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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소설

  • 작성일 2022-05-01
  • 조회수 2,787

[단편소설]



임상소설*)



김갑용





*



체호프를 읽고 있었다. 어느 관리가 장관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관리는 장관에게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벌써 소설의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장관이 소리쳤다. 당장 나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당장 나가!
그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모두 여전히 제자리였다. 밖에서 오토바이들이 요란하게 달려오는 소음뿐이었다. 오토바이들은 그가 사는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터널을 지나 한적한 교외를 마음껏 내달릴 것이다. 문밖은 온통 컴컴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안방은 문이 닫혀있다. 아까 그가 닫았다. 문에 귀를 대보면 아마, 희미한 숨소리가.
그는 돌아와서 다시 책을 펼쳤다. 어느새 관리는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책을 덮고 다시 어둠으로 발을 내디뎠다. 오토바이가 터널로 진입해 멀어져가면서, 서서히 분명해지는 안방의 침묵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가며 간신히 소파로 걸어가 굴러떨어지듯 누웠다. 불현듯 그는 자기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이마에 열이 있는 건지 손이 뜨거운 건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


항상성
항상 몸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성질. 그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배웠을 것이다. 인체는 생존에 필수적인 호흡과 체온, 신경 등을 환경에 맞게 조절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일정하게 유지 못 하면 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했다.
그의 손은 여름이면 비정상적으로 뜨겁고 겨울에는 손난로를 쥐어도 차갑다. 여름에도 땀을 거의 흘리지 않고 겨울 추위에도 급한 요의를 느낀 적은 없다. 그가 체온 조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처음으로 기절한 날은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맑고 따듯했으며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는 체력장 평가에서 오래달리기를 마치고 잠시 쭈그려 앉아있었다. 쉬는 시간 차임벨이 울렸다. 그는 운동장 모래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사이의 기억이나 공백은 없었다. 차임벨이 울리자, 운동장 모래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일찍 죽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성인이 되기 전에.
그 시절 그는 하늘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맨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까치걸음으로 걸어 다녔다.


*) 나는 임상소설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체호프의 임상의학적 체험과 관점이 반영된 작품들을 이르는 “Clinical studies”가 국내 웹에서 “임상소설군”으로 번역된 사례가 우연히 머릿속에 떠올라 제목으로 따왔다. 번역어의 최초 출처와 용례는 불분명하며 단지 오역이 전파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작가 개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 역시 있다.




