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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생태계로

  • 작성일 2023-04-01
  • 조회수 2,496

현장비평

2023년 비평연재는 두 명의 평론가가 3회씩 연재하며,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비평가의 눈’이라는 주제로 보다 확장된 문제의식을 펼쳐 보인다.

시장에서 생태계로

김미정

〈연재를 시작하며〉


개인적으로 ‘생태’라는 말이 들어간 모임을 통해 여러 지역, 각 분야의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온 지 5년째이다. (기후)위기 시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다양한 문제의식을 주고 받아오고 있었다. 그래서일지 자연스럽게 ‘생태’라는 말과 그 사유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3회에 걸친 지면이 주어진 차에 그 고민을 연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한 자본주의 바깥 없음을 거듭 확인하는 오늘날, 상품미학 이외의 미학의 설득력을 고민하던 차이기도 했다. 가령, 문학을 시장이 아니라 ‘생태계’ 모델로 다시 조망한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1회 여는 글에서는 문학을 시장으로부터 생태계 모델로 이동시켜 사유해보려는 맥락을 담고 있다. 이 글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분들과, 새롭게 연결되어 주실 분들에게 미리 감사드린다.



1. 21세기 예술, 혹은 상품-시장이라는 헤게모니


개인적으로 2020년 전후의 한국 소설에서 예술가, 창작자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유독 눈에 띄어 그것을 화두 삼아 글을 쓴 일이 있다.1) ‘예술가 소설’ ‘소설가 소설’ 등으로 불리며 창작자 고유의 아이러니를 다양하게 서사화하다가 한동안 자취를 감춘 듯했던 메타픽션이 다시 등장하는 조짐이 신선했다. 그리고 다시 등장한 그들이 스스로를 ‘프리랜서’나 ‘글쓰기 노동자’로 인식하며 현대의 무수한 비정규 직능인의 한 명으로 정체화하는 인물의 양상은 충분히 비평적 분석 대상이기도 했다. 소설 속 작가 인물들이 처한 곤경이나 갈등의 양상은 전혀 상이하지만, 그 저변에 오늘날 예술가의 이중구속적 상황과 그 속에서의 분열상은 동시대적 정확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시대로부터의 소외를 자처하며 그것에 역설적으로 추동된 이들이 근대 자본주의 초창기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이었음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소외감은 일종의 자긍심이기도 했으니, 그것은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타자화 전략이나, 미적 자율성의 역설을 통해 예술의 정체성 및 그 존립 근거를 확인시키는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2020년을 전후로 한 소설에서의 그들은,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는 분열적 소외감을 숨기지 않는 이들이 되었고, 시민의 지위를 요구받고/보장받는 자리에 압박당하며 불안정하게 살아내는 이들이 되었다. 끊임없이 요구받는 창작의 성과, 그리고 당장 자본-국가 안의 시민·생활인으로서의 생존과 자기보존 등 그들의 압박감은, 그간 시대마다 이른바 ‘예술가 소설’이라는 양식에 맞춤해 온 소설의 형질변환마저 감지케 하는 것이었다.

