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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1,556

   문학이라는 시대착오와 시차(時差)의 일상화


박인성


   ‘시성비’의 시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표현은 다소 정정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지나치게 빠르고 예술은 지나치게 느리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다. 그리고 시성비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바로 숏텀-피드백(short-term feedback)이다. 요구에 대하여 빠르게 응답하는 것, 입력(input) 대비 빠른 출력(output)을 도출하는 것. 이러한 경향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과정의 올바름보다는 과정의 빠름, 더 나아가 과정 자체가 생략되고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야말로 수용자들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준다. 

   최근 숏텀-피드백에 대한 선호는 단순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뛰어넘어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보편적인 감수성으로 확장되는 중이며, 피드백의 지연을 직접적인 피해나 손해, 경제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이득과 손실로 환원하는 소비자 감수성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따라서 숏텀-피드백에 대한 효능감은 빨라지는 것에 대한 체감보다 느려지는 것에 대한 역체감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요청에 대하여 응답이 느리게 오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며 손해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소비자 권리로 환원하여 자신이 정당한 권리에 비하여 그 결과를 누리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피해자 정체성이 횡행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존의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왔던 고전적 가치들은 주로 롱텀-피드백에 속한다. 노력, 숙련, 취향, 성장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할 수 없는 경험적 가치는 점점 더 쇠락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경험을 압축하여 정리한 정보다. 유튜브의 요약정리 영상이 아니면 더 이상 책이나 영화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는 플롯(plot)의 논리는 지나치게 느리고 효율적이지 않다. 롱텀-피드백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결과값에 대해서는 보장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롱텀-피드백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그동안 결과를 위해 쏟아부은 각종 정신적-물질적 투자의 무화(無化)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과정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경로의 다양성이나 결과 이외의 성취에 대한 부정이 전제되어 있다. 롱텀-피드백은 오늘날 너무나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실패를 하려면 빠르게 하는 것이 낫다. 조금 투자해서 빨리 실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숏텀-피드백에 천착하는 시성비 추구 경향은 글로벌한 보편 현상이다. 게다가 ‘빨리 빨리’ 문화를 통해서 원래도 더 빠른 것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은 그중에서도 최첨단의 시성비 사회라, 더 나아가 ‘속도 전체주의’ 국가라 할 만하다. 한국은 6·25 이후 폐허에서부터 압축적인 경제적 성장을 경험한 나라이며, 과거로부터의 전통이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현재 중심의 단기적인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발 빠른 성과와 성취만 쫓아가는 삶의 태도를 강조해 왔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에게나 장기적인 비전은 무화되고 자본으로 안정화되는 당장의 성취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표준적인 삶이다. 롱텀-피드백으로서의 연애와 결혼의 포기, 나의 단기적인 삶 이상을 책임져야 하는 출산과 육아로부터의 탈피는 시성비 시대의 당연한 풍경이 되어 가는 중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평에 대한 과대평가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또한 오늘날에는 ‘꼰대’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부정된다. 반대로 소위 ‘성공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에 대한 자기계발적인 정보들은 그 이상으로 ‘힘 숭배’의 대상이 되는 방식이다.1)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관심을 끌어당기는 주목 경쟁의 승자들은 소위 ‘셀럽’과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관심 자본을 통해서 기존의 전문성의 영역을 대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기 PR’을 넘어서 ‘개인 브랜딩’을 구축하고 ‘관종’이 되길 감수하면서 더 많은 관심 자본을 이끌어 와야만 유의미한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지금의 우리 자신이다. 

