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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보는 자들은 늘 목마르다

  • 작성일 2017-05-08
  • 조회수 5,018

[비평in문학]


문장웹진 비평 기획


2017년 3월부터 [비평in문학]에서는 비평적 글쓰기 형식의 다양한 방법을 비평가 자신의 실험을 통해 직접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주제로 비평 양식에 대한 이론을 실제 비평으로 실천하는 글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비평의 효용과 기능에 대한 회의를 멈추기 어렵지만, 비평을 읽지 않고 쓰지 않는 문화가 더 낫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평의 새로운 정동과 문제의식을 스스로 요청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모든 비평을 폐허로 만든 자리에서만 가능하리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문학 비평의 고답성 혹은 무용함에 대한 비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앞으로 [비평in문학]은 ‘비평가’로서 어떤 글쓰기를 창안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비평가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신을 보는 자들은 늘 목마르다

2017년의 한국문학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인 단상들



복도훈



악의가 있지 않고서는 누구도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질 리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그저 피고들의 사상만을 조사할 뿐이었다. 자신들이 진리와 지혜, 최고의 선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에 실수와 잘못은 자신들의 반대자들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ㅡ아나톨 프랑스,『신들은 목마르다』(1912)



1. 아카이브는 불타고 있다

오세아니아의 공용어인 ‘신어(new speaks)’에 대해 1984년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상세하고도 혁신적인 사용설명서의 후반부에는 신어의 최종 채택 원년인 2050년 이전에 출간된 문학작품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세아니아 인민 가운데는 열성적인 당원들이 간혹 있어서 특정 문학작품을 번역하거나 검열하는 대신 그것을 없애버리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것은 영사(英社, 영국 사회주의)의 이념에 전적으로 부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작품들이 언젠가 절로 ‘자연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연하며, 열려있기에. 우리는 성급하고 초조한 검열관이 아니기에. 시간은 전적으로 우리의 편이기에.
우리가 참조하는 문서는 신어사전 제11판이다. 그렇지만 사전을 만들기 위해 참조했던 아카이브의 서류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카이브는 초판 날짜가 찍히자마자 곧 잊히고 케케묵은 냄새만 풍기는 책과 먼지로 뒤덮인 서류들이 어지러이 가득 찬 바벨의 도서관이 아니다. 도서관의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카이브는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불사르면서 언젠가 한줌의 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비단 아카이브의 화염과 재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무와 어둠의 도래다. 그것은 시다. 화염과 재만큼이나 무와 어둠도 옛적부터 시인들을 매혹시켜왔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와 어둠으로 가득 찬 ‘도래할 책’을 기다리고 있다.
“구어가 완전히 폐기되면 과거와의 유대는 단절될 것이다.”1)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우아하며 시적인 희망으로 가득 찬 문장인가. 도래할 신어의 사상적인 핵심은 이것이다. “신어의 목적은 영사 신봉자들에게 부합하는 세계관과 사고 습성에 대한 표현 수단을 마련해주고, 영사 이외의 다른 모든 사상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370쪽) 이 문장의 전반부는 현재에 당장 수행해야 할 과제를, 후반부는 미래의 기대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당분간 현재의 과업에 집중하겠다. 언어는 사고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고 발화하는 사람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정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바로 그 ‘사람’이다. 신어의 철학적 요지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요,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는 구시대 철학자들의 언어철학과 닮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화하는 발화자의 위치, 그가 쓰는 문장, 텍스트의 맥락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번거롭고도 의심스러운 옛 사고는 우리 자신의 언어습관에 여전히 잔류하고 있지만,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그 낡고도 복잡한 사상과 언어는 인위적으로 없애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연사할 것이다. 신어 사용설명서의 실제 집필자로 알려진 사상당원 오브라이언은 셰익스피어에서 디킨스 등의 문학을 신어로 번역하고 후에 원본을 폐기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어서 그 속도가 느리므로, 21세기의 10년대나 20년대 전에 매듭지어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썼다(384쪽). 그가 언급한 ‘21세기의 10년대와 20년대’ 사이에 차세대인 우리가 수행해야 할 중대한 과업이 놓여있다.
도래할 무와 어둠을 반기는 미래의 시인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와 구문, 문장에 내재된 편견과 사상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위해서라도 아카이브에서 뽑은 특정시기의 문서를 열람하고 검토하는 일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문서에는 #2017-k-critic-n5라는 파일명이 적혀있다.

1) 조지 오웰,『1984』, 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09, 383쪽.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를 표시한다.



