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 작성일 2024-07-01
  • 조회수 888

[에세이]


   아, ‘장르 문학’ 하시는구나 


김용언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고, 열심히 읽고, 그에 관한 잡지를 만들고, 또 가끔은 관련 공모전 심사를 보면서 언제나 느끼는 바가 있다. 한국에서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심각하게 척박하다는 점이다.

   가장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장르 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다. ‘(그냥) 문학’1)의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소설들은 굳이 ‘장르 문학’이라고 불린다. SF, 판타지, 미스터리/스릴러, 로맨스, 공포, 무협 등의 꼬리표가 붙고 낱낱이 분류되며 ‘문학은 문학이지만 그냥 문학이라고 부르기보단 그 안의 장르로 명명되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에 속하지 않는 작품은 그냥 문학이 아니라 ‘비장르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면 순문학 역시 일종의 장르임을 인정하면서 모든 작품을 ‘장르 문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예전 한국 문단에서는 ‘순(純)’이라는 단어가 참여 문학/민중 문학 등의 대립항처럼 불렸다고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참여 문학/민중 문학도 ‘그냥’ 문학에 포함된 것 같다. 아무튼 거칠게 말해서 ‘장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현실 자체에 집중하는 소설을 ‘그냥’ 문학으로 호명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장르’로 호명되는 특정한 이야기들에는 그 장르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가 있고 또 그 안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 약속된 구조와 규칙을 이용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 결과물이 ‘그냥’ 문학으로 불릴 수 없고 장르 문학으로만 불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르 문학도 문학임을 인정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장르 문학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자꾸 찾아온다. 이를테면 한국 작가의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었을 때 현지 리뷰들을 찾아보면, 스릴러/미스터리/공포 등의 명칭을 명확하게 부여하면서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기존 등단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때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또는 ‘경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한’ 등의 애매모호한 문구로 시작할 때가 많은데, 해외에서는 자신들에게는 낯선 작가의 번역 작품의 특성을 단번에 설명하기 위해 ‘이것은 스릴러다’ 또는 ‘이것은 공포소설이다’라고 알려준 다음 그 작품의 특성이 어떤 점에서 새롭고 멋진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르 문학과 장르 아닌 ‘그냥’ 문학을 엄격히 구별해야 하고, 특정 장르의 테크닉을 시도한 후자의 경우 장르 문학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기법을 사용한 새로운 시도’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이 간극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다시 한 번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장르 문학과 구별되는 작품을 쓰고자 하는, 또는 장르적 기법을 활용하여 기성 문단과 다른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작가들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은 장르적 기법에 얼마큼 알고 있나? 나는 아무래도 미스터리 분야 쪽 심사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거기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정말 많은 작가/작가 지망생들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상황’만 들어가면 그것이 미스터리/스릴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드디어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왔다. 19세기부터 서서히 본격적인 틀이 잡히기 시작한 미스터리는, 일단 수수께끼가 선행한 다음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따라온다. 물론 수수께끼의 행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범죄다. 도둑이 감쪽같이 보물을 훔쳐가든, 누군가가 타인을 폭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든, 경찰이나 검찰 혹은 마을 이장 등의 지도자가 몸을 일으켜서 그 수수께끼를 해결해야 하는 형법/사법 시스템이 움직임으로써 기본 구조가 성립된다.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너무 단순해서 혹은 지나치게 복잡해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보였을 때, 예리한 눈썰미로 아주 미세하게 어긋난 ‘틈’을 발견하고, 그 논리적 유격에서부터 출발하여 결국은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전체 이야기의 주요한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아주 좁게는 에드거 앨런 포가 오귀스트 뒤팽을 통해서, 아서 코넌 도일이 셜록 홈스를 통해서 공식화한 구조를 떠올리면 된다. 미스터리를 쓰기 위해서는 뒤팽이나 홈스 같은 명탐정을 반드시 등장시키라는 소리냐고?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볼테르의 <자디그>,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의 작품을 이 자리에서 거론하면 꽤나 뜬금없이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영미권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미스터리 장르의 먼 조상으로 간주된다(이를테면 <걸리버 여행기>를 SF의 먼 조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번지고, 국가의 존립을 책임져야 하는 오이디푸스 왕은 신탁에 귀 기울이며 이 전염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신탁에서는 수십 년 전 벌어진 선왕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과거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아나서는 여정,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의 클라이맥스, 범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스스로 추방된다. <자디그>에서는 주인공 자디그가 사라진 동물을 눈앞에서 보듯 정확하게 그 모습을 묘사하는데, 동물이 남기고 간 모래 위의 흔적이나 나뭇가지가 부러진 모양 등을 관찰하여 동물의 형태를 유추해 낸 것이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건 현장에 뒤늦게 도착해 동물 찾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자디그의 모습은 셜록 홈스의 전신이라고 할 만하다. 아내 살해범 오셀로는 어떤가. 그는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인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결국 깊이 잠든 그녀의 목숨을 끊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오셀로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도록 사주한, 그러나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진짜 살인범 이아고가 존재한다. 누군가의 은밀한 죄악감과 질투심과 불안감을 엿보고 그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가장 지능적인 살인범(애거사 크리스티는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의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이아고 모티브를 정밀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말이다. 혹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 초반부터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범이라는 걸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떻게 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마음을 먹게 됐는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라스콜리니코프의 대단히 위험한 인간관의 요설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이 ‘쓸모없는’ 타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더 뛰어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잘못된 논리 체계를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를 의심하게 된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그를 소환하여 벌이는 대화 장면, 즉 예심판사는 자신의 심증을 굳히려 하고, 범죄자는 어떻게든 법의 언어를 빠져나가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치열한 논리 싸움은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미스터리가 1) 범인이 누구인가? 2)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 건가? 3) 왜 저질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죄와 벌>은 그 세 가지 주요 질문을 책 전체 분량의 1/3이 지나가기도 전에 전부 밝힌 다음, 그 이후의 과정에 더 집중한다. 이 범죄자를 어떻게 자백시켜 법정에 세울 것인가? 범죄자는 자신을 변호하고픈 마음과 죄책감 사이에서 어떤 갈등을 겪으며 왜 자신의 죄를 만천하에 고백하게 되는가? 