그와 그가 서로 알게 되기에 앞서, 각자의 이름이 있었을 뿐이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둘은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학기 초 조회 시간에 급식비 미납자들을 호명하던 담임교사는 우연히 둘의 이름을 연이어 부르고 나서 잠시 말을 멈췄다. 둘의 이름이 그럭저럭 어울리며 붙여 발음하기 좋아서였다. 당사자인 그와 그, 교실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꼈다. 담임교사가 뒤늦게 내 이름이 빠진 걸 깨닫고 덧붙여 호명했다. 만약 담임교사가 나를 깜박하지 않았으면 가나다순이니 내 이름이 그와 그 사이에 끼어 있었을 텐데. 나는 잠시 공상에 빠졌고 다음 날에 급식비를 냈다.
둘은 급식비를 낼 돈이 없었고 그냥 굶기로 했다. 서로의 원래 사정은 알지 못했는데 둘 다 말하기를 꺼려서 누가 먼저든 언급할 일이 없었다. 둘은 단지 급식비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끼고, 급식실 앞에 줄 서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이 같이 학교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서성이고 앉아있었다.
둘은 성이 다르지만 이름 첫 자는 똑같이 민이고, 이름 끝 자는 초성이 같다. 아이들은 둘의 사이를 의심하다가 단정 지었고, 둘을 가리켜 민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민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식으로 놀리기도 했다. 첫 자는 둘 다 민이니 바꿔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으니까. 둘은 아이들이 놀리는 게 나쁘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좋아했으며 특히 민이 겹치는 게 깨나 마음에 들어 자주 말장난을 쳤다. 우리 같은 민짜가? 우리는 민감해, 고매한 민중을 매도하지 마, 식으로 놀리는 아이들에게 받아치기도 했다.
둘 사이에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순간 둘은 그쯤에서 멈추기로 한 듯했다. 아이들은 당혹스러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둘만은, 그와 그였기에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니까. 둘은 여전히 반 친구로 지냈지만 전처럼 죽이 맞지도 않고 장난이 엇나가 한쪽이 화내는 때가 잦아졌다. 친구로 지내기에는 서로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음 해에 반이 갈렸다.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고 나중에는 외면이 인사가 되었다. 이제 아무도 둘을 한 묶음으로 보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이 둘을 신경 쓰이게 했다. 서로나, 사람들이나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만 같았다.
졸업식 날 강당에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둘은 서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둘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한 테두리 내에 존재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었다. 그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세계에 있어 서로의 존재를 인지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생각해버렸고 왜 그렇게 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그는 단지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가려진 것이라고.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데. 만약 둘이 잘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렇지만 그게 삶인걸.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는 어릴 때 꾼 두 꿈을 기억한다.
하나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관한 꿈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이 전국에 내려지고, 늙은 하인이 몰락한 왕가의 어린 왕자를 데리고 왕궁을 도망쳐 나온다. 은신처에서 하인은 왕자의 수음을 돕고 왕자는 울면서 사정한다. 하인은 왕자에게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왕자는 그저 울기만 할 뿐이다.
하나는 아버지를 죽이는 꿈이다. 환한 낮에 그는 아버지가 잠든 방으로 들어가 식칼로 아버지를 간단하게 죽인다. 일을 마치고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와 그는 아무 말 없이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톤 체호프 입시 학원
그와 그가 사는 아파트는 제법 괜찮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그가 잠든 침대에 누워 그를 껴안고 온기를 느껴본다. 그는 뜨겁고 그는 차갑다. 그가 그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자 그는 잠결에 차가운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다시 고르게 숨을 쉬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다 아이의 방에 들어가 아이를 깨운다. 그를 깨워서 셋이서 밥을 먹는다.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한다. 아이가 왜 그와 그는 아무도 나가서 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돈이 많거든.
그가 대답한다.
그도 한마디 보탠다.
조금이라도 널 더 오래 보고 싶은걸.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래? 밖에 나가서 놀아도 돼. 아니면 다 같이 놀러 나갈까? 네 친구들을 초대할까?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아이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그와 그, 아이는 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서서히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댄다.
그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래에는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이 남고, 땅은 대부분 바다에 잠겨 우리가 지금 사는 서울을 둘러싼 바위산들 너머가 망망대해가 될 거라고 그는 운을 띄운다. 슬픔의 물결이 세계를 잠식하리라는 과거 한 철학자의 예언대로 미래의 사람들은 산 너머를 슬픔의 바다라고 부른다. 미래에는 하늘이 없고 해가 없고 구름도, 별도, 달도 모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의 사람들 머리 위에는 고가가 있다. 고가는 지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고가는 하늘을 모두 뒤덮고 있기에 지상에서 올려다본들 온통 회색이지만, 사람들은 고가가 수정같이 영롱하고 투영성이 높은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해가 보이지 않는 지상까지도 빛이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내려온다는 것이다.
지상의 사람들은 고가를 부와 권력을 쥔 계층이 전유한다고 믿는다. 고가인들은 중력을 느끼지 않으며 피로와 고통이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순수를 알고 있다고,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충만하다고 믿는다. 지상의 사람들은 슬프고 지쳐 무력하다. 슬픔과 피로를 더는 버티지 못한 사람은 지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종된다. 실종된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모른다. 지상의 사람들은 실종된 이들을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다.
지상의 아이들은 하나뿐인 학원에 다닌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상의 아이들이 속한 학원의 원훈이다. 안톤 체호프 입시 학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은 이를 원칙으로 한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통감하는 것이 학원생들이 배우는 전부다. 그동안 이해해왔다고 자부하던 것들을 통틀어 부정하고, 실은 불가해하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탐구하고 또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누구든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많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야기를 그만 듣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이해하지 않고 싶지 않다.
아이는 기억이 없고, 유년이 없다.
그는 이야기를 중단한다. 학원이 세워진 건 아이들만큼은 실종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줄 기회를 그는 놓쳤다. 고가는 단지 실종된 사람들이 얼어붙어 있는 무덤일 뿐이라는 것도 역시 그는 말하지 못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와 그는 영원히 함께하지는 못할 것이다. 둘에게 아이가 생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텐데.
그는 그와 아이를 두고 발코니로 나간다. 창밖의 바위산을 멀뚱히 보다가 옆집 발코니와 맞닿은 벽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들겨 본다. 귀를 벽에다 대자, 마치 소라껍데기처럼, 스산한 소리가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죽이지 않기로 했다.
숫돌이 필요하다.
그는 아버지 다리를 들고서 욕창에 흐르는 진물을 닦아내고 있다. 아버지는 천장 너머를 보듯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무심한 눈길을 힐끗 던졌다가 거둔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이 집은 그가 어릴 적 살았던 곳으로 이제는 죽지 않은 아버지와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설마 죽었나, 그와 그가 확인하러 오는 곳이다. 이 시골집은 방이 하나다. 세기말에 아버지는 그와 그를 이 방에 가두고, 그를 다그치고, 그의 눈길을 피하고, 담배를 피워놓고는 환기를 하지 않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코를 골았다. 마당의 수돗가에서 세수만 해도 그 소리가 방까지 들리던 요란한 사내, 심각한 전화도, 깊은 한숨도, 가래침 뱉는 소리마저도 누가 들어주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던 아버지는 세기말이 지나고 더 나은 집을 구하고 먹고 살 만하다고 할 수 있을 때쯤 이 집으로 돌아와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아직 그와 함께, 이제는 아무 짓도 못 하지만, 죽지 않았다.*)
아버지를 이 집에 가둔 건 아버지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은 순교자의 길을 걷기로 한 그의 선택이었다. 아버지가 숨쉬기를 멈추는 순간 죽은 아버지는 영원히 그의 위에 군림하고 또한 그의 멍에가 될 것이다.
밖은 봄이다. 마당에 벌써 목련이 꽃 피었다. 그는 그에게 웃는 눈길을 보낸다. 그는 어딘가에 골몰한 눈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는 문과 벽을 없애고 통유리 창을 달아야겠다고 말한다. 아버지도 꽃이 피는 걸 봐야 한다고. 천장만 보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하겠느냐고. 누가 알겠나, 사람 사는 풍경 구경하다 언젠가 정신이 드실지. 그가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전에 집을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담과 대문을 없앤 게 그였다. 창을 달 때까지 잠시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이번에도 그가 멋대로 정해버린다.
그를 산책 보내고, 그는 아버지 곁으로 당겨 앉는다. 아버지 몸을 닦을 때 쓴 대얏물에 손을 담가본다. 아직 따뜻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실리콘 통을 꺼낸다. 그는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움직이면 안 돼요. 아직은.
그는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주물럭거리는 데에 열중이다. 그가 농담한다.
아버지, 갈수록 살이 느시는 게, 누가 보면 멀쩡한 줄 알겠어요.
그는 일을 마치고 마루로 나온다. 수돗가에는 그가 캐온 봄나물 한 모숨이 담을 데가 없었는지 거무튀튀한 숫돌 위에 놓여 있다. 기억하실까. 아버지는 저 숫돌에다가 칼을 갈았다. 푸줏간에서나 쓸 법한 우악스러운 칼이었다. 그 칼로 닭목을 땄다. 저 숫돌에다 대고. 아버지는 지혜로운 인디언마냥 말하고는 했다. 한 생명의 희생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거라고. 그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광에서 이제 무엇도 벨 수 없는 녹슨 푸주 칼을 찾아내 쥐어 든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광장 한복판에 서 있다. 아버지를 짓밟고 서서 푸주 칼을 번쩍 들어 올려 보인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는 아버지를 호명한다. 죄명은 없다. 아버지는 그와 그를 먹여 살린 것 말고는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목을 숫돌에 대고 단칼에 썩둑 썰어버린다.


