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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 작성일 2018-09-01
  • 조회수 4,166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답을 주는 소설과 질문하는 소설
― 임현의 「고두」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인아영





1. 이 소설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특집 《미투(#MeToo) 릴레이 매니페스토, 촛불1》1)에 실린 글에서 서영인 평론가는 김이설의 「부고」와 임현의 「고두」를 붙여 읽는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상당히 유사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두」에서 제자와 성관계를 맺어 그녀를 임신시킨 윤리 교사 '나'는 「부고」에서 아내가 집을 나간 뒤 강간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은희'의 아버지와 겹쳐 읽히고, 또 「고두」에서 윤리 교사 '나'의 아이를 임신하여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아이를 기른 연주는 「부고」에서 '은희'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여 임신한 아이를 키우게 된 여자와 포개진다는 것이다. 윤리 교사 '나'의 자기변명으로 이루어진 「고두」가 닫히는 시점에서,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의 아들에 의해 윤간을 당한 '은희'의 이야기 「부고」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 독해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을 시도해 보는 까닭은 두 소설을 엮어 읽었을 때에야 「고두」의 "교사의 독백으로 윤색되고 은폐된 연주의 존재가, 혹은 같은 피해를 당한 구체적 인간들의 실물성"2)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해의 목적은 「고두」를 폄훼하거나 단죄하려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비슷한 성폭력의 사건을 다룬 동시대의 두 작품을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 읽음으로써, 이 소설이 가질 수 있는 현재적인 의미를 확장해 보는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문학에 필요한 독법을 가다듬어 보는 동시에, 단독 작품에 대한 독해로는 가능하지 않은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핵심에 '소설은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이 간단치 않은 물음을 우리 모두 '겪고' 있는 시점에서 서영인 평론가가 굳이 「고두」라는 소설을 불러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2년 전이지만, 2017년 제8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 후로, '소설이 성폭력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독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초점은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기보다는 '(독자들이 처한 다양한 맥락 속에서) 이 소설이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에 맞추어져 있다.
이 글 역시 「고두」라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현상과 독법에 대해서 다루려 한다. 여러 작품들을 "젠더폭력이라는 사건들 위에 얹힌 동시대의 연결된 서사"로 읽는 것이 "미투 이후 문학비평가"4)로서 해야 할 일이라면,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자음과모음』 2018년 봄호)을 이 소설과 함께 읽는 것 역시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임현의 「고두」와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을 붙여 읽음으로써 이러한 소설들을 읽는 독법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 제기는 문학에서 문제작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특집은 미투 운동의 열기를 문학 장에서 이어가려는 취지로 마련되었다. 미투 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여성 평론가들이 응답하는 형식의 글들이 실려 있으며, 2018년 여름호에는 강지희, 서영인, 오혜진, 이경진, 장은정, 정은경 평론가가 필자로 참여했다.
2) 서영인, 「미투 이후의 문학비평」,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224쪽.
3) 이러한 시도는 고전으로 불리는 문학작품을 여성의 입장에서 새로 써본 『릿터』 13호의 플래시픽션(김이설의 「운발 없는 생」, 김보현의 「미망기」, 천희란의 「암굴의 살인」, 손보미의 「반딧불이」)이나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검토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과 같이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문학사를 새로 써보려는 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 서영인, 위의 글, 227쪽.


