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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3)

  • 작성일 2023-12-01
  • 조회수 1,083

   안전의 방향 (3)


홍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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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가을 『자음과모음』에서 기획한 좌담은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1)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발표되었다. ‘여성의 것’이라는 소유격을 가정하게 된 최근 문학장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좌담은 작가와 작품이, 현실 세계와 작품 속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최근의 경향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2021년에 발표된 박서련의 「그 소설」과 김보경의 「실종」을 2023년의 지금 다시 중요하게 읽게 되는 것은, 어떤 논의의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패턴을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라는 의문문의 맥락에서 문학과 현실을 분리하거나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데에는 어떤 면에서 마찬가지로, 안전을 향하는 방향성이 거듭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언어로써 창작할 때는 수많은 기제들 속에서 내적 검열을 하고 그 안에서 대결하며 나오는 것이 결국 내 창작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6년 이후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식하게 함으로써, 내가 쓰고 재현하고 있는 언어들이 이 세계의 오염된 언어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어디에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했다고 봐야죠. 이건 아주 유의미한 전환이었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장소를 열어 줬다고 여깁니다.(35)


   “문학적 현실을 실제 현실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인물들에게 실제 현실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도덕성을 강요”(34)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우려 섞인 입장을 드러내는 발언들에 이어, 하재연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가능하게 한 ‘전환’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정리하고자 한다. 하재연의 발언에서 2016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전환’이란 현실 세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문학 창작에 ‘검열’이 작동하게 만드는, 그렇게 모든 언어가 동질해지도록 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검열’이라는 단어 대신 ‘어려움’이나 ‘갈등’과 같은 표현을 선택한다. ‘전환’을 이해하는 언어가 ‘검열’이 될 때 초점은 문학적 현실과 실제 현실, 문학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의 밀착을 ‘강요’하는 문학 ‘외부’ 현실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을 ‘어려움’이나 ‘내적 갈등’과 같은 언어로 소화할 때 초점은 창작자 혹은 문학의 ‘내부’ 동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적 움직임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문학의 언어를 현실의 언어와 분리하여 “안전하고 안온하”(35)기를 바라는 태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무해다정안온”(30)을 지향하는 최근 문학적 재현의 방법에 대해서도 하재연은 어려움과 갈등, “고투”(36)가 필요함을 거듭 강조한다. 현실과 분리된 자리에서든 현실과 밀착한 자리에서든 ‘갈등’ 없이 문학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 태도가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전환’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 그러한 판단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16년 이후 그간의 언어를 반성하고 앞으로 어떤 언어로 문학의 장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기점을 의미화하는 데에도 관련한 진단이 늘 중요하게 언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좌담 안에서 하재연의 언어가 돌올하게 읽히는 이유는, 익숙한 방향성을 드러내는 언어들이 현재 언어의 장에 편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적 현실과 실제 현실이 분리되어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감각은 2016년 이전에도 ‘문학’에게 고유한 공간을 부여하는 전략으로 꾸준히 활용되어 왔고, 2016년 이후에는 일종의 “도덕 매뉴얼”(33)로 인해 작가가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되고 궁극적으로 문학적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우려하는 언어로 연결되어 왔다. 그러한 언어는 문학의 세계가 일방적으로 비난받거나 과도하게 ‘취급’받을지 모를 가능성을 거부하기 위해 분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내 얘기」에 대하여 ‘나’가 거듭 반복해야 했던 언어2)와 닮아 있기도 하며, 좌담에서도 거듭 이야기되듯 폭력을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안전하고 아름다운 윤리를 말하는 경향의 언어와 닿아 있기도 하다. 이런 언어들은 재현된 현실과 현실을 분리하는 대신 두 현실이 분리될 수만은 없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지만, ‘안전’에 대한 내적이거나 외적인 요청 속에서 문학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검열’을 우려하는 언어와 유사한 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이유와 방식으로 문학과 현실의 거리를 조정해 보려는 움직임들은 자신이 행하는 폭력이나 자신에게 가해질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으며, 폭력으로부터 문학을 지키는 방법론으로서 유의미하게 실천되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핵심은 문학과 현실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가 아니라, 무언가를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안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점이 같다고 해서 각각이 추구하는 안전의 방향이 같은 것은 아니다. ‘검열’에 대한 거부를 앞세우는 분리가 문학을 ‘문학’으로 ‘갈등 없이’ 보존함으로써 텍스트와 작가의, ‘문학’의 안전을 보장하는 전략이 된다면, 자신의 경험에 관해 말하고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 분리를 앞세워야 하는 ‘나’들에게 분리는 텍스트와 작가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텍스트와 작가를, 문학을 근본적으로 자기 부정을 반복하는 지점에 버려두는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떤 위치에 결박되어 있는 상태의 연속이며, ‘갈등’을 세계가 아닌 개인의 몫으로 축소시켜 문학과 현실을 ‘갈등 없이’ 분리된 상태로 보이게 하는 안전의 관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해하고 다정한 문학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경향 역시도 그렇다. 현실에 대해 무책임해 보일 수도, 혹은 지나치게 현실을 의식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무해함’이란 어느 측면에서든 유해하지 않은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무엇이 ‘유해’한가를 끊임없이 검토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으며, 그 무게를 세계에 돌려주지 않기를 택함으로써 ‘갈등’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한다. 그때 ‘갈등’은 ‘무해함’에 의해 해소되거나 방지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로 인해 개인에게 윤리적 책임을 오롯이 부과하면서 무해한 것이 곧 안전한 것이라는 환상을 다정하게 작동시킨다.

