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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 작성일 2013-03-01
  • 조회수 8,924

십년감수(十年感秀)_소설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김경욱

 

 

 

 


   평양의 맥도날드 매장에 어젯밤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폐점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누전 때문일 공산이 크지만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감식반의 조사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으며 지난주 개성의 맥도날드 매장에 발생한 화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 소방당국의 공식입장이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봄, 세상은 뭔가를 지키기 위해 분주했다. 누군가는 투기성 외국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만연한 학원폭력으로부터 자식을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신자유주의의 칼바람으로부터 생존권을 지켜야 했고 또 누군가는 백 년 만의 폭설로부터 도시의 간선도로를 지켜야 했다. 그해 봄은 지켜야 할 뭔가를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척척 안겨주었는데 우리들이 지켜야 할 것의 목록에는 심지어 ‘독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호적인 주주들을 끌어모아야 했고 학교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야 했으며 생존권 사수라는 글이 박힌 머리띠를 두르고 길바닥에 드러누워야 했고 사라진 길 위에 밤새 염화칼슘을 뿌려야 했으며 무엇보다 성난 얼굴로 일본대사관 앞으로 달려가야 했다. 전쟁처럼 소란스럽고 잔인한 봄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그해 봄, 나에게도 ‘사수’해야 할 것이 몇 개 있었다. 장래가 불투명한 남자친구의 폭발 직전인 성욕으로부터 순결을 사수해야 했고 좀체 원망의 대상을 찾을 길 없는 아버지의 실직 때문에 파탄에 직면한 가정을 돌봐야 했다. 그리고 실체가 불분명한 위협으로부터 맥도날드 매장을 지켜야 했다.
   하나같이 사수하기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으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지켜내서 나라는 존재가 아주 쓸모없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그해 봄 내가 새끼 밴 고양이처럼 독기를 품은 채 지켜내려 했던 것은 거추장스럽기도 했던 순결과 있으면 성가시고 없으면 아쉬운 가정과 하나쯤 사라진다 해도 표도 나지 않을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 안락한 미래와 교환될 수 있는 나의 ‘가치’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몸값’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용돈이나 벌 요량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내가 맥도날드 매장에 매일 출근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업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두번짼가 세번짼가 큰 자동차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의 관리부장이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연말성과급이 얼마인지 보너스가 있는 달이 언제인지가 중요할 뿐 그 회사가 어떤 부품을 납품하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모든 일은 아버지의 회사가 생산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비롯됐다. 원자재 가격상승 압박 때문에 생산비를 절감할 수밖에 없는데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는 공장의 중국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경영진이 전격 발표했다. 중국 이전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경영진의 설명은 그러나 두 아이와 아내를 부양해야 할 가장인 아버지의 고용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당최 남을 탓하는 법이 없던 아버지는 중국어를 미리 배워두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지만 온순한 자책은 만시지탄을 면치 못했다. 자신의 무능을 탓하던 아버지도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얼굴을 구긴 채 욕설을 내뱉곤 했다. 낯설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의 분노가 겨누고 있는 대상은 모호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실업이 특정한 개인 탓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잘난 체하는 남동생이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술 취한 아버지는 그 ‘구조’라는 것의 면상을 한 방 갈기고 싶었겠지만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 그 ‘구조’의 얼굴을 봤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실직 후 아버지는 종종 인천공항에 나가 이륙하는 비행기를 망연히 바라보다 오기도 했다. 세탁기에서 우연히 발견한 인천공항행 리무진버스 시간표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 아버지의 기행(奇行)은 가족에게 꼬리가 잡힌 후에도 좀체 끝나지 않았다.
   “공항엔 뭐 하러 나가세요?”
   내가 어느 날 물었다.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편안해 보였는데 이륙하는 비행기를 상상하는지 이륙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지하철로 한 시간이면 충분한 김포공항을 마다하고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 인천공항을 굳이 고집한 걸 보면 중국에 가면 그 ‘구조’라는 것과 맞닥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직은 거대한 파국의 전조에 불과했다. 실직과 동시에 평생의 운이 다한 것처럼 아버지의 삶은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주식으로 퇴직금을 야금야금 까먹더니 아파트를 담보로 빚을 얻어 야심차게 개업한 장작구이 통닭집은 조류독감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팔리지 않는 통닭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거듭되자 나는 달걀만 봐도 구역질했다. KFC 매장에서 일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던 나날이었다. 닭들이 집단으로 독감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재해였으므로 이번에도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을 쉬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아파트마저 경매에 넘어갔지만 아버지가 재기를 도모할 의욕마저 상실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졸업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입대해야 했고 엄마는 함께 단풍 구경 다니던 친구들에게 정수기를 팔러 다녀야 했으며 나는 학업을 중단하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뜸했던 공항나들이를 재개했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중국으로 밀항하는 꿈을 꾸곤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속셈을 들켜버린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경제적 능력은 상실했지만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마땅했다. 적어도 내가 결혼식장에 입장할 때까지는 말이다.
   휴학신청서 사유란에는 중국 어학연수라고 적어넣었다. 아침에 매장의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도맡아야 하는 메인을 맡겠다고 하자 평소 나에게 치근덕거리던 매니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고쳤냐?”
   기분이 상한 나는 대답했다.
   “애를 지워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요.”
   매니저는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메인을 맡기 위해 매니저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오전에 학교에 가야 하는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들은 애당초 엄두를 낼 수 없었을 뿐더러 갖은 허드렛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궁하지 않으면 가급적 피하려는 직책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아르바이트 삼아 주중 삼 일만 그것도 내 스케줄에 맞춰 짬짬이 근무하던 나는 매일 아침 꼬박꼬박 매장에 출근하게 되었다. 비정규적이던 나의 노동이 본의 아니게 정규적이 된 것이다.