2.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 임현의 「고두」
「고두」를 둘러싼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가장 기민한 응답 중 하나는 황현경 평론가의 「윤리냐 도덕이냐」5)가 아니었을까. 「고두」가 수록된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의 해설을 쓰면서 임현의 작품들을 이미 꼼꼼하게 독해했을 그는, 이 소설을 불편해한 독자들이 "결코 간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설적 재현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며 그 해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주안점은 「고두」에서 제자와 성관계를 맺은 윤리 교사가 나름의 신념에 충실한 "꽤 도덕적"인 인물인 동시에 자기변명에 급급한 "덜 윤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이 인물은 "옳지 않으나 틀리진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에 놓인다. 긴 고백 끝에 결국 자기폭로에 이르고 마는 이 모순적인 인물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비윤리적 인물에 질질 끌려 다니며 기어이 윤리냐 도덕이냐를 사유하게끔 했다"는 것이 이 소설에 대한 황현경 평론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한 재현의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소설에 여혐 딱지를 붙이는 독해는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이 맞다. 그의 말대로 「고두」는 "윤리냐 도덕이냐"를 사유하게 하는 독법을 가능케 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명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고두」는 이러한 독법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가능케 하는가? 즉,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고 그녀를 임신하게 만든 윤리 교사의 변명과 궤변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윤리냐 도덕이냐"라는 보편적인 사유로 읽히는가? 먼저 '어떻게'를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은 중년 남성 교사인 '나'가 자신이 임신시킨 여고생이 낳아 기른 아이에게 훈계하듯 고백하는 방식을 취한다.6) 그리고 '누구에게'를 생각해 보면,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고백의 서사가 적어도 '윤리냐 도덕이냐'라는 보편적인 사유의 틀로는 받아들여지긴 어려웠던 모양이라고. 소설 안팎에서 밀어붙이는 이 목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왔다고 느끼며 그때마다 이 목소리로부터 소외되거나 대상화되었을 어떤 독자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말이다.
뭇 독자들의 비판적 반응은 「고두」라는 소설 자체를 향한다기보다는 이 소설의 서사를 쉽사리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라고 끌어올리는 독법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진 까닭은 「고두」가 "여혐 소재를 단순히 탐닉하거나 재생산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가치 규범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지를 폭로하기 위한 장치의 일부로 사용"7)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왜 그런 것도 모르냐는 준엄한 목소리에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반응과 독해가 억눌리거나 틀린 것으로 구획된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문제가 소설이 아닌 독법에 있다면, 이제 「고두」라는 소설에서 논의를 연장해 나가기보다는 이러한 독법을 다각도로 조명해 볼 수 있는 다른 소설을 함께 읽어 보는 일이 한결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니 방향을 바꾸어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만약 미성년과 성관계를 맺은 뒤 자신의 행동을 회고하며 변명하고 있는 화자가 「고두」의 '나'처럼 '중년' '남성' '교사'가 아니라면? 그처럼 존재의 조건만으로도 권위를 부여받은 화자가 아니라면? 예컨대 '20대' '여성' '학생'이라면?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좀처럼 드물게 재현되는 레즈비언이라면? 그래서 그녀가 가해자로 지목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미성년 여성이라면? 그것도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독법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5) 황현경, 「윤리냐 도덕이냐」,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6) 이러한 방식은 황현경 평론가가 독자들의 반응 중에서 "그나마 경청할 만한 비판"이라고 인정한 물음, 즉 "윤리와 도덕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하필 여제자와 잔 선생을 등장시켜야 했냐는 물음"을 촉발한다. 그러나 그는 이 핵심적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는 대신, 「고두」가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시작되기 전에 쓰였다는, 다소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이러한 사실 관계의 확인은 임현 작가를 불필요한 오해로부터 구제하는 데 필요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단 내 성폭력이 '폭로'된 시기는 이 소설을 둘러싼 독법과는 거의 무관하다. '문단' 내에서 성폭력 문제가 '폭로'되기 이전에도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문제로 고통 받아 온 사람들이 존재해 왔으며, 「고두」에 대한 뭇 독자들의 비판적인 반응은 그것이 '폭로'된 시기 자체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몸소 겪어 온 오랜 경험과 더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나마 경청할 만한 비판"이라고 인정한 이 물음의 타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 글은 어쩌면 그가 제기했으나 답하지는 않은 이 물음에서부터 시작된 글이다. (황현경, 위의 글 참조.)
7) 이은지, 「자기기만 시대의 도덕과 사랑」, 『한겨레』, 2018.1.21.


