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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팅

  • 작성일 2021-08-01
  • 조회수 1,928

[단편소설]



피팅



박규숙




회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소희 지프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팀장까지는 회사에서 주차 자리를 내주었다. 일반사원은 주차비를 본인이 부담했다. 소희 월급으로 한 달 주차비까지 감당하기는 버거울 것이다. 아니 지프를 끌고 다닌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흰색 지프는 깔끔한 건물이 늘어선 논현역 사거리와 잘 어울렸다. 나도 모르게 코트에 배어 있을 냄새를 맡았다. 때마침 불어온 눈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려 할퀴듯 눈을 때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디자인실에 들어서자 하나실장이 불렀다.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실장님 자리로 다가갔다.
“오늘 입어야 할 옷들이 산더미인 거 알지? 지연 씨 혼자 모두 입어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시작하자.”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아직도 피팅 모델을 해야 하지? 소희는 아직 안 올라왔다. 주차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소희 자리를 흘겨봤다. 나는 가방을 던지듯 의자에 두고 실장님 행거를 찾았다. 행거에는 전날 픽스해 놓은 옷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내일 있을 SS 시즌 품평회에서 입을 옷들이었다.
“행거 가지고 따라와.”
부자재를 가득 안은 하나실장이 피팅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외투를 의자에 걸쳐 둔 채 행거를 밀고 피팅실로 갔다. 막 도착한 소희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
행거에 걸려 있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꺼내 갈아입었다. 바느질이 되어 있는 곳보다 시침핀으로 꽂아 놓은 부분이 훨씬 많았다. 샘플 작업 중인 옷이라 대부분 시침핀으로 핏을 잡아 놓았다. 겨드랑이에 꽂아 놓은 실크핀이 슬쩍슬쩍 살갗을 건드렸다. 하나실장이 블라우스를 매만지며 핀을 뽑았다가 다시 꽂고 옷감을 당겼다가 자르기도 했다. 블라우스 옆선 핏을 수정하다 핀으로 살을 집었다. 핀에 집혔던 통증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손목을 찔렀다. 나는 살아 있는 마네킹처럼 이용되는 피팅 모델 역할에 충실했다. 아파도 참았다. 실크핀은 섬세한 옷감에 쓰였고 시침핀 중에서 가장 가늘었다. 조금 더 굵은 진주핀은 묵직한 통증이지만 실크핀에 찔리면 소스라치게 아팠다. 하나실장은 핏을 수정하느라 옷을 찌르는지 내 몸을 찌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몸을 꼿꼿하게 좀 세워 봐.”
고개를 숙인 채 스커트 단 핏을 잡고 있던 하나실장이 벌게진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핀을 피하느라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있었던 몸을 쭉 폈다. 15센티 하이힐을 신고 퍼프소매 블라우스와 플리츠스커트를 입은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타이트한 몸 선, 풍성한 소매라인 블라우스는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했다. 펑키하면서도 디테일한 블라우스와 화려한 스커트는 우아하고 여성스러웠다.
플리츠스커트에 굵은 체인벨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실장은 포기하지 못하고 소희에게 들고 있게 했다. 곧 스커트 위에 스타일벨트를 걸쳤다 풀었다 할 것이다. 하나실장이 옷 벗자, 할 때까지 겨드랑이를 찌르는 핀을 나는 견뎌내야 한다. 소희는 린넨 소재 가방과 스타일벨트를 들고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눈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손가락에 세 개씩 반지를 끼고 귀에도 두 개의 반지 모양 이어링을 했다. 핀으로 찌르는 아픔을 모르고 편안하게 서 있는 소희를 나는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도 눈이 내렸었다. 오래되고 낡은 대문은 열 때마다 소리가 크게 났다. 요령껏 열어야 소리가 작은데 힘 조절을 잘 못해 너무 쉽게 열려버렸다. 문 열리는 소리는 더 크게 났고 나는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려는 순간 다행히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대문을 나섰는데 얇은 눈이 가파른 내리막길에 내려앉아 있어 한숨부터 나왔다. 아직 누구의 발자국도 없었다. 미끄러지기 딱 좋은 상태였지만 넘어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다. 벽에 손을 짚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담장 위에 박힌 유리 조각에도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담장은 내 머리 높이를 넘지 않았다. 눈에 섞인 유리 조각은 보석인 듯 맑았다. 손바닥으로 담장 위 눈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걸음을 멈추면 상처 따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할 것 같아 서둘러 내려갔다. 눈이 더 쌓인다면 퇴근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소희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눈 오는 창밖을 보고 있을까.
