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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1,337

   유령의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

   - 김선오 · 안미린의 시를 중심으로 -


황사랑


   1. 유령 문학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유령은 언제나 함께였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에게 저승의 풍경을 묘사하는 엔키두의 유령부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선왕의 유령, 수많은 공포 영화와 게임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 유령이 등장하지 못하는 자리는 없다. 인간에게 유령은 죽음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타자였으며, 죽은 자를 추모하는 관습을 만들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1)

   그렇다면 지금 한국 문학장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며 이전 시기의 유령들과는 무슨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90년대까지 문학에서 유령은 대부분 한을 품고 이승을 떠나지 못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문학에 등장하는 유령들에게서 미묘한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봉준은 자신의 평론집 『유령들』에서 유령을 “이미 죽었으나 충분히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온 유령”과 “살아 있으나 시체로 간주되는 유령적 존재”로 구분하며 존재를 부정당한 후자의 유령들을 김이듬, 최금진, 안현미, 신해욱, 강성은 등의 시에서 발견해 냈다.2) 즉, 애도되지 못했기에 출현하는 유령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지만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어 계속해서 발화할 수밖에 없는 유령들이 출현한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주체와 유령 타자의 관계가 변하고 있음을 김영찬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백민석,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관심이 환상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포착했다.3) 90년대의 문학이 사회적 관심에서 밀려난, 토대가 없는 환멸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억할 때4) 2000년대의 유령 문학이 보여주는 현실로의 이행은 허무주의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수정이 윤성희와 황정은의 소설에서 애도의 작업에서 벗어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5) 이제 유령은 환상이 아닌 현실적 타자가 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2020년대의 유령들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주목했듯 최근 소설에서 나타나는 유령들은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다.6) 인간과 다르지 않은 친근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경향은 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된다. 강아지를 따라 움직이고 인간에게 말을 붙이며 인간과 같이 걷는 김선우의 “따스한 유령들”(「내 따스한 유령들」)이나 김리윤이 보여주는 “모든 거리를 초월해 가까이 있는”(「사실은 느낌이다」) 유령, 그리고 강지이 시의 화자가 “유령과 나란히 서서/손을”(「캠핑 일기」) 흔드는 모습을 통해 유령이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7)

   이토록 범람하는 유령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유령들이 있다. 김선오와 안미린이 그려내는 유령들이 그 예다. 이 유령들은 2020년대 유령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유령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시인들의 작품에선 유령과 인간이 나란히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섞여 들어간다.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을, 실체 없는 것의 실재를 보여주는 시들을 통해 앞으로의 인간과 유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8)


   2. 유령 인간과 투명한 리듬들


   김선오의 시에서 유령들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활발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유령들에 비해 인간 화자는 유령보다 왜소한 존재로 “몸은 다 사라지고”, “눈앞이 온통 거미줄”(「나무에 기대어」)인 상태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이미 죽어 있는 존재에 가깝다. 이는 2000년대의 시가 보여주었던 존재감을 부정당한 화자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선오가 들려주는 음(音)은 2000년대와는 다르다. 그는 수다스럽게 유령들의 방언을 내뱉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간과 유령을 대면시키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한계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적기 위해 한 획을 그었다. 더는 글자를 쓰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종이를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 

   밤이 되면 학생들은 하나씩 지워졌다. 숱한 밤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은 내가 처음 그은 선으로 만들어진, 녹슬고 오래된 학생이었다.


   우리는 함께 수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삼차원을 가르쳤다. 공이나 나무, 심장처럼 부피가 있는 것들, 그 속에 담기는 사랑이나 감기, 졸음 같은 것들도 가르쳤다. 선으로 된 학생은 몸의 이곳저곳이 끊어질 듯했지만 언제나 열심이었다. 총명한 선이었다. 

   (···)

   그러나 나의 주먹은 종이 밖에서 무언가 쉴 새 없이 적어대고 있었다.