*) “죽었지만, 아직도 우리와 함께,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지만, 죽었다.”(도널드 바셀미, 『죽은 아버지』, 김선형 역,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아버지는 다 느끼고 있다. 다만 움직이지 못할 뿐이다.
아버지는 천장을 보고 있다.
집이 아닌 게 분명하다. 아버지는 누워있다. 그가 병상 곁의 의자에 앉아있는 걸 아버지는 알아챈다. 그는 산만하게 서성이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아무런 감흥 없이 밖을 내다본다. 창밖 날씨는 기가 막힐 것이다. 아버지는 이 좋은 봄도 못 보고 누워만 있다.
누가 들어온다.
아버님은 여전히 스스로 숨을 쉬시고, 모든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계세요. 아버님은 살아 계세요. 단지 세상과 단절되어 있을 뿐이죠. 언제 정신이 드실지 모릅니다. 먼 훗날일 수도 있고, 조만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긴 시간 동안 반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만큼,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을 많이 거세요. 다 듣고 계실 겁니다. 조심하시고요. 큰 충격을 받으면 혼수상태로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의사는 할 말을 마치고 나간다.
아버지는 안도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올여름은 더울 거라며, 아버지가 산 채로 썩어갈 거라 걱정한다. 그가 선언한다. 더는 지켜볼 자신이 없다고.
그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한다. 사고로 받은 배상금과 보험금이면 요양원 비용은 충분하다고, 이제 끔찍한 시골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고 말한다. 말을 마치고는 그가 창을 등지며 못된 말을 하고 난 아이처럼 그를 빤히 쳐다본다. 딱 그 만한 애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가 덧붙인다.
그러자 그가 그에게로 다가간다. 그의 숨소리가 흔들린다.
돈은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에게 다 생각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울상을 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아버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겠다고 말한다.
대답도 없는 사람하고 무슨 말을 나누게?
아버진 살아있어.
곧 그가 나간다.
그제야 그가 아버지의 머리맡에 앉는다.
그가 어깨를 움츠린 채 긴 한숨을 쉰다.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담요를 고쳐 덮어주고, 축 늘어진 손을 잡고 기도하는 시늉까지. 볼에다가 입도 맞춘다. 그러고는 한동안 방심한 등을 아버지에게 내보인 채 수그려 앉아있었다.
이윽고 담요가 걷히고 아버지의 바지는 무릎까지 내려간다. 그가 아버지의 자지를 손에 쥔다. 믿을 수 없게 뜨겁고,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이 아버지의 자지를 쥐고 서서히 힘을 줘가며 흔든다. 아버지는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다 느끼고 있다.
의사의 말대로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다.


