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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647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4.1) 전망과 실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시영화cinéma de poésie <분노>를 분석하며 시적인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 온 파솔리니는 이 영화에서도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처럼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우리가 감지하게 하기 위해 몽타주를 사용한다. 세계가 정상성을 위장하고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태를 가시화하는 예술의 역량이란 우리에게 익히 익숙한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은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 [······] provare는 (파솔리니가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여러 가지 의미를 함께 모았을 때에야 가장 정확해질 수 있는 동사이다. provare는 (예를 들어 소박한 장미와 같은) 무언가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 “겪다éprouver” 또는 “느끼다ressentir”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가 분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기 위해” 여기에서 연결된 세계의 요소들에 관한 발견적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다essayer”이고, “실험하다experimenter”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 연역과 세계의 모종의 상태(1840년대 마멜리의 애국가와 1960년대 정치 시인 파솔리니의 글 사이 어딘가)로부터 축조된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낱말은 “증명하다prouver”를 뜻한다. 『이단적 경험』의 저자에게 시는 세계를 prova(시험) - 이는 또한 시간의 prova다 - 하는 양상 또는 양태화로서 증명을 뜻할 것이다. 한편으로 논증된 사유, 증거, 판단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 구어적이거나 시각적 형식 속에서 양태화되는 감정을 낳는 에세이essai 또는 실험이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영화 <분노>의 기획을 특징짓고 있다.2)


   인용 글은 어느 시선집 서문에 파솔리니가 적은 문장을 디디-위베르만이 섬세하게 분석한 부분이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시와 영화 사이의 등가성을 분석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Un certo modo di provare qualcosa이 [······]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적는데, 디디-위베르만은 이 문장에서 사용된 ‘겪는/시도하는provare’이라는 동사의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파솔리니의 몽타주 작업이 “우리의 지적 판단(증거의 영역)”과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시련의 영역)을 동시에 건드린다”3)는 점을 조명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파솔리니의 시/영화는 서술된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적 장치를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겪고 느끼고 시험하고 실험하고 증명하며 판단하게 하여 파국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은 시와 영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파국을 인지하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동일한 분석을 파국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상상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지금껏 강렬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을 해온 김리윤은 「전망들」 연작 중 하나인 다음 시에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전망을 획득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미리 시험해 보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끔찍하게 춥다. 이렇게 단순 명료한 추위라니, 궁금할 것도 없는 날씨다. 춥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생각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얼어 터진 손으로 망원경을 쥔다. 뭐가 좀 보이느냐고 묻는다. 친구의 친구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들이, 언니와 동생이, 동료와 이웃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 이곳이 전부라고 믿지는 않겠다고. 아득바득 전망을 갖겠다고. 저기를 보거라. 더 먼 데를 보거라.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먼 곳이 있다고 믿어 보거라.


   바다가 보인다. 바다라면 섬 몇 개는 갖고 있다는 것쯤 우리도 알고 있으니 거기엔 섬도 있다. 가깝고 작은 섬, 멀고 커다란 섬이 모두 같은 크기로 보인다. 우리는 안다. 보일 듯 말 듯한 섬의 존재가 그날의 날씨를 점칠 수 있게 한다는 것. 날씨 때문에 기우는 운도 있는 법이라는 것. 섬에는 부드럽게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갈 물이 있다. 물이 돌 굴리는 소리가 있다. 오늘은 정말 잘 보인다. 이렇게 보들보들한 물이 돌을 깎다니 참 이상한 일이지. 동그마한 돌 하나씩을 줍는다.


