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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 작성일 2023-07-01
  • 조회수 1,150

《문장 웹진》 책방곡곡 전주 살림책방(제3회)

사회, 원고정리 : 살림
참여자 : 재재, 아리엘, 모아, 인애
책 : 정은, 『기내식 먹는 기분』(사계절, 2022)


창밖 독서모임 3회, 2023년 6월 9일, 지향집

살림 :

창밖 독서모임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여행’이라는 창으로 바라본 우리의 세계인데요. 정은 작가님의 여행 산문집, 다들 어땠어요?

재재 :

여행지에 대한 단순한 소개가 아닌 삶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부분, 예를 들어 “길을 걷는 순간만 삶을 살고 다녀와서는 그것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문장들이 참 좋았어요.

인애 :

저는 39, 40쪽 K한테 느꼈던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K는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작가는 고통을 참아내고 보상을 얻어낼 거라 생각하며 인내하면서 걷는데, K는 하루하루를 귀족처럼 대하면서 보내는 것?

모아 :

나도 거기에 밑줄 쳤는데.

재재 :

“좋은 하루를 쌓아 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그 부분도 참 좋아요.

인애 :

이어지는 문장에서 작가님이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잘하려면 일단 자신을 대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 K다.”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자신을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는데, 어떠세요? 저는 읽으면서 이 부분을 질문으로 던져 보고 싶었어요. 다들 자신을 잘 대접하고 있나요?

재재 :

저는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전주로 이사 온 이후로 내 삶을 어떻게 하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지 연습하고, <0원으로 사는 삶>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아리엘 :

저는 식사할 때 잘 차려 먹는데, 그게 나를 대접하는 방법이에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서서 아무렇게나 먹고 치웠는데, 언젠가 내가 외적인 것, 시각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를 위해서 예쁘게 차려 먹어요.

모아 :

아리엘은 자신에게 초점이 잘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여서. 인애는 어때요?

인애 :

나는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더 이상 집어넣지 않는 것 자체가 나를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리엘 :

34쪽에서 작가님이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놓곤 했다.”라고 했잖아요. 여행지만 보더라도 순례자의 길, 인도, 현재 살고 있는 곳까지. 그러다가 35쪽에서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고 해요. 고통이라기보다 자유로워 보여서 부러워요.

인애 :

243쪽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님은 자기 자신을 던졌다고 표현해요. 조금 더 읽어 보면, “그렇게 나를 던지듯이 달려갔을 때 함께 달려 주는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있고, 그 힘으로 내가 원래 나 자신에 더 가깝게 변해 간다는 것.” 이 부분을 읽으며, 작가 자신을 계속 던지면서 살아온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가끔 저도 고통에 밀어 넣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오히려 긴장 속에 사는 게.

재재 :

169쪽 “여행을 다녀오는 일이 먼 땅에 거울을 하나 만들어 두고 오는 일”.

모아 :

아, ‘연인’ 이 문장 너무 뻔뻔하고 재밌지 않아요?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방금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아리엘 :

중간 중간 그런 표현들이 좋았어요. “인도에서도 하늘을 몸을 뒤집어 순식간에 어둠이 내리면”, “나뭇잎은 얕은 계절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나무껍질은 그보다 오래된 자연의 얼굴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인애 :

170쪽에 “그 보이저호가 한 것을 하려고 우리는 매번 비행기 티켓을 산다. 떨어져서 나를 보려고. 내가 아닌 것을 거두어내어 버리고 보다 정확하게 나를 보려고.” 거기에 밑줄 쳤어요. 아리엘 말대로 그런 표현들이 남아요. 내가 왜 여행을 가고 싶어 했는지, 책을 읽으면서 그 언어를 찾은 것 같아요. 내가 나와 거리를 두고 싶구나. 나를 외딴 곳에 던져 놓고 싶지? 왜 나를 극한 상황에 두고 싶을까? 그래야 안 보이던 것이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리엘 :

“땅 위에 두고 온 자잘한 고민들은 차지할 자리가 없다.” 책 표지 끝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는데, 나를 고통 속에 던진다고 하지만 나를 떨어트려서 본다는 것이 주위에 있던 의무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오롯이 나만 남으니깐, 덧입혀 있던 나를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른 독서모임에서 여행기에 대한 책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는 너무 시간 순서대로 쓴 책이라 다시는 여행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고 했는데, 이 책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행기는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바뀐 거죠. <사랑의 방> 이 부분을 씁쓸한 부분이라고 해서 넣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반대로 이 책의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여행에 대한 환상보다는 현실이 이어지는 부분.

모아 :

어떤 부분이 완성이라고 생각해요?

