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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 작성일 2023-09-01
  • 조회수 957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윤재민


   나를 박해하던 자들은 증오심을 온갖 수단으로 표출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적대감 때문에 정작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이 적대 효과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 감으로써 내게 언제나 새로운 타격을 입혀 고통을 지속시키고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만약 그들이 내게 희망의 빛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는 간계를 부릴 줄 알았더라면 지금도 거기에 나를 묶어 두었을 것이다. 가짜 미끼로 나를 또다시 그들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이어서 내 기대가 좌절되면 나를 새로운 고통으로 영원히 상처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 수 있는 방책을 미리 다 써버렸다. 내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음으로써 그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중략) 그 고통은 내게서 비명을 끌어낼지언정 탄식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며, 내 몸의 괴로움은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해줄 것이다.1)


   1. 1960s: 죽음

   1953년, 전쟁포로(POW) 교환 현장. 명준은 그간의 방황을 끝내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남이냐 북이냐. 두 국가의 대변인들은 ‘조국 재건’에 일익을 담당할 인텔리 명준을 포섭하기 위해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북측 대변인은 앞으로 시행될 참전 용사(명준은 인민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연금 수령 대상자라 말하며 명준의 ‘귀국’을 설득한다. 남측의 대변인은 명준이 일반 국민 열 명에 상응하는 인재라 높이 평가하며 개인적인 조력을 해줄 것이란 제안으로 명준의 전향을 촉구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명준은 이 달콤한 제안을 물리치고 중립국을 택한다. 두 정부의 체제와 그것이 내세우는 가치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명준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에서의 대학원 생활과 월북 후 지식노동자 생활을 통해 두 체제에 대한 가치 평가를 이미 마친 상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전부를 던질 만한 가치와 의미가 한반도 어디에도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포로 교환협상장은 이를 확인할 마지막 순간이다. 

   남과 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양쪽이 명준에게 제시한 조건은 당시 국가가 일개 국민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모든 포로에게 안정적인 노후 대책(연금)이나 출세로까지 이어질지 모를 주류 사회 연줄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준이 ‘조국 재건’에 널리 쓰일 인재라 판단하기에 내놓은 조건일 터이다.

   그러나 두 체제는 명준이 진정 갈구하는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가 원했던 건 노후를 책임질 복지나 공명심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 가면서 살 수 있는 삶”2)이라는 관념적인 이상(idea)이다. 대책 없을 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름다운 영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서술 기조 전체에 드리운 명준의 ‘철학적 사색’과 간간이 내보이는 창작 시는 ‘관념 철학의 달걀’이라 표현되는 명준의 이러한 ‘순수한’ 면모를 부각한다. 그러나 명준은 식민지 시대의 유약한 폐병쟁이 시인이나 백면서생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실제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실천가다. 그가 품은 관념은 단순히 시 창작의 소재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드는 거침없는 실행력의 원천이다.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3)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직접 남북을 오갈 줄 아는 강건한 인물인 것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주저 없이 사선을 넘나드는 명준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란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가 죽음으로의 선구(das Vorlaufen zum Tode)라 지칭하는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죽음은 주체의 실존적 차원을 구획하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 지평이다. 이에 입각하여,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생과 실존이 마주한 가장 절대적인 필연성이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한다. 죽음으로의 선구란, 죽음이 주체의 확고한 가능성임을 직시하고 실존적/철학적 차원에서 죽음에 다가가 실존적 지평의 한계를 넘어 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힐 가능성이다.4)