   그렇게 ‘어려움’이라는 상태를 관통해 나가는 것이 문학을 비롯한 현실 전반이 아니라 낱의 개인이어야만 할 때, ‘어려움’은 ‘안전’에 대한 감각을 더 절실히 요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런 때 ‘갈등’이어야 할 것은 자기 부인으로서의 ‘검열’로 대체되어 버리기도 한다. ‘갈등’을 지속하는 상태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하재연의 언어가 거듭 ‘검열’이라는 문제를 상대하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어떤 ‘나’들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방식으로만 들릴 수 있게 될 때 페미니즘 리부트로부터 촉발된 ‘전환’은 어쩌면 다시금 역사화 되지 못하거나 ‘실종’될 수 있으며, 그 ‘실종’을 방법론으로 삼아 안전하게 지켜지는 문학의 영역 안에서 많은 위험과 위협은 무언가를 침묵시키고 배제시키는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종’이 일종의 패턴이 되어 갈 여지가 있다면, 실종시키지 않고 실종되지 않기 위해 상대해야 할 것은 바로 안전하고자 하는 마음, 특히 문학의 고유한 자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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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련의 「그 소설」에서 ‘나’는 자신이 습작 시절 썼던 소설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한다. “도용된 내 소설을 남의 이름과 함께 본 독자들은 그 소설의 주인공 얼굴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그게 내 소설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떠올렸을 리 없겠지?”(407) 

