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자기중심적인 : 『참담한 빛』
- 작성일 20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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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더하기(+)]
- 《문장웹진》에서 실시한 2010년대 문학 설문 결과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에 대한 리뷰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 『참담한 빛』1)
이소
1.
경계를 넘는 상상력은 예술이 태생적으로 지닌 욕망과 재능이기에, 2010년대 많은 소설이 ‘국경의 밤’을 넘나들었다. 물론 그 국경의 너머에도 다른 국가는 존재하는 법이라, 어떤 소설들은 국가의 자리에 무정부적 공간이 출현할 만큼의, 다시 말해 국가를 무너뜨릴 만큼의 막대한 재난을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감염의 시대인 지금, 우리가 실제로 목격하게 된 것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예컨대, 맥락으로 촘촘한 이 세계에 재난의 상황이 찾아올수록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기는커녕 막강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 막강한 공권력 앞에서 우리는 결코 무정부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최근 우리가 봉착한 상황은 이런 것이다. 국가나 ‘생명 권력’을 쉽게 비난할 수도,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도 없는 상황.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무언가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억압과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다고 더욱 강력하고 정교한 것들을 빽빽이 세우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돌파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이 막다른 곳에서, 이제 우리는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 모두를 감당하거나 혹은 눈감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전히 중요한 나의 신체와 당장 내 눈앞에 존재하는 너, 더 나아가 국가와 그 국경을 넘는 광대한 세계까지, 모두 우리가 보살펴야 하거나 혹은 포기해야 한다.
대체로 문학은 이 막다른 곳에서 ‘자기중심성’을 잃지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은 흔히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과 달리 이기적이라는 말과 전혀 유사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대체로 ‘타인 중심적’으로 책임을 분배한다는 것을, ‘정말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일수록 “내 탓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내 탓인 줄 알아서 잠을 이룰 수 없”2)는 끈질긴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 같은 문학의 세계 감각,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늘 문제의 중심에 자신을 놓아 보는, 이 답답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참담한 빛』에 담겨 있다.
1) 『참담한 빛』, 백수린, 창비, 2016.
2) 백수린, 「작가의 말」, 314쪽.
2.
현대미술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는 자신의 몸에 직접 석고를 발라 틀을 만드는, 눈과 입을 막은 채 틀 속에 갇혀 부동의 자세로 석고의 기화열을 견디는, ‘라이브 캐스트Live cast’ 작업으로 유명하다. 극심한 고통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는 이유는 단호하다. 그렇게 물질화된 신체만이 시간과 공간을, 내면과 외부를, 자신의 호흡과 외부의 공기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나의 신체’라는 매개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실물 크기의 입상은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 대신, 이민자들의 배가 들어오던 바다, 폐쇄된 탄광, 도시의 마천루, 아우슈비츠행 기차가 출발하던 역 등에 세워진다. 이렇게 신체가 놓이는 순간, 공간은 장소로 변모한다.
세계의 광장으로 뻗어 가는 ‘원심력’과 초고밀도 신체성으로 응축되는 ‘구심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곰리의 몸. 이 같은 몸의 운동은 백수린 소설의 운동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참담한 빛』의 인물들 역시 전 세계를 넘나들고 그곳에서 타자와 직접 조우하며 자기 삶의 중요한 계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들이 마주치는 이들은 예컨대 이러하다. 외국으로 입양된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낯선 사촌오빠(「시차」), 할아버지와 재혼한 화교 출신의 새할머니(「중국인 할머니」), 도쿄 사린 테러 이후 일본을 등지고 파리에 정착한 유학생 타까히로(「여름의 정오」), 쇠락한 리버풀과 아버지를 떠나 런던에서 임시직을 전전하는 쥬드(「스트로베리 필드」), 함부르크에 정착한 파독 간호사의 혼혈인 딸(「북서쪽 항구」) 등등.
그렇다면 화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질문은 명백하다. 그들과 나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복잡한 광장에서 사고처럼 마주친 우리를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끈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란 무엇인가?
3.