   위에서 예로 든 일련의 고전들은 미스터리, 더 넓게 명명한다면 범죄 소설(Crime Fiction)이라는 갈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한 쟁점들을 전부 선취했다. 범죄가 등장하는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그냥 살인범이 나오고 그냥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어떤 수수께끼(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범죄일 뿐이며, <자디그>의 경우처럼 동물이 사라진 경우도 가능하고, 혹은 최근으로 오자면 미카미 엔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의 경우처럼 왜 할머니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손도 못 대게  했을까 같은 궁금증도 얼마든지 미스터리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가 발생하면, 전후 상황을 폭넓게 조망하고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그 사건의 외양뿐 아니라 내적 의미를 고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안에서 범죄를 둘러싼 여러 인물군상의 희로애락과 함께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필연과 우연의 곡절이 펼쳐진다. 수수께끼(범죄)의 발생이라는 발단을 통해 정말 많은 종류의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이 장르의 구조와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미스터리’라는 단어의 우후죽순 남용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거나 할 때는 그저 헛웃음을 짓고 넘기면 그만이다. 미스터리를 SF나 판타지, 호러와 헛갈리는 경우는 조금 마음에 걸린다. 정말 장르의 정리를 모르기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는데, ‘장르 문학’이라는 문제의 단어 때문에 ‘아 미스터리든 SF든 그게 그거 아냐? 장르 문학 다 똑같은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상대가 누구든지 사양하고 싶은 게 진심이다. 또한 ‘추리적 기법’을 사용했다는 홍보 문구에 끌려 펼쳐 봤는데, 살인이 등장하지만 그 극단적인 수수께끼의 앞뒤를 살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부조리라거나 주인공에게 그저 스쳐가는 이벤트인 것처럼 그려지고, ‘그래서 그 일은 어떻게 됐는데’라는 궁금증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을 때, 나는 그것의 장르를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되는지 약간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명탐정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경찰이나 변호사가 나올 필요가 없다. 심지어 SF와 융합하여 배경이 우주선이거나, 주인공이 클론이거나, 먼 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에서는 고전부에 속한 고등학생들이 아까 그 문은 왜 잠겨 있었을까라든가, 우리 부에 가입하려던 후배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지 같은 수수께끼에 몰두한다. 그것만으로도 미스터리가 성립한다. 시공간적 배경이나 캐릭터의 설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특유의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그것을 어떻게 변주하고 갱신하며 21세기에 걸맞은 이야기로 만들어 가느냐가 진짜 문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정리해 보자. ‘장르’는 문학과 문학 비슷하지만 문학이라고만 부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나누는 벽이 아니라, 어떤 개별 작품의 성격을 드러내는 카테고리다. 그리고 ‘장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려면, 적어도 그 장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팬들에게 익숙한 관습과 규칙이 구축되며 다져진 특유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구조에 얽매이라는 게 아니라 그 구조를 잘 알아야만 다음에 나아가야 할 방향이 보인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권하고 싶은 바는 미스터리의 고전부터 시작해서 시대별 제일 유명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 보라는 것이다. 언제나 추천작을 뽑아 달라는 요청 앞에 난감해지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고전이, 유명한 작품이 제일 안전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셜록 홈스와 에드거 앨런 포, 애거사 크리스티, 존 딕슨 카부터 시작해서 코넬 울리치라든가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에드 맥베인, 페르 발뢰&마이 셰발 등의 대표작들을 차분히 따라오며, 좁은 의미의 ‘명탐정 미스터리’가 20세기 한복판을 가로지르면서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현재에 접합하며 현실의 더러움과 죄악을 어떻게 가장 잘 반영하고 또 그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장르로 굳혀 왔는지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