실제 오늘날 많은 글쓰는 이의 삶이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는 이상 매년 5월쯤 되면 개인사업자의 코드를 부여받는 직능인으로 셈해지는 존재 이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하니 21세기 초 예컨대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고 일컬어진 상황(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오늘날 문학 양식 및 서사의 형질에까지 미친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게다가 작품마다 의식했든 안 했든, 개개인의 내밀한 신체 수준에서까지 작동되는 현 단계 자본주의의 품행통치의 효과 및 그것에 부지불식중 공모되기 쉬워진 우리 모두의 예외 없는 상황을 엿볼 수 있던 것도 징후적이었다. 신자유주의적 통치 양식이 ‘사회적인 것’에 개입하며, 개인을 특정한 권력순응 형상으로 예속시키는 주체성 생산의 기제로 작동하는 측면을 2020년 전후 몇몇 예술가 소설에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단, 지금 이야기가 작품을 매개로 한 이야기임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작품은 한 작가의 경험적 단편에 그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작품은 경험 세계를 대상으로 취한다기보다 경험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대상으로 취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들 속 예술가, 작가 형상은 단지 현실반영이나 소재주의, 양식 등의 문제로만 넘길 수 없다. 이것은 예술 생산의 구조 변화 양상까지 가늠케 한다. 달리 말해 지금의 이야기는 예술가의 변화를 넘어 그들이 창조하는 작품의 구조, 메커니즘, 형질 변화도 함축하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예술, 문학이 시장 안의 상품으로서의 위치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 문학도 상품인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냉소적 반문에 부딪힐 때도 많다. 예술에 있어서 상품-시장 관계는 그 어느 때에 비할 수 없는 헤게모니를 갖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령, 미적 자율성과 같이 자본주의 시장에 대해 스스로 타자화하던 예술의 이념조차 어쩌면 익명의 시장 속 예술적 생산이 제한적으로 보호되던 특별하고 짧은 기간의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세기 말부터 새로운 세기를 진단하는 이들은 다양하게 외부소멸 테제(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를 말해 왔다. 그리고 현재 자본주의 시장 바깥의 존재론을 상상하기란 정말로 어려워졌고, 상품미학을 제외한 미학의 설득력도 곤란하게 여겨진다. 20세기 말과 20세기 초, 삶vs.예술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겨루던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과, 전위로서의 예술(avant-guard)의 전략이 지난 세기 내내 그 변주를 파생시킨 셈이라면 이제는 그러한 각축전을 가능케 한 조건은 달라졌다. 오랫동안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온 것이 예술이었다면 오늘날 예술은 시간의 흐름에 아예 투항하고 협력함으로써 현재를 일탈한다고 말해진다.2)

이것은 예술의 시간 형식을 염두에 둔 말이지만, 그 공간 형식을 대응시켜 본다면 이런 발언도 썩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 이래로 작품 역시 시장을 모태로 하지만 오랫동안 자본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그 존재 근거를 확인해 왔으나, 지금 작품 역시 자본의 흐름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며 수요에 응답한다고.3)


1) 졸고,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 Boris Groys, In the Flow, Verso Books, 2016, 1장.(e-book을 참조했기에 페이지 대신 장을 표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3) 물론 이것은 제도예술 상황에 한한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익혀 온 미학은 사실 제도가 지금처럼 공고화하지 않은 시절의 것들 아닌가. 지금 과거의 미학 범주가 잘 통용되지 않는다는 불안은 실은 지난 세기에 진행되어 온 예술의 조밀한 제도화 과정에서의 일인지 모른다. 그 점에서 예술 개념과 범주의 확장, 변화를 고려할 때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2. 안으로부터 파열음들 : 2010년대 중반 예술노동 의제화의 의미


2010년대 내내 문화예술계는 내내 세기말 ‘바깥 없음’ 테제를 겪고 확인해 온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현실에서는 선제적 능동성을 취하는 작가의 등장도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오늘날 작가들은 소속사를 가지거나, 스스로가 에이전시를 만들어 자기 저작권을 관리하고 해외 시장과 직접 교섭하기도 한다. (그간의 여러 스캔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소유권, 지적재산권 등의 시장-법의 사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상위 원칙으로 여겨진다. 이런 과정에서 프레카리아트화한 예술가의 위기의식과 시스템의 불안이 ‘예술노동’ 의제화의 방식으로 등장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잠시 예술노동 의제화 사정을 복기해 보자면, 우선 2010년대 들어 예술가의 빈곤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11년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 보호’ 및 ‘복지 지원을 통한 예술인 창작활동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인 복지법’이 공포되고 2012년 시행된다. 예술인 복지법은 여러 함의가 있지만 우선 예술이 일반 근로기준법의 하위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특수한 활동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제도화되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늘 그것이 위기에 봉착했으며 그것을 포섭하는 바깥의 큰 힘이 압도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예술이 복지법의 이름으로 보호받기 시작하는 순간은 시장 안에서의 예술(가)의 취약한 위치 및 운명(경제적 명령으로의 실질적 포섭)이 명문화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복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예술을 둘러싼 자본-국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이해를 수반하지 못한 채 예술인 복지법은 서둘러 공포, 실행되었다. 그러하니 이 법은 “예술인의 실질적인 노동-창작의 특수한 권리에 대한 보호 장치로 기능하지 못”하고, 실제 예술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노동-창작 권리를 위한 많은 이슈들을 쏟아”4)내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비판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젊은 예술가 당사자에 의해 ‘예술노동’이 의제화된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예술노동을 의제화한 입장을 당사자 입장에서 첨예하게 드러낸 논의5)를 잠시 살펴본다.