   팔 끝이 텅 빈 채로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 「부드러운 반복」 부분


   시인은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인간과 유령을 마주하게 한다. 김선오의 시에서 화자는 쓰는 활동을 통해 유령에 가까워지는데(나는,/이라고 쓰자 손끝이 희미해졌다 - 「불러오기」) 위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 역시 이름을 적는 선적인 행동을 통해 유령적 존재인 나들을 불러낸다. 자신의 이름을 적다가 중단하는 소극적인 화자에 비해 유령-나들은 자유롭고 빛나는 움직임을 보인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령-나들이 보여주는 리듬이 단편적인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입체적인 형태를 띠는 데까지 발전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리듬이 반복을 통해 고유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9) 종이에 선을 긋는 반복적인 리듬은 유령에게 반짝거리는 삶을 부여하고 화자의 손끝에 상처를 낼 정도로 물리적인 힘을 갖게 한다. 화자가 그은 수많은 선들이 합쳐져 종이 위에서 학교가 되는 것, 낱개의 선들이 학생이 되어 화자와 관계 맺는 모습에서 유령-나들이 환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양감을 가지고 실재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이 위에서 튀어 올라와 화자에게 찾아오고 화자와 수업을 하는 유령-나들은 완전한 실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밤이 되면 하나씩 지워지는 유령-나들의 모습은 세계가 유령적 존재들을 어떻게 배척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화자가 잊고 있던 과거를 품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성장하던 마지막 유령조차 허무하게 소멸하는 모습은 유령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세계의 억압을 보여준다. 인간 화자보다 빛나는 가능성을, 종이 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령-나들은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이 헛되지 않은 것은 화자를 통해 증명된다. 자신의 이름도 끝까지 쓰지 못하고 서랍 속에 묻어 두었던 생명력 없던 화자가 유령-나들과의 만남을 통해 울음을 터트리고, 주먹을 쥐고, 쉴 새 없이 적을 수 있는 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령의 리듬을 간직한 화자는 신체가 “텅 빈 채로” 유령을 소거하는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유령의 일원으로서, 언제부터 이러한 장밋빛이 나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것인지, 심장 쪽에 붉은색 등이 켜진 것처럼(우리에게 심장이 있다는 가정하에) 어째서 이 빛이 내부로부터 표면까지 침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장밋빛의 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세하게 짙어졌기에, 우리끼리는 그때그때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수줍으면 피가 몰리듯 얼굴에 장밋빛이 몰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너무 인간적이라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


   우리의 모든 면은 유리로 되어 있어 우리 밖으로 넘실대는 세상이 보입니다.


   농담입니다. 우리는 깨지지 않습니다.

   상처가 내장을 드러내면서도 깨지지 않는 방식과 같습니다.


   저는 제 말의 청자를 인간으로 삼아야 할지 유령으로 삼아야 할지 조금 헷갈리지만, 오늘은 그냥 당신으로 삼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인지 유령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쪽으로요.


   - 「농담과 명령」 부분


   김선오 시의 화자는 유령의 장점들을 받아들이며 유령이 되어 간다. 「농담과 명령」의 화자도 유령의 일원이 되어 유령의 세계에 편입되는데, 이때 유령이 된다는 것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더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유령이란 단지 그 되돌아옴을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관찰하고 감시한다고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그런 것”이라는10) 데리다의 주장처럼 김선오의 시에서 유령이 되는 것은 세계를 훑을 수 있는(검은 구체가 허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종이 위 수천 개의 시선이 해변을 향한다. - 「침범, 노이즈, 산성」) 방대한 감각을 갖게 됨을 말한다. 그리고 이 유령의 시야는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유령의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마주한 유령의 세계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이다. 유령들은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있기에 “불투명하게 아물어” 가고, “다른 속도”로 상처를 회복한다. 유령들의 세계는 서로의 상처를 헤집지 않고 상처를 감출 필요도 없으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확보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유령들은 과거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다른 유령들과 함께 현재를 살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는 인간과 유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성별이나 나이, 계급이나 민족 등 인간 세계의 규범이 통하지 않는 곳. 오직 ‘당신’이라는 존재 하나로 충분한 유령의 세계는 투명하게 빛난다. 이처럼 어떤 구분도 무화되는 곳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타자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살아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존중을 갖게 된다.11)

   이처럼 김선오는 유령을 소거하고 인간과 유령을 구분 짓던 세계를 유령의 모습으로 관통하고자 한다. 유령의 투명성을 지니고 유령 인간이 되어 자유롭게 떠다니는 일은 투명성이라는 수백 가지 유령의 언어를 알게 하고, 서로 다른 상처를 지닌 유령들 사이에 있게 하며, 인간에게 다양성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선오의 유령 인간은 인간 존재와 우주의 다양한 관계들을12) 자유롭게 오가며 리듬을 만들어낸다. 돌과 피부, 살과 뼈와 춤추고(「세트장」), 무생물과 식물, 동물 사이를 건너다니며(「범세계종」) “그저 나긋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세트장」)을 가진 유령 인간만이 세계의 결말에 다다를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장밋빛 리듬은 계속된다.