 

   정규적인 노동의 강도는 내 각오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여덟시까지 출근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재료를 싣고 오는 차를 맞는 날에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나가야 했다. 차는 일주일에 세 번 다녀갔다. 매일 오는 것이 아니어서 한 번에 받아야 할 재료의 종류와 양은 많았다. 양상추부터 콜라시럽까지 매장으로 옮겨야 할 재료들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빵이나 쇠고기패티 같은 것들은 그럭저럭 옮길 만했으나 콜라시럽처럼 액체상태인 것들은 몹시 무거웠다.
   재료 운반이 끝나면 전날 클로징 담당이 분리해서 세척해놓은 조리장비들을 조립하고 주방과 로비를 청소하고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하는 크루 룸을 정리했다. 이 모든 것을 끝내야 비로소 매장을 오픈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도 베이징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이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하루에만 전 세계에서 사천삼백만 명이 드나드는 이 패스트푸드점의 영업 준비는 인종과 언어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단일한 과정으로 ‘표준화’되었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별과 나이와 계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고객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균일한 맛의 햄버거를 먹고, 역시 성별과 나이와 계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뒤처리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제공했다. 햄버거를 먹고 나면 빌 게이츠도 실업자인 아버지도 스스로 쓰레기를 처리해야만 한다. 맥도날드의 상징인 황금 아치 아래서 이런저런 ‘차이’는 무의미해져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기꺼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다.
   갓 취직해 오리엔테이션받을 때의 일이다. 매니저는 이 거대한 다국적 패스트푸드 기업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영상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캘리포니아로 흘러들어간 형제에 의해 만들어져 백이십여 나라에서 삼만 개가 넘는 매장을 거느리게 되기까지의 ‘신화’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맥도날드는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다고 했다. 맥도날드가 들어간 나라끼리는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갈등 예방의 황금 아치 이론’이라나 뭐라나. 그때 여드름쟁이 남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알기로 1999년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했을 때 그곳에는 맥도날드 매장이 열 개나 있었어요.”
   여드름쟁이는 자신의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출발해 매출액 기준으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핵심 매장을 책임지게 된, 이 바닥에서 나름대로 입지전적 인물인 매니저는 얼굴을 붉힌 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오리엔테이션을 서둘러 마쳤다.
   “맥도날드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여러분이 맥도날드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묻기 바랍니다. 맥도날드 가족이 된 이상 여러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맥도날드화되어야 합니다.”
   매니저의 보복은 집요해서 여드름쟁이는 한 달도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 집요함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감자 튀기는 기름을 거르는 일, 그러니까 필터링을 맡긴 다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불순물까지 제거하도록 다그치는 것이었다. 삼백육십 도가 넘는 기름을 끝없이 걸러내면서 여드름쟁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으나 매니저와 화해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만두면서 여드름쟁이는 입사동기인 나에게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틀렸어. 유고슬라비아에는 1997년에 이미 맥도날드 매장이 열한 개 있었어.”
   역시 여드름쟁이는 ‘맥도날드화’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사건이 터진 것은 내가 메인으로 일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출근길, 매장 앞에 A4 크기의 종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근처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뿌린 광고전단이려니 생각했으나 주워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에 젖은 종이에는 괴이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잉크가 번져 본래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글자가 많았고 통째로 뭉개진 글자도 더러 있었다. 그것은 흡사 만신창이가 되도록 혹독한 검열을 묵묵히 감당한 ‘불온’문서처럼 보였다.