그는 마스크를 쓰고, 라텍스 장갑을 낀다. 크로스백에서 과도를 꺼내 든다.
경비실로 들어가 허둥대는 경비원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목젖을 벤다. 피가 튄다. 경비원이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린다. 그는 차량 차단기를 올리고, 전화를 후문 경비실로 전환한다. CCTV와 연결된 선을 모두 뽑아버리고 기억장치를 뜯어내 크로스백에 넣는다. 경비원의 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낸다.
그가 이제 푸주 칼을 꺼낸다. 경비원의 목을 바닥에 고정한다.
생각만큼 단칼에 베이지는 않았다.
불을 끄고,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간다. 부재중 팻말을 문손잡이에 건다.
밖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출입 카드를 대고 공동현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간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아이의 생일이다.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전자음이 울리기 무섭게, 그는 과도를 꺼내 쥐고 안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남자는 자고 있다. 그는 남자의 목젖을 벤다.
서둘러 아이의 방에 들어가, 아이의 목젖도 벤다.
이제 그는 라텍스 장갑을 갈아 끼운다. 아이의 바지를 벗기고, 크로스백에서 준비한 것들을 꺼내 일을 시작한다.
일을 마치고, 푸주 칼로 아이의 목을 내리친다.
한 방이다.
그는 거실로 나온다. 발코니 너머로 경광등이 번쩍이고 있다. 경찰관 둘이 경비원 한 명과 함께 경비실 문을 두드리고 있다.
남자의 방으로 돌아간 그는 남자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꺼버린다. 남자가 자기 목을 움켜쥔 채로 남은 한 손을 휘둘러대지만 그에게 닿지 않는다. 남자는 곧 진이 빠져 주저앉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목에서 피만 뿜어져 나올 뿐이다. 그는 라텍스 장갑을 벗고, 마스크를 벗는다. 그는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남자는 울고 있다.
다시 마스크를 쓰고, 라텍스 장갑을 낀다.
그가 푸주 칼로 남자의 목을 내리친다. 어찌나 안 잘리고 피에 미끈거리는지, 남자의 목을 거의 다지다시피 했다.
그는 발코니로 나가 옆집과 맞닿은 벽을 향해 크로스백을 힘껏 던진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그가 거실을 향해 손전등을 비춘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빛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손에 집히는 대로 쓰레기를 던져댄다. 닥치는 대로. 그는 속이 빈 봉지나 용기 따위를 굳이 피하지 않고 맞아가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며칠 만에 일어나, 비틀거리며 뒷걸음친다. 그는 나를 지나 쓰레기더미들 사이를 걸어 현관문에 기대 주저앉는다. 바깥에서는 쇠망치 같은 걸로 옆집 현관문을 부수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가 손전등을 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를 생생히 볼 수 있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어두운 탓에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한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를 본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과한다.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이제 곧 경찰이 발코니의 대피로를 발견할 거라고. 자기처럼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면 도망치라고. 그는 내게 안심하라고 말한다. 자기는 괜찮다고.
그의 정중함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문이 마침내 부서졌는지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에서 사라진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발코니에 널브러진 크로스백을 깜박한 채로.
옆집은 무전 소리만 들릴 뿐 잠잠하다.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는 범인의 도주로를 파악할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잔혹한 시신은 본 적이 없다.
나와 그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 같은 사람은 충분히 의심하는 법이 없다. 최소한 뭘 저지를 때는 그렇다. 그런데 잠시라도 멈추면 우리는 의심한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크로스백을 메고서 잠시, 별거 없는 밤 풍경을 내려다본다. 층이 높지는 않아서 죽지는 않을 듯하다.


