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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비판

  • 작성일 2017-06-01
  • 조회수 1,299

[비평in문학]



비판의 비판

-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의 의미를 향하여



김대산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사실적 근거와 논리적 일관성에 기초한 합리적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합리적 비판은, 많은 경우, 주관적 불만(족)의 객관적 표출로 나타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비평은 ‘객관적 불평’일 수도 있지 않은가? 혹은 객관성을 내세우는 것이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면, 비평은 ‘과학적 불평’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면, 비평은 과학적 객관성으로 위장된 주관적 욕망(항상 억압되어 있고, 항상 불만족스러운 상태 속에 있는 욕망)의 활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는가? 그렇기에 비평을 추동하는 주된 정동은 질투, 원한, 증오 같은 것이 아닌가? 또한, 그렇기에, 이른바 ‘비판적 지성’이란, 그러한 부정적 정동의 힘에 의하여, 자신의 주관적 욕망과 느낌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객관성의 효과를 장악하여 지배적 위치를 획득한 권력의지의 가면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비판적 지성에 기초한 과학이기를 원하는 비평의 진리 주장은 진리에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과학적 진리의 문제는 자주 정치적 권력(힘)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그렇기에 많은 과학적·정치적 논쟁들/투쟁들은 진리가 이기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다. 비평이 과학이고자 한다면(혹은, 비평이, 유희적 지식이건 진지한 지식이건 어쨌건 지식/인식과 관련된 한에서 과학적이어야 한다면), 비평이 추구하는 것 또한 진리일 수밖에 없다. 가령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자연의 진리라면, 문학비평이 추구하는 것은 문학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비평은 문학의 진리를 추구하는 문학의 과학(혹은 문학학) 같은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설령 그러한 이름의 과학이 아직 없고, 여전히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물론 여기서 ‘과학’이나 ‘진리’라는 이름의 의미는 어디에서나 일의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가령 니체나 그 이전의 누군가들이 말했던 ‘즐거운 과학’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 그 ‘과학’의 의미는 현재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과학’의 의미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 존재가 의심될 수도 있는 과학 자체, 진리 자체의 일의적(혹은 본질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거나 다의적 의미 중의 하나가 일의성을 가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이란 일반적으로 현재 통용되는 ‘자연과학’이란 이름이 함축하는 과학성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진리란 지성을 가진 사람(이른바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논리학’이 함축하는 진리성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과학의 의미가 근대적 의식의 지배권을 장악한 자연과학에 한정되어야 하며, 또 왜 진리의 의미가 사실과 일치하는 판단(혹은 이미 알려진 존재자들의 사태에 상응하는 지식을 재현하는 명제)의 진리, 즉 일상적으로 말해서 ‘맞는 말’ 혹은 ‘옳은 말’에 한정되어야 하는가?
과학 자체, 진리 자체의 일의적 의미, 본질적 의미가 없다면, 현재의 과학과 진리의 의미 또한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가 아니며, 다른 가능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혹은 만일 그러한 일의적 의미가 있음에도 아직 감추어져 있거나 잘 드러나 있지 않다면, 그 의미가 언젠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현재의 과학관과 진리관이 갖는 (파생적, 비-본질적) 의미의 한계 또한 명료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러한 일의적 의미가 있건 없건 간에, 현재 과학의 의미는 다의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학은 항상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과학들로 분열되어 있으며, 과학의 과학(즉 과학 자체의 본성을 밝힐 수 있는 과학, 혹은 지식 자체의 본성을 밝힐 수 있는 지식)이 밝힐 수밖에 없는 과학 자체의 의미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별이 있다면, 이때 ‘과학’은 자연과 인간(혹은 문화)의 구별에 따라 분열되고, 그때 그 과학들의 의미는 다의적이 된다(과학의 객체가 다르게 되고 다양해지면, 과학 자체의 성격과 의미도 다르게 되고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혹은, 만일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구별한다면(가령 딜타이나 가다머의 경우처럼), 그때 서로 다른 두 과학들 사이의 다의성과 이질성을 낳는 것은 자연과 정신의 구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이것이다. 그 두 과학이 ‘과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어떤 본질적인 관계성 속에 있는 한에서, 그 둘의 다의성 속에는 어떤 종류의 일의성이 작동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그 둘의 관계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구별하기는 구별되고 있는 것들의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어떤 유사성을 통한 공속성 없이 그저 다르기만 한 것들로 분리(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현재의 자연과학의 모델에 따라 정신과학의 의미를 한정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학과 전혀 무관한 정신과학의 의미를 찾을 수도 없다. 