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문학이라는 장르 소설
- 작성일 2016-11-01
- 댓글수 0
[비평in문학] 2016.11.3. 최종수정 되었습니다.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순문학이라는 장르 소설
- 한국문학과 문학성에 대한 단상
노태훈
문학의 깊이와 좋은 작품
돌이켜보면 최근 한국 문학의 장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새삼 놀랍다. 지난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 이후로 한국 문학이라는 어쩌면 ‘텅 빈 기호’를 구축하고 있던 여러 상황들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단순히 한 작가의 표절 시비를 넘어서 한국 문학계 전체의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문학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했는데, 별안간 다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많은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신경숙 작가의 사태 이면에 사실은 한국 문학의 열등감 같은 것이 깔려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세계로부터의 ‘인정’은 한국의 독자들이 기다려 온 사건이기도 했다. 또 시단에서는 젊은 시인들의 약진으로 몇몇 작품이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모처럼 활기를 띠었고 문예지들은 새로운 옷을 입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근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한국 문학이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근본적인 변혁의 씨앗이 될 조짐이 보인다.
한국 문학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문단이라는 시스템의 문제를 자주 언급한다. 등단이나 수상 제도, 문예지와 출판사, 학계 및 평단의 권력 문제 등은 늘 빈번하게 거론되는 사안들이다. 그 공고화된 체제 내에서 얼마나 많은 폐해가 발생하는지는 여기에서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문단이라는 구조의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제도를 개편하고 지면을 쇄신하며 대안을 찾으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이제 막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연히 더 중요한 것은 한국 문학이 생산해 내는 텍스트의 질이다. 시스템의 폐해를 날카롭게 직시하고 거기에 복속되지 않은 채 그 바깥에서 자유롭게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반드시 좋은 작품을 써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문단에 철저히 복무하는 - 그것이 가능하다면 - 작가의 작품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즉 문학장의 문제와 문학 텍스트 자체의 문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그 둘이 별개일 수는 없다. 텍스트는 이를 둘러싼 유무형의 조건들에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통해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문학적’이라는 수사로, 혹은 ‘문학성’이 높다는 평가로 길어 올릴 때는 작품 자체의 문제로 결국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한국 문학은 재미가 없다’, ‘한국 문학은 깊이가 없다’, ‘한국 문학은 난해하다’와 같은 한국 문학이 생산해 내는 텍스트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들, 아니 편견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그 반복되는 수사 속에서 사실 우리는 좀 지쳐 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가리키는 말인데, 생산자들은 작품이 읽히지 않아서, 소비자들은 읽을 작품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이 세계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 문학이라는 범주에 대해 총체적으로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작가들이 생산해 내는 텍스트에 대한 개별적인 선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개별적인 선호의 집합이 총체성의 기준이 되기도 할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 ‘좋은 작품’은 우리가 늘 기다리는 어떤 것이다.
물론 당장 지금 한국에서 쓰이는 시와 소설에는 좋은 작품이 없냐고 물으면 우리는 당연히 있다고 대답하며 각자의 목록을 내밀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목록은 다를 수 있지만, 망설이고 고민한 끝에 주저하다가 작성하게 되겠지만, 리스트는 분명히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문학에 대한 저 편견들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개별 작품들에 대해 선호를 따져 내세울 만한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마음 놓고 이런 작품들이 있으니 한국 문학은 의미 있는 예술 장르라고 말하기는 아주 어렵다. 꼭 한국이라는 공간·언어적 규정이 아니어도, 문학이라는 이제는 ‘종언’된 장르가 아니라도, 어떤 세계든 무슨 예술이든 당대의 비판에 직면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한국 문학에 관해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소설 쪽에 집중해 보려 한다. 거기에 한국에서 생산되는 여러 소설 장르 중 소위 순문학으로 범주를 더 좁히려고 한다(앞으로 한국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장르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한국 문단 소설’을 가리킨다).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순문학’은 당연히 ‘문단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에 이 장르가 가장 ‘순수’하다는 가치 평가를 포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대체할 말이 없을 따름이고, 내가 말할 수 있는 분야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순문학은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가 주로 문예지에 발표하고 또 보통은 문예지를 발간하는 출판사들로부터 출간하는 작품을 말한다. 작품 자체의 성격보다는 작가의 탄생과 활동 무대로 구획되는 측면이 강하기도 하고, 장르 문학과의 경계도 많이 희미해진 터라 순문학만의 특징을 적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문학은 서사의 힘보다 문장의 깊이를 더 중시하고, 이야기 자체의 재미나 흥미보다는 이야기로부터 삶이나 인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사유에 가까워지려는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장르 문학이 공상과학(SF), 추리,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탐정, 로맨스, 팩션 등의 장르 자체의 소재나 문법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픽션(fiction)이라고 하지 않고 문학(literature)이라고 명명할 때, 장르 문학의 그것과는 층위가 다른 기준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장르 문학이 그 장르의 문법을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 또 얼마나 새롭게 상상해 내는지에 따라 작품의 가치를 평가받는다면, 순문학은 그 작품이 얼마나 ‘깊이’를 확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따름이다. 순문학에서의 서사성이란 오로지 그 문학적 깊이를 확보했을 때라야만 의미가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꼭 소설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쪽이라면 영화나 만화, 드라마나 웹툰 등 다양한 장르들이 훨씬 능숙하고 월등하며, 이미 꽤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장르 소설도 많다. 그러므로 한국 문학은 재미가 없어서 안 읽는다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반응에 반박할 이유도 없다. 원래 순문학이라는 것은 때때로, 아주 가끔 재미있을 따름이지 대체로 모두에게 고된 예술이다. 그러니까 치명적인 것은 ‘깊이가 없다’는 말이다.