예컨대 시각예술계 홍태림의 논의는 시각예술 분야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지만 근간에 놓인 사정은 다른 분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스스로의 작업 경험 속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연상”했다고 한다. 또한 “예술가들이 불합리한 조건 속에서도 예술장 내외로 자신의 예술을 유통하고자 갈망하는 이유가 대부분 예술의 에토스나 사회적 자산화에 관한 의식이기보다 예술가 개인과 소수의 집단을 위한 시장가치 추구나 인정투쟁의 장에서 생존자로 남아 자아실현을 하기 위함”이라고 여기게 된 과정을 노출한다.

이어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내가 봐온 예술가들은 대부분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시장, 권위주의, 인정 투쟁, 각종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노예임을 자처하며 무한경쟁에 뛰어들기에 혈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의 자율성이나 세계에 대한 비판의 시선 같은 말들이 다 말장난처럼 느껴진다.”라고 적으며, 예술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 “더 이상 잃을 자율성이 없을 정도로 자율성을 잃었다.”고, 그리고 “예술이 신자유주의로 봉합된 사회 속에서 자발적으로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유의미한 가능성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예술은 스스로 소멸을 선택할 만큼 급진적이지도 않다.”라고까지 적었다.6)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방금 자세히 요약했듯 ‘예술노동’의 개념화보다 그것을 주장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의 글을 가로지른 것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세계 속 예술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환멸의 정동이었다고 보인다. 이미 시장 바깥이 없는 듯 보이는 (시각)예술장의 문제뿐 아니라 그 안의 동료 예술가들 사이의 경쟁과 불신 등이 극단화된 양상도 선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예술에 내재한 노동을 드러내고 예술장의 불합리와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했고 이것이 곧 그가 택한 예술노동 의제화의 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예술노동’이라는 말은, “껍데기만 남은 자율성의 표면을 맴돌고 있”는 예술에 대한 인식 및 예술가의 노고에 대한 보상(부연)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관념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와의 직간접적 공명은 가령 2015년 문학계의 표절 스캔들 이후 논의 전개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2015년을 기점으로 문학계에서도 제도 내 불공정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공공성’은 문예위 및 새롭게 창간되는 잡지의 주요 기조가 되었다. 공공(문예위)과 민간(출판사) 모두 표준계약서 도입으로 상징되는 법적·제도적 정비를 진행했고, 문학계 내의 일종의 자원 배분(잡지 편집위원 체제, 원고청탁 시스템, 지원금 수혜, 원고료 표준화 등등)을 둘러싼 요구가 빠르게 반영된다. 익명을 포함한 많은 젊은 작가들의 좌담에서 문학계의 자원 배분 문제는 격렬하게 논의를 이어 갔고, 2020년에 이르면 저작권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들의 이상문학상 보이콧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원고료 이슈와 더불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비평가의 논의7)가 제출되기도 한다.

방금 언급했듯 특히 문화예술계의 예술노동 의제화가 본격화하는 2015년 가을은 문학계 표절 스캔들이 전 사회적 여론을 비등시킬 때였다. 문예지마다 긴급점검 취지의 특집과 좌담이 편성되었고 젊은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일제히 부상시켰다. 이때 작가들의 목소리8)마다 공히, 문학 활동이 오히려 스스로의 삶을 소외시킨다는 자조감 혹은 열패감이라 할 만한 감각이 짙게 배어나던 것 및 그것에 나 역시 공명했던 일을 기억한다.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예술 혹은 창작의 이념에 대한 믿음 혹은 예술적·문학적 성취는, 원고청탁이나 계약 건수나 수상으로 치환되는 감각은 작가들이 느낀 신자유주의 환경에 대한 환멸, 회의에 대한 현실수리이자, 그 자체가 기존 시스템의 기능 부전에 대한 대응인 셈이었다.

