유고 씨는 놓치지 않고, 끝없이 되풀이한다.
……더 편안하게 해주세요. 더, 더.
조는 문 밖의 유고 씨에게 묻는다.
도대체 뭘 더요. ……뭘 더 해요.


가방 속의 우편물들과 책을 기억해 낸 건 그즈음이었다. 끼니나 일, 의무와 부양, 그리고 윤정과도 상관없는 게 분명한 어떤 일, 이 가방 속에 들어 있다는 걸 떠올린 거다. 조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주워 올려 책을 꺼낸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아 넘긴 표지의 사진 속 여자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서 있다. 조는 표지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표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면 라라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여자의 표정은 읽기가 어렵다. 반면에 또렷하지는 않으나 여자의 시선이 자신이 손에 든 뭔가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조는 독서등 불빛 가까이로 책을 가져간다. 흰 새인가. 아니, 새치고는 지나치게 동그란 모양이다. 그렇다면 동그랗고 투명하고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은 무엇일까. 조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 기준에 맞는 단어들을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거울이나 화장품, 구슬이나 안경 따위 들. 유고 씨의 긴 하품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온다. 돋보기…… 아닐까. 유고 씨가 들고 온 소지품 중 돋보기가 세 개나 들어 있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지었던 게 떠오른다. 조는 침을 삼키며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렇게 보기로 작정하고 다시 보니 그건 돋보기가 분명해 보인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는 여자와 어떤 오후의 始. 물론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표지의 그게 그거라는 걸 알아본 사람조차 많지 않을 거다. 조는 다소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속지에 적힌 글씨를 발견한다.


어떤 時를 보냅니다.
라라.


몇 번을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시始는 뭐고 시時는 뭔가. 도대체 자신에게 이런 정성까지 더해 책을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고개를 들어 올린 조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빈 벽을 멍하니 응시한다. 아무리 치워도 끝없이 어수선한 식탁처럼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말과 감정 들이 빈 벽에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始와 時나 처음과 끝, 작고 낮은 다락방을 떠다니던 먼지와 그 사이로 떨어지던 햇빛들, 냄새들. 그 작은 방에서 조는 주로 마당에서 주워온 돌멩이를 옆집 지붕이나 골목으로 던지며 놀았고 그마저도 싫증이 나면 앞집의 창들을 훔쳐보며 시간을 보냈다. 단지 따분해서 시작한 그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안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으나 그건 누구라도 호기심을 느낄 법한 일이었으므로 반성이나 후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해장국 속에 숨어 있던 몇 개의 선지 덩어리처럼 자신이 끝내 삼키지 못하고 만, 사소한 과오 중 일부일 뿐이었다. 그런 것들은 많았다. 무게도 없이 몸집만 남아 구석에서 구석으로 처박히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불쑥 굴러 나오는 것들. 한밤에서 새벽으로 이어지던 시간들. 얼굴들. 조는 의자의 등받이를 젖혀 비스듬히 앉으며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무모하고 자유로웠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목표나 꿈 없이 사는 것도 그렇지만 남이 설계한 대로 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국가고시에 세 번째로 떨어지고 나서였다. 더 이상 유고 씨의 계획대로 살 수는 없었다.
그건 제 꿈이 아니에요.
덜떨어진 놈이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유고 씨에게 조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없어서 집 밖을 떠돌았다. 철수와 영희, 혹은 미미와 찰스. 그 이름과 어울리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그들은 엉망으로 취할 때마다 황혼녘에 날아간다는 부엉이에 대해 몇 시간이고 지껄이다가 곁에 앉은 사람의 귓바퀴를 만지는 술버릇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빈 기타 케이스를 어디든 메고 다니며 싸구려 데킬라를 마시거나 서로의 손등을 핥아대던, 유쾌하고 끔찍하게 분방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물론 한밤에 만나 아침에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그들 중 지금까지 안부를 나누며 지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무리 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던 낯선 얼굴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어쩌면 라라는 이름과 얼굴과 자유와 방종이 뒤섞이던 그 나날의 어디쯤에서 만난 사람일 거다. 조는 점점 그런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그 사이로 내일 날씨를 전하는 기상캐스터의 예보가 끼어들고 유고 씨가 혀를 차는 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남쪽의 먼바다에서 태풍이 발달하고 있다고 한다. 올 농사는 망했다고 한숨처럼 털어놓는 유고 씨의 말소리가 들린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로 TV 앞에 앉아서 따뜻하게 데운 토마토나 사과를 먹으며 홍수가 나면 농사를 걱정하고 지지 정당을 대변하는 일에도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 교통사고 소식을 접할 때는 자신의 일처럼 황망해하기를 반복하는 유고 씨를 대하는 일이 점점 불편해진다. 남태평양에서 발달한 태풍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며 아직 그 진로는 유동적이라는 기상캐스터의 설명을 멍하니 듣고 있던 조는 문득 어제도 저 태풍의 예고를 들었으며 그제도 남태평양의 먼바다에서 발달하는 구름 영상을 해설하던 똑같은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분명 그 전날과, 전날의 전날에도 TV 속 기상캐스터는 똑같은 대기 영상으로 같은 예보를 했고 그를 시청하던 유고 씨의 반응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조는 생각한다. 뉴스 따위를 재방송할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비가 잦은 여름이라고는 해도 내일의 날씨가 어제, 혹은 그제의 예보와 똑같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저건 아무래도 방송 사고가 분명하다.
여전히 책을 든 채로 조는 주변을 둘러본다. 시야가 흐릿해 보이는 건, 몸과 마음에 누적되는 피로 때문일 거다. 퇴근 후는 물론이고 주말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게다가 더위는 아직 가실 기미가 없고 잠자리까지 편치 않은 상황이고 보니 전에 없이 식욕부진에 시달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일 점심에는 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사 먹어야 하나. 눈을 비비며 조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야.
벌컥 문을 연 유고 씨가 문 밖에 선 채로 조를 부른다.
자냐.
조는 앉은 채로 유고 씨가 선 쪽을 돌아본다. 야. 그게 유고 씨가 주변 사람들을 부르는 일관된 호칭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럴 거면 왜 이름을 지었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조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이유다.
내가 아무래도 샌 거 같아.
조는 유고 씨를 바라본다. 얇은 살가죽이 덮인 그의 얼굴이 해골처럼 창백하다.
왜요.
좀 봐달라고.
…….
뭐가 샜다는 말일까. 뭐가…… 샐 수 있을까. 조는 생각한다. 물이 새고 바람이 새고…… 말이 새고……. 또, 또 뭐가 샐 수 있을까. 그 와중에도 유고 씨는 다그치기를 멈추지 않는다.
안 들리냐?
뭐가요, 뭐가 새는데요.
조는 묻는다.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멍하니 조를 바라보던 유고 씨가 대답한다.
대변이 샌 거 같다고.