2. 문서 #2017-k-critic-n5-1

한 젊은 비평가가 이러한 도발적인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었다. “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2) 이 글은 세목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지만 최근 문예지에서도 수십 번 언급된 용어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겨냥하고 있었다[주 1]. 지난 몇 년 확실히 일군의 채식주의자들을 화나게 할 만한 그 글은 적어도 글을 쓴 필자의 경험 속에서만큼은 충분히 이해될 법도 하다. 물론 내가 만난 채식주의자 가운데 나의 육식을 꼬집어 문제 삼거나 채식의 당위를 일방적으로 들어야했던 ‘불편한’ 체험은 드물었다. 어느 채식주의자 앞에서 자신의 불편했던 경험을 피력하는 평론가의 글이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은 채식주의자에 대한 다소 일방적인 매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나 역시 느꼈던 불편함은 평론가 이은지의 개별적인 ‘경험’이 어느 순간에 일반적인 ‘전형’으로 재빨리 둔갑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경험에서 전형을 번역해내는 일이 문제가 될 수는 없겠다. 그러나 평론가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의 특정한 전형을 자신의 특수한 경험에 소급적으로 투사했다는 의혹에서 그리 자유롭지는 않을 듯하다. 전형이 소여(所與)된 것일 때 그것은 보편이 아니라 특수로 취급되어야 하겠다. 전형은 특수와 제대로 충돌하지 않으면 특수에서 보편으로 지양된다기보다는 한낱 특수에서 특수로 미끄러지기 쉽다. 이은지는 자신이 만났던 채식주의자에게서 “특정한 도덕 및 신념에 반하는 것들을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고, 울타리 안의 협소한 자기기만적 세계를 가꾸는 것을 정치적 실천으로 여기는 이”의 전형을 추출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정치적 실천이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그 누구에게도 훼손당하지 않겠다는 편협한 주관성의 표현”으로 타당하게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을 쓰는 필자에게서 느껴지는 일반화의 서두름이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가 어느 채식주의자와의 만남에 대한 약술에서 도약해 법의 울타리 안에서 진행된 촛불시위를 바라보며 “김빠진 축제”의 아쉬움을 느꼈다고 피력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이은지의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의 과감한 문제설정 덕택에 나는 비평적 문제의식을 이어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정치적 올바름’이 지난 문예지들에서 이렇게까지 언급된 적이 드물었다는 나의 놀라움3)은 이은지의 글 덕택에 착잡한 고민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음도 덧붙이고 싶다. 그 어휘는 때로는 냉소적 반어로, 때로는 옹호해야 할 당위로 흔들리면서 어지러이 발화되고 있었다.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답은 쉽사리 나올 수 없다. 이은지의 글을 반박한 임지훈의「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을까?」4)는 정치적 올바름이 동시대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만큼이나 정의하기 어렵다는 곤란을 확인시켜주었다.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면 동시대 문학 담론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어떠한 방식으로 실제로 소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해석하는 일이 따라서 필요하겠다.

2) 이은지,「문학은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하는가」,『문학3』, 2017. 3. 7.
http://www.munhak3.com/detail.php?number=970&thread=21r02r01
3) 복도훈,「‘도래할 책’을 기다리는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대한 비평적 소묘」,『문학과사회 하이픈: 문학성-역사들』, 2017년 봄호.
4) 임지훈,「비평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수 있을까?」,『문학3』, 2017. 4. 11.
http://munhak3.com/detail.php?number=1001&thread=21r02r01


문서 [주 1] #2017-k-critic-n5-1-PC1: 좌익 소아병

매리언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1934년이다. 그러나 그 용어에 내포된 사상과 관련된 최초의 비평적 언급은 소비에트 혁명가 레닌이 쓴『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0)에 등장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책은 오세아니아 대학도서관의 특별서고에서 먼지에 뒤덮인 채 발견되었다. 우선 책제목 ‘좌익 소아병’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임을 지적해야겠다. 거기에는 아동을 으레 미성숙한 존재로만 대상화하려는 혐의가 적지 않다. 그 책의 저자는 젊고 열성적이지만 경험이 부족하고 순진하기만 한 좌익분자들이 “겁나게 혁명적인”5) 것으로 착각하는 교조주의적 사상과 행동을 ‘아이’(小兒)의 치기어린 행동에 비유했다. 레닌은 그들 열성혁명가들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처방전이나 일반 법칙(“어떤 타협도 안 된다!”)을 만들어내는 것“을 ”터무니없는 짓”6)으로 일축했다. 의회는 부르주아적 산물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은 ‘귀족노조’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의회나 노동조합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좌익 소아병자들’의 주장이다. ‘실용주의적 타협’은 그들의 혁명적 순수함과 도덕적 염결성이 타락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오브라이언이 레닌의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 것은 흥미롭다. 오브라이언은 레닌이 칭찬했던 혁명가의 활동, 곧 짜르 비밀경찰 조직 ‘검은 100명대’에 혁명가들을 침투시켰던 방식을 모방해 윈스턴과 같은 오세아니아의 반혁명분자를 색출할 수 있었다. ‘이성의 간지(奸智)’는 짜릿한 반전을 선사하는 역사의 교훈이다.

5) V. I. 레닌,『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130쪽.
6) V. I. 레닌,『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73쪽.



