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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 작성일 2024-01-01
  • 조회수 1,088

   죽은 선생님의 사회에서 (1)

   ―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문학하기


송현지


   0. 복수극의 이면


   고백하자면, 나 역시 〈더 글로리〉1)의 애청자였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송혜교 분)이 계획대로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딸 하예솔(오지율 분)의 담임교사가 되자 복수가 언제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기다리느라 초조했고, 가해자들의 삶이 하나씩 망가져 갈 때에는 온 마음으로 기뻤다. 살인, 폭력, 리벤지 포르노 등이 얽힌 그녀의 보복 과정에는 분명 잔혹한 데가 있었지만 이를 즐기는 데 내가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문동은의 복수에 쉽게 동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폭력이 어떻게 행해졌으며 또한 어떻게 방관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각각의 에피소드와 그녀의 몸에 여전히 선명한 상흔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앙갚음을 정당하게 여기게 하는 주요한 요소였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지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복수의 와중에도 그녀가 ‘올바른’ 선생님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만큼은 진심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명초 1학년 2반 담임으로 학생들 앞에 처음 선 그녀가 앞으로 이 교실에서는 부모의 직업과 재력과 인맥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더 좋은 옷과 차와 집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를 괴롭히지 말 것을 엄포할 때, 하예솔에게 어떠한 해도 직접적으로는 가하지 않으면서도 죄 없는 그녀가 결국 받게 될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때, 나는 이 복수를 더욱 응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동은의 모습은 드라마가 그와 대비되는 교사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더욱 돋보였다. 문동은의 고등학교 시절 담임으로 학교폭력을 방관하고 오히려 가해자 편에서 합의를 종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던 김종문(박윤희 분)과 자신이 교사로 부임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치마 속을 촬영하는 추정호(허동원 분)는 정확히 문동은과 대극되는 자리에 있다. 작가는 이 ‘올바르지 않은’ 교사들을 극 중에서 모두 처단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위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김종문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으로 장학사가 되지 못할 위기에 처한, 역시나 교사인 아들(강길우 분)에게 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추정호는 하예솔의 친부인 전재준(박성훈 분)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는다. 2000년대 이전에 학창 시절을 보내며 교사의 물리적 · 언어적 폭력은 물론 젠더 폭력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이라면 이러한 결론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단죄가 이처럼 복수의 주요 에피소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이 복수극의 이면에는 교사와 학생 간의 오래된 위계 관계가 자리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그런데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문동은의 주요 전략을 다시 세심히 살펴보면 이는 충분한 설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문동은이 박연진 딸의 담임이 되려고 노력한 것 자체가 교사와 학생만이 아닌, 교사와 학부모의 위계 구도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며,2) 담임교사가 된 문동은을 보고 박연진이 느낄 위협을 상상하며 동은의 복수가 성공하리라 우리가 설득되었던 것 역시 이러한 구도에 대한 우리의 암묵적인 승인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복수극의 전제조건은 첫째, 교사가 학생에게 위력을 행사할 수도 있으며, 둘째, 그리하여 아이를 교사에게 맡긴 학부모 역시 그 영향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권력 관계는 일방향적이지 않다. 문동은이 복수에 방해가 되는 추정호를 제거하기 위해 전재준의 폭력성을 동원하는 데에는 학부모가 교사에게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배면에 깔려 있다. 따라서 이 복수극의 이면에 자리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 간의 다층적인 위계 관계이다. 교사-학생-학부모의 삼각 구도에서 교사와 학부모 간의 대립이 결국 학생에게 피해가 생기는 상황까지를 이 극이 다룬다고 할 때, 〈더 글로리〉는 표면적으로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결 구도를 띠지만 이면에는 교사와 학부모의 대립 구도가 자리하는 것이다.3)

   다시 고백하자면, 내가 처음부터 〈더 글로리〉의 이러한 이면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이를 더 이상 통쾌한 복수극이 아닌, 학교 내 권력 구도의 생생한 재현물로 다시 보게 된 데에는 극이 종영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 있었다.



   1. 공동의 사각(死角)

 

   2023년 7월 19일 저녁,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초등교사의 학교 내 사망이 사실인가를 묻는 질문들과 이에 대한 규명을 요청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학부모들의 문의에도 사실을 밝히지 않고 이를 은폐하는 방식으로 수습하려 했던 학교 측의 초기 대응에 대한 공분으로 학교 공식홈페이지 정책참여 게시판은 폐쇄되었고 언론화되기 하루 전에 이루어진 교사의 죽음이 사실로 밝혀진 이후에는 근조 화환과 추모의 글들이 교문 앞에 빼곡하게 놓였다. 7월 22일 첫 추모 집회를 시작으로 열 차례 이상 집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사한 어려움을 겪었던 교사들의 잇따른 죽음이 전해지며 ‘교사의 생존권’은 바야흐로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했다.

