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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양작에서 그가 본 것

  • 작성일 2022-03-01
  • 조회수 4,634

[단편소설]



바양작에서 그가 본 것



김연수




1.


코로나 이전,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외국은 몽골이었다. 당분간 외국을 여행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방송 프로그램 외주업체로부터 여행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핑계삼아 잠시 한국을 떠나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목적지도 제대로 듣지 않고 바로 승낙했는데, 마침 몽골의 고비사막이라고 했다. 사막이라니까 또 그녀와의 일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시절이 떠올랐다. 제작팀과 촬영 방향에 대한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불쑥불쑥 옛일들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 사막의 모래 폭풍에 대한 게 있었다. 하루는 그 이야기에 나오던 어떤 인도말이 궁금해 그녀가 남기고 간 서가를 샅샅이 뒤진 적도 있었다.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이라 그녀의 서가는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나 싶도록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서가의 주인이 따로 있으니 그로서는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참에 서가도 정리해 보자며 며칠을 매달려보았지만, 결국 그 책을 찾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책이 없어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인터넷 서점에 그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을 주문했다. 배송된 책을 펼쳐 보니 목차에 바로 ‘모래 폭풍’이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열풍을 피하기 위해 닫아건 버스 유리창 너머로 태양에 직사된 흰 모래 언덕이 눈부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책에는 그녀가 말한 인도말이 ‘캇땀 호 가야’라고 나와 있었다. 거기 적힌 대로 ‘캇땀 호 가야’라고 읊조리는데 어딘가 좀 이상했지만, 그때는 왜 이상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옛 책을 찾은 건 한 달 뒤, 제작팀과 몽골로 떠날 무렵이었다. 짐을 챙기며 그는 그 책을 여행가방 속에 넣었다. 일행은 피디와 카메라 감독, 그리고 한국에서 섭외한 몽골인 코디네이터까지 모두 네 명이었고, 현지에 가면 몽골인 운전사 겸 현지 가이드가 따로 있다고 했다. 출발하는 날 오후, 인천공항에는 카메라와 드론 등 촬영 장비를 잔뜩 들고 온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동해 현지 공항에서 밤을 보낸 뒤,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남쪽 고비사막의 초입인 달란자가드로 향했다.
공항은 그들이 타고 간 국내선 비행기만큼이나 작았다. 촬영팀이 화물로 부친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그가 건물 바깥으로 나가 보니 예약한 손님을 픽업하기 위해 마중 나온 여러 숙소의 차량들이 시동을 켜놓고 주차장에 서 있었다. 그 차들 뒤로는 숙소와 투어를 안내하는 영어 문구가 어지럽게 인쇄된 광고판들만 서 있을 뿐, 주위에는 건물이 없이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건물을 빠져나와 기다리던 사람들이 든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봤다. 늦든 빠르든 자기 이름을 찾은 이들이 함박웃음과 함께 저마다 준비된 차량에 올라타고 주차장을 떠나자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제야 더없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더욱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공기는 건조했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언제쯤 바람이 불 것인가, 라고 생각하며 그는 한 손을 들었다. 그들을 데리러 와야 할 픽업 차량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촬영팀이 에어컨이 설치된 대합실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그는 거기 계속 서서 도로와 그 너머의 모래 언덕과 선명한 하늘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차 오려면 멀었대요. 들어와서 기다리래요.”
커다란 하얀색 천 모자를 쓴 몽골인 코디네이터가 대합실 문을 열고 그에게 외쳤다. 더 긴 이름이었는데 인천공항에서 통성명할 때 그녀가 그냥 자르갈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전 괜찮아요. 여기가 좋아요.”
그는 든 손 그대로 손차양을 만들어 볕을 가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자르갈이 그의 옆으로 와 이마에 손을 댔다.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하지 않아도 될, 그러니까 그를 따라 하는 시늉이었다.
“저기 뭐가 있나요?”
“보시다시피 구름뿐.”
“그럼 구름을 보시는 건가요?”
“딱히 뭘 보고 있는 건 아니었어요. 이게 사막인가 싶어서. 저기 너머가 사막인 거죠?”
“저는 울란바토르가 고향이에요. 고비사막은 저도 처음이에요.”
손을 내리며 자르갈이 말했다. 몽골인들은 모두 고비사막에 가봤으리라고 생각하는 편견에서 그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캇땀 호 가야’라는 말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아직 모르는 한국말이 많아요.”
“자르갈 씨는 엄청 잘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한국말이 아니에요. 인도말이에요.”
“인도말 할 줄 아세요? 무슨 뜻인가요?”
그는 대답하려다가 되물었다.
“자르갈은 무슨 뜻인가요?”
“자르갈은 몽골말로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저도 인도말은 하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알아요. ‘캇땀 호 가야’는 인도말로 ‘끝났어’라는 뜻입니다.”
그냥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아는 만큼 대답한 것일 뿐이었는데, 어쩐지 그 대화가 서글프게 들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르갈, 캇땀 호 가야. 이제 그렇게 된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았던지 자르갈이 “예?” 하고 되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자신이 “자르갈, 캇땀 호 가야”라고 외친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행을 픽업하기로 했던 운전사는 그와 자르갈이 대합실로 들어가고도 한참 뒤에야 낡은 스타렉스를 몰고 나타났다. 완충 장치가 고장 났는지 아스팔트 위에서도 노면의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되던 그 차를 타고 그들은 초원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고비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까지 갔다. 거기서 호텔이란 레스토랑과 샤워장이 딸린 게르 캠프를 뜻했다.
그날, 게르 캠프에서 그는 이걸 보러 여기까지 온 것인가 싶은 두 가지를 봤다. 노을과 밤하늘. 그건 매일 봐 왔던 보통의 노을과 밤하늘이 아니었다. 원형의, 이데아 같은, 어쩌면 시원으로 무한히 뻗어간다고 할 만한 노을과 밤하늘이었다. 그가 시선을 더 멀리 옮길 때마다 노을은, 또 밤하늘은 그 경계를 계속 펼쳤다. 거기 한계는 없었다. 그는 끝간 데 없는 무한을 실감했다. 그러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계속 뻗어 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더 먼 미래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는 거기에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 첫 밤에 지나지 않았지만.