3. 2017년 한국문학과 정치적 올바름의 풍경들

정치적 올바름은 차별적이고도 편견을 조장하는 언행을 삼가는 문화운동의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사디즘적인 모욕과 무시의 누습적인 문화 관행에 대한 반발, 국내 예술과 문학계에 국한시켜 말해보면 #예술계-내-성폭력, #문단-내-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SJW(Social Justice Warrior), 프로불편러의 문화운동과 대동소이한 정치적 올바름의 주장은, 그 어휘를 명시적으로 쓰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문학작품에 재현된 여성혐오(misogyny)와 남성 중심적인 문학(사)에 대한 반발과 페미니즘 문학, 성적․인종적 소수자 문학에 대한 옹호의 움직임 속에서도 엿보인다. 물론 페미니즘이나 퀴어 그리고 소수인종의 문화적 정체성 또는 차이를 옹호하는 운동을 정치적 올바름의 그것과 곧바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정치적 올바름은 부당한 무시와 편견 속에 노출된 성적․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동등하고도 형식적인 긍정을 유도하고자 하는 다문화주의적인 전략에 더 가깝다. 예를 들면 남녀관계의 신분적 불평등에 대한 여성의 반발은 여성을 부정했던 가부장제 사회와 남성연대의 문화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관계의 부정’으로 부를 수 있다면, ‘관계의 부정’이라는 운동은 한편으로 그 부정이 향했던 타자(남성)=관계를 재소환하게 될 것이다. 무시와 모욕을 수행한 집단에 대한 공개적인 항의, 신분적 평등에의 요구와 관철을 통해 관계의 부정은 상호 부정된 관계의 불편한 동숙, 즉 ‘부정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인정’(anerkennung)에 대한 욕망으로, 만일 그것이 부정의 상호관계 속에서 전개될 경우에는 ‘인정투쟁’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그러나 인정욕망 또는 인정투쟁이 무시와 편견으로 평가 절하된 정체성의 내용이나 집단의 차이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찰을 수행하는 전략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 부정은 부정의 관계로 쉽게 전환되지 않으며, 오히려 관계의 부정을 더욱 가속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극단적으로 고수할 수도 있다.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분리주의, 집단 내부의 차이에 대한 상호토론과 논쟁보다는 몰인정과 검열, 배제, 낙인찍기 등의 형태로 관계의 부정을 ‘물화’(物化, reification)하는 위험한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이다.7) 어떤 정체성 정치가 대개 문화적 인정에 대한 형식적인 주장을 공허한 방식으로 되풀이하거나 반대로 몰인정과 무시에 대한 반발만을 수행하는 데서 자기 존재와 운동의 의의를 재삼 확인하는 것에 그칠 경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은 정체성 정치가 수행한 ‘관계의 부정’이 물화되는 위치 어디쯤을 향하지 않을까 싶다.

7) 낸시 프레이저,「정체성 정치 시대의 사회 정의」,『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 62-63쪽.



3-1. ‘충돌의 과정 없이’ ‘깨끗이 도려내기’

‘정치적 올바름’이 그와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을 문학에서의 어휘의 활용, 소재, 모티프, 재현 등과 만나는 경우에는 더욱 골치 아픈 문제들이 제기된다. 이은지는 “최근의 문단이 특정한 신념의 공동체를 자처하는 모습이 자못 우려스럽다”고 쓰고 있는데, 그것은 문인들이 그러한 신념의 공동체를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그는 “정말로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문학은 좀더 ‘오염’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페미니즘 문학에는 페미니즘을 모르는, 혹은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현실이 기입되어야” 하며, “그런 더럽고 지저분한 충돌의 과정 없이 뜻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들을 깨끗이 도려내고서 의미를 획득하는 문학은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다른 대목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이 갔지만, 나는 방금 인용한 문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문학이 왜 뜬금없이 ‘신자유주의의 기율을 내면화한 자폐적 주체’로 귀결되는지 다소 의아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충돌의 과정 없이 뜻하는 바를 거스르는 것들을 깨끗이 도려내고서 의미를 획득하는 문학’이라는 구절이었다. 나는 이은지의 이 말이 동시대의 한국문학의 현장에 등장하는 작품을 조금도 고려하거나 매개하지 않은 비평의 독단적 고성(高聲)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이은지가 리뷰를 쓰기도 한 최은영의 중편「그 여름」은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4)를 연상하게 하는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 갈등, 이별 등을 ‘그 여름’이라는 추억과 회상 속에서 단지 “맑고 쓸쓸한 풍경”8)으로만 그리는 소설은 아니었는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물론 이 단편에서 이은지가 말한 ‘오염’을 기대하기란 어려우며, 또 그래야 할 이유도 없겠다. 하지만 회상의 장치는 두 연인이 헤어지는데 계기가 된 “계급적 다름과 젠더적 같음”9)의 간단치 않은 문제를 적당하게 봉합하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이은지의 리뷰 또한 ‘다름과 같음’의 문제를 인지했지만 그 문제의식을 이 소설을 읽어내면서 더 밀고나가지는 않았다.『2017년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그 여름」과 함께 실린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천희란의「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를 나란히 읽으면「그 여름」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은 더욱 짙어진다. 이 소설은 한국과 바젤이라는 공간적 차이를 설정하는데, 이러한 배경설정은 최은영의 소설이 시간적 회상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함께 비교해볼 만하다. 그렇지만 두 소설 모두 동성애와 규범적 이성애의 갈등, ‘계급적 다름과 젠더적 같음’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적대의 요소는 지금 여기가 아닌 시공간의 배경으로 물러나 가라앉고 마는 것은 아닐까. 동시대의 가장 쟁점이 될 만한 문화적․신분적 인정의 문제는 왜 시공간의 격차를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설정해야, 다시 말해 배경으로 물러서도록 만들어야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물결무늬의 명암(明暗) 같은 아름다운 문체로만 남은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이야기’가 그 자체로 못마땅할 이유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올해『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한둘을 제외하고선 동시대적인 현실에서 파생되어 나올 법한 뚜렷한 경향성을 담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작의가 앞서게 되었으며, 현실의 모순을 서사에 밀착시켜 힘겹게 마주하기보다는 인상적인 등장인물의 담화나 시적 이미지에 기대어 해소하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다. 아이러니적 고백, 멜로드라마적인 회고, 서간체 등 그다지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소설기법의 여러 장치와 현실을 환기하는 중압감 있는 소재 및 모티브 사이에는 긴장보다는 어색한 간극이 두드러졌다.
차이, 소수, 다양성 등에 대한 문화적 자기주장과 재현이 지배문화의 획일성, 동일성에 대한 정당한 반발과 이유 있는 이의제기에서 터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차이, 소수, 다양성의 풍성한 증거가 될 수는 없겠다. 차이에 대한 요구와 재현이 단일한 목소리만 내거나 다른 목소리를 압도할 때 차이는 동일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들이 비판했던 지난 시간의 지배문화가 그랬던 것처럼.