아리엘 :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행이라면 무언가 일상에서 벗어나거나 탈출한다고 말하잖아요. 여행 가서 고생하면 좀 더 성장하거나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처럼 말하는데, 여기서는 여행과 삶이 이어지잖아요. 만일 여행기로만 끝났으면, 판타지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살림 :

저도 마지막 챕터가 가장 좋았는데, 210쪽에 왜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지, 누가 볼 때는 나태해 보일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철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 이유 자체가 삶이 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작가님이 대신 해준 것 같아 시원한 느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고 질문했는데 틀리지 않다는 위로를 얻을 수 있었어요.

인애 :

저도 211쪽 “걱정도 하지 말고 조언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래. 그 사람은 그게 살 길이야.” 이 부분에 밑줄 쳤어요.

아리엘 :

나도 전에 나를 뜯어 고치고 싶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 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애 :

걱정도 하지 말고, 조언도 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조율하면서. 그런데 사회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 때문에 늘 자신을 괴롭혔던 것 같아요. 나한테 좀 미안했어요.

아리엘 :

그래서 이런 모임이, 이런 공간이 중요한 것 같아요. 234쪽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느슨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 환대의 공간”.

살림 :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힘든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사람을 경계하거나 그럴 것 같은데, 책에 보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거든요. 편안한 공간에서 벗어나 타지에서는 더 그럴 것 같은데.

모아 :

여행지에서는 사람도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살림 :

모아도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았어요? 어땠어요?

모아 :

인도로 3개월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좋은 기억은 별로 없어요. (웃음)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해서 힘들었어요. 극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한 건, 배낭여행 중에 힘들고 낯선 상황이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런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극적으로 다가오는 거죠.

인애 :

저도 터키에 갔을 때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극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돼요.

재재 :

우리의 일상이 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일상에서 그런 요소들을 발견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내가 행복한 요소들을 일상에 일부러 떨어뜨려 놓는 것도 팁이라면 팁일까.

아리엘 :

그러면 작가님은 순례자의 길에도 떨어트려 놓고, 인도에도 떨어트리고, 부럽다. 106쪽에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두 번째 태어난 것처럼 기억할 수 있다”. 낯선 감각 속으로 던져지는 경험을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오늘 아로마 시향 할 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이 문장으로 설명이 되는 것 같거든요.

재재 :

타히티 프로젝트에서 나온 이야기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삶이 시작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작가라고 하는 것도, 작가가 되고 싶어서 길을 떠난 거잖아요. 순례길을 오른 순간부터 작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애 :

241쪽에 “스스로 작가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라며 말하며 고은이라는 친구가 작가의 글을 모아 A4로 출력해서 책 모양으로 만들어 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순간이 나한테 정말로 필요했다. 내가 믿을 만한 누군가가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해 준 순간. 그런 단 한 사람.” 우리의 선택이 확신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그 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살림 :

문득 책 제목이 왜 <기내식 먹는 기분>인지 궁금하네요, 우리가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보면 기내식이나 먹는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요.

아리엘 :

저도 사실 제목을 보고 생각했던 책 내용과 달랐어요.

인애 :

프롤로그에 “기내식을 먹고 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잠이 온다.” 공간의 변화 그 기분을 그렇게······ 망각 서비스가 결국 책이 말하려는 게 아닐까? 산티아고, 인도 모두 힘들지만 결국 다 망각을 하기 때문에? 책 제목을 다시 지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지으시겠어요?

아리엘 :

저는 ‘객창감’이요. 부제도 붙여서요. 105쪽에 보면, “객창감이란 건 아마도 타국에서 혼자 머무는 방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 같은 것”이라고 했잖아요. 뭔가 시적이기도 하고. (웃음)

살림 :

책방지기로서 끌리긴 하네요.

인애 :

산티아고도 인도도 힘든 곳인데 다시 가잖아요. 망각하기 때문에 또 갈 수 있는 것처럼 기내식을 먹는 기분이 그렇다고.

아리엘 :

버리는 것이 없을 때까지 버리는 것이 결국 망각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재재 :

232쪽 에필로그에서 괴테 문장도 좋았는데, “이 모든 것은 바로 ‘시작한다’는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왜 자꾸 떠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도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살림 :

여행 산문집인데 너무 철학적으로 다가간 것 같네요. (웃음) 오늘 모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세 번의 문학의 창문을 여는 동안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다들 건강히 지내세요.



<참여자>

전주한옥마을에서 책방을 운영하며 지역과 소통하고 있다.
살림(사회, 원고정리)

재재
마음의 평화와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며 자연(스러운 것)을 좇아서 살
아가고 있다. 탈서울 후 전주에서 적게 일하고 많이 노는 재미에 빠진
한량이 되고 싶은 방랑객.

아리엘
독서, 요가, 가족을 사랑하는 일상을 삽니다.
익숙해져서 편안해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고 싶어요.

모아
전주에서 공간 두 개를 운영하며 재미지게 살고 있어요.
요즘 정원 가꾸기에 푹 빠진 사람.

인애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 평화로운 것과 함께 사는 것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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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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