   이 문제에 대한 처음의 내 관심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자 몇 년 후면 초등학교 학부모가 될 나는 초등학교의 생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같은 선생으로서 분노했고, 아이가 앞으로 지내게 될 세계가 걱정됐다. 그런데 이를 개인적 분노와 고민으로 두지 말고 문학장에 가져와 함께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것이 현재 심각한 사회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교사의 위기는 최근 한국 문학장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어 왔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도 다뤄지지 않았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문제는 지난 담론의 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와중에 우리의 지난 논의들을 보완 · 확장해 갈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팬데믹을 거치며 돌봄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한국 문학장에서 주로 문제 삼아지고 있는 것은 돌봄 가치의 저평가와 돌봄 제공자의 젠더 불균형, 그리고 인종과 계급, 나이 등에 따라 이루어진 돌봄 노동의 차등 분배다. 이에 따라 무급 혹은 저임금 돌봄 노동자가 주목되었으며 피돌봄자가 미성년인 노동자의 경우에는 여성 양육자(모, 조모), 보육교사, 유아교사, 돌봄 교사 등에 문제의식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의 돌봄 노동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지는 동안 사실상 돌봄의 역할까지 배당받은4) 교사의 문제는 간과되었던 것이다. 다른 돌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치우친 심각한 젠더 불균형을 보이며,5) “가정 내 엄마들의 일과 가장 비슷한 일을 한다고 간주”6)되는 등 ‘여성화’된 노동으로 정의되어 온 교사의 돌봄은 왜 지난 돌봄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것일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 유급 노동자이자 사회적으로 선망 받는 위치에 있는 교사라는 자리가 그들의 위기를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으로 여기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는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간 한국 사회에서 교사는 사회적 약자와는 전혀 무관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2023년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직업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교사는 학생, 학부모, 교원의 희망 직업 순위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사회적 인식이 좋은 직업군 중 하나이며,7) 안정적으로 고용을 보장 받을 뿐만 아니라 방학이 있는 등 워라벨도 챙길 수 있고 학교 내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우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지난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에서 외쳐진 ‘교사 생존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낯설게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이 촌지와 같은 비리 행위로 발현되어 그 근절 정책이 2000년대 후반까지 논의되었으며 2016년, 소위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후에서야 이에 대한 대대적인 시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간 교사가 금품에 상응하는 대가를 학생과 학부모에게 보상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한다. 교사의 폭력과 비리를 소재로 사용한 영화(〈두사부일체〉8))가 2000년대 초반까지 흥행하고 ‘군사부일체’라는 말을 패러디하여 영화 제목으로 삼는 일이 가능하기도 했을 만큼 한국 사회에서 교사는 오랫동안 가부장적 질서 내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에게 폭언과 폭력을 퍼붓거나 정상성이라는 미명하에 학생들을 억압하는 교사를 한국 문학에서 발견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기인한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진 페미니즘 리부트와 퀴어적 전회 이후 이러한 교사들의 모습은 작품에 더욱 자주 등장했다. 


   치마를 하늘 끝까지 올렸다


   아이스케키


   철봉을 핥으며


   야, 장난인데 뭐 어때?


   어서 교실로 돌아가렴


   땡땡땡


   울리는 종소리에 따라서


   쟤가 너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수돗가에서


   닦은 눈에서는 물이 뚝뚝 쏟아지고


   선생님 저 오늘은 체육 시간에 뛰지 못할 것 같아요


   왜? 생리하니? 땡땡이치려는 건 아니고? 선생님이 휴지 줄 테니까 증거를 가져와 봐


   [······]


   이렇게 재미있는데 너는 왜 다 안 타려고 하니?