8) 하성란,「심사평」,『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7, 347쪽.
9) 이은지,「사랑이라는 역설」,『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73쪽.



3-2. 억압인가, 부인인가

서효인의 세 번째 시집『여수』를 읽게 된 것은 신앙 간증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제목의 한 신문기사10)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말을 빌리면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시에 드러나게 된 여성혐오적인 표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부분이 막상 내가『여수』를 읽을 때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여수』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가지 않았던 도시와 가 보았던 장소를 시인의 경험과 겹쳐가면서 읽는 나름의 재미가 꽤 쏠쏠했음을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시집을 읽고 나서 기사에 언급된 수정하기 이전과 이후의 시의 다른 표현을 비교해볼 수밖에 없었다.
기사에 따르면「서귀포」에서 4․3 항쟁의 역사적 폭력을 재구성하는 장면을 시인은 원래 ‘젊은 남자는 섬 말 쓰는 아녀자를 잡아서 궁둥이 사이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썼다고 한다.『여수』에 실린「서귀포」에서 그 표현은 “미아들은 섬 말 쓰는 사람들을 잡아다 몸 어딘가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로 바뀌었다. 원래의 표현이 왜 여성혐오적인 표현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일단 제쳐놓고 읽어보자. 물론 이 시구는 읽는 이에 따라서는 여성을 희생자로만 대상화하는 폭력적인 묘사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새로 수정된 시구는 폭력에 대한 보다 성공적인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정된 후의 시구에 폭력의 주체로 등장하는 ‘미아’는 다른 뜻의 미아(迷兒)로 짐작된다. 토박이가 아니며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미아’의 다른 의미와 ‘길을 잃고 미혹에 빠진 젊은이’라는 확장된 은유를 염두에 두더라도, 이어지는 시구를 읽어보면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죽었어. 누군가의 아버지를 죽이면서”라는 구절에서 폭력의 주체가 남성임은 짐작된다. 그러나 ‘젊은 남자’를 ‘미아’로, ’아녀자‘를 ’사람들‘로 바꿀 경우에 표현은 중의적이 되기보다는 중립적으로 얼버무려진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의 주체와 폭력의 희생 대상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수정되기 이전의 시구가 4․3 항쟁에서 발생했던 폭력의 한 양상을 오히려 거칠지만 또렷하게 상기시켰다고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편 기사에서 시인은「구미」에서 “공장에 다니는 여공들”이라는 구절에서 ’여공들‘을 ’젊은이들‘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마을의 노인들은 신작로 너머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을 미워했다”는 구절이 얻어졌다. 그러나 “적대감에는 이유가 없다”라는 강렬한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노인들의 알 수 없는 적의는 “입맛이 떨어진다고, 비린내가 난다”는 등의 환기를 통해 적실성을 얻는다고 볼 때, 적의의 대상이 ’젊은이들‘ 대신 ’여공들‘이 아니어야 할 이유를 찾기란 딱히 어렵다. 만일 ’여공들‘이라는 표현 그 자체가 문제였더라면 시인은「마산」의 첫 구절을 “자유무역단지에서 빠져나오는 이들은 여공이었다”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성 공단 젊은이들의 고단하고도 희망 없는 삶을 그린 이 시에는 “우리가 모두 학부모가 되면, 그때 우리는 모두 괜찮을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원래 이 구절은 기사에 의하면 “우리가 모두 아줌마가 되면, 그때 우리는 모두 괜찮을까”였다. 이번에는 ’아줌마‘라는 단어가 문제였던 걸까. ’아줌마‘ 대신에 중립적으로 성별을 환기하는 ’학부모‘라고 썼으면 이 시의 첫 구절은 왜 ’여공‘ 대신에 남녀를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젊은이‘로 쓰지 않았을까. 만일 ’아줌마‘라는 단어가 문제가 아니라면 ’모두 아줌마가 되면‘이라는 표현에서 문제는 무엇일까.
길게 쓰고 나니 약간 공허하면서도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금 쓴 문장들은 시에 대한 해석이었을까, 시인이 수정한 표현은 이전의 작품보다 현재의 작품을 더 낫게 만드는데 기여했는가, 수정되기 이전의 표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는 것과 수정된 이후의 작품을 읽는 것에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것을 기사의 제목처럼 문학의 “새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