시골집 공사가 끝이 났다.
그는 실종되었고 그와 아버지만이 남았다.
그는 구급차의 들 것에서 아버지를 꺼내 업어와 이부자리에 눕힌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제 앞이 탁 트였다고, 그런데 왜 계속 천장만 보고 계시냐고 묻는다.
그는 아버지의 고개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바깥을 향해 튼다. 이미 목련은 지고 흉하게 시든 꽃잎들이 마당에 나뒹굴고 있다. 그는 평소처럼 물을 데워 아버지 몸을 닦기 시작한다. 바깥에 경찰차 여러 대가 멈춰 선다. 경찰관들이 들이닥쳐 오는 동안 그와 아버지는 그대로 멈춘 채 쳐다만 본다. 창이 열린다. 형사가 아버지를 호명하고 특수강도, 살해, 아동·청소년 강간 및 살해 등 죄를 열거하는 동안, 그는 아버지를 껴안고 온몸으로 경찰관들을 막는다.
일어나요. 어서 무고하다고 말해요. 아버지는 여기 누워있던 죄밖에 없잖아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말하고 나서 그는 깨닫는다. 아버지가 일어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제압당해 바닥에 짓눌린다. 아버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다.
억센 손아귀들이 잡아 누르는 통에 그가 질식할 지경인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가만히 누워만 있다.