   이처럼 단기적 피드백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이 숏폼(short-form)화 되어 가는 시대에 문학 역시 예외는 아니다. 출판 시장에서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주제어 중심의 초단편 앤솔로지가 보편화되고, 기존의 장편으로 대변되던 단행본 역시 경장편의 규모를 거쳐서 이제는 중편가량으로 점차 짧아지는 경향이 강세를 보인다. 전통적인 문학 잡지의 독자 실종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다. 하물며 시대적 시의성을 따라잡기 위해 구성된 웹진조차도 실상은 실시간으로 디지털 사용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종이책 시장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작아지고 있지만, 놀랍게도 미디어믹스화를 위한 값싼 1차 판권으로나마 확보하기 위하여 출판사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책들을 계약하고 출간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 

   문학이라는 언어, 특히 소설이라는 서사적 언어 형식은 이 현기증 나는 시성비 시대에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 언어가 되어 가는 중이다. 시대착오란 흔히 시대성이라는 시간적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시대 인식의 착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구식 스타일에 고집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 또한 시대성을 단기적인 시간성의 개념으로 재구성한 근대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형태의 시간관에 의한 부정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대성에 발맞추고 그것을 따라가려 노력할 수 있을 뿐,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성에 일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처럼 우리는 시대라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상황에 처한다. 시대성이란 사후적인 것이고, 유행이란 파악하고 나면 지나가고, 다만 유행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대착오는 의도적으로 시대성을 비껴가면서 더 넓은 의미에서의 동시대성(synchronism)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기획이다. 나는 이 글을 시작으로 가속하는 사회적 시간과 문학적 시대착오에 관한 시론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 물론 이 또한 뒤늦은 이야기이며, 결코 우리 시대에는 올바르게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자신의 시대에 잘못 도착했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하지만 애초에 정확하게 도착할 곳이란 없다. 따라서 내가 주목하는 동시대적 소설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잘못 도착한 지점에서 비로소 자신만의 이야기 방식으로 감속하는 소설들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속과 감속에 대하여 논해야 한다. 



   가속 사회와 감속 문학


   하르트무트 로자의 『소외와 가속』(앨피, 2020)은 사회적인 의미의 시간 가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과 그에 따른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하여 살핀다. 이러한 논의의 발단은 20세기 초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미 정리되었기에 기실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오늘날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이나 신유물론과 같은 새로운 이론적 지평이 출현한 현시대에는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다. 근대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각종 탈근대적, 탈인간주의 이론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시대에 이러한 시간성의 논의는 여전히 근대적이고, 인간 중심의 소외 개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지극히 근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가속 개념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공통적 문제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가회적 가속에 의한 문제는 다름 아닌 시대착오와 세계-없음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동기화하지 못하고 비껴 나가 있는 시대착오적 인간이란 공간적으로도 자신이 서 있는 좌표를 잃어버리고 갈 곳을 잃은 방랑인이기도 하다. 좌표를 찾으려 갈팡질팡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화된 시간적 기준점을 찾아서 거기에 자신을 동기화하려 한다. 하지만 외부화된 시간을 움직이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우리가 일치시키려고 하는 표준적 시간은 사회적 시간이며, 사회 역시 사회 구성원들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균질화하려 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적 시간이란 개인의 그것을 맞추어 가기도 이전에 앞서 나가며 점점 더 빨라진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더욱 빠르게 대과거가 되고, 미래는 순식간에 현재화되며 다시 더 짧은 미래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경험은 과소평가되고 기대는 아주 빠른 초침의 움직임처럼 우리 눈앞에서 멀어져 간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사회적인 시간이 개인적인 삶의 시간보다도 빠르게 흘러가며 점점 더 가속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사회적인 시간의 가속과 개인에게 남겨진 시간의 격차야말로 우리를 근본적으로 어떠한 시간적 장소에도 머무르게 만들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러한 시간적 가속은 일본의 전설인 우라시마 타로(浦島太郞) 이야기와 닮아 있다. 바닷가에서 거북이 한 마리를 구해 준 뒤, 그 보답으로 용궁에 초대받은 우라시마 타로가 며칠 동안 호화로운 용궁 생활을 보낸 뒤 바닷가 마을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용궁에서의 며칠 사이 바깥세상은 이미 300년의 시간이 흘러 있었고 그의 가족은 물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황망해진 그가 용궁의 공주가 헤어질 때 선물한 상자를 열었을 때, 비로소 멈춰 있던 우라시마 타로의 시간이 흘러 그는 순식간에 노인이 되어버린다. 개인의 시간과는 다른 축에서 가속해 버린 사회적 시간을 개인의 삶으로 다시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는 우라시마 타로처럼 순식간에 조로(早老)한다. 