   이렇게 단단한 물건을 만들 때는 재료를 녹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이란다. 이게 뭐로 만든 건지 알면 깜짝 놀랄 게다. 우린 돌을 놓고 둘러앉아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 녹인 것을 굳혔다고 하면, 그 많은 게 결국 다 여기 녹아 있다고 하면 뭐가 들었대도 믿게 되겠지. 이런 식으로 세계를 믿었지. 희망, 희망, 희망······ 단어들을 혀로 굴리며. 희망을 녹여 만든 세계에 우리도 녹아 있다고. 세계란 그런 물질이라고. 그러나 상상은 지겹다. 모든 게 다 여기에, 안 보이는 상태로 있다는 상상은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가짜이며 믿음이 없다. 사실 믿음도 지겹기는 마찬가지다. 이제는 믿음 같은 것 필요 없는, 그냥 있을 뿐인 사실을 원한다. 신비도 지겹다. 신비 없이, 모든 것이 시선 아래 낱낱이 드러난 사물과 풍경을 원한다. 파헤칠 필요 없이, 길을 잃을 수도 없이, 어디를 헤매고 다니더라도 출구가 훤히 보이는 장소를 원한다. 사방이 출구인 장소를. 우리는 언제나 한발 늦게 보지. 발생을 허겁지겁 뒤따르는 시선. 그것이 우릴 안심시킨다. 이불 밖으로 손을 내놓고 푹 잠들게 한다.

― 김리윤, 「전망들」(『현대시학』 2023년 1-2월호) 1∼3연 


   넓고 먼 곳을 멀리 바라보거나 앞날을 헤아려 내다보는 행위를 ‘전망하다’라는 말로 가리킬 때, 이 시가 다루는 것은 전망하기 위해 다양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다. 지금 이곳의 날씨가 “끔찍하게 춥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지만 “이곳이 전부라고는 믿지 않겠다”는 듯 “얼어 터진 손으로 망원경”을 쥐는 이들도 있으며, 그들에게 “뭐가 좀 보이느냐고 묻”고만 있는 이들도 있다. “아득바득 전망을 갖겠다”는 목소리들에 떠밀려 함께 먼 곳을 바라보다가도 이런 시도들에 지친 채 “낱낱이 드러난 사물과 풍경”을, “사방이 출구인 장소를” 원하게 되는 이들도 있음을 시인은 적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시인이 시간과 공간을 뒤섞어 제시함으로써 시를 읽는 우리가 미로에 있는 것처럼 방향을 찾지 못하고 맴돌게 된다는 사실이다. 앞날을 바라보고 나아갈 길을 생각하는 일은 점점 막막하게 여겨지고, 우리 역시 시 속 ‘우리’가 그러하듯 발생된 일을 좇아가는 평온함에 어느새 익숙해져 출구를 찾는 일에 함께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처음 시를 읽었을 때부터 앞을 내다보는 일이 답답하게만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시는 한 번의 굴절을 하는데, 2연에서는 “가깝고 작은 섬”과 “멀고 커다란 섬”이 같은 크기로 보인다는 사실마저도 감지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던 시 속 ‘우리’가 더 이상 길을 잃지 않는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태도를 전환할 때, 시를 읽는 우리 역시 같은 지점에서 변화된 정동에 놓이게 된다. 전망을 찾기 위해 고양되었던 목소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3연을 기점으로 가라앉으며 시에는 감각의 언어가 아닌, 믿음과 희망과 같은 관념의 어휘들이 돌올해진다. “물이 돌 굴리는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보들보들한 물이 돌을 깎”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던 ‘우리’가 먼 곳에서 분명히 실감했던 ‘돌’을 내려놓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후(“우린 돌을 놓고 둘러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 의욕이, 그리고 그들을 시 밖에서 바라보던 우리의 고양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막막한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지치지 않고 이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할머니의 동화적인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그 추상성과 모호함이 세계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벼리게 하기보다는 세계를 모두 신비롭거나 낙관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 그 답이 있어 보인다. 마치 ‘돌봄’이라는 말의 포용력을 가능성으로만 인식할 때 더 함정과 같은 미로에 빠지는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앞을 헤쳐 나가는 일은 안개를 걷는 일과 같이 아득한 여정같이 여겨지고 길을 찾는 일은 점차 지루해지기 쉽다. 먼바다를, 섬을, 섬의 물과 그곳의 돌을 바라보고 “돌 하나씩을 줍”기도 할 만큼 너른 시야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우리’가 실제적인 실감인 ‘돌’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느라 놓아 둔 후 먼 곳을 바라보는 일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 시적 상황은 전망하는 행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문제를 추상화하고 신비화하는 사고방식에 있음을 알게 한다. 