디자인실 막내로 입사했고 피팅 모델과 디자이너들 심부름을 하면서 수습 기간을 보냈다. 후임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1년 만에 소희가 들어왔다. 소희는 심부름은 지나치게 잘했지만 키가 작았다. 작은 키는 디자이너로서 결격 사유 같은 거였다. 디자인 샘플 옷은 직접 입어 봐야 문제점도 알게 되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시즌마다 디자인한 옷들이 나오면 막내는 피팅 작업을 했다. 그래서 키가 작은 디자이너는 잘 뽑지 않는데 갑자기 들어왔고, 모델을 할 수 없는 소희를 대신해 나는 여전히 피팅을 하고 있다.
밟으면 꿈틀할 겨를도 없이 으깨져 버릴 하찮은 작은 벌레 같았다. 그런 소희가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맑은 표정이라니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심해 보이는 사람은 아침 출근길에 부딪히는 지하철 안에도 가득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게 서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옷에 붙어 온종일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 틈에 섞여 출근하는 게 싫었다.
오늘 아침에도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래 묵은 옷 냄새며 아침에 먹었을 음식 냄새가 흘러넘쳤다. 밖에서 차갑고 세찬 바람을 맞았을 텐데 날아가지 않고 냄새는 옷에 짙게 배어 있었다. 사람들에 밀려 나는 비좁게 포개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앞에 있는 여자 머리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며칠째 머리를 감지 않았을 여자의 얼굴이 궁금했으나 몸을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이 많은 남자의 목이 코앞에 닿았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숨을 참았다.
한 시간을 이리저리 밀리며 버텨냈다. 지하철에서 떠밀리듯 내렸다. 사람들이 얼른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나는 천천히 걸었다. 냄새에서 벗어났지만 매캐한 먼지가 날렸다. 디자인실까지 냄새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디자이너 중 막내인 소희까지 자기 차로 출퇴근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집에서 나올 때 뿌렸을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긴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릴 때마다 연한 샴푸 냄새까지 흘러넘쳤다. 한 시간 넘게 지하철에서 시달린 내게서는 그들과 다른 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오래 걸어 회사에 들어가곤 했다.
블라우스를 벗을 때, 튀어나온 핀이 팔을 긁었다. 피가 배어 나오진 않았으나 찰과흔이 긴 줄처럼 이어졌다. 피가 배어 나와도 실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핀으로 잡아 놓은 핏이 흐트러질까 다른 것은 살필 겨를이 없다. 내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아니 비명을 지르더라도 잠깐 돌아볼 뿐 미안한 표정조차 짓지 않을 것이다. 소희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까.
허물을 벗은 듯 내가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옷을 소희가 정리해 하나씩 행거에 걸었다. 옷에서 삐져나온 핀에 찔리는지 가끔 움찔거리기도 했다. 피팅 모델이 될 수 없으니 피팅 모델 조수 노릇은 열심히 했다. 벗어 놓은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옷과 함께 걸쳤던 부자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소희에게 화가 날 때는 옷과 매치했던 패션 브로치나 목걸이를 입었던 옷 주머니에 넣거나 창고에 감췄다. 그것을 찾지 못하고 소희가 디자이너에게 혼나는 걸 보면 기분이 나아졌다.
