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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문학, 첫 10년을 정리한다 (1부)

  • 작성일 2010-12-10
  • 조회수 8,306


[기획특집]


[좌담] 2000년대 한국문학, 첫 10년을 정리한다

- 1부 -



일시_ 2010. 11. 17(수)
장소_ 예술위원회 본관 대회의실
진행_ 복도훈(문학평론가)
참석_ 서희원, 양윤의, 이선우, 장성규(이상 문학평론가)


10년간, 작가와 작품의 경향


 복도훈___ 안녕하세요? 다들 원고 마감으로 한창 바쁘실 텐데 이렇게 대담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2000년 초반부터 10년 동안의 한국소설, 그리고 그를 통한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과 경향에 대한 것들입니다. 2000년대 첫 10년 동안에 나온 한국소설과 그 경향은 이전, 곧 90년대 후반의 소설들과 변별되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나온 한국소설의 경향이나 흐름도 세분화할 수 있지만, 먼저 2000년대의 한국소설이 이전의 소설과 뚜렷하게 변별되는 특징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작가이거나 작품이거나 경향이거나 논쟁들이고 또 무엇 무엇일 텐데, 한 분씩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담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서희원___ 『문예연감』에서 작품목록이라도 뽑아 놓을 걸 그랬나 봐요. (웃음) 작품목록을 뽑아 놓고 보면 대충 감이 잡히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0년대 초반이라고 하니까 대단히 먼 것처럼 느껴지네요.
 
 이선우___ 네. 2000년이면 사실 10년 전이니까요. 그래서인지 2010년에 문학 좌담을 하면, 실제로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논의되는 것 같아요. 물론 그건 단지 시간적 거리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1997년, 그러니까 IMF 외환위기 이후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어느 정도 일관된 흐름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이후부터는 좀 다른 흐름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2000년대 문학을 정리할 때 중·후반 이후의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할지, 1990년대의 연장선에서 2000년대 초반부터 이야기해야 할지가 문제인데……. 10년 단위의 문제점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 같네요.
 
 서희원___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고봉준 평론가가 “리얼리즘 모더니즘 논쟁이 2000년대 초반에 있었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순간이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논쟁을 거의 안하지 않나요?
 
 이선우___ 그런가요? 물론 예전처럼 그렇게 기계적으로 이분화하지는 않지요. 
 
 서희원___ 비평이 많이 유연해진 부분도 있고, 또 그 사이에 그 이분법이 그다지 큰 효용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 같기도 하고요. 
 
 이선우___ 그런데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과는 다소 다르지만, 순수·참여 논쟁의 새로운 버전이 최근 다시 문단을 달구지 않았나요? 분명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고,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60년대가 소환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양윤의___ 그런 논쟁의 지점이라면 2005년 이후 비평 담론 안에서 논의되었던 문제들을 이야기하게 되겠네요. 그럼 2000년대 전체를 아우르는 방식이라기보다는 2000년 전반과 후반을 나누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선우___ 네.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담론은 활발했지만, 구체적인 작품에서 시작된 논의들은, 특히 소설 부문에서는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정치’와 관련해서는 담론들도 주로 시/시인들에게서 촉발된 것이었고요. 그런데 소설과 관련해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오히려 ‘정치’보다는 ‘윤리’에 대한 고민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2000년대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로 ‘탈경계’를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 ‘탈국경’이 아니었나 싶고요. 사실 2000년대는 우리 사회의 ‘내부의 세계화’가 첨예한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죠. 그래서인지 이와 관련해서 ‘타자의 윤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담론이 작품을 앞질러 가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는 작품들이 먼저 등장하기 시작했고 비평과 작품,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문학의 윤리’ 논의가 ‘문학의 정치’ 논의로 바뀌기 시작했고, 때로는 두 가지가 크게 구분되지 않고 겹치기로 등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복도훈___ 사회자인 저에게 부드러운 태클이 들어오는군요. (웃음) 사실 저도 2000년대 초반 문학이나 소설을 생각하면 아득하게 느껴져요. 아무래도  제가 평론가로 활동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지난번 『한겨레21』에 실린 ‘2000년대 최고의 한국문학’ 특집 때, 저를 비롯해 대담에 참여하신 평론가들을 포함해 여러 평론가들이 설문조사에 응했고 직접 글을 쓴 분도 계십니다. 거기에는 평론가들의 선호도가 반영된 작품과 작가 목록이 있었지요. 2000년대 10년간의 한국소설을 이야기할 때 거론할 만한 좋은 소설이나 작가가 있으면 그것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한편 2000년대 한국소설 하면 굉장히 많은 비평적 어휘들이 떠오를 겁니다. 키워드, 경향이나 담론과 논쟁 등이 떠오르는데 우선 생각나는 것은 작가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을 이야기할 때, 충분히 논의를 시작할 수 있겠다 싶은 염두에 둔 작품이 있으면, 그것부터 이야기해 보죠.
 