   3. 밝은 빛의 수행성


   유령을 뜻하는 ‘ghost’가 실제론 죽음 이후의 생존보다는 생명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13) 떠올려 보면 안미린 시의 유령은 애도되지 못했던 타자도 아니며, 살아 있지만 유령처럼 여겨지는 존재도 아닌 수행성을 지니고 있는(유령이 유령임을 멈추지 않고 ‘유령을 하는’ 수행성. - 「유령 기계 9」) 생명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살과 뼈로 현전하지 않는 육체의 가시성만 지닌 유령과는 다르다.14) 유령은 물속이나(수중 유령이 가득하고 ··· 흐르는 피가 뼈에 닿은 기억이 났어 - 「유령계 7」) 돌에서도 모습을 보이고(유령이 하얗게 뭉쳐진 돌을 주웠지. ··· 작은 돌을 주웠던 것뿐인데, 주변이 조금 밝아지는 기분 - 「유령계 2」) 비어 있는 공간을 자신들로 채우기도 하며(집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거워진다는 것이었다.//이 무게에 빠져든다는 것이었다 - 「유령계 9」) 자신과 맞닿는 이들을 연결한다. 


   하얀 연골의 크리처가 오고 있다.


   빛과 불을 밝힐까.


   악천후에는 유령물을 찾곤 했지. 따듯한 미래물을 찾곤 했지.


   빛 속에서 눈을 감으면 가까운 뼈를 가졌다고 생각했어.


   얼린 티스푼을 두 눈에 올리면 그 차갑고 환한 기분이 유령의 시야였지.


   유령의 등뼈는 더 부서지려는 이상한 반짝임.


   크리처가 오고 있어. 들것에 실려 오는 시간.


   백골색 머리띠를 부러뜨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너의 어떤 면.


   - 「유령 기계 1」 전문


   위의 시에서는 크리처, 유령, 그리고 인간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등장한다. 크리처는 하얀 연골을 가진 다 자라지 않은 생물이며, 유령은 궂은 날씨에 찾게 되는 밝은 빛과 가까운 존재다. 다른 존재자들의 “유령적 숙주와 공존”하고 “공생적 실재 속에서 유령”들을 불러 모아 연결되는 생태학적 관계들처럼15) 이들의 종은 다르지만 유령에 의해 서로를 발견하며 연결된다. 

   이때 유령은 하나의 생명으로, 화자가 유령과 합일되는 순간 이제껏 숨겨져 있던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보는 것은 새, 야생 생물, 어린 들개(「비미래 8」)와 같은 세계의 여린 부분들이다. 안미린의 유령 인간이 유독 세계의 약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에게 수행성을 전해 주는 유령이 원초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끝없이 샘솟는 생명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막 태어난 여리고 희미한 생명에 가깝기 때문이다.(이 순간, 유령은 세계의 가장 여린 부위였다. - 「양털 유령, 양떼지기, 아기 양, 아기 양 지킴」) 이는 세계를 전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 없는 존재 방식으로 바라보며16) 세계의 소외된 부분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시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안미린의 시에서 유령은 세계가 숨겨 놓은 것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유령성이 개체들에 대한 패턴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처럼17) 유령의 감각을 지니게 된 화자는 세계의 여리고 어린 부분들을 발견하고 보듬는다. 은폐된 존재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유령 기계 9」), 어린 기계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부스러진 꽃잎에 믿음을 건네며(「유령 기계 7」) 다치기 쉬운 존재들을 부드러운 손길로 감싸는 것이다. 안미린의 근작 시 「양초 해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렇게 도달하고 나면

   마음 밖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에

   더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부재가 뚫고 들어간 눈과 입들이

   보이고 들릴 것 같아요.