즉, 2010년대 중반 ‘예술 노동(집필 노동, 글쓰기 노동)’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각자의 장에서 겪어 온 소외를 비로소 공론화했다. 물론 그 소외감이란 일종의 ‘인정욕망-승인’의 시스템으로서의 등단, 추천, 공모, 수상제도 등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내적인 고민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구조화되어 버렸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 구조화되어 버린 소외는 제도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바로 ‘예술 노동’ ‘집필 노동’ ‘글쓰기 노동’ 등의 말과 접속한 것이다.

요약건대, 201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내내 한국의 문화예술계가 겪어 온 감각과 정동과 의제들은 공기처럼 자연화한 무한경쟁, 우승열패, 승자독식 등에 대한 피로감이나 무뎌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모두들 예술을 둘러싼 낭만주의적 신화에 한편으로는 발을 딛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장 안에서 ‘가치 있는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에 쫓겨 왔음을 인지한다. 상례화한 불안정이 제2의 자연이 되어 간다. 신자유주의의 이른바 ‘품행통치’는, 직역(혹은 정규/비정규)을 막론하고 자신의 불안정함에 스스로 적응하게 만든다. 이것이 처음에 이야기한 소설들에서 엿보았듯 오늘날 텍스트 역학의 조건으로 놓여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4) 예술인 복지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해외 사례의 비교에 대해서는 이동연, 「예술노동의 권리와 사회적 자본 형성을 위한 예술행동」(《문화과학》, 2015년 겨울호)에 그 내용이 상세하다. 본문의 인용은 이동연의 글 84-85쪽.
5) 홍태림, 「예술노동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문화과학》, 2015년 겨울호.
6) 이후 예술노동 논의 전개 과정 속 논쟁이나 설왕설래도 중요하다. 지면 관계상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그 논의야말로 오늘날 예술의 재개념화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과제를 직접적으로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7) 장은정, 「지나간 미래」, 《자음과모음》, 2020년 봄호.
8) 예컨대 좌담 「한국문단의 구조를 다시 생각한다 ― 작가들의 시선으로」,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 좌담 「한국문학의 폐쇄성을 넘어서 : 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살펴보는 문단 권력과 문학 제도의 문제」, 《실천문학》, 2015년 가을호.



3. 그런데 시장 모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 혹은 ‘생태계’라는 문제틀의 등장


이렇듯, 2010년대 예술을 둘러싼 상황은 사실상 1990년대 이래 (자본주의) ‘바깥 없음’을 체감으로 확인시켰고, 거기에서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오래된 이념 역시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듯 간주하게 만들었다. 시장과 불화하는 예술의 포지션과, 시장에 의해 매력적 상징자본으로 간주되는 예술의 본래적 이중성은 후자가 전경화하며 그 성격이 단순화한다. 즉, 나의 예술 활동이 누군가에게 착취되거나 그것에 공모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그것을 ‘노동’으로 명명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시장 경쟁으로부터 예술인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법·제도가 예술을 ‘직업군’으로 명시하고 예술가의 ‘권리’ 보호를 목적화하는 세계에서 예술 노동이라는 명명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삶의 제반 상황이 경제적 명령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상황에서, 그리고 생존 자체가 자본-국가의 시민권을 통해 보증되는 세계에서 예술이 노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이상한 상황이 된 것이다.9)

하지만 한편 이것이야말로 창작-감상-유통 전 방향에서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시대’(F. 제임슨, S. 지젝)의 정서와 인식 구조를 거듭 강화되는 방식으로 순환해 온 사례인지 모른다. 즉, 어떤 장의 논리와 언어 자체가 근본적으로 질문되지 않는 상황은, 설령 강력한 비판과 대안의 스탠스라 해도 그것을 공유해 온 장의 회로를 더 공고히 하는 효과를 지니곤 한다. 이것은 예술 노동 의제화의 의미와 유효성에 대한 부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 노동의 노동 개념을 노동력 판매-구매 시장이라는 납작한 모델로 환원시키지 않을 방법까지 고민하고 싶다는 의미다.