 서희원___ 『한겨레21』 평론가 설문조사에서 가장 높은 표를 받은 작가가 김훈, 김연수, 김애란, 박민규인데, 그들이 2010년대를 대표하는가 하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이상한 일입니다. 90년대를 생각하면 윤대녕, 신경숙 몇몇 작가가 생각나고, 90년대가 뭉뚱그려 생각나는데. 아마도 그건 90년대 비평의 힘이겠죠. 그 작품들의 의미를 밝혀내는 강렬한 비평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요. 그에 반해 2000년대 하면 좋은 작품들도 많았고 다방면에 영향을 끼친 작가들도 있었는데, 그 작가들만으로 2000년대가 정리된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그런 점에서 ‘다양성’이라는 게 2000년대의 키워드가 아닌가 싶어요. 아까 언급한 작가 말고 박성원, 강영숙, 편혜영, 김영하, 백가흠, 전성태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작가라 생각해요. 이들이 비록 앞의 작가들보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을지 몰라도 중요도에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복도훈___ 문학이나 소설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은 90년대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겠지만…… 2000년대의 변별성을 그래도 서희원 선생님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변별된다고 하신 거죠? 이선우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이선우___ 글쎄요. 저도 서희원 선생님 말씀에 동감하는데, 아마도 80~90년대와는 달리 2000년대는 지금 우리가 같이 호흡하고 있는 당대여서 거리두기가 잘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작가를 이야기하고 저 작가를 삭제하게 될 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한겨레 기사에 이미 이름이 나왔으니 말씀드리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때 박민규를 꼽았어요. 방금 말씀하신 여러 작가뿐 아니라 김애란, 김사과, 오수연, 강영숙, 전성태 등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거나 의미 있게 생각하는 작가들이 많지만, 2000년대의 어떤 감수성, 그러니까 80~90년대와 변별점을 드러내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거든요. 저는 어쨌든 박민규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을 아직 간직하고 있어요. 
 
 서희원___ 어떤 느낌이었는데요?
 
 이선우___ 아, 이거, 그럼 90년대 소설부터 이야기해 보죠. 90년대는 제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시기였고, 그러니까 입시에서 벗어나 겨우 문학에 입문한 시기였죠. 그런데 제가 대학 초년생이던 90년대 중반은 김영하, 백민석 등이 화려하게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 한강, 전경린, 조경란 같은 여성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입니다. 물론 여성 작가라 해도 제각기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줬지만, 내면의 결을 드러내는 섬세한 문체라든가 여성 특유의 탁월한 심리 묘사 등에서 어느 정도 일관된 흐름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80년대와는 다른 맥락에서, 그러나 여전히 진지했지요. 철저히 일상성을 드러내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상 너머에 존재한다는 느낌도 좀 있었고요.
그런데 박민규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아주 발랄하게 드러내며 등장합니다. 유머, 하위 문화적 코드 그리고 사회학적 상상력. 2000년대 문학의 주요한 경향이 그의 초기작에 다 들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문체도 매우 가벼워졌죠. 그냥 가벼워진 게 아니라, 탈문법적 경향까지 드러내면서요. 그런데 대단한 실험을 한다는 식으로 심각하게 그런 작업들을 한 것이 아니라, 이거 뭐, 그러면서 아주 간단하게 해 버려요. 이전의 다른 작가들이 너무 진지하고 무거워서 격파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이죠. 거기에 그의 유머가 가진 힘이 있다고 봅니다. 약간 다른 측면은 있지만 김애란 역시 이 유머의 힘을 잘 살린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박민규가 더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장편의 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박민규에 비해 김애란 소설은 훨씬 더 고전적인 데가 있고요. 또 2000년대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이른바 백수들, 잉여인간들인데 박민규 소설의 인물들이 바로 그 전형이죠. 백수나 실업자, 아르바이트생, 고시촌 인물들…….  


 
 복도훈___ 박민규가 『핑퐁』(2006)에서 인상 깊게 말한,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이겠죠. 
 
 이선우___ 네. 사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은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져 왔죠. 그런데 박민규는 우리 시대의 그 타자들을 아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위문화적 상상력은 90년대에 이미 출현하고 있었지만, 당시 소설에는 의외로 문화적으로 고급한 취향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귀족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떤 측면에서 상당히 부르주아적이었죠. 그 때만 해도 저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는데, 음악이나 미술, 뛰어난 고전 영화들, 그런 걸 잘 모르면 소설도 잘 못 쓰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루저들의 등장이 시작된 거죠.
 
 복도훈___ 소설가 지망생이셨군요. 저는 시를 쓰다가……. (웃음) 이선우 선생님이 박민규라는 작가, 작품, 유머, 장르 혼효, 사회학적 상상력 등 여러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오늘 다루게 될 거의 모든 테마를 이야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양윤의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윤의___ 저는 2000년대 중반에 등단했는데요. 저도 역시 아직 조금씩 현장 경험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라 2000년대 문단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섣부르게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2000년대를 돌아보면서 제가 느낀 지점들은 새로운 목소리들이나 그 발성법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에요. 천운영이나 편혜영의 소설이 2000년대 출현한 새로운 세계를 대표한다면 김사과나 황정은의 아이들은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발성법들이 아닌가 싶고요. 이들이 2000년대 후반에 등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중에서도 김사과의 경우를 꼽으면 김사과의 인물들은 감정의 새로운 작동방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많은 평자들이 언급했듯이 김사과가 88만원 세대라는 사회학적 코드 안에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김사과의 인물들은 기쁨이나 슬픔, 불쾌나 유쾌, 적의와 환의가 구분이 되지 않는 새로운 정념의 표출방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독자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방법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유일한 통로라는 걸 발성 자체로 보여주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 현실과 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니 그러한 방식은 인물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이 있겠지요. 그 정념은 내면의 차원이면서도 탈내면의 지점이고 현실에 대한 강력한 반응이면서 직접적인 표출이고요.
2000년대 문학의 특성을 말할 때, 캐릭터나 스타일의 다양성을 언급할 수 있지만, 새로운 방식의 발성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문제는 2000년대 문학의 존재론 차원으로 확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복도훈___ 양윤의 선생님께서 김사과 작가의 예를 들면서 ‘새로운 발성법’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희가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간의 소설적·문학적 흐름을 단계적으로 짚어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지만 2005년이 분기점이었던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합니다. 박민규, 편혜영 등 2000년대 하면 떠오르는 작가들이 첫 작품집을 출간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논의를 꼭 2000년대 초반부터 짚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같기는 하지만, 장성규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시죠. 양윤의 선생님께서 탈내면이라고 한 부분에 대해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 듯합니다만.  
 