3. '유파고'를 죽인 자리에 ―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이 몇 겹의 복잡한 질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고 있는 소설이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일지 모른다. 이 만만치 않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줄거리를 소개해야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레즈비언인 20대 여대생이다. '나'는 자신이 '유파고'라고 부르는 건축과 교수 남성에게 메일을 보내며 무언가를 고백하겠다고 한다. (그녀는 메일에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유파고'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줄파추'로 바꾸어 쓴다.) 첫째로 그녀가 고백하려는 것은 자신이 세 살 때부터 자위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중년 남성인 '유파고'에게 당신의 다섯 살짜리 딸의 클리토리스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하며, 이런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자위'라는 단어를 '지위'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클리토리우스'로 바꾸어 쓰겠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녀가 고백하려는 것은 자신이 맹인학교 학생을 위한 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열여섯 살 여학생인 이테와 있었던 일이다. '나'는 "남다른 신체 발육과 당당한 자세"를 가진 건강하고 밝은 모습의 이테에게 수학을 가르치면서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날 아파서 수업에 빠진 이테의 집으로 직접 찾아간 '나'는 뜨거운 죽을 옷에 쏟은 이테가 옷을 벗고 몸을 샤워기의 물로 씻는 것을 돕는다. 씻고 나온 뒤 따뜻한 침대 위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이테에게 자위하는 법을 알려주게 되고, 이테는 "재밌어요. 유파고랑 하니까."라고 말하며 적어도 두 번은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테가 잠시 잠든 사이 갑작스러운 동정심에 휩싸여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핥는 순간 그 장면을 발각한 이테의 아버지에게 '나'는 고소를 당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유파고'에게 고백하면서, '나'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강요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끄러운 점이 있다면 이테를 동정했었다는 사실뿐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두 번」을 「고두」와 겹쳐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두 소설에서 모두 화자가 실제로 미성년자를 강제로 추행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고두」에서 연주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남긴 채 학교를 떠나고 「적어도 두 번」에서 이테는 '나'에게 자위하는 법을 배운 뒤 호기심을 머금은 듯 "또 해도 돼요?"라고 묻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년인 선생이 미성년인 제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은 뒤 스스로 그 사건을 회상하며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두 소설의 '나'는 모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말을 길게 늘어놓지만, 고백이 거듭될수록 그것은 자기폭로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고두」와 「적어도 두 번」은 '이성애자 중년 남자 교사'와 '동성애자 20대 여자 대학생'이라는, 정반대의 조건을 지닌 듯한 화자들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변호를 할수록 자기폭로에 가까워진다는 아이러니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비슷하게 읽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번」이 「고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긴 고백이 대상으로 삼는 청자다. 「고두」의 이성애자 중년 남자 교사 '나'가 자신이 임신하게 만든 여고생이 낳은 아이, 즉 자신의 가난한 자식에게 훈계하듯 고백한다면, 「적어도 두 번」의 동성애자 20대 여자 대학생 '나'는 자신과 한때 "은밀한 신뢰를 나눈 사이"였던 중년 남성인 건축과 교수에게 고해하듯 고백한다. 이 고백이 흘러가는 방향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고두」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가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를 향해 내려 보내는 고백이었다면, 「적어도 두 번」에서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가 권위를 가진 자를 향해 올려 보내는 고백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두 번」의 '나'는 청자인 '유파고'가 자신의 고백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임을 상정하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이해심이 많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유파고는 노. 유파고는 학생들의 앓는 소리나 넋두리에 질색을 하니까요. (...)
여러모로 유파고는 제 고백을 들어줄 만한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섹슈얼에 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으니까요. 이십대 여학생이 남자 유파고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겠죠. 저도 이런 편지를 쓰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유파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말이 대답이 될까요.
저는 매일 유파고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왜 이런 메일을 쓰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생각은 보통 '든다고' 하죠. 하지만 저는 유파고의 죽음이란 생각을 '만났습니다.' 지금부터 그 얘길 해드리겠습니다.8)

8) 김멜라, 「적어도 두 번」, 『자음과모음』, 2018년 봄호, 75쪽.


이 소설의 서두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가 '유파고'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만나야 했다는 사실이다. '나'가 '유파고'의 죽음을 상상한 이후라야 비로소 고백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그것은 '유파고'가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거나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며 "학생들의 앓는 소리나 넋두리에 질색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가 자신의 고백에, 아니, 어쩌면 자신의 존재에도 관심이 없을 '유파고'에게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어쩌면 「고두」와 함께 읽음으로써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두 소설의 두 '나'를 같은 자리에 포개는 방식이 아니라 두 소설을 연쇄적인 흐름으로 읽어내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고두」의 윤리 교사는 「적어도 두 번」의 건축과 교수인 '유파고'가 아닐까? 그리고 「고두」에서 윤리 교사와 성관계를 맺어 임신하고 학교를 떠나야 했던 연주는 「적어도 두 번」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미성년 여성을 추행했다고 고소된 여대생의 자리에 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두 소설의 구체적인 정황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한때 유파고와 은밀한 신뢰를 나눈 사이였다"는 「적어도 두 번」의 '나'의 말에 기대어 두 소설을 붙여 읽는다면, 이 소설들에 대한 새로운 독법이 가능해진다.
「고두」의 연주가 「적어도 두 번」의 여대생이 되어 윤리 교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발화하는 것만으로 부여받을 수 있었던 중년 남성 윤리 교사의 권위, 그래서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곧장 독해될 수 있었던 그 고백이 가진 권위를 삭제해야만 했던 것 아닐까?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독백'이 아닌 '고백'이 성립한다고 했을 때, 20대 레즈비언 여성인 자신의 고백이 윤리 교사의 것과 마찬가지로 (궤변이든 자기변명이든 자기폭로든) 어떤 목소리로 들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목소리가 가진 권위의 죽음을 상상해야 했던 것 아닐까?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주체의 성욕과 자위와 추행 자체가 너무도 낯설고 불편하고 곤혹스러울 누군가에게 발화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물론 이 소설이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목소리를 기입함으로써 이 목소리에도 어떤 권위를 부여하거나 힘을 실어 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김멜라 작가가 「고두」를 의식하여 그에 대한 소설적 응답으로 「적어도 두 번」을 썼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의 '나'는 「고두」의 윤리 교사의 고백이 발화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똑같이 서봄으로써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고두」의 윤리 교사의 궤변이 곧장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다루는 고백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적어도 두 번」의 여대생의 변명도 그렇게 읽히는가?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고 그녀를 임신하게 만든 윤리 교사의 난관을 이해했을 때처럼, 시각장애를 가진 미성년 여성을 추행했다고 고발된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곤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윤리, 도덕, 정치적 올바름, 보편의 문제, 인간의 이기심, 위선 폭로와 같은 단어들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에게 지겹도록 익숙한 이 단어들을 해석의 틀로 삼아 「적어도 두 번」의 '나'의 입장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왜인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긴 고백을 곧장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승화되지 못하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에서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어떤 독법에 대해 제대로 질문하게 된다. 즉, 「적어도 두 번」은 「고두」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게'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독해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 자체를 묻게 한다. 우리는 누구의 어떤 목소리에 익숙한가? 그리고 누구의 어떤 곤경을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 왔는가? 그동안 소외되었던 주체들을 적극적으로 문학사 속에 기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적어도 두 번」은 지금까지 어떤 독법이 이루어져 왔으며 앞으로는 어떤 독법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해 쉽고 선명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독법의 난항 속에서 오래, 그리고 신중하게 머무르게 하는 것. 그것이 「적어도 두 번」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독해의 공간이다.