표현을 수정하거나 대체하는 이러한 자기검열은 기사에 의하면 “표현의 자유나 상상력을 억압”하는 일은 아니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검열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와 상상력의 억압이니 하는 다소 소모적일 논쟁 이전에 그것이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의 의미에서 ‘억압’(verdrängung)의 한 작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 나는 억압으로서의 검열을 특정한 욕망이나 충동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억누름이거나 상상력의 방해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인지의 새로운 한 프로세스로 이해하고 싶다. 억압은 억압된 욕망의 내용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문화적인 현실에 대한 심의와 성찰을 동시적으로 이끌도록 만든다. 자아에 대한 억압의 행위자, 검열을 수행하게 하는 심급으로서의 초자아는 기존의 문화적 습속에서 볼 때는 자유로운 욕망을 꺾는 방해자로 간주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낳는 긍정적인 원동력이나 에너지로 전위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여수』에서 수행된 시인의 자기검열이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검열을 수행한 문학적인 예라고 간주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 든다. 오히려 시인의 자기검열에서 보이는 부분적인 비일관성 대신에 규칙을 의식적으로 도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공평을 기하자면 시인이 다른 곳에서 언급했던11) ‘페미니즘’은 좋은 의미의 문화적인 초자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여수』에 실린 마지막 시「죄인의 사랑」은「송정리역」과 함께 시인의 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시는 시집을 관통하는 방랑과 여정의 기원에 자기처벌이 있었음을 아프게 환기하고 있다).
자극적인 표현을 덜 자극적인 표현으로 바꾼다고 폭력이 줄어들 것으로 믿는 것은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 피해’로 바꿔 부른다고 민간인 살상이 줄어든다고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검열이나 완곡어법은 언어의 해방이 아니라 언어의 감옥이 될 공산이 농후하다. 그것은 프로이트적 의미에서무의식적인 억압-검열보다는 상처와 폭력의 적대에 대한 체계적인 ‘부인’(verneinung)에 가깝다. 그것은 단지 덜 자극적이고 덜 불쾌한 표현의 규칙과 예시를 만들고 그 규칙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 넣는 일을 선호할 뿐이다.

10) 이윤주,「“내 문학작품 속 여혐 수정” 새 풍경」,『한국일보』, 2017. 2. 23.
http://hankookilbo.com/v/f4735d3c868748e0b7d0ad857bb1930b
11) 서효인,「다시 만날 세계」,『문학과사회 하이픈: 세대론-픽션』, 2016년 가을호.



3-3. 김현의 ‘자연사’와 김훈의 ‘자연사’

김훈의 신작장편『공터에서』(2016)는 소아의 성기를 관음적인 시선으로 묘사했다고 일제히 비난을 받았다. 이 문제를 기사화한『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인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훈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아재스러움’ ‘꼰대스러움’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품에 반영돼 있다.” 그리고 “가부장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소설을 써냈을 때 소위 말해 ‘개저씨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12) 어찌 보면 깔끔하고 매끄러운 당구공의 인과성이라고 하겠다. ‘아재스러움’ ‘꼰대스러움’ ‘가부장 마인드’가 작품에 반영되어 ‘개저씨 문학’을 낳는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세계관과 작품의 재현은 일대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김현의 논평이 의식(가부장 마인드)이 존재(개저씨 문학)를 결정한다는 소박한 관념론의 산물임을 강하게 지적하고 싶진 않다. 나는 김현의 문장을 반박하는 대신에 그 문장을 시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싶어졌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당구공의 인과성은 김현이 시와 산문을 쓸 경우에도 그대로 경험되는 것인가.