 장성규___ 흔히 90년대의 문학을 ‘내면의 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게 오히려 80년대의 대타항으로서 등장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고전적인 리얼리즘의 문법과는 다르다는 점이 특징적인 것으로 고평된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신경숙이나 윤대녕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로 부각되었구요.
그래서인지 90년대적인 것이라고 하면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면서 내면이 과잉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2000년대는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진 않지만 이와는 구별되는 주목할 만한 지점들이 몇 가지 있어요. 특히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고전적인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새롭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시도가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에요. 윤이형 같은 경우 게임으로 대표되는 하위문화적 코드를  통해 소설 속에 미메시스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현실을 인식하는 시도가 눈에 띄었어요. 황정은의 경우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황정은이 보여준 유령이나 환상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비평적 과제라고 봐요. 이것은 단순히 기법적인 층위가 아니라 현실과의 팽팽한 긴장감의 산물로 느껴지는데, 여기서 억압된 정치적 무의식이랄까, 그런 지점이 표출되는 것도 중요한 2000년대 문학의 징후라고 생각해요. 윤고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작품에서 판타지적 경향이 강하게 묻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이를 소재적으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문제들에 대해 나름의 발언을 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징후들은 90년대의 다소 유폐적인 경향과는 확연히 다른 200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흔히 2000년대 문학을 얘기할 때 새롭다거나 발랄하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그런 논의는  약간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90년대의 촉촉함 대신에 흔히 얘기하는 88만원 세대로 표상되는 현실의 모순을 형상화하면서도 과거의 고전적인 리얼리즘적 미학으로 접근하지 않는, 그런 새로운 미학적 징후들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2000년대 문학의 중요한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장르 혼효, 또는 소설이라는 장르

 

 복도훈___ 2000년대 소설을 이것이다,라고 통칭할 만한 것은 결국 없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가 현재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탓에 포착하기 어려운 또 다른 다양성도 있을 겁니다. ‘90년대 문학’ 하면 개인과 내면성, 심리적 깊이, 일상성, 문체라고 부른 것들이 강조됐죠. 물론 그것이 9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그에 비해 2000년대 소설은 ‘표면의 미학’이라고 해야 되나요? 환상성, 탈내면화 기법, 복화술적 발성, 다종다양한 캐릭터의 등장 등은 확실히 2000년대 소설의 미메시스적 곡예의 움직임입니다. 캐릭터가 ‘방콕’의 백수라고 하더라도 훨씬 더 사회화된 주체로 그 모습이 나타나죠. 90년대라면 그 백수 내면의 고독한 움직임을 섬세하게 따라갔을 겁니다. 지금 제 귀에 ‘내가 바로 2000년대 작가고, 소설이야’라는 아우성이 들리는데요. (웃음)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장르 혼효적인 현상’을 본다면, 먼저 백민석을 떠올릴 수 있겠고 그 다음이 박민규 작가가 아닌가 합니다. SF, 묵시록이나 무협, 판타지까지 포괄해서 보통 장르문학, 혹은 대중문화와의 혼효현상 같은 게 최근 한국소설의 중요한 경향으로 특히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선우___ 어느 정도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좀 더 논의하자면 장르 혼효가 가져올 새로운 가능성을 점쳐 보자는 말씀이신가요?
 
 복도훈___ 장르 혼효적 현상이 ‘소설적 지평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소설의 장르적 혼효와 확장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에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또 새로운 경향의 소설은 계속 출현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만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두루 생각해 보자는 얘기죠.  
 
 서희원___ 작가마다 방식이 다르잖아요. 백민석은 박민규와 다르고 박민규는 윤이형과 다른데 뭉뚱그려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이선우___ 저는 장르문학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에요. 사실 어느 순간부터 거의 읽지 않았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중학생 때는 오히려 추리소설이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더군요. 남학생들도 그 때는 무협지를 많이 읽지 않나요? 실제로 세계적으로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는 SF도 꽤 있지요. 그런데 우리 문학적 흐름 속에서는, 어느 순간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장르문학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것 같아요. 저만 그런 걸까요?
 