1) 21세기에 들어와서 전통적인 등단 제도를 통해 문학계에 등장하여 출간되는 책들에 대해 ‘순수문학’ 또는 ‘순문학’으로 자주 호명하는 편이다. 이 명칭이 가장 적절할지, 아니면 ‘등단 문학’이라는 호칭이 더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문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순문학은] 근대 이후 일본 문단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독특한 용어로 통상 통속문학이나 대중문학에 대해 독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순수한 예술적 감흥에 의거하여 창작된 문학 작품을 지칭한다. 따라서 ‘순문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문학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으로 규정되는 개념이 아니고, 작가의 창작 자세나 독자의 작품평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문학(『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30358&cid=60657&categoryId=60657

추천 콘텐츠

산책과 가을의 일

[에세이] 산책과 가을의 일 박주영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했다. 여름이 시작되고는 햇빛이 사라진 밤 산책을 하다가 그나마도 열대야 때문에 멈춘 지 오래되었다. 오늘은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스탠드를 켠 책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어느새 창밖이 밝아지는 걸 보다가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바깥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산책은 어슬렁거리며 그냥 걷는 것이지만 소설가의 산책에는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달리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산책과 걷기를 구분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산책이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동하는 것이라면 걷기는 건강이라는 목적을 가장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여름이 아니라면 산책은 주로 오후나 해질 무렵에 한다. 늦게 자고 오전에만 일어나도 뿌듯한 사람이라 일어나자마자 소설을 쓰고 쉴 즈음이 대개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쓴 것을 생각하다가 빈틈을 메울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음 장면을 생각하기도 하고 이 소설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고심하기도 한다. 여름 해가 뜨기 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나는 문학 전공도 아니고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주변에 글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소설가가 된 후 소설가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알고 싶은 것들을 질문하곤 했다.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2개의 대답을 기억한다. 한 분은 그냥 걷는다, 라고 답했고 한 분은 안 되어도 앉아서 써야지 어떡해, 라고 했다. 두 분 다 그때 20년 가까이 소설을 거뜬히 써온 분이었다. 나는 2개의 답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정답을 안다고 정답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자주 책상 앞에서 벗어나고 걷는 것이 아니라 누워 있는다. 그냥 진짜 누워만 있는데, 요즘은 소설 쓰는 일에 자주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또 한 분의 조언이 생각난다. 건강을 챙기고 운동을 해라, 그러지 않으면 장편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의 조건은 ‘나이 들수록’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고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썼던 나는 그 조언이 그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젊지도 않고 약해 빠졌는데 장편소설을 쓰는 데 그리 힘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조언의 참 의미는 어떤 고비마다 왔다. 나이는 한 살씩 먹는 게 아니라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온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손목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이제 어깨가 아프다. 남들은 여름휴가를 가는 시기 나는 병원을 다녔다. 의사는 어깨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했다. 특정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자세는 하필 내가 반평생을 취해 온 자세이다. 지금도 나는 그 자세이다. 자판을 치고 노트에 글을 쓰려면 취할 수밖에 없는 자세. 그리고 의사는 옆으로 눕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누운 자세로 책을 읽었다. 너무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만 그 자세로 읽을