   연결된 두 물음은 앞서 지적한바 “여자 소설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이따금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얼굴로 상상된다는 것”(406)에 대한 저항과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내 얼굴과 내 얘기”(407)를 쓰겠다는 의지 사이에서 반복된다. 이 반복에는 나의 소설이 곧 나의 얼굴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나의 소설이 곧 나의 얼굴만큼 선명히 나의 것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다. 이때 두 마음의 결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전자의 마음은 자신이 만든 소설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기를 원하는 마음과는 다르고, 후자의 마음은 자신의 소설이 다른 모두와 단절된 고유의, 독창적인, 독자적인 세계로서 돌출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지 않다. 두 물음 사이에서 ‘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의 맥락에서 소설을 썼을 때 그것이 자신의 현실경험과 현실인식을 구체화해 낸 것이기를 바라고, 그러한 방식으로 타인의, 사회의, 법의 현실들과 만나기를 바라며, 그것이 타인에게 특정한 ‘취급’을 받고, ‘망신’을 당하며, 그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마저 ‘실수’로 여겨지게 되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이 바람은 여성 소설가가 쓴 소설의 얼굴이 작가의 얼굴과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는 상태를 꿈꾸는 듯 보이지만 사실 두 얼굴이 분리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특정한 프레임으로 독해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향한다. 그런 ‘상태’는 문학을 대하는 방식, 작가를 대하는 방식이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늘상 재검토하고 반성하는 세계의 움직임을 요청한다. 이때 ‘움직임’이란 특정한 사람이나 텍스트에게 안전한 공간을 보장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외려 특정한 사람과 텍스트를 대상으로 ‘안전’의 테두리를 만들어 온 시간의 정체를 묻고, 그 경계의 ‘안팎’에서 여전히 ‘안전’에 대한 욕구를 작동시키는 오래된 문법의 위협을 정확히 들여다보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나’의 바람이 도달하는 지점은 ‘이거 소설이잖아’로 ‘나’를 보호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게 사실이면 왜 안 되는지, 왜 여전히 어떤 경험은 ‘나의 것’으로 진술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안전을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는지, 그 가운데 어떤 배제와 소외의 구도가 반복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묻는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전환’을 정확하게 의미화 하는 데 중요한 것은 ‘갈등’을 차단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사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안전’의 공간적 경계를 만들어내려는 분리의 방법론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네 소설 소설 아니라고. 넌 낙태충 살인자 년이라고”(417) ‘폭로’하겠다는 말이 유효한 위협으로 여겨지게 되는 조건과, 그 앞에 “마음대로 해봐.”(418)라는 언어를 새기는 태도 사이에 놓여 있는 ‘갈등’을 정확히 언어화 하는 작업과 관계되어 있다.

   위협하는 언어는 확보되어 있는 안전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안전한 영역이고 어디서부터는 위험해질 영역인지 구도를 만들어 타인을 그 구도 안에 강제로 집어넣는 방식을 취한다. 그 언어의 자장 안에서 위협당하는 사람은 주어진 ‘안전’의 영역 안에 있기를 선택하도록 내몰리고, 그런 ‘선택’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앞으로의 시간이 볼모로 잡힌 상태로 주어진 다이어그램 중 특정 ‘지대’에 안착하기를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안전-위협의 구도 속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간을 지킬 수 있는 부분적 공간을 택하는 일처럼 보이고, 실제로 안전하다는 감각은 공간적으로 보장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핵심은 사실, “마음대로 해봐”라는 말처럼, 볼모로 잡혔던 시간을 위협하는 자의 손아귀로부터 내 손아귀로 다시 옮겨 오는 일, 혹은 애초에 시간을 볼모로 잡은 손이 실제 손이 아님을 기억해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위협함으로써 안전을 찾게 하는 언어의 틀 속에서 시간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틀 자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시간의 힘을 향해 나아가는 것. 어떤 어려움과 갈등이 도래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도 타인이 마련한 안전의 테두리를 거부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전환’은 사라지지 않는 움직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척 안전하지 않겠지만, 시간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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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은 흔히 공간적 거리의 문제로 이해된다. 「먼바다 쪽으로」3)의 ‘현태’와 ‘종희’가 가능한 위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기 위해 인적이 드문 ‘먼바다 쪽으로’ 가는 것처럼 거리를 두면 안전할 것이라 여겨지기도 하고, 「보편 교양」4)의 ‘곽’이 교실 안에 머무는 것처럼 무언가로부터 안전한 자리에서 말하는 사람은 공간적으로 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2017년 초 발간된 임솔아의 시집 속 시를 다시 읽어 볼 수도 있다. 숭례문이 불타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카트만두에서 4천 명이 사망하고 있다는 소식에는 눈물 흘리지 않는 이유가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라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위협이나 위험이 ‘멀리에’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먼’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티브이’ 같은 장치는 일상을 내내 안전하게 지킨다.