2.


“육체의 눈이 감기는 바로 그 순간, 생각보다 그리 무기력하지 않은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다른 눈이 열린다. 미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르고 지내던 세계의 어두운 사물들이 인간의 이웃이 된다.”라고 빅토르 위고는 썼다. 과거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 알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면 미래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을 대면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몸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죽은 자리에서 새로운 몸이 탄생할 텐데, 그보다 먼저 새로운 감각이 온다. 그건 마치 어떤 불투명한 알 속에 들어 있는데 미래의 바람이 불어와 그 단단한 껍질을 깨는 것과 같다.
바람을 느끼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어오고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우리의 세계는 동시에 태어난다. 오싹하면서도 시원한 바람과 함께. 붉은 천처럼 노을빛이 넘실거리던 바양작의 일몰 속에서 그는 그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평선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태양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때까지 붉어졌고, 그 빛을 받은 바양작의 모든 것들, 바위와 모래와 절벽과 관목들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어딘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착각을 한다면, 그것은 현실이 되리라. 그렇다면 그날 거기 모인 사람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을 함께 만든 셈이었다.
그 새로운 현실 속에 푹 빠져 있던 그를 깨운 건 원래의 삶이었다. 해는 시시각각으로 저물고 있었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노을 풍경을 촬영해야만 했다. 카메라에 담아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을에 물드는 바양작과 절벽 아래 펼쳐진 초원을 카메라에 담는 것. 다른 하나는 해가 떨어져 빛이 사라지기 전에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 공룡의 화석을 보여주는 것. 순서대로 절벽 위에서 노을 지는 풍경을 촬영하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보니 급경사의 절벽이었다.
“괜찮아요. 땅이 물러서 발이 빠져요. 미끄러지지 않아요.”
먼저 내려가 주변을 살피고 온 피디가 말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낸 그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더니 말 그대로 발이 흙속으로 푹푹 들어갔다. 뒤따라 뛰어내린 카메라 감독은 45도는 족히 넘을 듯한 경사면이 마치 평지라도 되는 양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해가 저물고 있어 서두는 모양이었다. 그도 발을 내딛었다. 몇 번 걸어 보고 안심이 되자 그도 뛰어갈 수 있었다. 절벽을 뛰어가다니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먼저 내려간 카메라 감독은 지는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가 그 앞에 자리를 잡자 피디가 뭔가를 내밀었다. 돌멩이인가 싶었는데 그녀는 공룡의 뼈가 광물화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에는 짐승의 뼈처럼 다듬은 돌로 보였다. 원래는 하얀 뼈였을 테지만, 부드러운 진흙에 파묻혀 몇 천만 년이 흐르는 동안 모래가 스며들어 그렇게 바뀐 것이다.
큐 사인이 떨어지자 그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이것은 공룡의 뼈입니다. 수천만 년 동안 흙속에 파묻혀 있던 탓에 이 뼈는 마치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그때 미리 약속한 대로 피디가 그에게 뒤돌아보라고 신호를 줬다. 눈이 부신데도 촬영 내내 두 눈을 크게 뜨고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노을을 등지고 그는 컷 사인이 들릴 때까지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컷 사인은 좀체 들리지 않았다. 감은 눈 속에서는 지는 해의 잔상이 하얀 원처럼 떠다녔다. 이윽고 피디가 ‘컷!’이라고 외쳤고, 그제야 그는 눈을 뜨고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3.