  김리윤의 시에 기대어 말해 보자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은 ‘돌봄’, ‘공공’, ‘교권’, ‘학생권’과 같은 거창한 개념을 탐구하거나 각각의 발생을 거슬러 톺아보며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학교라는 장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감해 보는 일일 것이다.

   관련하여 임유영의 시를 읽는다. 


   방과후 문예반에서 소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

   소녀들은 또래보다 빨리 읽는다. 소녀들은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고 끝낼 줄 안다. 여러 개의 문장을 잇고 쓸데없는 문장을 뺄 줄 안다.


   소녀들은 이야기를 빈틈없이 전개한다.

   곁으로 새는 법 없이 기승전결의 구성을 만든다.


   소녀들은 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맞이하는 청소년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폭력 방지 대책을 제시하고 광복을 기념한다.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거나 반대한다. 선조들의 기상을 찬미하고 독립 열사를 추모한다.


   소녀들은 어제 옆집 아저씨가 엄마한테 시비 거는 광경을 보았고

   소녀들은 요새 친구들과 은근히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소녀들은 교실에서 쓰고, 때가 되면 야외에 나가서 쓴다.

   그중에서도 잘하는 소녀들은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가서 쓴다.


   소녀들이 쓴 글 중에서 잘 된 글은

   문예반 선생님이 본보기로 뽑아 낭독해 주신다.

   선생님은 시인이다. 봄에 피는 꽃, 여름에 우는 새에 관해서 쓰시고

   자신이 발표한 시를 소녀들에게 낭송해 주시기도 한다.

   소녀들은 그것이 턱없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느끼지만 

   동시라서 그렇겠거니 싶다.

   선생님은 여러 권의 시집을 내셨고


   선생님의 시 중에 죽거나, 죽이는 글은 없다.

   소녀들도 죽거나 죽이거나 죽고 싶다고 쓰는 대신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고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쓴다.

  

   소녀들은 선생님이 친구의 글을 읽어 주는 걸 듣다가

   가끔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이라면, 소녀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쓰고 치워버리지만


   어느 여름 오후


   선생님이 사과 한 알을 교탁에 올려놓고

   그것에 대해 쓰라고 하셨을 때


   소녀들은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을 생각하는

   완벽한 방법을 알아낸다.


   음악이 시작된다.

― 임유영, 「헤테로포니」(『오믈렛』, 문학동네, 2023) 전문


   임유영의 시집에는 종종 어른과 아이, 선생과 학생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그들은 같은 곳으로 소풍을 가도 서로 다른 자리에 앉으며(「미래로부터」) 어른들은 슬픔과 마주한 아이가 풀어 놓은 ‘부드러운 마음’을 마냥 귀엽게만 여긴다(「부드러운 마음」, 50쪽). 이 시 역시 표면적으로는, 각자 서로 다른 시를 지향하는 “문예반 선생님”과 “소녀들”의 이질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이 배제된 선생님의 글쓰기 강의와 소녀들이 접하는 실제 세계의 괴리는 “죽거나 죽이거나 죽고 싶다”고 쓰지 않는/못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죽은’ 글쓰기인지를 생각하게 하며, “정확한 문장”을 쓰고 “또래보다 빨리 읽”으며 빈틈없는 이야기와 구성을 만들도록 훈련받은 그들이 정해진 틀 안에서만 글을 쓴다는 사실에서 정규 교육의 폭력성을 지적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죽거나, 죽이는 글”을 쓰지 않는 선생님의 ‘부드러운 마음’ 속에 시에 대해 이미 굳어버린 생각이 자리 잡혀 있다는 사실을 보는 일만큼이나 이 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점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소녀들의 유연함과 소녀들이 진정한 ‘시’를 쓰게 되는 것이 이러한 경험 이후의 일이라는 아이러니다. 