   월북과 전쟁이라는 실존을 건 기투에도 불구하고, 명준은 남은 생을 충만하게 할 ‘삶의 의미’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루어진 명준의 중립국 행은 그가 죽음을 불사하면서 얻고자 한 이상을 위한 결단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5) 명준은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생(의 의미)을 의탁할 장소를 찾아 헤매는 심신의 편력을 그만 끝내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이상을 좇던 진지하고 치열한 실천적 삶을 정리하고, 소소한 일상, 어쩌면 생의 딜레탕티즘으로의 도정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머나먼 중립국, 그곳에서 극단적인 이념 갈등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에서 누리기 어려운 소소한 행복이 명준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나 이념의 부조리한 압력과 횡포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도 뭔지 모를 마음속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무모한 짓을 거듭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명준은 중립국으로 향하던 중 마카오 인근 남중국해 어디쯤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지난 육십여 년 동안 수많은 해석을 생산한 이 죽음의 의미는 전혀 퇴색하지 않은 채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명준은 해방 이래 격동의 한반도에서, 남과 북 양쪽 체제 모두에 자신의 생과 이상을 의탁하여 그것들을 시험했다. 두 체제는 이에 호응하여 유무형의 다양한 가치와 기제를 내세워 ‘삶의 의미’를 나름대로 제시해 보지만, 명준은 끝내 이를 거부한다.

   두 체제가 명준에게 성심성의껏 제시한 ‘삶의 의미’는 그를 예속하기 위한 조치였을 터이다. 명준이 진정 익명의 군중으로 살고자 했다면, 아무 기반 없는 이국땅보다 모종의 조건을 보장받는 남과 북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사실 나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공해(公海)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사를 스스로 결정했다. 그의 죽음은 한반도에 태어난 ‘현대인’으로서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인 듯하다. 이로써 명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의미’는 명준 스스로에 자신에게만 오롯이 귀속된 채 남겨진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인간의 역사가 자의식을 선취하기 위한 인정 투쟁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자의식은 상대를 인정(recognition)하고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정립한다. 그러나 타인의 인정을 의식하면서 형성된 자아상은 성립된 이후 자기 확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서로에 대한 상호작용 외에 그 어떤 토대도 없는 가운데, 타인의 인정을 자아상의 확고한 토대로 ‘지배’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역사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지배하려는 주체의 본원적인 인간성, 인정을 사이에 둔 생과 사의 사투(life-and-death-struggle)의 결과다.

   명준의 인정을 영속화(지배)하려 하는 두 국가 체제의 경쟁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민 개개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남과 북의 ‘인정 투쟁’은 그 자체로 역사의 현장이다. 명준의 중립국행은 두 체제 사이의 인정 투쟁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의 거부이며, 남과 북이 나뉜 채로 진행되는 국가 중심으로 인민을 옥죄는 역사에 대한 사보타주다. 이는 당시 명준이 역사에 대해 행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에 대한 개인(인민)의 인정 투쟁은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루어진다. 


   2. 2020s: 죽음

   국가는 그 존재를 인정하는 개인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 자신이 통솔하는 개인들의 총합을 초과한다. 그 자신이 법과 규정의 결정권자라는 법 인격(法人)으로서의 메타적인 의지와 의식 없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법인이라 인식하는 메타 인지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힘이다. 이를 통해 국가는 법인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바운더리 안에서 개개인의 인정 여부를 넘어서는 결정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신의 ‘권리’에 대한 양도를 실제로 인정한 개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자, 정신적으로 국가를 인정할 인식이 불가능한 자(영유아 등), 이미 사망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이들에 대한 인정을 소유하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국가-법인은 이를 행사한다. 그렇게 전사자 위령비 등과 같은 죽은 자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출생률로 국가의 미래를 설정하는 일 같은 게 실제로 인정되고 실현된다.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문학에서 위와 같은 역사적 인정 투쟁과 관련하여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건 대체로 케케묵은 테제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미해졌다는 건 아니다. 역사를 사이에 둔 국가와 개인의 인정 투쟁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를 관장하는 역사적 주체로서 국가의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줄어들기는커녕 더더욱 교묘한 장치들로 우리 모두를 예속하고 있다.

   황모과의 SF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이후 『우다세』)(2022)는 국가에 대항하는 개인의 인정 투쟁을 동시대 문학의 테제로 회복한다. 이 소설은 ‘1990년생 백말띠 여아는 드세다’는 전근대 민간신앙과 남아선호사상(소설에서는 ‘여아불호사상’)의 ‘학살’ 생존자인 주인공 진리가 역사적 주체로 ‘각성’하는 과정을 다룬다.