 

   우리의 ×구
   1. ××세× ×성×자를 ×취하지 마라.
   2. ×경××× 즉각 중단하라.
   3. 아××의 ×강을 ××지 ××.
   이상의 ××를 ×살할 시에는 응분의 대가를 ×수해야 할 것이다.
   ―×××××방×선

 

   그 내용의 전모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글 밑에는 조잡한 솜씨로 햄버거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엑스표가 쳐져 있었다. 햄버거 그림만 아니었다면 정체불명의 전단을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오븐에 넣어 바싹 말린 괴(怪)전단을 매니저에게 보여줬다. 매니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매니저는 전단을 발견했을 당시의 정황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옆 빌딩에 버거킹이 들어서고 인근의 피자헛이 공격적으로 판촉행사를 벌이던 때였다. 매니저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대체 무슨 일이냐며 몰려들자 그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별거 아니라고 어떤 정신나간 녀석이 장난질한 거라며 코웃음쳤다. 그의 코웃음에는 과장된 구석이 있었다. 약자는 강자에게 살과 뼈를 내줘야 하는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매니저가 본능적으로 뭔가를 감지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조잡하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전단일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별일 없었다. 매니저는 초조해하면서도 안도했고 우리는 전단의 유실된 글자를 채워넣는 게임에 몰두했다. 상상력과는 무관한 판에 박힌 노동의 와중에 괴전단은 우리의 푸석해진 뇌에 예기치 않은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리의 친구’와 같은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전단의 제목은 ‘우리의 요구’로 별 잡음 없이 확정되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누군가는 이런 의견을 피력했다. “너무세게 동성애자를 갈취하지 마라.” 띄어쓰기가 틀렸다는 이유로 묵살되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망할세상 만성적자를 고취하지 마라.” 역시 띄어쓰기와 호응이 문제였다. 이런 추론도 제기됐다. “여보세요 악성감자를 섭취하지 마라.” 이번에도 자연스럽지 못한 호응이 걸림돌이었다. 두번째 항목은 “강경진압을 즉각 중단하라”나 “포경수술을 즉각 중단하라”일 수도 있었다. 세번째 항목은 “아우들의 요강을 버리지 마라”나 “아시아의 최강을 넘보지 마라”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맨 마지막 줄, 그러니까 전단을 살포한 주체였다. ‘청담동진단방사선’부터 ‘각종수입가방수선’이나 ‘물좋은노래방알선’까지 의견은 분분했고 분분한 만큼이나 전단을 살포한 장본인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리는 매니저의 눈을 피해 크로스워드 퍼즐을 맞추듯 전단의 유실된 글자를 복원하는 데 골몰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괴전단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형태를 잃어버림으로써 무의미해진 전단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장난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단이 다시 발견된 것이다. 비에 젖지도 신발 자국이 찍히지도 않아서 손상된 글자 하나 없이 너무나 양호한 상태로.