소희는 디자이너들이 맡긴 핀쿠션에 핀을 빽빽이 채워 넣었다. 품평회 전날은 핀쿠션에 핀을 수백 개씩 꽂아 놓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진 핀은 옷을 입고 있는 나를 찔렀다. 옷을 입고 벗으며 핀에 찔리고 스치고 할퀴었다. 핀쿠션에 핀을 꽂는 소희를 볼 때마다 나를 찌르려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핀쿠션에서 뽑힌 핀들은 내가 입었던 옷에 꽂혀 있었다. 소희가 내 손등을 핀쿠션 삼아 한꺼번에 수백 개의 핀을 손등에 푹 꽂아버리는 상상을 했다. 내 손이 한 개의 핀쿠션이 되었다. 핏을 잡을 때 손등에 둥글게 꽂힌 핀을 하나씩 뽑아 쓰면 되겠어.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손등을 핀쿠션 삼아 쓰면 소희는 핀 꽂는 일에서 벗어나게 될까. 수백 개의 핀이 내 손등에 꽂혀 있었다면 그날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핀을 한꺼번에 뽑아 휘둘렀다면.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회사에서 늦게까지 드로잉 연습을 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지하철이 끊길 시각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은 지하철역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따라 15분쯤 걸어 올라갔다.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하게 자리한 산 아래 동네 골목 끝에 집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내렸었다. 작은 놀이터 옆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곧장 단단한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입이 틀어 막히고 치마가 걷어 올려졌다. 술에 절어 있는 내장에서나 흘러나올 듯한 무서운 악취가 맡아졌다. 무력하게 당하고 있던 순간 반지 생각이 났다. 반지만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몰래 반지를 빼내 모래 속에 감췄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가깝게 다가오자 바위처럼 누르던 무게가 갑자기 사라졌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미팅에서 만난 남자를 졸업 전까지 사귀었다. 그 남자가 사준 반지였지만 헤어지고도 반지를 빼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와 무관하게 반지는 내 손가락에 스며들어 있었다. 가끔 그가 생각나긴 했지만 아쉽지도 않았다. 실컷 사랑하고 삐걱대다 지겨워져서 헤어졌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모래 속에 묻어 둔 반지를 찾으러 갔다. 손전등을 들고 찾다가 환해질 때까지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언니와 엄마와 셋이 모래 속을 샅샅이 뒤졌다. 반지를 묻어 둔 곳 멀리까지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없었다. 무언가가 썩는 듯한 냄새의 흔적은 남았고 반지는 사라졌다.
하나실장 의상 피팅을 마치기도 전에 디자인실 헤드인 이사님이 행거를 끌고 피팅실로 들어왔다. 행거에는 옷이 대여섯 벌 걸려 있었다.
“이 옷은 내가 입을게.”
이사는 들고 있던 옷을 흔들며 말했다. 이사는 자신이 먼저 옷을 입고 그다음에 나에게 입혔다. 품평회가 아니라면 이사는 스스로 피팅 모델이 되었다. 이사는 자신이 디자인한 옷은 스스로 입어 봤을 때 가장 잘 알 수 있는데 왜 막내들에게 옷을 입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디자이너로 회사에 들어왔으면 디자인을 하게 해야지 막내들에게 심부름만 시키고 피팅 모델로 하루를 보내게 한다며 아쉬워했다. 회사와 개인에게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헤드이사처럼 생각하는 디자이너는 흔치 않았다.
핀이 꽂힌 자리를 손으로 잡고 춤인 듯 움직여 이사는 옷을 걸쳤다. 핀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고 메인 재봉선은 거의 바느질이 되어 있었다. 이사는 거울을 보며 핀을 빼고 다시 꼽으며 손질했다. 옷에 핀이 많지 않았고 핀이 꽂힌 부분도 바느질이 된 듯 자연스러웠다.
헤드이사는 미국에 있는 패션학교 출신이다. 키가 작다는 아쉬움은 있으나 비율과 핏이 좋았다. 소희는 키가 작았고 어깨는 넓었다. 넓은 어깨는 여성스러운 옷을 입을 때 밸런스가 맞지 않아 핏이 어그러졌다. 20센티 높이의 힐을 신어 키는 높여도 넓은 어깨는 어쩌지 못했다. 그에 비해 나는 좁지도 넓지도 않은 어깨, 말랐다는 느낌보다는 살이 없지 않은 정도의 몸, 165cm의 키, 옷에 가는 시선을 빼앗아 가지 않을 느낌의 단정한 얼굴까지. 피부 톤이 약간 어두웠으나 매력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디자이너들은 나를 피팅 모델로 최적이라고 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패션 도식화를 뽑아내는 드로잉 실력이었다.
“이거 한번 입어 봐 줄래?”