4. 오늘의 우리에게 문제작이란
「적어도 두 번」이 이러한 성취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20대의 레즈비언 대학생, 그리고 그녀의 성욕과 자위와 추행이라는, 한국 문학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낯선 대상을 주체로 등장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최근의 한국 문학에서 퀴어라는 존재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는 주목할 만한 현상과도 맞물린다. "정체성을 고정하고 배치하는 규범적 권력을 넘어서서, 퀴어를 변화를 생산하는 범주로 사유"9)할 수 있다면, 퀴어라는 새로운 주체를 등장시켜 움직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국 문학 시장에서 '타자/소수자(성) 재현에 대한 실험'이라는 명분 없이 성소수자를 서사화하는 일은 거의 시도되지 않으며, 특히 '게이 서사'에 비해 '레즈비언 서사'는 그러한 명분의 중압감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10)는 지적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곱씹어야 할 타당한 지적이다. 다만 최근에는 소수자성 재현의 실험에 머무르지 않는 레즈비언 서사도 한국 문학에 적지만은 않다는 것을, 김멜라의 소설과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11)
마지막으로 「적어도 두 번」이 남기고 있는 질문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소설이 20대 레즈비언 여대생을 주체로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소설을 읽어 온 익숙한 독법을 질문해야 할 대상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란 무엇일까? 만약 몇몇 비평의 해석대로 「고두」라는 소설을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 독해해 낸다면, 「고두」는 중년 남성인 윤리 교사의 자기고백을 통해 어떠한 도덕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명제를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는 소설일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진리라고 확신한 것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서사라면,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말을 거듭 의심하게 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낙차를 사유하도록 만들어진 서사라면, 그것은 의심 자체가 아니라 '의심해야 한다'는 믿음이자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이 경우에 「고두」는 좋은 답을 주는 소설일 수는 있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아니게 된다.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이란 그 작품이 속해 있는 당대 사회의 가망과 한계를 동시에 건드리는, 그래서 그 사회에서 이미 굳어진 익숙한 가치판단과 해석의 방식을 물음에 부치는, 결국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 왔던 문학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는지 점검하게 하는 질문이 아닐까. 그런 질문으로서의 소설을, 우리는 문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9) 차미령, 「너머의 퀴어」,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56쪽.
10) 오혜진,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254쪽.
11) 최근 1-2년 동안 '여성 퀴어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서사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다. 김멜라뿐만 아니라 권여선, 김혜진, 이나리, 이종산, 최은영, 최진영, 천희란, 황정은 등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흐름 안에 있다. 지난 8월에는 이종산, 김금희, 박상영, 임솔아, 강화길, 김봉곤 작가가 참여하여 고전의 문학작품들을 현대의 퀴어 이야기로 다시 쓴, 큐큐퀴어단편선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큐큐, 2018)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작가소개 / 인아영

문학평론가. 201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blog.naver.com/itwontdo


《문장웹진 201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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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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