 

   우리의 요구
   1. 제3세계 미성년자를 착취하지 마라.
   2. 환경파괴를 즉각 중단하라.
   3. 아동들의 건강을 해치지 마라.
   이상의 요구를 묵살할 시에는 응분의 대가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제3세계해방전선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전단의 등장으로 매장은 발칵 뒤집혔다. 크루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자신들의 추론이 허황되고 턱없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3세계해방전선’이라니. 크루들의 표정이나 사소한 몸짓 하나도 매출에 직결된다는 것이 매니저의 지론이었다. 매니저는 적극 대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크루들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힘주어 말했다.
   “동요하지 마라. 저들은 한낱 사이비 테러단체에 불과하다. 불법 테러단체와 협상은 있을 수 없다. 굴복은 더욱 가당치 않다.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을 믿어라. 지금 이 시각부터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간다. 두 눈 부릅뜨고 거동 수상자를 색출해 조기에 격리하라.”
   테러라니. 그 자리에서 아연실색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나 영화에서나 보던 불타는 차량, 화염에 휩싸인 채 폭삭 주저앉는 건물, 구급차에 실려가는 부상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햄버거빵을 데우다가 쇠고기패티를 굽다가 감자를 튀기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계산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공격당한다는 상상은 즐겁지 않았다. 확정되지 않은 위협은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욱 위협적이었다. 테러야말로 맥도날드 정신에 역행하는, 반맥도날드적 행동양식이 아닐 수 없었다.
   훼손되지 않은 전단의 효과는 신속하고 확실하게 나타났다. 다음날 세 명의 아르바이트생이 돌연 매장을 떠났다. “너무세게 동성애자를 갈취하지 마라”와 “아우들의 요강을 버리지 마라”와 “물좋은노래방알선”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훼손되지 않은 전단의 출현으로 가장 큰 심적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되긴 했지만 그들이 매장을 떠난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겁쟁이, 배신자라는 말이 매니저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매니저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해나갔다. 먼저 세 명의 신입을 뽑았는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의 남자애들이었다. 남자로만 뽑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온 녀석들인지 눈매가 쫙 째져 날카로운 인상들이었는데 모두 무술 유단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무래도 매니저는 ‘제3세계해방전선’이라는 단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깨달았으나 사태가 어쩌다 그리 심각해졌는지 눈치채지 못한 매니저는 남아 있는 크루들에게 특별수당을 약속함으로써 추가이탈을 막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보상, 일종의 위험수당이었다. 햄버거가게 따위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게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매니저가 약속한 특별수당, 그러니까 위험수당을 손에 쥐자 미심쩍게만 여겨졌던 그 위험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실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매니저로부터 받은 추가액수만큼만.
   위험수당을 손에 쥔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데탕트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투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의 안전과 매장의 안위는 이 세계의 존망보다 우선했다. 그간 보이지 않던 위험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점만큼 불시에 감행되는 비정규적 공격으로부터 무방비상태인 곳도 없어 보였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고객이기 이전에 잠재적 테러리스트였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가 맥도날드에 소속되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유니폼의 모양과 색깔로 직위와 담당업무까지 식별할 수도 있다. 로비와 주방 사이에는 이렇다 할 은폐물이 없어서 우리의 보급루트 또한 잠재적 적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들이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언제 공격해올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카운터 앞에 줄을 서 있다가, 메뉴판을 보며 주문하다가, 구석자리에서 햄버거를 뜯어먹다가, 남은 음식과 빈 컵을 버리다가, 문을 열고 나가려다 갑자기 돌아서서 적의를 드러낼 수도 있다.
   공격의 방식도 예측불가능하긴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들이닥칠 수도 있고 독극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쓰레기통에 슬그머니 집어넣을 수도 있고 폭발물을 실은 차량을 몰고 드라이브 인 카운터로 돌진해올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한층 가공한 위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사위를 경계하는 게 고작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전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했다. 식사시간도 줄였으며 크루 룸에서 틈틈이 즐기던 휴식도 포기해야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십 밀리미터 두께로 다져진 쇠고기패티를 구우면서, 구워진 쇠고기패티와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십칠 밀리미터 두께로 구워진 빵과 칠점 영팔 그램의 양파와 십사 그램짜리 치즈와 냉동된 상태로 태평양을 건너온 양상추 한 장으로 햄버거를 ‘조립’하면서 매장 구석구석을 척후해야 했으며 고객 상대 매뉴얼에 따라 “콜라도 드시겠습니까?”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등의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며 카운터 너머의 상대를 정탐해야 했다. 느슨해지는 법이 없는 긴장 속에서 ‘나’라는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었고 ‘우리’는 각자에게 부여된 임무를 군말 없이 감당해야 했다. 그리하여 맥도날드화되지 않은 위협 앞에서 우리는 일사분란하게 맥도날드화되어갔다.