   [······]


   세상에 이것보다 무서운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 겁을 먹니


   이제 더한 것도 할 수 있겠다 


   다음 시간에는 선생님이랑 다른 것을 해보자


   선생님은 나를 꼭 껴안았다


   축축한 체육복 속 가지런한 어른이 자랐다


   ― 이소호, 「학교, 종이, 땡」(『홈 스위트 홈』, 문학과지성사, 2023) 부분


   이 시가 다루는 것은 남학생의 명백한 성희롱을 “쟤가 너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무마하려 하거나 생리혈을 휴지에 묻혀 생리 중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학생인 ‘나’에게 성적인 제안(“다음 시간에는 선생님이랑 다른 것을 해보자”)과 강제적인 신체 접촉을 하는 교사의 젠더 기반 폭력의 다양한 면면이다. 학교 내 성차별이 ‘교사의 말과 행동’에서 가장 쉽게 경험되었던 것으로 밝혀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설문 결과를 참조한다면9) 이 시에 그려진 폭력들은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 봤거나 학교에서 경험했던, 위계에 따른 젠더 폭력에 다름 아니다. 2018년,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이루어진 ‘미투운동’의 흐름에서 학교 내 공공연히 발생했던 젠더 폭력 역시 ‘스쿨미투’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공론화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피해자의 증언으로 읽히는 이 시의 의미는 상당하다. 미투 운동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은 현재, 가해교사에 대한 징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스쿨미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의 시의성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젠더 폭력 가해자로서의 교사와 피해자로서의 여학생이라는 구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평면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로부터 10년 전, 다른 여성 시인의 작품에서도 “여자로 태어났으니” 경험해야 하는 일들을 악담처럼 퍼붓는 “학생 주임”과 생리 중인(“피가 묻을까 봐 다리를 최대한 오므리고 있었는데”) ‘나’가 그러한 폭언을 감내하고 있는 장면(김혜순, 「출석부」,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사, 2011)을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읽기에는 2020년대부터 가시화되었던 학교 내 가해자 피해자 구도의 뒤바뀜, 그러니까 학생이 가해자이고 (여성) 교사가 젠더 폭력의 피해자인 다수의 현실 사례들이 작용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의 <학교 내 페미니즘 백래시와 성희롱 · 성폭력에 대한 교사 설문조사>(2021)에 따르면, 여성 교사의 41.3%, 특히 20∼30대 여성 교사의 66%가 최근 3년간 성희롱 ·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하였으며, 그중 학생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여성 교사가 55.8%로 가해자가 학생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성희롱 발언을 하는 학생의 연령대도 차츰 낮아지며 젠더 관련 교권 침해는 심각한 상태다.10) 가해자로서의 교사와 피해자로서의 학생 구도가 오랫동안 작품에서 반복 · 재생산되었던 것은 오랜 폭력의 역사를 방증하는 것이며, 현재에도 권력에 의한 교사의 젠더 폭력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소호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변화한 현실들은 이제, 이러한 상상 너머에 젠더 폭력 피해자로서의 교사도 있다는 점 역시 문학이 섬세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음을 요구한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교사란 이소호와 김혜순의 인용 시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폭력적인 존재거나 이 글이 제목에서 빌려온 고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1) 속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엄스 분)처럼 이상적인 존재로 이분화 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악마 혹은 성직자로 교사를 타자화 하는 사이 교사의 구체적 얼굴들은 지워졌다. 지난 우리의 문학이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이분화 하여 바라보는 태도를 여성혐오로 지적하며 여성을 입체적으로 다룸으로써 이에 대항하고자 했다면 이제 이러한 노력을 다른 대상에게도 확대하여 적용해 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2010년대에 발표된 김승일의 「다음」과 같은 시를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문학은 이러한 시도를 어쩌면 예전부터 해왔던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읽어내지 못했을 뿐.12)


   얘야, 너는 곧 죽을 거란다. 예상해 보렴. 네 생각엔 네가 언제 죽을 것 같니.


   헬렌? 모른다고 하지 말랬지.

   알고 싶다고 말하랬잖아.


   알고 싶다고 말하랬다고. 알고 싶다는 말만 한다면. 네가 정말로 알고 싶은지.

   선생님이 어떻게 알지?


   선생님은 실망은 하지 않지만. 선생님이 왜 실망을 하지 않는지.


   헬렌? 모른다고 하지 말랬어.

   알고 싶다고 말하랬잖아.


   모르핀에 절어 침상에 뻗은. 네 육체는 이제 너랑 상관이 없다.


   내가 너라면 궁금할 거야.

   오늘의 간호사들이.


   어째서 너를 뒤집는 건지. 그것도 욕창이 생긴 다음에······ 어째서 욕창이 생기기 전엔······


   헬렌? 가진 게 오답뿐이면

   알고 싶다고 말하랬잖아.


   그런 다음 다시 오답을 말해. 그러면 선생님이 믿어 주지. 헬렌이 얼마나 알고 싶은지.