예컨대 (아주 많은 보충이 필요한 사례일지라도) 지금 나의 글쓰기 노동에는 ‘나’라는 한 개체의 노동력 이외에 다양한 요소, 행위소들이 개입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 글에 알게 모르게 개입된 무수한 사람들의 사고와 정동, 인용자들의 집필 노동, 동거견(犬) 콩이의 감정 노동, 그리고 글쓰기에 투여된 단위시간을 셈할 수 없는 비물질 노동 특유의 시간적 속성 등등. 오늘날 복잡화한 비물질 노동의 성격이나, 노동을 인간만의 것으로 특권화해 온 인식체계를 질문하는 가운데 지금 이 글쓰기 노동의 성격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시장 모델 속에서 모든 존재가 회로화되어 이해되는 어딘지 갑갑한 상황도 어떤 출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시장 시스템의 회로 속에서 이해되는 문학에 대한 고민을 잠시 다른 언어권의 상황을 겹쳐 생각해 본다. (단, 그들의 논의가 소설이라는 장르, 읽는 측을 염두에 두며 시작한 것임은 일단 유의해둔다.) 우선 한국에서도 간헐적으로 언급된 오츠카 에이지의 논의인데, 그는 2010년대 중반 일본 소설의 경향을 일별하는 지면에서 “소설을 포함한 ‘책’이나 ‘언어’에서 ‘정보’로서의 실용성·즉효성을 찾는 흐름”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그는 소설의 독자가 마치 기능성 식품처럼 소설이나 그 밖의 책, 언어 등에서 “‘감정’에 대한 직접적 효능을 찾는 독해방식”을 당연시하거나 “‘서플리먼트’ 같은 단순한 기능을 바”라는 경향을10) 그가 분석하는 독서 경향 및 출판계 분석은 소설의 변화도 당연히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이며 문학이든 언어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경제적 요인 때문에 변화할 수밖에 없거나 스스로 적극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을 전제로 펼친 것이므로 일종의 자본주의 시장 하의 소설 형질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도 강조했듯 잘 팔리는 문학이 옳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항간의 오해와는 다른 논의였다.