 서희원___ 중·고등학교 때 염상섭이나 최인훈을 읽지는 않잖아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 시절에는 대부분 장르 소설들과 외국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그렇게 나름의 문학적 감수성을 세계문학전집과 도서대여점, 만화방에 꽂혀 있던 다양한 것들(?)을 통해 키웠죠. 사실은 전 대학에 와서 순문학이라고 지칭하면 이상하고 문단문학이라고 해도 이상한데, 하여간 아카데믹한 그런 걸 접하게 됐고 ‘이게 문학이다’라고 배운 거죠. 그리고 다른 체계의 공부들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정말 말 그대로 과거를 싹 잊는 거죠. 읽어야 할 텍스트라는 게 정해져 있잖아요. 그 외의 것들을 읽지 않고 뭔가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문제점이 어떤 시스템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요. 물론 문학연구자를 생산하는 아카데미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창과 시스템도 다르지 않죠. 지금은 약간 달라졌겠지만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장르문학을 가지고 창작을 시도하면 선배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요. 대단히 욕을 먹는 거죠. 한 마디로 어떤 문학적 지향성이 있는 거거든요. 교육받고 등단하고 평가받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는 거예요. 하지만 장르 쪽에서는 정반대예요. 그런 권위 있는 시스템이 없어요. 제대로 된 잡지도 장르의 성과를 검증할 만한 평론도 없어요.
물론 최근의 상황을 보면 이렇게 서로를 구별하던 분별력 자체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작가들이 자신이 문학적이라고 읽었던 많은 부분을 자유롭게 소설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이전의 평가가 지니고 있던 강력한 구속력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거든요.
박민규가 예전에 대단히 유명한 얘기를 했잖아요. 선배들이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충고하자  ‘어쩌구~ 마이신’이랬잖아요. (웃음) 상징적인 일화지만 작가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던 금기나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건 사실이에요. 그 다음부터 자유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고 자유로운 이야기들을 커버하는 작은 담론들이 형성된 것도 분명한 것 같고요.
제가 아까 ‘다양성’이라고 했는데,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세계가 깜빡한 인물들’, ‘루저’나 ‘백수’ 그런 인물들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분명 그 이전에도 존재했던 사람들인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상징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겠죠. 오히려 200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우파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1997년 IMF 이후 2007년까지 소위 ‘잃어버린 십 년’을 만들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 속에서 문학을 하던 사람들이 있고요. 그 시대의 가치가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떨 땐 정말 다른 세상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지금이 바로 ‘우파의 시대’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니라고 고개를 갸우뚱해도 이명박 대통령이 매우 많은 표차로 당선된 건 확실하잖아요. 대단히 많은 젊은이들도 그걸 지지하고 있고요. 진정한 2000년대의 주체는 신자유주의적 우파잖아요? 그런데 문학에서 그러한 변화를 찾을 때 거론할 수 있는 주체는 과연 누가 있을까요?
굉장히 돌아온 느낌이네요. 장르적 혼효 이야기가 문학적으로 많이 나오긴 했는데, 그것이 과연 2000년대를 대표하는 현상인가?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장르 혼효적 현상이, 그리고 그 작가가 2000년대를 대표한다? 그래서? 세상은 그걸 어떻게 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선우___ 2000년대의 주체가 ‘우파적 성향을 가진 청년들’이라는 분석은 학교 현장에서 실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어쩌면 기성세대가 타자화한 청년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급속히 우향우하고 있는데(머리까지는 아니라도 확실히 몸은), 그것을 감추기 위한 대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그것이 정확한 분석이라 할지라도 소설에서 그런 인물들이 주요한 주체로 등장하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정일이 야심차게 내놓은 우익청년 성장기(『구월의 이틀』)가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느껴져서요. 저는 이 지점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청년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소설에서는 왜 그런 인물들이 드문가,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 만합니다. 작가들의 성향 때문일까요, 가난한 작가들의 현실 때문일까요?  
장르 혼효 현상과 관련해서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두 가지입니다. 장르문학 안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본격문학을 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새로운 상상력이 많이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장르문학을 비판하는 논리는 그것이 장르적 틀이랄까 관습에 갇혀 있다는 것인데, 본격문학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오히려 새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격문학이라고 말하는 것도 실은 하나의 장르적 관습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장르문학적 상상력이 새로워 보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물론 최근의 장르 혼효 현상이 단순히 소재나 기법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다소 그런 측면도 있고 그래서 같은 작가의 경우에도 작품에 편차가 존재합니다만), 서로의 영역을 겹치면서 더 넓혀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이형이나 박민규, 박형서 같은 경우를 보면 장르문학의 관습이나 소재를 비틀어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측면이 있잖아요. 사실 장르문학이냐 본격문학이냐를 떠나서 좋은 작품들은 그런 역할을 하죠.
이런 성과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어쩌면 기존의 문학적 틀만으로는 급변하는 문학적 현실과 사회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장르 혼효 현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겁니다. 사실 대중문화적 상상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문학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죠. 그것은 문학의 잡식성 때문이 아니라 대중문화가 우리 삶에 그만큼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당에 문학만 순수성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죠. 최근에 장르 혼효 현상을 다룬 글을 몇 편 읽었는데, 제가 살펴본 바로는 본격문학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별로 없었는데요. 대부분 이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나요? 
 
 장성규___ 하위문화의 전복성을 담지하지 못한 채, 단지 몇몇 소설이 이를 소재적 차원으로만 소비하고 있다는 비판은 있었죠. 
 
 이선우___ 네. 그런데 그건 장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작품의 성취도 문제죠. 세대가 달라서 그런가요. 90년대만 해도 이미 장르 혼효는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요. 다만 앞서 말했듯이 그 때는 하위문화적 상상력뿐 아니라 고급문화적(?) 상상력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죠.
 