관광안내소의 직원은 꼭 찾아가 봐야 할 곳의 하나로 이민박물관을 표시해 주면서, 함부르크가 1850년과 1939년 사이 신세계를 향해 떠나간 500만 유럽 이민자들의 관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국경을 넘었을까. (……) 아버지는 그 시절 왜 그토록 배를 탔을까. 배를 타고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북서쪽 항구」, pp.240~241)
늘 술에 취해 항구 주변을 배회했던 아버지의 첫사랑을 찾아 아들은 저 멀리 함부르크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파독 간호사의 딸(실은 아버지의 첫사랑이 아닌 다른 파독 간호사의 딸이었지만)은 그를 ‘이민자들의 해안’으로 데려간다. 평생 단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향해 절반의 화해를 시도하는 이곳은, 공교롭게도 곰리가 이민자들을 상징하는 저 유명한 100개의 신체 입상들3)을 처음 세운 장소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그 후 순회 전시되던 이 작품이 영구 설치된 장소가 「스트로베리 필드」에서 쥬드가 떠나온 고향,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남겨 둔 그 리버풀 해안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흥미롭게도, 바다 너머를 응시하는 곰리의 신체들은 「북서쪽 항구」에서 시작하여 「스트로베리 필드」에서 자리를 잡은 셈이다. 떠났으나 떠난 게 아닌 이들과 떠나고 싶었으나 남겨진 이들이 뒤섞인 그곳에.
이처럼 세계를 향한 신체라는 매개를 잊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구나 국경이 갖는 공간성은 특별하다. 실제로 『참담한 빛』에 수록된 10편의 작품들 가운데 주요인물의 고향이나 현재 배경이 항구도시인 작품은 무려 절반이 넘는다. 아마도 이 같은 공간들이 갖기 마련인 헐거운 중력 때문일 것이다. 어떤 공간은 우리 신체에 뒤덮인 기존의 언어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워낸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무중력 상태로 해방될 리는 없다. 다만 잠시 헐거워진 틈으로, 정체성의 언어들 대신 희미한 공백이 생길 수는 있으리라. 소설은, 바로 이 공백에 우리의 기억과 경험이 각인되길 기도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9월 11일, 저 멀리 뉴욕의 참사를 텔레비전으로 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타까히로,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타까히로를 만난 것이 뉴욕도 아니었고 그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여름의 정오」, p.91) 아마도 이것은, 웅변적인 ‘인터내셔널가’의 음조보다 낮고 느슨한 연대의 노래, 국경 너머를 자신의 세계로 느끼는 섬세한 메아리,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간절한 혼잣말일 것이다. 소설은 이 조심스러운 독백을 유려하게, 그러나 읊조리듯 담아낸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서로를 향해 건넬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민족도 국가도 계급도 아닌, 밀실에서 빚어져 광장에 세워진, 세계를 매개하는 나의 몸일 것이다.
3) 안토니 곰리, <또 다른 장소>, 철, 100개의 등신상, 1997.
4.
이렇게 이국을 넘나들며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감각을 기억하고, 그 신체를 자신과 세계의 접점으로 실감하는 인물들은, 어린 시절 외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거나 세계에 대한 제삼자적 이해가 용이한 세련된 인물들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중산층 이상의 계급이거나 지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시간강사’나 ‘유학생’처럼, 더 이상 계급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 신자유주의적인 세련된 불안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세계시민이지만 한 나라의 시민이 되기도 어렵고, 제대로 된 방 한 칸 얻기 힘들지만 전 세계를 여행한다.
이렇게 시대마다 고군분투의 모양새는 달라진다. 역사의 진보적·계급적 전망을 확보하는 것이 70~80년대 리얼리스트들의 고민이었다면, 2010년대 ‘리얼리스트’ 백수린은 역사적·사회적 시선을 거두지 않되, 미래의 전망 대신 현재의 신체와 장소에 집중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확장된 공간의 연쇄를 자신의 몸으로 이어 가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중이다. 일생 동안 내 몸에 새겨진 것들은, 광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딪히며 일종의 화학반응을 경험하고, 그 반응의 화합물이 기억과 경험으로서의 ‘역사’가 된다.