샘플 옷을 벗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은 이사가 나에게 말했다. 이번 SS 시즌에서 준비한 가장 핫한 디자인이었다. 파리 컬렉션에서 가장 많이 선보였던 스타일에 약간 변형을 줬고 자사 디자인 트렌드를 입힌 셋업 룩이었다. 3, 40대 여성을 겨냥한 백화점 브랜드 셋업 룩이라면 한 벌에 백만 원을 훌쩍 넘겼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고가 브랜드 옷을 입었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녔다. 시즌이 바뀔 때마다 액세서리도 사들였다. 관심 분야이다 보니 소비패턴이 그렇게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연봉 대부분을 명품 구매에 쏟아 부었다. 잦은 이직으로 경력을 쌓고 연봉을 높여 나갔다. 그들의 목적이 명품이었을까 궁금했다. 소희도 명품은 아니었으나 백화점 브랜드를 입고 다녔다.
언젠가 피자를 먹으려다 소희가 하나실장 블라우스에 음료를 쏟았다. 구찌 실크블라우스였다. 실장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몰아붙였다. 소희는 울면서 뛰쳐나갔다. 하나실장은 디자인실에 있던 샘플 옷으로 갈아입었고 소희는 실크 블라우스를 세탁소에 맡기러 갔다. 디자이너들이 피자를 먹고 가라고 달랬지만 그냥 나가버렸다.
이사님 옷을 입을 때는 핀에 찔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핀을 꽂는 요령이 있는지 옷을 입고 벗을 때도 긁히거나 찔린 적이 거의 없었다. 등에서 핀을 옮겨 꽂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느긋했다. 오히려 한 번쯤 찔려도 괜찮은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수입 원단의 질감이 섬세했다. 이런 옷을 입고 출근하게 되는 날이 있을까. 거울에 비친 나는 시크하고 세련된 직장 여성처럼 보였다. 핀으로 얼기설기 꽂힌 가봉 핏이었지만 그것마저 디자인인 듯 보였다. 뉴욕 패션위크에 서도 손색없을 만큼 멋진 옷이었다. 촤륵 촤륵, 쉴 새 없이 소희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셋업 룩 수석팀장의 옷 피팅까지 마치고 디자이너들은 점심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소희와 둘이서 미리 사둔 샐러드와 커피로 회의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소희가 늦게 입사했지만 나이는 같았다. 점심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샐러드를 주로 먹었다.
“지연아, 톡 보냈어.”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가며 소희가 말했다.
“무슨?”
“내가 우연히 발견했어.”
소희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야쿠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이유 10가지, 라고 적힌 글을 캡처해서 톡으로 보내왔다. 이게 뭐지? 한참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온몸에 열이 솟구쳐 오르는 걸 느끼며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보낸 거지.
“내가 읽어 줄게. 첫 번째는 동료를 배신해서 살해된 경우. 두 번째는 조직을 위해 살인하고 감옥에 가 있는 경우. 세 번째는 다른 조직에 쫓겨 몸을 숨긴 경우.”
“닥쳐.”
깜짝 놀란 소희는 손에 든 폰을 떨어뜨렸다.
친구들과 이태원 클럽에 갔을 때 그를 만났다. 예전엔 야쿠자였지만 그 생활을 청산하고 장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물감 만드는 회사였고 한국에 출장을 자주 왔다. 네 번 만났는데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그의 등에 새겨진 문신과 전화번호뿐이었다.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그는 문신을 자랑스럽게 나에게 보여줬다. 물고기들이 등과 팔 전체에서 꿈틀댔다. 중앙에서부터 회오리처럼 퍼져 나가는 물결이 물고기들을 휘감았다. 회오리치는 물결 틈에서 부드럽고 날렵하게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녔다. 꼬리에서 흩어지는 물방울은 몸 밖으로 튕겨 나올 것 같았다. 힘차게 몰아치는 물속 세상이 그의 등에 옮겨져 있었다. 푸른 물감으로 그린 물속은 생동감 있고 잔인했다. 땀에 번들거리는 등을 만질 때면 푸른 물감이 내 손을 물들였다. 물고기가 날카로운 이빨로 손가락을 깨물었고 사나운 물결에 휩쓸려 아득해졌다. 나는 물고기를 휘감은 물결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날렵하게 헤엄치던 물고기가 거칠게 나를 파고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소희 앞에서 몇 번 눈물을 보였다. 많이 힘든 만큼 위로받고 싶었다. 피팅 하느라 힘들어 오전 내내 말이 없었는데 소희는 그 남자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날 위로하느라 보낸 거라고?”