거리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대목을 맞아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으로 치장한 가게들 덕분에 떠들썩했다. 그는 아직 블랙 사바스의 시끄러운 음악들을 듣고 있던 신입생이었다. 괜스레 설레어 오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걸어 내려가던 그는 같은 과 여자 선배 서너 명이 교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봤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스마트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모임을 잡으려면 미리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약속장소에서 모두 모일 때까지 함께 기다려야만 했다.
그가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손짓을 하며 알은체를 했다. 아직 ‘밥약’이라는 말은 생겨나지 않았을 때였지만, 말하자면 밥약을 한두 번 건 적이 있는 선배였다. 그녀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귀로 들리는 것은 여전히 블랙 사바스의 노래들, 오지 오스본이 아니라 ‘디오 이어즈(The Dio Years)’ 시절, 로니 제임스 디오가 부른 노래들이었다. 그는 노래를 껐다.
선배인 진이 몇 번이고 외쳤던 건 그의 이름이었다.
“종강했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종강했나요?”
진은 자신들은 시험이 모두 끝나 술 마시러 가려고 모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들만의 종강파티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좋다고 말하자 다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그럼 지금까지 나를 기다렸던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선뜻 물어보지 못했고, 또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간 곳은 교문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 안쪽의 춘천 닭갈빗집이었다. 무쇠 불판을 놓을 수 있는 둥근 화구가 가운데 놓인, 드럼통 모양의 테이블이 가게 양쪽으로 줄지어 있었다. 벽에는 꽃무늬가 또렷한 한지를 발라 놓았는데, 누군가의 이름과 날짜가 아니면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진지한 낙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거기 구석 자리에 앉은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자리에 따라간 것을 후회했다. 자신을 왜 불렀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에게 새삼 화가 났다. 그 자리는 그들만의 종강파티 같은 게 아니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어떤 사람을 성토하기 위해 시험이 끝난 뒤 교문 앞에서 만날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그의 가장 친한 동기생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왜 그렇게 친구를 비난하는지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한 선배가 말했다.
“양다리 걸쳤으니까 그러지. 얘만 당한 거잖아.”
그런 친구를 둔 것도 잘못이라는 듯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가 가리킨 또 다른 선배를 바라봤다. 그제야 그는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그해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무렵, 그는 대학로의 한 호프집에서 그 친구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서빙하는 종업원 없이 카운터로 가서 생맥주와 안주를 사오는 셀프 호프집이었다. 조금 술을 마시려니까 한 여자애가 다가왔다. 친구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라고 했다. 그게 문제였다. 그가 그날 본 친구의 여자친구와 과에서 그 친구와 남몰래 사귀었다는 여자는 동일인물이 아니었다. 술자리 한쪽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녀는 기말고사 직전에야 그 친구가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날의 술자리는, 그러니까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넌 알고 있었어?”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몰랐어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너한테는 자기가 좋아하는 애를 보여줬다고 하던데?”
어두운 표정의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아니, 제가 몰랐다는 건 걔가 선배랑…….”
“그건 우리도 몰랐어.”
다른 선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아무도 몰랐다고. 둘이 사귀는 줄도 몰랐고,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사실을 알고 혼자 끙끙대느라 장학생으로 들어온 그녀가 기말고사를 완전히 망쳐버린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 애가 고등학생이라는 것도 몰랐어?”
너무도 중요한 문제라는 듯, 어두운 표정의 선배가 다시 물었다. 물론 그 사실도 몰랐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수레에 실린, 물을 가득 채운 통이 흔들리는 것처럼 묵직한 마음이 흔들렸다. 그 친구에게 배신감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게 그의 마음을 흔든 건 아니었다. 각자의 인생에 우리 모두는 진지한 것이다. 그걸 두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거기서 원치도 않은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지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진의 마음이 그는 궁금해 여러 번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다들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에도 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이름을 왜 부른 건가요?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며칠 전에 청소하다가 말고 어떤 책을 펼쳤다가 모래 폭풍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거든.”
그때 뭔가 떠올랐다는 듯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4.