그 두 과학은 일의적 의미로 일치될 수도 없고, 다의적 의미로 분리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일의적인 것과 다의적인 것 사이의 역동적 긴장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유비적인 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문학비평이 전제할 수 있는 문학의 과학은, 문학이 자연보다는 인간, 문화, 정신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자연과학보다는 정신과학 쪽에 가까울 것이지만, 그때의 정신과학의 과학성은, 자연과학과 무관하게 분리되지도 않고, 자연과학에 일치하지도 않으면서, 그것과 유비적 관계성을 갖는 과학성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은 ‘유비analogy의 과학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유비적 과학성의 요청은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화, 자연과 정신 사이에 이미 유비적 관계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직관적 경험(혹은 경험적 직관)에 기초한다. 인간 영혼의 중요한 세 활동, 즉 과학적(지성적)/예술적(감성적)/종교적(의지적) 활동은 모두 여하간 그 발생적 국면에서 어떤 종류의 근본적인 경험에 기초할 수밖에 없으며, 유비의 과학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 유비적 관계성에 대한 직관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막연하며 희미하며 순간적이며 심지어 발생하자마자 망각될지라도, 삶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서로 다른 존재들을 꿰뚫고 있는 전체성, 통일성에 대한 느낌, 어떤 충만한 온전성을 예감케 하는 질적으로 특이한 감성적-인지적 느낌의 경험이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결코 결합될 수 없이 단절되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 가장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하늘(위)과 땅(아래), 빛(낮)과 어둠(밤), 선과 악 등이 어떤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방식일지라도 어떤 연속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혹은, 실재적(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또한 전혀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불(열)-물(액체)-공기(기체)-흙(고체)-광물-동물-식물-인간-신-천체(별)-천사-악마-유령-호문쿨루스-요정-귀신-괴물-드래곤-유니콘-불사조-스핑크스-인어-뱀파이어 등등은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느낌의 경험’이란 자주 개인적 취향, 성격, 기분, 기질 등으로 채색되며, 그렇기에 그 느낌을 불러일으킨 사태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적 기능을 할 수 없으며, 설령 그러한 기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인지적 오류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는 주관적(자의적)인 반응에 불과하기에, 그것은 과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왜 과학이 오류를 배제해야 하고, 주관성을 배제해야 하는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형성과정(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거치고 있고, 아마도 계속 거치게 될지도 모를 형성과정) 중에 있는 자기-의식적인 개별적 인간의 인식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과학에서 오류 없이 도달될 수 있는 진리, 주관성 없이 도달될 수 있는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오히려 진리추구에서 오류(혹은 비-진리)는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에서 주관(자기-의식적 개인)은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이고 결정적인 작인의 역할을 하고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의 과학에서는 진리와 비-진리, 객관과 주관의 대립적 구별 또한, 자기-의식적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면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본질적인 내적 관계성의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비평이 전제할 있는 그러한 유비의 과학에서 진리는 그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혹은 무지 속에서 발생 가능한 갖가지 부정적인 오류, 위험, 유혹적 요소들 속에서 새로움의 빛, 미래를 향한 길을 발견/발명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창조적 활동이 없다면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생성의 진리, 창작의 진리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적 주관성은 객관적 진리가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며, 치명적인 오류와 유혹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비-진리는 창조적 진리, 자유의 가능성을 억압하지 않는 관계적 진리가 태어날 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주관적 오류’의 발생장소는 느낌의 경험 자체에 있지 않다. 느낀 것은 느낀 것이며, 경험한 것은 경험한 것이다. 한 개인의 감성적 주관이 사태 자체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겪은 순수한 경험 그 자체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설령 어떤 동일한 사태 혹은 현상(가령 그것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든 한 그루의 나무이든 간에)과의 마주침에서 여러 감성적 주관이 서로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들 자체는 그 동일한 사태가 보여주는 다양한 질적 특성들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경험일 뿐, 그중의 한 경험만 ‘맞는 경험’이고 다른 경험들은 ‘틀린 경험’일 수 없다. 현상과의 진정한 마주침이라 할 수 있을 모든 감성적 경험은 그 자체가 전체적 진리일 수는 없지만, 반쪽의 진리 혹은 전체적 진리를 향한 잠재적 가능성이며, 여기서 오류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모든 경험은 그것이 경험인 이상, 전부 ‘맞는 경험’이며, 그 속에는 그 경험이 관계하고 있는 사태 자체, 현상 자체의 실재적인 질적 본성이 내재한다. 그리고 유비의 과학이 기초하는 느낌의 경험, 혹은 감성적 경험이 그러한 특징을 갖는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귀결이 뒤따른다. 실재는 현상과 분리되어 불가지적인 무엇으로 배후에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X가 아니라, 현상과의 본질적 관계성 속에서 감성적 주관에 알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낌의 경험을 통하여, 실재는 현상 속에서 자신을 알려 올 수 있다. 도대체 왜 실재와 현상을 분리하면서 불가지적인 물자체를 가정하는가? 