입사 한 달 후부터 지프를 타고 소희는 출퇴근했다. 디자이너로 입사하면 몇 년 동안은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피팅 모델로 수습 기간을 보내야 한다. 소희는 키가 작아 피팅 모델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취업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대학 졸업도 하기 전인 9월부터 출근했다. 회사 총괄 전무님이 소희 아버지 친구라는 소문이 돌았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서인지 눈치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서울 외곽의 가난한 산동네. 아버지가 고향에서 올라와서부터 살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낳고 나서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형편이니 나에게 미술학원비까지 지원해 줄 능력이 부족했다. 나는 패션디자인학과가 아닌,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입학이 가능한 의상학과를 지원했다. 실기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던 친구들과 드로잉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스케치를 잘할 수 있어야 디자인도 잘하는데 나는 유치원생보다 드로잉이 서툴렀다.
소희는 중학교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며 실기 실력을 쌓았다. 드로잉은 누구보다 잘했지만 제품 디자인을 맡기지 않으니 아직 쓸모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모델들 사진을 찾아 도식화를 시키면 빠르고 멋지게 스케치했다. 나는 두세 시간씩 머뭇거리며 만지작댔다. 때로는 소희가 내 스케치를 도와 완성해 주기도 했다.
“네가 많이 슬퍼하는 것 같아 빨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힘들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고.”
“우유 먹고 키나 크시지. 어깨도 좀 욱여넣고.”
먹던 샐러드를 팽개치고 일어섰다. 다시 피팅실로 들어갔다. 피팅실은 벗어 놓은 옷가지와 떨어져 구르는 실크핀과 진주핀들, 쌓여 있는 부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나실장이 디자인한 재킷을 입었을 때 달았던 브로치를 바닥에서 주웠다. 큐빅이 박힌 가는 링 여러 개가 서로 엇갈려 맞물린 화려한 패션브로치였다. 차르릉, 링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맑았다. 링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에 끼우면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를 두 번째 만났을 때였다. 그날 갔던 클럽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흑인 여자가 작은 목재 좌판에 이국적인 반지와 목걸이들을 펼쳐 놓고 팔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부인인 듯 보이는 여자에게 목걸이를 사주려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것저것 목에 걸어 보다 몇 개 골랐다. 아랍인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추위를 피해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오갔다. 그가 좌판에서 반지를 골라 내 손에 끼워 주었다. 한 개로는 부족했는지 네 개를 끼워 줬다. 비어 있던 손가락이 가득 찼다.
브로치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실장이 잘 챙겨 두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지나치게 심플했던 재킷에 이 패션브로치는 디자인의 완성처럼 느껴졌다. 소희는 잘 챙겨 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디자이너들에게 야단을 자주 맞으면서도 덜렁대는 성격은 안 고쳐졌다. 품평회장에서 이 브로치가 없다면 다른 브로치로 대체는 하겠지만 뒷감당은 알 수 없었다. 품평회 결과가 좋지 않으면 화는 더 클 수밖에 없다. 모든 화풀이를 소희가 다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디자이너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자기 아래 디자이너에게 떠넘기는 일이 잦았다. 옷 한 벌이 만들어지기까지 디자인실부터 소재실, 개발실, 생산부 그리고 외부 업체까지 모두 얽혀 있었다. 그만큼 누구 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일이 드물었다. 중간 역할을 맡겼던 막내 디자이너에게 모두 떠넘겼다. 막내는 종일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 고통이 막내가 겪어야 하는 전부이기도 했다. 나는 소희가 짊어진 짐을 얹어 주거나 덜어내기도 했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브로치를 내 자리로 돌아와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겼다.
오후 피팅은 데일리 룩 파트부터 시작했다. 내가 제일 꺼리는 은실팀장 샘플을 입었다. 손이 섬세하지 않아 스케치도 투박하게 했고 가위질도 거칠었다. 은실팀장은 겨드랑이 선 옷감을 잘라내고 더 타이트하게 실크핀을 꽂았다. 목선이 예쁘지 않다며 다시 원단을 잘라냈다. 귓가에서 스윽삭 스윽삭, 가위질 소리가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핀에 찔리는 것은 참았지만 가위 끝이 피부를 건드리는 건 더 싫었다. 금속성 차가운 느낌은 참을 수 없었다.