한편, 영어권 문학 연구자, 평론가인 그린월드는 2010년대 신자유주의와 현대문학의 관계를 다룬 저서에서11) 1990년대 초부터 미국 문학계에서 개인적 경험이나 정서적 특수성의 표현 및 전달을 문학 고유의 기능으로 특권화해온 ‘정동 가설(the affective hypothesis)’을 비판한다. 그녀는 이 가설이 20세기말 미국의 신자유주의 논리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분석하며, 미국 소설 독자들이 쉽게 코드화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방식의 소설 읽기에 익숙해진 상황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를 통해 촉발된 감정이 독자로 하여금 자기 삶에 투자하듯 등장인물의 정서적 특수성에 윤리적으로 투자하도록 한다고 말하며,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문학과 그 교육방식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의 논의는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문학이 창작되고 읽히고 유통되는 과정 전체에서 발견되는 경제 논리와 삶의 습합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유되는 문제의식과 언어란 충분히 고양감을 준다. 그들의 문제의식, 문제틀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소통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츠카 에이지, 그린월드 모두 2010년대 중반 자기 언어권의 소설 읽기의 상황에서 비슷한 것을 보고 있고, 내용과 방법은 다르지만 공명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들의 자본주의 단계 및 성격에 대한 인식이나 문제의식의 내용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2010년대 ‘감정’ 혹은 ‘정동’의 관점에서 독자와 소설의 관계가 달라지는 양상을 살피고 있고, 나아가 공통적으로 ‘생태계’라는 말을 통해 시장 시스템이 문학을 변화시켜온 과정의 곤혹스러움에 출구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생태계라는 말은 인간의 문명, 기술 등과 반대되는 이미지의 자연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오츠카 에이지의 글 도입부의 소제목은 아예 “생태계 속의 ‘문학’”이다. 그는 근대적 의미의 작가, 즉 자아와 세계의 길항의 흔적을 ‘문체’로서 남기는 작가 이미지를 준거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작가(작품)와 세계의 유기적 역동성과 이행의 현장을 시야에 두고 있다. 한편, 그린월드는 좀 더 최근의 정동, 신유물론의 이론적 전거를 가지는 ‘생태’의 관점을 보인다. 이때의 생태란 구획되지 않은 유기적 전체 속에서의 연결로서, 신유물론자 티모시 모턴이나 제인 베넷의 관점에 결정적으로 빚지고 있다.12) 그녀의 용법에 따라 문학을 생태계 모델 속에 위치시킨다면, 협소한 제도 문학의 틀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의 연결을 비롯하여 그러한 구획 자체가 서로 얽히고 서로를 구성시키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즉, 생태,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문학은 단순히 시장 모델로 환원되기 어려운 살아 움직이는 무엇이고 “책과 같은 비인간 행위자” 13)도 참여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작동방식의 필드로 전환된다. 또한 여기에서의 문학은 판매자와 구매자의 매개(상품)라는 특정 역할을 가질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생태계의 적극적 참여자이자 인간 활동의 결과물이고, 또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일단 세상에 공개되면 접촉하는 이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는 참여자다. 이러한 생태계에서는 어떤 개인에게 사유화되는 방식의 감정(정동), 작품, 행위 등은 질문의 대상이다. 창작, 향유 개념도 근본적으로 재정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이 근대적 사유와 존재론에 대한 질문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2023년 한국어 문학권에서 폐색감 짙어 보이는 시장 전면주의의 모델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여지를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또한 생태계라는 말을 경유한 문제의식이 한국어 문학계에서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 말은 일본어권, 영어권의 논의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그러나 전혀 다른 문맥에서 등장한 바 있다. 표절 스캔들로 여론이 비등(沸騰)했던 2015년 당시, 한 잡지에서 기획한 좌담회의 토론자로 참여한 시인·사회학자 심보선은 표절 스캔들과 그 자성(reflection)의 프레임을 향해 “한국 문학의 유기적 생태계”에 대한 상상을 제안한 일이 있다.14) 표절 스캔들을 곧 비평의 위기로 진단하고 성찰을 촉구하는 측과 대립한 그의 입장은, 제목이 명료히 보여주듯 문학을 ‘시스템’에서 ‘생태계’로 이행시켜 이해하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말한 생태계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관계를 필수적인 생성 요건으로 삼는 세계”로 묘사된다. 당시에 다용(多用)되던 시스템이란 말의 함의를 사후적이나마 생각해 본다면, 첫째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 둘째 구조주의적 결정론의 이미지와 무관치 않았던 것 같다. 이때 ‘생태계’로서의 문학(심보선)에 대한 상정은 확실히 어떤 강력한 구심력이나 압도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달 혹은 과잉(정동적인 것) 및 우발성으로서의 장에 대한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바가 있다. 이것은 이질적인 것들의 우발성 혹은 잉여나 잔여로서의 장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시스템에 구속된 존재이고, 제도는 언제나 일종의 거푸집 같은 장치(dispositif)지만, 존재나 사태는 온전히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기억할 수도 있게 된다.

지금 생태계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재배치하는 일에서 행여 공동체의 중요성이나 개인의 윤리 등이 환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공동체라고 말해 온 것, 또는 개인의 윤리라고 말해 온 것들의 전제를 질문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내면, 자아, 개인의 작동원리부터 차근차근 질문한다면 이것은 윤리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정확히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관계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자주 공동체나 윤리의 문제로 귀결되곤 한다. 하지만 그 말들이 이미 여러 부침의 역사 속에서 오해로 점철되거나 실효성을 설득하기 복잡해진 것이 되었다고 할 때, 과감히 그 말들을 재질문하고 다른 사유와 말을 고안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미리 강조건대 이 글에서의 생태계는 그러한 말과 전제를 질문하면서 사유될 개념인 것이다.