한국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진지하게 출판된 순문학 텍스트가 그저 ‘이야기’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장르적’으로 실패다. 장르 소설들이 특유의 장르적 문법이나 구상된 세계의 정합성, 이야기의 밀도 등으로 독자의 평가를 받는다면 순문학은 ‘문학성’이 기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학성이라는 말은 얼마나 모호한가. 그것은 우리 각자의 주관적인 판단과 결부되어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 어떤 이에게는 아름다운 문장과 묘사가, 또 어떤 이에게는 지적 자극과 통찰력 있는 작가의 관점이, 또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주는 울림과 감동이 그 기준일 수 있다.
지금 한국 문학에는 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꽤 꾸며진 문장을 통해 어느 정도의 사유로 포장한 작품이 차고 넘친다. 순문학 작가들은 장르적으로 대개 잘 단련되어 있고, 여러 번의 ‘심사’를 거치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담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그중에서 ‘좋은 작품’을 찾기란 정말 어렵다. 그것은 문학성이라는 모호한 각자의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되는 한국 소설들은 늘 읽고 나면 딱히 단점을 지적하기는 어려운데, 또 드러내 지지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와도 관련이 없지는 않을 텐데, 2000년대의 문학이 표면적으로나마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있었다면 2010년대 이후로는 끝없이 파국과 절망으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서 천국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작품의 경향을 획일적으로 만든 측면이 있고, 누가 더 처참하게 이 세계를 그려내는지가 ‘깊이’라고 여겨진 듯도 하다. 이 방향의 천착은 물론 황정은이나 김사과 같은 탁월한 작가를 낳았고, 최근 한국 문학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 난관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이는 최근 몇몇 작가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지돈, 오한기, 이상우
이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별다른 설명 없이 ‘후장사실주의자’라고 쓸 수 있게 된 작가들이 우선 그렇다. 2010년 이후 문단에 등장한 이들은 명백히 배수아, 김태용, 한유주, 정영문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 문학의 한 흐름 아래에 있다. 사건을 전달하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소설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시도는 늘 유효하지만, 때때로 지독한 실패를 동반하기도 한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을 지켜볼 가치가 있다면 그 실패를 긍정하고, 오히려 실패하기 위해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작가들은 최근에 첫 소설집을 발간했는데,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어떤 문학적인 것, 문학성이라는 관념을 상정할 때 그것이 종잡을 수 없이 모호하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은 매번 문학성과 싸운다. 정지돈, 이상우, 오한기의 소설집은 그런 투쟁의 기록이며, 그래서 문학적이다. 『내가 싸우듯이』, 『프리즘』, 『의인법』은 제목에서부터 이들의 문학적 태도를 드러낸다. 정지돈은 참고문헌과 색인으로 가득한 자신의 소설집에서 “문학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눈먼 부엉이」, 『내가 싸우듯이』, 문학과지성사, 2016, 31쪽)라고 물었고, 오한기는 “작가의 말”(『의인법』, 현대문학, 2015, 326쪽)에서 “이런 문장들을 썼다”고 몇 번씩이나 쓰면서 파편적인 것이야말로 자신의 스탠스임을 보였고, 이상우는 어딜 펼쳐서 읽어도, 매번 다르게 “황홀하게 분방”(「객잔」, 『프리즘』, 문학동네, 2015, 92쪽)함을 선보인다.