***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톤 체호프.
차임벨이 울리고 지척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야 그는 변기에 앉아 칸막이 문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눈을 떴다. 처박은 고개를 들면서, 누가 왜 하필 그런 말을 문에 적었는지 정말 체호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를 낙서를 그는 아무 생각도 이해도 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
누가 조심스럽게 톡톡 문을 두드렸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화장실을 독차지한 모양이었다. 미지근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혀 그는 무심코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걸쇠를 풀었다. 문을 당기자 학원생들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그를 에워쌌다. 그제야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원 시간에 이르도록 다른 강사들이 그렇게 그를 찾아다녔는데도 연락도 안 되고 행방불명이었다는 것이다. 학원생들은 이제 막 수업을 다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누가 칸막이 안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자 겁을 먹고 원무실에 알릴 참이었다고 했다. 그가 왜 피가 나도록 머리를 문에 처박아댔는지 학원생들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잡아 당겨가며, 에워싼 그대로 원무실까지 향했다. 머리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다들 화장지나 손수건 따위를 머리에 대주느라 그는 몸을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걸어야 했다.
학원생들이 하원하고도 원무실에는 강사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부장 강사 역시 얼굴에 핏자국이 채 안 닦인 그를 보고 놀랐으나 무엇이 먼저인지를 잊지 않고 다소 야박하리만치 학원생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그다음에야 호들갑을 떨면서 핏자국을 마저 닦아주었다. 그는 사과하려고 거듭해서 말을 꺼냈지만 부장은 계속해서 말을 막았다. 사정을 들어보기는커녕 방금 학원생들을 내쫓던 솜씨로 그에게 응급실에 가보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는 머리에 상처가 심하기는 한지, 상처가 나기는 했는지 느낌도 없었다. 피도 더는 나지 않았다. 그는 원장님을 뵙고 싶다고 했지만 부장은 눈만 휘둥그레 뜰 뿐이었다. 미디어아트 작품마냥 벽면 하나를 꽉 채우고 있는, 강사와 학원생을 감시하던 CCTV도 시간이 다 되어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강사들의 사담을 훔쳐 듣기 위해 늘 열려 있던 원장실도 역시 닫혔다. 관리자는 지금 말을 피하고 있는 부장뿐이었다.
그는 기어코, 그러나 몹시 부끄러워하며 말을 꺼냈다.
저는 아픕니다…….
부장은 그렇겠다고, 얼른 응급실에 가봐야 한다고 손을 꼭 잡아주면서도 눈을 피했다. 그는 어떻게든 다음 말을 지어내 갔다. 죄송하지만 너무 힘들다고, 마저 말하면서도 그만두겠다는 말 한마디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갈수록 구차해져 이제는 아프고 죽을 것 같다고 칭얼대는 꼴이기만 했다. 부장도 더는 듣기 곤욕인지 눈을 내리깔고 잡던 손을 뿌리쳤다.
그래요. 그렇게 아프다면, 날 밝는 대로 맞는 병원을 찾아가 봐요.
부장의 말이 끝나자 방금까지만 해도 그를 걱정하면서 지켜보던 강사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말을 걸면 쏘아붙이겠다는 듯이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잔업을 처리하는 강사들에게 그는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자기 자리를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겁에 질려 원무실을 도망쳐 나왔다.
그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아 우는 소리만 내면서 밤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행인을 마주치면 무표정한 얼굴로 서둘러 지나쳤다. 마주칠 때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는 창피하기만 하지 자신이 울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창피한 일쯤이야 얼마든지 잊을 수 있었다. 정말 걷다 보니 잊었다. 집에 돌아갈 생각뿐이었고 병원은 생각지도 않았다. 집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태엽 감는 아버지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며 언제나 그렇듯 다시금 착잡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곰팡내 나는 지하 계단은 항상 지하실에 어울리는 생각에 잠겨버리도록 강요했다.
아버지는 분명 떠나고 없었다. 이제 집에 남자라고는 없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자유다. 떠나기 전에 아버지는 캠핑차를 사서 여행을 다니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암에서 벗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암이 얼마든 재발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남자가 얼마나 추하게 일상을 망가뜨리고 생을 마감할 수 있는지 말이다.
마치 꿈같은 일이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던 그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그러다 그가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다시 안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놓인 썩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문가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시취가 은은하게 돌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곁에 무릎 꿇고 앉아 마치 아버지의 유언에 귀 기울이듯 바람 빠진 맥없는 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했다.
문가에 선 그가 그에게 아버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만이 이 상황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몰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썩어가는 아버지를 어떻게 할지 그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에게 설명했다. 아버지에게 피와 숨을 계속해서 불어넣고 있다고. 아버지는 죽었지만 피와 숨이 아버지의 태엽을 감아주고 있다고. 그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태엽은 무엇이고 태엽을 감음으로써 아버지가 무얼 한단 말인가? 누가 자신의 아버지를 오르골로 여기겠는가? 그런데도 선택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달린 듯했다. 무슨 선택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다시 재촉했다. 그는 무심결에 고민 중이라고 대답했다.
얼만큼?
그가 흠칫 그를 돌아보고는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머리털이 빠지도록.
민머리가 되도록?
둘은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잠시 킥킥거렸다. 덕분에 그는 좀 덜 심각해질 수 있었다. 한참 무릎 꿇고 있던 그는 휘청대며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다 그만 엉덩이가 아버지의 싸늘한 코에 닿고 말았다. 어찌나 싸늘한지, 속옷까지 불쑥 뚫고 들어오는 찬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 지경이었다.











김갑용
작가소개 / 김갑용

1990년생.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등단.


《문장웹진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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