   시대착오와 세계-없음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공통감각으로 작동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시간의 가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사실상 상실한 셈이다. 하르트무트 로자의 진단은 사실 단순 명확하다.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 수행하는 감속으로 가속에 맞설 수는 없다. 가속하는 시간적 감각 앞에 감속이란 일종의 인식론적인 휴지기에 불과하며, 결국 감속 자체를 의미화함으로써 다시금 외부화된 시간에 접촉하게 된다.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사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라는 김성모 만화 속 대사처럼, 감속은 더욱 가열하게 가속하기 위해 스스로 웅크리는 자기계발의 전략적 수단이 될 따름이다. 문학이란 한편으로 이미 그러한 전략적 감속 수단으로 인스타 속 피드의 자기표현을 위한 그럴 듯한 액세서리이자 편의적 인용의 문장 단위로 수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쇄말적인 파편화 현상 속에서 문학장의 문학적 언어는 외부 장과의 단절을 통해 시대적 가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감속하려 하지만, 문학적 언어와 문학장의 감속은 사회적인 영향력의 상실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일종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저항으로서의 감속을 주장하는 것은 쉽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목가적인 삶을 추구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다양한 유행에 대하여 거부함으로써 시대착오를 새로운 스타일의 복장처럼 몸에 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결국에는 제도화된 언어이자 문학장 역시 자본주의와 연계된 사회적 체제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비관적으로 들리겠지만 문학의 형식적 언어는 체제 내에서 허용되는 형태의 저항에 그칠 가능성이 높으며, 오히려 사회적 차원의 실질적인 변화를 방해할 수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비유하듯 제로-콜라를 마시면서 실상 제로(0)의 기표 아래 감추어진 자본주의의 환상을 더욱 열렬하게 섭취하게 되듯 말이다. 



   전위(傳位)하는 문학적 시대착오


   조로하는 노년 문학. 내게는 이보다 더 정확한 오늘날의 전통적 서사 문학, 즉 근대문학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근대문학은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더 이상 오늘날의 청년에게 허락된 성장이란 없다. 사회적 성취나 능률적인 성과가 그 자리를 대체할 따름이며,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계와의 대결이나 갈등을 구체화하지 못한다. 장편소설에서 그려낼 것이라 기대했던 세계에 대한 재현은 무기력해지고 서사적 시간은 밀도 있는 경험을 구현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서사적 시간의 흐름이 밀도 있는 시간적 경험을 구성할 수 없게 됨에 따라, 가속하는 사회적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더욱 빠르게 일상의 시간을 점유한다. 

   문제는 사회적 시간은 빠르고 문학의 시간은 단순히 느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라시마 타로의 시간처럼 상대적으로 시간은 가속한다. 사회적 가속에 발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사이에 문학장은 거의 정지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분리되어 있지만 사후적으로 그만큼 밀려 나간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 일시에 시간이 문학장을 통과해 간다. 따라서 문학장이 시대성을 의식하고 시의성에 발맞추어 가려고 의식하는 순간, 이미 그러한 문학적 시도는 유행에서 비껴간다. 심지어 애써서 유행에 합류하려는 올드한 패션센스의 소유자처럼, 더더욱 구닥다리 스타일로 보일 따름이다. 

