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풍경
- 작성일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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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리뷰(시)]
사유와 풍경
박동억
1.
줄곧 나는, 사유는 명사보다는 동사이며, 논리란 사유 이후에 얻는 결론이 아니라, 사유가 중단되고 난 이후의 잉여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논리적인 글인 비평은 사유를 중단한 언어이고, 비논리적인 시는 사유 속에 머무는 언어이다. 비평은 결론에 만족하는 정주이고, 시는 완결되지 않는 정신의 전진이다. 따라서 비평에 부재한 것은 근본적으로 시이며, 비평가의 과제는 사유하기와 결론짓기 사이의 긴장을 첨예하게 지속하는 문자를 발명해 내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묻자. 시가 우리에게 변화를 야기하는 사유라면, 사유란 무엇일까. 진정한 의미로 시는 순수한 현기증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세상과 타인을 천진한 눈동자로 다시 보게끔 하며, 우리의 사고와 관점을 전환하는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한 사유란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생각에 골몰한다는 관습적인 말로 표현되는 것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평온히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그러한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는 이성이 마비되고 윤리적 타성을 깨트리는 충격에 자신을 내던지는 희귀한 순간이다. 사유하는 자는 생각한다기보다 현기증에 휘청거리고 있으며, 그래서 침묵한다. 사유하는 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증언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실어증, 침묵하는 인간의 자세, 그것은 그 자체로 사유의 상형문자다.
따라서 비평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가 흔히 비평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논리적 귀결을 향해 수렴해 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은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고 해석된 언어를 이성적으로 배열하는 기술이다. 반면 시에 가까워지는 방식, 다시 말해 은유와 알레고리와 이미지에 가까운 언어를 활용하면서, 획득된 일시적인 결론을 폐허처럼 다루고 사유의 부재를 통해 더욱더 넓은 사유의 지평을 암시하는 방식 또한 가능하다.1) 이때 비평가의 의무는 시를 독자 대신 해석한다기보다 독자가 시라는 사유의 풍경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1) 조르조 아감벤은 『행간』의 서문에 이러한 비평을 유일하게 완수한 이로 발터 벤야민을 꼽는다. 그에 따르면, 특히 벤야민의 저작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야말로 유일하게 비평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목소리는 이미 시적이다. 벤야민은 은유적으로 말한다. "상징에서는 몰락이 이상화되는 가운데 자연의 변용된 얼굴이 구원의 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계시되는 반면, 알레고리 속에는 역사의 죽어가는 얼굴 표정이 굳어진 원초적 풍경으로서 관찰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벤야민의 문체다. 이렇게 우리는 비평문이 하나의 시 작품처럼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것을 목격한다. 간단히 말해, 벤야민에게 언어는 그 자체로는 옛 신성성을 잃어버린 몰락의 표상이지만, 몰락으로 인해 인간이 성취해야 하는 구원을 깨닫게 하는 계시이자 드러냄이다.
지평선은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늘어나는 직선의 행렬. 민치는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양치식물의 얼굴로 서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듯. 나는 다가가지 않는 방식으로 민치에게 다가간다. 민치는 말하지 않는 마음으로 멀리 멀리에서 민치 민치한다. 우리의 기억은 민치의 곁에서 자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바람은 바람처럼 크고 촛불은 촛불로 흔들리고 있었다. 엄마는 소녀의 어린 양. 엄마는 소녀의 어린 양. 엄마는 여전히 내 주머니 속에 가만히 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거야. 이제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기울기를 알 수 없는 감정의 계곡 앞에 서서. 민치는 민치 민치 울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자세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도는 자줏빛으로 타오르면서. 그것은 붉고 푸른 먼지와도 같은 것으로.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직선 혹은 곡선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워진 기억을 이어 나가듯 민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지 그것은 묵직하고 괴롭고 그립고 아픈 것으로. 내 차가운 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주던 누군가의 말없음 같은 것으로. 어둠은 빛에 가깝게 타오르고 있어서 내 두 눈은 점점 더 넓게 열리고 있었다.
― 이제니, 시 「우주의 민치」 전문
이제니 시인의 시는 구체적 현실에 기초하지 않는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현실성을 제거한 채, 감정이나 행위의 층위만을 남겨둔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이 생각하는 현실이나 존재의 중핵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게 그의 시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시 「우주의 민치」의 배경이 어디인지는 알기 어렵다. 일단 독자는 지평선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고 있고, 밤인지 우주인지 알 수 없는 어둠을 배경으로 '민치'는 '나'에게 다가오려 한다. 또한 '민치'는 사람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 대상이다. 주술처럼, 민치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며, 민치의 목소리는 '기억의 언저리'에서 울려 퍼질 뿐이다. 또한 이 시에 반복되는 일종의 선문답과 같은 역설들, 이를테면 "다가가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방식은 무엇이며, "말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현실의 풍경이 아니다. 표현의 복잡성과 달리, 만약 이 시의 정서와 행위를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 시의 풍경을 내면의 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가 환기하는 주된 감정은 그리움이며, '나'와 '민치'의 근본적 운동은 '다가옴'과 '멀어짐' 두 가지뿐이다. 따라서 이 시의 가까움과 멂은 물리적 거리가 아닌, 애달픈 그리움의 원근운동과 일치한다. 문맥상 이 시에서 위안이자 그리움의 대상인 것은 '어머니'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어머니에 관한 시가 아니라, '민치'에 관해서, 비밀에 부친 이름에 관해서 쓰고자 했다. 따라서 '민치'가 어떤 대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민치'란 당신이 그리워하는 모든 존재의 이름이고, 당신이 애써 기억해 내려는 '지워진 기억'으로 생각해도 좋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민치'와 '나'의 거리가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그리움의 대상은 언제나 가장 먼 것이다. 진정 그리운 사람은 몇 분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움이란 서 있는 동안에도 상대에게 다가가는 마음이고, 아무리 가까워져도 줄어들지 않는 간절함이다.