   나는 키즈 과학체험을 보며 운다. 소의 배에 구멍을 뚫고 아이들에게


   손을 넣게 한다. 소야. 커다란 눈을 껌뻑이는 소야.


   아이들이 배에서 꺼낸 곤죽이 된 음식물을 허연 침을 뚝뚝 흘리며 핥는 소야.


   나는 콧물을 풀고 눈물을 닦으며 티브이를 본다.


   지금은 긴급속보에서 카트만두가 무너지고 있다.


   사망자가 8백 명이라더니 이 시를 쓰는 동안 4천 명으로 늘었다.


   왜 울지 않아?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는 눈물은 안 난다고 한다.


   티브이에서 본 비극을 모아 나는 지금 시를 방영한다.


   뛰어난 인류를 상상한 독재자가 학살을 자행한 다큐를 보았고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중심가로 질질 끌려가며 죽어갔고


   수백의 사람들이 구경만 했다는 뉴스를 감자칩을 먹으며 메모했다.


─ 임솔아, 「티브이」5) 부분


   “티브이에서 본 비극”들은 티브이 화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뉴스나 다큐가 선별한 장면과 정보만을 전달받는 조건 속에서, 겹겹으로 거리감을 내포하는 채로 수신자에게 도착한다. 지근거리의 사건도 티브이를 통해 전달되면 현장을 촬영하고 저장하고 편집하여 전달하고 보도하고 송신하는 방식으로 멀리 에두르게 되고, 멀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은 지리적 거리에 국경과 정체성 감각으로 분류되고 분리되는 심정적 거리감을 덧입어 지리적 거리보다 더 멀리 돌아 전달된다. 그런 티브이의 공간 법칙에 기대어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중심가로 질질 끌려가며 죽어갔고//수백의 사람들이 구경만 했다는 뉴스를 감자칩을 먹으며 메모”하는 일상에서, 현장에 있는 ‘수백의 사람들’과 그 소식을 전하는 뉴스 스튜디오와 뉴스를 보며 메모하는 어느 공간의 ‘나’의 위치는 모두 ‘여자’의 현장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위기감을 느낄 때 한 걸음이라도 멀리 물러서려는 본능처럼, 안전은 공간적 거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안전은 기실 시간의 문제이다. 같은 공간에, 같은 현장에 있어도 그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자신이 연루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어떤 현장의 시간이 자신의 시간과 무관하다고 혹은 무관해야 한다고 여길 때 안전을 향한 본능 혹은 마음은 발동된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처럼 시차가 생기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현재에서도 누군가의 현재와 나의 현재 사이에 선을 그어 시간을 분리해 내는 방식으로 그렇다. ‘동시同時’라는 말을 거부하는 그 시간적 거리감이 머리채 잡힌 여자의 시간에 개입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안전하게 지키며, 그 거리로부터 ‘티브이’의 공간적 거리는 가능하게 된다. 이를테면 나의 몸은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 키즈 과학체험에 동원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서 있는 땅은 흔들리지 않으며, 학살은 다큐멘터리 속에서 재현되는 과거일 뿐이고, ‘티브이’는 그 시간적 단절을 공간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장치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티브이에게 말을” 거는 일은 공간적 거리를 좁힐 때가 아니라 시간적 거리를 좁힐 때 발생한다. 멀리 카트만두에서, 이미 지나간 시간을 촬영하여 송신된 영상을 보면서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라고 임솔아 시의 화자가 말을 걸 때, 그 ‘말 걺’에는 영상 속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의 시간과 티브이를 보는 사람 사이의 시차가 없다. 그들은 동시를 사는 중이며, 그때 ‘동시’의 시간은 어떤 장소에서든 안전하지 않다. 정확히는, 어떤 장소와 거리에서도 ‘동시’를 사는 마음은 스스로 안전하고자 하지 않는다. 안전을 선택할 때 시간은 분리되고, 나의 시간이 안전할 때 나의 공간적 위치 역시 안전하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시간이 ‘실종’되지 않는 일이 중요한 나는 모르지 않고 알기 때문이다.