 

   그 무렵 맥도날드화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의 의사소통은 단 몇 마디 말로도 가능해졌다. 각자의 어깨에 얹힌 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밥은?” “됐다.” 이런 식이었다. 맥도날드의 고객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나도 끼니는 스스로 장만해 먹고 알아서 치워야 했다. 모든 가사노동은 특정한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각자의 필요와 능력에 맞게 분산되어 ‘효율적’으로 수행되었다. 엄마가 늘 세일즈중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광경은 아버지가 실직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귀가시간은 어김없이 마지막 공항 리무진버스가 집 근처에 도착하는 무렵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내가 매장에서 가져온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중국 무협영화를 보았다. 과장된 기합과 비명을 내지르며 공세와 수세를 거듭하는 영화를 보며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급기야 엄마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햄버거를 입 안 가득 채워넣은 채 중국 무협영화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엄마가 읽어낼 희망이란 한줌도 없었나보다. 엄마의 때늦은 절망의 정확한 근거를 짐작할 수 없었던 나는 더이상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를 집에 가져오지 않았고 두 달 동안 무료로 시청하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치고 케이블방송을 끊었다. 이혼만은 막아야 했다. 미모가 출중하지도 않고 재산도 없는데다 학벌도 신통치 않은데 부모의 이혼이라는 결격사유까지 프로필에 추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무원시험 준비한다며 고시원에 처박혀 있던 남자친구를 찾아갈 때면 엄마가 느꼈을 감정의 정체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모름지기 목표는 크게 잡아야 한다 했거늘 사법고시도 아니고 공인회계사시험도 아니고 공무원시험 준비가 뭐란 말인가. 게다가 행정고시도 아니고 9급이라니.
   “모르는 소리 마라. 요즘은 사법고시나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하고도 갈 데가 없어서 노는 사람들 많아. 일단 합격만 하면 나라에서 갈 곳 마련해주지 중간에 잘릴 염려 없지 공무원이 최고야.”
   남자친구의 대답은 언제나 ‘예측가능’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분식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비디오방이나 노래방에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데이트 비용의 총액은 예외없이 이만원 안팎으로 ‘계산 가능’했다. 게다가 자기는 시험 준비로 일분일초가 아까우니 내가 만나러 오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실직은 나의 직업관마저도 바꿔놓아서 명예나 부보다는 안정이 최고라고 여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디오방이나 노래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내 몸을 더듬는 ‘자동화’된 행동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스킨십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자신의 억압된 성욕을 해소하는 데 골몰하는 남자친구의 태도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처음에는 불쾌했고 나중에는 절망스러웠다. 전화해서 보고 싶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도 그나마 내가 순결을 사수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의 순결이 지켜지는 한 남자친구는 내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친구의 욕구가 극에 달할수록 나의 불만도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
   요즘 뭐가 그리 바빠 얼굴도 안 비치냐는 남자친구의 투정에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헤어지자면 누가 겁낼 줄 알아?”
   큰소리친 지 이틀도 못 가서 남자친구는 잘못했다고 전화해왔다.
   “당분간 전화도 하지 말자.”
  그렇게까지 할 뜻은 없었지만 말을 내뱉고 보니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차제에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할 참이었다. 이를테면 우리 집의 의사소통과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연애가, 심지어 남자친구의 성욕마저도 맥도날드화된 것이다. 강요된 결과가 아니었기에 그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괴전단이 발견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다. 부주의한 고객들은 늘 있게 마련이어서 콜라를 바닥에 쏟거나 탁자를 케첩범벅으로 만들거나 쟁반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두거나 막 걸레질한 바닥에 발자국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주의한 행동은 ‘제3세계해방전선’과는 무관해 보였다. 매니저는 다음달부터는 특별수당 지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특별수당 지급 중단은 더이상 위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계는 허물어졌고 긴장은 무너졌다. 화폐로 교환되지 않은 위험은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
   허물어진 경계와 무너진 긴장은 사소하고 어이없는 실수를 야기했다. 양상추가, 심지어 쇠고기패티가 빠진 햄버거 때문에 고객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카운터의 처리속도는 더뎌졌고 드라이브 인 카운터에서 주문받은 빅맥이 치즈버거로 둔갑해 전달되었다. 새로 채용된 남자애들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어떤 꼬마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팀워크는 실종되고 매출은 급감했다. 애당초 햄버거가게 따위가 테러의 대상이 될 리가 없었다. 양상추나 쇠고기패티가 빠진 햄버거를 조립하면서, 고객의 주문을 건성으로 들으며, 막 걸레질을 한 바닥에 콜라를 흘리는 꼬마를 무섭게 노려보며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전단이 발견된 것이 매니저로서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전단을 발견한 사람은 매니저였다. 주차하다 주웠다는 매니저는 기다렸다는 듯 크루들을 다시 집합시켰다. 새로 발견된 전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1995년 덴마크 코펜하겐 맥도날드 매장 전소.
   1997년 콜롬비아 칼리 맥도날드 매장 폭탄 폭발.
   1998년 그리스 아테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맥도날드 매장 폭탄 폭발.
   1999년 벨기에 앤트워프 맥도날드 매장 방화.
   2000년 런던 트라팔가 광장 맥도날드 매장 습격.
   2003년 베네수엘라 맥도날드 매장 습격.