   주인공 진리는 타인에 대한 폭력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다정하고 평범한 십대 여고생이다. 자신을 낳다 세상을 떠난 엄마가 남긴 레트로 문화로 또래와의 ‘세대 차이’를 느끼는 남다른 취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진리의 레트로 문화 취향은 매우 중요한 장치다. 누구보다 기민하게 아감벤적 의미에서의 동시대성을 인식하는 감각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또래문화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진리는 옛날 영화를 좋아하면서 다른 남성들처럼 드세지 않고 다정한 훈우와 첫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훈우는 진리와 사귀었던 기억을 잊은 것도 모자라 앞장서서 약자를 괴롭히는 폭력적인 인간으로 변해 나타난다. 진리는 이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과 동시대성을 공유하던 훈우가 아닌 ‘다른 사람’임을 직감한다.

   이러한 변화가 그저 훈우 개인의 문제라면, 적절히 배제하거나 훈육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곧장 드러난다. 진리와 훈우가 급우로 만난 남녀공학이 하루아침에 남자고등학교로 바뀌어 버렸다. 어제까지 멀쩡히 존재하던 진리의 동성 친구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중이다. 하루아침에 세상 전체가 나쁜 쪽으로 뒤집혀 버린 것이다.

   진리는 훈우의 갑작스런 변화를 통해 세상의 퇴행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를 인식하는 진리의 감각이 친구와 적의 구분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발견하는, 슈미트적 인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선만으로 반 아이들이 둘로 갈렸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우리’라는 이름이 뚝 갈라서는 순간이었다.”6) 이후 진리는 하루아침에 발생한 친구와 적을 구획하는 새로운 ‘결단’에 대항하는, 국가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파르티잔의 길로 나아간다.

   『우다세』의 플롯은 진리가 지닌 ‘동시대인’으로서의 인식에서 기인하는 정치적 감각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추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수자와 여성을 향해 폭력성을 분출하는 훈우를 비롯한 또래 남성들의 변화와 동년배 여성들의 실종과 망각은 국가의 ‘결단’에 의한 차원 조작의 결과로 드러난다.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이라는 시공간 전체를 관장하는 국가-법인 수뇌부 체제를 무너뜨릴, 어떤 1990년생 여성의 탄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선도적인 조치다. 새로운 유대의 왕이 탄생한다는 예언을 듣고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모든 영아를 학살한 헤롯왕의 일화(베들레헴의 영아 학살)가 떠오른다. 그러나 『우다세』의 백말띠 여아 ‘학살’은 한 인간의 선택으로 인한 전제주의적 폭력이 아니다. 소설의 배경은 ‘학살’이 일어난 지 17년 후인 2007년 대한민국이고, 그곳은 자유주의적 사목권력이 그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시공간이다. ‘여아불호사상’이라는 한국 가족주의의 집합 의지, 차원 이동 기술과 임상의학 낙태 기술, 거기에다 뭔지 모를 미래학(?)이 뭉뚱그려진, 통치성의 결과로 국가의 결단이 이루어지는 건 합당한 설정이다. 

   국가-법인은 진리와 친구들이 대면한 끔찍한 문제, 즉 가임기 여성의 몸과 시공간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조절하는 초현실적 테크놀로지를 관장하여 진리와 친구들의 죽음과 망각을 실현한다. 진리는 그에 따른 변화를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핍박받고 망각된 존재들 편에서 1990년 여성들을 압박하는 ‘여아불호’와 소수자 혐오의 집합 의지의 현현에 맞서는 인정 투쟁을 시작한다. 국가라는 ‘보편적인’ 법인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개인의 입장이나 삶이 뒤집히고, 그에 따른 모종의 변화가 집합적인 일반 의지로 현현하는 사태는 실로 역사의 현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준이 살았던 해방기 한반도가 그랬듯 말이다. 진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순간’에 국가의 정치적인 결단이나 일반 의지에 순응하지 않고 떨어져 나오는 동시대적 역사 주체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국가에 대항하는 진리의 역사적 인정 투쟁이 ‘학살’을 피해갈 운 좋은 위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때 노벨상을 꿈꾸던 야심만만한 과학자였으나, 지금은 평범한 빵집 사장인 진리의 아빠는 다른 차원에서 국가의 백말띠 여아 학살을 돕는 성공한 테크노크라트-기업인이다. 아빠가 자신의 꿈을 이룬 이 ‘모든 것이 나빠지기만 한 세계’에서, 1990년생 백말띠 여성인 진리는 예외적으로 보호 받는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국가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국가가 관장하는 역사적 결정권과 예속을 철저히 부정한다. “이 좁은 나라가 뭘 궁리하고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 조금 지켜본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나라라면 지구에서 그냥 사라져도 되지 않을까?”7)