   ······


   어떤 사람의 중심은 영혼으로 만든 뼈

   라는 생각이 이어지고


   뼛속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은

   내부로 돌아서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뼛속까지 지내고 있다는 느낌은

   서서히 기대앉은 형태를, 형태 공간을, 움푹 파인 눈과 입으로 만든 방을 만들고

   머물게 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슬픔과 함께 깨어 있게 해요.


   (···)


   나는 텅 빈 네 얼굴뼈를 만지며

   먼 안개를 기억할 수 있어요.


   그것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사랑의 흰 이미지겠죠.


   - 「양초 해골」 부분(『현대시』 2022년 9월호) 


   유령을 통해 세계의 여린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 화자는 유령에게 받은 환한 빛들을 홀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유령 인간으로의 기쁨을 나누어주고자 한다. 시의 화자가 “있어야 할 곳에 흰 것을 돌려주”는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그 예다. 이를 보면 지금 화자가 자리한 세계는 유령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유령이 없기에 타자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타자를 기억했던 세계와는(감은 눈은 깊고 먼 기억을 가만히 받아들인다/더 연해지는 연골의 세계 - 「비미래 1」) 다르다. 화자는 유령 인간이 되어 성장하는 반면, 세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종말을 향해 가는 세계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일을 꿋꿋하게 이어 간다. 유령을 전해 주는 것이 화자에게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지점을18)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 밖에도” 있는 마음들을 인식하는 일은 시야에서 배제되었던 타자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화자의 세계 인식을 더욱 확장시키게 된다. 해골의 눈과 입에서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부재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된 화자를 통해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다치기 쉬운 존재들뿐만 아니라 그 외의 존재들과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그렇기에 안미린의 유령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유령 인간이 된 화자가 보여주는 수행성은 유령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는 소외된 타자를 감싸는 것에서 나아가 타자의 내부로 향한다. 그동안 안미린이 수행성을 가진 유령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시인은 이제 인간의 내부로 들어가 슬픔을 발견해 내는 화자를 그리며 가시적인 것의 비가시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안미린이 알려주는 섬세한 감각들은 양초 해골과 같은 사물에서도 인간이나 유령의 만남과 같은 애틋함을 가지게 하고, 타자의 내부에서도 그와 공명하며 편안히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의 내부에 느리게 기대는 화자는 하나의 형상에서 “형태 공간”을 만들고, 더욱 부피를 늘려 방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되어 타자의 슬픔과 함께 지낼 수 있다. 타자의 “뼛속까지” 침투하고 슬픔을 위로하는 화자의 실천적 행동은 타자를 유령의 세계로 이끌 뿐만 아니라 화자 역시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짐작하건대, 유령이 준 사랑의 감각을 뼛속까지 새긴 화자는 이 다정한 유령적 실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4. 당도한 미래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기계라는 데카르트적 사상에 기반해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간 위주의 인식을 받아들여 온 우리에게 유령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의 출현은 기이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김선오와 안미린이 그려내는 유령 인간을 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 온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자유로운 리듬을 통해 유령 인간을 만들어내고, 규범에서 벗어난 유령의 세계를 보여주는 김선오의 유령 인간과 수행성을 지닌 유령과 합일되며 세계에서 소외된 여린 부분을 발견하고, 타자를 향한 실천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가는 안미린의 유령 인간은 우리에게 유령적 사유와 실천이 필요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류세라는 행성적 위기를 마주함에 있어 인간임을 내려놓고자 하는 유령 인간의 등장은 인간의 지위를 내려놓고자 하는 시도가 동·식물, 사물 등 비인간들과의 결합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부피를 줄이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구에 과도하게 얹힌 인간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듯이 육체가 가진 질량을 버리고 투명하게 세계를 통과하는 유령 인간들은 인간의 시대가 끝나고 유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지표다. 잘 아문 상처로 세계를 통과하고(김선오, 「농담과 명령」) 여린 부위를 쓰다듬을 줄 아는(입김으로 흰 꽃을 깨우는 유령의 동력과, 눈부신 빛의 순백력 - 안미린, 「비미래 9」) 유령의 시대를 환영한다. 이제 우리도 유령이 될 시간이다.