   헬렌이 어느 정도 절실한 건지.


   선생님이 몰라서 묻는 것 같니? 정말 몰라서 묻고 있을까?


   헬렌? 그걸 왜 나한테 묻니.

   내가 왜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왜 나한테 묻고 있는지. 선생님은 그게 더 알고 싶구나. 죽기 전에 알고 싶은 것들을.

   죽고 나서는 알 수 있다고.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지.


   헬렌? 선생님은 알고 싶은데.

   알고 싶다고 표현하는데.


   너는 계속 똑같은 질문만 던지고 있어. 죽어서는 볼 수가 있고. 죽어서는 들을 수 있고.

   벙어리도 노래를 부를 수 있나?


   당연히 그렇게 믿고 싶겠지. 네가 얼마나 믿고 싶은지. 그게 도대체 얼마큼인지.


   헬렌? 선생님도 알고 싶은데.

   알 도리가 없으니까 알고 싶은데.


   너는 선생님이 알고 있다고. 오로지 그렇게 믿고 싶구나? 정 그렇다면 믿어도 좋아. 네가 듣고 있는 내 목소리가

   정말로 네 선생님 목소리라면.


   헬렌? 너는 언제 죽은 것일까.

   선생님이 묻고 있잖아?


   내가 네 선생이라고.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헬렌? 어서 대답해 보렴.

   실망은 굉장히 하기 쉽지만.


   선생님은 내색하지 않을 테니까.


   ― 김승일, 「다음」(『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전문


   “죽어서는 볼 수가 있고. 죽어서는 들을 수 있고. 벙어리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를 물으며 화자인 “선생님”에게 의지하는 시 속 “헬렌”의 모습은 헬렌 켈러와 특수교사 앤 설리번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이 시에 대한 지난 해석들은 학생에게 “강압적으로 현실의 규칙을 주입시키”며 “상상력 대신 규칙을 받아들일 것으로 강요”하는 선생님의 모습과 “현실의 규칙에 포획되지 않으려”13) 하는 학생의 모습에 주목했다. 학교를 감옥과 같은 규율 사회로 본 푸코의 논리를 기반 삼아 시 속 선생님을 권위 있는 상징 질서이자 억압하는 대타자로 읽었던 것이다. 이후 민경환이 이 시의 선생님은 “탈주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흐름을 절단하고 정해진 규칙을 주입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선생님의 “무능함”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시를 새롭게 읽어 보기도 했지만 그 결론으로 이 시가 선생님의 발화가 아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한 헬렌의 목소리라고 주장14)한 데에는 선생님은 무능할 수 없으며, 듣고 말하지 못하는 헬렌을 말하도록 다그치는 선생님의 태도가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이 자리해 보인다. 왜 지난 비평은 이것이 ‘선생님’의 발화임에도 ‘선생님’의 것으로 읽지 않았던/못했던 것일까. 지난 11월, 무단으로 녹취된 어느 특수교사의 세 시간가량의 수업 녹음본을 통해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사의 발화를 의도치 않게 들어 보게 된 지금의 우리와 달리, 그때의 (교사 아닌) 우리는 교사의 말과 행동을 추상적으로만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시 속 설리번의 말이 저 녹음본 속 교사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에 “모른다고 하지 말랬지”라고 다그치는 선생님의 말과 “얘야, 너는 곧 죽을 거란다”라는 섬찟한 예언을 아동학대 혐의의 증거로 섣불리 제출하기 전에 설리번의 다음과 같은 행동과 말들에도 주목해 볼 수 있겠다.

   가령 “욕창이 생긴 다음”에서야 “간호사”들이 몸을 뒤집을 만큼 이미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인 헬렌에게 “모른다”라는 낙담하는 말이 아닌, “알고 싶다”라는 생의 의지가 담긴 말을 할 것을 권하는 설리번의 목소리에 주목한다면 헬렌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아 섬뜩하게 여겨졌던 그녀의 발언(“얘야, 너는 곧 죽을 거란다”)은 진실을 알려주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듣기/읽기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띠는 그의 말들을 재차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숨과 같이 내뱉는 지친 자의 목소리와도(“헬렌? 그걸 왜 나한테 묻니”), 학생에게 자신의 실망을 쉽게 내색하지 않으려는 이상적인 교육자의 목소리와도(“헬렌? 어서 대답해 보렴./ 실망은 굉장히 하기 쉽지만.// 선생님은 내색하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의 선생-됨을 의심하는 목소리와도(“내가 네 선생이라고. 네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죽음 이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인지 자신 역시 알고 싶어 하는(“헬렌? 선생님도 알고 싶은데./ 알 도리가 없으니까 알고 싶은데.”), 그래서 먼저 죽은 헬렌에게 답을 구하려는 취약한 인간의 목소리와도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의 목소리는 헬렌의 “불안이 음각으로 파인 투사물”도, “스스로 내면화한 대타자의 시선과 화자 자신의 욕망이 뒤섞인 혼합물”15)이 아닌, 교사를 직업으로 삼은 한 복합적인 인간의 생생한 육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여름 마주했던, 대타자의 상징도, 성직자이거나 악마도 아닌, 노동 현장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이자 한 인간인 교사가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마지막 목소리처럼 말이다.