   티브이 속 화면에 비추어지는 이미지가 타인이 아니라 혹은 다른 생명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면 어떨까. 위험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리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일부를 혹은 분리된 현재를 지키고자 할 때, 그 안전은 자신의 또 다른 일부를 지우고, 지워질 위험 속에 놓아두면서, 조건적으로만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 것 혹은 위협이 된 것을 상대하지 않고, 외려 그것이 제공한 틀 안에서의 시간만을 연장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안전의 이름으로 부인되는 자신에게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말을 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살 수 있음’이라는 시간에 관한 가능성은 어떻게 안전의 거리를 가로질러 부인하는 나와 부인되는 나를 ‘동시’에 있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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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그 유래와 위치를 알리지 않은 채, 접근을 거부하면서 주어진다. (...) 법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마치 법은 역사가 없다거나 있다 해도 역사적 현시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자신을 이 비역사의 역사에 매혹되고, 자극되고, 불려지게 놔둔다는 것이다.6)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반복하며 ‘법’에 대해 말하는 글 「법 앞에서」에서 데리다는 ‘법 앞에서’라는 제목의 ‘앞’을 공간이 아닌 시간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카프카의 소설은 ‘법’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법 앞’의 문지기에게 가로막혀, 거듭 오늘이 아닌 나중을 기약하며 그 자리에서 일생을 보내다 숨을 거두는 짧은 이야기이다. 소설은 언뜻 ‘법’의 안과 밖, 입구와 통제선의 문제를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소설에서 공간의 법칙이 아니라 법칙 자체가 개시되는 장면을 본다. 그의 읽기에서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법’의 안쪽으로 ‘입장’하지 못하고 ‘법’ ‘앞’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유는 ‘법’이 견고히 닫혀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의 위협에 사나이가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을 무탈히 통과해 가더라도 안쪽에 더 힘이 센 문지기들이 거듭 ‘법’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문지기의 말은,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할 뿐 아니라 그의 생의 시간 전체를 통제한다. 사나이의 생을 매 순간 위협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를 항상 “지금 모피 외투를 입고 있는 문지기의 크고 뾰족한 코, 길고 가늘며 검고 뻣뻣한 수염을 자세히 살펴보”7)는 ‘응시’의 시간에, 위험의 구도를 제공한 문지기 자체의 존재성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그렇다.

   문지기 ‘앞’에 머물러 있는 사나이의 시간은 그러므로 사나이의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만들고 문지기가 부여한 문지기의 시간이며, 사나이 ‘앞’에 있는 것은 그가 시간을 관통하여 가닿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시간을 중지시키고 위탁해 버린 채로 마주하는 문지기의 “지킴 자체, 오로지 지킴일 뿐”(272)이다. 데리다는 문지기의 ‘지킴’이 그 행위의 대상으로 선재해야 할 ‘무엇’으로서의 ‘법’을 행위의 개시와 ‘동시에’ 출현시키며, 그 가운데 “현전하거나 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법 앞에서’ 지킴을 수행하는 문지기가, 그에게 가로막힌 사나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쪽의 지킴과 한쪽의 가로막힘 사이의 작용으로 함께 “이 아무것도 없음이 잘 보존”(271)되게 하는 것이다. 사나이가 문지기 ‘앞’에서 문지기의 시간에 결박될 때 둘은 ‘지킴’을 수행하는 공모자가 되며, 그 가운데 지킴과 지켜짐, 위협과 시도, 안전과 위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선다고 말할 수는 없”(266)는 비역사성의 관계에 갇힌다. 안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위협으로 발생하는 동시에 위협이 작동 가능하게 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그 가운데 시간은 법 ‘앞’, 문지기 ‘앞’에 붙박여 문지기의 시간을 사는 사나이처럼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과 분리된 채로 정지되고, 정지된 채로만 안전을 지속한다.