 양윤의___ 90년대 문화적 아이콘을 차용하는 시나 소설의 경우에는 다소 배타적인 방식으로 하위문화적인 속성에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상징성 자체가 크다는 건 차용하는 의도에 좀 더 방점이 찍힌다는 의미고요. 그런 점에서 백민석은 90년대와 2000년대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민규 소설에서는 본격문학‘적’이라거나 장르‘적’이라거나 하는 경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정도로 장르적인 것을 차용한다는 일종의 자의식 자체를 허물어 버리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고. 박민규식 타이포그라피나 문체는 박민규식 스타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인데 그것들을 장르적인 것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나면 지나치게 단순화된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로 저는 제도를 벗어나 독자들과 직통으로 만나는 작가들이 생각나는데요. 물론 그 전에 그런 작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령 배명훈 작가가 알라딘 연재를 통해서 독자들의 반응을 얻은 사례가 떠오릅니다. 저도 독자로서 열심히 그 연재를 읽었거든요. 웹진에 대한 평가 역시 편차가 있지만, 소설의 유통방식의 차이, 환경적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복도훈___ 갑자기 SF작가인 배명훈의 말이 떠오르네요. ‘순문학 말씀하시는데, 그럼 저희는 불순문학 하나요?’ (웃음) 
 
 이선우___ 사실 ‘장르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정말 의아했어요. 그 용어를 누가 만들었나도 궁금했고요. 소설도 하나의 장르인데 ‘장르소설’이라니, 게다가 이런 구분법 아래에서는 장르소설의 반대편에 본격소설 혹은 순수소설 뭐 이런 게 놓이는 거잖아요. 이런 게 엄밀한 의미에서 분류체계로 작동할 수 있나요? 흔히 말하는 본격문학의 미덕을 다 갖춘 장르문학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장르문학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구분했던 걸까요? 아니면 단순히 장르적 관습에 강하게 지배받는 작품군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명명한 걸까요? 그런데 그렇게 구분을 해 놓고, 장르문학에 대해서는 별 논의가 없죠. 논의를 안하는 걸까요, 못하는 걸까요?
 
 복도훈___ 우리가 많이 안 읽은 건 사실이고 그러다 보니 안 읽은 것에 대해 말하기 뭣하니까, 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게 『섬, 그리고 좀비』라는 제목의 좀비 묵시록 단편들이었습니다. 제가 묵시록이나 SF를 읽는 이유는 가정법의 신선함 때문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혼자 살아남으면 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질 수 있겠더라고요. 
 
 이선우___ 우리가 잘 안 읽고 있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장르 혼효 현상은 장르문학을 열심히 읽은 소수의 작가들이 장르문학의 기법을 본격소설에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장르적 상상력은 영화나 다른 분야에서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나요?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들이 굳이 SF소설을 보아서가 아니라,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게 이제 이미 자연스러운 우리의 현실이 된 건 아닐까요? 
 
 복도훈___ 그렇겠죠. 윤이형의 「큰 늑대 파랑」만 하더라도 사실 ‘좀비 묵시록’을 많이 읽고 쓴 소설도 아니고, 영화 <28일 후>나 <모노노케 히메> 같은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더 쉽게 지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도 마찬가지로 작품 아닐까요. 그러나 그러한 SF적·게임적 현실의 자연스러움이나 익숙함만 강조하는 것으로 어떤 스타일의 우세종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역으로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의 SF는 잘 나오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이선우___ 영화나 게임이나 만화에는 SF적인 것이 주류인데, 소설에서는 특히 본격문학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서희원___ 어떻게 보면 소설이 가장 교류가 안 되는 장르인 것 같아요. 음악은 전 세계에서 어떤 게 유행하는지 금방 알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죠. 영화도 대단히 유통이 빠르죠. 하지만 ‘2010년 일본에서 문제적인 소설은?’ 그러면 우리는 잘 몰라요. ‘2000년대 중국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역시 모르는 거죠. 번역이 되어야지 아는 거거든요. 소설은 대단히 느린 유통 구조를 갖고 있어요. 18~19세기의 문화에서 소설이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걸 못 가지고 있는 거예요. 아까 장르 혼효에 대해 계속 얘기하셨는데, 거시적으로 볼 때 민족문학이 퇴거하면서 장르문학적인 부분, 혼효적인 부분들이 나오는 거 아닌가요? 민족문학적인 영향 속에서 창작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사실 대단히 옅어진 거죠. 그리고 박민규도 예전에 어느 대담에서 이야기했지만 일본소설이 한국보다 훨씬 빠르고 앞서 있다 얘기할 때 박민규가 말하는 일본소설은 소설적인 부분, 어떤 걸 다루는 토픽의 문제, 그것을 평가하는 방식을 말하는 게 분명하거든요.
한국소설에서는 어떤 일정한 감식안을 갖고 봤던 거고, 감식안 외의 소재들을 활용하는 것에 배타적이었던 게 사실이죠. 장르 혼효적인 현상이 한국만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라고말하는 것은 우스운 얘기인 것 같고 그건 이미 세계문학적인 방식이었으니까요. 지금 번역되고 있는 민음사 모던 클래식만 보더라도 대단히 다르잖아요. 그건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이 장르문학이죠. 혼효적인 부분보다 민족문학적인 부분에서 세계문학적인 감각으로 변화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성규___ 더불어 드는 생각인데, 더 이상 대중문화가 소설이나 문학에 영향을 끼치는 게 새로운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분명히 90년대까지는, 아까 복도훈 선생님께서 백민석을 예로 들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하위문화가 가진 전복성이 상당한 파괴력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위문화 자체가 점차 주류에 많이 포섭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경향으로 더 이상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적 상상력을 가져왔다는 것만으로 작품의 전복성을 인정받기는 어려운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선우___ 네.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측면과 관련해서 우리 문학계에서 그동안 장르문학이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 한국 문단문학의 특수성과 연결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등단제도가 없잖아요. 대개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서 등단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는 문학이 상품이란 것이 너무나 명료하지만 우리는 순수문학 운운 하면서 문학의 상품적 측면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장르문학을 소외시킨 것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문학장 안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훨씬 우세하니까 그런 위장마저도 발가벗겨지면서 장르문학이 적극적으로 호명되는 것은 아닌가.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는 문학적 현실의 문제일 텐데, 이렇게 보면 장르문학적 상상력이 갖는 어떤 전복성이랄까 새로움은 확실히 반감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나 게임에 장르문학적 상상력이 가장 많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겠지요. 하지만 상업적인 논리에 포섭되는 작품이 있을 것이고 오히려 그런 지점을 넘어서면서 상품성을 획득하는 작품이 있겠지요.
 