   이러한 진리의 인식은 결코 가벼운 감상이 아니다. 국가폭력이나 사회문화적 집합 의지에 대한 비판의식을 초과하는 역사적 주체의 선언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우린 목격자이고 생존자이고 메신저야.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험가이기도 해. 디스토피아가 엔딩이라고 믿지 않는 낙천주의자들이지. 우리, 앞으로는 또 어떤 사람들이 될지 너무 궁금해. 그러니 얘들아, 앞으로도 나랑 함께 살아남자.8)

 

   진리는 국가와 일반 의지에 따라 죽음으로 내몰린 7만여 명의 백말띠 여성 그리고 소수자 친구들을 ‘생존자’라 지칭한다. 국가에 대한 생존자. 그(녀)들을 국가가 관장하는 역사와 생사여탈의 정치적 결단에서 살아남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진리는 생존자로 호명되는 이들과 함께, 국가에 의한 개인의 죽음과 삶, 무엇보다 법인이 관장하는 과거·현재·미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전인미답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또래와 함께 대안 세계를 꿈꾸는 진리의 생존자 의식은 남다른 문화적 감수성을 지닌 십대의 소위 이유 없는 반항을 아득히 초과한다. 진리는 일반적인 청소년 소설의 반항아들과 다르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겨우 그 실체의 일부가 드러나는 복잡다단한 통치성 체제의 공정을 경유하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인식론적 지도 그리기를 아주 정확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국가 대 생존자’라는 정치적 인식에 도달한 진리가 개인에 대한 국가-법인의 생사여탈 권한 여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건 필연적이다. “마음을 잡았다면 극단적인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테니까.”9)라는 진리의 독백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우다세』가 시사하는 진리의 정치적 각성 과정은 한국 사회 내부에 싹튼, 통치성과 그 예속에 대한 주체의 발본적인 인정 투쟁의 의지와 요구를 시사하는 듯하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그 주체가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탈정치적이라고 이해되는 계급적 감수성으로부터 발화하는 과정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특권층이라 할 순 없으나 ‘학군 때문에 눈 돌아갈 만큼 부동산세가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서민 계층의 청소년이다. 변진섭이나 옛 순정만화 같은 그녀의 레트로 취향은 사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끝없이 미분화되는 대중문화의 반복 체제(레트로 마니아)와 맞닿아 있다. 진리의 계급과 문화적 아비투스를 종합해 보면 그녀는 사실상 21세기 한국 사회의 청년·청소년들 주류 집단에 속할 터이다. 21세기 한국 사회가 허락한 딜레탕트적 삶, 즉 평온한 일상을 영위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이를 거부하고, 그 조건을 발본적인 인정 투쟁의 수단으로 철저하게 전유한다. 그녀는 초현실적 테크놀로지와 폭력적인 일반 의지의 통치성에 대항하여 무선호출기나 동인지 문화 같은, 흘러간 미디어와 서브컬처로 대항한다. 거기에는 근대적 ‘보편성’이 주조하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에 대항하여 이데올로기 기능이 사라진 내용물이나 매개물을 통해 역사의 동시 발생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문화 전달(transmission of culture)10)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시공간을 관장하는 국가-법인의 강도하고 절대적인 힘 앞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치고는 한없이 미약하다. 그럼에도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주류 계급(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서민)과 그들에게 허용된 문화 내부에서 발생한, 국가-법인에 대한 내파의 의지 혹은 욕망과 관련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한국 사회 젠더 문제와 국가폭력의 통치성에 대한 진리의 인식에 반론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운 좋게 주어진 평탄하고 안온한 삶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위기에 처한 친구들 편에 서는 진리의 모습은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시대와 동시대 문화에 대한 지극히 ‘올바른’ 인식과 용감한 행동 이면에는 동시대적 일반 의지와 통치성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견디기 어려울, 정치적 인정 투쟁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일반 의지와 영합하여 폭력을 추동하는 통치성에 대항하는 진리의 각성은 성차별, 배타적 민족주의, 소수자 및 약자 혐오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지지할 만한 ‘내용’을 취한다. 진리가 그려낸 인식론적 지도를 따라 생존자들 편에 서는 건 온당하다. 그러나 통치성에 대한 예속을 거부하는 진리의 스탠스가 현실에서 철저하게 관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주저할 수 있다.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기에 많은 부분을 뜯어고쳐야 하지만, 진리의 말대로 21세기 한국 사회의 일반 의지와 국가-법인의 통치성이 ‘존재할 가치가 없는’ 전면적인 투쟁의 대상인지 확언할 순 없는 것이다. 생존자 편에서 동시대적 일반 의지와 통치성 문제와 싸울 순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도래할 것이 무엇인지 진리처럼 무람없이 상상하고 단행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면에서, 『우다세』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역설을 따라서, ‘통치성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상상력의 임계를 시사한다.