   소녀들은 선생님이 발표한 시가 “턱없이 단순하고 유치하다고 느끼지만/동시라서 그렇겠거니 싶”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시를 쓰는 와중에 비로소 자신의 연주를 시작한다(“음악이 시작된다”). 이때 발생하는 음악은 제목에 적시된 대로 ‘헤테로포니’이다. 같은 선율을 여러 사람이 변주하여 동시에 연주하는 이러한 형태의 음악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은 봄에 피는 꽃에 대해 쓰는 시를 좋은 시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쓰고 가르치는 교사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동안, 학생들은 이를 존중하되 그것에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부딪혀 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는 방향으로 성장하였음을 시사한다. 비록 문예반 교실에서는 여전히 선생님의 방식대로 글을 쓸지 몰라도 소녀들은 이미 그것을 넘은 상상 체계를 저마다 갖추었기에 교사와 함께 사실상 어느 하나의 연주가 힘을 갖지 않는 수평적인 연주를 한다. 이러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이곳은 정규 교육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이상이 실현된 교육 현장으로 보인다. 

   이는 학교의 본질적인 역할과 기능이 학생을 안전하게만 보호하거나 맞벌이 학부모를 위한 임시 거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어 그가 독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 이와 더불어 그 목표와 가치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학교의 본질이 학생의 ‘성장’에 있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이러한 학교의 본질적 기능에 대해 합의하고 그에 맞게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이 아닐까. 이는 교사의 위기와 공공 돌봄의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생각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교육과 보육의 위계에 대한 소모적 논쟁을 지속하기보다는 ‘돌봄’에서 한 단계 더 구체화된 ‘성장 돌봄’의 맥락에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최우선의 장소가 학교인가에 초점을 맞춘 보다 신중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그간 ‘보살핌의 윤리care ethics’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보살핌 윤리에서 말하는 보호”의 개념에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4) 통제(걱정, 잔소리, 주의 깊은 관찰) 없는 보호는 없으며, 보호는 통제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그의 말에 기댄다면, 교사의 노동은 “책임, 보호자의 성찰과 인지, 협상 능력 등을 요구하는 몸 전체가 동반되는 노동”으로 바라보아져야 하며, 단체로 이루어지는 정규 교육 형태의 특성상 발생할 수 있는 (지배가 아닌) 통제는 임유영의 시에서 보듯 학생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성이 제기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이질적 존재들이 모인 학교에서는 모든 갈등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 본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임유영의 시에서 확인했다. 또한 이러한 성장에서 중요한 것은 권리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중이며, 전인격적 성장을 포함한 그들의 성장이 바로 이러한 존중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교권의 회복을 학생의 인권조례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얼마나 빈곤한  상상이며 현장과 동떨어진 것인가를 다시금 되짚어 보게 한다. 교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최우선의 방법은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의 숨소리와 말소리를 들으며 실질적인 관계를 맺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관계를 “교환과 계약”, “권력관계”5)와 같은 큰 말들로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 상호 활동을 중심으로 관계를 다시 살펴보고, 상호존중의 가치를 재구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지금 우리가 확실히 감각할 수 있는 돌처럼 여겨진다.

 


   5. 꺼지지 않는 불을 위하여


   그런데 이런 결론으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아직 김리윤의 마지막 두 연이 남았다.  


   땅이 부족하다면 불을 지르거라. 불에 잡히지 않도록, 잡혀도 상관없도록 먼 델 보도록 해라. 불타며 넓어지거라. 너른 불 속을 느긋하게 걸어가거라. 멀어지거라. 불이 집어삼키는 것들을 다 잊거라. 불이 가진 전망은 지나간 자리를 모두 집어삼킬 수 있다는 잠재력 속에 있는 법. 불을 헤집고 그것을 들여다보거라.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제도 오랜 옛날이다.*

   오늘 그 섬 보여?

   누군가 묻고

   조그맣고 납작한 자연이 자신을 복원한다.


   *다와다 요코, 『지구에 아로새겨진』, 정수윤 옮김, 은행나무, 2022.