그보다 앞서 바양작을 찾은 사람은, 당연히 무수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이 태고의 땅을 깨운 사람은 미국인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델로 알려진 그는 포유류가 중생대 백악기에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아시아탐사대를 꾸려 1921년부터 만리장성 밖 몽골의 사막지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낙타가 아니라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는데도 닷지 자동차와 풀턴 트럭을 앞세운 대규모 탐사대를 이끈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저돌적인 모험가였다. 그러나 고비사막으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자는 동안 장화에 들어가 똬리를 트는 살모사, 밤이면 출몰하는 마적 떼, 사람을 뜯어먹는 들개, 별안간 차오르는 홍수 등 모험담에는 빠질 수 없는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그의 탐사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난관은 몽골 지배에 눈독을 들인 제국주의 미국의 스파이라고 그를 의심하는 중국과 소련 정보기관의 시선이었다. 결국 그 때문에 몽골에 사회주의 정권이 접어든 뒤로는 ‘고생물학계의 에덴 동산’인 고비사막에서 영영 쫓겨나는 신세가 돼버렸는데, 앤드루스 스스로 자초한 면이 없지 않다. 흑백사진과 영상으로 남은, 고성능 쌍안경과 소총으로 무장한 그의 모습은 의심받을 만했다. 기기묘묘한 모험담과 그런 외모 덕분에 그의 스펙터클한 생애는 훗날 영화 ‘인디아나 존스’ 속 캐릭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양작으로 가는 길은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모험이었다. 앤드루스는 바양작을 ‘불타는 절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세의 성처럼 생긴 그 붉은 절벽에서 탐사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전혀 뜻밖의 사실이었다. 탐사대원 중 한 명이 걸어가다가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일어나면서였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그가 발견했던 것처럼 바양작의 토양은 사암이다. 공룡이 나타나기 전인 고생대에 고비사막은 바다였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퇴적층이라 바다가 사라지고 융기한 뒤에도 입자가 곱고 쉽게 부서지며 바람에도 잘 날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 적어도 1억만 년 정도는 필요했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그 대원은 배가 고팠던지 땅에 뭔가가, 아마도 감자나 바게트 같은 게 박혀 있는 걸 눈여겨보게 됐다. 오랫동안 봉인됐던 중생대의 비밀이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공룡의 알이었다. 피디가 내민 광물화된 뼈를 보고 그가 돌멩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탐사대도 처음에는 그게 알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도 학계는 공룡이 어떻게 새끼를 낳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공룡의 알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앤드루스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것은 인류의 시작 이전의 시간, 그것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앤드루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고생대에 바다 속에서 차곡차곡 쌓였던 퇴적층으로 불어닥친 모래폭풍이 쌓은 성채인 바양작에 서 있었다. 그렇게 공룡들이 멸종하고 신생대가 시작된 뒤로 시간은 마치 조각가처럼 비바람을 도구 삼아 언덕처럼 쌓인 바양작의 퇴적층의 구석구석을 깎아가며 모양을 잡았다. 그러면서 파묻혀 있던 화석들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어떤 화석은 둥글고, 어떤 화석은 길쭉했다.
어떤 화석은 타조알보다 작았고, 어떤 화석은 너럭바위처럼 길고 컸다.
그가 읽은 책에는 ‘깊은 시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지구의 나이 46억 년을 1년으로 치면, 한 달은 4억 년, 하루는 1300만 년, 한 시간은 55만 년이 된다. 그런 식으로 따져보면 공룡은 12월 11일에 나타나기 시작해 16일에 사라졌고, 인류는 12월 31일 저녁 8시에 처음 등장해 11시 30분이 되어야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문명은 자정 2초 전에 시작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양작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것은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5.