문학성의 관점에서 결국 작가에게 남는 것,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어떤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다.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작가는 무책임하다. 또 그것을 신비화시켜 말할 수 없음의 가능성이라는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은 더 무책임하다. 나는 이들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읽으면서야 겨우 이들이 무책임한 소설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 이들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아마 그들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문학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문학도 무책임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듯하다. 문학은 어떻게 계속 새로워질 수 있을까. 아니, 새로워져야만 하는 것일까.
김엄지
최근 김엄지가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은 꽤 흥미롭다. 첫 소설집인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 이후 장편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로부터 시작된 ‘이니셜 소설’이 그렇다. 그는 A, B, C, D, E 등을 등장시키고 이들의 일상을 건조하게 그려낸다. 인물들 간의 관계나 특별한 사건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 자신의 가치 판단이 배제된 문장들로 소설을 채워 나간다. 연작으로 발표되고 있는 「예지」 시리즈도 그러한데, 그 단순한 반복들이 아주 미세한 차이와 함께 계속되면서 어느새 다채로워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작가의 꾸준한 시도가 문학적 책임감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 지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의미 있는 지점들을 생산해 내고자 하는 김엄지의 작업은 신뢰를 준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암울하고, 착잡하고, 답답했는데 끝내 개운치 않은 그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양선형, 민병훈, 천희란, 김남숙
이제 막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신인들 중 양선형, 민병훈, 천희란, 김남숙의 작품들을 유심히 읽고 있다. 이들의 문학적 강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겠다. 「종말기 의료」(《문예중앙》, 2016년 봄호)에서 양선형은 시작과 끝은 있으나 나아가지 않는 소설을 쓰려고 헀던 것 같다. 불구의 ‘그’와 그를 돌보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모호한 세계 속에서 그들이 형성한 독특한 ‘관계’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고르고 골라 쓴 티가 역력한 단어와 문장들이 속으로 와 닿지 않고 그냥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민병훈의 작품도 문학적으로 쓰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이 말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양선형의 작품과 같이 실려 있는 「임무위스키」(《문예중앙》, 2016년 봄호)나 「붉은 증기」(《현대문학》, 2015년 12월호)는 잔뜩 힘을 실은 이야기이지만 왠지 단조롭다. 「붉은 증기」는 요약될 수 없는 복잡한 이야기이며, 「임무위스키」는 상관의 시체를 운반하는 부하와 운전기사의 이야기여서 그 자체로 단조롭지는 않은데 말이다. 혹시 의도적으로 맥락과 앞뒤를 다 소거해 버린 자리에 사유와 묘사를 가득 채워 넣으면 세련된 소설이 된다고 믿는 걸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작가가 보여주는 것 같다.
천희란은 이미 꽤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창백한 무영의 정원」(《현대문학》, 2015년 6월호), 「영의 기원」(《현대문학》, 2015년 12월호)이 인상적이었으며 「경멸」(《문학들》, 2016년 봄호)도 그랬다. 이 작가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천착해 보려는 노력이 돋보이는데, 문학적 깊이에 대한 강박이 꽤 심해 보인다. 이를테면 「경멸」에서 필멸과 불멸 사이에서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 한 인물의 이야기에 이토록 많은 사유와 문장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독자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적은 서사’일지도 모른다.
김남숙은 초기의 황정은이나 최진영을 떠올리게 하는 작가이다. 「자두」(《Axt》, 2016년 1/2월호)와 「파수」(《문학동네》, 2016년 가을호)가 인상적이다. 완전히 세계로부터 괴리된 듯한 ‘어린’ 인물들에 대해 꽤 깊이를 확보했다는 느낌을 줬다. 나이가 많지 않은 작가인데 질척이고 끈적이는 삶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거기에서 출렁이는 온갖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서사물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사는 놀랄 만큼 다양한 장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 각각은 마치 어떤 재료라도 인간의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는 듯이 다양한 매체와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라는 구분과는 상관없이,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인용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롤랑 바르트의 「서사의 구조적 분석 입문(An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 서두를 어쩔 수 없이 가져왔다. 한국에는 이야기의 힘으로, 이야기의 재미로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가도 많이 있다. 좋은 이야기꾼은 당연히 훌륭한 문학 작품을 생산한다. 그들은 ‘삶=이야기’라는 생각으로 서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내려고 한다. 그것은 당연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혹시 ‘삶≠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시작과 끝이 있는 늘 이어진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소설가들은 이야기가 꼭 오래 남아 있지 않아도, 금세 휘발되어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소설을 읽는 순간의 사유와 분위기와 이미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런데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인 이야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오한기의 소설집에 실린 금정연의 문장을 살짝 바꿔 본다. ‘그들’은 언제나 온다. 다만 지나치게 먼저 왔거나 너무 늦게 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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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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