― 김리윤, 「전망들」(『현대시학』 2023년 1-2월호) 4∼5연


   나아갈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을 포기한 앞선 목소리와 달리 땅이 부족하다면 불을 질러 땅을 확장하라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하며 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저 말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무턱대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이곳을 변화하게 하는 일에서부터 전망을 시작하라는 말로 들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놓은 불에 자신이 잡힐 수도 있겠지만 “먼 델 보”며 그런 위기를 감수할 때 보다 확장된 세계가 마련될 수 있음을 이 새로운 목소리는 여러 문장들로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저러한 문장들이 앞서 한 말을 번복하는 방식으로 씌어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불타며 넓어지”라거나 “너른 불 속을 느긋하게 걸어가거라”와 같은 권유는 “멀어지거라”라는 말에 의해 뒤집어지고, “불이 집어 삼키는 것들을 다 잊거라”라는 말은 “불을 헤집고 그것을 들여다보거라”라는 제안에 의해 전복된다. 얼핏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제언들은 그다음 연에 제시된 대로 “어제 있었던 일”도 “오랜 옛날”이 될 수 있을 만큼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계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로 읽힌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보이는 섬이 ‘내일’도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 장담할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의 관점을 고수할 수 없으며, 고정된 해결책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껏 옳다고 여겼던 생각들에 불을 지르며 나아가면서도 다시 불태웠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하는 번복의 반복, 전개와 멈춤의 변증법을 통해 사유의 갱신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근 개봉한 <괴물>(2023)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우리의 사유를 추동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미나토(쿠로카와 소야 분)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 분)를 둘러싸고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학생, 그리고 영화와 관객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는 아동학대, 돌봄과 교육, 그리고 교사의 위기와 관련하여 여러 생각해 볼 거리가 있지만, 일단 영화 속 ‘불’의 이미지에만 주목해 보자면 영화는 화재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우리를 ‘겪게’ 한다. 영화는 미나토의 엄마(안도 사쿠라 분), 호리 선생님(나가야마 에이타 분), 미나토의 시점으로 구성한 각 부의 시작에 걸스바의 화재 장면을 배치하여 이야기의 시작점을 표지하는 한편, 이전의 시점에서 행해졌던 이야기들을 무화함으로써 우리가 앞서의 이야기를 태우고 다른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가운데, 지워버린 앞선 시점의 이야기들을 불을 헤집고 다시 소환하여 재조합하는 작업을 반복하게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간 보지 못했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김리윤과 고레에다는 불의 상상을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사유할 필요를 제기하며 어제를 오늘로 두지 않고 사유가 이어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마치 예술의 역할은 저러한 불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함께 사유하는 장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듯. 

  나는 연재를 시작하며 나의 문학 읽기가 사건에 상당 부분 빚져 왔음을 고백한 바 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사건과 문학이 각기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하는가를 김소연의 시를 빌려 말해 보고자 한다.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면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 김소연, 「흩어져 있던 사람들」(『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3) 부분


   김소연의 시에서 뿔뿔이 흩어져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은 것은 분명 말벌이 들어온 사건이었다. 저 사건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관련된 저마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말벌을 잡을 방도를 제시하는 이도, 말벌의 위험을 경고하는 이도, 말벌을 만났던 이전의 경험담들을 늘어놓는 이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말벌은 보이지 않고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말벌과 벌집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게 될 것이고, 동일한 상황에 놓인 다른 이들과 연대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말벌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이 해야 하는 일은 이 이야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것, 그러니까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벌집을 가지러 2층으로 간 시 속 “선생님”처럼, 돌봄과 가족과 학교와 공공 정책 등 여러 담론들의 층을 넘나들며 앞서의 불행한 사건들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점차 꺼져 가는 불을 지피면서 불 사이를 헤집어 보는 일, 불이 꺼지지 않도록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일, 이것이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이 해야 할일이다. 이 글이 아주 작은 불이라도 지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끝>


1) 2회 연재 글에서 3, 4장으로 오기한 장 번호를 각각 2, 3장으로 바로잡는다.
2)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 이나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94-95쪽.
3)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같은 글, 96쪽.
4) 정희진, 「보살핌 윤리와 페미니즘 이론」, 『돌봄이 돌보는 세계』, 동아시아, 2022, 250-252쪽 참조.
5) 정희진,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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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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