“후지와라 신야라는 사람이 쓴 『인도방랑』이란 책인데, 읽어 본 적 있어?”
그에게 묻듯이 그녀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저었다.
“대청소하느라 온갖 물건을 꺼내 놓다가 입학하고 나서 교보문고에서 샀던 그 책을 발견한 거야. 버릴까 말까 결정하느라 앞부분을 조금 읽었는데 재미있더란 말이지. 그래서 아예 그 자리에서 반이나 넘게 읽었어. 청소한답시고 창문을 열어 둔 탓인지 조금 있으니까 추워지더라고. 그러면 창문을 닫으면 될 텐데 조금만 읽고 청소할 생각으로 두꺼운 스웨터를 입어 가면서 읽었는데 계속 페이지가 넘어가는 거야.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방 안이 어둑어둑해지더라. 그때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르.”
“책 읽다가?”
그의 입술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와라, 그 사람이 낡은 버스를 타고 타르 사막을 건너가는 부분이었어. 사막에서는 바람도 뜨거워 창문을 열 수도 없다고 하네. 그러다가 갑자기 버스가 멈춰서더니 차장과 운전수가 지붕에 올라가 차창 위로 휘장을 늘어뜨렸대. 차 안이 온통 어두워졌겠지. 눈이 안 보이자 냄새가 밀려왔어. 싸구려 기름 냄새. 담배 냄새. 땀 냄새. 그다음에는 살인적인 더위가 느껴졌고 운전사는 엔진을 껐어. 그렇게 몇 십 분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지. 어둠에 익숙해진 후지와라가 둘러보니 사람들은 모두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모래 폭풍은 십여 분 동안 버스를 둘러싸고 미쳐 날뛰다가 잦아들었는데,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대. 모래 폭풍이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러자 군복 차림의 운전사가 말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녀는 어떤 힌디어를 말했다. 모두 지나갔어. 다 끝났어.
“그 얘기 때문에 울었다고?”
“응. 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이야. 만물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웃긴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는 큰 도움이 돼. 불합리한 것을 알아보고 불평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뀔 수 있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지. 모래 폭풍이 지나간다는 것을 믿고, 버스 안의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그 인도 사람들처럼, 뭔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지. 양다리니 뭐니, 이런 얘기를 할 줄은 전혀 몰랐어.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해. 미안해.”
마지막 말은 역시 달싹거리는 입술로. 그렇게 진이 말했고, 그는 종강을 한 학생들로 가득한 닭갈빗집에, 그것도 여럿이 앉아 있었는데 꼭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사랑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만의 중생대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6.