  • 관리자
  • 2024-10-01
다시 서정을 위해

[에세이] 다시 서정을 위해 권상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되기 전에 시인이 되겠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슴하다. 「홀로서기」를 외웠고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외웠다. 이생진을 읽고 백창우를 읽고 박노해를 읽었다. 잔잔하게 때로는 웅장하게 가슴을 밀고 들어오는 시편들이 심장을 가로세로로 뛰게 만들었다. 백석과 김수영과 기형도의 이름은 몰랐지만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충만한 시간들이었다. 시집이 이천 원에서 삼천 원 정도 할 때여서 큰 부담 없이 고를 수 있었고 외출할 때 시집 한 권을 들고 밖을 나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오히려 뭇 여성들의 시선이 슬쩍슬쩍 내 턱선을 지나 책장에 닿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으레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신진호) 같은 시집을 골라 슬쩍 건네던 날들이 아련하다. 스물이라는, 가라앉을 것 하나 없는 맑은 감정에서 속살거리는 말들을 시인들은 대신 말해 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십 대는 가고 이십 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학을 쫓겨나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아무데도 기댈 수 없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오래된 가난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가난은 나를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공장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 해보는 노동이란 게 미치도록 좋았다. 종일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일이 알 수 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고 월급이라는 보상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 시를 읽고 쓰는 일만큼 일이 재미있었고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없이 좋았다. 지쳐 잠들기 전 문득 돌아본 시의 한때는 짧은 여행지의 추억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의 스물은 급류처럼 흘러갔고 시는 둑 너머에 있어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돈, 그리고 자립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노동은 즐겁고 땀은 향기로웠지만 갑자기 내가 꿈꾸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툭 한 번 치고 갔다. 해지는 풍경만 봐도 맥박이 난동을 부리고 꽃과 낙엽의 표정을 살피면 왠지 모를 눈물이 맺히던 한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피곤에 지친 등을 흔들어 깨웠다. 시인이 되겠다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나를 공장 노동자로 내몰았던 대학교 재단 이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은 지키면 좋은 것이고 못 지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던 그의 말.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나는 궤도를 이탈해 버린 행성처럼 어둠 속으로 무작정 떠밀려가고 있었다. 막막한 혼돈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약속이란 단어가 다시 나를 수습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서른을 지나갔고 아무도 내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물어 보는 이는 없었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은 끝내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세월도 변했고 시도 변해

  • 관리자
  • 2024-10-01
과거를 보는 미래 SF

[에세이] 과거를 보는 미래 SF 곽재식 며칠 전 나는 한 행사에서 SF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발표를 하나 맡게 되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질문 답변 시간이 되었는데 청중 중 한 분이 “SF라면 미래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왜 옛날 SF를 소개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날 행사 중에는 답변을 짧게 드렸지만 이 내용은 한번 깊게 따져 볼 만한 재미난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한다. 명작 SF로 자주 손꼽히는 1970년대 영화로 <>이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을 맡아 대형 영화사에서 배급한 그야말로 정통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러면서도 비참한 미래의 모습을 예상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결말도 뻔한 할리우드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눈에 뜨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는 SF 영화사에서 유명한 대사 순위를 꼽으면 상위권에 자주 오를 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인구가 너무나 많은 데 비해 식량과 자원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리고 모든 물자가 부족해 다들 비참하게 살고 있다. 영화 제목인 “소일렌트 그린”이란 식량이 부족한 세상에서 특별히 개발해 보급 중인 신형 인공 식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19세기 맬서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미래 인류의 멸망 시나리오라고 철석같이 밀었던, 맬서스 함정을 정통으로 다룬 영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한다.”라는 말은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망한다, 그러니 사람이 많은 것은 해악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곧 “사람이 곧 모든 파괴의 근원이며, 사람이 없어져야 지구가 살아난다.”는 생각으로도 자주 이어지기도 한다. 재미난 사실은 이 영화에서 다루는 멸망해 가는 미래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은 1973년에 개봉된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이란 영화가 제작되던 1972년으로부터 50년 후를 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SF 영화에서 말하는 2022년의 미래라는 시간은, 2024년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는 2년 전의 과거가 되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의 꼬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요즘 이 영화의 내용을 보다 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도 깨달을 수 있다. 실제 2022년이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2020년대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문제인 시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 겪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한국에서 인구 문제가 워낙 극심하게 나타나

  • 관리자
  • 2024-10-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