*


근육이 느슨해지고 시야가 허술해지는 게 노화에 동반되는 현상 중 일부라는 걸 안다. 유고 씨가 걸핏하면 침이나 음식을 흘리고 용변의 뒤처리에 깔끔하지 못한 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 그런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조는 지린내가 진동하는 변기를 청소하거나 흘린 음식들로 어지러운 식탁을 치울 때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전과 후로 나뉘는 일들이 있어. ……결코 그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야.
며칠 전, 조가 자신의 피로감을 털어놓던 한밤에 윤정은 그렇게 말했다. 조가 듣기에 그 말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사유들이 결국 사려 깊고 성숙한 내면을 만든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말…… 사랑해, 자기야.
취하지 않았지만 취한 기분이었다. 이런 성숙한 사랑이 주는 안정과 평화가 기적인 것처럼 여겨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유고 씨가 벗어 놓은 속옷과 양말, 두툼한 트레이닝복을 뭉쳐 쓰레기통에 넣으며 조는 땀을 흘린다. 경험으로 치부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다. 조련을 당한다는 느낌까지 들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유고 씨와는 평생 제대로 된 대화는커녕 마주 앉아 식사조차 한 기억이 없다. 아니, 조는 유고 씨와 어떤 기억도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무나 책임을 강요당하는 건 어딘가 부당했다.
춥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서 있는 유고 씨가 말한다. 조는 욕실 안을 떠도는 구린내와 묵은 암모니아 냄새에 점점 속이 불편해지는 걸 느끼며 샤워기를 집어 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수습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건 분명한 상황이다. 물의 온도를 거듭 확인한 다음 낡은 목각인형처럼 선 유고 씨의 등 쪽에 샤워기를 갖다 댄다. 평평한 엉덩이 골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들이 가느다란 유고 씨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본다. 유고 씨나 조나 채 닦아내지 못한 배설물들이 욕조 바닥에 어수선하게 고이는 걸 볼 뿐, 별말이 없다. 샤워기를 유고 씨의 손에 쥐여 준 조는 비누 거품을 낸 타월로 그의 엉덩이와 늙은 고환 밑을 닦아내며 숨을 참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조는 유고 씨의 몸을 헹구며 참는 일과 참을 수 없는 일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다. 유고 씨가 조를 향해 입을 연 건 그즈음이었다.
널 낳길 정말 잘했지 뭐냐.
조는 미리 준비한 수건이나 우산, 장갑 따위가 된 기분으로 유고 씨를 본다. 탁한 눈동자는 어디 먼 곳을 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초점이 없고 입매는 점점 느슨해진다. 한번 늘어나면 다시는 오므라들지 않을 것처럼. 그건 조가 자주 꾸는 악몽 중 하나였다. 최근까지도 조를 괴롭히던 그 꿈은 손을 넣으면 손이 사라지고 어깨와, 머리와…… 온몸이 사라지는 꿈이었다. 비명을 지를 입이 없어 시체처럼 누워 우는 조를 달래 준 건 윤정이었다. 조는 늘어진 고무줄처럼 탄력이 사라진 유고 씨의 허벅지를 닦으며 그 순간의 감각들을 떠올린다. 몸에 감기는 뭉클함과 부드러움, 혹은 곡선으로 이루어진 밤의 평화와 정적 같은 것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고 이따금 숲이 바람에 몸을 비비는 소리들이 지나갔다. 조가 느끼기에 완벽한 생의 감각은 그런 거였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
조는 윤정의 품에서 다시 잠에 빠지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가여워라.
윤정은 그렇게 대답했다. 꿈에서 들은 말인지도 몰랐다.


방으로 돌아온 조는 다시 메시지를 확인한다. 이제 일주일만 견디면 된다고 보낸 자신의 메시지를 윤정은 아직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다. 잠이 든 거겠지. 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며칠 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유고 씨가 돌아갈 요양원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다. 재입소에 따른 여러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지금 이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정말이지 조는 이제 단 하루도 꾸물거리지 않을 작정이다. 지금 조에게 필요한 건 오직 생의 실감과 안정된 시간이고 그 시간들은 윤정을 통해 완벽해질 거였다. 그게 지난 4주 동안 조가 확신하게 된 사실이다.


창밖의 먼 곳에서 하늘이 낮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 불안정한 대기 탓이다.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조는 눈앞에 놓인 책을 들고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다.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김선재
작가소개 / 김선재

2006년 《실천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 2007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부문 등단.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어디에도 어디서도』,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 시집 『얼룩의 탄생』, 『목성에서의 하루』가 있음.


《문장웹진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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