바로 위 선배 디자이너는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온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의 연락처를 차단했고 가장 가깝게 지내던 디자이너 전화도 받지 않았다. 자기 물건은 주말에 와서 찾아갔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하루에 백 번쯤 이름을 불리며 심부름만 했을 때도, 피팅 모델을 하며 핀에 찔리는 것도 참아낸 후 기본 의류 디자인을 막 시작했을 즈음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은실팀장이 들고 있는 가위가 어디로 갈지 몰라 긴장됐다. 벌써 두 번째 가위질을 하고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솜씨가 없으니 옷을 입혀 놓고 하는 가위질이 많았다. 가위를 든 채 핀을 옮겨 꽂다가 가위가 내 손등을 스쳤다.
“아악.”
필요 이상으로 비명을 질렀다.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붉은 줄이 생겼다. 고개를 힘껏 들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보이는 건 오직 흰색 석고보드 마감 천장뿐이었다. 목과 눈에 힘이 들어가니 오히려 피로가 덜어졌다. 자질구레한 것들이 꽉 들어찬 피팅실이 눈에서 사라지자 편안해졌다.
“아, 미안해.”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목소리. 호들갑을 떤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호들갑스럽게 미안해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 휴지라도 떨어뜨린 듯 아무렇지 않게 슬쩍 바라보고 지나쳤다. 상처와 고통은 피팅 모델 몫이었다.
소희가 봉제실에서 행거 가득 샘플 옷을 가져왔다. 절반쯤은 바느질이 되어 있고 절반쯤은 실크핀으로 핏을 잡아 놓았을 것이다. 옷을 입고 핏을 잡고 다시 봉제실에서 바느질을 했어도 품평회 날에는 여전히 많은 핀이 옷에 꽂혀 있었다. 품평회 자리에서도 핀을 옮겨 가며 핏을 수정했다. 바느질은 메인 선만 주로 했다. 바쁘게 옷을 입고 벗고 하다 보면 핀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찔리거나 긁혀도 아픔을 크게 못 느낀다. 회사 임원들과 각 부서장들 그리고 불안한 디자이너들. 긴장된 분위기의 품평회장은 한꺼번에 오르는 열기에 몹시 더웠다. 긴장감이 도는 들뜬 분위기가 아픔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품평회를 마치고 나서야 옷감에 쓸리고 핀에 찔리고 긁힌 흔적들이 보였다. 품평회 결과가 좋으면 아프다고 투정도 했다. 반응도 좋지 않고 디자인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면 아픈 티를 낼 수 없었다. 품평회장에서는 고성도 오가고 얼굴도 붉어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도 있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발표했던 디자인을 갈아엎고 새롭게 다시 해야 한다. 다시 해도 결과가 좋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시즌 매출이 낮아지고 디자이너들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나야 한다. 되풀이되는 긴장 때문에 디자인실은 차분해질 수가 없고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하고 독해져야 한다.
“강하고 독해져야 할 것 같아.”
언니가 했던 말이다. 형부의 장례식 날 화장장에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던 언니가 조용히 말했다. 정기검진을 받은 후 정밀검사에서 형부는 시한부 3개월 진단을 받았다. 예고된 날에서 20일쯤 더 살았다. 20일쯤 더 살아서 형부에게 좋았을까, 아니면 언니에게? 그것도 아니라면 조카들이 좋았을까. 형부는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갔고 통증도 심해졌으며 말수는 줄어들었다. 그 곁을 지켰던 언니는 아이들 돌보랴 형부 돌보랴 점점 말라 갔다.
의사는 입원이 의미가 없다며 퇴원해서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형부 고향이고 어머니가 살고 있던 강원도에 일주일쯤 내려가 있었다. 힘들다며 어머니가 형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어머니 부탁도 있었지만 형부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형부의 어머니는 오래전 떠났던 자식이 불편했던 걸까, 아파서 힘들어하는 자식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걸까. 돌려보낸 이유가 오래도록 궁금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언니와 형부가 결혼을 앞두고 점집에 갔었다. 둘이 결혼하면 3년 후 남편이 죽는다고 했다. 오래 사랑했던 연인이 그런 말에 휘둘려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아이가 연년생으로 태어났고 둘째 아이를 낳은 지 3개월 만에 형부는 말기 폐암 진단을 받았다.