1) 장클로드 슈미트, 『유령의 역사』, 주나미 역, 오롯, 2015, 26-27쪽 참조.
2) 고봉준, 『유령들』, 천년의 시작, 2010, 4-6쪽.
3) 김영찬,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51-52쪽.
4) 이광호, 「‘90년대’는 끝나지 않았다 - ‘90년대 문학’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 『문학과 사회』 1999 여름호, 758-760쪽.
     박영근·김형수·이성욱·방현석·방민호 좌담, 「90년대 문학의 길찾기」, 『당대비평』 1997 겨울호, 295-301쪽.
     김영찬, 앞의 책, 50쪽.
5) 신수정, 「2000년대 소설에 나타나는 유령 화자의 의미 — 윤성희・황정은의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예창작』 18(2), 한국문예창작학회, 2019, 178쪽.
6) 소설에서는 임선우의 『유령의 마음으로』(민음사, 2022),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창비, 2022) 등 유령이 등장하는 작품이 증가했으며 이에 주목한 글은 다음과 같다. 김요섭,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 『문학과사회』 2022 겨울호; 이희우, 「멸망보다 긴-김지연, 나푸름, 임선우 소설에 나타난 인간의 유령들」, 『문학들』 2022 겨울호; 박혜진, 「인간의 얼굴을 한 유령, 유령의 얼굴을 한 인간」, 『문학들』 2023 봄호; 김다솔,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문장 웹진』 2024.1.
7) 인용한 시가 수록된 시집은 다음과 같다.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김리윤, 『투명도 혼합 공간』, 문학과지성사, 2022; 강지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 2021.
8) 이 글에서 중심으로 다루는 시집은 김선오의 『세트장』(문학과지성사, 2022)과 안미린의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문학과지성사, 2022)이다.
9) 앙리 리페브르, 『리듬분석』, 정기헌 역, 갈무리, 2013, 16, 64-67쪽.
10) 자크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진태원 역, 민음사, 2002, 209쪽.
11) 같은 책, 214쪽.
12) 앙리 리페브르, 앞의 책, 82-83쪽.
13) 리사 모튼, 『유령에 홀린 세계사』, 박일귀 역, 탐나는책, 2022, 15-16쪽.
14) 자크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러, 앞의 책, 204쪽.
15) 티모시 모턴, 『인류』, 김용규 역,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06쪽.
16) 시노하라 마사타케, 『인간 이후의 철학』, 최승현 역, 이비, 2023, 115-116쪽.
17) 티모시 모턴, 앞의 책, 125쪽.
18) 시노하라 마사타케, 앞의 책,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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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복음서와 묵시록 ― 듀나의 SF를 ChatGPT와 함께 읽다 노대원 한국 SF 계보에서 듀나라는 나비 효과 2024년은 듀나(DJUNA)가 창작을 시작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근본적으로 듀나의 SF 소설들은 1990년대의 PC통신에 기반을 둔 디지털 문학으로 출발했다. ‘기술적으로 포화된 사회의 문학’(로저 록허스트)1)이라는, SF에 관한 한 정의는 듀나의 SF에도 적절하다. PC통신 기술을 가능하게 한 한국 SF 팬덤의 본격화는 활발한 SF 아마추어 창작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듀나는 자신의 초기작을 “90년대 통신망 문화에서 자연 발생한 잡동사니”2)라고도 표현한다. 여기서 PC통신은 독자가 곧 작가가 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었다. 듀나가 그간 필명으로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해 왔던 것도 디지털 문화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준은 “사이버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덴티티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3)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과학소설 동호회의 팬덤 문화는 듀나라는 걸출한 SF 작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기술적 · 사회적 맥락이지만, 물론 그것만으로 듀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시절 등장한 많은 아마추어 SF 작가들이 모두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 나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F 작가 이경희는 듀나의 초기 작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 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4) 이 점은 듀나 스스로 작품의 레퍼런스를 자주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초기 창작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동의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작가가 스스로 영향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듀나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이 위치한 계보와 상호 텍스트적 맥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창작의 전략으로 활용했다. 장르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지닌 작가로서 듀나의 SF 소설들은 ‘한국 SF 장르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5)이다. 듀나 SF에서 탈식민성은 서사의 소재와 내용과도 관련되지만, 특히 듀나의 초기작들에 집중한다면, 주로 영미 서구 문화에 기원을 둔 SF 장르를 수용하고 한국적으로 다시 쓰는 현지화 과정 자체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듀나 이후로 김보영, 배명훈과 같은 SF 작가들은 한국 SF의 현지화(localization)와 진화를 이어 나갔다. 그동안 PC통신 기술은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으로 이어졌다. AI는 SF가 현실의 서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SF 장르는 한국의 문학적 우세종이 되었다. 이 글은 일상화된 AI 시대에 30년 전 듀나의