   재차 고백하건대, 내가 김승일의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 데에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의 잇따른 죽음과 아동학대 혐의로 무분별하게 고소되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영위해야 했던 그들의 고통이 있었다. 말하자면, 나의 문학 읽기는 저 사건들에 빚져 왔다. 이제 이 글은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답변을 문학의 상상력에서 찾음으로써 저 사건들에 진 빚을 갚아 보려 한다. (2편에서 계속) 


1) 김은숙 극본, 안길호 연출, 넷플릭스, 2022.12.30(파트 1), 2023.3.10(파트 2).
2) 물론 여기에는 학교폭력 피해자로서 학교가 복수 무대가 되어야 했던 문동은의 특수한 상황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3) 대결 구도의 이면과 표면이 문동은과 박연진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제3자에게는 거꾸로 인식된다는 점은 극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이다. 즉, 문동은과 박연진은 ‘표면적’으로 교사와 학부모 관계다.
4)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서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5)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치원 여성 교원 비율은 1980년에 이미 85%를 넘었으며, 2005년 이후부터는 전체 교원의 98%를 차지하였다. 초등학교의 경우, 1980년대에는 남성 교원 비율이 높았으나 1990년부터 여성 교원 비율이 50%를 넘어서다 2022년에는 전체의 77.2%가 여성 교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학교 여성 교원 비율은 1980년에는 32.8% 정도였지만 2022년에는 71.6%로 증가했는가 하면 고등학교 여성 교원 비율은 1980년의 17.1%에서 57.1%(2022년 기준)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 교육부 ·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분석자료집―유초중등교육통계편>, 2022, 95쪽.
6) 세라 자페,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재득 옮김, 현암사, 2023, 143쪽.
7) 교육부 · 한국직업능력연구원, <2023년 초 · 중등 진로 교육 현황조사>, 2023.11.26. 해당 조사는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비롯하여 교사의 연달은 죽음이 보도되기 전인 2023.6.5.∼7.18에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초 · 중· 고 1200개교의 학생(2만 3300명)과 학부모(1만 2202명), 교원(2800명)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8) 윤제균 감독, 윤제균 · 하원준 · 김윤희 각본, 2001.
9)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서울시 성평등 생활사전―학교편>, 2018. 이 설문은 시민 528명을 대상으로 9일간(2018.10.10.∼10.18) 이루어졌다. 학교생활에서 성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경험한 바 있다면 어디서 가장 많이 경험했는가를 묻는 질문에 교사의 말과 행동(34.5%)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교칙(27.5%), 학생의 말과 행동(11.2%)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0) 자세한 내용은 윤지원, 「초등 6학년의 충격적인 ‘성희롱 메시지’···교사들 ‘속앓이’」, 『동아일보』 2021년 10월 11일 자 참조.
11) 피터 위어 감독, 톰 슐만 각본, 1990.
12) 최근 송종원은 2000년대 중반에 제출된 김행숙의 작품을 예로 들어 당시 비평이 난해, 감각, 탈주체 등과 같은 용어로 이를 수식하는 데 치중하느라 그의 시가 다루었던 돌봄과 같은 “긴박한 사회의 현장으로부터 이탈”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송종원,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여름호, 19-20쪽). 이러한 비평의 미달은 인용한 김승일의 시 해석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가 또 다른 지면(송종원,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문장 웹진』 11월호)에서 미래파의 작품이 “과소 의미화” 되었음을 지적하며 그 속에 담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장에 대한 고민”을 짚는 시도는 유의미하게 여겨진다.
13) 한설, 「석양이······ 진다―맥크리의 시론, 또는 김승일의 시론」,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509-510쪽.
14) 민경환,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 『문학과사회』 2018년 여름호, 430-431쪽.
15) 민경환, 같은 글, 430-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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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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