   그 무력해진 시간성 ‘앞’에서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자신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문지기가 부여하는 시간-공간의 논리 ‘앞’에서 멈추지 않는 것, ‘안전’의 이름으로 정지된 시간을 제 시간의 방법으로 여기며 살아가기를 최종적으로 선택해 버리지 않는 일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나이는 숨을 거두기 직전, 어째서 이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이 문에 찾아와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지기에게 묻는다. 문지기는 이 입구는 당신을 위해 정해진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입장 허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이제 가서 당신을 위한 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나이의 시간은 그렇게 정지되어 있던 채로 그 자리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렇게 사나이를 위해서만 작동하고 있던 입구의 ‘개별성’에서 문학이라는 ‘법’이 그것의 ‘앞’에 다다르는 텍스트들의 거듭되는 움직임에 의해 ‘유희’될 가능성을 본다. 이를테면 그 가능성에는 ‘시골에서 온 사나이’가 수천이 있다. 사람은 매번 문학 ‘앞’에 서고, 문지기에게 가로막히며, 그 위협 ‘앞’에서 시간을 결박당한다. 그렇게 위협과 안전의 구도는 거듭되고, 문학이라는 ‘법’은 여전히 비역사적인 공간처럼 감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움직임이 카프카의 사나이처럼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별적 사건으로 계속해서 문학이라는 ‘법’의 ‘앞’을 기웃거리며 개별의 ‘앞’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 ‘앞’들로 에둘러지는 문학은 비역사성의 방식으로 머물 수 없다. 문학이라는 ‘법’을, 그것을 발생시키고 지키는 문지기의 위협과 안전의 구도를 시간의 문제 위에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은 그 ‘앞’에 거듭 다시 도착하고 그 문법을 다시 마주하며 그것이 허용하는 시간의 구도를 재차 부수고 나오는 개별의 움직임, 그 ‘유희’이다.

   아무리 힘이 센 문지기여도 ‘법’을 내내 하나의 상태로만 보존할 수는 없음을 강조하는 데리다의 논법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법’이, 그리하여 문학이 언제나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문지기의 ‘지킴’은 언제나 위협의 방법을 택한다는 점에서 단순하고, ‘법’은 그 방법론에 기대어서만 개시된다는 점에서 역시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을 갱신해 가는 것은 개별의 실천들이다. 그 실천들 없이 ‘지킴’도 ‘법’도 작동할 수 없으며, 그것들을 시간성 위에 놓아두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논법에서 중요한 것은, ‘법’의 시간성을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실천들이 스스로 자신의 시간성을 지키고 그것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그리하여 시간의 움직임을 만드는 일이다. 이때 움직임은 ‘법’이나 문지기를 겨냥하기보다 사람 자신을, 주어진 구도 ‘앞’에 안전하게 머물며 멈추려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겨냥한다. 안전을 향하는 마음 다음으로 움직이는 것, 적어도 그다음이 있음을 잊지 않는 태도에서만 시계의 바늘은 다음으로 움직일 수 있고, ‘전환’은 비로소 가능해지며, ‘실종’되지 않으려는 마음은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을까.


*


  너무 밝은 빛은 빗방울들에 과도한 반사광을 발생시킨다 했다. 투명한 빗방울들이 별처럼 보이면 차창에 부딪치는 유성우를 와이퍼가 쓸어낼 것이고 자전거가 튀어나오며


   스톱.

   백색 라이트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자전거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영상은 황색 라이트 광고로 끝이 난다.


   그 영상을 누른 건 실수였는데

   실수는 수백 가지 버전으로 되돌아온다.

   영상은 되감기되고 슬로모션으로 다시 시작되고

   더 잔인하고 더 자극적으로 진화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멈춘다.


   나는 다음 장면이 보고 싶다. 광고든 영화든 CCTV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을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동어반복이라도 듣고 싶다.


   일기장의 두 페이지를 붙여버린 적이 있다.

   찢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쉽게 떼어낼 수 없게끔 꼼꼼히 풀칠을 했다.


   아침이 쏟아지면

   켜져 있는 불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아침이 덮쳐 오면

   나는 불을 꺼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잠을 자러 갈 것이다.