 복도훈___ 장르 혼효적인 현상이 한국문학이나 소설의 특징이다라는 ‘우스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스타일의 분리나 혼합 같은 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고 우리의 논의도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봅니다. 확실히 문학은 순문학보다도 불순문학이라고 할 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웃음) 장르 혼효 현상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서희원___ 장르란 말을 좀 구분해서 써야 할 것 같은데요. 장르소설이라고 말할 때와 소설의 장르는 서로 다른 개념이잖아요.
 
 이선우___ 지금 여기에서는 소설의 장르적 속성이 사실은 이런 혼종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거잖아요.



장편소설의 시대?

 복도훈___ 일단 장르소설의 장르는 당연히 문법이나 규칙 같은 거고, 소설장르의 장르는 다양한 소설 양식의 이접과 혼합의 양상이겠죠. 좀비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마켓이나 쇼핑센터의 통음난무가 그런 문법 중 하나고. 그런 양식화된 문법도 다양한 변형을 통해 새로운 소설의 ‘장르’를 가능하게 하는 거구요. 가령 『죄와 벌』과 당대의 싸구려 범죄 로망을 함께 생각할 수 있겠죠.
지금까지 순문학·본격문학과 그 주변에 있던 어떤 준-문학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혼효되는 현상을 소설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라고 생각하고 그 한계를 간단히 짚어 봤는데요. 장르소설을 말했지만, 장르소설의 상당수도 문체나 문장 단위의 단편보다는 복잡한 선을 가진 이야기와 중층적인 플롯을 강조하는 장편이 본령입니다. 이쯤에서 이른바 ‘장편소설의 활성화’, 물론 2000년대 소설의 경향으로 일반화하기는 무리지만, 그에 대한 수요와 요구가 많이 늘고 있는 최근의 추세에 대해 생각해 보죠. 
 
 장성규___ 문학이 지나치게 미시적인 층위에 국한되어 있다는 지적과 함께 장편소설론이 대두한 것 같아요. 현실과의 대면을 추구하는 거대 서사가 필요하지 않냐는 문제의식이었을 텐데요. 원론적으로 단편이 형식적 완결성을 강조한다면 장편의 경우에는 세계화의 대결이라는 미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묘하게 다른 측면하고 섞인 것 같아요. 장르적 속성으로서의 장편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더불어서 긴 이야기 자체가 지닌 읽을거리로서 속성이 있을 텐데 이 두 가지 성격이 뒤섞여서 장편소설에 대한 요구가 급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장편소설 급증의 배경에는 웹진의 대두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이런 경우는 장편소설의 장르적 속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죠. 바꿔 말하면 처음에 장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많이 언급됐던 장편을 통한 세계와의 대결, 거대서사의 복원이라는 문제의식이 희석된 감이 커요. 실제 현재 장편소설들이 그런 점에 부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다소 부정적이거든요. 세태 묘사에 치중하거나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읽을거리로서의 측면을 주로 취하게 된다거나, 혹은 유통과정에서 웹진 등의 형식을 통해 출판 마케팅에 이용된다는 측면 등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장편소설론이 제기된 원래 문제의식과는 실제 작품들이 다르게 가는 느낌이 있어요. 

 
 양윤의___ 자연스럽게 장편소설 문제로 연결되는데요. 단편이나 장편이 분량의 차이가 아니라 행동이 제시되는 양식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장편소설이 전달하는 세계관이랄까, 그 스케일과 구성이 전달하는 감동이 있죠. 장편소설에 대한 갈증은 단순히 환경적인 변화나 작가들의 대응 정도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시장에서 팔린다, 아니다, 와는 별개로 ‘좋은 장편’을 읽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었거든요. 좀 소박한 소망이지만요.
작가들이 미학적 성취도를 평가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 나오고 있는 ‘시도’는 의미 있는 작업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분량상 중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는 장편을 기다린 저의 보람이기도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장편을 양산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학적으로 자기갱신을 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실험과 시도에 좀 더 기대를 걸고 싶어요. 
 