12) 강푸름,「소설가 김훈, 신작서 ‘소아 성기 묘사’ 논란… “관음적 시선 불쾌”」,『여성신문』, 2017. 2. 15.
http://www.womennews.co.kr/news/111659


김훈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아재스러움’ ‘꼰대스러움’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품에 반영돼 있다. 가부장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소설을 써냈을 때 소위 말해 ‘개저씨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시집『글로리홀』에는 페미라이터 김현 시인의 ’인권‘과 ’페미니즘’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작품에 반영돼 있다. 페미니즘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시를 써냈을 때 소위 말해 ‘페미니즘 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첫 번째 문장에 설득력이 있다면 두 번째 문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첫 번째 문장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는 한에서 두 번째 문장도 김현 시인과 시에 적용할 때는 적합하다 하겠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졌다고 그가 그 생각을 작품에 반영한다는 인과론은 작가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게 아닐까. 왕당파였던 발자크의 소설에서 왕당파적 세계관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현실을 재현하면서 비판하는 리얼리즘을 읽어냈던 엥겔스는 괜한 헛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글로리홀』에서 과감하게 파괴적으로 펼쳐진 카오스적인 이형(異形)의 상처받은 말들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아와 세계의 잔해로부터 페미니즘적 세계인식과 가부장 마인드에 대한 비판을 읽어낼 수 있다면 또 모를까. 권여선 소설의 한 표현을 빌리면 세계관에 붓 달렸다고 믿는 것은 문학입문에서조차 다소 언급하기 민망한 신앙이다.
그저 인터뷰 수준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도 달리 생각해본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다른 글에서 김현은 앞서보다는 좀 더 다르면서도 강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작품에는 작품의 윤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강력한 필치로 이렇게 쓴다. “나는 혐오와 차별에 힘을 실어주는 모든 작품의 자연사를 믿는다. 그런 자연사를 믿는 일이 한국문학의 미래를 믿는 일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13) 도래할 미래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문장이다. 그런데 나는 김훈에 대한 김현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김현이 언급한 ‘자연사’를 김훈이 자신의 소설들에서도 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김훈의『칼의 노래』에는 선조와 수구세력을 위협하는 반란의 주동자로 소문이 난 ‘길삼봉’이 허깨비인지 실체인지에 대해 묻는 대목이 나온다. 그 질문은 처음에는 ‘길삼봉이 누구냐’였지만 나중에는 ‘누가 길삼봉이냐’로 바뀐다. 질문이 바뀌는 순간,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고 수천 명이 잡혀와 죽는다. 여성혐오적인 재현의 측면에서 김훈의 소설은 그에 대해 변론할 만한 윤리적인 자산이라곤 확실히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 정교하게 가공된 ‘자연사’는 이데올로기적 허깨비의 무망함과 허무함을 꿰뚫어보는 윤리의 소산임은 분명하다. 김훈 식으로 바꿔 물어보자. “‘작가와 작품의 어떤 부분이 여성혐오적인가’라는 질문이 ‘어느 작가와 작품이 여성혐오적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김훈 소설에 대한 김현의 비판은 전자의 질문에 집중되어 있다고 확신 가득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김현이 인터뷰한 신문기사와 문제가 된 소설에 대한 이런저런 반응에서 김훈 소설에 대해 새롭게 말해주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김훈 소설에 대한 거의 비슷한 비판적 인상과 코멘트, 논평이 더 흥미로웠다. 그것은 신문기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는 김훈 소설을 읽기 힘들어할 정도로 공감능력이 확대된 눈 밝은 독자들이 등장했다는 뜻도 아니다.
돌아가는 주변 상황을 보면 정치적 올바름은 문학작품의 여성혐오적인 측면을 비판하면서 다르게 읽기를 제안하는 것에 별반 관심이 많지 않아 보일 때가 있다. 다르게 읽는 것은 다르게 상상하거나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삶을 새롭게 꿈꾸는 일이다. 그러나 문학 읽기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은 그 문학작품이, 아울러 그 작가가 ‘여혐’인지 아닌지, 읽어야하는지 읽지 말아야하는지 판정하고 판정의 목록을 작성하는데 더욱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작품에 재현된 여성혐오적인 불인정이나 무시의 언표가 곧바로 작가가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편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남는 것은 작가의 신념에 대한 단속이다. 물론 여성혐오적인 작품이 여성혐오를 문화적으로 재생산하는 효과를 낳기에 재생산을 차단하자는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픽션 주 3].
한편 특정한 문학작품이 저절로 자연사할 것이라는 시인의 믿음은 모종의 진리를 전제로 한 것이리라. 물론 이 진리는 초시간적이거나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간 속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진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증명되는 진리란 없다. “작품의 윤리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결국 정치적 올바름은 무시와 불의의 신분적 위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참여 동등의 요구를 옹졸하고도 피상적인 검열로 치환한다. PC를 police의 준말로 취급하거나 사상경찰로 부르는 것이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한 비아냥은 아닌가 보다. 랑시에르를 빌리면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politics)를 주장하면서 치안(police)을 뒷문으로 도입한다. 랑시에르의 ‘정치’와 ‘치안’이 이접(disjunction)의 관계가 아닌 이분법으로 느슨하게 활용될 때, 그때, 정치는 선, 치안은 악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을 낳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의 환상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가 아니다[주 2]. 그것은 정치를 가장한 치안이다.