   꽉 붙어 있던 입술

   내가 야경을 보고 있었을 때 친구는 립밤을 꺼내 발랐다.

   그리고 내게도 립밤을 건네주었다.


─ 임솔아, 「손끝으로 어둠을 밀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8) 부분


   2023년에도 임솔아의 시는 화면을 보고 있다. 화면에는 위험을 재연하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되감기로 반복되고, 안전을 판매하는 광고가 흐른다. 열심히 ‘진화’하는 이 위험-안전의 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화면 속의 폭력과 무관하고 먼 자리에서 나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그런 위협이 발생하고야 마는지, 그런 위협이 어떤 위험으로까지 연결되어 버리는지, 그럴 때 위협이나 위험은 누구의 입장에서 ‘위험’으로 말해지는지 끝끝내 목도하고 따져 묻는 일이다. “황색 라이트 광고로 끝”이 나는 스크린 앞에서 황색 라이트를 구매하는 대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동어반복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은, 단단히 붙어 읽을 수 없게 된 기록을 읽을 수 없는 채로도 기억하고 바라보며 묻기를 반복하는 마음은 그‘다음’으로 어디를 향해 갈 수 있을까. “손끝으로 어둠을 밀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어쩌면 “말을 해요, 그래야 살 수 있어요,”라고 티브이에 말을 거는 일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문장을 반복하는 일은 그 자체로 ‘다음 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어둠을 밀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도 없을지 모른다. ‘장면’이라는 것이 공간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다음 장면’이 ‘새로운 장면’이 아니라 ‘다음’이라는 시간을 의미한다면, 그리하여 “손끝으로 어둠을 밀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는 평서문이 ‘다음’으로 나아갈 시간을 스스로 약속하고 지키려는 문장이 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의 반복은 그저 같은 공간을 맴도는 것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반복은 외려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와 그리하려는 마음과 그것을 현재형의 평서문으로 쓰는 힘을 불러들여 저 위협적이고 안전한 화면 위의 세계를 상대로 있는 힘껏 반복 이상의, 멈추어 있지 않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복하여, 안전은 선택이기보다 필수이고 개인이 처해 있는 조건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듭 움켜쥐어야만 하는 삶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화면을 보거냐 ‘야경’을 보고 있는 시간과 공간 어디에서고 먼 거리감은 수시로 작동하고, 그 거리감을 상대하려는 움직임에도 안전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고 있을 것이다. 위협과 안전의 구도가 “수백 가지 버전으로 되돌아”오는 구조에서라면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보고 화면에서 본 ‘위험’의 영상을 떠올리고, 그렇게 황색 라이트 광고를 떠올리게 되는 순환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유무가 아니라, 그 마음의 한계선을 찾는 일일 것이다. “더 잔인하고 더 자극적으로 진화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의 위험 속에서 이미 항상 풍경 속에 연루되어 있는 자로서 나는 나의 안락과 안전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 어떤 안전의 선까지를 스스로에게 용인하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용인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 그렇게 안전하려는 마음 자체를 상대하면서 어떻게고 안전해져 버리고 마는 세계의 위협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지금 여기의 ‘다음’에 관한 문장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때 ‘다음’이란 언제나 황색 라이트 광고 ‘다음’에 놓인다는 점과 더불어서 말이다.

1)노태훈, 심진경, 이현석, 하재연, 황인찬,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11-43쪽.
2) 박서련, 「그 소설」, 『문학동네』 2021년 여름호, 398-419쪽.
3) 김지연, 「먼바다 쪽으로」,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211-231쪽.
4)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189-210쪽.
5) 임솔아, 「티브이」,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 48-51쪽.
6) 자크 데리다, 「법 앞에서」, 데릭 애트리지 엮음, 정승훈·진주영 옮김, 『문학의 행위』, 문학과지성사, 2013, 254쪽.
7)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박철규 옮김, 『카프카 변신·화부』, 아름다운날, 2007, 270쪽.
8) 임솔아, 「손끝으로 어둠을 밀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57-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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