근대의 자연과학의 방법에서 영향 받은 ‘비판의 방법’을 통해 바로 그 자연과학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던 칸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알려질 수 없는 현상 배후의 실재(혹은 물자체)를 가정하는 이유는 아마도 감성적 주관의 경험이란 믿을 수 없이 불안정하고 부정확하고 우연적인 경험이기에 결코 실재일 수 없는 현상의 경험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린 비판적 지성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판단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혹은 자연과학적 지성)은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느낌의 경험(항상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보여주는 미묘하고 구체적인 실재적 성질들을 무시하면서, 귀납적 일반화를 목표로, 그러한 질적 느낌들을 지성의 고립되고 고정된 도식적 형식에 들어맞는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양적이고 추상적인 감각자료들로 환원시켜 버리는 경향성을 갖는다.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인 유비의 과학은 그렇게 구체적인 질적 느낌을 추상적인 양적 감각자료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귀납적 일반화를 일차적 목표로 하지도 않을 것이며, 혹은 귀납적 일반화에 기초한 연역적 증명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령 ‘모든 사람은 죽는다’ 혹은 ‘모든 지상의 존재는 무게를 지니며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혹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동시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 혹은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이다’ 혹은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등등의 명제적 판단의 진리나 ‘질량보존의 법칙’ 혹은 ‘적자생존의 법칙’ 혹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법칙’ 같은 것은, 그것이 수적이고 양적인 메마른 지성적인 감각자료로 추상된 수많은 개별적 사례들에 기초한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도출된 것인 한에서, 문학비평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진리가 아니며, 심지어 그 판단의 진리성마저 충분히 적극적으로 의심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서부터 문학의 진리를 연역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대전제로 기능할 수도 없는데, 만일 그것이 상식이나 합리적 판단에 반하는 일이라면, 문학비평이나 문학은 그러한 것들에 반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판적 지성이 행하는 실재와 현상의 분리는 실재와 상징의 분리와도 맥을 같이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비판적 지성은 상징하는 것과 상징되는 것(이것이 실재이든 존재이든 의미이든)을 분리시키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렇기에, 가령 ‘언어는 상징이다’라고 말하면, 그때 언어는 상징되는 의미(혹은 의미-존재)와 분리된 상징하는 것으로만 파악된다(또한 실재와 상징의 분리를 전제하기에, 상징은 상징되는 것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을 잃어버리고 계속 상징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이동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게 근대철학의 인식론에서 사유와 존재가 분리되듯이, 언어와 존재(또한 언어와 사유)가 분리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직관적(감성적-인지적) 경험의 시원적 발생에서 언어, 사유, 존재가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는 공속성을 보여준다면, 그러한 분리를 가정하는 것은 시원적이고 발생적인 사건의 경험을 망각하면서 그 경험과 분리된 비판적 지성의 오류일 수 있다. 그렇기에 ‘주관적 오류’의 진원지는 그러한 사건의 경험에서 분리된 비판적 지성일 수 있다. 비판적 지성은 왜 그렇게 무엇이든 분리시키려는 경향성을 가지며, 자신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하는가? 도대체 비판적 지성의 정체란 무엇인가? ‘비판’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비판이란 근대성과 함께 떠오른 개별적 자기-의식의 자유로운 사유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비판은 근대적인 지성이 사유하는 방법이며, 비판적 지성의 분리시키려는 경향성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비판의 방법 자체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비판의 방법이란 바로 분리에 기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성의 작동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세계와 나, 혹은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때 그 둘을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이 상호관계성에 기초한 감성적 경험이라면, 그러한 분리는 또한 지성이 감성적 경험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분리란 비판적 지성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혹은 바라보기 싫은 어떤 것을 무시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하는 거리두기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판적 지성의 그러한 의식적 거리두기는 과학 이전의 자연적 차원에서의 무의식적인 분리의 사건이 이미 발생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계와 나, 객관과 주관, 자연과 인간, 감성적 경험과 지성적 사유 사이에는 이미 다시 건널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망각의 심연이 놓여 있으며,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이 행하는 실재와 현상, 혹은 실재와 상징의 분리는 비판적 지성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한 자기성찰로부터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며, 자신이 세계 자체나 자연 자체의 존재와 분리되었기에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자기고백이다. 결국 모든 비판은 그러한 자기-비판으로 귀결되며, 긍정적으로 이해된 비판의 방법이란 자기-의식적 개인의 내면을 향한 자기-인식의 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자기-인식이 세계, 자연,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성에 대한 인식 없이는 가능할 수 없다면, 그렇기에 비판적 지성의 밖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면, 그리고 비판의 방법이 그러한 자기 내면의 반성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는다면, 비판의 방법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극복되어야 하는 방법이다. 