소희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함께 점집을 가자고 했다. 예약하고 6개월을 기다려 점술가를 만났다. 한 명씩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웬일인지 소희에게는 좋은 말만 했고 나는 좋은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다. 점술가에게 들은 얘기를 적어온 소희가 노트를 뒤적여 가며 들려줬다. 나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 퇴근하고 혼자 남았다. 바쁜 날이라 모두 늦은 시각에 퇴근했지만 나는 더 늦게까지 남아 있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비어 있는 작업일지를 꺼냈다. 헤드이사의 지난 시즌 작업일지도 펼쳤다. 지난 FW 시즌에서 판매량이 가장 좋았던 오피스 룩 패션 도식화였다. 캐시미어와 울 소재가 섞인, 활동성과 보온성을 추구한 필수템 디자인이었다. 옷의 앞면과 뒷면이 떨어져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겹쳐 그려져 있었다.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곡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디자인이 복잡하지 않아 드로잉 연습에 적합했고 기본 핏 디자인이라서 연습용으로 좋았다. 이사님 도식화를 아래 놓고 그 위에 빈 작업일지를 겹쳐 놓았다. 연필로 도식화를 베끼고 다시 굵은 펜으로 선을 그어 볼륨감을 입혔다. 똑같은 디자인을 다섯 장 그렸다.
드로잉이 부족한 나는 모두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이사나 실장들 도식화를 그대로 옮기는 연습을 했다. 패션위크에 나왔던 모델 사진을 주며 도식화를 떠오라고 하면 나는 두 시간을 열심히 그려도 선이 비뚤어지고 전혀 다른 옷이 나왔다. 소희는 순식간에 멋지고 정확하게, 자기만의 색까지 입혀 디자인했다. 소희 드로잉은 이사님의 선과 닮았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 열심히 드로잉 연습을 해도 나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 지우개 가루가 수북이 쌓였다. 소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먼저 자신의 커피를 내리고,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디자인실 책상을 청소하고 피팅실 전신거울을 닦았다. 중앙 회의 테이블과 헤드이사 테이블 정리까지 마치면 식어버린 커피를 들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나에게는 이미 과거가 된 일상이었다. 쌓여 있는 지우개 가루를 소희에게 들키기 싫어 말끔히 쓸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청소 시절을 벗어난 나는 지난 FW 시즌부터 처음으로 바지와 치마를 디자인했다. 매 시즌마다 출시하는 기본 디자인을 약간 변형하는 수준이었지만 내가 스케치한 디자인은 너무 형편없었다. 수십 번 그리고 다시 고쳐 그렸지만 결국 수석팀장님이 매만지고 나서야 컨펌이 떨어졌다. 이번 SS 시즌에서도 수석팀장이 스케치를 매만져 주어 치마와 바지 그리고 원피스까지 디자인할 수 있었다.
내 행거에는 꽃무늬 원피스와 데일리 바지 그리고 A라인 스커트가 차례로 걸려 있었다. 치마부터 입어 보았다. 봉제를 이미 마친 것처럼 걸리는 핀 없이 쉽게 들어갔다. 치마에 맞는 블라우스까지 도식화를 그렸는데 컨펌이 떨어지지 않아 디자인할 수 없었다. 바지는 봉제선이 더 많은데도 핀 닿는 곳 없이 쑥 들어갔다. 바지에 어울리는 셔츠를 다음 시즌에는 디자인할 수 있을까.
원피스를 입어 보았다. 헤드이사가 네이처 무드 톤의 트렌드리스 스타일로 디자인해 보라고 했었다. 아이보리 톤의 린넨 원단은 풀잎 색과 우드 톤의 깊은 자연색이 수수하게 섞였고 붉고 자잘한 꽃무늬가 돋보였다. 아래로 갈수록 풀잎 색이 진해졌고 윗부분은 붉은 꽃이 휘날리듯 흩어져 포인트가 도드라졌다. 린넨 소재 특유의 색 번짐이 꽃과 잎과 가지의 경계를 무너뜨려 마치 한 그루 나무인 듯 보였다. 나는 사라지고 나무 한 그루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원피스도 핀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느질된 듯 핏이 잘 맞아떨어졌다. 핀에 찔리고 긁혔던 기억을 떠올려 몸의 라인을 잡고 핀을 꽂았었다. 헤드이사 옷을 입었을 때처럼 편안하고 느낌이 좋았다. 피팅 모델을 오래 하면서 핀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꽂아야 옷 핏이 살고 입고 벗기 편한지 깨닫게 되었다. 피팅 했을 때 디자인이 좋고 편했던 옷은 생산 후에도 판매 결과가 좋았다.