   전하영의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문학동네, 2024)는 표제작의 제목만큼이나 문학적 형식으로 구현된 시차와 시대착오의 모음집들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집에서 그려지는 이야기들과 주제의식은 예술적 복무와 시대적 감각의 분열에 대하여 불필요한 시간적 조정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예술에 대하여 다시 시대착오로서의 서사적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이중의 시대착오를 겹쳐 보일 뿐이다. 내용으로서의 시대착오와 그것을 언어적으로 수행하는 수행적 언어로서의 시대착오를 병행하는 셈인데, 당연하게도 이러한 내용-형식이 독자를 더 정확한 시대성으로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대를 따라잡을 수 없는 시대착오적 예술에 대하여 건조하고 솔직한 태도만이 이 소설집의 시도들을 더욱 개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다. 내게는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갈팡질팡하는 무의지적인 방황이야말로 지금의 시대성 아래 가장 솔직한 문학적 태도처럼 보였다. 


   이제 동시대 미술계에서도 가상화폐 투자, NFT, 빅데이터, 인공지능, 대체 현실 등 메타버스와 관련된 ‘첨단’ 이슈들을 앞다투어 다루고 있었고 그 대열에 합류해야 적응하는 자들만이 다음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어 보였다. 예술이 아방가르드였던 시대는 훌쩍 지나버린 것 같았다.(「시차와 시대착오」, 187-188쪽)


   아방가르드라는 형식 실험 역시 미래를 선취하는 예술적 시도로서 각광받았던 시대를 떠올려 보라. 전위(前衛)란 결국 공간적 감각을 통해서 예술에 대한 시간의 감각을 구체화하려는 상대적인 비유이며, 그것은 구시대 문학에 대한 차별화를 통해서 성립 가능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지금 우리 시대에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결코 자신이 수행되는 시대적 좌표와 배치로부터 전위를 차지할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조함으로써 후위에 선 예술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위로서의 예술을 주장하기에 앞서 이미 수많은 후위로서의 예술적 시도들이 비의도적인 시대착오, 더 나아가 순진무구하고 당당한 시대정신처럼 수행되는 (비)문학적 언어들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지금의 예술은 그저 전위(轉位)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주어진 위치를 바꾸고 전위에서 후위로, 다시 후위에서 전위로 오가는 과정 자체가 예술에 허용된 ‘과정으로서의 감각’이다. 수록작 「경로 이탈」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시공간의 구성은 바로 이러한 방황하는 자의 과정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려내기 위한 매개라고 보아야 한다. 「경로 이탈」에는 이십삼 년 만에 몽유병적인 잠에서 깨어난 최사해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며, 어디로도 정확하게 전진할 수 없는 공간적 상황에 갇혀 있다. 지난 이십삼 년간의 기억은 사라지고, 일순에 조로해 버린 인간으로서 최사해는 당연히 공간적으로 자신의 좌표를 잃어버린 세계-없는 사람이다. 

   이 소설은 오늘날 예술에 대한 일상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시각적 구현에 매달리고 있다. 비록 알 수 없는 몽유병에 의해서 오랜 잠을 자다 깨어났음에도, 일상의 행위처럼 영화 필름을 배달하는 행위가 최사해에게는 일종의 예술 작업이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이 과정에서 최사해는 자신의 삶의 방향은 물론이고 예술에 대한 자신의 시선과 그에 따른 감각을 재조정한다. 그리고 그 모든 효과는 그가 좌표를 특정할 수 있는 위치에서 깨어나 영화관을 향해서 다시금 걸어가는 방황의 과정에 있다. 「경로 이탈」에서 부정확하고 유동하는 좌표로서 활용되는 영화의 역할은 온전히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일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내용 역시 불확실한 것으로, 다만 영화를 보는 수행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최사해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삶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는 말 그대로 후위에서 전위를 오가는 유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시차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의미를 독립적인 예술의 장(champ)에서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나쁜 의미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제 예술이 단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상만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유동적 시공간의 불확실한 방황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혼란이나 불안만을 그려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예술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향한 여정이기도 하다. 