 복도훈___ 양윤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장편을 읽고 싶은 희망이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도 동의하고, 장편소설에 대한 역사철학적 고민을 소홀히 한 채 장편소설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여러 환경, 매체, 출판시장, 문학상 등에만 주력하면서 발생할 우려에 대해 장성규 선생님이 좀 더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선우___ 2007~2008년도의 장편소설 대망론과 관련해서 장성규 선생님께서 중요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논의가 시작된 지 2, 3년밖에 안 됐거든요. 그동안 장편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되지 못한 것은 장편을 쓸 수 없는 우리 문학판의 구조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장편소설 대망론이 장편소설 창작 지원책에 대한 논의로 많이 기울어지기도 했지요. 단편과 달리 장편은 최소 1, 2년은 잡아야 쓸 수 있는데 그동안에 생활은 어떻게 할 거냐, 시장에만 맡길 수 있나, 그런 공감대가 확산되었던 것도 같고요. 그래서 예술위는 물론이고 춭판사들도 장편 작가들에게 대거 지원을 해 주면서 장편에 대한 논의를 확산시켰는데, 그 과정도 그렇고 지금 벌써 평가하려는 움직임도 그렇고 저는 우리가 너무 호들갑스럽고 조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들의 작품이 무르익을 시간을 안 주는 거죠. 마치 이제 대세는 장편이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압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쫓기듯이 쓰고 나면 이번에는 작품의 질이 왜 이렇냐, 또 압박하고.
장편 하나가 제대로 나오려면 2, 3년은 걸리는데, 이제 막 시스템을 바꿔 놓고 벌써부터 작품이 좋지 않네, 어쩌네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 아닐까요. 작가들의 급격한 체질 전환에서 오는 문제들은 사실 시스템이 급격히 전환되면서 생기는 여러 시행착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호들갑을 오래 견디고 제대로 소화해 내는, 그것을 스스로의 요청으로 받아 안는 작가들이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만, 장편소설을 상업적 척도에서만 대망했던 것이 아니라면, 좀 더 진득하게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작가들도 몸을 바꾸는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웹진이나 블로그의 경우도, 너무 연재와 홍보 공간으로만 활용되었으니 문제가 노출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웹진이나 블로그라는 인터넷 공간의 특수성을 제대로 살리거나 새로운 공간의 상상력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존의 이름 있는 작가들을 동원해서 신문연재 공간처럼 활용했기 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작품 질의 저하 같은 문제가 똑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인터넷 공간은 사용하기에 따라 분명 새로운 실험의 장이 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출판구조라든가 문단문학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도 분명 있고요.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웹진 해 봤더니 별로더라, 그러면서 또 한 번에 접어 버리고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다른 장을 열 수 있느냐 하는 거죠. 블로그는 좀 덜하지만, 웹진의 경우는 대부분 기존 출판사나 문단권력의 확장판이지 새로운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 결국 자본력의 싸움이 되는 경우도 많고요. 90년대 중·후반에도 사이버문학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아직 명확하게 개념조차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지만 그래서 더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측면도 있었죠. 제 기억으로는 당시 대표적인 논자가 지금 크리티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욱 교수인데, 대학생 때였지만 저도 그분 글을 찾아 읽으면서 꽤 많은 기대를 했어요. 『버전업』이라는 잡지도 나왔었고.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이버문학 시대가 열렸느냐 하면, 몇 번 실험하다가 안 됐어요. 게임 서사 쪽에서는 그런 논의가 여전히 활발한 것 같지만, 게임 서사다 하면 이미 우리는 문학장 밖으로 밀어내 버리니까요. 그건 장르문학도 아닌 거죠. 생각보다 문학이 보수적인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물론 그 보수적인 부분에서 가치를 생각하는 게 없지 않아 있으니 무조건 비판만 할 건 아닙니다만.
 
 양윤의___ 말씀하신 것처럼 웹진의 상업성에 대해서 우려가 많습니다. 접근성이랄까 물리적 제약이 약해지면서 작가나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아지고요. 파워블로거들이 활약하는 경우를 보면 대중적인 매체라는 차원보다는 문학이 자생적으로 운동하고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루트가 생겼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이선우___ 그 가능성을 어떻게 열지, 좋은 도구를 잘못 사용해서 망쳐 놓고 폐기처분해 버리지는 않을지. 원래 인터넷 공간 자체가 상업적인 공간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공간에 기대를 걸었던 건 자율적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인데,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여러 웹진은 상업성과 근거리에서 만들어지고, 거기에 대항하는 대안적인 공간도 아직은 큰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경, 타자, 외국인 

 

 복도훈___ 논의를 조금 다른 쪽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서희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주의적입니다. 그것은 소설이 잡식성의 장르라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19~20세기의 독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형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반주변부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한국소설 역시 자연스럽게 세계문학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얘긴데요, 그것은 한국문학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아니겠죠. 그것은 오히려 마르크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지방문학이 세계문학이 된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즉 문학에서 경계나 국경, 번역 문제가 부각된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는 타자성,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 이건 한편으로는 2000년대 중반을 지나서는 ‘문학의 윤리’라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3년에 출간된 김영하의 『검은 꽃』이 그 시발점일 텐데, 이 소설은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민족이나 국가와 더불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소설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기도 했죠. 『검은 꽃』 자체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김영하 나름대로의 묵시적 답변이기도 했구요.
2000년대 소설에서 외국인이라면 외국인이겠고, 철학적 범주로는 타자성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그것들은 이른바 80년대 민족문학 계열의 작가들이 90년대 내내 거의 침묵하다가 2000년대에 들어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구요. 저는 우선 김재영의 『코끼리』, 전성태와 오수연의 소설들, 강영숙의 『리나』 등이 떠오릅니다. 
 


 서희원___ 그런 문제를 얘기할 땐 전성태 작가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데요. 「국경을 넘는 일」이 줬던 충격 같은 게 있었죠. 좌파가 갖고 있는 타자성, 거기에서 나오는 몇 가지 문제들, 국경이라는 것을 실제 접하는 사람들의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가진 트라우마적인 느낌들이 있고, 그리고 일본 여자와의 연애라는 것, 대단히 예민한 문제고 한국 민족이 갖고 있던 폭력성 같은 것들이 어떻게 나오는가, 그리고  정반대로 일본이 여성화돼 있는 형태인 거죠. 그런 것들이 전성태가 보여준 문제성을 많이 확장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몽골로 가서 썼던 연작들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성태 흐름이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그가 통일을 지향하는 방식에서 자본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쪽으로 사유가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런 것들이 대단히 전성태의 솔직함이라고 보여집니다. 민족 문제를 분열된 향토적 정서라든지 감흥이라든지 잃어버린 민족성 회복이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전성태에게서 주목할 부분이고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리나』인데요.  
 