품평회가 있던 날은 겨드랑이에 울긋불긋 핀 자국이 보였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등이나 목에도 긁히거나 찔린 핀 자국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프고 쓰라렸다. 아프고 쓰린 경험들이 몸에 스며들어 디자인할 때 자연스럽게 그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었다. 몸의 기억을 손이 받아들여 핀을 꽂을 때나 스케치할 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내 몸이 패션도식화가 되었으니 드로잉 연습은 이제 안 해도 될 것 같다.
우당탕 소리가 났다. 소희 책상 옆에 있던 행거가 넘어졌다. 아래 놓여 있던 휴지통이 행거에 부딪쳐 멀리 날아갔다. 품평회에 쓰일 가방이며 벨트, 브로치나 액세서리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부자재들이 잔뜩 걸려 있던 행거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듯했다. 하나실장이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스타일벨트도 보였다. 구겨져 떨어져 있는 부자재들을 하나씩 주워 행거에 걸었다. 의류는 없었다. 소희도 다음 FW 시즌에는 기본 바지나 치마 하나쯤 디자인할 수 있을까. 낮에 피팅실에서 주워 가방에 숨겨 둔 브로치를 꺼내 행거에 같이 걸었다.
소희 책상에는 디자이너들 핀꽂이가 스무 개쯤 놓여 있었다. 늦게까지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다 퇴근 전까지 핀을 꽂았다. 미처 못 꽂은 핀꽂이들은 쇼핑백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핀꽃이를 뒤덮은 저 핀들이 내일도 내 살갗을 파고들 것이다.
바느질이 덜 된, 핀이 꽂힌 옷들을 입고 벗었다. 옷을 입은 상태에서 핀을 뽑았다가 다른 옷감을 대거나 가위로 자르고 다시 핀을 꽂기도 했다. 핀이 살갗을 찌르고 긁었다. 수많은 핀 자국, 옷감에 쓸린 피부가 따끔거리고 아팠다.
문신을 새길 때의 느낌은 어떨까. 찌르고 들어온 핀에 물감이 묻어 있었다면 내 몸은 문신처럼 무늬가 새겨졌을 것이다. 그의 몸과 비슷했을까. 그는 블루 한 가지 색이었다. 내 몸은 잭슨 폴록의 작품처럼 핀이 찔린 자리마다 온갖 색으로 무늬가 생겼을까. 핀에 자주 찔려 붉어진 곳마다 흩뿌려져 떨어진 물방울무늬가 그려졌을 것이다. 내 몸의 가치도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천문학적으로 높아졌을까. 품평회를 마치고 났을 때 찔린 핀의 자리, 매일같이 피팅 할 때 찔린 상처. 핀에 긁히거나 옷감에 쓸려 붉어진 피부에 스며들었을 물감의 흔적들.
책상 서랍에 있는 물감이 생각났다. 그를 만났을 때 나에게 물감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장인어른 회사에서 이런 것을 만들어, 하면서 내밀었다. 디자이너라고 하니 물감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에게 등에 새겨진 문신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조직 2인자였던 사람과 같은 무늬라고 했다. 조직 2인자는 키가 작았던 선배 조직원의 문신과 똑같이 새겼고 그것을 다시 그가 물려받았다. 선배 조직원이었던 사람은 키가 너무 작았고 조직 2인자는 못생긴 남자였다. 그는 키도 컸고 잘생겼다. 그의 그늘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화려한 문양의 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물감을 꺼냈다.
원피스를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붉은 물감을 손에 묻혀 목부터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핀에 자주 찔렸던 겨드랑이에는 푸른색을 듬뿍 발랐다. 손에 묻어 있던 붉은색이 푸른색과 겹쳐 그려졌다. 미끈거리는 물감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물감 냄새가 훅 올라왔다. 손바닥 가득 초록색을 묻혔다. 양쪽 어깨를 번갈아 쓸어내렸다. 덧바를수록 색이 어두워졌다. 오른쪽 다리는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작아지는 노란 원을 그려 넣었다. 여러 가지 물감이 섞여들어 색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물감이 조금씩 말라 가며 피부에 스며들었다. 비어 있는 곳을 찾아 꼼꼼히 덧발랐다.











박규숙
작가소개 / 박규숙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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