   「경로 이탈」은 말 그대로 명확한 서사적 구성과 시간적인 플롯의 배치로부터 이탈해 있는 소설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대적으로 구성된 시간의 경로와 사회적 세계의 인식론적인 배치와 경로에서 이탈해 버린 개인의 보편적 삶의 단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에 예술이라는 (비)일상적 감각이 더해질 따름이다. 『시차와 시대착오』의 수록작들을 포함한 전하영의 소설에서 예술은 더 이상 독립적 영역에서 기능하고 자본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율적 대상이 아니다. 당연히 문학장 내부의 동료들 또한 과거의 낭만주의자들이나 근대적인 의미의 예술지상주의자, 문학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에 충실하려 노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에 비껴가며 시차를 생산할 뿐이다. 

   따라서 예술과 일상이 비틀린 시간 감각으로 교차하며 그려내는 시차가 예술의 유일한 자리가 된다. 「경로 이탈」의 시공간적 구성과 탐색은 예술과 삶이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고,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현실 사이에서 어떠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탐구하지만, 이것을 아방가르드나 실험 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위이면서 후위, 말 그대로 예술의 자리바꿈(轉位)이야말로 이 소설이 그려내는 유동적 공간의 확장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수행되는 내면적 회상과 사유의 의미는 우리 각자가 겪는 일상의 반복과 예술적 순간 사이의 균열에 있다. 그리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 바로 그 이러한 전위의 순간들에도 끊임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외부화된 사회적 시간의 가속이다. 

   『시차와 시대착오』를 포함한 전하영 소설들이 가진 강력한 설득력은 그 시간들의 병치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대립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포괄적인 역사적 시간관을 환기한다. 이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하는데, 앙리 베르그송이 고안한 ‘지속’의 개념처럼 벤야민 역시 역사를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의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중첩되고 상호작용하는 시간의 층위로 보았다. 문학이 이러한 복잡한 시간관념을 일상과 예술의 중층적 영역으로 소환할 때, 독자들은 현재의 순간을 다양한 시간적 관점에서 재조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학 작업은 단순히 예술적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라 현실의 균열을 통해 나타나는 ‘진실의 순간’을 포착한다. 물론 그 진실이란 거창하고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바로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가 영원히 항상성을 가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하고 대체 가능함을 상기시키는 순간의 효과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현기증 나는 디지털 사회의 속도 속에서 우리는 폐허의 이미지를 겹쳐 볼 수 있어야 한다. 아주 먼 과거의 폐허가 바로 이 끝없는 가속의 끝에 도달할 지나간 미래의 풍경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편화해야 한다. 



   빈티지 문학이란 가능할까? 


   한국에서 빈티지(vintage)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권보다도 빠르게 가속하는 한국의 사회적 속도에 있어서 전통은 부정적인 것이며, 새로움은 언제나 상찬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타인이 소유했던 오래된 물건의 가치라는 것이 인정받기는 어려우리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의 경우 오래된 장인의 골동품에서 아우라를 찾았으며, 이는 기술복제 시대의 복제품이 베낄 수 없는 원본으로서의 원천적인 분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빈티지는 자본주의 이전의 골동품과는 구별되며, 동시에 완전한 수량을 셀 수도 없이 생산되는 글로벌 브랜드들의 대량생산 체제의 산물들과도 적절하게 구별된다. 그러다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다 빈티지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며, 그 희소성과 대표성이 공통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원형적 가치가 사물의 형태로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골동품이 온전히 대량생산 체제가 자리 잡기 이전의 전근대적인 것이라면, 빈티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화된 대량생산 체제 이후의 것들이면서도 그 내부에서 골동품에 존재하는 가치를 인정받은 시간적 경험의 물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적 사물들로 복각되는 시대성, 스타일, 장르를 대변하는 원형적인 사물들로서 빈티지는 그 자체로 시차를 대변한다. 빈티지 자체가 아니라 그 흔적들이 현행의 모든 물건들에 영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주 클래식한 대상들이 흔적으로서나 원천으로서나, 심지어 다시금 자본주의의 상품으로서 실존하며 존재하는 병존의 방식이 빈티지라는 대상을 복합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존재로 만든다. 빈티지의 예술적 가치는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독립적인 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일상의 영역에 있다. 