9) 서동진, 「예술가는 언제 파업하는가 – 예술과 노동 그리고 상품」, 《한국예술연구》 제36호, 2022. / 「예술-노동-물신주의」, 《청색종이》, 2022, 가을. 단, 서동진은 이런 이유에서 ‘예술 노동’ 개념의 현재적 복잡성과 아도르노적 의미의 예술의 자율성을 다시 환기한다.
10) 오츠카 에이지, 「기능성 문학론」, 『감정화하는 사회』, 선정우 옮김, 리시올, 2020, 199-200쪽.
11) Rachel Greenwald Smith, Affect and American Literature in the Age of Neoliber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12)Rachel Greenwald Smith, ibid, pp.24-26.
13) Rachel Greenwald Smith, ibid, p.26.
14)심보선, 「생태계로서의 문학VS.시스템으로서의 문학」, 《문화과학》, 2015 가을.



4. ‘자낳괴’의 촌철살인을 넘어서 : 생태계에 대한 상상


시장이 아니라 생태계,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생태 시스템(ecosystem)으로 바꿔 생각하는 일은 단지 같은 사태를 다르게 보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달리 상상하고 재배치할 수행성의 도구를 디테일한 말의 수준부터 재고하고 싶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늘 체감되는 것이겠지만, 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물론 말은 표현과 소통의 일차적 수단일지라도, 그런 동시에 늘 수행적 힘을 지니고 있다. 발화되고 소통되는 과정에서 그 말의 함의는 참여자들을 부지불식중 공모시킨다. 말이 함의하는 것들은 그 장의 참여자들을 구속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내면화=주체화하게 한다. (이것이 subject의 두 상반된 의미라는 점도 잠시 환기해 둔다.) 사소한 단어 하나가 바뀔 때 달라지는 것은 뉘앙스나 의미만이 아니다. 말의 디테일은 그것에 관여하는 이들의 사고와 신체를 은연중에 디자인한다. 일상의 말들은 인간의 의식에만 작동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물론 신체에 직접 작동한다. 말은 어떤 정동을 촉발하고 활성화시키는 버튼(트리거)이다. 어떤 인식을 세팅시키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버전을 달리해 온 자본주의는 오늘날 모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상정하며 복잡한 인간 및 비인간 생태계에서 신체의 의미나 존재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에 우리를 태만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가령, 호모 이코노미쿠스 같은 말은 신자유주의가 파생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비판의 수사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비판의 대상이 어떤 위기감을 느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이와 비슷하게 항간의 유행어로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 말도 오늘날 자본주의가 주조하는 일종의 주체 형상을 촌철살인적으로 지목하고 희화화했다. 구석구석에 깃든 자본주의의 디테일을 회의하고 자조하는 어떤 맥락에서도 이 말은 위화감 없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 촌철살인적 명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끝에서는 각자도생밖에 답이 없다고 여기거나 자조하는 것에 그친다. 비판의 대상에게도 어떤 치명타는커녕 너그럽게 용인되는 농담으로 사용될 뿐이다. 뾰족한 모든 것이 위험하게 여겨지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말의 고안과 발명에는 좀 더 전략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생태, 생태계라는 말과 그 사유도 단순히 이항대립적 반대자의 그것은 아니다. 이 글 역시 자본주의 바깥이 있다는 결론을 마련해 둔 것은 아니다. 단, 바깥 없음의 세계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더 예측 가능하고 회로화된 존재로 공고히 하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하고 싶다. 최근의 많은 사변(speculation) 철학과 소설들이 그것을 미리 조금씩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도 한다. 이 글 역시 바로 그 방법을 이리저리 고민해 보고 싶다. 바깥 없음이라는 조건을 어떻게 트릭스터처럼 이용할 수 있을지, 혹은 비유건대, 안으로 접힌 솔기를 어떻게 바깥으로 방향을 바꾸어 접을 수 있을지. 이런 고민과 함께 이후 문학 현상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려 한다. 다음 2회 차에서는 생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생태계로서 문학을 생각하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등이 이어질 것이다. 규모가 큰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셈이지만 결국은 모세혈관과 같이 작품의 문장 수준으로까지 논의를 섬세화해 보는 것이 남은 글들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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