 

   그것은 ‘제3세계해방전선’이 자행한 맥도날드 매장 습격의 핏빛 연대기였다. 맥도날드 매장이 그토록 빈번한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방화와 폭파와 약탈로 점철된 그 연대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제3세계해방전선’이 즐겨 사용하는 공격방법이 방화, 폭파라는 것.
    누군가는 경찰에 신고하자 했다. 경찰이 드나드는 것이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니저는 그 의견을 일축했다. 대신 위험수당을 다시 지급하겠다고 했다. 전소, 폭발, 방화, 습격이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위협에 상응해야 했으므로 특별수당의 액수는 지난달보다 커졌다. 그리하여 ‘제3세계해방전선’의 실체와는 무관하게 위험은 다시 현실이 되었다.
   이번에도 불안과 긴장은 특별수당의 금액만큼만 교환되었다. 우리의 눈초리는 재차 매서워졌고 손놀림은 빨라졌다. 되살아난 것은 눈빛과 순발력만은 아니어서 무너졌던 팀워크가 복구되어 우리는 다시 ‘가족’이 되었다. 햄버거는 완벽하게 조립되어 고객의 주문을 충족시켰으며 막 걸레질을 한 바닥에 일부러 콜라를 흘리는 꼬마에게조차 너그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상대의 주된 공격방식을 간파한 이상 경계의 역량은 집중되고 위험은 현저히 예측 가능해졌다. 카운터 밑에는 야구방망이와 소화기가 비치되었고 로비 담당에게는 가스총이 지급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큰 가방이나 배낭을 소지한 사람은 따가운 감시의 눈길 속에서 햄버거를 먹어야 했으며 드라이브 인 카운터로 진입하는 운전자들은 주문에 앞서 터무니없어 보일 정도로 높은 과속방지턱의 환대를 받아야 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위험은 점차 예측 가능해지고 계산 가능해졌으며 경계는 효율적이고 자동화되었다. 위험마저도 맥도날드화된 것이다.