바양작을 떠날 무렵부터 그의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달란자가드 공항에서 경비행기처럼 작은 국내선 비행기에 올라탈 때부터 몸살기가 돌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의 구름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그는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침방울의 존재를 느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내릴 때는 열이 더 올랐는지 온몸이 덜덜 떨렸고 심할 때는 이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공룡을 멸종시킨 바이러스에 자신도 감염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자르갈을 제외하고 한국인 스태프들은 한 숙소에 묵었는데, 그게 그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은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아플수록 정신은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에게 좀 더 잘해 줄 걸 하는 생각부터 이제는 죽는대도 미련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생각들이 뿌옇게 뒤엉켜 있었다.
아픈 몸이 살갗 하나까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게 어떤 생각이든 떠오를 때마다 그를 아프게 했다. 주위가 좀 환하면 불안이 좀 가시지 않을까 싶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조금 서 있는데, 여전히 온몸이 덜덜 떨렸다. 창밖을 내다봤지만 어두운 길로는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불안 때문인지 문득 자기 혼자 그 집에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어 그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나마 옆방에서 스태프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문을 두들겼고 카메라 감독이 문을 열었다.
“제가 지금 아파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저를 병원에 좀 데려다주세요.”
깜짝 놀란 두 사람은 그에게 당장 택시를 부를 테니 옷을 입고 나오라고 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방을 나서며 뭘 가져갈까 하다가 그는 배낭 속에 든 그 책, 『인도방랑』을 꺼내 손에 쥐고 나섰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 울란바토르 시내를 돌아다니며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은 문을 연 병원을 찾지 못했다. 밤새 응급환자를 받는 병원이 한 군데 있다고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외국인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피디가 한국에 있던 방송작가에게 연락해 울란바토르의 병원을 검색하게 한 결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들려왔다. 울란바토르에 한국인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이 한 곳 있다는 것과 내일 아침에나 진료가 가능하다는 것. 상황이 심각했으므로 밤인데도 불구하고 그 의사에게 연락해 보니 다음날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고, 병원이 문을 여는 9시까지 꼽아 보니 절망적이었다. 아침까지 버틸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1993년도 판 『인도방랑』을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의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병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냥 잠이라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이상한 확신이 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울란바토르의 한 방에서 죽기로 돼 있었다는 확신이 드는 아침이었다. 이렇게 아픈 건 분명 그동안 잘못한 일들에 대한 인과응보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의 그녀를. 아직 젊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던 시절의 그녀를. 그리고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라며, 그 시절 노래방에 가면 다들 합창하던 그 노래 가사처럼 젊고 서로 사랑을 하기 전의 두 사람을. 그러니까 그녀를, 그리고 그녀 옆에 선 자신을.
마음이 담담해진 그는 아침에 숙소로 온 자르갈을 따라 나섰다. 둘이서 택시를 타고 간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있는 2층 건물의 병원이었다. 소아과였는지 복도에는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았다. 그들을 지나 한국인 의사가 있는 진료실까지 가서 기다렸다. 환자들은 많았다. 밤새 잠을 설친 탓에 그는 몹시도 피곤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힘을 모아 그는 자르갈에게 말했다.
“자르갈, 전에 내가 고비사막에 갔을 때 ‘캇땀 호 가야’라고 말했던 건 사실은 ‘카타무 호갸’였어. ‘끝났다’라는 인도말 말이야.”
하지만 힘이 없어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르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이 곧 낫게 해주실 거예요.”
“그런 걸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옛날 책에는 그렇게 돼 있다는 걸 어젯밤에야 알게 됐어. 미안해. 자르갈. 자르갈에게 내가 잘못 말했어.”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가 말했다. 그러나 자르갈은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울었다. 비로소 아직은 스무 살이던 그녀가 ‘카타무 호갸’라고 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난 비관주의자야.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될 때가 있어.”라고 말하던 그녀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졌던 것이다. 가 될 때가 있어.”라고 말하던 그녀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졌던 것이다. 자르갈은 그의 울음만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자 그가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만났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들로 소란스럽던 그 병원 복도에서, 그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고 알아듣기도 힘들어 얼굴을 찡그리던 자르갈에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 존재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을 하고, 또 그렇게 몇십 년을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에 대해, 눈깜빡할 사이에, 마치 폭풍처럼 지나간 인생에 대해. 그때 자르갈이 그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고 그는 눈을 떴다.
“지금, 안으로 들어오래요.”
그는 진료실로 들어가 한국인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의사도 열병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불면에 지친 그를 재울 수는 있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는 몽골인 간호사가 그의 왼팔에 수액 바늘을 꽂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은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 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진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는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들로 파묻히고 있었다.











김연수
작가소개 / 김연수

19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를 출판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등 여러 권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펴냈다.


《문장웹진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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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거나몰라

    마지막 장에 오류있습니다.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졌던 것이다. 가 될 때가 있어."

    • 2023-07-18 17:12:36
    아무거나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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