  • 관리자
  • 2024-04-01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박인성 ‘시성비’의 시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표현은 다소 정정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지나치게 빠르고 예술은 지나치게 느리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그리고 시성비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숏텀-피드백(short-term feedback)이다. 요구에 대하여 빠르게 응답하는 것, 입력(input) 대비 빠른 출력(output)을 도출하는 것. 이러한 경향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올바름보다는 과정의 빠름, 더 나아가 과정 자체가 생략되고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야말로 수용자들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최근 숏텀-피드백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뛰어넘어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확장되는 중이며, 피드백의 지연을 직접적인 피해나 손해,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이득과 손실로 환원하는 소비자 감수성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숏텀-피드백에 대한 효능감은 빨라지는 것에 대한 체감보다 느려지는 것에 대한 역체감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이 느리게 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며 손해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소비자 권리로 환원하여 자신이 정당한 권리에 비하여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피해자 정체성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존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왔던 고전적 가치들은 주로 롱텀-피드백에 속한다. 노력, 숙련, 취향, 성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경험적 가치는 점점 더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경험을 압축하여 정리한 정보다. 유튜브의 요약정리 영상이 아니면 더 이상 책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plot)의 논리는 지나치게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다. 롱텀-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값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롱텀-피드백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결과를 위해 쏟아부은 각종 정신적-물질적 투자의 무화(無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과정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로의 다양성이나 결과 이외의 성취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롱텀-피드백은 오늘날 너무나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하려면 빠르게 하는 것이 낫다. 조금 투자해서 빨리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숏텀-피드백에 천착하는 시성비 추구 경향은 글로벌한 보편 현상이다. 게다가 ‘빨리 빨리’ 문화를 통해서 원래도 더 빠른 것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은 그중에서도 최첨단의 시성비 사회라, 더 나아가 ‘속도 전체주의’ 국가라 할 만하다. 한국은 6·25 이후 폐허에서부터 압축적인 경제적 성

  • 관리자
  • 2024-04-01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3)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4.1) 전망과 실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시영화cinéma de poésie 를 분석하며 시적인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 온 파솔리니는 이 영화에서도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처럼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우리가 감지하게 하기 위해 몽타주를 사용한다. 세계가 정상성을 위장하고 있음을 가리켜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태를 가시화하는 예술의 역량이란 우리에게 익히 익숙한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다음과 같은 상세한 설명은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 [······] provare는 (파솔리니가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여러 가지 의미를 함께 모았을 때에야 가장 정확해질 수 있는 동사이다. provare는 (예를 들어 소박한 장미와 같은) 무언가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 “겪다éprouver” 또는 “느끼다ressentir”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가 분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기 위해” 여기에서 연결된 세계의 요소들에 관한 발견적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다essayer”이고, “실험하다experimenter”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 연역과 세계의 모종의 상태(1840년대 마멜리의 애국가와 1960년대 정치 시인 파솔리니의 글 사이 어딘가)로부터 축조된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낱말은 “증명하다prouver”를 뜻한다. 『이단적 경험』의 저자에게 시는 세계를 prova(시험) - 이는 또한 시간의 prova다 - 하는 양상 또는 양태화로서 증명을 뜻할 것이다. 한편으로 논증된 사유, 증거, 판단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 구어적이거나 시각적 형식 속에서 양태화되는 감정을 낳는 에세이essai 또는 실험이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영화 의 기획을 특징짓고 있다.2) 인용 글은 어느 시선집 서문에 파솔리니가 적은 문장을 디디-위베르만이 섬세하게 분석한 부분이다. 파솔리니는 자신의 시와 영화 사이의 등가성을 분석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여기에 “무엇인가를 겪는/시도하는 어떤 방식Un certo modo di provare qualcosa이 [······]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적는데, 디디-위베르만은 이 문장에서 사용된 ‘겪는/시도하는provare’이라는 동사의 다양한 의미에 주목하여 파솔리니

  • 관리자
  • 20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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