 

   맥도날드 습격의 연대기가 발견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카운터를 맡던 K가 연락도 없이 결근하는 바람에 내가 대신 카운터를 지키게 되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제멋대로야. 도대체 책임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다니까.”
   결근한 사람을 대신해 출근한 사람들이 매니저로부터 훈계를 들어야 했다. 매니저의 훈계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잖아도 빠듯한 일손이었다. 전선에서 이탈한 한 명의 몫을 분담하느라 모두들 예민해져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햄버거를 반으로 썰어달라 했다가 금세 주문을 취소하고 프렌치프라이를 새로 주문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몰염치한 고객 때문에 나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저거……”
  까무잡잡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른 외국인이 카운터 너머 천장에 부착되어 있는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눌하게 말했다. 동남아시아 쪽 같기도 했고 서남아시아 쪽 같기도 했다. 점퍼 차림의 그는 까만 륙색을 메고 있었다. 내 얼굴이 굳어졌다. 매니저가 마련한 테러방지 매뉴얼에 따르면 그는 요주의 인물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적색경보상황이었다. 나의 신경은 그가 메고 있는 륙색에 집중됐다. 저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M16? 수류탄? 아니면 시한폭탄? 불길하고 끔찍한 상상이 스치면서 오금이 저리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햄버거 하나.”
   끔찍한 상상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주방에 대고 외쳤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주문했는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콜라도 드시겠어요?”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어서 그 와중에도 내 입에서는 판촉을 위한 판에 박힌 질문이 튀어나왔다.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외국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콜라. 오케이.”
   그 외국인을 주시한 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로비를 청소하고 있던 S의 손길이 조심스레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매니저의 지시를 따랐다면 그의 허리춤에는 가스총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S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우리의 주밀한 경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문한 햄버거를 기다리던 외국인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륙색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햄버거와 콜라를 쟁반에 담아 건넸다. 외국인은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포장지를 벗기고 햄버거빵을 들춰보았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비명이 날카롭게 터져나왔다.
   “노 비프(No beef)! 오 마이 갓(Oh my God)!”
   버럭 소리치는 외국인과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매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주목했다. 긴장한 탓에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왓스 더 프라블럼(What? the problem)?”
   그는 햄버거가 담긴 쟁반을 카운터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다시 외쳤다.
   “노 비프(No beef)!”
   그 다음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제 나라 언어로 무슨 말인가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쏟아내면서 갑자기 륙색을 내려놓고 지퍼를 여는 것이었다. 그의 손길은 다급했다. 그때였다. 매장 전체가 뭔가에 떠밀리듯 진저리쳤다. 의자가 부르르 떨며 자리를 맴돌았고 탁자 위에 있던 종이컵이 넘어져 음료수가 쏟아졌다.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매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특별수당을 받은 우리는 매장을 버릴 수 없었다. 크루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들고 외국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방망이, 소화기, 빗자루 심지어 햄버거도 들려 있었다.
   “맥도날드를 지켜라!”
   매니저의 외침은 다급하고 비장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S의 가스총에서 가스가 분사되는가 싶던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모든 종말은 그렇게 찾아오는 듯했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의 등짝을 감당할 수 없는 소란의 중심으로 매몰차게 떠밀며.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밖에서, 텔레비전 속에서 세상은 여전했다. 텔레비전은 우리나라도 더이상 지진의 안전지대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발생한 지진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상륙했다는 것이다. 매장이 흔들린 것은 테러가 아니라 지진 때문이었단다. 나는 뭔가 속은 느낌이었다.
   응급실에서 눈을 떠 내가 알게 된 것은 진동의 원인만이 아니었다. 내가 건넨 햄버거를 보고 화들짝 놀라 항의하던 외국인은 테러리스트도 거동 수상자도 아니었다. 그는 외국계 컴퓨터회사에 근무하는 프로그래머였다.
   “아!”
   병원에 들른 매니저로부터 그 외국인이 인도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외마디 탄성을 내뱉었다. S가 긴장한 나머지 외국인이 아닌 내 얼굴에 가스총을 분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매니저의 냉정한 말에 나는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침묵을 자책과 반성으로 해석했는지 매니저는 소동의 책임을 물어 내 수당을 깎겠다고 핏대를 올렸다. 해고되지 않는 걸 고마워하란다. 외국인이 륙색에서 꺼내려 한 것이 무엇이었냐고 내가 물었다. “폭탄이라도 터뜨리려는 줄 알았어? 사전을 꺼내려 했대”라고 대답하고 나서 매니저는 그리 어수룩한 상황판단력으로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제3세계해방전선’을 상대할 수 있겠냐며 흥분했다. 이번 소동으로 ‘제3세계해방전선’에 대한 매니저의 적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듯했다.