   이 소설이 취하는 국가와 통치성에 대한 특유의 비교적 선명한 입장은 한국 사회의 역사와 집합 의지 안에서 영위하는, ‘살게 내버려두는’ 일상적 감각을 대상화하여 제시한다. 비교적 풍요로운 사회를 허용하는 작금의 통치 체제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몲으로써 유지되는 체제라는 게 명백하다면, 자신의 일상을 위해 집합 의지와 국가-법인의 결단에 적당히 순응할 것인가,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 편에서 전인미답의 인정 투쟁을 시작할 것인가.

   국가의 ‘생존자들’과 함께하겠다는 진리의 이야기는, 이러한 질문이 국가의 정무적 판단이나 사회적으로 선택된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남과 북 사이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다 죽음을 선택한 명준이 처한 딜레마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하는 부분이 있다. 국가-법인에 대한 개인의 인정과 관련된 진리의 딜레마가 명준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문제와 밀접하게 이어지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다세』의 배경인 21세기 대한민국은 『광장』 시대의 국가-법인보다 더 많은 군중에게 안락하고 풍요로운 일상과 문화를 영위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사회다. 이러한 일상은 국가-법인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언제든 뒤흔들릴 수 있다. 진리는 그 대상이 당장은 내가 아닐지 모른다고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임을 역설한다. 그녀의 모험은 오늘날 국가-법인에 대한 개인의 인정과 역사의 관계, 다시 말해 ‘거대 서사’와 맞닿아 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진리의 정치적 각성은 명준의 죽음이 남겨 놓은 질문을 우리 시대의 문제로 되돌려준다.

1) 장 자크 루소, 문경자 역,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문학동네, 2016, 9~10쪽.
2) 최인훈, 「광장」, 『광장/구운몽』, 문학과지성사, 2014, 40쪽.
3) 앞의 책, 60쪽.
4) 주체의 실존적 가능성으로서 죽음으로의 선구 개념에 대해서는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역, 『존재와 시간』, 까치, 1999, 317~357쪽 참조.
5) 최인훈, 위의 책, 185쪽.
6) 황모과,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문학과지성사, 2022, 35쪽.
7) 앞의 책, 209쪽.
8) 앞의 책, 250쪽.
9) 앞의 책, 149쪽.
10) 전 벅 모스, 김정아 역, 『발터 벤야만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문학동네, 2004, 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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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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