13) 김현,「자수하세요」,『서정시학』, 2017년 봄호, 36-37쪽.



문서 [주 2] #2017-k-critic-n5-1-PC2: ‘최후의 인간’의 정치와 도덕

정치적 올바름은 극단적으로 도덕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도덕이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다는 데서 문제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그리 정치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그리 도덕적이지도 않다. 정치적 올바름의 도덕은 위선으로 변질되기 쉽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인종적이고/이거나 성적인 폭력의 더욱더 새로운, 더욱더 정제된 형식들을 적발해내려는 강박적 노력”으로 비판된다.14) 지젝은 이러한 노력을 헤겔을 빌려 금욕주의(Stoizismus)의 공허한 자기의식의 한 판본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젝도 지적했지만 정치적 올바름은 불법적인 욕망에 체계적인 금지 목록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어느 순간, 금지행위 자체를 즐기는 열정의 화신이 된다. 금욕주의는 욕망의 단순한 비워냄이 아니라 욕망의 특정한 양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과 타자에게서 불법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비워 내거나 비난하는 행위에 PC주의자의 정체성이 자리한다. “그것은 문제를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자꾸만 새로운 답을 내놓는다.”15) 그러나 속지 않으려는 자는 길을 잃는다. 리비도를 금지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리비도 과잉이 된다. 리비도 과잉은 금지하는 대상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한편으로, 금지하는 대상보다 대상을 금지하는 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헤겔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행의 작인에 위치한 ‘양심’의 자기기만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선취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정신현상학』의「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 도덕성」의 세 번째 장인 “양심, 아름다운 마음, 악과 그 용서”에서 헤겔은 양심을 지녔다는 것을 언표하는 행위를 의무의 보편적 실천으로 착각하는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헤겔의 신랄한 말을 들어보자. “양심”은 “각기 다른 여러 도덕적인 실체들을 거세하거나 근절시키는 부정적인 일자(一者) 내지는 절대적인 자기”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특정한 하나의 의무를 이행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으로 정당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고 또 이를 행하는 의무에 준하는 단순한 행동일 뿐이다.”16) 한마디로 양심은 자신을 ‘절대’로 착각하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불과하다. 헤겔의 현상학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동하는 양심이 위선의 다른 이름임을 폭로한다. 양심은 교활하다. 양심은 타자를 향할 경우 “악한 타자의 의식을 불량, 비천하다는 등으로 일컫는 열성”(796쪽)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다시 자신의 공명정대, 선함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복귀한다. 그것은 악한 세상에 대한 무력하고도 탄식 섞인 “판단”을 “현실적인 행위로 간주되도록” 할 뿐이다. 양심은 “행동하는 대신에 다만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심정만을 토로함으로써 자신의 성실, 공정함을 입증하려”고 한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무력하다. 그러면서도 무력한 자신은 악한 세상과 타인에 대한 비판적인 감시자임을 기꺼이 자처하려고 한다. 그것을 곧바로 “위선”(797쪽)이라고 지적하지는 않겠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희화화하는 여성혐오적인 문학으로 읽힐 수 있음에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탁월한 소설적 비판을 수행한 필립 로스의『휴먼 스테인』의 한 구절을 빌리겠다. “성실성이 도처에 닿아 있지. 거짓보다 더 나쁜 성실성. 타락보다 더 나쁜 순진무구. 온갖 탐욕이 그 성실성 아래 감춰져 있어.”17) 자신의 오점(stain)을 인정하지 않거나 타자와 화해하지 않으려는 “두 자아 사이의 한복판”에 “신”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809쪽) 대신에 우리에게 도래하는 신은 다른 신일 것이다. 도처에 “자기만이 성자인 척하는 감정적 도취가 부활”18)할 것이다.
헤겔은 확실히 나에게 유효한 참조점이지만 정치적 올바름도 특수한 역사적인 현상이고, 그 나름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더불어 고려해야만 하겠다. 아마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다른 사회문화적인 분석과 이해도 잠시 가능할 것이다. 사실상 치안이라고 불러도 좋을 기성 정치에 대한 오래된 불신과 환멸,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공통의 선(善)에 대한 목적보다는 세계의 온갖 악한 양상들에 대한 공통의 공포와 방어로부터 이끌어내는 ‘공포 정치(politics of fear)’19)의 후기근대적인 양상은 지금의 한국사회가 마주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한 담론은 그에 대한 환멸과 불신으로 더욱더 도덕에 대한 논쟁으로 변하는 중이다. 주체와 타자는 자신을 끊임없이 악한 외부나 비가시적인 낯선 타자로부터 침해 받기 쉬운 취약한 정동으로 정의된다.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도덕은 ‘취약한 삶(precarious life)’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언행에 대한 제도적 규제와 금지서약, 도덕적 자기단속과 검열을 승인하는 것을 수용한다. 문화적으로는 취약한 정동으로서의 자신에게 불쾌와 해악을 줄 수 있는 타자의 문화적 모욕과 멸시의 언행, 각종 미디어와 문화상품에서 재현의 자극적인 양상을 즉각 나의 감수성을 침해하는 폭력으로 간주한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폭력적 과정으로서의 재현보다는 재현의 폭력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니체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에게 알맞은 정치이자 도덕일지 모른다. 미량의 독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안락한 꿈을 꾸고, 보호받기 위해 온기를 필요로 하며, 위험과 모험에 내맡기지 않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부터 자신과 타자를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든다. 그가 살아가는 대지는 점점 작아질 것이다. 인간은 벼룩의 장수(長壽)를 누리겠지만 그 종족에게서 삶은 휘발된다.