   내가 꿈꾸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형태의 빈티지 문학의 존재 가능성이다. 숭고화된 예술의 영역에서 고전이나 정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살아남으면서도 일상으로 다시금 재소환되며 얼마든지 지금 입고 읽을 수 있는 실용적 대상으로서 말이다. 물론 문학에 있어서도 새로움에 대한 강박 속에서 비평적 의미를 수행해 온 한국 문학장에 있어서 빈티지 문학이란 어불성설이다. 지금도 많은 작가들의 수명이 등단과 함께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조로하지만, 문학장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 속에서 그들을 다른 신인 작가군으로 손쉽게 대체하며, 그들의 문학적 가치를 새로움에 대한 의미화 속에서 발견할 모든 준비를 미리 하고 있지 않던가. 따라서 문학장이라는 고립된 예술적 장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공존할 수 있는 복합적인 문학적 시도가 언제나 요구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시대성으로부터도 거리를 취하면서, 동시에 문학장에서 생산된 문학성으로부터도 거리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중으로 자신이 속한 시공간에서 소외되어야 하는데, 동시에 사회적인 시간으로부터도 틀어지고, 문학장의 시간으로부터도 틀어짐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의 시차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적 시간과 문학장의 시간 역시 그러한 수많은 시차들의 종합으로 구성된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모두에게 정확한 시간과 올바른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의식화함으로써만, 우리는 고립된 자율성의 영역이 아니라 더욱 다양한 세계와 교차하는 자신만의 좌표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는 시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속도 감속도 아닌 전위를 통해 자신의 시대와 더욱 정확하게 어긋나는 시도가 필요하다. 


1) “능력주의와 소비자 정체성과 피해자 정체성은 아무도 누군가를 돌보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자도생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중략) “우월함과 열등함의 구분을 지적 행위로 포장하고 자신이 비교우위에 서 있음을 끝없이 즐기려는 경향성. 이 나르시시즘적 욕동이야말로 힘 숭배의 핵심이다.”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아, 2022, 299-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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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시민과 세계시민 사이 ― 소수자 시민권의 기획과 해외 이민의 상상력 오혜진 ‘탈조선’이라는 모험과 자기 계발의 윤리 2015년을 기점으로 확산된 ‘헬조선’ 담론은 계급 세습이 고착화된 한국사회를 풍자하는 ‘수저론’과 결합하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정치 담론으로 회자됐다. 잘 알려졌듯 이 담론은 한국사회를 더는 진보의 기획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태된 미개한 공간으로 정의하며, 젊은 세대를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려는 기성세대의 욕망 또한 단호히 거절한다. 헬조선 담론과 함께 부상한 ‘죽창론’ 역시 ‘리셋’에의 강렬한 열망을 내세웠지만,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죽으면 끝’이라는 자기 파괴의 제스처에 가깝다고 해석된다.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2)는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 자조의 정동이 주조한 헬조선 담론을 발 빠르게 포착해 선동적인 대중 서사로 가공한 사례다. 전작들에서 ‘자살’(『표백』, 2011)과 ‘덕질’(『열광금지, 에바로드』, 2014)을 통해 “저항하는 잉여”3)로서의 청년 형상을 부조한 바 있는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에서 ‘해외 이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한다. 다만 그가 모종의 “도발”4)을 의도한 것과 달리, 독자들에게 이미 ‘탈조선’의 상상력은 불온하다기보다는 또 다른 차원의 ‘노오력’을 요하는 규범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설은 ‘해외 이민’이라는 선택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정황을 제시한다. 하나는 ‘평범한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등시민”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싫어서』, 44쪽)라는 진단이 ‘홍대 나온 20대 후반 여성’ ‘계나’의 자기인식이다. 즉 계나는 학벌과 외모, 가족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어릴 적 자신의 할머니가 새벽에 폐지를 줍기 위해 무단 횡단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다고 회고함으로써 ‘폐지 줍는 할머니’의 형상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이자 비참한 미래로 의미화한다.5) 다른 하나는 소수자들이 연대해 사회구조를 변혁하고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일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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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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