 복도훈___ 서희원 선생님의 평론 등단작 중 한 편이 「리나」론이었죠? (웃음)
 
 서희원___ 갑자기 그런 얘기를……. (웃음) 『리나』는 탈북자 문제를 난민 문제로 확장했잖아요. 국적을 지움으로써 그게 범세계적인 문제가 돼버렸잖아요. 그런 게 흥미롭죠. 『리나』와 같은 시기에 나온 황석영의 『바리데기』 같은 경우는 정말 고유한 민족의 문제로 계속 얘기하고 거기서 민족의 바리데기 설화를 통해서 뭔가 도출하려는 방식으로 끝나는 거죠. 그런데 두 소설이 끝나는 지점의 차이가 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바리데기』는 인생의 유전에 따라 런던으로 흘러간 주인공이 런던 테러를 지켜보는 장면에서 끝이 나고, 『리나』는 정황상 초원으로 가는 걸로 끝이 나는데 그 두 가지 차이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거죠. 하나는 계속되는 문제고 하나는 테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끝이 난다는 거죠. 이것이 뭐다 딱히 얘기할 수 없지만 그 두 가지 지점은 분명 다른 게 있는 거죠.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많은 작가들이 외국인들을 재현하는 문제에 있어서 기존 클리셰들을 반복했다고 생각해요. 이 도식에서 탈피하는 방식으로 2000년대 문학의 변화가 형성되었지요. 
 
 복도훈___ 어떤 클리셰들이죠?
 
 서희원___ 탈북자들이 들어와서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문제들, 그들이 겪는 고초, 그들이 가진 이방인적 성격, 즉 타자화를 통해 문제의식을 도출하는 방식들. 그것은 이미 60년대나 70년대 노동의 소외계층을 문학화하면서 활용되었던 아주 익숙한 기법이잖아요. 예전의 작품들, 다른 장르 예를 들면 TV나 영화,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보여주던 것을 소설이 다시 보여주면서 기법적으로는 거기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복도훈___ 우리 시대에 적극 권장되는 다문화주의의 소설적 판본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었죠. 이주노동자들에게, 소수 인종들에게 관심을 갖자……. 그들은 알고 보면 신성한 코끼리의 후손이요, 러시아 백향목의 순결함을 가졌다는. 
전성태의 경우는 조금 달랐고, 그래서 문제적이었죠. 타자를 신비화시키지 않았어요. 타자성에 부딪치는 자의식의 한계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무조건 타자성 운운하는 게 우리라는 자기동일성이 가질 수 있는 감각과 사고의 한계를 예리하게 점검하죠. 예를 들어 「코리안 솔저」에서 교수인 주인공이 몽골인 타자와 ‘만나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한국에서 그토록 상기하기조차 싫었던 군인이었음을 밝혔을 때거든요. 



 
 이선우___ 소설의 경우 ‘타자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된 것은 ‘내부의 세계화’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 ‘내부의 세계화’는 9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고, 이제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명 시대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고, 제도적으로도 차별과 배제가 뿌리깊이 박혀 있습니다. 작가들이 이 문제를 더는 도외시할 수 없었겠죠. 그런데 20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 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는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10여 년이나 걸린 셈이죠. 그런데 아까 사회자께서 말씀하셨듯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작가들이 이른바 민족문학 계열의 작가들입니다. 90년대 문학이 서유럽 쪽으로 공간 확장을 시도한 데 반해 2000년대 소설은 아시아로 공간을 확장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경향성과 관련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이런 국경 넘기는 특정 작가군으로 한정되지 않는 전반적인 경향이지요.
서희원 선생님께서 『바리데기』와 『리나』의 결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저도 그 소설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결말을 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나』는 경계를 향해서 계속 가는데 『바리데기』는 정착할 뿐만 아니라 소설의 마지막이 환상적으로 처리되고 있어요. 『리나』에도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충돌이 있지만, ‘환상을 통해서 오히려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느냐’와 ‘현실적으로 싸워야 할 부분에서 환상으로 도피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리데기』는 싸워야 할 곳에서 환상을 도입했습니다. 환상과 함께 작가의 전지적 목소리도 개입했고요. 그래서 그 전의 유랑들이 무의미해졌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 『리나』는 구체적인 시공간도 지워져 있고 여러가지 애매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부단하게 싸우면서 경계로 나아갑니다. 끝까지 그 경계에만 서 있지요. 그런 지점들이 다른 작품들과 차별되는 성과였다고 생각해요.
김재영 역시 등단 초기부터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 오는 작가인데, 작년에 나온 『폭식』도 『코끼리』에 비견할 만큼 좋은 작품들이 많더군요. 김재영이나 전성태는 외부를 바라보면서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방식이 무엇보다 아주 정직하고 울림이 깊지요. 문학적으로도 성취도가 높은 작품들을 써내는 중요한 작가들이고요. 특히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국가, 혹은 국경 문제는 우리 모두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화 혹은 지구제국의 도래와 관련해서 마치 국경이 지워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국민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맞지만 자본이 아니라 노동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국경은 공고해지고 있는 측면도 있거든요. 이들은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탈근대를 살아가는 근대인, 지구적 자본 아래 포박당한 현대인들을 말이죠.
한편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상상력도 이러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전일화와 연결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되면 종말밖에 상상할 수 없는 거죠. 네그리·하트는 ‘대항제국’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구적·제국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싸우나 싶고, 현실의 모든 일이 좀 절망적인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싸움이 곧바로 제국과의 싸움이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절망하지 말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싸움도 굉장히 많거든요.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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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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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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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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