14) 슬라보예 지젝,『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410쪽.
15) 슬라보예 지젝,『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411쪽.
16) G. W. F 헤겔,『정신현상학Ⅱ』,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88, 766쪽.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를 표시한다.
17) 필립 로스,『휴먼 스테인 1』, 박범수 옮김, 문학동네, 2009, 269쪽.
18) 필립 로스,『휴먼 스테인 1』, 13쪽.
19) 나는 다음 두 책의 핵심요지를 참고했다. 프랭크 푸레디,『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 박형신․박형진 옮김, 이학사, 2011 및 프랭크 푸레디,『공포 정치』박형신․박형진 옮김, 이학사, 2013 참조.




4. [픽션, 주 3] “자극적인 내용과 이데올로기적 좌편향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최종판본의 신어사전을 만들려는 우리의 과업은 격렬한 이행기에 있다. 우리는 구어를 사용하는 과거를 최종적으로는 망각 속으로 이월하려고 하지만, 우리가 과거로부터 참조할 부분도 적지는 않다. 오브라이언이 레닌의 위장혁명가에서 위장경찰이 되는 법을 터득했던 것처럼. 다르면서도 비슷하게도 문학작품의 재현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작성한 아래 두 사례는 도래할 미래의 청신호 같았다. 2016년에 작성된 K대학의 다문화문제 중재위원회 문건은 문학작품에 ‘자극성 경고’라는 문구를 붙이고 상처받기 쉬운 학생들을 위해 작품을 가르치는 교수에게 감수성 훈련을 시행토록 했다. 한편으로 2015년 자유경제원에서 작성한 목록도 흥미롭다. 최인훈의『광장』은 두 목록에서 모두 언급된다.


이광수의『무정』?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여성 강간과 구타. 손창섭의「잉여인간」?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성희롱 및 방조. 최인훈의『광장』?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강간미수. 김승옥의「생명연습」?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돼지발정제 요힘빈을 언급. 김수영의「죄와 벌」: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아내 구타. 김훈의『공터에서』?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여아의 성기 묘사.


박민규의『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데올로기적 좌편향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경쟁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할 우려. 최인훈의『광장』? 이데올로기적 좌편향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남한의 고귀한 자유에 대한 왜곡의 우려. 신경림의「농무」? 이데올로기적 좌편향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과정을 비판 왜곡 우려. 황순원의「학」? 이데올로기적 좌편향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전시에 적을 풀어주는 충동적인 행동 우려.20)

20) 첫 번째 문건은 슬라보예 지젝,「정치적 올바름의 덫」,『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김영선 옮김, 글항아리, 2016, 51쪽의 예시를 참조해 작성했다. 그 중 하나를 들면 이렇다. “『죄와 벌』? 자극적인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노파에 대한 잔혹한 폭력.” 두 번째 문건은 다음 기사를 참조해 작성했다.「황순원·최인훈·신경림… 헬조선 조장하는 문학교과서」, 『미디어펜』, 2015. 9. 26.
http://m.mediapen.com/news/view/955611


목록은 앞으로 더 늘어날 필요가 있다. 횔덜린은 어둠 속에서 신들의 임재를 기다렸지만 그는 틀렸다. 신들은 무와 어둠 그 자체다. 무와 어둠의 신이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목마를 것이다.



추기: 원고를 보내고 나서 나는 내 글이 실리는 지면에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전개하는 글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서야 알게 되었다. 평론가 조강석의「메시지의 전경화와 소설의 ‘실효성’-정치적․윤리적 올바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단상」(『문장웹진』, 2017. 4. 1)은 정치적․윤리적 올바름이라는 전언의 가치가 소설의 실효성(플롯화)을 앞지르면서 제쳐둘 때 발생할 수 있는 재현층위의 여러 문제점을 소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조남주의 장편소설『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입증하는 글이다. 나는 이 글의 문제설정, 예술과 정치(도덕)의 절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쟁점에 대한 논의, 작품분석에 대해 별다른 유보 없이 동의한다. 조강석이 글의 마지막에 피력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일반론과 각론의 차원에서 두 글이 전개한 것과 같은 비평적인 논의와 토론이 다양하게 제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도훈
작가소개 / 복도훈

2007년 제 52회 현대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저서 『눈먼 자의 초상』, 『묵시록의 네 기사』


《문장웹진 2017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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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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