 

   다음날 매니저는 특별수당의 액수를 더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크루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날의 소동에 대해 입을 다물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맡은 일에 몰두함으로써 매니저의 배려에 화답했다. 무단결근에 대해 매니저에게 한 시간 동안 질책을 받으며 참회의 눈물을 떨어뜨려야 했던 K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경계의 빛을 애써 감춘 채 고객과 생글생글 눈을 맞추며 콜라나 세트메뉴를 권했다. S는 분사력이 한층 강화된 가스총을 허리춤에 은밀히 찔러넣은 채 바닥을 정성껏 쓸고 닦으며 고객들의 동태를 살폈다.
   특별수당 인상 대상에서 유일하게 제외된 나는 쇠고기패티를 굽다 문득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버거킹도 아니고 피자헛도 아니고 왜 하필 맥도날드일까? 마닐라도 아니고 방글라데시도 아니고 왜 하필 서울일까? 신촌도 아니고 압구정동도 아니고 왜 하필 이곳일까? 그 점에 대해 여태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더욱 놀라웠다.
   나는 매장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매장 왼쪽에는 버거킹과 피자헛이, 오른쪽에는 피트니스센터와 스타벅스가, 도로 맞은편에는 도요타와 크라이슬러 매장이 보였다. 다국적기업 특구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서울 도심 어디에서나 맞닥뜨릴 수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불현듯 고개를 든 의문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증폭되었다. 맥도날드화된 위험에 대처하는 것보다 더 화급한 것은 전혀 맥도날드적이지 않은 바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왜 하필 우리인가?
   돈을 모아 유럽으로 배낭여행 가는 것이 꿈인 K, 오백만 화소를 자랑하는 최신 카메라폰에 다운받은 동영상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J, 지난 겨울방학 때 받은 쌍꺼풀수술 부작용으로 색안경을 끼고 다니는 H, 합기도 삼단이라고 소문난 S, 자동차를 몰고 오는 연예인에게 사인을 받다 매니저에게 주의를 받곤 하는 드라이브 인 카운터의 L. K가 가고 싶어하는 배낭여행의 목적지는 어디며, J가 오백만 화소의 최신 카메라폰에 다운받는 동영상은 어떤 것들이며, H가 쌍꺼풀수술을 받은 병원은 어디며, S가 다닌다는 도장은 어디에 있으며, L이 사인을 청한 연예인들은 누구인가? 매일 감자를 튀기고 햄버거를 조립하고 카운터를 지키며 바닥을 쓸고 닦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평양의 맥도날드 매장에 어젯밤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폐점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누전 때문일 공산이 크지만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감식반의 조사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으며 지난주 개성의 맥도날드 매장에 발생한 화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 소방당국의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제3세계해방전선’이라는 단체는 일련의 화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에 수록

 

 

 

  추천하며


   웰빙 바람을 타고 이제는 패스트푸드점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오히려 슬로 라이프의 이름을 내걸고 여유와 위안의 환상을 판매하려는 업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을 지경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현대인의 삶은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는 열쇳말 안에 갇혀 있다. 표준화된 생산과 소비 과정 덕분에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햄버거를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맥도날드의 황금 아치 아래서 인간들 역시 로봇처럼 표준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소설이 하는 일은 이 같은 사회과학적 진단을 맥도날드화된 방식으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데 있지 않을 터. 작가는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을 영민하고 재치 있게 수행해 나간다. 이래저래 ‘사수’해야 할 것들이 많은 스무 살 여대생인 주인공의 목소리로 구조적 폭력으로 망가진 가족의 곤경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구조(構造)’보다도 구조(救助)되어야 할 청춘의 생을 엄살도 체념도 없이, 긍정을 앞세운 정신승리도 없이 맛깔스럽게 술술 풀어 나간다. 그저 맥도날드에 가려 했는데 맛집을 찾은 기분이 이럴까.

 

(소설가_편혜영/문학평론가_노대원, 양윤의, 조연정)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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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쾌의 여정

[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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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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