물론 그러한 극복의 가능성은 비판적 지성 자체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일에서 발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판적 지성은 명료한 자기-의식에 기초한 자유로운 개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우주론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비극적인 역사의 지난한 분리(분열)의 과정을 통해 획득된 개인적 자유의 가능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적 지성이 인간의 과학적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수적 능력이라면, 그것은 문학비평이 전제할 수 있는 한 가능한 과학인 유비의 과학을 위해서도 포기될 수 없다. 결국 문학비평에서 비판적 지성이 갖는 방법적 한계의 극복은 그것이 처해 있는 의식상태의 변형/변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식의 변형은 의식의 대상이 변형되면 의식 자체도 변형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의식의 객체와 주체의 상호의존적 관계성). 의식의 객체이건 주체이건, 고정되고 고립되고 정지된 고체적 실체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구되는 의식의 사유는 의식의 대상들을 상호 침투시키면서 물처럼 흐르게 하는 사유, 서로 분리된 고정된 형태들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결합시키면서 변형시키는 사유이다. 이때 유비적 통일성 속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대상들은 상징적 연관을 창출하는 자유로운 사유의 활동을 통해 구체적인 관계성에 기초한 이행의 운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과학적 목표는 추상적·평균적 일반성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구체적인 개별적 사례들을 지성적 도식에 맞추어 가공할 수 있는 감각자료로 간주하여 귀납적으로 추상된 일반성, 혹은 개별성과 분리된 보편성이 아니라, 개별성 속의 보편성, 보편성 속의 개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구체적 보편성의 요구가 또한 어떤 실재적인 원형적 존재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탐구의 대상은 원형적 이미지, 원형적 상징, 원형적 현상이다. 여기서의 이미지, 상징, 현상은 실재적 원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원형적 나무와 개별적 나무들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개별적인 방식으로 원형적인 나무 자체와 관련된 어떤 특수한 원형적 상징이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비평은 그것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쉽지 않은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판적 지성의 의식 속에 놓여 있는 잠재적 변형의 능력이 활성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의식의 지향성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비판적 지성은 일정한 지향성을 보여주는 감정과 의지를 가지며, 비록 외부와의 구체적인 감성적 경험에서는 분리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외부를 향해 있는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어떤 것과의 분리는 다른 것과의 결합이며, 어떤 것과의 결합은 다른 것과의 분리이다). 그러한 경험이란 바로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에 근거를 제공하고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신의 의지적 행위의 동기를 부여할 사실적 감각자료에 매달려 있는 경험이다. 의식의 지향성이 감각자료의 성격을 갖는 의식의 대상을 향해 있는 한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변할 수 없이 고정된 과거의 사실성을 향해 있는 한에서, 의식의 변형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현재를 과거로 후퇴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형을 중요시하는 문학비평에서 문학작품의 경험은 사실적 감각자료의 경험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다. 오히려 문학비평 혹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경험이 아니라 기억, 혹은 상기의 경험이다(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사유에서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어머니는 바로 기억이었다). 기억은 현재를 과거로 후퇴시키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전진시키는 일이다. 감각과 기억은 시간의식의 방향성이 다르며, 또한 그 둘은 질적으로 다른 능력이다. 그렇기에 기억은 감각의 이차적 재현이나 복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비록 비판적 지성이 머물고 있는 의식의 차원에서 자각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것일지라도, 자신이 아닌 것과의 공감적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존재의 활동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창조적 활동의 산물이다. 한 개인의 창조적 활동의 출발점은 감각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판적 지성에게 익숙한 감각자료와 결합되어 있는 기억이 아니라, 감각자료와 분리된 기억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감각될 수 없는 것, 혹은 감각되지 않은 것, 혹은 망각된 것을 상기하고자 하는 기억이다. 여기서, 기억은 상상으로 변형되며, 과거가 현재를 넘어 미래로 도약하며, 미래가 현재로 온다. 상상이란 예술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일이며, 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비판적 지성의 변형은 감각 경험과 결합된 사실적 의식(즉 일상적 의식, 자연적 의식)에서 자신을 방법적으로 분리시켜 기억의 경험과 결합된 상상적 의식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며, 문학비평의 한 가능한 과학성의 의미 또한 그러한 방향전환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산


작가소개 / 김대산

1974년 출생. 2006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집 <달팽이 사냥>(2011)이 있음.


《문장웹진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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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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