물론 이런 방식의 역사가 기존의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역사처럼 공증 가능할 리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섬세하고 상냥한 사람들 사이에서 간절히 시도되는 일일지라도, 불화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공증 불가능한,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이 얽히는 이 같은 순간을 벤야민은 ‘위험의 순간’이라 불렀다. 정말 그의 말대로 역사가 단지 과거의 ‘원래’ 모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이라면, 세계라는 광장에서 나와 네가 부딪히는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4)으로서의 과거가 출현한 순간이리라. 소설은 이 순간을 향해 ‘참담한 빛’을 비춘다. 이 빛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라고 부를 만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붙잡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제 우리는 백수린이 광장 여기저기에 ‘곰리적인 신체들’을 던져 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와 과거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가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역사를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낯선 자들에 대한 무지를 선언하고 교차로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혼잣말에 가까운 이 선언과 기다림이 쓸쓸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지라도, 이 선언과 기다림이 광장의 첫 번째 윤리가 될 때만 우리는 ‘위험의 순간’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4)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15, pp.333~334.1997.
5.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만 같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 그저 지금 그런 기분이 든 것뿐 아닐까. (……) 도시가 조금씩 젖어 가고 있다. 도시를 이루는 선과 면들이 서서히 흐려진다. (「스트로베리 필드」, p.8)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지켜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햇살이 우리가 타고 있는 차를 부드러운 파도처럼 집어삼켰다. (「길 위의 친구들」, p.273)
제는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 그러면 여기는 어디지? 제는 묻고 싶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제 역시 알 수 없었다.
밤사이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높은 물 때」, pp.199~200)
켜켜이 종횡으로 직조된 감정과 앙금들이 임계치까지 응축되었다가 터져 나올 때, 이 참담한 세계는 자주 비에 젖거나 물에 잠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출렁이는 파도 앞에서, 범람하는 물살 위에서, 이들은 ‘알 수 없음’을 고백한다. 타자와 무지를 동시에 대면하는 일이 맑은 날의 소풍 같은 일은 아닐지니, 이들은 떠나지도 남지도 못한 채 “버스 안에 남아 비에 젖은 유리창을 통해”(「스트로베리 필드」, p.34) 도시를 바라보고, “물기로 얼룩져 가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 채 붙박이처럼”(「높은 물 때」, p.213) 서성인다. 비 갠 하늘을 바라보며, “그것이면 충분해”라고 조그맣게 읊조려 보다가도 곧이어 다시 씁쓸하게 자문한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여름의 정오」, 93쪽)
이제 우리는, 불타올라 파괴되고 뒤집히는 혁명도 없이, 끝없이 물 위를 출렁이게 된 것이다. 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고작 ‘알 수 없음’ 따위를 고백하는 우리의 모습이 초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초라함을 감수하는 것보다 “허무에 기대는 것은 차라리 쉬운 거라고”(「길 위의 친구들」, p.264) 조용히 항변한다.
소설이 기대하는 것은 어떤 순간이다. 강력한 점착성을 지닌 정체성의 언어 자리에 쉽게 흩어지고 미끄러지는 습기 같은 말들이 차오르는 그런 순간.
아델을 떠나왔으나 정호에게 도달하지 못한 무언가, 캐러멜처럼 열기에 녹아내려 그들 사이에 들러붙은 무언가를 정호는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호는 끝내 아델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참담한 빛」, p.178)
바람에 날리던 고추 씨앗처럼 떨어져 내리던 엄마의 말. 내 안에 영원히 침투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어디론가 흩어져 내리던,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면서도 내가 한없이 붙잡고 싶었던, 그날의 그 말이요. (「북서쪽 항구」, p.239)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이쪽에서는 출발했으나 저쪽에는 닿지 못한 연약한 목소리가 부유하는 어디쯤이라면, 이렇게 출렁이는 유동적인 세계에서 답을 찾는 일관성보다 긴급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민감함일 것이다. 이것을 ‘윤리’라 부르든 ‘정치’라 부르든, 2010년대 문학은 이 물음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곳에는 무수한 시험들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그 시험이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희미한 빛의 한복판”(「참담한 빛」, p.177)에서 가까스로 누군가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과 비슷한, 그 “고통스러운 것도 같고 홀가분한 것도 같지만, 동시에 참혹한 것도 같던 얼굴”(「참담한 빛」, p.178)의 표정을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한, 그런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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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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