'민치'는 바로 그리운 타자다. 또한 그것은 '기억의 언저리'를 떠도는 불씨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최초에는 '촛불'이자 '자줏빛' 불꽃으로 생생히 타오르다가 '붉고 푸른 먼지'처럼 재로 남게 되는 불의 기억과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행복의 순간들이 그렇다. 그러한 순간은 찰나의 행복으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물들이고, 재와 같은 여생 동안 황홀한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이 때문에 시인의 분신이라 볼 수 있는 '나'가 '양치식물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프다. 꽃도 갖지 않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식물, 그러한 끈질긴 삶을 지속하는 풀에게 다가오는 불은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이미지의 전개로 보면, '나'와 '민치'의 만남은 풀과 불의 포옹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불길은 망각에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인 "묵직하고 괴롭고 그립고 아픈" 고통을 일으킨다. 그러나 소중한 기억이 그렇듯, 이 불꽃은 '주머니'에 넣은 타인의 손처럼 '내 차가운 손'을 덥혀 주는 위안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이러한 그리움의 진술 이후, "내 두 눈은 점점 더 넓게 열리고 있었다"고 쓸 수 있는가. 이 시를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 문장이다. 그리움에 사무치게 된 이후에서야, 시인은 눈을 크게 뜰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눈의 확장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근원적으로 이 시의 주제가 그리움이라면, 이 시가 지향하는 형식 또한 그리운 이를 호명하는 울음이나 노래의 형식에 가깝다. 민치라는 이름의 반복 속에서 '민치'는 노래이자 울음이 되기도 한다. 반복의 형식은 아주 단순한 사실, 즉 더 깊이 그리워하고 아파할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삶을 깊이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에게 풍경은 더욱 찬란하고 커다란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니 시인의 시는 독자를 깊은 그리움을 체험한 이후에 탄생하는 '두 눈'의 시야로 인도한다. 그는 어떤 결론이 아니라, 어떤 새로움을 향해 존재의 길을 트이게 한다. 이 길은 비교적 간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계의 크기와 찬란함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에게 세계는 무미건조한 평면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세계를 아프게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빛'이 솟아오르듯, 세계는 '넓게 열리는' 것이다.
2. 원근법적 풍경과 시적인 풍경
매일 마주치는 창밖의 풍경을 돌아보다가, 문득 그 모든 것이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이제니 시인의 사유는 바로 그러한 역설적 순간에 기초한다. 말할 수 없는 말, 다가갈 수 없는 걸음걸이, 아프면서도 뜨거운 기억 등이 역설적 표현으로 반복된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진실이기도 하다. 정말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깊이 그리워할수록 우리는 '거리'를 깨닫기 마련이고, 어떤 행복한 순간을 만날수록 그것이 곧 사라질 슬픔임을 안다. 또한 이제니 시인이 구축한 시적 풍경은 그러한 간명한 진실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후를 암시한다. 그러한 그리움 이후를 사는 존재인 인간을 가리킨다.
그리움에 기초한 자아는 주관의 소실점을 잃어버린 자아다. 역설적 표현으로 인해 멂과 가까움은 모호해지고 뒤엉킨다. 이것이 시적 풍경이 개진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시야임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일상적으로 현대인은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예컨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적 주체는 무질서한 상념이 아니라 체험을 객관적으로 구조화하는 '원근법'을 갖기 마련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풍경화처럼 그는 자신의 주관으로 모든 사물을 일률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고진은 그러한 주관이 개인 스스로 형성한 것이 아닌, 근대적 제도에 의해 형성된 산물이라고 전제하면서, 근대인의 원근법적 시선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고진의 논의는 근대소설의 시점에 국한된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할 테지만, 근대적 제도에 포섭된 인식틀의 성격을 보여준다. 통속적으로 우리는 풍경화나 지도를 바라보듯,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나 오래된 기억을 '멀다'고 말할 뿐이다. 심지어 관계의 필요성을 차츰 잃어 가는 현대인에게 집을 마주한 이웃은 '먼' 것을 넘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표현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시적인 풍경, 혹은 이제니 시인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시 「우주의 민치」로부터 발견한다. 멀고 가까운 것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내면의 풍경으로 본다면, 사실은 공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우리가 간절히 그리워할수록 '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리움이라는 주관적 정조로 객관적 원근법을 해체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 속에서 길을 잃으며, 그러한 현기증에 자신을 깊이 맡긴다. 타인 또는 타인의 기억을 향한 그리움이 자기 자신을 재창조하는 순간 속에 머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그의 시는 윤리적이다. 현대인이 상실해 가는 존재론적 감각을 그는 되살리려 하는 셈이다. 그의 시 마지막에 제시된 '넓은' 시야는 깊이 사유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시야는 좁다. 현대인은 앞서 언급한 가라타니 고진의 '원근법적 주체'보다도 하루하루 일상을 견디는 것조차 버거운 협소한 주체에 가깝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아픔조차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타인을 돌볼 여유는 더욱 없다. 따라서 이제니 시인의 시가 그리움을 품고 타자를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를 제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인간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시인의 시구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 현기증 속에서 이제니 시인의 시가 창조하는 것은 하나의 윤리적 풍경이다. 그의 '두 눈'은 끝내 타자의 풍경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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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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